바다늑대 FORCE

서울 도봉산(道峰山). 조선왕조 흥업(興業) 전설을 따라 도봉산에 오르다 본문

바다늑대/山 & 旅行

서울 도봉산(道峰山). 조선왕조 흥업(興業) 전설을 따라 도봉산에 오르다

바다늑대FORCE 2019. 8. 26. 14:46


서울 도봉산(道峰山)

   조선왕조 흥업(興業) 전설을 따라 도봉산에 오르다


▲ 서울 도봉산

   자운봉(주봉) 높이 : 740.2m

   신선대 높이 ; 726m 

   위치 :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양주시 장흥면의 경계에 있는 산. 


▲ 산행일 : 2019년8월24일 토요일. 날씨 : 약간흐림


▲ 나의산행코스 :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산 탐방지원센터→→→ 천축사→→→마당바위→→→선인봉→→→

  신선대정상→→→포대능선→→→우이암 갈림길→→→마당바위→→→도봉서원

  →→→도봉탐방지원센터

 왕복8.5km  4시간 소요


▲  도봉산 개요:

높이는 740.2m이며, 주봉(主峰)은 자운봉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의 일부로 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절리(節理)와 풍화작용으로 벗겨진 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주봉인 자운봉(紫雲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五峰)이 있으며, 우이령(牛耳嶺)을 경계로 북한산과 접하고 있다.

도봉동계곡·송추계곡(松楸溪谷)·망월사계곡(望月寺溪谷)을 비롯하여

천축사(天竺寺)·원통사(圓通寺)·망월사(望月寺)·관음암(觀音庵)·쌍룡사(雙龍寺)·회룡사(回龍寺) 등 많은 사찰이 있다.

그 밖에 조선 선조(宣祖)가 조광조(趙光祖)를 위하여 세웠다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이 있다.

주요한 탐방코스는 사패산 코스, 망월사∼포대능선∼회룡 코스, 오봉코스 등이 있으며

북한산 지역과 더불어 연간 500만 명의 탐방객이 찾는 공원으로서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남쪽에는 우이령을 넘어 우이동에 이르는 도로가 있으나

1968년 청와대를 습격한 간첩침투사건으로 폐쇄되어 있다가 2009년부터

제한적으로 등산객에 대하여 제한적인 출입이 가능해졌으나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도로의 건설을 요구하는 양주시와 원상보존을 요구하는 환경단체 등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지역이다.

계곡의 수석이 아름다워 유원지로 개발되었고, 수락산(水落山)·불암산(佛巖山) 등과 함께

서울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될 뿐 아니라, 좋은 등산로가 되고 있다.

도봉산 동쪽에는 서울과 의정부간의 국도, 서쪽에는 구파발과 송추간의 지방도로

북쪽에는 송추와 의정부간의 국도가 있다. 또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있는데

이는 2007년 12월 28일 개통되어, 착공 20년만에 127.5㎞ 완전 개통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개통된 의정부 나들목과 송추 나들목 구간이 국립공원 지역에 속한

사패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환경단체의 운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 등산지도


▲ 산행지 찾아가는길

진주역 →→→ 남해고속도로 진주jc →→통영대전고속도로 산내jc →→→ 경부고속도로

→→→ 중부고속도로 하남jc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도봉산길→→→북한산국립공원 도봉분소

353km  승용차 4시간 30분 소요(시내도로 지체포함)


→→→→→2019년8월24일 토요일  도봉산 산행시작

2019년 8월19일 부터 1주간 도봉산에위치한 국립공원 산악안전교육원에서

산악구조 전문교육 훈련을 마치고

사우나에서 서울의 밤을 보네고 아침 7시30분경  산행을 사작 하였다.


산악구조 교육(크렉직벽등산)

서울 도봉산 아래 국립공원 산악안전교육원에서

전국소방관 35명이 일주일 동안 산악구조교육훈련을 하였다

강사진은 국립공원 산악안전 교육원 소속 강사들이며

경남에서는 4명이 교육을 받았다

교육과정은

구조장비 종류 및 사용법, 개인보호장비 종류와 사용법

등강 하강 기술 숙달,자력구조 및 후송방법

매듭법 숙달,티롤리안 브릿지,도르래 시스템 유형

등산 중 사고자 구조방법.로프매듭 통과 기술

분력(分力)등을 교육을 받았다.


훈련장에서 바라본 仙人峰(선인봉)과 天竺寺(천축사)

훈련장 암장 끝에서 바라본 선인봉과 천축사 모습이다

선인봉(仙人峰)은

선인봉(仙人峰)이라는 명칭은 이 바위에서 신선이 도를 닦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도봉산에는 대보 조산 운동이 발생했을 때 대보 화강암이 관입하였다.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침식을 받아 산의 정상부는

대부분 기반암인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의 형태가 되었다.

화강암이 오랜 시일에 걸쳐 모암으로부터 일부분이 벗겨지거나 떨어져나갔다.

도봉산의 봉우리는 화강암의 차별 침식으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암석이 벗겨져나간 박리면과 잘라져 나간 절리면도 잘 발달해 있다.

주변 지역과의 비고가 200m에 달하고 폭이 500m에 이르는 선인봉은

가파른 경사를 이루는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빼어난 암봉 사이 마다 깊고 맑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

북쪽의 산 정상부에는 화강암 봉우리인 만장봉과 자운봉이 연속되어 있다.

선인봉은 기반암이 노출된 봉우리가 주변 지역과 비교적 높은 고도차를 보이고

풍화와 침식에 의한 암벽의 틈이 많아, 암벽 등반을 하는 전문가나 동호회원들이 즐겨 찾다.
天竺寺(천축사)는

천축사 목조석가삼존불상(天竺寺木造釋迦三尊佛像)은 미륵보살(彌勒菩薩)

가모니불·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 삼존불을 나무로 조각하고 외부를 금으로 도금한 목조불 좌상이다.

조선 시대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의 전형적인 불상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현재 천축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최근 석가모니불 좌상의 복장(腹藏)에서 불상의 중수 발원문(發願文) 2기, 불교 경전(佛敎經典)

불교 다라니(陀羅尼) 등의 복장물(腹藏物)이 발견되어 불상의 조성 시기가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

2013년 5월 23일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34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국립공언 도봉분소

도봉산 산행 들머리는 대부분 여기서 부터 시작한다.

주봉인 자운봉 높이 740.2m이며

북한산국립공원의 일부로 주봉인 자운봉을 비롯하여 오봉·만장봉 등이 솟아 있다.

산 전체가 하나의 큰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기복과 울창한 수림이 절경을 이룬다. 도봉동·송추·망월사 계곡은 유원지로 개발되었으며

불암산·수락산과 더불어 서울 시민의 휴식처 및 등산로가 되고 있다.

그밖에 망월사·쌍룡사·천축사 등의 절이 있다.

도봉산과 북한산의 안부에 해당하는 우이령을 통해 우이동과 연결되며

구파발-송추 간의 간선도로와 서울-의정부, 송추-의정부 간 국도가 나 있다.


자운봉 2.3km

천진사 와 우이암 갈림길이다

우리는 천축사 방향으로 산행하기로 하였다.

한주동안 도봉산 암장(巖場)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 혼자라도 도봉산과 사패산까지

산행을 할려고 했었는데 경남대학교행정대학원산사회 회원들이

100대명산 도전 도봉산에 온다고 하길래 같이 토요일날 산행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금요일을 보네면서 명동거리를 돌아보았다

여기가 우리나라인지 외국인지 구분이 안될정도로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도봉산 초입구간

초입구간은 서울시민들이 산책삼아 운동삼아 찾는곳이라 그런지

평탄하면서도 넓직한게 좋아 보였다

탐방로 옆에는 계곡이 있어 서울시민의 쉼터로 안성 맞춤 같아 보였다

도봉산은

뾰족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의 아름다움이 빼어난 산이다.

 “푸른 하늘을 깎아세운 만 길 봉우리”라 읊었던 옛 시인의 표현만큼이나 선인봉, 자운봉, 만장봉

신선대, 오봉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대한 화강암 으로 되어있어 맑고 푸른 하늘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봉우리들 사이로 수 십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다.

세종 때의 문장가이며, 한성부 판윤(지금의 서울 특별시장) 을 두 번씩이나 지냈던

서거정은 만장봉 아래에서 도봉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이렇게 읊었다 한다.


높은 다락에서 술잔을 들고 한번 웃어보는데

수 많은 푸른 봉우리 뾰족 뾰족 무더기를 이루었고

십년 세월 하는 일없이 귀거래시(歸去來詩)만 지었는데

백발이 다정하여 자꾸만 재촉하는구나


※ 서거정(徐居正)

조선 세종 때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이며 세종 2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에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에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해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뤘던 목릉성세의 디딤돌을 이뤘다.


선인봉(仙人峰)

선인봉 조망처이다 훈련장소 암장위 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훈련장소는 일반인이 출입할수 없는 장소라 나는 훈련중 특혜를 받는셈이다

선인봉은

도봉산에는 대보 조산 운동이 발생했을 때 대보 화강암이 관입하였다.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침식을 받아 산의 정상부는 대부분 기반암인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의 형태가 되었다.

화강암이 오랜 시일에 걸쳐 모암으로부터 일부분이 벗겨지거나 떨어져나갔다.

도봉산의 봉우리는 화강암의 차별 침식으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암석이 벗겨져나간 박리면과 잘라져 나간 절리면도 잘 발달해 있다.
해발 708m의 선인봉은 도봉산의 최고봉인 자운봉[739.5m] 및 만장봉[718m]과 더불어

 ‘삼봉’ 또는 ‘삼형제 봉우리’로 불린다.

이들 삼봉은 도봉구를 상징하는 상징휘장에 세 개의 봉우리로 형상화되었다.

선인봉은 북한산의 인수봉과 더불어 서울에서 쌍벽을 이루는 암벽 등반의 명소로 꼽히는 봉우리이다.

선인봉에는 박쥐길·현암길·표범길·재원길 등의 이름이 붙은 암벽 등반 루트가 40여 개에 이른다.


테크계단

우리나라 山이라면 이렇게 산행자의 안전을 위하여 테크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막바지 여름속의 도봉산 오르는길은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모자를 벗고서 손수건으로 머리띠를 하여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차단 시켰다

날씨가 흐린탓에 그나마 산행하기엔 좋은 날씨 였다

아침부터 도봉산을 찾아 올라가는 산행자들이 많았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보였고 간단하게 산악구보차림의 산행자도 보였다

산은 이렇게 우리에게 휴식과 동시에 건강한 심신(心身)만드는 곳이다


道峰山 天竺寺(도봉산 천축사)일주문

한주동안 산악구조 훈련을 위해 3일동안 올라온 곳이기도 하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도봉산(道峰山)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673년(문무왕 13)에 의상(義湘)이 만장봉 동북쪽 기슭에 있는 의상대(義湘臺)에서 수도할 때

현재의 위치에 절을 창건하고 옥천암(玉泉庵)이라고 하였다.

그 뒤 고려 명종 때는 영국사(寧國寺)를 창건한 뒤 이 절을 부속 암자로 삼았으며

1398년(태조 7)함흥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태조가 옛날 이곳에서 백일기도하던 것을 상기하여

절을 중창하고 천축사라는 사액(寺額)을 내렸다.

절 이름을 천축사라고 한 것은 고려 때 인도 승 지공(誌公)이

나옹화상(懶翁和尙)에게 이곳의 경관이 천축국의 영축산과 비슷하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道峰山 天竺寺(도봉산 천축사)

1474년(성종 5) 왕명으로 중창하였고

명종 때는 문정왕후(文貞王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헌납하여 불좌(佛座)를 만들었으며

1812년(순조 12) 경학(敬學)이 중창하였다.

그 뒤에도 이 절은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여러 차례 중수했는데, 현재의 당우는 1959년에 중수한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圓通殿)·복운각(福雲閣)·산신각·요사채 등이 있고

참선도량인 무문관(無門關)이 있다.

특히, 무문관은 근래에 세운 참선 정진처로서 부처의 설산(雪山) 6년 고행을 본받아

한번 들어가면 4년 또는 6년 동안을 면벽수행(面壁修行)하는데

방문 밖 출입은 일체 금지되어 있고 음식도 창구를 통하여 들여보내며 수행의 규범이 매우 엄하다.

고승 중 이 무문관에서 6년 또는 4년의 정진을 한 이들이 많다.

전래되는 유물 가운데 문정왕후가 헌납한 화류수목조용상(樺榴樹木彫龍床)은 대웅전 안에 보존되어 있다.

부속 암자로는 약 50년 전에 창건한 석굴암이 있다.

당우로는 석굴·만월보전(滿月寶殿)·나한전(羅漢殿)·종각(鐘閣)·요사채 등이 있으며, 석간수(石澗水)가 좋다.



천축사 대웅전과 선인봉

천축사에는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독성각·산신각·요사·범종각 등이 있고

참선 도량인 무문관이 있다. 대웅전은 ㄷ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로 1812년(순조 12)에 지어졌다.

그 후 몇 차례 중수되었는데 현재 절의 중심 건물로서 법당과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석가 삼존상과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후불화로 삼세불화와 지장 탱화,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신

중탱화는 다소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으로 시주자 명단에 상궁의 이름들이 보인다.

원통전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여기에는 관세음보살상을 주존으로 모셨고, 천수 천안 관음보살 탱화와 칠성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독성각과 산신각은 각각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독성 탱화와 산신 탱화가 있다.

절의 동북쪽으로 70m쯤 올라가면 3층의 석조 건물인 무문관이 있다.

무문관은 참선 수행처이다.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아 한 번 들어가면 4년 또는 6년 동안 문을 봉쇄한 채 면벽 수행하며

방문 밖의 출입은 일체 금지된다.

음식도 창구를 통하여 들여보내야 하는 등 수행의 규범이 매우 엄격하다.

천축사는 깎아지른 듯한 만장봉(萬丈峰)을 배경으로 계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찰이다.

가람 소나무·단풍나무·유목 등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어 마치 닭이 계란을 품은 것 같은 포근한 정경을 연출한다.

천축사에 오르는 길도 평탄하며, 여름이면 울창한 수풀이, 가을이면 단풍나무가

겨울이면 설경이 암벽 곳곳에 펼쳐져 좋은 경치를 자랑한다.

맑고 깨끗한 석간수가 유명하고, 백년 묵은 보리수나무가 샘물 위쪽에 있다.

2009년 11월 5일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292호와

제293호로 지정된 천축사 비로자나 삼신불도(天竺寺毘盧舍那三神佛圖)

천축사 비로자나 삼신 괘불도(天竺寺毘盧舍那三神掛佛圖)와

2013년 5월 23일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347호로 지정된 천축사 목조 석가 삼존불상이 있다.

천축사 비로자나 삼신불도는 19세기 서울과 경기 지방의 대표적 화승인 경선당(慶船堂)

응석(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혜조(慧照)·경림(璟林)·탄인(呑仁)·창오(昌悟) 등이 제작하였다.

상궁 박씨와 김씨 등이 명성 왕후를 위하여 시주한 불화이다.

가로가 긴화면이 상하로 구분되어 상단에는 삼신불을, 하단에는 보살들을 배열한 구도로서 독특한 도상을 보여 준다.

천축사 비로자나 삼신 괘불도는 화면에 손상이 없고, 화기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채색도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등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또한 괘불로서 규모가 크지 않고 연대도 오래되지 않았으나 삼신불을 그린 구성과 양식 등이

19세기 서울과 경기 지방 괘불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제작한 하운당(河雲堂) 유경(有鏡)의 남아 있는 작품이 희귀하여

그의 독특한 불화 양식 규명과 19세기 불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기암(奇巖)

북한산 그리고 관악산등 서울에 산을 오르면모두 돌산이다

이렇게 오르다 보면 기암들이 있고 탐방로는 대부분 암석으로 이루어진 돌산이다

도봉산은 지질학적으로는 고생대부터 화강암의 지반이 융기 및 침식되어 형성되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2억만년전 한반도의 지각변동사상 가장 격렬했던

중생대 쥬라기 중엽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에 의해 형성된

대보화강암의 돔(dome)형태의 암벽과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봉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시대 지리서(地理書)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양주목(楊州牧) 남쪽 30리 지점에 도봉산이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함경도 안변 철령의 한 산줄기가

남으로 500~600리를 달려 양주의 여러 자그마한 산이 되었다가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의 만장봉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질학적 측면에서 보면

도봉산의 봉우리들은 고생대부터 이어온 화강암 지반의 융기 및 침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 조산 운동에 의해

형성된 암석들로 기암절벽의 비경을 이루게 되었다.

도봉산의 면적은 약 24㎢로, 해발 739.5m의 주봉(主峰)인 자운봉(紫雲峰)을 중심으로 하여

만장봉(萬丈峰), 선인봉(仙人峰) 등 각 봉우리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각각의 봉우리들이 등반로로 연결되어 있어

도봉산은 1년 내내 서울 및 수도권 주민들의 대표적인 등산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그중 선인봉은 암벽 등반 코스로 이름난 곳이다.

또한 각 봉우리 사이사이에 형성된 맑고 깨끗한 계곡들이 유원지로 개발되었는데

도봉동 계곡, 망월사 계곡, 송추 계곡 등은 행락객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돌로 이루어진 탐방로

정상에 가까워 질수록 경사가 심해진다 일명 깔딱고개인 셈이다

산개나리는 우리나라 중북부 지방에서 주로 자생하였으나

현재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소수만 남아있다 한다

멸종위기에 있는 산개나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으며

현재 북한산 국립공원의 깃대종으로 지정되어있으나 북한산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도봉산 지역에 일부 자생하고 있다 한다

줄기 속, 잎자루에 난 털, 직립인 줄기 등으로 개나리와 구별된다.
※ 깃대종 : 환경보전 정도를 나타내거나 한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하는 상징 동·식물종(種)


마당바위

마당바위에 오르니 더디어 서울시내가 보인다

먼저온 산행자들이 많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산행자 주변에는 고양이들이 간식 얻어 먹을려구 여기저기 보인다

까마귀도 먹고싶어 주위 뱅뱅돌며 까악 거리고 있다.

도봉산에는 조류도 많다

깃대종의 하나인 오색딱따구리는 북한산, 도봉산 전역에 분포하며
딱따구리 보전이 북한산 국립공원의 보전이라 할만한 생태 환경 지표종이다.
검은색, 붉은색,하얀색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몸빛이 특징이며,
나무 줄기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애벌레들을 잡아먹기에 ‘숲 속의 의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북한산에서 가장 그 수가 많고, 번식도 많이 하는 새는 박새 종류이다.
박새는 대표적인 우리나라 숲에서 번식하는 텃새로
한 번에 10개 이상의 알을 나무 구멍 속의 둥지에 낳는다.
이외에도 산악의 고산 지대에서 번식을 하는 굴뚝새, 도심의 말썽꾸러기 까치,
숲 속의 음치인 어치, 겨울손님인 개똥지빠귀 등이 있다 


도봉산 신선대 인근에서 바라본 선인봉

선인봉은 암벽등반의 명소이며

암벽등반 루트가 40여개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암벽등반 전문가만이 오를수 있는 암봉이다

산행은

산행은 자신의 페이스에 맞게 속도와 강도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산행 중 지치게 되면 체력을 회복하기 어려우므로 쉬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다. 

몸에 무리를 느끼면 쉬어주되 너무 오래 쉬면 근육이 굳어지므로 

쉬는 시간은 땀이 식으려고 하는 정도까지가 적당하며 앉기보다 서있는 것이 좋다. 

 여유가 있다면 등산화 끈을 고쳐 묶어 발의 피로를 풀어주면 더 좋다.


자운봉과 서울시의 풍경

도봉산 신선대에  가가워 지니  자운봉의 암릉이 수채화를 그리고

서울시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바람의 맛이 다르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정상에서 맞는 바람이 달콤 하기만 하다.

도봉구의 유래를 보면

도봉구는 동쪽으로 노원구, 서쪽으로 강북구, 북쪽으로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울 동북부의 관문으로 면적은 20.842㎢로 이중 북한산 국립공원을 비롯한

공원면적이 구면적의 52.5%에 달한다.

도봉구의 서남부로 흐르는 우이천은 강북구와 경계를 이루어 흐르고

북부로는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는 도봉산이, 동부는 한강상류 지류인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도봉구의 상징은 도봉산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한북 정맥에 속하며

예로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사랑받아 왔으며 산 전체가 웅장한 바위로 이루어져

드높은 화강암 벽이 흰 빛을 뽐내며 공중에 솟아 변함없는 지조와 의리의 상징으로 서울을 굽어보고 있다.
도봉산은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이 망월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고

천축사 뒤편에 위치한 만장봉(萬丈峰), 바위 봉우리가 기둥처럼 솟아있는 주봉(柱峰)

그밖에 선인봉(仙人峰), 오봉(五峰) 등이 연이어 있어, 승천하는 용의 기세 같기도 하고

혹은 거북 모양 같기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명산으로 천만 서울 시민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다.
1973년 7월 1일 성북구에서 분리 신설될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명산이자

우리 지역의 상징인 도봉산 이름을 따서 도봉구라고 하였다.


도봉산 신선대(道峰山 神仙臺) 726m

도봉산은

조선왕조를 여는 길을 닦았다는 뜻과 뜻있는 지사들이 그 뜻을 키우고자

학문을 연마하고 민생을 구제하고자 도을 닦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조선왕조의 흥업이 이 도봉산의 정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도봉산 정상인 자운봉(717m)과 만장봉,도봉,우이암,선인봉 등 닭 볏 모양의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높이 솟아 있어서 팔팔한 정기가 어려 있고

천축사,망월사의 고찰이 있으며

도봉서원 터 부근 골짜기의 수석이 기이하여 선경 같은 놀이터가 되었다.

도봉산 명소를 보면

서울 근교의 명산인 도봉산에는 많은 문화재와 관광 명소가 있다.

그중 도봉구 지역에 위치한 것을 살펴보면, 도봉 서원은 현재 서울시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원으로

1573년 조광조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원통사는 신라 시대 도선 국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며

현재 광륜사(光輪寺)가 들어서 있는 자리는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별장이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만월암에는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된 만월암 석불 좌상이 있으며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에는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106호로 지정된

조선 세종의 손자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의 신도비(神道碑)가 위치하고 있다.

도봉산 계곡에는 바위에 새겨진 옛 사람들의 글씨가 많이 있어 선인들의 풍치와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현재 도봉산에는 총 17점의 바위 글귀를 볼 수 있는데

도봉 서원 근처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도암(陶庵) 이재(李滓) 등

서인 노론계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의 암각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도봉산 포대능선

신선대에서 정상인 자운봉을 바라다 보고

포대능선에서 서울 시내를 구경하였다

달콤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안고서 한참이나 쉬었다.

포대 능선(砲隊稜線)은

도봉산의 주봉인 자운봉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능선이다.

 능선 중간에 대공포 진지인 포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포대 능선의 길이는 약 1.4㎞이며, 북쪽의 사패산 방향으로 원도봉 계곡, 회룡 계곡, 안골 계곡 등에 연결된다.

도봉산 남쪽 방향으로는 도봉 계곡과 오봉 능선으로 연결되며

우이암을 경유하여 우이동 계곡까지 능선을 따라 등산로가 나 있다.

도봉 주능선은 우이 남능선과 우이암을 지나 주봉(柱峰)을 경유하여 신선대로 이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우이 남능선, 도봉 주능선, 포대 능선, 사패 능선 등의 4개 소구간 능선이 모두 한 코스를 이룬다.

이들 능선을 모두 합해서 이루어지는 도봉 주능선의 구간 길이는 약 11㎞에 달한다.

우이 남능선은 도봉 주능선에서 우이암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우이암 사거리에서 우이암을 지나 우이암 공원 지킴 터 부근까지 연결된다.

오봉 능선은 자운봉에서 도봉 주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서쪽의 오봉산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자리하고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 있는 오봉으로 연결된다는 데서 오봉 능선이라 하였다.

오봉 능선이 끝나는 오봉에서 경기도 양주시 송추 유원지까지는 송추 남능선이 연결되어 있다.

도봉동에는 무수울이라고 있는데

도봉동 104번지 일대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약 500여년 전에는 수철동(水鐵) 일명 무 쇠골이라 하였고


이후 무수동(無愁洞)이라 개칭하였는데

그 연유는 영해군 묘소 형국이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으로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수동(無愁洞)이라 호칭을 했다.

또한 서낭당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생겼다는 설과

세종이 재위시 이 곳에 왔다가 원터(도봉동 578번지) 약수터의 물을 마시고 물 좋고

풍광 좋은 이 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고 하여

무수골로 칭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


포대 능선(砲隊稜線)

포대능선에서 도봉산 주봉인 자운봉을 앵글에 담아본다

서울 도봉구에는 전설 민담이 전해 내려오는데

쌍문동 효자이야기가 유명하다 한다

지금의 쌍문동에 250여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효자, 효부이야기가 있다.

남궁 지(南宮 遲)는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기를 남과 달리 정성을 다하였고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고 부친의 대변을 혀에 대고 병세를 살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남궁 지의 처(妻) 하동 정씨는 출가할 때 의장과 경대를 하인이 돌아가는 길에

친정으로 되돌려 보내고 말하기를"나는 이미 출가외인이 되었으니

어찌 친정의 물건을 탐내어 부모공양에 손색을 입게 하리요"라고 하였다.

또 시댁에서도 효도와 우애를 갖추어 지극 정성으로 시아버지가 2년간 병환으로 누워 계실 때

정(鄭)씨는 해산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항시 시아버님 곁에서 시중하였다고 한다.

아들 남궁 조는 암회리(현 방학동)에 살면서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옷차림을 한 번도 풀지 않고

정성껏 약을 달여 드렸고 밤에는 북두칠성을 향하여 자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축원하였으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렸다고 한다.

남궁 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 내외와 그의 아들 남궁 조의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효자문 쌍문(雙門)을 세우게 되었으며(1893년 교지) 현재 쌍문동(雙門洞)의 동명(洞名)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자운봉(紫雲峰)

도봉산의 주봉인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자운봉이다

암벽등반 전문가만이 오를수 있는 도봉산 정상이다

자운봉(紫雲峰)은 높은 산의 봉우리에 붉은 빛의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

 ‘자운’은 불교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뜻한다.

자운봉은 도봉산 주능선에 우뚝 솟아 있는 도봉산의 주봉(主峰)이다.

정상부는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침식과 풍화 작용을 받아 절리면이 잘 발달해 있다.

마치 다듬어진 바윗덩어리 여러 개를 포개놓은 듯한 모습이다.

자운봉에 오르면 만장봉, 오봉능선, 칼바위, 포대봉, 우이암 등이 한눈에 보이고 멀리 북한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동남쪽으로는 만장봉과 선인봉이 연속적으로 위치하고, 서남쪽으로는 주봉(柱峰)이 있다.

봉우리의 북쪽으로는 포대 능선이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도봉 주능선이 연결된다.

해발 739.5m로, 도봉산의 최고봉인 자운봉은 만장봉[718m] 및 선인봉[708m]과 더불어

 ‘삼봉’ 또는 ‘삼형제 봉우리’로 불린다.

이들 삼봉은 도봉구를 상징하는 상징 휘장에 세 개의 봉우리로 형상화되었다.

자운봉은 경사가 아주 급한 암봉이기 때문에

봉우리를 걸어서 오르거나 암벽을 등반하는 것이 위험하여 산행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던 때가 있었다.

자운봉으로 오르는 코스로는

도봉 탐방 지원 센터~도봉 서원~금강암~도봉 대피소~석굴암~신선대[자운봉]에 이르는 3.3㎞

1시간 40분 코스를 비롯하여 만장사~도봉 서원~도봉 산장~천축사~약수터~마당 바위~자운봉 코스 등 여러 코스가 있다.

전문 등산 장비와 암벽 등반 기술이 없으면 오를 수 없는 봉우리 이다


포대능선에서 우이암 방향으로 하산

포대능선에서 한참이나 놀았다

간식도 먹었다  자운봉에서 우이암 방향의 하산길엔 탐방로 조성을 위해

목재와 건축자재들이 큰봇짐에 쌓여 있었는데

그 속엔 작업자들의 간식도 보였다

그러나 일부 산행자들이 꺼내어 먹고서 쓰레기만 넣어둔곳도 보였다

아직 우리의 건전한 산행 마음이 산처럼 갈길이 먼것처럼 보였다

물론 일부 산행자의 일탈이긴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그런행위는 범죄라고 할수 있다.



참매미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서 참매미가 열심히 노래를 부런다

근접촬영을 하려고 하지 이쪽 저쪽 몸을 숨겼지만 용케 앵글에 잡았다

매미는 전세계적으로 2000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약15종 매미가 살고 있다고 한다

참매미는

일반적으로 넓은 나무 숲에 많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산에서만 사는 경우도 있다.

성충은 7월 중순부터 9월 하순 사이에 출현하며, 주로 평지나 산기슭에서 산다.

애벌레는 땅 속에서 4~5년을 경과한다. 대개 가장 우렁차게 우는 수컷에게 암컷이 날아와 교미하는데

교미 시간은 약 3시간 정도이다.

교미 후 암컷은 죽은 가지에 산란하는데 알 상태로 월동한 후 이듬해 7월쯤에 부화하게 된다.

부화 시기에는 어느 정도 수분이 필요하므로 비 오는 날에 부화하는 경우가 많다.

마른 나뭇가지의 구멍에서 나올 때에는 전유충기라 하는데 얇은 껍질을 뒤집어 쓴 물개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즈음에 구멍의 입구에서 껍질을 벗고 1령 유충이 되며

갓 탈피한 1령충은 잠시 후 발을 떼서 땅 위로 낙하하여 더듬이를 흔들면서

땅이 부드러워 보이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땅을 파고 들어간다.

 이후 2-3개월 후 탈피하여 2령충이 될 시기에는 몸의 구조가 달라져서, 몸에도 다리에도 긴 털이 난다.

 이 털들은 흙에 묻힌 캄캄한 생활 속에서 몸 언저리의 상태를 알아 내는 데 도움이 되는 감각털이다.

5령 유충은 여름날 저녁 때부터 밤중에 걸쳐서 땅 위로 올라와서 나무 위로 올라가 성충으로 우화한다.



우이암과 마당바위 갈림길

여기서 우리가 왔던 마당바위 방향으로 하산하였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사패산가지 가고싶었으나

나 혼자만의 생각뿐이고 산사회 회원들이 그다지 멀리가지 시간을 투자하고 싶진 않나 보다

이렇게 도봉산을 정기를 맞이 하고서 하산길에 접어 들었다

하산길에는 우리가 등산할때 보다도 많은 산행자들이 오르고 있었다

아침일찍 산행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신선대에서 줄을 제법서서 기다려서 인증사진을 찍을뻔 하였다.


高山 仰止(고산 앙지)

하산길에 바위에 새겨진 고산앙지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고산앙지의 뜻은

시경(時經)에 나오는 문구로

높은 사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리라고 한다.

이 글씨는 1700년(숙종26년) 7월에

곡원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쓴 글씨라고 한다.

※김수증(金壽增 )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 살만한 곳을 가려져 정함)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성천 부사로 있던 중에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이름 짓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였다.

1682년 화가인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때 그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소강절(邵康節 : 중국 북송의 유학자 邵雍을 그 시호로써 일컫는 이름)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造景)에 응용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을 도상화(圖象化)하는 데 힘을 기울여

주돈이(周敦頤)와 주자의 행적에 나타나는 「태극도」, 「하도낙서(河圖洛書)」, 「선후천팔괘도(先後天八卦圖)」

등을 정사의 경내에 있는 바위에 새겨 ‘인문석(人文石)’이라 하였다.

또한 계곡에 있는 바위들에 천근석(天根石), 월굴암(月窟巖) 등 소강절의 사상시(思想詩)에 나오는

음양소식관을 담은 이름도 붙여 조경을 하였다.

이들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 성리 사상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곡운집』과

1692년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에 그와 후손들이 창작한 「谷雲九曲歌」를 곁들여 만든 『곡운구곡도첩』이 있다.


도봉산 119산악구조대 사무실

도봉산 산행을 마치고 119산악구조대 사무실 앞에서 사진하나 남겨보다

도봉산에서 유래한 지명을보면

도봉구 지역은 고려 시대 이래 해촌(海村) 혹은 해등촌(海等村)이라 불렸으며,

 ‘도봉(道峰)’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인 행정 지명으로 나타난 것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에, 도당리(陶唐里), 무수동(無愁洞), 상누원리(上樓院里)의 통합으로

도봉리(道峰里)가 형성되면서부터이다. 도봉리는 이후 도봉동이 되었으며

도봉구는 1973년에 분구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렇듯 20세기에 들어서

옛 해등촌 지역에 도봉리·도봉동·도봉구 등 ‘도봉’이 포함되는 행정 지명이 만들어진 것은

바로 ‘도봉산’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 때문이다.

‘도봉구’라는 지명이 도봉산에서 유래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도봉산은 도봉구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도봉구에서는 도봉산이 구의 상징임을 고려하여, 현재 도봉구 10대 명소 중 제1의 명소로 지정한 상태이며

2007년부터는 매년 가을에 도봉산 일원에서 도봉산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도봉구는 도봉산 축제를 통해서 ‘에코’와 ‘그린’으로 대표되는 도봉구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으며

도봉산 및 도봉산에 소재한 문화유산을 매개로 하여 도봉구의 지역 공동체적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100대 명산의 하나인 도봉산을 둘러보고

산행을 마무리 해본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서울시 도봉구등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19.08.2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