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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황장산(三陟 黃腸山), 빼곡한 밀림(密林)같은숲 백두대간 황장산에 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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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황장산(三陟 黃腸山), 빼곡한 밀림(密林)같은숲 백두대간 황장산에 서다

바다늑대FORCE 2019. 8. 18. 17:52

삼척 황장산(三陟 黃腸山)

 빼곡한 밀림(密林)같은숲 백두대간 황장산에 서다


▲ 삼척 황장산(三陟 黃腸山) 

  높이 :1069m

  위치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와 화장면 번천리에 걸쳐 있는산


▲ 산행일 : 2019년8월17일 토요일, 날씨: 맑음

▲ 나의 산행코스:

   삼척 댓재→→→황장산 정상(원점회귀)

   왕복 1.2km  38분소요


▲ 삼척 황장산 개요:

황장산은 육산이며 산행 초보자도 부담없이 산행을 할수 있는 코스 이며 금강송이 있어

금강송 기를 받을수 있는 곳이며 조선시대 조성된 준경묘가 있는곳이다

고종 광무 3년(1899)년에 묘소를 고쳐 짓고 제각과 제실(제사를 모시는 집)

비각(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 등을 세웠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일대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삼척 황장산 등산지도



▲ 산행 가는길 :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진주ic→→중부내륙고속도로 칠원jc→→중앙고속도로 금호jc

 →→→경북대로 단양방향→→→36국도 울진방향→→→태백로 동해방향→→→두타로  댓재휴게소

350.2KM  승용차 4시간 소요

→→→→→→2019년8월17일 토요일 두타산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옆 백두대간 댓재 초석옆으로 산행로가 있는 황장산으로 발길을 돌려본다

거리가 0.6km이라 간단하게 정상석을 찍을수 있을듯 같아서 이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자라면

반드지 지나가야 하는 산 황장산이다

황장산은 백두대간의 두타산과 덕항산 중간에 위치하기에 그러하다

나 역시 자주오는 강원도도 아니고 조금 귀가시간이 늦어도

가까운 거리라 황장산을 찍어보고 가고 싶었다.


황장산 들머리

백두대간 댓제 초석옆에 있는 황장산 들머리 안내 표지목이 있다

백두대간 종주에서 덕항산과 자암재 황장산 댓재 두타산 구간을 보면

전형적인 동고서저 지형을 보이면서 동으로는 골 깊은 삼척을 아우르고
서로는 태백의 젖줄을 빚어내는 황장산군이며
덕항산을 지나 두타산·청옥산으로 이어지기 앞서 잠시 숨을 고르는 구간이 황장산이다.

백두대간의 황장산은

삼척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며 서쪽으로 완만한 산세를 보이지만 동쪽으로는 천길 벼랑 끝이다.
그 벼랑 아래 깊고 깊은 강원도 산촌에서 바다내음이 물씬 풍기는곳
그래서 늘 우리가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은 동해 바다에 이르기까지
산촌에서 어촌까지 옛사람들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모든 것이 백두대간의 영향이며 백두대간에서 동해바다로 흐르는 오십천과
그 주변의 산줄기, 그리고 동해 바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이 바로 삼척이다.

황장산 초입구간

댓재에서 황장산 산등하는 구간의 초입부분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행자들의 수많은 발자국과 담 그리고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백두대간의 동쪽 삼척은 어떤 곳인가?

삼척은 역사적으로 신라가 지배하기 전 실직국(悉直國)이었다.

신라 파사왕 23년, 서기 102년 이전의 일이다.

한 때는 고구려 땅이기도 했으나 신라의 김 이사부가 505년 고구려로부터 회복해 실직주를 설치

초대 군주로 파견되기도 한 곳이며 757년께 삼척군으로 개칭되면서 실직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삼척 시내의 왕릉과 왕비릉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실직왕조의 후손이 바로 삼척 김씨들이다 한다.



밀림같은 황장산 탐방로

초목이 빼곡해서 밀림과도 같았다

황장산(黃腸山m)은

경북 문경의 황장산과 강원도의 황장산과 이름이 많다

이름의 유래는 옛날 에 황장목이라는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지만

막상 현재에는 황장목은 눈 씻고 찾아 보려 해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점까지도 공통점이 있다.

문경의 황장산이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릴 만큼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는 반면

이곳 삼척의 황 장산은 북쪽의 두타산과 남쪽의 덕항산이라는 두곳의 100대 명산 사이에 끼여

그저 평범하고 순 하기 이를 데 없는 산봉우리라는 점이 다르다.

들머리는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을 넘나드는 424번 지방도로의 고갯마루 댓재다.

백두대간의 길목에 있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고지나 다름없듯하다.


탐방로 주변 멧돼지의 흔적들

주로 멧돼지들은 새벽녘에 출몰해서 먹이사냥을 한다

햇살 좋은날 오후에는 양지 바른곳 물웅덩이에서 딩굴며 지내기도 한다는데

이른 흔적을 보면 왠지 좀 등이 오싹한 기분이 든다.

삼척 황장산은

조선을 개국 이태조의 조상 묘인 준경묘와 영경묘고 있으며
그리고 이성계로부터 내쫓김을 당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능이
삼척 안에 있어 왕조의 생성과 멸망에 얽힌 역사의 일들을 되새기게 한다.
이태조의 5대조인 목조의 부친 묘소인 준경묘와 관련한 이야기 한 토막을 보면
1231년 고려 고종 18년 전주의 지방 호족이던 이성계의 5대조 이 안사가 기생을 놓고
한 관리와 싸우다 관헌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해침을 당할 위기에 처해진다.
이 안사는 이를 피해 삼척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부친의 상을 당해 명당을 구하던 중
어느 고승이 나타나 묏자리를 잡아주고는“소 백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금으로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면 5대 뒤에 왕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가난하던 이 안사는 백마리의 소(百牛)를 흰 소(白牛)로 대신해 처가의 흰 소를 잡고
금관(金棺)은 황금색 귀리 짚으로 대신해 제사를 지냈다 한다.
이른바 ‘백우금관’의 전설이다.
조선 왕조의 개국이 이 안사가 발휘한 임기응변의 기지 때문이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백두대간 등산도 안내판

안내판을 세워둔곳이 위치가 적정하지 않은지

안내판 뒷편으로 길이 잘 나 있었다

나는 황장산 안내표지판인줄 알고 돌아가 보았더니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판이였다.

황장산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많은데 댓재에구간에서는 볼수가 없었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하며

이성계의 5대 조부 양무장군의 묘로 1899년에 영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하여 정자각

비각을 건축하고 舊居址에 재실, 비각을 건축하였으며

특히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 시림의 경관을 여기서만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 전주이씨의 실묘로 는 남한에서 최고의 시조 묘로 매년 4월 20일에 전주이씨 문중 주관으로 제례를 올리고 있다.

984년 8월에는 삼척군에서 영경묘와 함께 재각, 비각, 재실, 홍살문 등을 일제히 보수하였다.

묘 앞의 제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일자각(一字閣)으로

왕릉의 제각(祭閣)인 정 자각(丁字閣)과는 그 규모가 다르다.

그리고 제각 우측에 "어제준경묘비(御製濬慶墓碑)"라 적 힌 비가 비각 안에 있는데

이 비는 광무 3년(1899)에 자헌대부 이근명이 비문을 서했다.

활기리 마을에 있는 재실은 ㅁ자 와가(瓦家)로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제기(祭 器)가 보관되어 있다.

재실 바로 앞에 "목조구거유지(穆祖舊居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이 비는 광무 3년(1899)에 이중하가 어명으로 세웠고, 재실도 이때 이중하의 감독으로 지어졌다.

영경묘는 태조의 5대 조모 평창 이씨의 묘로

1899년에 준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하여 정 자각, 비각을 건축하고 영경묘라고 하였다.

이 묘는 준경묘와 함께 전주 이씨의 실묘로는 남한 에서 최고 시조 묘이며

매년 4월 20일 전주 이씨 문중에서 제례를 지낸다.

비각 안에 있는 "어 제영경묘비(御製永慶墓碑)"는 광무 3년(1899)에 정헌대부 민병석이 서(書)했다.

특히 준경묘가 위치한 나지막한 야산 일대는 입구부터 소나무로 가득하다.

차도가 없는 관계로 차량은 통과할 수 없어 준경묘에 들어가는 길에는

어른 팔뚝만 한 굵기 소 나무가 찾아오는 사람의 시선을 이끈다 하며

2001년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과 혼례를 올린 소나무도 준경묘 입구에 서 있다. 이

지역의 송림은 일부 간벌해 궁궐건축과 문화재 복원 목재로 사용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숭례 문 복원을 위하여 전주 이씨 문중의 협조를 받아

준경묘의 용맥 능선의 소나무를 간벌해 사용했다고 한다.


경사가 있는 탐방로

두타산 산행을 한 탓인지 경사가 있는 탐방로를 오르니 다리가 좀 아프다

삼척에 대한 전해내려는 이야기를 보면

삼척에는 또 조선시대 최고의 산악인으로서 나라 땅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숱한‘산수기’를 남긴 미수(眉嫂) 허목(許穆)선생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낙남정맥 천주산자락의 달천계곡에 달천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던 미수 허목이 삼척부사로 부임해 남긴 족적이 크다.
1661년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할 당시 동해 바닷물의 역류로 오십천이 범람해
백성들이 큰 피해를 당하자 이를 막기 위해 동해를 예찬하는 노래를 지어 비를 세웠더니
물난리가 잠잠해지고 바닷물이 심술을 부리더라도 이 비를 넘지 못했다 한다.
바로 이 비가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다.
비문은 부적에 쓰는 전서체로 씌어졌는데 과연 비석을 세우자 물이 물러나고
그 후로는 수해가 없었다 해서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한다.
씨가 뛰어나고 신묘한 부적의 힘까지 지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오늘날까지도 비문을 탁본해 간직하면 재앙이 없어진다고 해
많은 사람들이 탁본해 가는 바람에 비문이 마모될 지경이라서 보호각에 갇힌 신세가 돼 있다.
이 비는 삼척 항이 내려다보이는 정라동 육향산이라는 낮은 언덕에 세워져 있다 한다.



황장산 정상

황장산 높이를 검색해보면 산림청에서 산높이를1069m 기록 해놓았다

주소는 강원도 삼척시 마로면 활기리 화장면 번천리에 있다고 소개해 놓았다

정상에 올라보니 표지석은 없고

백두대간 등산로 댓재 건의령 구간중 총19.7km 이라고 안내판만 있었다

그 아래 표지석은 산림청에서 댓재와 덕항산 4시간이란 표지석이다


황장산(黃腸山) 정상 1069m

황장산 정상이란걸 안내표지목에서알수가 있다

그 인근에 안내표지석 위에 황장산이라고 되어 있어 황장산 정산 인증 사진이다

백두대간의 길에 두타산과  덕항산에 끼여 백두대간 종주산객들이 지나는곳

이름은 널이 알려지지도 않고 정상석이 멋지게  있지는 않지만 알찬 황장산이다.

또한 영경마을에서 시작하는 황장산 강강송 산책로는

금강송 솔 향기 체험에 좋은곳이다


황장산(黃腸山) 정상 1069m

이게 정상석일까.....황장산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높이가 없다

일반적으로 안내표지석 역할하는 표지석이다

댓재 20분 덕항산 4시간 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누구의 기준일까

어떻게 평균치를 내어는지 궁금해진다.

삼척 황장산은 백두대간 주위 유명한 산으로 인하여 빛을 보지 못한 산이지만

황장산은 준경묘가 있는데 준경묘는

사적 제524호. 이양무는 고려시대 인물로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부친이다.

그의 부인인 삼척이씨는 상장군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목조가 전주를 떠나 강원도로 이주할 때 이들도 함께 동행하였다고 전한다.

강원도 삼척의 마을인 노동(蘆洞)과 동산(東山)에 있는 고총(古冢)이 그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덤은 국가의 수호를 받았다.

대한제국 기간이던

1899년에 이르러 황실에서는 이 고총을 목조의 고비(考妣: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으로 인정하고

노동의 이양무 무덤을 준경묘(濬慶墓), 동산의 부인 무덤을 영경묘(永慶墓)라 하여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시켰다.

조선 초기부터 강원도에 이양무(李陽武)와 그의 부인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 대표적인 곳이 삼척부 미로리의 이릉(伊陵)으로,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국가의 수호를 받았다.

선조대 강원도 관찰사로 왔던 정철(鄭澈)이 이 무덤을 목조의 고비(考妣) 무덤이라며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조정에서는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 중기에는 삼척이 아닌 황지 부근에 이양무의 무덤이 있다는 주장이 계속 나타났다.

이후 이양무의 무덤이 삼척인지 황지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조선 말기까지 국가에서 이양무의 무덤을 확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삼척 무덤의 수호와 제향은 왕실 후손들에 의해 사적으로 진행되었다.

1880년(고종 17)에는 진사 이종(李宗)이란 사람이 삼척의 두 무덤 근처에 거주하는 종인(宗人)들과

협력하여 매년 10월에 시제(時祭)를 지냈다.

삼척의 무덤이 조정으로부터 왕실묘로 인정받게 된 것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이다.



황장산 표지석(산행안내석)

황장산에는 금강송과 이러한 역사적 이야기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정상에는 이렇게 정상석이 아닌것이 서있다

황장산의 준경묘의 풍수설화를 보면

잘 알려진 명당자리에는 그에 따른 전설과 설화가 많이 있듯이

이곳 준경묘도 조선왕조 건국과 관련된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피신와 자리를 잡고 산 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의 상(喪)을 당하게 된다.

이안사는 아버지 묘 자리를 구하려고 이산 저산 산등성이를 넘어 사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이어서 말하기를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시신을 금관(金棺)에 안장하여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있다가 그들은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 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더구나 금으로 만든 관은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소 백(百) 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고

귀리짚은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갈이 할 일이 있다며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盧洞)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처가에서 빌린 흰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고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여 아버지의 장사를 치루었다.



산객들의 흔적 깃표

황장산 정상에는 백두대간 종주자 그리고 황장산을 찾았던 산객들의 깃표가 해풍에 나부끼고 있다

깊은 산골에서 동해바다의 해풍내음이 전달되는 삼척이다

시간이 많이 허락했다면 아마도 금강송이 있는 준경묘 영경묘도 답사했을것인데

강원도라는 거리가 하루코스로는 너무 하루가 짧다.


댓재 조형물

황장산을 마무리하고서 댓재에 있는 조형물에서 인증사진을 찍어본다

댓재 조형물은 여기저기 녹이 썰어 있었고 삼척시에서 관리가 좀 부실하게 보였다

주변에는 양심없는 사람의 쓰레기 봉지도 딩글고 있어 좀 그렇다

조형물 글을 보면

산죽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일명 죽현(竹峴) 죽치령(竹峙嶺)이라고 불리며

1984년 10월 지금의 도로가 개통되기 까지 영동과 영서를 넘나 들던

옛 고갯길로써 보행자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 있는곳이다.

라고 써 놓았다.


이렇게 해서 백두대간의 댓재에서 두타산과 황장산 정상에서 서보며

삼척에서의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해본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한국의 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삼척시 강원도등 홈페이지

월간 산,한국향토문화 전자대사전.백과사전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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