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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유달산(木浦 儒達山),노령산맥의 마지막 봉우리 유달산 일등바위에 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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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유달산(木浦 儒達山),노령산맥의 마지막 봉우리 유달산 일등바위에 서다

바다늑대FORCE 2019. 4. 16. 19:30

목포 유달산(木浦 儒達山)

 노령산맥의 마지막 봉우리 유달산 일등바위에 서다



▲ 목포 유달산((木浦 儒達山)

     높이 : 228m

     치 :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대반동·온금동·북교동에 걸쳐 있는 산


▲산행일  : 2019년04월16일 화요일 날씨 : 맑음


▲나의산행코스 : 

  목포 유달산 공영주차장-→유달산 공원→ 오포대→유선각→→유달산정상→→이등바위

  →→ 유달산조각공원 →→철거민탑 →→보광사 →→ 노적봉 →→ 시민종각 →→유달산공영주차장

 3.2km(GPS) 1시간40분 소요


▲산행지개요:

목포 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유달산은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높이 228m의 목포 뒷산이다.

기암절벽이 첩첩하여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하며 노적봉을 비롯하여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해발 228m의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바위) 로 나뉘어진 유달산은 갖가지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첩첩하며 그 옛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정상에 올라 서면 다도해의 경관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오고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등 5개의 정자가 있으며, 산 아래에는 4.19 기념탑, 충혼탑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기념비 등과 조각작품 100점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난공원이 있다.

노적봉은

유달산전체 보다 더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노적봉이 산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유달산 입구 도로 건너편에 일부러 가져다 높은 듯 서 있는 큰 바위덩어리 하나가 보이는 데 그곳이 바로 노적봉이다.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군량미를 쌓아놓은 큰 노적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를 본 왜적들은 저렇게 많은 군량을 쌓아두었으니 군사는 얼마나 많겠느냐며 지레놀라 도망쳤다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유달산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 노적봉을 거쳐야 한다.

노적봉을 건너면 유달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이자 유달공원이다.

노적봉 아래 속옷을 입지 않는 여인이 있다.

다산목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툭 터진 길옆에 민망스런 자태로 앉아있다.

노적봉 주차장에서 조금 오르다 보면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서 있고, 바로 위로 휴게소가 있다 .

휴게소 위로보이는 정자가 소요정. 소요정에 서면 유달산의 진면목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소요정에서 최고봉인 일등바위까지는 40분이 걸린다. 등산로 중간중간에 얼굴바위

나막신 바위등이 숨어있어 볼거리도 많은 편이다.

목포역에서 목포문화원(구사립도서관)을 지나면 언덕이 나오는데 그 언덕에서 우회전하여 승용차로 5분만 가면

노적봉이 보이고 바로앞에 유달산 매표소가 있다.


▲  유달산 등산지도



찾아가는길

 진주ic삼거리 →→→남해고속도로 남순천TG→→→영산로 목포역 방향→→→유달로 유달산 우회전 도로

 →→→유달산 공영주차장

212km 승용차 2시간4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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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4월16일 화요일

 우리나라 구석구석  그리고 산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당직근무를 마치고 봄햇살 좋은날에 목포 유달산으로 을 나서본다.


유달산공원 입구

유달산 공원입구 유료주차장에 주차요금은 30분에 1000원이며

하루종일3000원이라고 한다 난 한시간 주차요금 2000원을 선불 지불하고 주차를 하였다

유달산 계단으로 오르면

유달산 공원 입구에는 유달산(儒達山)이란 표지석이 수호자 처럼 서 있다

유달산은 전라남도 목포시 남서부에 위치하며 228m로

동네 뒷산처럼 낮지만 기암과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수려한 풍광 그리고 남도바다의 조망이 너무 좋은곳이다.


유달산 정기(儒達山 精氣) 목포개항 100주년기념(木浦改港100週年記念) 초석

유달산 공원에는 유달산 정기라라는 목포개항 100주년기념 초석이 멋지게 있다

남도 먼거리를 운전헤 온 보람이 기암에서 또 바다와 목포시내를 한눈에 조망할수 있어

결코 후회 되지 않은 산행지였다.

영달산이라 불리던 목포의 상징이며
노령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으로

유달산은 면적140ha, 높이 228.3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유달산은 옛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리웠으며 도심 속에 우뚝 솟아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보며 이곳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예혼을 일깨우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忠武公 李舜臣 將軍狀)

유달산에 오르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목포바다를 내려보고 있다

잠시 이 나라를 지켜주신 장군님쎄 목례로서 예를 올리고 감사 참배를 하였다

1974년 5월 20일 209명으로 구성된 이충무공 동상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그해 8월 15일 장군의 동상을 건립했다 한다.

높이 370cm, 너비 160cm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피사의 탑처럼 옆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는 동상은 중심선을 기준으로 했을 때

투구까지는 약 0.5도 기울어져 있다. 

동상이 일본이 있는 쪽을 정확한 각도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장군의 사후에도 일본의 동향을 살피고 기운을 약하게 만들어 다시 침략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칼을 뽑는 순간 모습의 자세를 나타내고자 하여 기울어지게 동상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목포 노적봉과 이순신장군의 심리전술이 숭리한 작전지역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아군의 군세에 눌려 후퇴한 노적봉.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이엉을 엮어 바위를 덮었는데 

마치 그것이 군량미를 덮어놓은 노적처럼 꾸며서, 군량미가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주위를 계속 돌게 해서 마치 많은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게 하여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왜적들에게 아군의 군세를 위장하여 

왜장이 군사를 돌려 후퇴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난영 목포의 눈물 노래비

유달산으로 오르다 보면 목포의 눈물 노래가 흘러 나오며 이난영 목포의 눈물 노레비가 있다

1930년대 가수 이난영이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노래 목포의 눈물이다.

근대사 격동기 남도 여성인으로서 50세를 넘기 못하고 단명한 가수 故 이난영 가수는

그는 1916년∼1965. 4. 11년 생을 마감한 대중가요 가수이다.

본명 이옥례(李玉禮)이며  목포시 양동 3구 '바윗등 비탈'진 집에서 이남순의 장녀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하고

오빠 이봉룡(李鳳龍)과 함께 불우하게 자란다.
당시에 어린시절을 보낸 목포 양동은 목포가 개항된 이후 선교사들이 터를 잡으면서

교육.의료 등 신문물들이 목포에 유입되는 통로가 되었던 공간이었다.

목포에서의 어린 시절은 이난영이 보고 자란 환경은 외부인들은 자주접하여

가수의 활동성인 직업적인 조건을 간접적으로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는 부두 노무자로, 어머니는 난영 10살때 식모살이를 떠나고

그녀는 목포의 조선 면화공장에 나가 솜타는 일을 한다. 그후 식모살이간 제주도로 엄마를 찾아간다.
난영은 엄마와 함께 제주도의 생활이 시작되고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높이 평가하게 된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 되기전 나와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단원으로 채용된 것이 1932년 열여섯살 되던 해였다.
16세 때에 제주도에서 삼천가극단(三川歌劇團)의 순회공연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 나섰다.

단체가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작사가 강사랑(姜史郞)이 재질을 발견하여

오케이레코드사 사장 이철(李哲)에게 추천하여

1933년 8월 태평에서 <지나간 옛 꿈>과 <시드니 청춘>을 발표하여 정식 데뷔

1933년 손목인(孫牧人) 작곡의 〈불사조 不死鳥〉로 처음 취입한다.

이때 본명 이옥례가 아닌 김난영으로 예명을 얻게된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하였고

20세가 되던 해에 가요작곡가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면서 그의 굴곡진 인생의 또다른 막이 시작된다.
1937년 목포의 눈물 속편격인 <해조곡>을 발표하여 다시 한번 히트를 기록

<해조곡>은 표면적으로는 님을 그리워하는 가사로 구성되어 있으나

징용 등으로 끌려간 연인을 빗대어 반일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뒤이어  일제 강점기 최고의 인기곡이자 한국 가요사의 불후의 명곡으로도 불리는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면서,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된다.

목포의 눈물은 원래 목포출신 문일석이라는 문학청년이 '목포의 노래' 로 OK레코드에서 공모하여

1등을 한 작품을 이철이 '목포의 눈물'로 바꾸어 이난영이 취입했다고 한다.

정상으로 가는 계단

돌계단도 유달산의 풍광과 잘 어울려 오래된 역사의 길을 걷는듯 하다

제주도 올랫길 개통된 이후로 많은 지자체 뿐만 아니라 국립공원에도 둘레길이 많이 생겨 났다

목포 유달산도 둘레길이 유달산 한바퀴를 도는 코스로 총 구간6.3km로서

다도해 절경과 조각공원등 볼거리가 풍성해 목포시만 뿐만아니다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천자총통(天字銃筒)

 

※ 달선각 옆 오포대(午砲臺)

오포는 오정포라고도 하는데 1908년 4월 1일 당시 일본통감부가 우리나라와 일본의 1시간 시차를 무시하고

오전 11시에 일본 시간 정오 12시에 맞춰 정오로 정하고 포를 쏘아 알린 아픈 역사가 있곳이기도 하다

오포대는1909년 설치되었다.

당시의 오포대는 현재 유달산공원의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포는 주변에 모형으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조선식 선입포로서 조선 헌종 10년(1667년)에 제작되었고

높이 5자, 구경 3자 5푼, 기부 8치, 주량 733근, 1회 발사시 화약 소비량 30량이었다고 한다.

1913년 8월 신식 대포로 일본 오오사까 포병공장에서 구입, 대체했고

그 전에 있는 구식 대포는 일본의 신사(神社) 경내로 옮겼다고 하며

당시 오포대 담당직원이 정오에 맞춰 오포대에 올라가서 포탄 없이

포구에 화약과 신문지를 넣고 쏘아 굉음과 함께 목포 상공에 휴지가 흩어지면, 시민들은 "오포 텄다.

점심 먹자"라는 신호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말기 일본이 전쟁수행을 위한 공출로 신·구 오포를 걷어가 버렸다고 한다.

1988년 12월 다시 이를 복원, 당시 오포대에 전시하고 지방문화재 제 138호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일등바위460m

정상까지는 460m남아 잇다 역사를 보며 목포시내를 조망하면서 천천히 걸어온길

정상위치를 알리는 표지목이 유달산 구석 구석을 가르쳐 주고 있다.

유달산은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하는 유달산에는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등의 5개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으며

산 아래에는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기념비 등이 있으며

1982년 발족된 추진위원회의 범시민적인 유달산 공원화 사업으로 조각작품 100점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난공원 등이 조성되어 볼거리가 많으며 산 주변에 개통된 2.7km의 유달산 일주도로를 타고 달리며

목포시가와 다도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해발 228m의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바위)로 나뉘어진 유달산은

갖가지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첩첩하며 그 옛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유선각(儒仙閣)

유선각은 1932년 10월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는데

처음에는 목조로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콘크리트건물로 개축되었다

유선각에 올라서면 노적봉이 한눈에 들어오며

삼학도와 목포항구 그리고 시내조망이 너무 좋은곳이다


삼학도 (三鶴島)

목포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조망되며 삼학도다 아름답게 물위에 떠 있는듯 하다

무안동 남동쪽에 위치하며 면적은 1.12㎢이었고, 해안선 길이는 4.3㎞이었다.

연륙(連陸) 및 간척공사(1968∼1973)의 완공으로 현재는 내륙과 이어져 영해동의 일부가 되었다.

대삼학도·중삼학도·소삼학도로 구성되었으며 서로 연결되었다.

지질은 백악기의 산성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점은 높이 73m로 낮은 구릉성 산지이다.

섬의 모습이 학처럼 보여 삼학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섬에는 무사와 그를 사랑했던 세 처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 처녀가 그를 기다리다 학이 되었으나, 이를 알지 못한 무사가 쏜 화살을 맞아 모두 죽게 되었고

학이 떨어진 자리에 세 개의 섬이 솟아나 삼학도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삼학도 전설

이 섬은 모습이 학처럼 보여 삼학도라 불리워졌다.
하지만 삼학도라는 이름에 대해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기품이 당당하고 이목이 수려한 젊은 장사가 유달산에 홀로 살고 있었다.
때로는 시와 노래를 읊조리고 칼쓰기와 활쏘기를 하면서 어느 누구와 사귀려 하지도 않고 두문불출 수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 유달산 밑에 갯마을이 있는데, 이 갯마을에는 아주 예쁜 처녀 셋이 살고 있었다.
이 세 처녀는 산밑 우물가로 종종 물 길러 오는 이 낯선 젊은이에게 제각기 짝사랑으로 가슴을 죄게 되었다.
서로 산 위에까지 물을 길어다 주는가 하면 빨래를 해주거나 밥을 해 주는 등 온갖호의를 베풀며 서로가 사랑을 전하기에 바빴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왕자라고 했지만 어디서 온 누구인지도 확실히 몰랐다.
다만 세 처녀는 자신들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수도를 위해 이 산에 들어온 젊은이는 세 처녀의 친절과 유혹에 견딜 수 없었다.
드디어 젊은이는 굳은 결심을 하고 세 처녀를 불러 간곡히 부탁했다.
"저의 젊은 꿈이 깨지기 전에 멀리 떠나 주시오" 진정으로 젊은이를 사랑하던

세 처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마을을 버리고 멀리 떠날 것을 다짐했다.
새벽을 틈타 작은 배에 오른 세처녀는 포구를 떠나며 눈물어린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정들었던 마을과 그들의 가슴을 메이게 한 산 기슭을 향하여 멀리 산 위에서

이 처녀들의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된 청년은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처녀들을 보내버리고는 수도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신도 사랑에 빠져 있음을 발견했다.
젊은이는 소리쳐 세 처녀를 불렀다.
떠나지 말고 돌아오라고 목이 메어 불렀으나 청년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인지

세 처녀를 실은 배는 점점 멀어져 갔다.
산을 뛰쳐 내려와 바닷가에 서서 뱃전을 향해 활을 쏘았다.
활에 맞아 구멍이 난 배는 가라앉아 버렸다.
청년은 애타게 세 처녀를 부르며 바다에 뛰어들어 가라앉는 배를 향해 헤엄쳐 갔다.
청년이 그곳에 당도하기도 전에 세처녀는 학이되어 하늘로 올랐다.
학이 오른 자리엔 나란히 섬 세개가 생겨났다.
청년은 울면서 산에 돌아와 삼학도를 바라보며 이는 하늘이 자신을 시험한 것이라 깨닫고

열심히 수도하여 큰 장수가 되었다.
이리하여 삼학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설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수도했다는 젊은이가 도승도 되고 장수도 되고 선비도 된다.


종바위

절에서 볼수 있는 범종과 다른 서양식 종으로 이랫쪽에서 보면 종(鐘)모양임

이라고 안내석에 기록되어 있다.

유달산에 오르면 이렇게 여러갖 모양의 기암괴석을 볼수 있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 때 이엉으로 바위를 덮어 아군의 군량미처럼 가장해

왜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는 이순신 장군의 설화가 전해오는 노적봉을 비롯하여 유선각

오포대 등 역사상 의미 있는곳이 많으며, 특히 유달산에는 이곳에서 멸종되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되는 왕자귀나무가 서식하고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다도해의 경관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오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모습이 충분히 아름다운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목포의 뒷산 유달산.

그 위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일몰이나 목포항의 야경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일등바위0.5km

아래 이정표지목은 일등바위까지 460m 라하엮는데

몇분더 올라 왔는데0.5km라고 안내 되어 있다 거리가 들쭉 날쭉 한다.

유달산은 지질학상의 판구조이론으로 볼 때 압축구조장의 안쪽에 위치하며

고생대 말부터 중기의 사이에 있었던 큰 규모의 습곡 운동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뒤로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침식이 되어 지금은 노년기 지형으로 발달하였다.

목포시와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므로 산정에 두 개의 봉수대를 설치해

멀리 바다에서 들어오는 외적을 경계하였다.

달성각(達成閣)에서 약 100m 내려오면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午砲臺)와 노적봉(露積峯)이 있다.


일등바위(유달산 정상)

일등바위 정상을 한눈에 볼수 있도록 조망처를 만들어 놓았다

유달산은 목포 시민의 공원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져 있어

전국에서 모여드는 관광객이 많다.

1982년부터 유달산 공원화가 추진되어 유달공원, 난공원, 달성공원, 조각공원 등이 있다.

서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급하여 도시화가 덜 진행되었고, 해안에는 유달산해수욕장이 있다.


일등바위에 세겨진 부동명왕(不動明王)

일등암반에 새겨진 부동명왕상이 잇어 촬영해 보았다

밀교의 대표적인 명왕으로서

오대명왕, 팔대명왕의 주존. 대일여래가 일체의 악마와 번뇌를 굴복시키기 위해

분노한 모습으로 화현하여 나타난 것이라 한다.

진언종 천태종 선종 일련종 및 일본불교 각 종파에서도 폭 넓게 신앙되고 있으며

나머지 오대명왕인 강삼세면옹 군차리명왕 금강야차명왕과 함께 안치한다고 한다.


유달산 정상으로가는 태크계단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로 가는 계단이다

쳐다만 보아도 한숨이 나오는 가파른 계단이다

유달산은

노령 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 끝에 자리한 산이다.

일등봉의 높이가 230m이며, 표고 50m이하가 29.8%로 가장 많으며 200m 이상은 0.4%에 불과하다.

유달산 전체가 화강암이며 경사가 급하지만 일주도로를 따라 일부 완만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유달산의 대표 수종은 소나무(곰솔)이고 왕자귀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이 있다.

식생 구성으로 볼 때 인공 조림 수종을 제외하면 토양 조건은 척박한 편이다


유달산 정상(일등바위)228m

몇년전만 하여도 정상석이 없었고 정상표지석만 있었다

정상에 서면 목포시내가 사방팔방으로 조망이  되어 다도해 풍경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달산은 지질학상의 판구조이론으로 볼 때 압축구조장의 안쪽에 위치하며

고생대 말부터 중기의 사이에 있었던 큰 규모의 습곡 운동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뒤로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침식이 되어 지금은 노년기 지형으로 발달하였다.


유달산 정상(일등바위)228m

유달산은 노령산맥의 마지막 봉우리라고 한다

노령산맥(蘆嶺山脈) 

소백산맥의 추풍령 부근에서 갈라져 남서 방향으로 전라북도의 무주, 진안, 임실을 지나

전라남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다시 전라남도의 무안반도에 이르는 산맥. 길이 약 200㎞의 구릉성 산지이다.

형성 및 변천을 보면

중간에는 완주의 운장산(雲長山, 1,126m), 진안의 마이산(馬耳山, 667m)

정읍의 내장산(內藏山, 763m), 금산의 대둔산(大芚山, 878m), 김제의 모악산(母岳山, 793m) 같은

화산암과 옥천층군의 퇴적암 및 화강암 산지가 솟아 있고

소백산맥과의 사이의 산간지대에는 금강 유역의 영동군, 충청남도 금산군, 전라북도 무주, 장수 진안군이 있으며

섬진강 유역으로 임실군이 자리한다.

이 가운데 진안고원은 500m 내외의 고도를 이루는 고위평탄면으로 금강(錦江)이 발원한다.

이 산줄기는 논산천·만경강·동진강 등의 유역과 금강·섬진강 유역을 가르는 큰 분수계로서

금강이 북류하고, 섬진강이 남류하며, 이밖에도 만경강과 영산강이 이 산맥에서 발원한다.

전주∼진안 간의 곰티재(熊峙, 427m)와 정읍∼장성 간의 노령(蘆領, 276m)이 주요 고개이다


다도해와 목포대교

유달산 정상에서 바라본 다도해와 목포대교의 조망이다.

목포대교(木浦大橋, Mokpo Bridge)는

 목포시에 있는 국도 제1호선의  자동차 전용도로 교량으로

죽교동과 유달동의 고하도,허사도를 연결한다.

목포신외항과 서해안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목포의 관문으로 2012년6월29일에에 개통된 다리이다.

대불산업단지와 고하도 허사도(목포신외항) 목포대교 목포ic

죽림분기범 남악ic  서영암ic  대불산업단지로 구성된 사실상 목포외곽순환도로의 한 주축이다.


다도해의 조망

목포대교는

목포대교는 사장교 형식이지만

세계에서 두 번째, 우리나라에선 최초로 시도된 3웨이 케이블공법이란 고난이도 공법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대교역사의 새로운 획을 긋고 있다.

일반적인 사장교는 상판 좌우측에 각각 2쌍의 케이블로 지탱하지만

3웨이 케이블공법은 좌우측의 케이블을 1쌍으로 줄이고 이를 상판의 중앙에 옮겨 상판을 고정하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계나 시공등에서 고난이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며

케이블을 중앙에 배치함으로써 사장교 좌우측의 경관을 살릴 수 있는게 장점이다.

목포대교는 목포의 시조이며, 상징인 학을 형상화하여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또한 목포는 태풍이나 강풍이 자주 부는 지역이기 때문에 다리의 상판은

초속 67.4m, 주탑은 초속 74.9m의 강풍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고

또한 상판을 유선형으로 만들어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시켰다.

북항~고하도 간 총연장 4.129km를 잇는 왕복 4차로로 3,346억 원을 투입, 길이 167.5m짜리 주탑 2개

교각 36개, 상판 슬라브 36경간이 시공됐다.

사장교 형식은 3경간 연속 유선형강상판 강사장교(200+500+200m)이고, 주탑 모양은 다이아몬드형이다.

그리고, 케이블은 3웨이 120케이블(약 19,500m)이 시공됐다


얼굴바위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포효 하고있는 남자의 얼굴모양이라고 안내석에 새겨 놓았다

아마도 심술굿은 남자가 지나가는 행인을 깜짝 놀릴려고 소리치는가 보다.

유달산은 이렇게 여러모양의 기암괴석이 많아 군데군데 이름도 붙여 놓았다

설악산 만물상 처럼 그형상도 다양하다

나즈막한 동네 뒷산처럼 산책겸 다도해와 목포시를 조망하는것이

유달산 산행의 묘미라고 할수있겠다.


이등바위로 가는길

이등바위는 유달산에서 두번쨰로 높은 암봉이다

유달산에 오르면 목포시 조망이 좋은데

전라남도 무안반도 남단에 있는 시. 개항 이후 항구도시로 발전해 왔으며

서해안고속도로의 종점으로 수륙교통의 요지이다.

지방 도시 중 면적이 가장 작지만, 전라남도 지자체 중 인구수로는 3위를 차지한다.

2005년부터 목포시와 무안군 경계 일대에 남악신도시건설이 조성되고 있으며

전라남도의 주요 공공기관이 이전해 와 있다.


이등바위 정상으로 가는길

이등바위로 가는 계단은 주위환경과 조화를 잘 우루게 만들어 졌다

돌계단에 낙엽 그리고 봄을 맞이하여 초록으로 석트는 초목들

유달산은 목포시민에게 정말 좋은 안식처와 같아 보였다

돌맹이 하나 하나 부터 초목 하나 하나까지 보는 그 자체 만으로 힐링이다.

나즈막한 동네 뒷산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가 쉽게 오를수 있고 둘레길 한바퀴 할수 있는것이다.


암석샘과 목포대교

암릉에 작은 샘이 물이 고여 있다

작은 암릉샘과 목표대교와 함께 조화 되게 촬영해 보았다

파란바다위에 표주박 엎어놓은 것처럼  올록볼록 작은섬들이 도화지위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위에 목포대교가 아름다움을 더했다

암릉작은샘에 비쳐진 다도해가 마치 무릉도원 같다


이등봉(이등바위)

유달산에서 두번째 높은봉우리 여서 이등봉 이라함 이라고 안내석에 새겨 놓았다

정상에 올라가는 계단은 암릉을 깍아 만들어 놓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들었지만 자연훼손인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안전하게 만들었는가

갑론을박 토론을 할만도 하다

유달산의 정상부분은 암봉이지만 아주 멋지게 만물상처럼 펼쳐 놓았다.


이등바위에서 일등바위 유달산 정상 조망

유달산 중턱에 핀 벚꽃과 연두색으로 피어나는 초목의 새싹

유달산 전체가  바다와 조화를 이룬 한폭의 풍경화이다.

유달산에는

유달산 봄축제가 4월6일 부터20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일제에 저항했던 민족 정신을 이어받아 함께 4.8만세운동과 독도 플래시몹 함께 화려한 개막식를 통해

양국이 화합와 소통을 한다는 의미의 개막식과 꽃길걷기 등

다양한 퍼포먼스가 펼쳐진다고 전한다.


이등바위에서 목포시 조망

전라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로서

광양, 군산과 함께 호남 3대 항구의 하나이며 호남선 철도의 종착역이자 서해안고속도로의 시점으로

개항 이후부터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만 해도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원산시와 함께 인구 7만으로 조선 4대 항구 중 하나였고

1950년대 10만을 훌쩍 넘는 인구 증가(11만)로 한때 남한 6대 도시에 속했으나

내해 수심이 얕아 현대적 대규모 무역항으로 쓰기에는 입지가 나쁜 탓에 대도시로 성장하지 못했다.

또한 지금에 와서 성장시키려 해도, 면적이 너무 작다.

흔히 경부축 위주의 발전으로 인한 희생양으로 여겨지지만 나름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는 것.

그래도 전남 서부권의 중심 도시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전라남도청이 남악신도시 내인 근방의

무안군 삼향읍으로 이전하면서 전라남도청의 배후 도시 역할도 하고 있다.

목포시의 인구는 전라남도의 지자체 중 여수시 순천시에 이어 3위이지만

읍면을 제외하고 동 지역 인구만 비교하면 목포가 이 둘을 앞선다.

그리고 여수, 순천은 도농복합시이고 목포는 아직 도농통합이 안 된 것을 감안해 목포+무안으로 계산하면 32만 명이고

신안까지 합치면 36만 명대, 말이 영암이지 목포 생활권이나 다름없어

줄기차게 목포로의 편입을 요구하는 영암군 삼호읍 지역까지 합치면 사실상 인구 40만명 급의 도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지명역사를 보면 삼국시대엔

백제의 세력확장으로 근초고왕 연대(346~375)에 백제에 병합되어 물아해 군이였고

신라 경덕왕대에는 면주에 속했다. 삼국말엽 고려태조가 수군을 이끌고

이곳을 거쳐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지명의 유래는 나주의 남쪽 포구(남포)라 하여 이곳을 목포(남포→맑포→목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보다는 지형이 마치 목처럼 중요한 역할을 해서 목개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써서 목포라고 하는 설이 더 유력하다.
※ 실제로 목포입구에 큰목(대항), 작은못(소항)이라는 지명이 있다.


수도바위(똥바위)

때마침 여객기 한대가 목포하늘을 가로 질러 날아간다

이등봉우리에는 수도바위가 있는데 똥바위라고도 한다

정상이 평평한 터위에 용맹하게 전진하는 수도자의 모습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그런데 수도자의 전진이 아니라 정진(精進)이 맞는데......

유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영달산'으로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노령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

유달산은 면적140ha, 높이 228.3m로 그리 높지는 않지정상의 평평한 터에서 용만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 끝인 산이다.

경치가 좋은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소요정 등의 많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으며

가수 이난영 '목포의 눈물' 기념비,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 등의 볼거리가 많고

2.7km의 유달산 일주도로는 목포 시가지와 다도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는 일등바위(율동바위), 심판을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는 이등바위(이동바위)

이등바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극락세계로 간다는 전설이 내려져온다.


목포대교와 목포해양대학교

이등바위에서보면 목포해양대학교가 발아래 펼쳐져 한눈에 들어온다

목포해양대학교(木浦海洋大學校, Mokpo National Maritime University)는

전남 목포시 해양대학로 91에 있는 국립대학이다.

1950년에 개교한 목포수산상선학교가 모체이다. 교훈은 진리탐구, 성실봉사, 해양개척이다.

대학원(일반대학원, 해양산업대학원), 2개 단과대학(해사대학, 해양공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육지원시설은 실습선, 승선생활관, 마린시뮬레이션센터, 도서관, 기관공장 등이 있고

연구시설에 해양산업연구소, 기계전자기술연구소 등이 있다.


유달산 인공터널

유달산 이등바위에서 조각공원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굴(堀)하나가 있다

제법 터널 길이도 길다 어떤 용도로 굴착 햇는지 안내판도 없고

노숙자 숙소같고 종교인의 굿당 같기도 하다.


이등바위에서 조각공원으로 가는길

벚꽃이 떨어져 꽃길을 만들었다.

유달산 조각공원은

목포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유달산 이등바위 아래 위치한 조각공원은 48,000㎡ 규모로

지난 1982년 11월 우리나라 최초 야외 조각공원으로 개원하여

한국조각공원연구회 회원들의 우수한 작품들을 임대 전시해왔으나 전시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부분의 작품이 교체되었다.
이번 작품들은 해양 준심 도시로서 문화를 상징하는 “ 자연, 문화, 조각” 이라는 주제로

추천 심사를 통해 선정 교체하였으며 설치된 조각작품들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세심하게 고려하여

2008년 8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특히 유달산 조각공원에 설치된 외국의 저명한 조각가들의 작품들은

국제조감 심포지엄을 통해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들로 국내 조각가 작품들과 함께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관상수 등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유달산을 찾는 관광객의 기념사진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또 야외음악당, 분수, 휴게소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시민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노적봉에 서 있는 유달산 초입의 도로에 들어선 다음 오른쪽의 순환도로를 따라가면

이등바위의 위용이 한눈에 올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조각공원이 설치되어 있는데

조각 하나하나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고,  조각 주변에는 희귀목들을 일부러 심어 놓아 볼거리를 더하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가며 조각작품을 돌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원에서

 이등바위로 오르는 등산로가 마련되어 있어 유달산 등산도 겸할 수 있다.


철거민탑

고향을 사랑하고 유달산을 아끼는 갸륵한 마음으로 정든터전을

스스로 떠나간 철거민의 애환을 달래고 자연을 사랑하고

가꿀줄 아는 새로운 시민의 기상과 의지를 다짐하고자 철거민의

숨결과 정성이 깃든 돌을 모아 세운탑 1979.12

라고 안내석에 기록해 놓았다.


보광사 대웅전

보광사는 유달산 동쪽 기슭(달성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9년 10월 30일 박운계(朴雲溪)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해남 대흥사의 말사(末寺)이나 개인사찰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대지 190평

건평 29평 정도의 조그마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18호(1962년 10월 29일)로 등록되어 있다한다.

보광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용화전(龍華殿)에 모시고 있는 석조미륵좌불이다.

미륵불을 모시고 있다하여 미륵사(彌勒寺)라고 불리웠는데, 이것은 유달산의 바위 줄기에 불상을 새겨 조성한 것이다

뒷부분에 난포를 터서 연결된 바위 부분을 단절시켰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약70년 정도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광사입구 좌편에 석조미륵조성공덕비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바위에

석조미륵불을 세워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사찰로 발전해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좌불 아래 보광사(普光寺)의 짓샘

짓샘의 전설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보광사(普光寺) 석조미륵상 아래에 있는 샘이다.

산고(産苦)가 들었을 때 효험이 있다고 하여 일제때까지만해도 이 일대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산고가 들면 짓샘에서 물을 길어다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였고

또한 산모의 젖이 부족할 경우 옹기 두 개에 끈을 매서 짓샘에 띄우고

젖을 많이 태워 달라고 기원한 다음 그 옹기에 샘물을 채워서 집으로 가져와 조앙신에게도 소망하였다 한다.  

짓샘에서 축원을 할 때에 주술문으로는 "해동 조선 전라도 목포 모동 모씨의 남·여 산신님께서

굽어 살피사 젖을 태워주시고 수명장수하게 하시고 두루두루 살피어 많은 복을 내리소서"라고

수십번을 외며 절을 올린 후 물을 길렀다고 한다.
주술문을 외며 축원하는 것은 그 맥이 단절되었고, 이 샘의 물이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증명할 길이 없지만

지금도 여름철이 되면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경상도 쪽에서 온 관광객들이 짓샘의 물을 담아가고자 찾아온다고 한다.
짓샘의 정확한 위치는 용화전 안의 석조미륵좌대 앞의 마루바닥 밑이다.

마루바닥 덮개를 열어야만 짓샘의 모습이 드러난다.

전혀 샘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약2∼3미터 정도 깊이의 샘이 보인다.

물의 양은 많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마르지 않고, 비가 많이 올 때면 짓샘의 물도 늘어난다고 한다.

보광사에는 이 샘 외에도 마당에 샘이 또 있다.

최근에 짓샘의 전설을 듣고 보광사에 찾아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이 샘을 보지고 못하고

앞마당에 있는 우물을 보고 짓샘으로 오인했을 것이다.

이는 기존에 나와 있는 책들에 관련사진이 잘 못 실려 있기 때문으로 이 글을 통해서 바로 잡는다.
보광사에는 석조미륵불과 짓샘 외에 1974년에 세운 칠보탑(七寶塔)이 용화전 뜰 앞에 세워져 있다.



복바위와 노적봉

이충무공의 전술을 느낄 수 있는 곳 노적봉
유달산 정문격인 등구의 좌측변에 솟아있는 큰바위 봉우리이다.

목포시 대의동 2가 1의 120번지에 위치한 노적봉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고 있으며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께서는 적은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덜어 아군의 군량미로 위장함으로써 우리의 군사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겁을 먹은 왜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게 했다는 장군의 뛰어난 전술을 이야기한 것으로

진도의 강강술래, 영산강 횟사루, 울뚝목 쇠줄 등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다.


노적봉 다산목(多産木)

이 나무는 다산을 이루게 한다는 인근 주민들의 믿음의 대상으로

은밀하게 보존되어 외지인에게는 노출되지 않았으나

2000년 10월 새천년 시민의 종 종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외부로

드러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실제로 이 나무를 쳐다보면 아이를 가질수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으며 그 영향으로

인근지역은 유난히 출산율이 높았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기도하다.

관광객들 사이에는 여자나무(여인목)로 불려지고 있으나

오래전부터 다산목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며

수종은 팽나무로 150년이 넘은

어미나무의 뿌리에서 싹이 나와

성장하여 현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라고 안내판에 기록하고 있다.


시민종각 대통령 김대중(市民鐘閣 大統領 金大中)

시민종각 편액은 김대중 대통령 친필인듯 대통령 김대중이라고 적혀 있다.


시민종각(市民鐘閣)

시민의 종은 유달산 노적봉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각의 방향은 정남쪽으로 하는 것이 통례인데

환태평양시대를 주도해 나갈 목포시의 의지를 상징하는 의미

중국대륙을 향한 미래지향 종의 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종각의 현판은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서 유달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 

종을 지탱하는 상부에는 전통적인 양식에 따라 대나무 모양의 음관과

그것을 호위하는 용문양의 고리가 장식되어 있다.

종의 상대에는 8천만 겨례를 상징하는 무궁화가

하대에는 목포의 시화인 목련이 장식되어 시민화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이렇게 하여 먼 목포 유달산 한바퀴 둘러보고 산행기를 마무리 하며

목포시 홈페이지 시장에게 바란다에 이등바위의 안내글 전진을 정진으로 수정 요청

글을 올리며 산행기를 마무리 한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목포시등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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