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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도 이즈하라いずはら (日本 對馬島 厳原),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길을 따라서 대마도를 걷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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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도 이즈하라いずはら (日本 對馬島 厳原),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길을 따라서 대마도를 걷다

바다늑대FORCE 2019. 4. 3. 19:47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いずはら (日本 對馬島 厳原)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길을 따라서 대마도를 걷다

▲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つしま  いずはら)

▲ 여행일 : 2019년3월30일~31일
      산행후 이즈하라 ↔ 히타카츠시내 및 유적지 탐방


▲ 여행지 개요 :

쓰시마섬 일본어로는 対馬 츠시마라고 하며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일본 나가사키현의 섬이다

규수 본토 사가현 가라쓰 시 하도 곶 에서 북서쪽으로 82km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에 위치한 이키섬까지의 거리는 47.5km이고, 우리나라와의 거리는 약 49.5km이다.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이다. 섬 넓이는 약 700km²이며

섬의 인구는 2017년 기준으로 35,115명 이다.

농경지는 전면적의 3.3%이며, 섬전체 면적의 대부분인 80~90%가 산지이다.

면적은 총 695.9㎢로 제주도 면적의 약 38%, 거제도 면적의 2배 정도이다.

관광업이 번성하였고,  우리나라에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조선통신사

조선 통신사는 조선 시대에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에 파견한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이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 교린의 원칙에 따라 주변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다.

명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여 조공 책봉 질서를 형성하였고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동등한 위치에서 교역하는 교린 정책을 시행하였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이후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를 수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선에 외교 관계 회복을 요청하여

광해군 대에 기유약조를 체결(1609)하였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가 탐탁지 않았으나, 포로의 송환, 일본 정세 파악 등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의 통신사를 맞이하면서 막부의 국제적 지위를 다이묘와 주민에게 과시하였고

조선 통신사를 통해 명과 조선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

조선의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에는 많은 일본인이 나와 구경했으며

일본 지식인층은 통신사 일행의 글을 받기 위해 애썼다.


※ 대마도 정벌

대마도에 주로 거주한 일본의 해적단 ‘왜구’는 적게는 20~30척에서 많게는 200~300척의 대병을 이끌고

중국과 조선의 해안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당시 배 한 척의 승선 인원이 20명 정도였으므로, 300척이라면 총인원이 약 6,000명으로 일개 해적을 넘어서는 규모였다.

이들이 1년에 58회나 침입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 이들로부터 입은 피해는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건국 직후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등 회유책을 실시하였으나 상습적인 약탈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태조 때 왜구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계획했으나 국내 사정으로 중단되었고

대신 대마도주에게 쌀을 지급함으로써 이들의 수가 상당히 감소되는 듯했다.

하지만 세종 원년인 1419년, 경기만에 위치한 연평도에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하자 세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대마도 정벌에 앞서 일본과 외교 교섭을 벌여 조선의 군사행동이 합법적임을 강조하고

사행동에 따른 양국관계의 악화를 사전에 예방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왜구를 직접 제어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의 행동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가 이끄는 조선 원정군은 경상·전라·충청 3도 병선 227척과 1만 7천 285명의 군사로 대마도를 공격했다.

조선군은 6월 20일 대마도의 마메지우라에 병선을 정박시키고 수색작전을 전개하여 크고 작은 병선 129척을 노획했다.

그중 사용 가능한 병선 20척을 제외한 나머지 병선과 가옥 1939호를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왜구 114명을 사살하고 21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 세종은 항복한 왜구들을 앞세워 대마도주에게 조선에 복속할 것을 명했다.

대마도 도주 소 사다모리는 이에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빌고 통상을 간청해 왔다.

조선은 1426년 3개 항구를 개항하여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후 왜인들은 조선과의 합법적 교역을 통해 부족한 식량과 필요한 물품을 구함으로써 노략질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대마도 정벌은 조선시대에 행한 성공적인 해외원정이었다.

한편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측에 복종하며 한일 양국의 징검다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  대마도 관광지도


▲ 일본 대마도 가는길

진주Ic삼거리 →→→ 부산 신국제여객선 터미널 →→→ 대마도 히타카츠 여객선터미널

약 49km  대아고속해운(오션플라워) 1시간30분 소요


→→→→→2019년3월30일 토요일

일본 대마도 유명산 산행을 마치고 대마도의 시내중심지 이즈하라 탐방길에 나섰다

유명산 바로 아래 고려문 조선통신사가 들어 온길을 따라

역사를 생각하면서 길을 따라 가본다


고려문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옛성문인데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만든 문이라 하며

그래서 고려문으로 불렀다고 한다.

수백명의 조선통신사 일행이 이 문을 거쳐서 이즈하라 성내로 들어가는 상상을 잠시 해본다

일본에 파견된 사신에게 붙은 통신사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통신사라는 명칭만을 사용하지 않고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명나라는 동일한 사대국을 가진 동등 외교 관계의 국가로서 파견하는

외교사절단으로, 왜구의 단속 요청,대장경의 증정 등을 주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사절들 중에도 무로마치 막부의 새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사절들이 있었다.


주차금지 벌금

지나가는길에 아주 익숙한 문구가 있어 촬영해 보았다.

고려문 인근 공터라 아마도 우리나라 렌트카 여행자들이 주차를 들어 했나 보다

주차금지 벌금이란 문구가 아주 강력하게 느껴진다

일본은 경차 차량번호판이 노랑색이고

흰색은 중형차량이다 라고 생각하면 되고 차량 배기량 별로 번호판 색이 달라진다고 한다.


고려문앞 이왕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 안내표시판 

고려문 바로앞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 덕혜옹주(이덕혜 德惠翁主)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으며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에 걸렸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하다가, 1989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에 왕실에는 후궁 소생의 수많은 옹주들이 있었지만

정비 소생의 공주보다 서열이 낮은 신분의 한계 때문에 역사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다.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인물로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사도세자의 동생 화완옹주와

망국의 황제 고종의 말년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덕혜옹주를 들 수 있다.

고종에게는 일찍이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고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명성황후 민씨 소생의 순종 이척, 귀인 장씨 소생의 의친왕 이강, 황귀비 엄씨 소생의 영친왕 이은

복녕당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었다.

그 때문에 덕혜옹주는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애지중지 키워졌다.

덕혜옹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한국인들에게 조선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랄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으며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에 걸렸다.

몇 년 뒤 어머니 귀인 양씨의 죽음으로 덕혜옹주의 심리 상태는 벼랑 끝까지 몰려

정신분열증으로 비화되었지만 냉혹한 일제는 정략결혼을 통해 그녀를 더욱 비좁은 새장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 때문에 병세가 심화된 그녀는 딸과 생이별하고 사방이 가로막힌 정신병원에서 청춘을 흘려보내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했지만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그녀의 육신은

아득한 유년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파랑새처럼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한다.


조선통신사 비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으며 대마도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한국 관련 유적들은

조선통신사와 관련이 있는 장소들이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10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1510년 중종 5년 발생한 삼포왜란을 계기로 세종 이후 파견되던 일본과의 사절 왕래는 끊겼으나

선조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파견하게 된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과 역시 동인이었던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여 1590년 3월6일 출발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대립하여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591년2월21일(음력1월28일) 일본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내놓게 된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였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히데요시의 국서에는 이미 명나라를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대마도 이즈하라 가네이시 정원에 있으며

기념비 문구는

한자로 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 결혼기념비의 '이왕조'라는 문구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황실을 격하해 부른 용어인 만큼 일본측에 수정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과
비하가 아닌 가문과 가문의 결혼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존하고 있다 한다.

덕혜옹주의 삶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덕분에 더 많이 알려졌는데

조선 제 26대 왕 고종의 막내딸인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에 끌려가

1931년 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을 하고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한 뒤 1962년 귀국하게 되었다 한다.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실어증과 지병으로 힘겨운 삶을 살다가

198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베스트셀러 소설로 남아 있다.

이곳에 세워진 봉축기념비는 1931년 다케유키와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이며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는 국내에 알려진 것처럼 난폭하고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동경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였고

대마도지에 시를 기고하였으며 유화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결혼이 당시 한일관계에서 비롯된 강제 결혼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다.

이 결혼봉축비는 두 사람의 이혼으로 없앴다가 부산-대마도간 선박 취항이 시작되고 한국관광객이 늘어나자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기념비) 설명문

주소 : 長崎県対馬市厳原町今屋敷670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소 타케유키 백작과 결혼했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됐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정혜가 있었는데

이 무렵 덕혜옹주는 지병이 심해져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딸과 헤어져 많은 시간들을 우울 속에서 보내야 했다.

딸 정혜 역시 결혼 실패로 방황하다가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됐다.
1955년 이혼 후 우여곡절 끝에 1962년 귀국한 덕혜옹주는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했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으로 기구했던 덕혜옹주의 흔적을 잠시나마 되새겨 볼 수 있다.


이즈하라 하치만구 신사

대마도의 대표적인 팔번궁 신사는 삼한을 정벌한 신공황후를 모신 신사로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한 몸으로 출병 정벌에 나서 삼한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고려시대 중엽부터 대마도주에게 당관이라는 고려관직과

만호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주는등 대마도를 종속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고려말 고려 몽골 연합군의 대마도 일본정벌 및 끓임없는 일본내부의 사정(전국시대)으로

고려와 대마도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이후 대마도는

조산의 남해안과 중국연안을 침입하여 약탈을 일쌈는

왜구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수선사

이곳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는곳이며

조선 후기 학자로서 나라를 잃는 슬픔을 딛고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의 불의에 저항하다

이곳 대마도에 끌려와서 단식 하시다 돌아가신 애국지사 이시다.

지금은 출입구를 폐쇄해서 내부는 구경할수 가 없다

이유는 개인소유의 사찰에다 우리나라 탐방객들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폐쇄했다 하는데

진짜 이유인지는 알수가 없다.

수선사는 백제시대 법명스님이 창건했다는 사찰이며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서옥사하신후 시신을 수선사에 안치(1907년1월1일~4일)후

부산을 거쳐 정산에 안장 하셨다 한다.

※최익현(崔益鉉)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기남(奇男).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아버지는 대(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9세 때 김기현(金琦鉉)에게 유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때부터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공부했다.

1855년(철종 6)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어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이조정랑·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866년(고종 3)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후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해 10월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聚斂政策)의 혁파,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사대문(四大門) 문세(門稅)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대내정책을 비판했다.

이 상소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곧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양주 직곡(直谷)으로 내려가 학문에 힘썼다.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대신을 비롯한 관리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그를 극렬히 비난했으나 당시 친정(親政)을 생각하고 있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소문의 문구 가운데 지나치게 과격한 내용이 있어 삼사(三司)를 비롯한 대신들의 탄핵으로 국문(鞫問)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1875년 2월 풀려났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위정척사론)

그는 이 상소에서 첫째, 일본과의 강화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비(武備)를 갖추지 못하여 고식책으로 강화를 추진한다면 앞으로 적의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일본의 물화(物貨)는 모두가 요사기완(搖奢奇玩)으로서 우리나라의 유한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셋째, 일본을 왜(倭)라고 일컬었으나 실은 양적(洋賊)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일단 강화가 성립되면

금수와 같은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했다.

이 상소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1879년 풀려나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약탈·잔학행위를 일삼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해 6월 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가바오개혁이 단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친일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했으며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의 처단과 역적들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를 요구했다.

1895년 8월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보낸 순검(巡檢)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되어 있다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풀려나 향리로 내려갔다.

이어 고종에 의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을 회유하여 해산시키기 위한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8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2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여기서 그는 강렬한 화이관(華夷觀)과 양이주의(攘夷主義)의 입장에 서서 갑오개혁을 부정하고

구래의 봉건적 지배체제의 회복을 주장했으며,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을 추진하는 독립협회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라 칭하며 연호를 제정함은 종사(宗社)가 거의 멸망 지경에 이른 현시점에 있어서

명실(名實)이 일치하지 않는 헛된 일이라며 그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말에는 중추원의 설치를 건의한 자 및 박영효의 등용을 상소한 자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만민공동회가 열려 헌의6조(獻議六條)를 제출하는 등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자 독립협회류는 일체 혁파할 것이며

주모자를 모두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1900년 거주지를 충청도 정산으로 옮긴 후 홍천·지평·제천·안동·경주 등지를 여행하면서

친척과 벗들을 방문하고 강회를 여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2월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8월에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상경하여 자문에 응할 것을 요청하고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의 벼슬을 내렸다.

1905년 1월 고종을 면담하고 국세가 금일과 같이 위란(危亂)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까닭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복수심이 결여된 때문이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재택용(人才擇用)·취렴금지(聚斂禁止) 등 5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상소를 올려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다.

그의 반일활동을 계기로 김학진(金鶴鎭)·허위(許蔿) 등의 반일상소가 잇따르자

그해 3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포천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며칠 후 다시 상경하여 상소문을 작성했으나 재차 강제 송환되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전국에 걸쳐 반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포고팔도사민 布告八道士民〉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는 동시에 비통한 전도(前途)를 예시하고

오직 우리는 궐기투쟁해야 할 것과 을사5적을 토륙(討戮)할 것, 이들이 국왕을 압박하여 일본의 포로로 하려는 등의

흉악한 음모를 방지할 것, 결세(結稅) 상납을 거부하고 일본이 경영하는 철도를 타지 말고

군기(軍器)·총포(銃砲) 이외의 일본상품을 사지 말 것 등을 촉구했다.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전라북도 태인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고

113명의 지사들과 〈동맹록 同盟錄〉을 작성한 후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동참을 촉구했다.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창의구국(倡義救國)을 결의하고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했으며, 격문을 열읍(列邑)에 보내 호응을 촉구했다.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인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에서는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이 저지른 기만적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태인읍을 무혈점령하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했으며, 이튿날 정읍에 도착해 무기와 병력을 증강했다.

다시 순창으로 행군, 많은 주민과 이속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소총과 화약 등 무기를 수합했으며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의병의 수는 500명에 달했다.

이때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출동하자 이를 물리쳤다.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의병 수는 900명으로 증가했으며 소총 등의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력이 증강되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고종의 선유조칙을 전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날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진위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고석진(高石鎭) 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嚴原衛戍營)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으로 사절(死節)하기로 결심하고, 임병찬에게 구술(口述)로 유소(遺疏)를 전했다.

유소에서 그는 왕에게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국제관계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은 반드시 미구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단발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그해 11월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했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봉환되었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대마도 소방단(對馬島 消防团)

지나는길에 우리나라 소방서의 지역대 역활과 같은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소방지역대는 원거리 일선에 있는것으로 1일 근무2명이

소방차와 구급차를 주로 운용하고 있다

일본의 소방단은

소방 본부나 소방서와 마찬가지로 소방 조직 법에 따라 각각의 읍면에 설치되는

소방 기관 지역의 소방 방재 리더로서, 평상시와 비상시를 불문하고 그 지역에 밀착하고

주민의 안심과 안전을 지킨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또, 근년은 여성의 소방단 참여 여부도 증가하고 있어

특히 혼자 사는 고령자 집에 방화 방문, 응급 처치 보급 지도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한다.


이즈하라 마을 항구

소형선박뒤에는 선외기가 부착 되어 있는데

동일 마력의 선외기가 아닌 큰마력 선외기와 작은마력 선외기가 2기가 부탁 되어 있었다

아마도 먼바다를 나갈때 큰 선외기 사용하고

연안에 왔을땐 작은 선외기를 사용하는가 보다

우리나라에선 동일기종 마력의 선외기를 2개 부착 해서 사용하는것과 다르다.


쯔리노이에 민숙(民宿)

우리 일행은 여기서 1박을 하였다 물론 저녁도 먹었다

저녁은 꽁치 1인당 한마리 가리비 조개구이 2개 문어구이 4인기준 한접시

돼지삽겹살 4인기준 한접시  구운 삼각밥 2개가 회식겸 먹었다

일본은 자판기 문화하 할정도로 자판기가 많다

거리마다 아이스크림도 자판기로 판매하고 있었다.


일본 민박집 소화기

소화기는 우리나라와 별 차이는 없으나 먼지 앉지 않게 비닐커버가 있는게 특징이다

우리는 2층에서 3인1실로 사용하였다

난방은 전기장판 그리고 가정용 냉난방기이며 전기는 100볼트이다.

수건 담은 바구니를 보니

우리나라 관광객이 두고간 수건을 세탁해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만제키바시(만관교万關橋) 러일전쟁때 만든 운하

만세키코시(万關越)에 아소만과 미우라만을 연결하기위하여 파낸 운하에

1900년에 동도와 서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세운것이 만세키바시(万關橋)이다

대한해협과 대마도해협을 연결하는 중요한 항로 역활도 한다.

한글 안내문을 보면

만제키바시 다리는 메이지 33년 당시 해군의 함선이 항해할수 있도록

파낸 해협에 건설된 다리이다

쓰시마의 상도와 하도를 연결하는 교통 요소이며 여러가지 표정을 보여주는 조류의 조망 포인트로

인기가 있습니다


대마도해협과 연결된 미우라만(三浦灣)

만제키세토를 건설한 이유는 만주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 간에 벌인 러일전쟁(1904. 2.~1905. 9.) 때문이었다.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대장이 이끈 일본 해군은 로제스트 벤스키 중장이 이끈 러시아 발틱함대를

쓰시마 해협에서 괴멸시키므로서 러일전쟁의 승부를 사실상 가린 유명한 해전이 있었다.

이 만제키바시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승리의 다리라고 하는데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비운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일본 해군의 승리는 일본 외교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발트해 군항에서 극동을 향해 출항한 것은 전년도인 19041015일이었다.

38척의 함대가 극동의 블라디보스톡까지 가려면 직항로인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것(1개월 반 소요)인데

영일동맹으로 일본의 동맹국이던 영국이 수에즈운하는 물론 영국의 지배하에 놓인 항구에는 기항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발틱 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7개월 소요) 지구를 반 바퀴나 도는 대원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피로 누적과 석탄 등 물자의 고갈은 처음부터 무리한 싸움이었다.

결국 러시아는 전함 6척을 포함하여 총 21척이 격침되었고, 5,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로제스트 벤스키 사령관을 포함한 약 6,1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은 수뢰정 3척의 손실과 12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전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을 전쟁의 신, 군신(軍神)으로 여기며

동양의 넬슨이라 칭하고 있으나 정작 도고 본인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장군이었다고 한다.

러일전쟁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이었다.

아사히 신문기자가 도고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빛나는 업적이었다."고 하자

도고는 "나는 넬슨 제독에 비견될 수는 있겠으나 이순신 장군에는 비교하지 말라.

이순신 장군은 국가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이끌어 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인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여호도(女護島 메고시마)

한글 안내판을 보면

해군의 함대를 통과시키기 위해 판 만제키세토에서 바위야사토가 대량으로 버려져

바다를 매운 결과 이 집락이 생겼습니다

지금도 이 지역의 지하에 만제키의 토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와타즈미 신사

와타즈미 신사는 5개의 문 중에서 2개가 바닷속에 세워져 있어

밀물과 썰물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한글 안내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와타즈미 신사는 히코호호데 미노미코토와 토요타마히메 노미코토를 기리는 해궁으로

바다신 신사 중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신사로 예로부터 용궁전설이 전해 집니다

본전은 정면 5개의 문중 2개는 바다속에 세워져  있어 밀물과 썰물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여 먼 옛날 신화시대를 연상할 수 있는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 집니다.


와타즈미 신사

와타즈미 신사(和多都美神社)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県) 쓰시마시(対馬市)에 있는 신사(神社)이다.

전설에는 해신(海神) 도요타마히코노 미코토(豊玉彦尊)가 이 땅에 궁전을 짓고

와다쓰미 신사가 진수하는 땅을 「오토히메」(夫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신사에서 모시는 히코호호데미노 미코토(남신)와 도요타마히메노 미코토(여신)는 부부신이다.

헤이안 시대의 문헌인 《엔기시키》(延喜式)의 「신명장」(神名帳)에서는 쓰시마노시마 가미아가타 군(對馬嶋上縣郡)

와다쓰미 신사 명신대(和多都美神社 名神大)로 되어 있다.


와타즈미 신사

삼나무숲이 울창하다 여름이면 정말 시원하게 지낼수 있는곳일 것이다

일본에는 신사가 약8만5천개 정도 있다고 한다

그 신사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마한 진한 변한 상고구려 백제 신라 고구려 가야 고려

조선에서 건너가 일가를 이룬 씨족의 창시자로 일본전역의 약90%가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조상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와타즈미 신사

신사에 관한 재미있는것은 와타즈미 신사는 일본 초대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의

할머니가 되는 도요타마히메 노미코토(豊玉姬命)를 바다의 신을 모시고 있는 용왕신사다

신사와 도리이의 방향이 가야 또는 신라를 향하여 세워져 있다.

직선으로 선을 그어보면 통영이나 거제도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이유로 일본인의 뿌리가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도해궁(渡海宮)으로 도래설 흔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와타즈미 신사 입구

와타즈미 신사 전승을 보면

도요타마히코노 미코토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호타카미노 미코토(穂高見尊)

딸은 도요타마히메노 미코토와 다마요리히메노 미코토(玉依姫命)였다.

어느 날 히코호호데미노 미코토가 잃어버린 낚싯바늘을 찾으러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 궁에서 3년을 머물렀고

도요타마히메를 아내로 맞았다고 한다.

사리 때는 경내에 사전(社殿) 가까이까지 밀물이 차오른다.

이 광경은 마치 용궁(龍宮)을 연상케 하며, 도요타마히메와 히코호호데미의 만남에서 유래한 「다마 우물(玉の井)」이나

만주뢰(満珠瀬) ・ 간주뢰(干珠瀬), 기량혜비수(磯良恵比須) 같은 고신타이시로(御神体石) 등이 있다.

또한 본전 옆의 우미노미야 산(海宮山) 원시림 속으로 조금만 걸어들어가면 반석이 하나 있는데 그 반석 앞에 있는 단이 다마요리히메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곳이다. 다만 다마요리히메는 ”인위(仁位)의 고산(高山)”에 묻혔다고 신사에서는 전해지고 있으며

해당 반석 앞의 단은 과거 오래된 장례용 제단으로 쓰였던 것이 일본 패전 뒤의 혼란기에

신사를 모셔야 할 사가(社家)가 일시 단절되는 바람에 「다마요리히메의 무덤」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다마요리히메를 인위의 고산에 묻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낙교기문》(楽郊紀聞)에 와다쓰미 신사의 구지(宮司)가

그렇게 전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소만 가는길에

쓰시마섬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水路]에 의해 상·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경작을 했다 하며

특히 대마도에는 멧돼지가 많아 에도시대에 멧돼지 퇴치를 담당하는 번사(藩使)를 두기도 하였다고 잔한다.


에보시다케 전망대

아소만을 가장 잘볼수 있는 전망대라고 한다

아마 여름에 말벌집이 많은가 보다 한글로 말벌조심이란 문구가 확 들어온다.

대마도의 섬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만제키바시 다리를 건너

막다른 고개에 에보다시케 주차장에서 내려 산길을 오르면 아소만을 조망할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여기서 대마도 107개 섬중 103개섬을 볼수 있다고 한다.


아소만의 작은섬들의 풍경

전망대에는 우리나라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다

물방울 처럼 아소만의 작은섬들이 한눈에 조망 되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풍경사진만 촬영하고서 전망대에서 곧장 내려 왔다

아소만 전망대로 가는 도로는 대형버스가 교차 하기엔 작은도로이다

대형버스들은 서로 대기 하면서 지나갈때 까지 잘 기다려 준다

도로 확장을 할려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듯 하다.


아소만의 작은섬들의 풍경

여기서 107개 섬중 103개섬을 볼수 있다는데 일일히 손으로 셀수는 없지만

협곡에서 작은 섬들이 우리나라 남해안 처럼 아름답다.

우리 일행들은 주차장에 푸드트럭에서 붕어빵을 구매하여 먹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붕어빵은 찹쌀로 먼저 쪄서 붕어틀에서 2차로 구어내어

찹쌀맛이 더해 허기진 배를 채우기는 알맞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슈시강(丹志川) 단풍산책길

가미쓰시마 북부의 슈시강을 따라 조성된 이곳은 나가사키현 내에서도 단풍이 가장 아름답고 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슈시삼림공원(舟志森林公園)으로도 지정되어 있어 산책로나 휴게시설,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놀이시설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어 여유롭게 쓰시마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을이 되면 단풍과 전나무, 스기나무 들의 울창한 숲이 멋진 조화를 이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매년 11월 초중순에는 ‘슈시단풍축제(舟志もみじ祭り)’가 개최되어

지역의 특산품을 판매하거나 전통공연 등의 이벤트가 다채롭게 진행된다.      

또한 이팝나무 개화때에는

이팝나무 자생지(ひとつばたご自生地) 1928년, 일찌감치 국가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쓰시마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본토에는 기소가와강 유역 등에 수십그루의 나무들이 자생하고 있지만

이렇게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곳 쓰시마의 와니우라(鰐浦)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곳 군락에는 약 3천여 그루의 이팝나무가 자생하고 있고, 5월 초순부터 개화시기가 되면

군락을 둘러 싼 산 전체가 새하얀 눈이 내린 것과 같은 풍경을 연출하여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전망대와 인접해 있어 연계한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개화기에는 지역축제가 성대히 열리고 외지에서도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슈시강(丹志川) 단풍산책길

쓰시마섬은의 역사를 보면 삼국시대초에는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 갔다

6세기 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국주( 對馬島主)가 일본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 하였으며 전쟁시에는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289년(고려 창왕 2년)에 박위가

쓰시마를 토벌 하였다.


조선역관난지(朝鮮譯官殉難之碑)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 113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조선역관난지(朝鮮譯官殉難之碑)

와니우라 앞 바다에서 풍랑으로 죽음을 당한 한천석 일행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 학자(황수영 박사, 정영호 박사 등)들과 대마도 관계자들이 힘을 합쳐 세운 비석으로

비신을 받치고 있는 돌들이 총112개이다. 

초석을 112개로 한 이유는 역관사 일행 104명이 조난당할 때

배안에는 8명의 대마도 사람 (대마도 관리 4명과 뱃길 인도자 4명)이 타고 있다가

함께 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익사자 명단이 발견되어 새로이 그 비 앞에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역관난지(朝鮮譯官殉難之碑)

역관사는 대마도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약 100여명씩 파견하는 조선의 사절단으로

숙종 29년인 1703년 음력 2월 5일에 한천석을 대표로하는 역관사 일행 104명은

대마도 도주 종의진의 죽음을 애도하고 새로 번주가 된 종의방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마도에 파견되었다가 풍랑때문에 이곳에서 좌초되어 전원이 죽었다고 한다. 

한국 전망대

한국전망대는 우리나라 건축자재와 건축기술로 만들었다고 하며

쓰시마 한국전망대(対馬 韓國展望臺)는 쓰시마 의 관광명소이다.

맑은 날에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전지역과 경상남도 거제시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다고 하며

특이하게도 이 관광지는 일본에서, 주일본국대한민국대사관과 함께

일본의 한국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기도 한다.


한국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망

우니지마에 있는 일본 해상자위대 레이다 기지

우리나라 코앞에 해상 레이다 기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 해군 움직임을 감시하겠다는건가

우리나라는 제주도에 해군기지 만든다고 해도

평화의 섬 어쩌구 하면서 엄청 반대 시위가 있었다

경제적 힘과 군사적 힘이 없다면 평화라는게 있을지 궁금하다

아름다운섬 제주도 해안에는 일본이 만든 해안포기지가 암반을 굴착해 만들어 흉물스럽게 보였다

평화는 어떡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히타카츠 여객선터미널

1박2일 산행과 대마도를 둘러보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야 할 배가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대마도를 둘러본 느낌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마도는 우리꺼 같은데 라는 생각 뿐이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 대마도관광공사 및 여행사등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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