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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늑대 FORCE
대구 앞산(大邱 前山).성불산(成佛山)이라 불렀던 천자남면(天子南面)의 앞산(前山) 능선을 비오는날 걸어 보다 본문
대구 앞산(大邱 前山).성불산(成佛山)이라 불렀던 천자남면(天子南面)의 앞산(前山) 능선을 비오는날 걸어 보다
바다늑대FORCE 2024. 10. 6. 21:23
대구 앞산(大邱 前山).
성불산(成佛山)이라 불렀던 천자남면(天子南面)의 앞산(前山) 능선을 비오는날 걸어 보다.
▲ 대구 앞산(大邱 前山)
높이 : 658.7m
위치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걸쳐 있는 산
▲ 대구 앞산(大邱 前山)나의 산행일 :
2024년10월06일 일요일 날씨 흐린후 비
▲ 대구 앞산(大邱 前山)나의 산행코스 :
안지랑골 주차장 →앞산전망대1.5km안내표지목 →안일사 →통일기원돌탑 →왕굴
→대덕산갈림길 →정상 →능원정쉼터 → 대덕산성 →앞산전망대 →안일사 →안지랑골주차장
5.69km 2시간49분 소요(트랭글 앱 기준)
▲ 대구 앞산(大邱 前山)개요 :
원래는 성불산이라고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형도에서 '전산(前山)'이라고 표기되었던 기록이 있다.
사실 대구 시가지 남쪽에 있는데 앞산이라 한 이유는 전통적으로 남향으로 집을 짓기 때문에
집 앞에 보이는 산이라 하여 앞산이라 한 것이다. 서울의 남산도 앞산이라 불렸던 이유와 같다.
오마이뉴스같은 언론 에서는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 의도'라며 앞산을 성불산으로 되돌려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강산의 이름이 바뀌는 건 흔한 일이고,
그저 시대에 따라 보통명사로 앞산(남산)이라 하던 것이 정착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지금도 대덕산, 비슬산 등의 다양한 (봉우리) 명칭으로 불리지만,
대구시민 대부분은 간단하게 전체 산의 이름으로 앞산을 선호하듯이.남쪽에 있는 산을 앞산이라는 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천자남면(天子南面)이라 하여 방위에서 남쪽이 앞, 북쪽이 뒤, 동쪽이 왼쪽, 서쪽이 오른쪽이다.
좌청룡은 동쪽의 청룡이고, 전라우수영은 전라도의 서쪽 지역이듯. 이런 방위 설정이
조선시대의 한양 기준으로 알려져있지만 그건 아니고, 한양 북쪽도 마찬가지로
동쪽이 왼쪽, 남쪽이 앞쪽으로 전국 어디나 같다.
때문에 대구 앞산은 한자로 전산(前山)이라 할수도 있지만 남산(南山)이라 해도 그 의미는 같다.
대구의 앞산, 서울의 남산 두 산 모두 옛날 군사정권 시절 때 산 기슭에 중앙정보부 또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있었고
지금도 주한미군의 군부대가 있다는 점,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터라는 점, 전망대에 연인들이 자물쇠를 채운 점,
각 방송국의 통합 송신탑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산을 관통하는 터널까지. 참고로 TBC의 경우 예전에는 케이블카 승강장 위에 중계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되고 KBS와 함께 철탑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 대구 앞산(大邱 前山)산행지도
▲ 대구 앞산(大邱 前山)
나의 트랭글(TRANGGLE) 궤적도(軌跡圖)
▲ 대구 앞산(大邱 前山)
나의 Relive궤적도(軌跡圖)
→→→→→→2024년 10월06일 일요일 대한민국(大韓民國) 구석구석 산(山)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오늘은 대구에 있는 앞산이다 우리지역의 월아산 같은 지역시민이 많이 찾는곳 하나이기 때문이다
해병대 동기 자녀 결혼식에 참석후 산행지 들머리로 가서 환복 (換服)후 산행 하려고 하였으나
공영주차장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도로변까지 주차차량으로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어
할수 없이 되돌아와서 도로주변 주차공간을 찾아야 했다
도로갓길에 주차차량이 하나 빠진 자리에 근근히 주차를 하고서 환복(換服)을 하는데 차 유리문엔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우산도 챙기고 등산복으로 환복(換服)후 들머리로 걸었다
안지랑골 들머리
여기서 도로를 따라 쭉 가면 안정사 사찰이 나오고 걷다가 좌측에 있는 산길을 이용해서 산행 들머리로 하였다
앞산은 대덕산, 비파산과 연결되며 비슬산까지 종주를 할 수 있으며
앞산 자체가 비슬산의 여러 봉우리들 중 하나라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앞산에 있는 사찰하나는 비슬산 신광사라고 되어 있으며
비슬산에서 더 나아가 능선의 끝인 부곡하와이가 있는 덕암산까지 종주도 가능하다고 한다.
앞산 북부의 앞산 순환로와 앞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앞산터널이 놓여 있으며
앞산케이블카라는 이름으로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좌측 들머리
아스콘포장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좌측에 앞산전망대란 안내표지가 있는데 그 쪽 산길을 본격적인 들머리로 삼았다
앞산이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몸소 느끼게 하는게 뺴곡한 주차장 도로변 갓길에 주차된 차량 그리고 산길에 가족끼리 연인끼리
아니면 나처럼 혼산하는 시민들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지금도 산길을 걷고 있었다.
앞산 안지랑골 주변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구시의 부자들이 거주하는 부촌이었다고 하며
90년대 중반 이후 부자들이 수성구 쪽으로 넘어가고 슬럼화되다가 2000년대 이후
그 노후된 주택들이 카페거리로 다시 태어나서 데이트 코스 등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안지랑골 동네에 카페거리가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도 옛날 부촌은 마당이 넓은데다 집집마다 주차장을 갖춘
중층 단독주택이 몰려있던 지역이라 카페로 바꾸기 수월했기 때문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초입 산길
빗방울 뚝뚝 떨어지는 산길이 촉촉히 젖어 먼지도 없고 초목의 향기가 시원하게 코끝을 노크한다
많은 시민들이 운동삼아 힐링삼아 오르는 앞산이며 안지랑골 커피숖도 많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도 좋을듯 하다
앞산(658.7m)은 대구 남구 대명동에 위치한 산으로 본래 이름은 성불산이라 하며
앞산공원(1971년)으로 고시되어 있다고 하며 앞산 공원 내에 낙동강승전기념관, 충혼탑, 체육시설, 시비, 동상, 청소년시설, 방송송신시설, 사찰 등이 있고 대구 서부정류장 옆 관문시장 앞에서 남구1 시내버스를 타면 앞산공원이 종점이라고 한다.
앞산전망대1.5km안내표지목
안지랑골에서 1km지점인데 누구나가 쉽게 앞산에 오를수 있는 산길 같고
우리지역 월아산 처럼 운동과 힐링이 이루어지는 산길이며 앞산에 오를 동안도 많은 시민들을 만날수 있었다
앞산에는 앞산 자락길이 있는데 자락길은 고산골에서 달비골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기존의 등산로와는 달리 앞산순환도로에서 일정높이의 이격거리를 두고 등고선을 따라 산자락부에
기존의 산책로와 오솔길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된 길이라고 한다.겨
앞산 산길
초록으로 물들린 앞산 산길이며 나무잎에 빗방울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좋기만 하다
앞산 자락길은 고산골에서 출발하면 메타세콰이어길을 지나 과거 앞산의 흔적을 찾을수 있는
용두토성, 공룡발자국 및 지질자원(연흔·건열)을 볼 수 있다.
용두토성은 머리띠를 맨 것과 같은 토성으로 원삼국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공룡발자국 화석은 약 1억만년전 중생대 백악기의 것으로 그 당시 앞산일대는 거대한 호수로
초식공룡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등 아이들의 산 교육장소로서 좋으며
특히 봄철에 큰골 및 고산골 맨발산책로 주변의 개나리와 벚나무가 꽃을 피울 때면
주변 숲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만끽할 수 있다고 홍보글에 있는것을 옮겨 적어본다.
안일사(安逸寺)방향 표지목
앞산전망대는 하산길 코스로 하고 먼저 안일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앞산 자락길을 걷다보면 고려태조 왕건의 유래와 관련 있는 전통사찰을 볼 수 있는데
신라 경애왕 3년 926년에 영조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왕건이 후백제 견훤에게 패하여 탈출하다가 3일간 숨어가 지내다 갔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은적사 및 신라 경명왕 5년 921년에 영조가 창건한 사찰로 왕건이 후백체 견훤에 패하여 도망친 뒤
이곳에서 군사를 추슬러 쉬어 갔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임휴사 라는 사찰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앞산 산정을 오르기 위하여 먼저 안일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걸었다
안일사(安逸寺)
안일사 사문(寺門)의 편액에는 한글로 안일사라고 걸여 있고 편액에는 소원성취기도도량이라 걸여 있었다
산에오르면 사찰이 있고 사찰에 가면 산이 있듯이 나 역시 그냥 지나지 않고 사문으로 들어 섰다
안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며
927년(경순왕 1)에 영조(靈照)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이곳에서 편안하게 머물렀기 때문에
안일암이라고 하였고 하며 지금도 절 위 500m 지점에는 왕건이 머물렀던 굴이 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절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안일사 대웅전
안일사는 1915년 음력 1월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 등 13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을 서약하고,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중앙총부를 조직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뒤에는 상해임시정부를 돕기 위하여 군자금
조달운동이 벌어지는 등 일제강점기 하에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1932년에는 경송(慶松)이 중창하였고, 1960년 이후 주지 철인(哲印)이 중건하였다고 하고.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요사채 등이 있는데, 대웅전은 2000년에 새로 지었다.
산신각에는 산신도·독성도·용왕도를 봉안하고 있다. 사찰 앞에는 약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왕굴방향 산길
돌계단이 차곡차곡 하늘방향으로 뻗어 있는듯 보이고 산길옆에는 수국이 가득히 심어져 있었다
오늘은 일기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에 대구시내의 도심 조망은 넓게 볼수 없을듯 하다 우중산행의 특징은
빗방울로 인하여 주변 초목들이 깨끗하고 맑게 보이는듯 하며 빗물에 뭍은 초목향기가 더 좋다
앞산 자락길에는 덩굴식물, 작은키나무, 큰키나무들과 함께 동행하는데 국수나무,
좀깨잎나무,쥐똥나무,광대싸리,생강나무,덜꿩나무,가막 살나무,분꽃나무,사위질빵,찔레,인동덩굴,
소나무,단풍나무,참나무,느티나무 등 앞산자락길 주변 숲에는 다양한 수종이 살고 있어
숲속 교육의 장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통일기원 돌탑
마이산 돌탑처럼 사람이 일리리 쌓았다고 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는걸 느낄수가 있었다
안내글을 보면 이돌탑은 (이름삭제됨 1935출생)씨가 1970~2003년 동안 조국의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쌓았다
돌탑의 돌들은 인근 애추(taius,너덜지대)에서 가져온 것이다
규모는 높이23m 둘레75m트럭 528대분의 돌이 사용되었으며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광역시 남구청
통일기원 돌탑
통일기원탑 옆으로 왕굴과 산정가는 산길이 연결 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여뀌 야생화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다
앞산에 있는 시민공원이라고 하며 이 곳은 두류공원, 달성공원, 망우공원과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공원이라고 한다.
대구시안에 앞산이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매우 좋아서, 근처에 있는 학교들은 소풍장소로 애용하기도 하며
특히 남구에 살면 초ㆍ중ㆍ고 소풍 모두 앞산공원으로 간다고 하며 봉덕동에 산다면 걸어서 가기도 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시설로는 심신수련장, 케이블카 등이 있으며, 길이 잘 정비되어 있기에 산책하기 좋아서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찾아오는 시민들이 많다고 하며 특히 두류공원 옆 이월드정상에 있는
83타워와 함께 대구 시가지를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라고 한다.
통일기원탑이 왜 이 크고 아름다운 돌탑이 냉전의 상징인지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이 돌탑은 통일기원탑으로 불리고, 이 돌탑에는 하나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2008년에 SBS의 순간포착 세상의 이런일이에도 나왔다.
이 탑의 주인공은 2008년 당시 73세의 김종환 할아버지로,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할아버지가 이때 당시를 기준으로 무려
38년간 매일 밤 10시에 서구 비산동 자택을 나와 이곳에 와서 아무런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밤새도록 탑을 쌓은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에서인데, 10000일동안 돌탑을 쌓으면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꿈속에서의 계시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뀌꽃
통일기원 돌탑 주변에는 여뀌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여뀌는 습지에 잘 자라는데 아마도 이지역은 습기가 많을듯 싶다
여뀌는 잎과 줄기에서 즙을 내어 고기잡이에 사용하고, 어린순은 식용한다고 하며.
全草(전초)는 水蓼(수료), 뿌리는 水蓼根(수료근), 과실은 蓼實(요실)이라 하며 약용한다.
水蓼(수료)는 개화기에 채취하여 햇볕에 말린다 성분은 전초에는 辛辣(신랄)한 精油(정유)가 0.07-0.13%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약효는: 化濕(화습), 行滯(행체), 祛風(거풍), 消腫(소종)의 효능이 있다고 하며
사세복통, 吐瀉轉筋(토사전근), 水樣性 下痢(수양성 하리), 이질, 류마티즘痛(통), 각기, 癰腫(옹종), 疥癬(개선),
타박상을 치료한다고 한다 용법/용량은 15-30g(신선한 것은 30-60g)을 달여 복용하거나 생즙을 내어 복용한다고 하며
외용은 짓찧어 환부에 붙이거나 煎液(전액)으로 씻는다고 한다.
왕굴
왕굴의 유래 안내표지에 있는 글이 옮겨보면 다름과 같다
왕굴의 유래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공산전투(927년)에서 대패하여 죽을 위기에 빠졌을 때
신숭겸 장군의 지략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피신한 적이 있었다.
반야월을 거쳐 이곳 비슬산(앞산)으로 피신하여 인근의 은적사에서 3일 동안 머물다가 이 동굴 속에 숨어 있을 때였다.
왕건을 쫓는 견훤의 군사들이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운해(雲海)가 가득하고 동굴 입구에는 거미줄이 쳐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깊지 않은 동굴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견훤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위기를 무사히 넘긴 왕건은 훗날 후삼국을 통일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왕이 머물렀던 동굴이라고 하여 왕굴(王)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대구광역시앞산공원관리사무소
왕굴내부
왕굴까지는 제법 가파르지만 크다란 암봉아래에 자역적인 굴이 왕굴이며 내부도 제법 넓은데 누군가가 촛불이 켜 놓았다
석간수가 떨어져 물을 먹을수 있는 샘이 있지만 물을 먹기에는 좀 그렇다
앞산이 있는 남구는 대구의 중심에서 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구라 일컫는다고 하며
남구를 중심으로 동으로 수성구, 서로 서구와 달서구, 북으로 중구에 감싸져 있다.
이들 주변의 지역과 합쳐지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지금의 남구로 형성되었다고 하며
대덕산 해발 750m:일명 앞산의 대덕산성을 비롯한 많은 유적과 한 공직자의 뜻있는 업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신천의 유래를 지니며 남구는 대명동, 봉덕동, 이천동의 3개동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 3개동의 자연부락에는 그 지명에 담긴 유래담이 전해지고 있다.
남구는 많은 유적과 유물 그리고 아름다운 민속 ․ 설화 ․ 민요도 다른 지역에 비해 풍부하다고 한다.
왕굴
왕굴내부에서 시내방향으로 촬영을 해보았는데 앉아서 수리수 있는 벤취의자가 있고
초록색의 참나무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듯 보았다
현재의 남구지역은 신라시대에는 대구지역의 중심역할을 했던 수성군(壽城郡)에 속했으며, 대구현은 수성군의 속현이었다.
고려 현종 때부터는 수성군이 동경유수부(東京留守府:경주) 관할하의 수성현(壽城縣)으로 되었고,
고려 말에 이어 조선 초에 대구지역이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대구현(大丘縣)에서 대구군(大丘郡)으로
그리고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하였는데 대구군, 대구도호부에 예속된 수성현의 하수서면(下守西面)지역이었다.
1910년경에는 하수서면이 상수서면에 합쳐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심인 대구부(大邱府)와 주변지역을
분리하여 달성군(達城郡)을 신설하였는데 이 때 남구지역은 달성군 수성면(壽城面)에 속했다.
1917년 수성면의 봉덕동과 대명동의 일부가 대구부의 대봉동으로 편입되었고,
1938년 대구부역 확장에 따라 달성군 수성면의 봉덕동과 대명동 전부가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대구부가 대구시(大邱市)가 되고, 1951년 대구시 남부출장소(南部出張所)가 신설되어
1963년 1월에는 대구시 남구(南區)로 승격되어 구제(區制)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대구를 중ㆍ동ㆍ서ㆍ남ㆍ북의 위치에 따라 중구ㆍ동구ㆍ서구ㆍ남구ㆍ북구라고 명명하였는데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구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대구앞산 왕굴전망대
대구시내가 빗방울 떨어지는 지금 구름속에 대구의 시가지가 발아래 펼쳐진다
대구 남구 대명동이 빌딩숲을 이루고 있는 풍경이며 1980년 4월 남산동과 대봉동 일부가 중구에 편입되었으며,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대구직할시(大邱直轄市)로 승격되면서 대구직할시 남구로 되고,
달성군 월배읍 일원이 남구에 편입되었다고 하며. 1988년 1월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월배지역은
달서구가 신설되면서 다시 달서구로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부터는 자치구제가 실시되었고, 1995년 1월 1일부터 대구직할시가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로 명칭이 변경됨에 따라 대구광역시 남구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구의 행정동으로는 대명 1동, 대명2동, 대명 3동, 대명4, 5, 6동, 대명 9, 10, 11동으로,
봉덕 1, 2, 3동, 이천동으로 구분되어 있고, 법정동으로는 대명동, 봉덕동, 이천동으로 구분되어 있다.
대구 대명동의 전경
앞산아래 펼쳐진 대구광역시의 도심풍경이 비오는날 모습은 한층더 아름답게 보이지만 시야가 멀리까지는 가지 않았다
대명동(大明洞)의 명칭 유래는 임진왜란과 정묘재란 때 조선에 원병 온 명나라 두사충(杜師忠) 장군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정묘재란이 끝난 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는데 처음에는 경상감영 자리에 살다가
경상감영이 이곳에 오자 그 자리를 돌려주고 현재 계산동 자리에 살다가 말년에는 최정산 아래로 자리를 옮겨 살면서
수만리 떨어진 고국 명나라에 두고 온 처자와 고국을 그리는 뜻에서 동구(洞口)에 대명단(大明壇)이라는 단을 세워
아침 저녁, 북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
대명단(大明壇)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대명골이라 하였으며 이 대명골이라는 지명에서 지금의 대명동이 되었다고 한다.
대명동의 연혁을 보면, 1910년 10월 1일 대구부 상수서면 지역으로 ‘대명골’이라 불렀다.
1970년 7월 1일 대명 1~8동으로 분동이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대명 1동을 1,9,10동으로 분동하였으며
1979년 1월 1일 대명 1동은 1. 11동으로 분동되었다.
1980년 4월 11일에 남산동 전부, 대봉1동, 대봉3동 일부 및 대명4.6동을 중구에 편입, 대봉3동 일부를
이천1동으로 신설, 대봉2동을 이천2동으로, 대명11동을 대명4동으로, 대명10동을 대명6동으로 각각 개칭하였다고 한다.
조난위치표지목
앞산 산길은 고도가 높아지면서 이렇게 좁다란 산길도 나오고 참나무 소나무가 있는 혼합림이다
조난위치표지목은 지자체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고 대구 앞산도 주변환경과 맞게 설치한듯 보였다
앞산이 위치한 대명골은 대명 5동의 자연마을이며 대덕산 아래 제일 크고 맑은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명칭의 유래는 임진왜란 시 조선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의 장수 두사충(杜師忠)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두사충(柱師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조선을 도우러 왔다.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작전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조선군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도
조선군과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수였으며 그의 활동과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당시 수군을 총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친분이 두터웠다.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도독과 함께 다시 우리나라로 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자 명장수가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 번씩이나 나와 도와주니
감격하여 두사충(柱師忠)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으로 표했다.
그는 왜란이 끝난 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귀화했는데 조정에서는 그에게 땅을 주어 살게 하였다.
그러나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항상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였다.
이에 그는 땅을 모두 내어놓고 최정산(最頂山, 현재의 대덕산, 앞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골’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산정으로가는 데크계단
산길을 걷다보면 이렇게 데크계단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나무가 썩어가면 나무를 교체해야 하는 관리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어떤 곳에는 예전의 철계단을 다시 되돌아가는 지자체도 있다
비오는날 하늘높이 파란하늘이 아닌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듯 보였다 가는골․ 세골은
가는골은 대명 9동의 자연마을이며 지금의 무당골(해방 후 무당들이 많이 모여들어서)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안지랑이’, ‘물탕 위’를 일컫는다. 가느다란 골짜기란 뜻으로 ‘세골’ 혹은 ‘가는골’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앞산 능선
구름이 몰려오고 빗방울이 나무잎에 부딪쳐 토닥토닥 소리를 내며 향긋한 향기를 뿜어 내는듯 하다
앞산이 위치한 남산갈림이란 마을은 현재의 성당시장주변의 마을이름으로 성당시장이 생기기 전에는
그 자리가 황색못이었으며 못 주변의 마을 이름을 "남산 갈림" 이라 불렀다고 한다.
못을 중심으로 남쪽은 비스듬한 언덕으로 공동묘지였고, 서쪽 편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었다.
50년 전에는 주택이 도로(국도)주변에 10호 정도 있었으며
대명동, 성당동, 두류동에 있는 주민들이 와서 농사를 지었는데 자작농, 소작농이 반반쯤 되었다고 한다.
부근에 공동묘지가 있어 영구차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울퉁불퉁한 길이 나 있었고,
사람들은 논둑길로 많이 걸어 다녔다고 하며 못이 매몰되자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점차 주택지가 변해
성당동으로 되었다가 행정구획 변경으로 대명 11동(72년)으로 되었으며, 다시 대명 4동(76년)으로 바뀌어 졌다고 한다.
대구 남산 야생화(구절초)
시월이면 어딜 산에가던 구절초나 쭉부쟁이를 만날수 있는 계절이왔다 구절초는 가을을 대표하는 야생화 이듯
여기저기에서 만날수 있고 구절초의 아르다운 자태도 좋지만 한방의 효능 또한 좋아서 만병통치약 처럼 여겨진다
구절초도 다양한데 넓은잎구절초·들국화·구일초(九日草)·선모초(仙母草)·고봉(苦蓬)이라고도 한다.
구절초라는 이름은 아홉 번 꺾어지는 풀 또는 음력 9월 9일에 채취한 것이 좋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땅속줄기가 옆으로 길게 뻗으면서 번식한다. 줄기는 곧게 서는데 가지를 친 것과 외대뿐인 것도 있으며
관상용·약용으로 이용되고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거나 엿에 넣어(구절초엿) 사용한다.
특히 부인과 질환에 많이 이용되며 남자가 장복하면 양기가 준다고 전해진다
능선풍경
하늘엔 구름바다를 이루고 비를 가득 머금은 구름은 산봉우리에 비를 가득 뿌리는듯 보였다
이제는 빗방울이 제법 굵어지고 소나기 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우산을 폈다 작은 빗방울은 맞고 걸었는데
빗줄기가 강해서 이제는 철퍽거리는 산길과 우산을 펴고 걷는 산길이 되어 버렸다
대명동(大明洞)유래를 보면 두사충(柱師忠)에서 연유된 지명인데 두사충은 명나라 원병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도선국사·무학대사와 더불어 3대 풍수지리가로 이름이 난 사람이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원병을 왔으며,
천계(天啓:명 희종조 연호) 연간(1620∼27)에 타계, 복야공(僕射公)으로 불린다.
그의 직책은 당시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으며 주로 진(陣)터와 병영 터를 잡아주는 임무를 맡았다.
한마디로 지형·지세를 이용해 전쟁을 유리하도록 이끈 일종의 풍수전략가였다.
임란이 끝나자 그는 매부인 진린 도독을 압록강까지 배웅하면서 명이 망할 것을 예측하고 조선에 귀화했다.
그는 전쟁 중, 군진을 펴는 데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나자 풍수지리가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산정으로 가는 능선길
두사충(柱師忠) 은 지금도 국적을 떠나 도선국사·무학대사 등과 더불어 3대 풍수지리가에 넣는 이도 는데
당시 풍수지리는 지리멸렬했다가 조선 초기 한양으로 천도하는데 풍수지리학이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성리학이 지도이념이 되면서 풍수지리학은 쇠퇴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두릉두씨세보(杜陵杜氏世譜)에 나오는 '제가창수시(諸家唱酬詩)'와 '동국동유록(東國同遊錄)'을 보면
그가 얼마나 명성을 얻었는지 알 수 있고 그와 교유했던 송강 정철, 서애 류성룡, 백사 이항복, 우복 정경세 등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 나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각종 풍수이론이 도입되고 있던 시기여서,
풍수를 아는 양반관료들이 두사충(柱師忠) 과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하사받는데 경상감영을 대구로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 일대로 주거를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가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경상감영을 대구로 옮기기를 주장했던 체찰사 이덕형과 가까웠는데,
두사충(柱師忠)이 자신이 하사받은 땅이 감영 터로 적격임을 알고 그곳을 양보했던 것이라고 한다.
대구 앞산(大邱 前山) 658.7m
비오는날에 대구 앞산에 올랐다 운무가 자욱해서 주변 풍경은 볼수가 앖어서 아쉬움만 남았다
앞산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얽힌 이야기가 내려오는 사찰이 무려 3곳이 있고
은적사와 안일사, 임휴사가 있으며 후삼국시대 왕건이 견훤과 맞서 싸우다가 패배 후 팔공산을 떠나 피신하면서
안일사에 와서야 편안히 쉴 수 있었다고 한다.
안일사 위쪽 앞산정상 부근에는 왕건이 숨었던 곳으로 유명한 왕굴이 있다.
큰골에는 한국자유총연맹 산하의 낙동강승전기념관이 있고 이곳은 대구지역에서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면 웬만하면 가봤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지랑골에 있는데,
안일사를 지내 왕굴로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한 거대한 돌탑도 볼만 산길 볼꺼리중 하나이다
대구 앞산(大邱 前山) 658.7m
대구 남산은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558-6 안지랑골에 위치하며 안내소를 출발하여 완만하게 산행길이 이어지다가
앞산전망대 1.5 Km 이정목을 지나면서 된비알 구간이 이어지고 돌계단을 올라가 왕굴전망대 갈림길서
좌측 앞산전망대 방향으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 조망을 즐길수가 있다
통신탑과 케이블카 상부승강장 대덕산성을 지나 앞산정상에 도착하여 인증하고 조망을 즐길수 있으며
대덕산 방향으로 출발하여 완만한 능선을 내려서 대덕산 왕굴 갈림길서 왕굴 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서
왕굴을 지나 다시 가파르게 내려서 통일기원탑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 안일사에 도착해서 수리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대구 앞산(大邱 前山)산정의 풍경
비오는 날 젊은 청년들이 신정을 다 점령한듯 하고 비소리가 제법 소리가 큰데 청춘들은 하산할 생각이 없나 보다
나는 안지랑골에서 산행을 시작 하였는데 안지랑골은 양녕대군이 피난 와서 머물던 곳으로 대구가 살기 좋은 곳이고
자신이 편히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안지랑골 골짜기에서 편안하게 안일하게 지내다가 돌아갔다 하여 안지랑이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앞산도 대구 시민이 운동과 힐링 산행으로 최고인듯 싶고 그래서 인지 일기가 좋지않은 날에도
산길을 걷는 시민들을 많이 볼수가 있었다
앞산전망대 방향 하산길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우산 안쓰고는 산행을 할수 없는 한여름 소나기 처럼 내렸다
비소리가 나무잎사귀에 떨어지는 소리가 도심의 빗소리 보다 더 듣기가 좋았다
앞산을 찾던 시민들은 비때문인지 보이지 않았고 앞산 능선길을 빗소리와 함게 걷는길이 되었다
대구 앞산이라는 이름은 유래가 있는데 예전에는 성불산이라 불렀고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대덕산이라 하였고
일제강점기에 전산이라는 지명이 병기되면서 부터 앞산으로 불리기 되었다 전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천자남면(天子南面)이라 하여 방위에서 남쪽이 앞이라 앞산이라는 설도 있다
앞산 봉우리 조망
앞산에는 팔공산 못지않게 여러 통신시설들이 존재하고있는데 앞산 정상에는 대구광역시경찰청의 통신대가 주둔하고 있어
시설 보안을 목적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경찰청과의 협약으로 통신탑만 남기고 통신대 숙소를 철거한 뒤
전망데크와 정상표지석을 설치한 후 2019년 12월에 개방하였다고 한다
산성산은 앞산에서 유일하게 자동차로 오를 수 있고 당연히 일반 차량은 출입금지다.
아주 오래 전에는 이곳에 미군 통신대가 주둔하였으며 산성산에는 한국공항공사의 대구항공무선표지소와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대구광역시본부의 광역망 중계기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앞산전망대가 설치된 비파산에는 KBS대구방송총국의 송신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 곳에서 지상파 3사의 TV채널 및 지상파 DMB[2]와 대구원음방송, 대구국악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대덕산성
하산길에 대덕산성을 만났는데 산성은 보이지 않고 여기가 대덕산성터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안내문이 있었다
대구광역시 남구 대덕산(大德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된 포곡식 성곽(包谷式) 이며
1988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하며 표고 670m의 험준한 대덕산에 축성된 포곡식 산성
대구의 진산(鎭山)인 대덕산은 동남쪽으로 산성산(山城山)과 비슬산(琵瑟山)으로 연결되고
서북쪽은 낙동강과 금호강의 평야와도 연접된다.
속칭 안지랭이라 부르는 골짜기를 중심으로 석축하였으며 축조수법이 조잡하다고 하며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 또는 고려시대의 기와편 및 토기편이 흩어져서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 축성되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태조왕건(王建)이 파계사(把溪寺) 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패하여 반야월을 거쳐
대덕산(大德山) 은적사(隱寂寺)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산성과 관련되는 기록으로는 대구읍지의 “成佛山有古城 今無(성불산유고성 금무)”라고 하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成佛山 古城 在壽城縣 西十里石築 周三千五十一尺 今廢
(성불산 고성 재수성현 서10리석축 주3,051척 금폐)”라 한 사실에서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성벽 둘레가 3,051척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쉼터
촉촉하게 젖은 비오느날 쉽터에는 조용하기만 하였고 주변을 둘러보면 풍경 조망이 좋아야 하는데 비 속에 다 숨어 버렸다
대구 앞산에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고 대표적인 것은 앞산 석굴암은 신라시대 조성된 불교유적지라고 하며
앞산 산정에는 대구최초 기상관측소가 있으며 앞산 자락에는 대구최초의 앞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앞산은 2019년12월1일 대구앞산 개방되었고 대구 앞산(해발658.7m)정상은 1985년 대구 경찰청
통신중계소가 설치되 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곳인데 34년만에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앞산공원은 비슬산에서 뻗어나온 앞산(해발658.7m)을 주봉으로 산성산(해발653.4m)대덕산(해발583.5m)등
3개봉이 5백13만평에걸쳐 국골을 이룬 도시 자연공원이라고 이야기 힐수 있다.
앞산의 조망
앞산은 옛이름인 성불산에 걸맞게 은적사.안일 사.임휴사.법장사등 전통사찰을포하여
18개사찰과 대덕산성.삼층석탑.왕굴 석정등 유적지가 산재해있다.
산자락 골자락마다 각종유회 체육시설 과 심심수련장이있고 길어야2시간 넉 넉잡아 3시간걸리는 9개등산로가
골짜기 마다뻗어 가족등산의 최적조건을 구비 한 체육공원이기도하다.
그 이름만큼이나 대구시민들에게 친밀 한 앞산은 도시의 빌딩숲을벗어나 한 발더 다가갔을때 이렇듯
또다른 모습 으로나타난다고 이야기 하며앞산은 큰골.앞산.청룡산으로 이어지 는 종일코스(약6시간)로 제외하면
모두 2~3시간내의 등산코스로 난코스가 없서 가볍게오를수있는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앞산 산길
앞산 전망대로 가는 산길이 그야말로 조용하고 오직 빗소리만이 들어며 걸을수 있는 힐링공간이다
앞산이 있는 도촌(都村)은 대명 9동의 자연마을이며 동개진(東開津)과 서개진(西開津)으로 나뉘어져
250여 년 전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다고 하며 당시는 남구 대명동에 5개의 자연부락이 형성되어 왔는데
대명 9동 앞산아파트 북편 200m 지점에 부락을 동계진동이라하고 현재 대명 9동사무소 부근 마을을 서계진동이라 하였다.
영남대학교(대명동캠퍼스) 남편 마을을 장진동이라 부르고 대명 6동 마을은 골안이라 하였다.
이와 함께 장등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은 도촌(都村)이라 불렀고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 중에
도씨(都氏)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부락주민 70%가 都氏) ‘도촌’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또한 1600년경 대구지방에 무역을 교역할 때에는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현재의 화원 유원지 부근에
대구 상인들과 상거래를 형성하였는데 1700년 경 갑자기 홍수로 인하여 낙동강 물이 범람하여 상선이
정상적으로 운행을 할 수 없어 배가 대피하던 중, 배의 일부가 대명천 부근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낙동강 물이 줄어들면서 배가 다시 강으로 가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돛대가 걸려서 가지 못했다 하여 그 부근 마을을 ‘도촌(棹村,현재 파크맨션 뒤편)’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앞산 전망대
앞산전망대는 대구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전망대로 대구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대구관광의 명소이며
앞산전망대의 건축물은 도시와 자연, 역사와 미래를 함께 엮어낸 성공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앞산전망대는 관광객 그리고 산행자들도 많이 찾고 있지만 무엇보다 대구에서 먹고 자고 살아가는
대구 시민에게 대구가 어떤 도시라는 산교육을 할 수 있는 교육장의 역할도 하고 있다고 전한다.
앞산전망대에서 바라본 대구광역시 전경
비오는날 대구광역시의 풍경이다 대명동에는 동쾌진(東掛津)․서쾌진(西掛津)대명 1동의 자연마을로
쾌진과 서쾌진을 ‘동계진’, ‘서계진’이라 부르기도 한다. 앞산에서 내려오는 현재 남대구 등기소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흐르는 강나루가의 마을 동편나루에 위치한 부락이라 하여 동쾌진이라 하였고,
서편 나루에 위치한 부락을 서쾌진이라 불렀는데, 발음 편이현상에 의해서 동계진과 서계진이라 불렀다.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아직 이름은 전해오고 있다고 하다
일설에 서쾌진은 대명 9동의 옛 이름으로 ‘괘진’이란 지명은 이곳을 대대로 살 곳으로 정한 두사충이
이곳이 강가는 아니지만 강의 모습과 같이 생겼고 나룻배가 닿는 곳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괘진(掛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며 서괘진과 동괘진의 분기점은 현재 앞산공원으로 올라가는 현충로로서
서쪽이 서괘진 동쪽이 동괘진에 해당된다.
그중 서괘진은 옛날 ‘안지랑골’ 또는 ‘안지랑이’로 불리는 곳이며 대구 시민들의 휴식처로 널리 이용되기도 하는곳이다
토끼조형물
대구 앞산전망대에 있는 토끼조형물인데 토끼몸체에는 여러가지 한글 단어가 있다
밤이되면 황금불빛을 발산하는 화려한 토끼로 변신한다고 한다
앞산 전망대는 대구 시가지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매년 3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고 하며
특히 도시 야경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로 한국관광공사 야경 명소로도 선정된 곳이라고 한다.
기존의 노후된 전망대, 능운정, 팔각정을 새로 정비하고 포토존, 쉼터 7개소 등을 설치해
관광객들에게 특색 있는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2021년 3월 공사 착공해 완공되었다
기존 노후된전망대 에 쉼터 기능만 있던 능운정은 숨어있던 고려 태조 왕건 이야기에 숨결을 불어넣고
재해석을 통해 앞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앞산 관련 역사를 이해하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로운 변화를 추구했다.
고려 태조 왕건 전설과 관련된 은적사, 안일사, 임휴사, 왕굴 등 앞산의 역사 스토리를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제작해
키오스크와 연계된 대형 스크린 월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앞산전망대
비오는날 앞산전망대에 있는 보라색의 벤치가 하트모양에 꽃이 피는 형상 같아서 촬영해 보았다
능운정에서 앞산 전망대 방향으로는 7개의 쉼터를 조성해 산행으로 무거워진 몸을 잠시 쉬면서
파란 하늘을 바라다보며 가을바람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으로 포토존으로도 좋은 장소가 될 듯하며
야간에는 쉼터 곳곳에 있는 갈대 조명, 장미 조명 등이 은은하게 빛을 발해 더욱더 매력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고 한다.
전망대로 가기 전에 위치한 팔각정 쉼터는 소원을 희망하는 공간으로 풍등 나무에 소원을 적어 게시할 수 있으며,
전망대에 들어서서는 소원성취 문구로 제작된 달토끼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고 한다.
산행종료
비오는날 이렇게 대구 앞산 횡하니 걸어보았다
대구 앞산(大邱 前山)은.성불산(成佛山)이라 불렀던 곳이며 앞산이라는 하는것은 전통적으로 천자남면(天子南面)이라 하여
방위에서 남쪽이 앞, 북쪽이 뒤, 동쪽이 왼쪽, 서쪽이 오른쪽이라고 한다 그래서 앞산이라는 설이 있다
천자남면(天子南面)의 앞산(前山) 능선을 비오는날 걸어 보면서 앞산에 얽힌 유래와 왕굴에서
왕건이 피신했다는 이야기등 하나하나가 걷다보면 우리산 모두가 이야기가 있는 산이다
이렇게 비오는날 성불산(成佛山)이라 불렀던 천자남면(天子南面)의 앞산(前山) 걸어보았다.
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산줄기이야기
유정열1000명산견문록
한국의산천 손경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월간 山(아웃도어 매거진).
신 산경표 박성태 조선일보사
해설 대동여지도 최선웅 민병준 진선출판사
인문산행 심산 바다출판사.
태백산맥은없다 조석필 사람과산.
한국1000산 신명훈 깊은솔
한국의 산하, 등산지도
산에서 만든 튼튼한 허벅지가 연금보다 낫다 오혜령 박옥남 복랩
대구광역시 홈페이지 지역신문 및 지역주민 인터뷰 참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