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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늑대 FORCE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신라 사령지(新羅 四靈地)라 불리는 불교 유적지를 따라 금오산(金鰲山)산정을 걸어보다 본문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신라 사령지(新羅 四靈地)라 불리는 불교 유적지를 따라 금오산(金鰲山)산정을 걸어보다
바다늑대FORCE 2024. 5. 2. 11:59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
신라 사령지(新羅 四靈地)라 불리는 불교 유적지를 따라 금오산(金鰲山)산정을 걸어보다
▲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
높이 : 468m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인왕동에 걸쳐 있는 산
▲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나의 산행일 :
2024년04월21일 일요일 날씨 : 약간비 흐림
▲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나의 산행코스 :
서남산주차장→삼릉 →상선암 →금오봉 →사자봉 → 금오정 →늠비봉5층석탑 →포석정주차장
7.05km 3시간54분(트랭글 앱기준)
▲ 경주남산(慶州南山)개요 :
신라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경주는 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이다.
그 중 신라인들이 천년을 두고 다듬었던 남산은 그 자체가 신라인들에게 절이요, 신앙으로 자리한다.
한 구비를 돌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마애불이 맞이하고 골골이 남아 있는
수많은 절터와 유적은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기에 남산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문화재인 것이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뻗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곳곳에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만날 수 있다.
경주사람들은 흔히 ‘남산을 오르지 않고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들 한다.
경주 남산은 평소에는 가기 힘든 곳. 휴가철을 맞아 산행과 함께 우리의 문화유산을 볼 수 있는 1석2조의 피서지다.
금오산(4백68m)과 고위산(4백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개의
계곡길과 산줄기로 이루어진 남산에는 1백여 곳의 절터와 60여구의 석불과 40여기의 탑이 있다.
이와 함께 남산의 지정문화재로는 보물 13개, 사적 12곳, 지방유형문화재 9개와 중요 민속자료 1개로
곳곳에 유적이 산재해 있다. 경주 신라문화원이 제작한 경주 남산지도에는
순례길만 70여개를 잡아놓았을 정도니 비록 산은 낮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등산로다.
하루 일정으로 남산을 둘러보는 코스로는 삼릉골을 따라 상선암-사선암-금오산-용장사터-신선암-칠불암-통일전(9.5㎞)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더 짧은 코스로는 용장사터에서 바로 용장골을 따라
하산하는 길(5.1㎞)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이며 길이 약 8km, 폭 약 4㎞의 산줄기안에 불상 80여체, 탑 60여기,
절터 110여 개소가 산재하여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등
신라시대 역사 유물·유적의 보고인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 경주남산(慶州南山)산행지도
▲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
나의 트랭글(TRANGGLE) 궤적도(軌跡圖)
→→→→→→2024년 04월21일 일요일 대한민국(大韓民國) 구석구석 산(山)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어제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오늘도 비예보에 산행지에도 비가 예보되어 있어
우중산행채비를 하고서 산악회 버스 출발지점인 홈플러스 건너편 동부농협 앞으로
택시를 타고서 시간 맞쳐서 가늘길에도 비가 어제보다는 덜 이슬비처럼 내렸다
경주남산은 대학원 100대명산 도전팀 산악회에서 산행한곳 이기도 하지만
오늘 진주지역 비타민산악회 따라 지붕없는 박물관인 남산을 걷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서남산 들머리
서남산주차장에 도착했지만 그다지 걱정할 비도 내리지 않고
비옷 입기도 어중간한 이슬비는 내렸지만 산행하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판쵸이 입어야하는 산행은 아니었다
경주 남산(南山)은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금오산의 정상의 높이는 468m이며 남북의 길이는 약 8㎞이고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라고 한다.
삼릉탐방지원센터
삼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산길로 이어지는 들머리가 나오며 경주 남산은 국립공원인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사적형 공원인 경주국립공원은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로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불교문화의 백미인 불국사, 석굴암을 품에 안은 토함산과‘불교 노천 박물관’으로 불리는 남산을 비롯해
8개 지구의 면적이 136.55㎢에 달한다고 하며 잘 보존된 신라 문화 유적과 조화로운 자연경관 때문에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또한, 1979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10대 유적지 중 하나로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금오봉2.35km안내표지목
삼릉탐방지원센터에서 남산 금오봉 까지 거리가 2.35km라 아마도 최단거리 같아 보였다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삼릉에서 금오봉 탐방로는 사계절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으로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특히, 경주소나무라는 사진 작품으로 유명한 삼릉의 소나무 숲에서
사진을 찍어보고 산행 중 구간 구간마다 자리 잡고 있는 불상에서 쉬어가며 문화재를 감상하며
산행을 할수있는 산길이며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신라의 왕릉, 신라시대 불상, 수려한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대표하는 탐방코스라고 알려져 있는 구간이다
삼릉구간 초입산길
토요일부터 지금까지 내린비에 산길은 촉촉하고 솔향기가 그윽하게 코끝을 자극하였다
야자매트 산길을 걸을때 봄비네 젖은 초목들이 그 초록의 색이 짙어만 갔다
금오봉 오르는 산길 중에 불국사 코스도 있는데 불국사에서 석굴암 구간 중 일부 탐방 구간은
차량 두 대가 한번에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구간도 있으나, 박석으로 포장되어 있고, 계단이 있어 유모차나
휠체어가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곳이며 봄철(4월 초·중순)에 벚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절경을 이룬다는 산길이다
낙석 위험 구간이 군데군데 위치하고 있어 탐방에 주의가 요구된다고 하며 탐방로 중간지점에는 약수터가 있어
목을 축일 수도 있고 석굴암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탐방로를 벗어나 왕복 1.2km(30분 소요) 거리를 걸어야 한다.
삼릉계 제1사지 탐재 및 석재
경주남산은 지붕없는 박물관 이라 불리울 정도로 신라시대의 유물이 가득한 곳이다
삼릉계는 초입에 삼릉(사적)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냉골로도 불린다
삼릉계 제1사지 주변에서 발견된 석재유물을 이곳에 정비 하였다
석조여래입상편은 하반신 일부로 옷주름이 확인되며 제작시기는 알수없다
석조여래좌상은 왼쪽은 약합을 쥐고 오른손은 촉지인을 취한것으로 보이나 손목아래가
훼손되어 정확하게는 알수가 없다
석탑재는 옥개석1매와 탑신석 1매이다 같은 탑의 부재인지는 알수는 없으나 9세기 중반 이후
제작된것으로 보인다
초목의 산길
촉촉히 젖은 된비알 산길이 코앞에 나타나지만 우리지역 근교 월아산 정도의 산길이라 산보사마아 오를수 있어
누구나가 야외 박물관 우리 문화재 흔적을 보면서 역사를 배우며 산길을 걸을수 있는경주남산 산길이다
경주 남산의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북으로 뻗어내린 산맥에는 상사암(想思巖)·해목령(蟹目嶺)·도당산(都堂山) 등의
봉우리가 있고, 남으로 뻗은 산맥에는 높이 495m의 고위산이 있다.
경주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누고 동남산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며 서남산의 계곡은 2.5㎞ 내외이고,
동남산은 가장 긴 봉화골(烽火谷)이 1.5㎞ 정도이다.
경주남산 삼릉계 제2사지
산길 주변에는 석조 유물이들이 옛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온전한 것은 없고 안내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석조여래좌상 앞 평탄지부터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일원까지를 사지로 추정한다
사지내에 석렬,우물지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석조여래좌상은 1964년 계곡 옆에서 발견되어 현 위치로 옮겨졌다
불두는 결실되었으며 대좌가 함께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다
완쪽 어깨와 양손도 훼손되었다 목에 삼도가 뚜렷하며 왼쪽 어깨에는 가사 끈이 새겨져 있다
가사자락을 묶어 매듭지은 후 나머지 끝을 무릎까지 늘어뜨렸고 끈의 끝에는 술장식이 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三陵溪谷 線刻六尊佛)
오래전에 딸애가 초등학교시절 가족들이랑 여기까지 올라온 기억을 소환이 되었다
비가 온 탓인지 선각육존불이 선명하지 않아고 세월이 가면 없어질듯한 느낌도 들었다
앞뒤로 솟은 이들 바위의 크기는 앞의 것이 높이 4m , 폭 4m 가량 되고, 뒤의 것은 높이 4m에 폭 7m 가량이다.
바위의 표면을 정으로 쪼아 새긴 것이 아니라, 붓으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각각의 암벽에 삼존불을 그려 놓았고
2구의 마애삼존상(磨崖三尊像)이 만들어진 시대나 조각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국내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힌다고 전한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三陵溪谷 線刻六尊佛)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올리고 싶었지만 비가온 터라 바닥이 물끼가 많아서 합장예로 대신 하였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三陵溪谷 線刻六尊佛) 의 앞쪽 바위에 그려진 삼존불의 본존(本尊)은 입상의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은 좌상(坐像)이며 본존의 높이는 2.65m, 협시보살(脇侍菩薩) 의 높이는 1.8m 정도이다.
본존은 오른손을 올려 들고 왼손을 배에 대고 있으며
협시하는 보살은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供養)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협시보살이 두 손에 모아 쥐고 있는 것이 꽃인지 다기(茶器)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뒤쪽에 새겨진 삼존불 중 본존은 좌상으로 높이 2.4m이고
두 협시보살은 높이 2.6m 정도 되는 입상이고 음각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냈으며
아래쪽에 연화대좌(蓮花臺座)를 조각하였다.
이 자연암석 위로는 인공으로 길게 홈을 파놓았고
이것은 아마도 빗물이 마애불(摩崖佛)위로 직접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배수로의 역할을 한 듯하다.
긴 돌홈 바로 앞에는 전실(前室)을 씌웠던 흔적으로 여겨지는 작은 홈도 양쪽에 나 있다.
초록으로 물든 산길
올 봄엔 유독 비가 많이 내렸는데 어제 내내 비가 내렸고 산횅지 오는길에도 비가 내렸지만
경주 남산에 걷는 동안에 다행히 비가 그쳐 촉촉한 산길을 걸을수 있게 되었다
경주에는 전체가 하나의 유적지 같은곳이데
경주평야의 주위에는 서쪽에 선도산(仙桃山) 동쪽에 낭산(狼山)과 명활산(明活山)
북쪽에 금강산(金剛山) 등 많은 산들이 성벽처럼 둘러서 있는데 그중에 크고 높은 산이 남산이다.
남산에는 고위봉(高位峰)과 468m의 금오봉(金鰲峰)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계곡과 산발들을 합쳐서 경주 남산이라 부른다.
까치봉(鵲峰작봉)이나 황금대 부근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반달형돌칼·돌살촉 등이 발견되고
오산골(鰲山谷)어구에는 고인돌이 남아 있다고 하며 또한 암석신앙의 유적인 남산부석(南山浮石)
천룡암(天龍岩)·큰지바위[大地石]·상사바위[想思岩] 등이 있으며
진평왕대(579~632)에 쌓은 남산신성(南山新城)이나 고허성(高墟城) 같은 국방시설의 터도 남아 있다.
금오봉1.5km안내표지목
봄인가 싶더니 초록으로 물든 산야에서 어느듯 여름으로 달리는듯 기후는 예전같지 않게 변하였다
오늘은 비가 그친 날씨이기에 주변은 운무로 인하여 조망은 모두 숨어버렸지만
비를 맞으면서 걸어야 하는 우중산행이 아닌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산길이였다
남산은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며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蘿井)이라고 한다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었고
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이 현신해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어느 날,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이 홀로 이것을 보았고
왕은 스스로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였던 것이 라고 전한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慶州 南山 三陵溪 石造 如來 坐像)
산길을 걸어면서 불교 유적 하나중 제일 온전한것 같지만 불두 부분을 복원한것이 라고 한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慶州 南山 三陵溪 石造 如來 坐像)의 높이는 142㎝이며
대좌 높이 96.7㎝이고 원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광배가 크게 파손되어
윗부분이 3분의 1 정도 결실된 상태로 불상 대좌 뒤쪽에 방치되어 있다.
그리고 불상의 얼굴 부분이 코 밑에서 턱까지 손상을 입어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뚜렷하다.
이 불상은 나발(螺髮)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어 있으며,
얼굴은 많이 손상되었지만 풍만하고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당당한 어깨에 걸친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는 몸에 얇게 밀착되어 간결하고
유려한 옷주름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어
석가불로 추정되며,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는 당당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부처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느끼게 한다. 둥근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돌출선으로 구분된 주형(舟形)의 거신광배(擧身光背)는 안쪽에 연화문과 당초문을 새겼고
주위에는 화염문(火焰文)을 둘렀 있다.
경주남산 삼릉계 제6사지 삼층석탑의 탑지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慶州 南山 三陵溪 石造 如來 坐像) 바로 앞에 있는 삼층석탑의 탑지인데
그 자리에 삼층석탑을 축소하여 있었던 자리에 만들어 놓았다
삼층석탑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제6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삼릉계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추정된다.
개꽃(연달래&철쭉)
우리 유년기 시절엔 해마다 봄이되면 산으로 뛰어다니면서 참꽃(진달래꽃)을 따먹었는데
요즘애들은 진달래란 이름조차 모를것이고 자연훼손이라는 교육을 받아서 아예먹지도 않을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참꽃 아닌 개꽃을 따먹을까바서 걱정하여 개꽃엔 독이 있다하여
어릴적 부터 그 구별법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진달래는 잎이 돋기전에 꽃이 피지만
철쭉은 잎이 상당이 자란후에 핀다는 점이고 결정적으로 꽃받침 부근에 쩍쩍 달라붙는 분비물이 있으면
독이라 생각하고 따 먹지 않았는데 그것이 개꽃의 철쭉 연달래이다
연달래 꽃길
어제도 비내리고 아침까지 비가 내렸으니 산길은 온통 촉촉하게 젖어있고 연달래꽃이 바닥에 떨어져 꽃길이 되었다
마치 바다에서 스쿠바다이빙을 하면 불가사리가 수중 바위와 바닥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모습이랑 같다
촉촉히 젖은 산길에는 짙은 솔향기도 있고 걷는길이 먼지가 나지 않아서도 좋지만
암릉은 비에 젖어 많이 미끄러워 전도에 유의해야 하는 신길이 되었다
된비알 구간
촉촉이 젖는 마치 석축으로 만든 산성같은 곳을 초장부터 다리에 힘을 빼는 구간이지만
산길을 많이 걸어 보았는 산꾼에겐 그져 평길처럼 걷지만 어찌 나 같은 사람만 있나 다양한 사람들이 오르기에 그렇다
수목이 젖은 풍경은 초록으로 물드는 지금 그 색을 찐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고 봄비에 험벅 젖어
그야말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듯한 수목이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간에 옷을 갈아 입고 있는 모습이다
휴식
된비알 구간을 오르는 산꾼들을 위하여 이렇게 나무벤치도 있는데 비가와서 앉아서 쉬기에는 그렇다
요즘 산행을 하다보면 국립공원 뿐만 아니라 도립등 많은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산길에 설치를 해 두었는데
지자체 관리도 부실 하거니와 찾는 산행자도 많지 않은 탓에 부식에 되고 이끼가 가득한 벤치들도 많다
촉촉히 젖어있는 수목과 산길이 오늘따라 더 운치가 있어 보이고 빗물에 공기도 씻어져 있어
공짜로 마음것 산속의 공기를 먹을수 있어 한결 걷기가 편하였다
상선암(上禪庵)
상선암(上禪庵) 은 금오봉 가기전 삼릉계곡의 중턱으로 탐방로와 도량 이어져 많은 등산객들이 참배하는 암자이며
나 역시 그냥 지나가지 않고 등산화를 벗지 않고 합장 참배만 하였다.
상선암은 광복이후 박배월 스님이 창건 하였고 그 후 여러 스님들이 이 곳에서 정진하였다고 하며
예전에도 절터 였음을 여러가지로 증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 순조때(1934년) 강와 임필대가 서술한 유동도독에서 "상선암에 오르면
앞쪽의 하선암이 수석사이에 있다"고 기록 되어 있다고 하며 남산에는 하선암이라는 절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과 요사채로 아주 규모가 작고 보통 암자는 암자이름을 편액으로 거는데
상선암은 대웅전이란 편액이 걸여 있었다
운무에 가려진 풍경
어제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비가 내렸는데 우중산행을 안한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풍경은 모두 숨어버렸다
경주 남산에는 64개의 계곡이 있다고 하고 절터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중 60개의 계곡을 따라 295곳에 절터가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먹을 물이 필요하기에 계곡의 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 절을 조성하기에 계곡을 따라 절터가 보이는 것이다.
옛날에는 골짜기가 남산을 오르내리는 길의 역할을 했을 것이니 남산에서 골짜기를 따라
절과 불상과 석탑이 모셔진 것은 당연하다 하며 산악의 비탈면의 평평한 곳마다
전각을 짓거나 했었을 것이기에 모여 있는 곳을 하나로 묶으면 150여 곳의 절터가 확인된다.
불상은 130여 구가 있으며 100여기의 불탑과 22기의 석등 그리고 19점의 연화대가 있고
또한 왕릉도 13곳이 있으며 산성은 4곳이 있다고 한다.
남산 조망처
조망은 운무에 가려져 보이는것 모두가 앞도 볼수없는 운무 뿐이였는데 여기서는 경애왕릉과 삼릉도 보이는 곳이며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그리고 우리가 들머리로 삼은 삼릉주차장도 보이는 곳이다
특히 경주를 지나는 형산강도 조망이 되는데 해병대특수수색대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곳이였다
형산강은 경주를 가로질러 포항으로 흘러 동해바다로 흘러든다
암릉은 빗물에 젖어 자치하면 미끄러 질수도 있어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는 구간이다
암릉의 소나무
흙도 없고 물끼도 없는 저 차디찬 바윗돌에 뿌리를 내리고 살수 있는 강인한 소나무인데 저 강인함은 어디서 나올까 싶다
이처럼 남산 전체가 부처님의 손바닥 같은 느낌이지만 삼륜의 용장사 터 석조불상은 세상을 굳어보고 있고
경주 남산을 깔고 앉아 계신 부처님께서 중생을 굽어 살펴주고 계시는듯 하다
경주 남산이 나의 마음을 씻어주고 봉우리에 우뚝 솟은 바위는 신라와 경주 시내를 굽어보고 있기에
봉우리에 우뚝 속은 바위에 불상과 불탑을 모셨을 신라 선조들의 불국토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남산 암봉
경주 남산 금오봉에 가까워 질수록 암릉길과 암봉들이 나타나는데 경주남산은 국립공원에 속하는데
유일한 사적형 국립공원이다 그리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남산은 온갖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며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탄강한 나정(蘿井)과 초기 왕궁, 나을신궁, 도성을 지켜온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비롯한
4곳의 산성,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지(鮑石亭趾)가 전설과 함께 지나간 역사를 전하고 있는 곳이다
경주 남산에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는데 7세기 초에 조성된 동남산 부처골
감실여래좌상(佛谷龕室如來坐像)은 투박한 시골 할머니가 돌로 만든 집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듯한 모습의 한국 최고(最古) 감실불이라고 한다.
7세기 중엽의 장창곡 석조미륵삼존불의상(石造彌勒三尊佛倚像)과 선방곡 석조여래삼존불(石造如來三尊佛)은
티 없이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웃음으로 잘 알려진 불상이라고 한다.
산정으로 가는 데크계단
데크계단도 젖어있고 수목도 촉촉히 젖었고 반겨주는 연달래꽃도 부끄러운듯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경주 남산을 걸어면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는것을 알수가 있고
남산은 서울의 북한산과 같이 경주의 진산이며 북의 금오봉(金鰲峰, 468m)과
남의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너비 4㎞, 남북 길이 10㎞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의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한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해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어 야트막하면서도 큰 산이다.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남산은 온갖 전설이 남아 있는데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탄강한 나정(蘿井)과 초기 왕궁,
나을신궁, 도성을 지켜온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비롯한 4곳의 산성,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지(鮑石亭趾)가 전설과 함께 지나간 역사를 전하고 있는 산행지이다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 468m
경주남산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불교 유적과 관련된 산여며 사적국립공원이다
금오산이라고도 하며, 북쪽 금오산과 남쪽 고위산 사이의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 하며
금오산 정상의 높이는 466m,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했다고 하여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며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어 왔다.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 468m
경주 남산은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금
오산의 정상의 높이는 466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고
북으로 뻗어내린 산맥에는 상사암(想思巖)·해목령(蟹目嶺)·도당산(都堂山) 등의 봉우리가 있으며
남으로 뻗은 산맥에는 높이 495m의 고위산이 있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누고 동남산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서남산의 계곡은 2.5㎞ 내외이고,
동남산은 가장 긴 봉화골(烽火谷)이 1.5㎞ 정도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고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
포석정주차장4.5km안내표지목
운무(雲霧)가 자욱한 산길을 따라 이젠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주 남산의 불보살상과 불교 유적은 문화재로서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닌 불교 신앙의 결정체이와 같았다
三國遺事(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시대 서기 800년 중반 경주에는 약 100만 명의 인구가 있었고
이러한 신라의 수도 경주의 남산은 부처님 세상 불국정토가 이뤄져 있었는데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600년대부터 800년 후반까지 300여 년간 신라의 사람들은 곳곳에 처처의 바위에 부처님을 모셨다.
곳곳에 처처의 봉우리에 부처님의 몸인 불탑을 모셨는데 이 시기 신라의 사부대중은
경주 남산의 부처님 세상 불국정토를 이루었으며 참배를 하며 지극한 기원을 올렸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하산길
하산길은 임도처럼 넓다란 흙길이며 황토흙으로 붉은 색이고 빗물 가득히 머금은 송화가 눈부시다
불교를 특히 숭상한 신라는 남산에 그 자취를 고스란히 남겼고 산길 주변 곳곳에 많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탑과 석불로서 특히 마애불이 많다.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것은 질 좋은 화강암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어져온 바위 신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南山觀光一週道路竣工碑(남산관광일주도로준공비) 및 사자봉
사자봉에는 정상표지석은 없고 南山觀光一週道路竣工碑(남산관광일주도로준공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경주 남산 포석골 방향으로 하산길인데 원래 부흥골(富興谷)이라 하였고 포석정이 있기 때문에
포석골(鮑石谷)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포석정 뒤 계곡 일대를 가리키는데, 전체 길이는 2.5㎞에 이른다.
사적 제1호인 포석정지(鮑石亭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고도 하며 이궁이란 별궁이란 뜻이며
왕과 귀족들의 놀이터로서, 개울가에 솟은 바위에 돌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주고받게 하였다.
그러나 경애왕이 이 곳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면서 신라는 끝을 맺게 된다
금오정(金鰲亭)
포석정주차장으로 하산하는길에 금오정(金鰲亭)이 있으며 금오정 역시 늠비봉에 위치하고있는 정자이다
경주 남산은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며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다.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蘿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었다.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이 현신해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어느 날,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이 홀로 이것을 보았다.
왕은 스스로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였던 것이다.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했던 것이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하여 방탕한 생활이
더욱 심해졌던 까닭에 나라는 마침내 멸망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신라인의 산악숭배에 있어서 남산이 특히 호국의 보루로서
존숭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포석곡 제7사지 큰늠비절터 주변 석조유물
안내글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포석곡 제7사지 큰늠비절터로 불리는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폐허가된 절터에 탑재들이흩어져 있었다
1층 탑신과 옥개석 기탑갑석 등 6점의 석조유물들은
운무에 가려진 조망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삼층석탑의 부재로 추정된다
유물의 망실과 훼손을 방지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2012년 4월에 현 위치에 받침대를 설치하고 정리하여 놓았다
하산길의 탐방로
남산(南山)과 망산(望山)의 유래가 있는데 사라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쇠벌에 두 신(神)이 찾아왔다. 맑은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두 신을 보았다.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과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두 신은 아름답고 기름진 쇠벌의 경치를 둘러보더니 남신이 입을 열어 "우리가 살 곳은 바로 이 곳이로구나!" 하고 외쳤다. 너무나 우렁찬 외침이 새벌의 들판을 진동할 때, 강가에서 빨래하던 한 처녀가 너무 놀라
"저기 산 같은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것을, "산 봐라"하고 소리를 질려버렸다.
비명에 놀란 두 신이 발길을 멈추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처녀의 외침으로 두 신은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망산(望山)이 되었고, 남신은 장엄한 남산(南山)이 되었다.
두 신이 변해 이루어졌다는 남산과 망산은 지금도 나란히 정답게 솟아있다.
망산 곁에는 젊은 산인 벽도산과 선도산 등이 있다. 이들은 젊음을 힘으로 해서 얌전한 망산을 쉴 새 없이 유혹한다.
그래도 망산의 머리는 언제나 남산 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망산의 절개가 변치 않는
한 쇠벌 처녀들의 순결도 변치 않는다고 딸을 가진 쇠벌의 부모들은 언제나 망산을 바라보면서
한시름 덜고 살아오는 것이다.
경주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慶州 南山 鮑石谷第五層石塔)
작은 늠비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석곡 제7사지 큰늠비절터 주변 석조유물에서 하산하면 안내표지목에서
약50m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무작정 하산하다보면 놓칠수가 있는 석탑유물이다
안내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주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은 작은 늠비봉 정상부에 위치하여 늠비봉 오층석탑 이라고도 불린다.
절터를 발굴조사하고 2002년에 석탑을 복원하였다. 이 탑은 경주 일대의 일반적인 석탑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다.
자연암반을 받침으로 삼아 암반의 요철에 따라 바닥돌을 세우거나 눕혀 쌓았다.
바닥돌 부재는 일반적인 가구식기단과 달리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이다.
암반에 홈을 파서 바닥돌이 밀려나가지 않도록 고정하였으며, 1층 몸돌은 4개의 장방형 돌로 구성하여
모서리기둥 없이 세장한 형태이다. 나머지 몸돌은 각각 한돌로 만들었는데, 2층부터 급격하게 높이가 낮아진다.
각층마다 몸돌보다 넓은 몸돌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4매의 돌로 짜였고, 받침은 3단이다.
지붕돌 윗면에 두터운 내림마루*를 새겼다.
통일신라 후기~고려시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경주 남산에 있는 백제 계통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예이다.
※ 내림마루隅棟): 목조 건축에서 지붕의 모서리 부분에 기와를 몇 겹으로 높이 쌓아 솟아 있는 부분
경주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慶州 南山 鮑石谷第五層石塔)
이렇게 자연기단에 5층석탑을 보며 남산 전체가 지붕없는 박물관이라는걸 세삼 느끼며 불상들이 많이 훼손된게
6.25전쟁 당시 파괴 되었거나 이단종교숭배자들이 훼손한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나의고향 함안군에도 길옆에 삼존불이 있는데 모두 불두가 없는 삼존불이기에 훼손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신라는 아마도 불국토를를 그리는 간절한 신앙은 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듯 하고
용장계곡의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200여m가 넘는 높은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상층기단을 쌓고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얹어 삼층석탑을 쌓았으니
하층기단인 바위산은 바로 8만 유순(由旬)이나 되는 수미산이 되는 것이요
탑 위 푸른 하늘이 수미산정(須彌山頂)의 부처님 세계가 되니, 서라벌 벌판은 부처님이 굽어보는 복된 땅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 또 하락한다면 고위산과 용장계곡을 탐방하고 싶다
포석정 주차장2.4km안내표지목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을 보고서 다시 안내표지목으로 되돌아와서 포석정주차장으로 하산길이다
경주 남산 왕정골 인용사지는 왕정골(王井谷) 입구 남천(南川)의 남쪽 기슭에 있었던 인용사(仁容寺)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친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위하여 지은 절이 라고 한다. 김인문이 당나라와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신으로 갔다가 옥에 갇혀 있었을 때, 신라 사람들은 그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이 절을 관음도량으로 지었다.
김인문이 귀국하던 도중 바다에서 죽자, 그 관음도량을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바꾸어 조성하고 명복을 빌었다. 이 절터에는 두 탑의 잔재가 남아 있다. 동쪽 탑은 첫층의 지붕돌과 2층의 탑신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탑자리만 남아 있다.
이 밖에 팔방(八方) 대좌의 지대석(地臺石)이 발견되었다.
팥배나무꽃
하산길에 비에 촉촉히 젖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꽃망울을 매단 팥배나무가 하산길을 재촉하였다
경주 남산의 곳곳들이 신라시대 유물과 불교문화 유적들이 가는 발걸음마다 함께 한 조상들과의 추억과 시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니 경주 남산 산행은 이렇게 시간여행속이란 말도 할만 하다
늠비봉오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내려오면 옛 포석곡 6사지의 건물이 있었을 곳에 부흥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대웅전 옆에서 바라보는 늠비봉탑도 우아하게 우리나라의 5천년 역사를 지키고 있는듯 하였다
하산길
이렇게 남산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신라의 불교유적과 함께한 산길도 솔향기와 함께
막바지에 접어 들었고 경주 남산에서 발견된 불상은 대다수가 파괴되어 불두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탑들 또한 파괴되어 흩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2015년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한국의 사지〉의
경주 남산에 관한 자료에서 절터는 149곳이 확인되었고 그리고 석탑은 99개, 마애불상은 73상,
불상은 129상이 확인된다고 전한다. 그러나 149곳 대다수 절터는 모두 폐허이며 알아보기조차 힘들 지경이라고 한다.
산행종료
경주남산 금오봉(慶州南山 金鰲峯)산행은
신라 사령지(新羅 四靈地)라 불리는 불교 유적지를 따라 금오산(金鰲山)산정을 걸어보면서
조선 초기부터 이루어진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들은 불태워져 폐사되었고 이러한 억불의 정책 속에
조선 말기가 되면 전국에 폐사지가 산재하게 되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폐사지에는 석조로 된 불상과 불탑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고
조선 말기가 되면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양반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금당과 불탑 자리에 모시는
유행이 불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는 학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오늘 산행길 비가 내리지는 않아서 다행이였고 산길 주변에 산재되어 있는 불교유적지 하나 하나 보면서
경주 남산 3번째 산행을 마무리 해본다.
※ 출처:
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유정열1000명산견문록
한국의산천 손경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월간 山(아웃도어 매거진).
신 산경표 박성태 조선일보사
해설 대동여지도 최선웅 민병준 진선출판사
인문산행 심산 바다출판사.
한국1000산 신명훈 깊은솔
산에서 만든 튼튼한 허벅지가 연금보다 낫다,오혜령 박옥남,복랩
경주시 남산국립공원 홈페이지 지역신문 및 지역주민 인터뷰 참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