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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가 있는 복한산 비봉에 올라 북한산 풍경에 젖어 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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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가 있는 복한산 비봉에 올라 북한산 풍경에 젖어 보다

바다늑대FORCE 2024. 4. 28. 20:24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가 있는 복한산 비봉에 올라  북한산 풍경에 젖어 보다

 

▲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 

    높이 : 560m

 

▲ 북한산 (北漢山) 위치 :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고양시, 양주시, 의정부시에 걸쳐있는 산.

    

▲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 나의 산행일 :

     2024년04월27일 토요일 날씨 맑음(미세먼지)

 

▲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 나의 산행코스 :

     진관공원영주차장→진관사일주문 →응봉능선 →돼지바위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

    →진관사 → 진관사일주문 → 진관공원공영주차장(원점회귀)

    6.64km 4시간16분 소요(트랭글 앱기준)

 

▲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개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삼국시대 신라의 진흥왕이 건립한 4개의 순수비이다.

4개의 순수비는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 4개의 석비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라 부른다.

진흥왕순수비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의 영토 확장, 중앙과 지방 통치제도, 국왕의 근시 기구, 정치사상 등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북한산 (北漢山) 개요 :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고양시, 양주시, 의정부시에 걸쳐있는 산이며 삼각산이라고도 한다.

같은 명칭의 국립공원의 범위인 서울특별시 은평구, 서대문구, 종로구, 성북구, 강북구 및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일원에 걸쳐 있는 봉우리들을 아울러 북한산으로 일컫는다.

세부적으로 우이령을 기준으로 도봉구, 양주시, 의정부시 방면의 북한산 일부를 도봉산으로 따로 말하기도 한다.

서울에서 남산, 한강과 함께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그런데 사실 북한산의 3봉우리 중 백운대(837m), 인수봉(811m)은 모두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영역이 아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영역으로 되어있다. 즉 엄밀히 말하면 북한산은 서울에 없는 셈이다.

그러나 서울 시내에서도 다 보이는데다가 역사적으로도 북한산은 원래 고양시 땅도 아니었다.

역사 이래 북한산은 양주(楊州)의 땅이었으며, 옛 양주는 조선 왕조 개창과 함께 한성부가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분리되기 전까지는 한양 전역도 관할구역으로 두고 있었다.

삼국시대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현 서울 강북 지역의 옛 이름이 북한산군(北漢山郡)

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로 즉 아예 그냥 북한산이었다.

북한산이 서울에 없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1914)의 행정구역 개편 때문이라고 한다.

 

▲ 북한산 (北漢山)산행지도

 

▲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 

나의 트랭글(TRANGGLE) 궤적도(軌跡圖)

→→→→→→2024년 04월27일 토요일 대한민국(大韓民國) 구석구석 산(山)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한 사패산 산행은 최단코스를 이용해 산행을 마무리 하고 북한산 비봉으로

산행을 위해 진관공원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한후 차박(泊)준비를 한후 비봉산행을 위하여

잠을 청하여 본다 4월27일 07시에 빵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진관사 일주문을 향해 걸었다

삼각산진관사(三角山津寬寺)일주문(一柱門

일주문 편액에는 三角山津寬寺(삼각산진관사)라고 되어 있었는데 북한산은

북한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 일명 한산, 삼각산(三角山) 또는 화산이라 불렀으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하였고 옛날 개성의 송도에서 한양으로 오다가 이 산을 바라보면

백운대(白雲臺), 만경대(萬景臺), 인수봉(仁壽峰)의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산행지도에는 일주문 지나기전 좌측길이 있는데 보이질 않아서 진관사에서 내려오시는 어르신께

북한산 비봉 가는 산길을 여쭈어 보니 해탈문을 가러키면서 왼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가더라 이야기해 주셨다

진관사 해탈문(津寬寺 解脫門) 과 산행들머리

산행지도에 있는 진관사 일주문 가기전 응봉능선 산행코스 그림이 같았는데

지도를 제작한 사람이 일주문과 해탈문이 조금 헷깔린듯 하였는듯 하다

만약에 오른쪽으로이야기 해주셨다면 진관사계곡을 따라 향로봉을 먼저 올랐을것이라 생각에

그 어르신께 감사 드리며 아침 새소리를 음악처럼 들어면서 응봉능선(鷹峯稜線)산길을 걸었다

사모바위2.1km안내표지목

초록이 물들고 산새소리도 없이 고요한 산길을 걸어본다 북한산 비봉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 비봉이라 하는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9-1856)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예술가로 글씨를 잘쓰는

명필(名筆)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인데 갑자기 왠 김정희 선생의 이름을 이야기 하는것은

진흥왕순비와 큰 관련이 있어 그렇다  김정희는 39일간의 짧은 연경 유학을 마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금석학 연구에 나서기 시작했다는데 김정희가 주목했던 것은

북한산에 위치한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였다.

신라 24대 국왕인 진흥왕은 국경지대를 순시한 뒤 북한산 비봉을 비롯한 한반도 각지에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비석들을 세웠다.

팥배나무와 소나무

사모바위 방향으로 가는길에 고요한 아침에 팥배나무꽃이 그래도 나를 반겨주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직접 몇차례나 북한산 비봉 암벽을 올라 손상된 비석을 닦아내 탁본을 떴고

복원된 문장들과 역사기록을 대조해가는 수고를 감수하며 비석을 해독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무려 1년여간의 기나긴 노력 끝에 김정희는 마침내 이 비석의 정체가 진흥왕 순수비이고,

진흥왕이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한 치적과 의의를 기록한 내용임을 알게 된다.

김정희 선생의 노력 덕분에 잊혀질뻔했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세상에 다시 알려질수 있게 된 것이다.

소나무 숲길

아침햇살이 소나무 사이로 번져 나갔다 난 소나무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유년기 시절부터 우리의 친구이기에 그렇다

여름에 소나무 아래서 놀고 소먹이러 나가면 소나무에 묶어두고 놀고 소나무 낙엽 깔비를 끍어모아 땔감으로 하고

봄에 소나무 새로운 가지는 먹을게 없는 우리에게 간식을 제공하였던 소나무이다

내가 비봉을 가고싶었던 이유중 하나는 진흥왕순수비를 보고싶어서 그렇다

지금 자리에는 진흥왕순수비가 있던 자리에 똑같이 만들어 모조품을 세워 놓았지만

옛날 선조들이 어떻게 여기에 세웠는지도 궁금하였다

암릉길 사이로 비봉조망

암릉길 사이로 저멀리 비봉이 보이기 시작 하였다 나는 북한산 백운대 신선대만 올랐고 오늘 비봉과 향로봉을

올라보는 기회를 얻어 이렇게 북한산 산길을 걷고 있다

북한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 일명 한산 또는 삼각산(三角山) 또는 화산이라 불렀고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하며 옛날 개성의 송도에서 한양으로 오다가 이 산을 바라보면

백운대(白雲臺), 만경대(萬景臺), 인수봉(仁壽峰)의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이곳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고 한다.

또한 무학대사(無學大師)이성계를 위해 도읍지를 정할 때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올랐다가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렀다고 하여 만경대를 일명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비봉은 진흥왕순수비가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관사(津寬寺)조망

암릉길에서 진관사를 줌으로 당겨서 촬영해 보았다 북한산 골짜기에 명당터에 자리잡은듯

북한산 능선이 좌우로 진관사를 감싸고 있는듯 보였다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진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誌)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은평지구의 조망

서울 근교 4대 명찰로 손꼽히는 진관사는 템플스테이 체험으로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힐링 장소라고 하며

진관사 근처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한옥마을이 있어 도심 속에서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다.

은평구 중심을 가로질러 한강으로 이어지는 불광천 주변에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 등이 조성되어 있어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응암동 대림시장 감자국거리를 가면

저렴하고 맛있는 감자탕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북한산 의상능선의 의상봉 조망

산에 오르다 보면 산이름이 의상대사의 의상봉이 많이 있고 사찰은 원효대사 흔적이 많았다

북한산에서 최고의 능선은 의상능선이라고 하며 북한산에서 가장 알려진 능선은 비봉 능선

의상 능선 그리고 최근에 젊은 산객이 많이 찾아 핫플이 된 숨은벽 능선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시 북한산 최고의 능선은 의상 능선이라고 하는데 의상 능선은 높낮이의 굴곡이 심해

작은 공룡 능선이라고 하며, 큰 산을 갈 때 준비하기 위해 의상 능선을 찾는 산꾼들이 많고

그만큼 어려운 능선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들어 어려운 곳은 계단을 설치해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어려운 코스라 한다

응봉 (鷹峯)332.9m

응봉능선(鷹峯稜線)에 있는 응봉 또는 매봉이라하는데 북한산 12명봉 중 가장 높이가 낮은 것이 응봉鷹峰(333m)이며

산 아래에서 보았을 때 매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유래한다고 하며

응봉 꼭대기는 정상표지석이 없을 뿐더러  안내판이도 없어 여기가 응봉인지 알수가 없지만

트랭글 앱 덕분에 응봉인줄 알았고  숲 속이라 봉우리다운 경치가 없고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 산길이다.
응봉이란 봉우리보다는 응봉능선의 손을 들어 준 것이며  사모바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응봉능선 초반부에 황금비율의 경치가 드러나는 너른 전망바위가 있고 이곳이 실로 응봉능선의 백미라고 한다 

북한산 의상능선의 의상봉(義湘峰) 조망

북한산성 대서문 방면에 있는 봉우리로 의상봉 높이는 해발 502m이며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한하며 명칭은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고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지만 정상은 평탄한 편이다.

북쪽으로 원효봉(元曉峰)과 마주하고 있으며

이 봉우리에서 남쪽의 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나한봉~715봉~문수봉으로 의상능선이 이어진다.

응봉능선(鷹峯稜線)암릉산길

삼천사에서 응봉까지는 1km 거리이며 흙길이라고 하며  굳이 난이도를 따지면 쉬운 코스 이지만

중간 난이도로 꼽은 것은 상행이든 하행이든 비봉능선의 사모바위까지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산행 코스는 구기동에서 승가사를 거쳐 사모바위에 올랐다가 응봉능선으로 하산하는 것이며

응봉은 진관사에서도 오르는 산길이 있어, 진관사계곡을 거쳐 비봉과 사모바위에 올랐다가

응봉능선을 따라 원점회귀가 가능하고 반대로 삼천사에서도 응봉능선을 거쳐

문순봉과 나한봉~나월봉을 거쳐 부왕동암문에서 삼천사로 원점회귀 가능하다고 한다.

응봉능선에서 우측으로 나란히 뻗은 기자능선과 은평지구

기자능선을 탄다면 그 코스는 기자촌 옛터(주차) ~ 기자공원지킴터 ~ 기자능선 ~ 향로봉 ~ 비봉 ~ 향로봉

~ 선림봉 ~ 선림공원지킴터 ~ 기자촌 옛터(주차) 5시간 정도 소요 된다고 한다

아마 북한산 구석 구석 산길을 걸어 보려면 산아래 숙박을 하면서 올라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주는 지리산과 가까워서 지리산을 자주  업무상 오르는고 그냥 오르고 해서 100번도 더 올랐을텐데

아직도 구석 구석을 모르는 것처럼 북한산도 구석구석 가보려면 많이 시간을 투자해야 가능할듯 하다

진관사 계곡 상단의 웨딩바위

슬랩등산을 하는 산꾼들은 훼딩바위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절벽이 긴훼딩드레스 처럼 생겨서 그런가 싶은데

저기를 오르는 산꾼들을 7단이라 해야하나 우스개 이야기로 산꾼도 등급을 정하면 9급부터 10단까지 있는데

바위틈을 비집고  얼음을 붙들고 하면 유단자 중수에 속한다고 한다

도심에 이렇게 경치좋은 산이 있다는게 정말 도시인들에게는 행운이고

코로나 이후 부쩍 늘어난 젊은 등산객도 상당히 늘어 난듯 가는곳 마다 젊은이들 보이고

웨딩바위는 서울에서 3대 슬랩중 하나라고 한다

비봉(碑峰)의 조망

내가 저기까지 걸어가야 할 지점이며 빨리 걸어서 비봉찍고 하산해서 다음 산행지 불암산에도 가야 서울에 온 보람이 있다

천리길 진주에서 한양땅에 달랑 산봉우 하나만 찍어면 어찌 억울해서라도 해가 있을때 올라야 한다

처음 계획되로라면 북한산 비봉은 어제 오후에 완료 해야 되는데 어쩔수 없이 플랜B 등산을 하고 있다

서울 은평구는 북한산을 비롯해 봉산, 앵봉산, 백련산 등 많은 산과 공원이 구 전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응봉능선과 의상봉능선을 가로지르는 삼천사계곡이나 절묘하게 V자를 그리는 진관사계곡 등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이 빼어난 자연경관에 천 년의 문화유산들은 역사의 향취를 더하며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462호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와 보물 제657호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千寺址 磨崖如來立像),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4호 수국사 극락구품도(守國寺 極樂九品圖)

제144호 진관사 나한전소조십육나한상(津寬寺 羅漢殿塑造十六羅漢像) 등이 은평에 있다.

의상능선 넘어 멀리 보이는 북한산 주능선 영봉들 조망

북한산국립공원의 대표적인 지질명소로는 인수봉, 사모바위, 구천계곡 등 능선과 계곡을 따라 위치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수도권 최고의 야외 지질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거대한 화강암이 빚어낸 ‘선인봉, 자운봉, 만장봉, 우이암, 오봉’은 도봉산을 대표하는 봉우리로 장관을 이룬다.
이처럼 북한산국립공원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1,3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문화유적과

100여개의 사찰, 암자가 곳곳에 위치하여 다양한 볼거리와 생태, 문화, 역사 학습장소를 제공한다.

응봉능선 봉우리와 비봉 조망

보통 산행자들은 삼천사를 들머리로 잡고 진관사를 날머리로 하는데 혼산에다 주차까지 했으니

이러한 코스를 탈려면 시골사람이라 택시를 타야 원점으로 가겠지만 오늘은 그냥

진관사에서 응봉능선을 타고 향로봉을 거쳐서 진관사로 하산하는 게획으로 지금 응봉능선에 있다

북한산에 오르니 보이는것마다 큼직한 돌덩어리들이 수석장을 만들어 놓았고 합천 가야산 만물상 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은 없지만 그냥 크다 높다 라고만 이야기 할수 있겠다

돼지야..?

응봉능선을 오르다 보면 동물들과 비슷한 생김새를 한 크다란 돌덩어리들이 보이며

어케 굴러 떨어지지도 않은체 수백년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북한산에는 둘레길도 조성되어 있고 하기사 요즘 어딜가던 저수지 둘레길 까지 있으니

당연하게 북한산 둘레길도 있기 마련인데 둘레길의 은평구간은

옛성길·구름정원길·마실길·내시묘역길·어울림구간 등으로 나눠진다.

둘레길 곳곳엔 템플스테이·사찰음식을 체험해볼 수 있는 진관사와 여러 문화유적 등 외국인을 위한 공간도 있다.

옛성길구간(탕춘대성암문 입구~북한산생태공원 상단)은 북한산 둘레길 중 유일하게 성문을 통과하는 구간이며

조선 숙종 때 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탕춘대성암문에서 북한산 생태공원 상단으로 이어진다.

전망대에서는 보현봉, 문수봉, 비봉, 향로봉, 족두리봉 등 다양한 봉우리들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고 한다

응봉능선의 바윗돌

응봉능선에 크다란 바윗돌을 그늘 삼아서 잠시 쉬어보며 들머리에 있던 은평한옥마을이

경남 산청에 있는남사마을이 떠 올랐고 은평 한옥마을은

북한산 자락 약 7만㎡ 부지에 ‘21세기 서울형 한옥마을’을 조성했다고 하며

한식·한옥 등 ‘한()’을 브랜드로 상품화해 인근의 역사자원(진관사·삼천사 등)과

자연자원(둘레길·생태공원)을 연계하며 은평한옥마을 토지분양은 2012년 상반기에 이뤄졌다고 한다

암반위 홀로선 나무

나는 산길을 걷다가 보면 이러한 모습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어찌 흙이라고는 찾아 볼수가 앖는 돌덩어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있는 나무를 보면 인간의 삶은 보잘것 없고 인내도 없고 그렇게 보일때가 많은데

저 나무 처럼 척박하고도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있는 사람이 되고자 다짐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작심삼일도 무색하게 자나가버리면 가마덕하게 잊고 또 세속에서 숨쉬고 있다

공룡등뼈

마치 커다란 공룡 등에 서 있는 것처럼 공룡 등뼈가 울퉁불퉁하게 나온것처럼 보인다

북한산은 서울에 근접해 있으면서 자연 경관이 뛰어나 1983년 4월 경관의 보존과

합리적 이용을 도모하기 위하여 도봉산(道峯山)일대와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나한봉에서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1711년(숙종 37)에 축조된 연장 8㎞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있으며,

지금도 14개의 성문 중 대서문(大西門)·대남문(大南門)·대성문(大成門)·보국문(輔國門)·

대동문(大東門)·용암문(龍巖門) 등이 남아 있다.

은평구의 조망

아주 커다란 용의 등에 타서 서울 은평구를 발아래로 펼쳐져 있는데 미세먼지로 인해 재빛 그자체다

은평구를 대표하는 연신내 로데오거리는 일식, 한식, 양식, 퓨전 음식점 등 다양한 먹을거리와

액세서리·의류 쇼핑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거리라고 하며

이곳엔 지하철 지하수를 재활용한 친환경 도심공원 ‘물빛공원’도 눈길을 끄는 곳이라고도 하며

종종 ‘찾아가는 음악회’가 열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곳이라고도 한다

의상능선 넘어 삼각산 조망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 北漢山)은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도 서울의 상징이자 수호신으로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듯 싶다

북한산의 특징적인 매력은 미끈하게 잘 빠진 화강암 봉우리에 있다고 하며 내내 걷는동안 덩치큰 돌덩어리 이며

북한산의 최고봉 백운대, 암벽 등반의 메카 인수봉, 무속인의 성지 보현봉 등 총 32개의 봉우리가

저마다 독특한 바위미를 자랑하고 있으며 북한산을 즐기기에 좋은 방법은 능선 산행이 라고 한다.

주능선, 의상능선, 원효능선, 우이능선, 진달래능선 등 북한산의 뼈대를 이루는 여러 능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단연코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비봉능선이라고 한다.

돼지코 바위

멧돼지가 아닌 집돼지가 우리를 뛰쳐나와 북한산에 터를 잡았나 보다 북한산의 풍경에 빠져서

이렇게 떡하니 한곳을 자리하고 있었다

북한산 비봉능선의 등산 코스는 구기동을 들머리로 비봉, 승가봉, 문수봉을 차례로 넘고 대남문에서

구기동으로 하산하는 길이 정석이라고 하는데 혼산 하는 나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산행지도 한장 달랑들고 오늘 산행이지만 구석구석은 챙겨 두루 살펴가는게 나의 산행길이며

구기동 이북5도청을 지나 골목길 모퉁이를 두어 번 돌면 비봉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산행이 시작되면서 작고 아담한 계곡이 펼쳐진다고 하고 졸졸 흐르는 개울을 기분 좋게 따르면

왼쪽으로 목정굴(木精窟) 안내판이 나오는데 등산로는 오른쪽이지만 목정굴을 구경하고 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사모바위에서 바라본 북한산 봉우리들

북한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와 마치 춤을추듯 곡선을 그리며 내 앞에 다가왔다 맘 졸이며 오르니 세상이 발아래다.

기묘한 바위 사이로 조망이 터져 나오고 아찔한 암릉길이 하얗게 엎어진 길을 걸어면

용의 허리가 돌에 누워 있는 듯하고 나는 용의 등을 걷는듯 하다.

족두리봉이 문수봉에 예를 갖춘듯 보이고  승가봉과 비봉, 향로봉이 바로 있으며 너른 공터엔 사모바위가 절묘하다.

사모바위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과 양천구 목동과의 경계지점에 있던 바위로서 바위 모습이

마치 사모나 감투처럼 생긴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바위를 보면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 쓰는 모자와 비슷하고 병자호란때  한 젊은이가 전쟁터에서 집으로 도로아와 보니

사랑하는 여인이 청나라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북한산에 올라가 북쪽으로 바라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그 자리에서 바윗돌로 변했다고 하는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 오고 있다

지금의 독립문이 청나라에서 독립되어 세운 독립문이라는걸 요즘 세대들은 국사공부를 했는지 모르겠다

사모관대의 사모(絲帽)를 닮은 사모바위

1968년1월21일 청와대를 습격을 위해 남파한 간첩 김신조 일당 31명이 내려오다가 피신했다고 해서

김신조 바위라고도 하는데 우리민족은 역사이래 930여 차례 중국과 일본에 침략을 받기만 하였고

힘없는 우리는 일방적으로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 과거의 역사가 있다

지금은 그것도 모자라 남북으로 우리끼리 총칼을 겨누고 한쪽은 정치적 이득을 위해 당쟁만 하는

조선이나 대한민국이나 똑 같은 복사판 같다

비봉0.5km안내표지목

비봉능선을 대표하는 명소인 사모바위에서 옛 문무백관의 모자를 닮은 기암에서 여러장의 인증사진도 남겨보고

삼각대 세우고 사모바위의 풍경에 앵글에 담아보고 응봉능선에서의 마지막 구간에서 비봉으로 내려 선다

사모바위 넓은 공간엔 등산객이  삼삼오오 앉아서 쉬고 있었고 수려한 암봉이 곳곳에 널려 있는 모습을 감상하니

역시 명산 중의 명산 북한산 이라 하겠다

비봉방향 탐방로

탐방로는 큰돌맹이로 흙길에 해놓았는데 산길을 걷다보면 이러한 곳이 북한산 뿐만 아니라 많이 볼수 있는데

산꾼들은 이러한 길이 불편해서 흙이 있는 길을 걸어서 또 다시 길이 생긴곤 한다

사모바위에서 내려와 비봉으로 향하는길인데 초록이 무성하고 능선길을 걷는데 시원한 바람이 땀을 씻어주었다

사모바위에서 매봉쪽으로 조금 걸으면 북한산 의상봉능선과 백운대가 한눈에 보이는 조망 명소가 있었고

그  풍광을 보면 삼천사 계곡과 의상봉능선, 백운대 풍경이 장엄하며 북한산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코뿔소 바위

북한산까지나 코뿔소가 올라왔나 보다 북한산 풍경을 볼수 있는 산길이 여기저기에 많다고 하는데

북한산 산행중 나이도가 제일 낮은 구간이 대남문코스라고 하며 대남문코스는 북한산성의 역사와 풍경을 즐길수 있는

코스라고 하며 가을날에는 단풍과 야생화 그리고 야생돌물도 관찰 할수 있는 산길이라고 한다

지금의 북한산이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과 지명을 개편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고 하며

이런 이유에서 북한산 명칭을 일제 잔재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렇게만 보기 어렵다

왜냐 하면  신라의 24대 왕 진흥왕은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정확한 명칭은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다. 삼국시대부터 북한산이라 불린 것이다.

코뿔소 바위

북한산 명칭은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이 지정되면서 공식 명칭으로 인정되었으며

그러면서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공식 문서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고 한다.

서울 강북구에 있는 행정동 삼각산동은 잊혀가는 삼각산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지명이며

이 지역은 주민 99%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560m

북한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 일명 한산, 삼각산() 또는 화산이라 불렀으며

신라 때에 는 부아악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하며 옛날 개성의 송도에서 한양으로 오다가

이 산을 바라보면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이곳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고 한다.

또한 무학대사()이성계를 위해 도읍지를 정할 때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올랐다가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렀다고 하여 만경대를 일명 ‘국망봉()’이라고도 한다.

비봉은 진흥왕순수비가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제작년도는 555년경 진흥왕16년이며 높이 154.0 cm, 너비 69.0 cm이라고 한다

6세기 중엽 신라는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대외적으로 크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재위 540~576)이 새로 확보한 영토를 돌아보며,

여러 곳에 세운 순수비 중 하나다. 555년 무렵, 지금의 서울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있었는데, 1816년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이 비를 조사한 후에 그 참모습이 밝혀지게 되었다. 비의 왼쪽 면에는 김정희가 밝혀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서울 북한산 일명 삼각산(三角山) 남쪽 승가사(僧伽寺) 서남방에 위치한 비봉(碑峰) 꼭대기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 부근에 승가사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의 탑비가 있어

종래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순조 16) 7월에 김정희(金正喜)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이 비석을 조사하고, 다시 이듬 해 6월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조사하여

68자를 심정(審定), 비로소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진흥왕은 553년(진흥왕 14)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방을 빼앗아 이 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으며

555년(진흥왕 16) 10월에는 몸소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기념해 순수비를 세웠을 것으로도 보인다.

북한산비에는 일척간(一尺干: 伊飡의 별칭)의 고위관등을 가지고 있던 내부지(內夫智)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남천군주(南川軍主)의 직명도 나타나 있어, 신라시대의 인물 및 관직제도 연구에 참고가 된다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560m

북한산 비봉 입구의 진흥왕 순수비 설명문에는 아래와 같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직접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수비를 이곳에 세웠다.

이 곳에는 비석이 있던 자리와 비석을 꽂았던 홈이 남아있는데,

비석이 세워진 곳이라고 하여 북한산 비봉의 이름이 생겨났다.

비석을 세운 이래 1,200년동안 잊혀오다가 19세기 전반에 추사 김정희가 비문을 판독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확인하였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광개토왕비와 함께

삼국시대 역사연구에 귀중한 금석문으로서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코뿔소 바위

비봉 진흥왕순수비 가파른 암릉을 타고 내려와 코뿔소 바위를 한번더 감상 해본다

비봉은 북한산 비봉능선의 향로봉과 사모바위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서 높이는 해발 560m이다.

명칭은 이 봉우리 정상에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데서 유래하였는데,

원래의 순수비는 훼손을 막기 위하여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관하고 있다.

순수비가 있던 자리는 1972년 사적 제228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 복제비가 세워졌다.

비봉탐방지원센터에서 금선사를 거쳐 비봉까지는 2㎞ 거리에 약 1시간 20분이 소요된다.

비봉의 조망

향로봉 가는길에서 비봉을 바라 보았는데 크다란 암봉위에 진흥왕순수비가 우뚝 서있는게 보인다

옛날 사람들이 어떡게 저 암봉까지 올라가서 비석을 세웠는지도 궁금하고

근처 돌을 케서 현장에서 비문을 새겼을수도 있겠다 생각도 들었다

진흥왕순수비를 보면 진흥왕 업적을 알수 있는데 진흥왕은 7살 때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어렸기 때문에 한동안은 태후의 섭정을 받게 되었다고 하며 그리고, 이사부가 보좌하는 식으로 해서 

한동안은 정권을 유지한 듯 하며  초기 시절에  거칠부에게 명해서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게 하기도 했다.

향로봉(香峰)  527.4m

북한산의 족두리봉과 비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527.4m이며

산정에는 표지석이 없고 향로봉 오르기 직전에 말뚝형식의 표지목이 있었다.

향로봉 명칭은 봉우리 모양이 멀리서 보면 향로처럼 생긴 데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구파발 방면에서 보면 사람 옆모습을 닮았다 하여 인두봉이라고도 하고,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하여 삼지봉이라고도 한다.

정상 부근은 추락위험지역이어서 2인 이상 안전장구를 갖추지 않으면 출입을 제한한다고 한다.

향로봉(峰) 527.4m

향로봉 봉우리에서 바라보면 조망은 서울 도심의 발아래로 펼쳐지고 주변 북한산 능선들이 다가온다

우리가 산행을 하다보면 입산금지 구역을 만날수가 있는데 그 역사를 보면

최초의 입산통제 정책은 금산(禁山)제도를 꼽을 수 있으며

조선시대 귀중한 목재 자원인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세종 때 전국에 금산으로 지정된 곳이 200여 곳에 이르렀으며, 이를 어길 경우 곤장 90대를 때렸다고 한다.

입산보다는 벌목을 금지시키는 데 더 주안점을 두었다고 하며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지금의 의미를 가진

입산통제가 시작되었는데 다만 예방의 목적은 시기별로 조금씩 다르다.

처음에는 간첩을 막으려고 했고 1968년 3월 서울시경은 정릉, 도봉산, 우이동, 세검정, 삼청공원 등

5개소 18개 지역에 대해 민간인의 통행을 일절 금지시켰는데 북괴무장공비나 간첩이 산악을 타고 침투할 경우

간첩 색출이 어렵고 작전상 지장이 많다는 이유였다고 하며 이는 같은 해 1월 발생한 김신조 사건의 영향이 컸다.

1970년 10월에는 입산통제 산에서 캠핑하던 학생들을 간첩으로 오인하고 총격을 가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향로봉에서 바로본 족두리봉과 은평구

은평구 지역의 도심이 재빛 하늘아래 펼쳐져 있으며 미세먼지로 인하여 조망이 멀리까지볼수없어 아쉽기만 했다

족두리봉은 조선시대에 여인들의 머리 장식이며 전통결혼식에도 신부는 족두리를 머리에 쓰고 한다

서으르시 은평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도인 한성부를 5부(중부, 동부, 서부, 남부, 북부)와 53방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개편하였으며 북부 중에 연은방과 상평방에 해당한 곳이 은평지역이었고,

은평이란 명칭은 바로 이 두 방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와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잠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으로 개편되었으나, 해방 후 1949년 대통령령으로

다시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79년 10월 1일에 서대문구에서 분구하여 기존의 은평 출장소가 폐지되고

은평구로 승격되었다고 하며  서울의 역사와 함께 한 은평구는 조상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족두리봉의 조망

족두리봉은 북한산 가장 남서쪽에 솟은 높이 370m의 봉우리 이며 멀리서 보면

봉우리 모양이 족두리를 쓴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한편으로는 독수리의 머리처럼 보인다고 하여

수리봉, 인수봉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고 하여 ‘작은 인수봉’으로도 불린다.

불광역에서 출발하면 약 50분이면 족두리봉에 오를 수 있다. 시간은 짧지만, 난도는 조금 높다.

급경사의 계단은 물론 위험한 바위 구간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은평구 조망

북한산 비봉에서 향로봉을 올라보고 넓다란 암릉길에서 서울도심 은평구를 바라보았다

은평구의 법정동이자 행정동. 통칭 구파발 또는 기자촌 신문사 기자들이 이 동네에 모여 살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이름은 현재 3지구 11단지 한라비발디 아파트의 부명칭으로 반영되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은평뉴타운이 개발되어 은평뉴타운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동네이라고 하며

2023년 기준 은평구를 비롯하여 서울특별시에서 단일 행정동 크기로 가장 큰 면적을 관할하며,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행정동이다.

철저한 계획 하에 신도시급 규모로 최신식 아파트를 배치한 동네라 그런지

주택가 위주인 은평구 타 지역(특히 6호선 라인)과의 이질감이 좀 있는 편이며

 진관동과 불광동의 경계인 메뚜기다리를 넘자마자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인 서울 외곽지역이라 진관동 내에 주둔하는 군부대도 꽤 많다.

향로봉 갈림길

봄에서 계절이 여름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듯하다 한여름 같은날 북한산의 응봉상능선을 오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봉우리들의 행렬 앞에서  큰바위덩어리들을 보며 감탄을 내고  한 봉우리를 넘었는데

이내 다른 봉우리가 앞을 막아서는 산길에서 어려움보다는 반복의 암릉구간이 너무 좋았고

산길여정이 주는 풍경에서 고단함도 잊어 버렸다

진관사방향 하산길

오늘 보고싶었던 진흥왕순수비를 보고 비봉과 향로봉에서 북한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서

초록이 무성한 산길을 따라 원점으로 진관사방향으로 하산을 해본다

짝을 찾는 새소리인지 자기구역에 들어왔다고 짖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새소리와 함께 걷는다

북한산 산행은 산봉우리들의 순례라고 해야 할듯 봉우리들이 많았고 힘들여 오를 이유가 넘 좋다

산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또 올라가봐야 어차피 내려와야 할 여정이 분명한데 왜 힘들게 가나 한다

발품을 팔지 않고는 이렇게 멋진 산하의 풍경을 볼수기 없기에 그렇다

진관사 대웅전(津寬寺 大雄殿)

진관사 도량에는 머지않아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날 준비에 분주하게 보이고 연등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며 고려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하여 진관사를 창건하였고

고려경종이 죽자 젊은 왕비는 왕태후가 되어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나누다가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 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왕욱(王郁: 安宗)의 직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기도록 하였다.

신혈사는 진관(津寬)이 혼자서 수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사실을 눈치 챈 진관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열두 살인 대랑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3년 뒤 목종이 죽자 대랑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현종이 되었고, 1011년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뒤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고 전한다.

진관사 해탈문(解脫門)

해탈문(解脫門)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가는  가지 선정(禪定) 통틀어 이르는 말이며

공해탈문, 무상 해탈문, 무작 해탈문의  가지가 있다고 한다.

진관사 해탈문 앞에는 바위 하나가 지면에 노출되어 있는데 그 바위에는 ‘마음의 정원’이라는

문구가 명조체로 새겨져 있어 마음의 정원. 소박한 다섯 음절은 소리 없이 읽기만 해도 풍요를 느끼게 하였다

지금이 초록이 더욱 짙어지는 계절이라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진관사가 추구하는 마음의 정원은 누군가 잘 가꿔놓은 정원에 들어가 걷고 구경하는 공간이 아고

 ‘스스로 심고 가꾸고 다듬어 감으로써 결국 스스로 부처가 되어가는’ 실천형 정원이라고 한다다. 

극락교

진관사 극락교에서 우측으로 가면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인데 오늘은 여기 이길로 날머리로 삼았다

하산길에 진관사를 참배하고 둘러 보았는데 진관사의 가람은 나란히 서 있는 게 특징이며

가운데 대웅전을 중심으로 타원형 공간에 크고 작은 가람들이 적당한 여백을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진관사에서 늘 주목받는 가람은 칠성각이라 하며 칠성각은 원래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와

빛나는 지혜로 중생을 가르치는 일광보살, 달처럼 청정한 덕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월광보살, 칠성대군은 민간 신앙으로, 불교에 흡수된 칠성신앙의 상징이며

칠성신앙은 인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대군을 모신 곳이다.

석조여래좌상과 칠성도가 봉안되어 있는 이곳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이 담겨있었다.

산행종료

진관공원영주차장에서 산행을 마무리 하는데 밤새 여기서 차박을 하였고 선결재 카드를 집어 넣어니 18000원 결재

북한산 비봉(北漢山 碑峰)산행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가 있는 복한산 비봉에 올라 

진훙왕 순수비에 담긴 이야기 그리고 진관사에 얽인 이야기와 북한산 풍경에 젖어

응봉능선을 타고 비봉을 그쳐 향로봉까지 이어지는 산길에서

북한산은 아직도 갈곳이 많이 있구나 백운대만 가는곳이 아니라는걸 새삼 느꼈다

 

※ 출처:

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유정열1000명산견문록

한국의산천 손경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월간 山(아웃도어 매거진).

신 산경표 박성태 조선일보사

해설 대동여지도 최선웅 민병준 진선출판사

인문산행 심산 바다출판사.

한국1000산 신명훈 깊은솔

산에서 만든 튼튼한 허벅지가 연금보다 낫다,오혜령 박옥남,복랩

진관사,은평구청, 북한산국립공원 홈페이지 지역신문 및 지역주민 인터뷰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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