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늑대 FORCE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금오산성(金烏山城)을 따라 왕의 기운이 서려있는 금오산 산정을 걷다 본문

바다늑대/山 & 旅行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금오산성(金烏山城)을 따라 왕의 기운이 서려있는 금오산 산정을 걷다

바다늑대FORCE 2022. 12. 12. 14:38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

금오산성(金烏山城)을 따라 왕의 기운이 서려있는 금오산 산정을 걷다

 

▲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

  높이 : 976m

  위치 :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칠곡군 북삼면에 걸쳐있는 산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나의 산행일 :

   2022년12월11일 일요일 날씨 : 맑음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나의 산행코스 :

  금오산공영주차장→케이블카탑승장→대혜폭포→ 할딱고개 →오형돌탑→마애보살입상→약사암

→ 현월봉(구)정상석 → 금오산 현월봉 →금오산성중수송공비→성안마을터 성안전위봉→칼다봉→할딱고개

→대혜폭포→금오산공영주차장

12.84km  5시간47분 소요(트랭글 앱 기준)

 

▲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개요  :

경북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에 걸쳐있는 금오산은 특이한 산세를 자랑하며 정상 일대는 분지를 이루고 있고

그 아래쪽은 칼날같은 절벽이 병풍을 이루고 있으며 산세가 가파르다.

정상부는 달이 걸린다는 정상인 현월봉(懸月峯), 약사여래의 전설이 담긴 약사봉과 보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 부근은 하늘로 비상하려는 새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고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 모습 같기도 하여

와불산(臥佛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외관이 장엄한 만큼 명소도 많은 금오산은 야은 길재선생과 고사리에 얽힌 전설로도 유명하며

금오산의 명소로는 금오저수지, 채미정, 명금폭포, 도선굴 등이 있다.

197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관광시설이 골고루 갖추어진 명승지이며 정상부근에 길이 2km의 금오산성이 있고

단풍의 명소로 일명 금강이라 불리우며 옛부터 경북 8경의 하나로 꼽혀왔다.

정상에서 북동쪽으로는 금조 저수지와 구미시가 보이고 경부 고속도로와 낙동강구비가 보이며 동쪽으로는

구미공업 단지, 북서쪽으로는 효자암, 제석봉, 국사봉이, 북쪽으로는 선산읍이 보인다.

산 정상의 금조산성 암벽밑에는 약사암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 기슭에는 고려 말 충신 길재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채미정이 있다.

이밖에 북쪽계곡의 중턱에는 금오폭포와 도선굴이 있고 북서쪽의 거대한 암벽에는 마애불이 부각되어 있다.

 

▲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산행지도

 

▲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

나의 트랭글(TRANGGLE) 궤적도(軌跡圖)

→→→→→→2022년 12월11일 일요일 대한민국(大韓民國) 구석구석 산(山)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진주지역의 솔산악회 따라 산길 나선게 오늘 4번째 인데 구미 금오산은 일출산행을 위해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일요일 간다기에 그냥 일출산행은 접어두기로 하고 진주지역에서 오래된 솔산악회 따라 구미 금오산으로

길을 나서본다

금오산(金烏山) 입구

구미 금오산공영주차장에서 케이블카탑승장으로 가다보면 대문처럼 커다란 홍보용 전광판이 있으며

구미공영주차장 주소는 경북 구미시 금오산로 400이며 제1주차장으로 안내된다

금오산(金烏山)의 높이는 976.5m로 기암 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산행 탐방로는 경사가 급하고 험난한 편이나 산정부는 비교적 평탄하다고 한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금오산(金烏山) 들머리

금오산 케이블카 탑승장 가는 방향의 들머리인데 금오산 산 아래는 토종 소나무가 빼곡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가는길이 솔향기 그윽하여 걷는것만도 솔향기가 폐속 깊숙히 스며들어 힐링이 되는듯 하다

금오산라는  이름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금오산의 능선을 유심히 보면 ‘왕(王)’자처럼 생긴 것 같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 모양인데

조선 초기에 무학(無學)도 이 산을 보고 왕기가 서려 있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정상3.3km안내표지목

안내표지목 옆에는 금오산성사적비가 있으며 소나무 숲이 빼곡한게 우리나라 전통 소나무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금오산성탐방안내소를 지나서 금오산 케이블카 매표소를 지난 약1.1km 지점과 금오산 정상부에 있으며

금오산 산정까지는 3.3km이면 산꾼이라면 손쉽게 오를수 있는 거리같지만 금오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단과

오르막길의 연속이며 특히 끝이 보이지 않는 데크계단을 보면 무릎이 걱정되기도 하는 탐방로 이다

오르막 데크계단길

금오산 탐방로는 대부분 데크계단 오르막 산길인데 능선길 구경하기 힘든곳이였다

정상까지 그야말로 땀을 쏙 빼는 코스다

구미 금오산은 구미시의 성장과 함께 관광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며

좁고 긴 계곡 입구에는 금오산 저수지가 있으며 구미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계곡 안에는 고려 말의 충신이요, 성리학자인 길재(吉再)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세운 채미정(採薇亭)이 있는데 일명 금오서원(金烏書院)이라고도 한다.

금호동학(金烏洞壑)각자 바위

금호동학이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는 금오동학(金烏洞壑)이란

조선조 중종때 선산 대망동에서 태어난 명필가 덕산인(德山人)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가 쓴 것으로

금오산은 깊고 그윽한 절경임을 뜻하는 글귀로 사람을 위압할 큰 글씨로 초서(草書)로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금오산의 깊고 그윽한 절경 을 뜻 한다는 이야기 인데 오늘 산행에서 그 이야기를 음미해보자

금오산성 대혜문(金娛山城 大慧門)

금오산성은 둘레 약 3.5㎞로서 현재 남·서·중문 및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만든 성문)과

건물지 등이 남아 있으며 처음 축조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입보피란(入保避亂:들어와 보호받으며 난을 피함)의 요충지로 이용되었던 대규모 산성이다.

이 성은 산의 정상부를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과 정상부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는 큰 계곡을 끼고

포곡식으로 쌓은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은 높고 험한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공력(工力)을 줄였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둘레 2.7㎞ 정도의 테뫼식 내성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여기에 고려시대 말에

선산·인동·개령·성주 등 주변 여러 고을의 주민들이 왜구를 피하면서 병정을 뽑아 지켰던 자취가 배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에 군창(軍倉)을 마련해 놓고 선산·개령·약목 등의 주민이 입보할 수 있도록 양식을 저장하였고

1410년(태종 10)부터 1413년까지에 걸쳐서 성을 수축하였다.

또한 안내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오산성(金烏山城)

금오산성은 조선조 초에 인동의 천생 산성과 같이 낙동강을 낀 영남 지방의 전략 요충지로서

3,500여 명의 군 병으로 선산, 개령, 김천 지례 등 4군을 관할하였으며

특히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에는 정기룡 장군이 왜적을 맞아 이 산성을 지켰던 곳이기도 하다.

이 산성의 축성과 규모는 1410년(태종10)과 1595년(선조28)에 축성하였으나 그 규모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1639년(인조17)에 수축한 내 성은 둘레 7,644m척(2,316m), 높이 7척(2.1m) 자연절벽이 661보이며

외성은 둘레 4,135척(1253m) 높이 14 척(4.2m)이고, 성안에는 못 7개소, 샘 8개, 1개의 걸(개천)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후 1868년(고종5) 11월에 산성을 보수 정비하였으며

이때 세웠던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가 성내에 현존하고 있다.

해운사(海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며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827∼898)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대혈사(大穴寺)라고 하였다고 하며 고려 말에 길재(吉再:1353∼1419)가 이 절과 절 뒤에 있는

도선굴(道詵窟)에 은거하며 도학(道學)을 익혔다고 한다.

1592년(조선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폐사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1925년 복원되었는데

이때 절 이름을 해운암(海雲庵)이라고 바꾸었다고 하고 1956년 대웅전을 신축하였으며

이후 꾸준히 불사를 진행하면서 다시 절 이름을 해운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도선굴(道詵窟 )가는길

도선굴 가는길은 마치 절벽의 잔도처럼 산꾼 두사람이 교차하기엔 좁은 탐방로이며

금오산 도립공원에서 출발해 50분 남짓이면 도선굴에 이를 수 있는데

탐방로는 매우 가파르고 미끄러워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며

도선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 구미공단과 낙동강 그리고 해평면 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선굴(道詵窟)

도선굴은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에 위치한 자연동굴로 도선 대사가 도를 깨우쳤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통일신라의 승려인 도선은 풍수지리설을 처음 도입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도선굴은 고려의 대각국사와 야은 길재 등이 찾아와 은거할 만큼 절경이지만

오랜 세월 오르는 길이 없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1937년에서야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당시 구미 면장과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통로를 내고

동굴 입구 벽에 기록을 남겨 두었다고 한다

대혜폭포

도선굴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28m 높이의 대혜 폭포가 있는데 가뭄탓인지

그다지 물줄기가 약하게 흘러 내리고 있었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고도 불리우며

폭포 아래에 형성된 넓은 소(沼)는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기는 곳이라 하여

욕담(浴潭) 또는 선녀탕이라고 한다.

대혜폭포

조선시대 인조 때의 학자 여헌 장현광의 문도들이 연중행사처럼 폭포를 찾아 목욕을 즐기고 시회를 가졌다고 전해지며

폭포 옆 암벽에는 ‘욕담’이라는 예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장현광의 문도 중 한 사람인

김공이 폭포 근처 도선굴 아래에 움막을 짓고 학문을 닦다가 새긴 것이라 한다. 

안내글은 다음과 같다

대혜폭포(大惠瀑布)는 해발 400m 지점에 위치한 수직 27m 높이의 이 폭포는 대혜폭포 또는

대혜비폭(大惠飛瀑)이라고 하며 떨어지는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는 별명도 있다.

금오산 정상 부근의 분지에서 발원하여 긴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폭포수는

이 고장 관개(灌漑)의 유일한 수자원이 되니 큰 은혜의 골이라 하여 대혜골이라 했고

주변의 경관은 경북 8경 또는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또한 물이 떨어지는 일대의 움푹 패인 연못이 있어 용담이라 하니

선녀들이 폭포의 물보라가 이는 날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주변 경관과 옥같이 맑은 물에 탐하여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할딱고개 가는 데크계단

금오산이 명승지로 이름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지주중류(砥柱中流) 백세청풍(百世淸風)

야은 길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채미정이 자리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마비(下馬碑)에 예(禮)를 표하고 대혜(大慧)폭포를 떠난 물줄기가 계천을 만들어 휘감는 석교를 건너면

맹자가 평한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의 풍모를 일으키라는 흥기문(興起門)이 손님을 맞이한다.

흥기문은 百世之下聞者 莫不興起也(백대 후에도 듣는 이에게 감동을 일으키노라)라고 한 문장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할딱봉

할딱봉에서 바라보니 금호저수지가 깊은산 옹달샘처럼 보인다

구미시가 발아래 펼쳐 보여지지만 그옛날 이곳에 올라 내려다 보았을 첩첩산중 금호동학이라 칭 했을 법 하다

금오산도립공원 내에 있는 금호저수지는 1종 저수지로서 금오산 정상 부근에 형성된 고위 평탄면에서 내린 빗물 등이

북쪽 계곡을 따라 모이고 명금폭포를 지난 물이 계류를 이루어 흐르다가 모이는 곳이다.

주변 둘레 길이는 약 4㎞이며 여기서 시작된 금오천이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정상1.4km안내표지목

산정이 가까워 지고 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많은 산행자들이 보였고 우리도 40명이 넘게 금오산을 오르고 있다

금오산은 각 지역에서 보는 방향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는데 선산 방향에서 보면

붓끝을 닮았다고 해서 필(筆)봉 이라 이름하고 인동 방향에서 보면 큰 거인이 누워 있어 귀(貴)봉이라 일컬으며

뒤쪽 김천에서 보면 쌀가마니를 쌓아 놓은 형상으로 보여 적(積)봉이라 불려지고

성주 쪽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으로 투영되어 음(陰)봉이라고 각각 이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풍수적인 요소로 선산에는 인재가 많이 나고 인동에는 귀한 인물들이 나며 김천에는 부자가 많고

성주에는 미인이 많이 난다는 속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명산이라고 이름하는 이유는 금오산에만 20여 곳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며

지금은 흔적만 남은 곳이지만 당시에는 불자들의 기도처로 경향 각지에서 금오산을 오르내렸으리라 생각된다

바위에서

담장같기도 하고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금오산성처럼 보이는 바위에 올라 잠시 불어오는 금오산 바람을 맞이 해본다

펼쳐진 금오산자락을 내려다 보면서  관직을 던지고 향리로 내려와 은자의 생활을 하며 일상의 여유로움으로 노래 했을

시(詩) 한구절을 담는다

한 거(閑 居) 한가히 살며

길재(吉再) 

 

臨溪茅屋獨閑居(임계모옥독한거)

개울가에 초가 지어 혼자 살면서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바람 맑고 달 밝으니 기분 상쾌하여라 

外客不來山鳥語(외객불래산조어)

찾는 이 없어도 산새들 지저귀네 

移床竹塢臥看書(이상죽오와간서)

나는 대나무 언덕에 상을 옮겨 책을 읽는다

소폭

가까이에 가서 얼음 가득한 빙벽등산이라도 하고픈 빙폭포이다 겨울이긴 겨울인가 보다

이렇게 얼음이 꽁꽁 얼어 붙어 있다

금오산 일대는 대부분이 화산암류로 구성되어 급한 경사와 험한 산세를 이루고 있으며

북동쪽은 퇴적암으로 된 천생산(407m)이 있고, 동쪽은 응회암질 암석으로 구성된 봉두암산(326m)

유학산(839m)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급한 경사와 상당한 기복량을 나타내는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형돌탑

<세상에 이런 일이>란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사연에 의하면 뇌 병변 장애로 인해 손주 형석이는 태어날 때부터

말하지도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어르신은 아픔을 겪고 있는 손주를 위해 자식들을 대신해 돌봐왔는데

형석이는 10살이 되던 해에 갑작스러운 패혈증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손주를 그리는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둘씩 쌓은 돌탑은 어느새 금오산의 상징이 되어 있었고

태어나 등교를 단 하루밖에 못 한 형석이를 위해 오형학당 이라는 돌탑을 쌓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오형돌탑

산에 많이 오르다 보니 산정에 많은 돌탑을 볼수기 있는데 각자다른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이산 돌탑부터 시작해서  마산 팔용산 돌탑 그리고 치악산 비로봉에 있는 돌탑까지

산에는 돌탑이 하나의 랜드마크 처럼 되어 있는듯 하다

돌탑하나 하나에 쌓는이의 바라는 소망이 깃들여 있고 나 역시 하나의 소망을 기원해본다

구미금오산금오산 마애여래입상(龜尾金烏山磨崖如來立像)

커라란 암봉의 모서리에 마애불을 새겨 놓았다 잠시 삼배를 올리고 마애불에서 휴식을 취해 보았다

마애여래입상은 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하며 금오산 정상 바로 밑 암벽에 새겨진 이 마애불상은

전체 높이가 5.5m에 달하며 불상의 크기는 4.1m이며 불상이 암벽의 모서리에 있는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불상 앞에는 주초(柱礎)가 남아 있고 불상 주변에서는 기와편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불상이 새겨진 바위면에도 목조가구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이 옛 보봉사(普峰寺)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고 한다.

마애여래입상(金烏山磨崖如來立像)

마애여래입상(金烏山磨崖如來立像)은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불신(佛身)·연화대좌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져 있고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머리 정상에는 크고 높은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고부조로 새겨졌지만, 가는 눈과 작은 입 등의 표현에서는 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과는

다른 특징이 엿보인다고 하며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며, 목은 굵고 짧은데 삼도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약간 몸을 튼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대의 자락을 잡고 있다.

왼손은 팔꿈치를 약간 구부려 상체에 붙여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데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해 준다는 여원인(與願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선각(線刻)된 옷주름은

왼쪽 어깨에서 한 번 접혀진 다음, 왼팔과 허리를 감싸고 흘러 내리고 있다.

하반신에서는 U자형의 옷주름이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가슴과 배 그리고 팔 등의 신체 각 부분의 양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발은 다소 둔중하고 큼직하게 조각되었다.

금오산 찾은 스웨덴 산꾼

마애여래입상(金烏山磨崖如來立像)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외국인이 오길래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어디사람인지 궁금해 물어보니 스웨덴 사람이라고 하며 한국어는 모르고 영어만 할줄 안다고 한다

한국어도 모르는데 어찌 금오산 까지 왔는지 궁금했지만 함께 사진찍자 하니 허락하였고

손을 어깨에 올려  오래된 친구처럼 함께 찍어 보았다

약사암(藥師庵) 종각

금오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 해주는 약사암 종각이며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정상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금오산 정상의 금오산성 암벽 밑 약사봉 아래에 약사암이 자리잡고 있으며

기암절벽 아래 자리한 약사암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래되고 있으며

그러나 당시의 유적은 전하는 것이 없으며 현존하는 당우도 모두 근세에 이루어진 것이다.

약사암의 중심 전각은 약사전인데 기암절벽 밑에 남향하여 건립되어 있으며

북쪽의 소봉상 아래도 남향한 요사 1동이 지어져 있다.

요사 좌측으로 300미터 지점의 바위에는 보살입상(보물)이 선각되어 있다

약사전(藥師殿)

약사전 안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수도산 수도암(修道庵), 황악산 삼성암(三聖庵)의 약사불과 함께

3형제 불상이라고 불리우며 세 불상이 함께 방광(放光)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절의 동쪽 암벽에는 약수가 용출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구멍에서 쌀알이 하나씩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약사암은 옛날부터 참선도량으로 유명해서 오늘날까지 수행승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약사전(藥師殿)에서 바라본 종각

종각은 행사때만 개방한다고 안내문이 있고 시건장치가 되어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그냥 개방해서 산행자들이 자유롭게 풍경을 감상할수 있도록 배려 해주었음은 하는 바램이다

약사암에서 바라본 발아래 풍경은 선경(仙境)이나 다름없다.

맑은 날에는 대구까지 보이고, 약사암의 은은한 풍경소리까지 합치면 마음의 위안을 받기에 충분하다. 

구미시의 풍경

1953년 주한미군이 산 정상을 포함한 2만2천585㎡ 부지에 통신기지를 세워

일반인들은 해발 고도로 10m 낮은 지점까지 올라가는 데 만족해야 했었고

그러던 중 2011년 구미시가 미군 측과 협상을 벌여 무인기지로 운영되던 군 부대 중

일부 5천666㎡를 돌려받아 통신사 중계탑 철거 등의 작업을 마치고

2014년 10월 25일 공식 개방되면서 많은 산행자로 부터 사랑을 받아 왔다

금오산 현월봉(金烏山 懸月峯)976m

옛 금오산 정상 표지석인데 아래 안내글을 보면

본 표주석은 정상 반환전인  2014년 9월이전 까지 있었던 옛 정상석으로 실제 정상은 해발 10m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라고 새겨져 있다

금오산 현월봉(金烏山 懸月峯)976m

주봉인 현월봉(懸月峯)과 약사봉(藥師峰)은 영남8경 중의 하나인 보봉(普峰)이 백두대간 지맥에 솟아 있으며

시생대(始生代)와 원생대(原生代)에 속하는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신라 불교를 전파한 아도(阿道) 화상께서 저녁 노을 속으로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金烏)라 이름하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한 연유에 구미시민들은 풍우(風雨)로부터 보호받아 왔고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로 감성을 자극해주고 있는곳이다.

우리는 명산 금오산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오늘날 구미의 번영이

금오산 산신령의 조화에 있음에 오늘도 어김없이 정상표지석을 향해 삼배(三拜)을 올렸다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산 산정에서 칼다봉쪽으로 하산길에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가 있어 촬영해 보았다

금오산성은 전략 요충지로서 성안에 있는 대원군이 세웠다는 비문이 있는데 1868년(고종 5)에 금오산성(金烏山城)의

성책과 공관(公館)을 보수하였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에는

1868년에 흥선대원군 섭정 당시 내성을 수축했는데 누각 규모가 100여 칸에 이르렀고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아와 군창을 새로 지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왜적에 대항하는 중요 거점지로 활용되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구미에 금오산이 있으니, 다섯 고을을 에워싸고 있으며 온갖 산을 압도하고 있다.

기세가 드높고 기운이 충만하여 우뚝 동남지방의 보루였으며, 진(鎭)을 설치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그 중간에 무너졌다.

지난 임진년에 왜란이 있은 뒤, 임금께서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적을 방어하는

데에 특별한 뜻을 기울이시어 정상에서부터 산성을 쌓았다.

성 안에는 만명을 수용할 수 있고, 소모장(召募將)을 두어서 방어하게 하였으나

요해지를 마련하여 굳게 지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 ! 우리 임금께서 서로 계승하신 300년 동안 전쟁이 없어서 무심하게 다만 산 높고 물 맑은 지역으로만 돌 뿐이었다.

그러다가 1868년(고종5)봄에 승선 이용직이 왕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와서 이 진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니 성벽은 허물어져 평평하고 성루와 관청은 모두 무너져 산 동쪽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곳이라 믿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에 선산부사 김병우와 함께 흥선 대원군께 그림으로 그 형세를 알리고 서신으로 폐단을 설명하기로 계획하였다.

흥선 대원군께서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 한다는 것을 신명에게 확인할 수 있었으나 밝혀지지 않아 가려진 것이 없고

거행되지 않아 버려진 일이 없었으며 신하들이 직분을 다하고 모든 법도가 잘 정비되었다.

나라의 재난에 미리 대비한다는 것에 더욱 감개무량 하여 마침내 경영하고 계획하니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이

쉽게 이루어졌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의리를 표출하여 윗사람을 따랐으며 바삐달려와 기꺼이 공사에 참여하면서도

혹 남들보다 뒤쳐질까 염려하였다. 며칠 되지 않아 공사를 완공하여 성벽과 관청이 모두 새롭게 되었다.

성은 총 길이가 3천3백70보 이고 누각은 거의 백 칸이었다. 그곳에 우물과 못을 파고 소금을 저장하고 곡식을 쌓아두었다. 이에 뭇 백성의 음이 성처럼 굳건해졌고 남쪽 변방의 방어가 더욱 탄탄해졌다.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사방에 들렸다.

봄이면 뽕나무 가지를 치고 가을이면 수하니 백성들이 편안히 농사지어 자신들의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이것은 누가 내린 은혜인가 ? "말소리와 얼굴빛을 동요하지 않고 천하를 산과 같이 안정하게 하였다."고 한 말과 같다.

역사책에는 "신령스런 덕을 밝혀 영원토록 이어지리라"고 하였으니, 아 ! 아름답도다.

흥선대원군의 넉넉하고 위대한 공적이 곧바로 천지에 전해져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보여주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뜻 말고 다시 무엇을 더하겠는가.

모든 사람이 바위 벼랑에 새겨 칭송하기를 바라기에 삼가 목욕재배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공조참의(行 工曺參議) 박문현이 짓고

조봉대부(朝奉大夫) 전 주서(前注書) 이능화가 쓰다.

금오산(성안전위봉)852m

성안산림습지를 지나 조금만 오르면 성안전위봉에 도착하는데 성안산림습지는

정상에서 서남향으로 800m 정도 내려오면 고위평탄면의 분지(盆地) 내에 성안마을이 1971년까지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이곳에 습지가 형성돼 있으며 금오산 정상임에도 수원이 풍부했던 이곳은 조선 시대 선조 때에는

9개의 우물과 7개의 저수지가 있어 가뭄이 들어도 산 아래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물 걱정이 덜했다고  한다.

금오산성 내성(內城)

칼다봉 가는산길옆에 이렇게 금오산성 내성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금오산성으로 피난온 백성들로 하여금 성을 쌓고

병사들로 하여금 성벽을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내성(內城)은 해발 850m성안분지를 둘러싼 능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벼랑

칼다봉 가는길엔 이렇게 천길 낭떨어지가 아찔할 정도로 펼쳐져 있었다

금오산도립공원은 구미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만큼 다양한 관광자원들을 품고 있는데

신라말기 도선이 창건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옛 대혈사 터 위에 1925년 다시 세워진 사찰 해운사를 비롯해

도선이 참선해 도를 깨우친 곳이라는 도선굴, 보봉(성주봉 933m) 아래 절벽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전신상인 마래여래입상 그리고 약사봉 절벽에 붙어있는 암자 약사암

세상을 먼저 떠난 손주가 다음 생에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길 바라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담고 있는 오형돌탑

금오산성과 성안마을습지, 다혜폭포 등이 금오산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다. 

칼다봉에서 바라본 현월봉(懸月峯)

현월봉 산정은 철탑이 있어 금세 산정임을 알수가 있었고 금오산은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하는데

하늘이나 먼발치에서 보면 "王"자로 보인다하여 나랏님을 배출할수 있는 기운이 왕성하다고 한다.

금오산의 사계절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금오산 올레길은 구미시민들에겐 일상의 공간으로

관광객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금오산 저수지는 1945년 1월 1일 저수지 공사를 시작해

1946년 완공한 인공 저수지이다. 644만 4천㎡ 규모 면적에 수혜 면적은 60만㎡이라고 한다.

금오산 올레길은 저수지 둘레 2.4㎞ 구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길에는 수변산책로, 부교, 생태습지, 수변공연장, 전망대, 조각공원, 휴식공간 등이 조성돼 있어

구미시민들이 사계절 가장 산책하기 좋은 장소로 꼽는다. 

칼다봉 715m

봉우리가 칼처럼 생겨서 칼다봉인가 싶지만 유래는 어디서든 찾아 볼수가 없었다

또한 금오산으로부터 발원하는 소하천으로는 율곡천, 연봉천, 경호천, 연곡천 등이 있고

율곡천, 연봉천 등은 감천(甘川)으로 합류하고, 경호천과 연곡천 등은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이들 수계는 계절에 따른 유량변동이 심하다.

금오산 일대의 식생은 낙엽활엽수림으로서 신갈나무군락이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소나무·구실사리군락을 비롯한 암벽지대의 식생은 매우 높은 자연도를 나타낸다고 한다. 

산행종료

신라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득도하고 야은 선생이 이곳에서 세류폭포의 물줄기를 받아먹으며

도학을 연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곳 금오산 산정을 걸어보고 또한 조선초 무학대사가 왕의기운이 있다는

금오산에서 선조들의 재난과 침입에 대비하여 쌓아 올린 역사 현장을 보면서 산행기를 마무리 해본다

 

※ 출처:

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유정열1000명산견문록, 한국의산천 손경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월간 山(아웃도어 매거진).신 산경표 박성태 조선일보사

해설 대동여지도 최선웅 민병준 진선출판사

인문산행 심산 바다출판사.한국1000산 신명훈

구미시 홈페이지 지역신문 및 지역주민 인터뷰 참고함.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