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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오천년 역사 고조선(古朝鮮) 안녕기원제단 참성단(塹城壇) 있는 마니산 산정을 걷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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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오천년 역사 고조선(古朝鮮) 안녕기원제단 참성단(塹城壇) 있는 마니산 산정을 걷다

바다늑대FORCE 2022. 3. 5. 19:41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

오천년 역사 고조선(古朝鮮) 안녕기원제단 참성단(塹城壇) 있는 마니산 산정을 걷다 

 

▲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

     높이 : 472.1m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산. 

 

▲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나의 산행일 :

     2022년03월05일 토요일 날씨 맑음(미세먼지많음 강풍)

 

▲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나의산행코스 :

    상방리매표소→개미허리→917계단길→참성단→마니산→참성단우측데크길→암릉길

    →314봉→데크계단길→화도방향→상방리매표소

    5.61km 2시간50분소요(트랭글 앱기준)

 

▲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개요:

마니산(摩尼山)높이는 472.1m이며 강화도 서남단에 있으며 강화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마니산의 정상에서 남쪽의 한라산과 북쪽의 백두산의 중앙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마니산은 마리산 또는 머리산으로도 불리우며 마리란 고어(古語)로 머리를 뜻하며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의미한다. 더우기 산 정상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는 단이 있어

강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 민족, 전 국토의 머리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마리산(摩利山)으로 되어 있고

그 후 마니산으로 바뀌었다.

마니산은 한반도 중심론을 떠나서 보았을때 남쪽 끝자락에 솟은 마니산은

그 높이에 걸맞지 않게 북쪽으로 고려산(高麗山)·혈구산(穴口山)·진강산(鎭江山)

별립산 등400m급 산과 더불어 앞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석모도 해명산이며 낙가산 등

가히 제왕의 기풍을 지니고 있는 마니산이라고 한다.

마니산은 본래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으로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는데

강화도의 가릉포(嘉陵浦)와 고가도의 선두포(船頭浦)를 둑으로 연결하면서

강화도와 한 섬이 되었다고 한다.

 

▲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산행지도

▲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

  나의 트랭글(TRANGGLE) 궤적도(軌跡圖)

→→→→→→2022년 03월05일 토요일 대한민국(大韓民國) 구석구석 산(山)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새벽03시30분에 기상하여 318km를 자가운전해서 마니산국민관광지 상방리매표소 주차장에 도착했다

미세먼지가 뿌옇게 하늘을 가리고 뿌연 틈으로 아침햇살과 함께 전국 제1의 생기처(生氣處)인

마니산 산행채비를 하고 마니산으로 길를 나섰다

마니산 상방리 매표소

주소는 인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로675번길 18 검색하면 여기로 안내된다

주차비는 무료이나 입장료는 성인2000원이며 들머리가 있는곳까지 그냥 쭉 걸어가면 산정으로 갈수있다

먼지터는 곳에는 마니산의 유래에 대하여 기록해 놓았는데 내용을 보면

마니산의 원래 이름은 우두머리라는 뜻의 두악(頭嶽)으로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마리' 는 '머리' 를 뜻하며 민족의 머리로 상징되어

민족의 영산으로 불러오고 있다.강화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가 472.1m이며 사면이

급경사로 화강암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곳에서 전국체육대회의 성화가 채화되며

해마다 개천절에는 개천대제가 성대히 거행된다.참성단내 소사나무는 수령이 150년이 되고

높이가 4.8m로 국가지정문화재 제502호로 지정되어 참성단을 풍체좋게 지키고 있다

등산로는 계단로, 단군로, 함허동천능선로, 계곡로,정수사로가 잘 정비되어 있으며

동쪽기슭에는 함허동천 야영장과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한 정수사가 자리하고

경내의 법당은 보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마니산은 1977년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전국에서 가장 기(氣)가 쎄다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천부인 광장

들머리로 가는 방향에 천부인광장이 있는데

천부인(天符印) 광장은 단군신화(檀君神話)속 신단수 상징 조형물과 8개의 앉음 벽을 통해

전국 8도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 전파되어 한민족의 통합과 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공간이다

천부인(天符印)은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인은 아들 환웅이 항상 하늘 아래에 뜻을 두고 있어 천부인 3개를 주어 

내려가서 다스리라고 했다. 그리하여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풍백·우사·운사와 함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고 한다. 천부인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고조선 국가의 성립이 청동기의 사용과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고대사회 초기에 주술의 도구이자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던 청동단검·청동거울·옥과 같은 상징물이라고 짐작된다.

들머리로 가는길

매표소에서 아스콘 포장도로를 따라 직선을 1km 정도 걸어야 하며 오늘이 경칩(驚蟄)인데 날씨는 춥다

경칩(驚蟄)은 '일어나다'라는 경과 '겨울잠 자는 벌레'라는 뜻의 칩이 어울린 말라고 하는데

곧 겨울잠 자는 벌레나 동물이 깨어나 꿈틀거린다는 뜻라고 하며 계칩(啓蟄)이라고도 하는 날씨가

이렇게나 추워서 벌레들이 다 얼어 죽겠다 그기에다 바람까지 불어오니

체감온도는 더 내려 가는듯 하고 그렇지만 주말을 맞이하여 아침부터 마니산을 찾는

가족단위 산행자들이 많이 보였다

마니산 들머리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드는 데크계단인데 참성단까지는 1.1km 라고 안내되어 있으며

이길로 올라가면 개미허리와 917계단길이 연결 되어 있다

강화도 마니산은 서해의 일몰 명산으로 이름나 있다하며 여름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같은

시원한 계곡이 많아 야영과 여름 피서지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917계단길

계단길이 참성단까지 연결 되어 있으며 아마도 무릎에 신경 쓰이는 산행자라면 조금 어려워 할수도 있는 코스 같다

강화도에는 5개의 산이 의좋은 형제처럼 남북(南北)방향으로 나란히 솟아 있는데

북쪽부터 별립산 고려산 혈구산 진강산 마니산이 바로 5형제 산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마니산은 마리산으로 불리는데 가장 으뜸이 되는 산으로 이름 그대로 머리에 참성단(塹城壇)이라는

거대한 제단을 얹고 있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이 제단은 단군(檀君)이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바로 이 참성단의 존재롤 말미암아 마니산은 그보다 높은 산들을 제치고 단박에 명산에 오를수 있었다 하며

바로옆에 솟은 진강산이 그렇게 잘난 마니산과는 등지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는 전설도

마니산이 범상치 않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라 한다

917계단길

계단길이 장난 아니게 가파르고 길게 하늘가지 연결 되어 있는듯 보인다

마니산은 옛날에는 '마리산'이라고 불렀다. 산 이름인 '마리'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1. [방언]‘머리’의 방언(함북).
2. [옛말]‘머리’의 옛말.
四海ㅅ 믈 이여 오나 마리예 븟고 太子셰시니≪월인천강지곡(1447) 상:13≫
伽闍山 苦行애 六年을 안샤 마리 우희 가치 삿기 치니≪월인천강지곡(1447) 상:22≫
化佛마다 마리예 放光샤≪월인석보(1459) 7:34≫
3. [옛말]‘머리털’의 옛말.
이라고 나온다.

머리의 옛말이 마리이니 마리산은 '머리산', 즉 '으뜸인 산'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우리 땅이름 연구자인 배우리씨(국어학자)에 따르면, 한자 ‘摩尼山(마니산)’은 한국 말의 ‘마리산’을

음역(音譯)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이름으로 굳어진 것은 일제의 의도적 왜곡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산의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마니산으로 바뀌었는데, 이 땅의 기를 꺾고자 했던 일제로서는

으뜸을 뜻하는 마리라는 이름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쉼터

계단길을 올라와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나무게시판에 새겨진 시(詩)한수를 읽어 보았다

눈덮힌 마니산

천단은 잠자는듯 옛터전은 드문 것인데 신화는 계속하여 전해오는구나

험준한 길이니 남북으로 끊겨있고 영산은 변함없이 이제나 저제나 한결같아

만대에 걸친 백성은 번영하고 있지 우리나라의 성화는 빛나도다

아득한 옛일이니 줄곳 알고자 하네 참성단은 오랜 궁궁이풀로 희미하게 보이는구나

화암 유형석의 시문

암릉길

참성단 방향으로 오르는 산길은 계단과 암릉길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마니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산(巖山)이라고 할수 있다

마니산은 우리나라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는데 한반도의 정중앙을 주장하는 곳은

이곳 외에도 강원도 양구를 비롯해 몇 곳이 있다고 하며

하지만 마니산(摩尼山)에서 백두산(白頭山)까지의 거리와 한라산(漢拏山)까지의 거리가 같다고 하니

마니산이 한반도의 정중앙이라 주장하는 것에 무리가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다.

그래서인지 마니산은 우리나라에서 기(氣)가 가장 센 지역으로 꼽히며

풍수지리가들에 의하면 마니산 참성단이 전국에서 가장 센 기를 방출하는 생기처(生氣處)라고 한다.

그 때문에 강화군에서는 매년 6월에 '마니산 기(氣)축제'를 연다고 한다

강화군 화도면의 조망

저멀리 장곶돈대도 보이며 파란바다위에 어선들도 보이며 바다건너편은 석모도(席毛島)라고 한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석모로도(席毛老島)’로 표기되어 있으며 ‘석모로’라는 지명은

‘물이 돌아 흐르는 모퉁이 혹은 돌이 많은 해안 모퉁이’라는 뜻이다. ‘돌모로’를 한자화하면서

석모로(石毛老)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석모도(席毛島)로 기록되어 있다.

그림자 놀이

산길을 오르면서 여기저기 풍경을 촬영하다 보니 오전 햇살에 의해 나의 그림자가 보여 하나 촬영해보았다

마니산은 본래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으로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는데

강화도의 가릉포(嘉陵浦)와 고가도의 선두포(船頭浦)를 둑으로 연결하면서 강화도와 한 섬이 되었다고 한다.

과거 북쪽 양도면의 진강산과 동쪽 길상면의 길상산(吉祥山)은 마니산과 얕은 바다를 경계로 분리되어 있었다 하며

이는 과거의 지질시대에 지각 변동이나 해수면 승강운동이 조금만 일어나도 섬이 되었거나

육지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높음을 시사한다.

강화군 화도면(華道面)의 조망

미세먼지 속에 강화군 화도면이 바다랑 함께 평지를 이루며 펼쳐져 있다

화도면(華道面)은 우리나라 인천광역시 강화군 남부에 있는 면(面)으로서

마니산이 솟아 있는 중앙부는 산지를 이루며, 서쪽과 남쪽은 서해에 면해 있으며

내리·흥왕리·사기리 일대에는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소규모의 평야가 펼쳐져 있다. 

강화군 화도면(華道面)의 조망

강화군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고 하며 고구려 때는 혈구군(穴口郡)이었으며 

수지현(首知縣)·동음내현(冬音奈縣)·고목근현(高木根縣)이 있었다. 

이후 신라의 경덕왕이 해구(海口)라 고쳤으며, 수지현은 수진(首鎭), 동음내현은 강음현(江陰縣)

고목근현은 교동(喬桐)으로 바뀌었다. 그 후 문성왕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초에는 열구현(冽口縣)이라고 부르다가

몽골 침입으로 고종 때에 수도를 옮기면서 강도(江都)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말기인 우왕 때부터 강화라고 칭하였다 한다.

미세먼지속 마니산 능선풍경

산아래는 바둑판처럼 잘 가꾸어진 들판이 보이며 그 사이로 오똑하게 솟은 작은 산봉우리들이 조화롭다

마니산이 들머리가 있는 화도면 유래를 보면 옛날에는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이었으며

강화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이래로 하도면(下道面)  이라고 칭하다가 

1937년 하도공립보통학교장으로 부임하여 왔던 일본인 산원(山元)의 제청으로 

하도(下道)라는 명칭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화도(華道)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참성단(塹城壇)울타리와 마산산 정상안내표지

오는날이 장날이라고 할까 사진에서나 TV에서 보면 울타리는 보이지 않고 크다란 제단만 보였는데

입구는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참성단 출입통제 안내문만이 걸여 있었다

참성단은 마니산 정상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제단이라고 전해오며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한다.

참성단(塹城壇)

참성단(塹城壇)은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최초의 모습은 찾아보기는 어렵다고 하며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고 하며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고 하고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일제강점기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사적 제136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마니산 제천단 이라고도 한다

자연석으로 기초를 둥글게 쌓고 단은 그 위에 네모로 쌓았다

아래 둥근 부분의 지름은 8.7m 이며 상단 네모의 1변의 길이는 6.6m의 정방형 단이다

상방하원(上方下圓) 즉 위가 네모나고 아래는 둥근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인 하늘이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생각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 임금이나 제관이 참성단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조선시대에도 하늘의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고려 원종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인조17년(1639)에 다시 쌓았고

숙종26년(1700)에 보수 하였다 현재 참성단에는 매년 10월3일 제천행사가 있으며

전국체전 성화가 칠선녀에 의해 이곳에서 봉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열린다

참성단(塹城壇)

참성단은 하늘에 감사의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단군이 세운 제단으로  참성단의 주변에는 높은 철제울타리가

둘러있고 입구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잠겨있어 들어갈 수가 없어 정말 안타까웠다 318km자가운전 해 왔는데

그래서 그 산꼭대기에서 참성단을 향해 서보기도 하고 첨성단을 향해 삼배(三拜)를 올려 기원과 예를 올렸다.

참성단이란 말 그대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인데 이곳 참성단은 한민족의 성산인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마니산의 맨 꼭대기에 있어,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을 연결해주는 곳이라하여

이곳에 제단을 쌓았다고 한다.

참성단(塹城壇)주변 바윗돌

옛날 어른들이 쓰던 참빗과 같은모양을 하고있어 한번 촬영해 보았다

그리고 참성단 바로 옆 바위벽에 새겨진 조선 숙종대 최석항이 중수하고 남긴 기록을 번역문을 보면

참성단 중수기(조선 숙종 43년 강화유수 최석항)

우리나라 국토 수 천 여리를 통틀어 강화는 나라의 방패가 되는 중요한 곳이다. 수 백리에서도 마니산은 나라에서 제사를 드리는 명산이다. 이 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든 곳이 있으니 이곳이 참성단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국조 단군께서 돌을 쌍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던 곳이라고 한다.

돌이켜 보건대 연대가 오래되어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서쪽과 북쪽 양면이 반쯤 무너졌으며, 동편 계단 또한 많이 기울어져 이 고을 여러 어른들이 서로 더불어 개탄한 지 오래되었다. 부족한 내가 이곳의 유수로 와 이고을을 지키게 되어 올 봄에 고을을 두루 살피면서 시험삼아 한 번 올라가 보았는데, 분연히 이곳을 중수할 뜻이 생겨 선두포 별장 김덕하, 전등사 총섭승 신묵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여 다시 쌓게 하니, 열흘이 채 아니되어 공역을 다 마쳤다.

아! 무너진 곳을 일으키고 고치어 옛 모습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은 고을을 지키는 자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이다. 하물며 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시어 실로 우리 동국 백성의 조상이 되시는데, 순수 단을 쌓아 하늘에 청결한 제사를 드리던 곳임이랴! 수 천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이 우러러보며 공경할 곳이니 고쳐서 완전하게 하는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신묵이 이 일의 시말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이를 알리기를 청함에 이를 써서 기록하는 바이다.

정유(1717, 숙종 43) 단양월(5월)에 강화유수 최석항이 기록하다.

참성단 쪽에서 바라본 마니산 산정

마니산 일대에는 선캄브리아기의 변성암 계일인 편암과 편마암이 넓게 분포하며

이른바 마니산 화강암으로 지칭되는 중생대 대보화강암이 고 하며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북쪽 기슭에는 굳은 화강암 암반이 넓게 깔려 있는 곳이 있고

등산로 양쪽의 노두(露頭)에서는 심하게 풍화되어 부스러지는 새프롤라이트(saprolite)와 암석 표면이

양파 껍질같이 떨어지는 박리현상(剝離現象)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거대한 화강암의 판상절리(板狀節理)가 곳곳에서 나타나며

경사가 심한 산정 부근에는 화강암의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것을 볼수있다.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472.1m

산정은 암봉으로 이루워져 있으며 바로아래는 둥글게 시멘트로 포장된 헬기장이 자리하고 있다

많은 산행자들이 헬기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여기에도 길고양이가 대략 10마리는 넘을듯 싶다

산행자들이 가져온 간식을 얻어 먹고 또 주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아마도 길고양이로 인해 청설모나 다람쥐 그리고 땅위에 둥지를 터는 조류는 없을듯 싶다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472.1m

마니산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산이며 마리산(摩利山)·마루산·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발고도 472.1m의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다 하며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京畿灣)과 영종도(永宗島)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정에는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이 있는데

이 곳에서는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채화된다. 

마니산 정상의 북동쪽 5㎞ 지점에 있는 정족산(鼎足山)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사적 130)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북동쪽 기슭에는 정수사법당(淨水寺法堂:보물 161)이 있으며 북서쪽 해안에는

장곶돈대(長串敦臺:인천기념물 29) 1기(基)가 있다.

참성단과 마니산 산정

마니산 산록에는 고려시대부터 형성된 여러 촌락이 있었다고 하며 북사면의 내리·문산리·상방리는

마니산을 오르는 입구에 있고, 동사면에는 사기리, 남사면에는 흥왕리, 서사면에는 장화리 등이 있다.

사기리는 지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려 분청사기의 가마터가 발견된 곳이고

남쪽의 흥왕리에서는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지은 이궁(離宮)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정수사(淨水寺)는 신라 선덕여왕 때 개산(開山)한 고찰로 마니산 동봉(東峰) 중복에 자리잡고 있다.

또 마니산 서남사면에 위치한 북일장(北一場)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마목장 중 한 곳이었다.

강화도는 고려의 개경은 물론 조선의 한양과도 가까웠고, 섬이었던 관계로 여러 차례 천도(遷都)와

몽진(蒙塵)의 땅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화도 곳곳에 진보(鎭堡)와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는데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진보가 12개, 돈대가 53개나 되었다.

특히 마니산은 삼면이 바다와 접해 있어 주변 해안에 진보나 돈대 유적이 많다.

마니산의 서북단에는 숙종 때 만들어진 장곶보(長串堡)가 있고

서쪽으로부터 검암돈대·미루돈대·동막돈대·분오리돈대·칠오지돈대 등이 있다.

참성단 소사나무

카메라를 줌으로 참성단을 촬영해 보았다 중앙에 소사나무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502호 지정 관리 되고 있다

2009년 9월 16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하며 수령은 약 150년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높이는 4.8m, 뿌리 근처의 줄기둘레는 2.74m이며 수관 폭은 동서 방향이 7.2m, 남북 방향이 5.7m이다.

나무는 전형적인 작은키나무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이 잡혀 있고

참성단의 돌단 위에 단독으로 서 있기 때문에 주위에 방해 요인이 없어서 한층 돋보이는데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

나무의 줄기는 지면에서 여러 개로 갈라져 있는데 줄기 수는 현재보다 많았었으나

일부가 잘려나가고 현재는 여덟 개만 남아 있다.

 

마니산 산정에서 바라본 풍경

마니산 주변 해안에서는 일찍부터 방축(防築)을 쌓아 농경지를 간척하였다 하며

마니산 서북쪽에 위치한 내리(內里)의 가곶보와 1664년(헌종 5)에 강화도의 가릉포와

고가도의 선두포를 연결하는 선두포 둑을 쌓았다는 기록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마니산 남쪽 해안은 근대적인 간척사업으로 경지를 넓혀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대표적인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하산길

상방리 매표소 방향에서 돌계단 따라 올라오면 참성단에서 우측으로 연결된 데크길이 하산코스이다

그리고 마니산은 전국 제1의 생기처(生氣處)라고 하는데 기와 풍수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좋은 기가 나오는 곳이 십여군데 있는데 그중에서도 민족의 성지 강화도 마니산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제1의 생기처로 꼽고 있으며 이런 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활력이 생기고 건강해 진다고 하며 그래서 예부터 수도하는 분들은 기가 좋은 산과 들을 찾아 다니면서

심신을 수련하였고 이와 같은 곳을 최적의 장소로 삼아왔다

마니산 기암(奇巖)들

마니산에도 기암의 전시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다와 암봉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면서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마니산은 예전 토박이 사람들은 마니산이라 하지 않고  마리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마리산은 원래 머리를 뜻하는 마리산의 한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화도는 한강하구에 위치하여 고려조는 물론 조선조에서도 국토의 핵심인 중부지역을

옹위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중요한 섬이며 지도를 보면 강화도의 위치는 강화도가 없었더라면

해외로부터의 한강하구에의 접근은 훨씬 쉬어져 그로 인한 역사변경의 가능성도 추론해볼 수 있는

위치임을 알 수 있다. 

떡시루 같은 바위

마니산에는 신선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우리가 흔히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 속담이 여기에 있다

옛날에 나무꾼이 나무를 하려고 마니산 중턱쯤에 올랐을때 숲속에서 이상한 행색차림을 한 두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는것을 보고 있었는데 그러는 동안 나무꾼은 노인이 권하는 술을 마시면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바둑을 구경하다가 날이 저물어 산을 내려와 자기 동리로 와보니

그 동네에서는 세월이 흘러 300년이 지난 뒤였다

동리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노인들이 권한 그 술이 바로 불로주(不老酒)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속세에서 말하기를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참성단과 사기리 풍경

마니산 산행코스는 계단로 코스에서 눈에 안 띄던 것이 보이는데 바로 암봉들과 바위 길이다.

기이한 바위는 단군로 진입로부터 시작해 372계단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는 산길이며

바위의 모양은 누군가 칼로 무를 썰어 놓은 듯하고 372계단까지는 산책로처럼 조성되어 있어 누구나 걷기에 좋다.

상방리 매표소에서 372계단 앞까지는 가파른 오르막이 없는데 이코스로 나는  하산하는 길이다

화도면 흥왕리 조망

바다근처는 흥왕저수지가 마치 염전처럼 보이고 바둑판처럼 잘가꾸어진 들판이다

발아래에는 고려이궁지가 위치하고 있는데 강화군 향토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 궁지는 옛 고려시대 사찰인 흥왕사 인근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려 고종 46년(1259) 풍수 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이 궁은 왕이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으로서 역대 고려 왕조는

특히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많은 이궁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은 멸실되고 페허화 되어 터만 남아 있으며 현재는 축대 일부와 주초석이 남아있다.

신도와 흥왕리 들녘

바다엔 작은 섬들이 신도와 시도 그리고 장봉도라고 한다 남해보다는 섬들이 적게 분포되어 있지만

올망졸망 바다에 떠있는 섬들이 미세먼지 속에 빛나고 잇다

마니산 372계단으로 하산길에는 이렇게 많은 바위들을 만날수 있는데 커다란 마당바위 중앙에

굳건하게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마니산 능선

거창 보해산 처럼 능선이 암봉으로 이루어 져있지만 칼날처럼 뽀쪽 하지 않고 모두 둥글둥글하고 부더럽다

아마도 강화도 사람들의 성격이 마니산 바위처럼 성격이 부더러운듯 싶다

마니산이 솟아 있는 화도면은 중앙부는 산지를 이루고 서쪽과 남쪽은 서해에 면해 있으며

 

산길을 걷는동안 서해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으며

동쪽 기슭으로 신라 선덕여왕때 지은 정수사 법당 살문짝 꽃무늬의 아름다움도 즐길 수 있다.

또한 마니산 치유의 숲은 소나무 산림유전자 보호림으로 다량의 피톤치드를 느끼며 힐링 할 수 있는 곳이다

하산길

매표소 까지는 2.4km라고 안내되어 있고 여기서 부터는 걷기좋은 마사가 많고 산아래쪽은 흙으로 되어 있었다

겨울의 마니산은 볼거리가 많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소원을 빌 수 있는 참성단이 있었는데

비록 내부는 들어기지 못했지만 밖에서나마 기원과 예를 올릴수 있어 다행이였지만

마니산은 나 혼자만 약속도 없이 요즘같은 코로나 시대에 알맞은 산길인듯 싶다

마니산 쉼터

마니산 쉼터에는 마니산을 주제로 한 시가 이렇게 군데군데 세워져 있었지만

시간이 오래되어 글씨가 퇴색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읽을수가 없었다

또한 하산길에서 바라본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고 하며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의 궁궐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 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 건물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오천년 역사 성화 채화장소 마니산

마니산국민관광지에 있는 조형물이며 1955년 제36회 전국체전 최초 성화 봉송이라고 대리석에 새겨 놓았다

전국체전 성화를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는 이유는 우리민족의 뿌리 단군 에서 찾기 때문이다

또한 전국체전 규정 제68조에는 전국대회 성화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소재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하여

전국 또는 개최도시로 순회 봉송 하여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산행종료

마니산 산행코스는 1코스부터 5코스 가지 있는데 나는 1코스로 산횅하여 5코스로 하산 하였다

참성단 개방시간은 4월에서 10월까지는 09:30~16:30 이며 11월에서 3월은 10시부터 16시 까지인데

가는날이 장날인지 아니면 내가 덕이 부족한 탓인지 내부공사중으로 인하여 개방을 하지 않아

아쉬움이 큰 마니산 산행이였지만 그리고 1968년 11월 중앙정보부는 최초 해병대  장기하사관 11명과

사병 2명을 차출하여  마니산 서남쪽 정수사아래 텐트를 치고 합숙훈련을 시작하면서 마니산첩부부대(MIU)를

탄생시켰는데 지금의 해병대특수수색대 전신이기도 해서 마니산 산행은 의미가 있는 산행이며

오천년 역사 고조선(古朝鮮) 안녕기원제단 참성단(塹城壇) 있는 마니산 산정을 걷는것 만으로

만족하며 다시 318km의 긴 거리를 자가 운전으로 귀가를 재촉한다 

 

※ 출처:

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유정열1000명산견문록, 한국의산천 손경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월간 山(아웃도어 매거진).신 산경표 박성태 조선일보사

해설 대동여지도 최선웅 민병준 진선출판사

인문산행 심산 바다출판사.한국1000산 신명훈

명산플러스 경남일보. 산&산 부산일보

강화군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및 지역주민 인터뷰 참고함.

 

바다늑대FORCE [202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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