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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늑대 FORCE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6.25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의 격전지 안보(安保)의 현장 유학산을 걸어보다 본문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6.25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의 격전지 안보(安保)의 현장 유학산을 걸어보다
바다늑대FORCE 2022. 3. 21. 17:23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
6.25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의 격전지 안보(安保)의 현장 유학산을 걸어보다
▲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
높이 : 839m
위치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산리 석적읍 도계리 지천면 학상리에 걸쳐 있는 산
▲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 나의 산행일
2022년03월21일 월요일, 날씨: 맑음
▲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 나의산행코스 :
팥재주차장→도봉사 도로→도봉사→목계단→데크계단→헬기장→유학산→다부리삼거리
→도봉사→팥재주차장
3.30km 1시간36분소요(트랭글 앱기준)
▲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개요 :
호국의 고장 칠곡의 유학산(해발839m)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산,학상,학하리와 석적면 성곡리에
동서로 길게 병풍을 펼쳐 놓은 것처럼 뻗어있다
예로부터 학이 놀던 명산으로 높이는 839m이며, 6.25전쟁때는 다부동 전투의 격전지였다.
학바위는 산악인들의 암벽 등반 훈련장으로 유명하며 가산면 다부리, 학산리와 석적읍 성곡리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험준한 산으로 암벽이 병풍을 이루고 여러종류의 동물이 서식하며
느릅나무, 박태기나무, 자귀나무 등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
예부터 학이 놀던 명산으로 도봉사, 쉰질바위, 정상부근의 갈대밭이 볼만하다.
6.25 전쟁 때는 다부동전투의 핵심 방어고지가 되어 무려 9번의 탈환전 끝에 승리함으로써
인민군에게 밀려 대구와 부산의 함락 일보 직전 처음으로 유엔군과의 연합작전을 승리로 장식하였고
북진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호국의 산이다.
당시 전투에 참전한 생존자로 구성된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주관으로 군부대등의 협조를 받아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실시된 유해발굴작업 결과 유골과 유품이 수습되어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있는지 그 참상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도봉사에서 우측산길로 약20분쯤 오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위용에 놀라게 되는데
어른키로 50질이나 되며 학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쉰질바위 또는 학바위로 불려진다.
산악인들의 암벽등반 훈련장으로 유명하다
▲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산행지도
▲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
나의 트랭글(TRANGGLE) 궤적도(軌跡圖)
→→→→→→2022년 03월21일 월요일 대한민국(大韓民國) 구석구석 산(山)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일요일 당직근무를 마치면 월요일은 휴무라 배낭속에 파워레이드 한병 쏘시지 몇개가 든 배낭을 챙겨서
박카스 한병 훌쩍 마시고서 합천을 지나 고령을 지나서 경북 칠곡으로 길을 나서본다.
팥재 주차장(칠곡군관광안내도)
경북 칠곡군 석적읍 유학로 785-1 네비에 주소를 검색하거나 팥재주차장을 검색하여도
넓다란 주차장에 도착하며 주차장 앞에는 엠비언트라는 커피숖이 있었다
오전 10시 55분에 도착하여 산행채비를 하고서 우측에 있는 도봉사 표지석에 있는 길을 따라서
약 800m의 아스콘 포장도로를 올라가다 보면 도봉사가 나온다.
도봉사 가는길
소나무숲으로 빼곡한길을 약800m정도 걸어야 하며 여기저기서 향긋한 봄내음이 오는듯 했다
유학산 6.25 격전지 순례탐사로 당시 전투현장을 생생히 느끼게 하려면 이 순례 탐사로를 따라가 보는게 좋다고 하며
유학산 격전지 탐사로는 기산면 다부리 다부동 전적기념관 맞은 편에 있다고 한다.
6.25 전쟁을 기념해 6.25㎞로 조성한 탐사코스는 다부동 전적기념관 정문 앞에서
곧장 유학산으로 치고 오르는 코스와 반대편 코스 2가지이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을 지나 왜관 방면으로 1㎞정도 가면 만나는 팥재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도봉사→팔각정→674고지→다부동 전적기념관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비교적 완만하다.
도봉사를 지나 30분이면 839고지인 팔각정(유학정)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며
팔각정(유학정)에 올라서면 당시 적국이 처들어 오던 코스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가 보면 여러 고지가 잇따르고 곳곳에 당시에 만든 참호들이 발견된다
도봉사
유학산으로 가다보면 절벽 아래에 도봉사란 사찰이 위치 하고 있으며
오늘 유학산 산행들머리는 도봉사에서 시작하여 도봉사 뒤 유학산 능선을 따라
다시 도봉사로 하산하는 코스로 택했다
너무 늦게 산행을 시작한 탓에 6.25 격전지 순례탐사길은 다음기회에 또 미루었다
6,25전사자 유해발굴 기념 지역
전투명: 다부동지구 유학산(839고지)전투
이곳 유학산은6.25 전쟁 당시 5번.25번.907번.908번 도로를 통해 대구로 들어갈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써
1950년 8월13일 부터 23일 까지 11일간 국군1사단 12연대와 북한군 제15사단이 혈전을 벌인
다부동지구 전투 최대 격전지로써 고지의 주인이 아홉차례나 바뀌었는데 당시 유학산 능선과
골짜기는 온통 시체로 산을 이루고 전사자의 피로 시내를 이룬 문자 그대로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수많은 국군장병들이 포연과 함께 사라져간 구국의 현장 입니다.
특히 이 유학산 지역은 나라를 이해 목숨바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 무한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2000년4월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 이 최초로 시작된이후 2013년까지 지속적인 유해발굴사업을 실시하여
당시 이곳에서 미처 수습되지 못한 국군전사자 유해 123구를 발굴하여 뒤늦게나마 조국의 품인
국립현충원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부동지구 전투는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했을때 국군 제1사단 전 장병들의
필사즉생의 정신과 미1기병사단등 유엔군, 경찰,학도병, 지역주민들의 결사항전의 굳은 의지가
함께 뭉쳐져 북한군 3개사단을 격멸시킨 구국의 혈전 이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나라사랑과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2013.10.30 국방부.제50보병사단.칠곡군
유학산 들머리
도봉사에서 좌측에 있는 목계단 들머리 이며 본격적으로 산길로 이어지는 곳이며
유학산은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의 격전지 인데 다부동전투란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선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전투라고 한다
그르므로 유학산을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 아픔을 안고있는 산이라 할수 있겠다
휴식
유학산 산길에는 이렇게 산길을 걷다가 쉴수있도록 여기저지 의자를 많이 설치 해두었다
우리지역 경남은 금요일 부터 주말까지는 봄비가 촉촉히 내렸고 오늘은 햇살이 맑아
산행전 선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올라야 했다
유학산의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는 낙동강 방어선이였으며
1950년 6월25일,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몰아쳤고 국군을 연이어 물리치고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했고 이후 7월 5일에는 오산전투에서 미군을 격파하고
7월 24일에는 대전을 7월 말 목포와 진주를 함락시켰다.
결국 7월말 아군은 영덕·안동·상주·진주를 잇는 선까지 밀리고 이제 남은 지역은 대구와 부산뿐, 국토의 5%에 불과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그 해 8월15일 부산에서 통일기념식을 갖겠다고 호언했고
여의치 않자 대구 점령의 날로 못박고 총공세에 나섰다.
대구마저 빼앗기면 한반도에는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지리적인 공간조차 남지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한미연합군을 지휘하던 미 8군사령관 월턴 워커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는데
8월1일 워커 사령관은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 지대를 잇는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른바 ‘낙동강 방어선’이었고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이 바로 칠곡이었다.
칠곡 왜관을 거점으로 동북쪽은 국군이, 서남쪽은 미군이 맡았다.
바위에 작을 돌탑들
아마도 산행자들의 작은 소망과 그리고 조국을 위해 순국하신 국군장병 영혼을 기리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젊은 시대 뿐만 아니라 6.25전쟁을 겪지 않았던 나 자신 72년이란 긴 세월속에 이데올로기(Ideologie)는
우리의 이념체계속에서 가끔 혼란서럽기도 하다 지금도 반으로 갈라져서 남북이 대처하고
년일 미사일을 쏘아대고 핵개발 하는데 우리는 반미를 외쳐대고 있고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강건너 불구경은 아닌듯 싶다.
119위치표지목 그리고 암릉길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지나 가듯 유심히 위치표지목을 살펴보았다 위치표지목은 국립공원에선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관리하며 최근들어서는 소방관서와 지자체가 공동으로 국가지점번호를 도입해서
설치하고 있으며 조난이나 부상을 당했을때 신고자 위치를 쉽게 접근과 찾기위함 이다
보통 일반적으로는 500m마다 하나씩 번호를 매겨 설치를 하고 있다
조망
산정으로 가까워지니 시야가 넓게 보이며 발아래는 걸어온길 아래까지 보인다
유학산의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는 북한군이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해 1950년 8월 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7월 말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게 된 북한군의 작전개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를 공격, 둘째,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 방향으로 공격
셋째,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의 병참선 차단
넷째, 남해안을 따라 마산∼부산 방향으로의 공격 등이었다.
이는 4개의 공격축선에서의 동시 공격으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고 부산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 8월 초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가용부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했다.
따라서 8월 공방전의 승패는 대구 북방의 전투결과에 따라 결정될 정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면 그 지역의 아군 방어병력은 총 3개 사단(국군 제1·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 뿐이었으며
그나마 인접 사단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적의 주접근로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 부근으로 도하하는 적을 몇 차례 격퇴시켰으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제6사단은 북한군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용기동에서 위천으로 물러났다.
왜관일대의 미 제1기병사단은 역습을 전개해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적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가파른 목계단
다부동 전투 이어서 서술하면
그 무렵인 8월 11일 육군본부는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작오산, 왜관 북쪽)∼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8월 16일 낙동강변에 이른바 융단폭격을 단행했다.
이는 대구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8군사령부가 낙동강 대안의 적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해 실시된 폭격이었다. 융단폭격의 성과는 명백하게 확인되지 않았으나
북한군 지휘관들에게 대단히 큰 심리적 충격을 준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18일 가산에 침투한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는 등 대구일대가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 후 미 제1기병사단 정면의 적은 강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고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었고, 국군 제6사단 지역에서도 유엔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함으로써
적의 대구 공격은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축선에 집중되었다.
데크계단
팥재를 바라보면서 다부동전투를 생각해 본다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제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다고 하며 마침내 8월 20일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제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고,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위기는 해소되었다.
이끼 꽃
유학산에서 6,25전쟁때 국군의 피가 이 바위 위에 흘러내릴을 것인데
70년이 지난 지금은 그 상처대신 이끼에 꽃을 피웠다
춘설(春雪)
오늘은 춘분(春分)인데 이렇게 몇일 내린 춘설로 인하여 아직 잔설이 남아잇는 유학산이다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에 이렇게 남겼다. “유학산과 수암산의 능선이 이어지는 고지 곳곳은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적정을 살피기 위해 낙동강을 건넜다. 15연대 수색대의 경험담이다.
이들은 미군의 융단폭격이 펼쳐지기 전인 8월 13일 적의 집결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밤 11시쯤 강을 건너기 위해 물에 들어선 그들은 그만 지독한 악취에 뛰쳐나와야 했다.
물속에서 시신 썩는 냄새가 너무 강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갈수록 전선은 같은 핏줄, 같은 언어, 같은 모습의 민족끼리 벌이는
싸움의 비참한 광경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학상리 갈림길과 헬기장
우리 산하는 어디 아픈곳이 한두곳이 아닌듯 싶다 칠곡 유학산 우리동네 근처인 여항산과 서북산이 그렇다
6.25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전투가 벌어진곳 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산에 오를수 있는것 또한 국군의 숭고한 희생으로 얻어진 자유 이기에 그렇다
푸른청춘들이 푸른제복과 함께 포화속으로 사라져간 이곳 이자리에서 따스한 봄날 차가운 잔설이
서러운듯 남아 있었다
산정으로로 가는길
산정으로 가는길에는 봄에 내린 하이얂 눈이 아직 녹지 않은체 유학산 산정을 덥고 있었다
유학산이 위치한 칠곡군은 서남부에 있는 군으로 동쪽으로는 군위군, 대구광역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는 김천시, 성주군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대구광역시, 북쪽으로는 구미시와 접한다.
영남지방 교통의 요지이며, 이 대구광역시와 구미시에 주된 생활기반을 두고 있는 위성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왜관읍에는 칠곡왜관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기산면에는 칠곡기산농공단지가 입지해 있다.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 839m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 석적읍 성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명칭 유래를 보면 학이 놀던 산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해발고도 839m의 산으로, 유학산은 중생대 백악기에 분출한 응회암류로 이루어져 있고
정상 부분은 대체로 완만한 억새밭을 이루지만, 남쪽과 북쪽의 사면은 경사가 매우 급하여 단애를 이룬다.
남사면의 절벽에는 쉰질바위(학바위)가 있고, 단애 아래에는 붕락한 암설들이 쌓여 있다.
광암천과 한천의 상류 골짜기는 퇴적암층과 화산암층의 지질 경계를 이룬다.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 839m
유학산은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 그리고 석적읍 성곡리에 걸쳐 있는데
팔공산에서 가산으로 이어진 산줄기로부터 서쪽으로 분기한 산줄기에 위치한다.
유학산과 황학산 사이에 있는 다부리 고갯길은 6·25전쟁 때의 격전지였다.
유학산 남쪽 다부리 고갯길에는 6·25전쟁 때의 승리를 기리는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있으며
다부리는 대구로 밀려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다.
국도 5호선에서 분기한 지방도 79호선이 다부리 고갯길을 통하여 왜관으로 이어지고
유학산 남사면 중턱에는 도봉사(道奉寺)가 있으며, 절 뒤편에는 쉰질바위(학바위)가 있다.
칠곡 유학산(漆谷 遊鶴山) 839m
유학산 정상표지석 뒷면의 글씨 내용에는 조국을 위해 산화한 호국의 영령들의 넋을 기립니다
라고 새겨져 있었다 글씨 하나로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의 희생 또한 얼마나 많았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다부동전투는 국군 제12연대는 사단 일선 중앙의 숲데미산(수암산)에서 유학산 일대를 담당하여
8월 13일 아침 왼쪽으로부터 제2대대를 숲데미산에서, 제3대대를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각각 배치해놓고 제2봉인 837고지에는 제1대대를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837고지는 국군 1대대 병력이 배치되기 전에 북한군이 먼저 점령해 있었다.
그 때문에 837고지 전투는 유학산 일원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고 국군의 피해도 컸다.
유학정에서 바라본 조망(79번 국도)
작오산까지는 조망이 나오지만 미세먼지로 인하여 칠곡과 비룡산의 원경은 희미하며
날씨는 맑음인데 미세먼지로 인하여 그다지 시야는 멀리까지 나오지 않아 아쉽기만 하였다
유학산이 위치한 가산면은 산이 시렁처럼 둘러쌓여 불려진 가산(山) 산천이 아름답고 인심이 좋아
정으로 모여사는 이곳 가산면이라고 하며 특히 6.25전쟁 최후 보루지 다부전승기념관, 유엔 전승비 등
호국고장인 이곳 가산면이라고 한다
가산면에는 가산(902m)과 유학산(839m)의 청정계곡수와 중산간지 천연 토양을 바탕으로 사과, 채소류, 버섯류와
쌀 생산이 많다고 하며 대구광역시, 구미시와 인접해 있고 사통팔달의 도로교통망을 갖춰
생활여건이 편리한 곳라고 한다
유학정에서 바라본 조망(구미방향)
낙동강이 6.25전쟁 아픔도 보고 지금 70년이 지났지만 유유히 흘러내리는 것이 미세먼지 사이로 보인다
세상은 지금 코로나와 전쟁 중이며 세계적인 방역 모범국 이라던 K방역의 실태는
확진 판정을 받아도 집에 가서 기다리라는 것 외엔 정부가 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코로나 검사를 받지 않고 버티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말까지 나온다.
방역 당국이 운영하는 24시간 상담센터 보건소 등에 전화 연결 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사망자가 급증하며 화장장이 부족해 본의 아니게 장례 일수를 늘려야 하는 일도 다반사로 벌어진다.
코로나 누적 사망자수 280만명(2022.03.19)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하산길 확인
가져온 지도를 보며 하산길을 확인하였다 만약 지금2022년이 아닌 1950년대 였다면 전투를 하고 있을것이고
만약 전세가 북한공산당에게 넘어 갔다면 나는 여기서 편안히 등산배낭을 메고 유학산을 오를수 있을까 싶다
유학산은 학이 노닐던 산이며 다부동은 부자가 많은 동네였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 유유자적 평화롭던 마을은
갑자기 몰아닥친 6.25 전쟁이란 참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빠져들어
개전 2개월만에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유학산 하나를 두고 인민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이곳
나는 국군들의 희생 덕분에 포화가 자욱했던 이길을 배낭을 메고 봄기운 만끽하며 걷고 있다
춘설(春雪)
하산길은 음지라 그런지 봄에 내린 잔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유학산이 유명한 이유는 6.25전쟁의 격전지였다는 역사적 사실 이외에 거대한 바위에 있다 하며
실제로 걸어보면 육산에 가깝지만 들머리에서 보면 여지없는 바위산이 확인 할수 있다
쉰길바위 어른의 쉰길이 넘는 절벽이란 뜻이라고 하는데 838m봉을 지나면
절벽이 하나씩 모습이 유학산 산정에 펼쳐지는곳이다
도봉사 방향 하산
유학산 산능선에는 봄에 내린 춘설로 아직 남아 있는 이 평화스러운 곳이
6.25전쟁 때는 최대 격전지였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얼마나 국군의들 피로
얼룩져 흘러 내렸을까 하지만 북한은 변함없이 늘 도발을 일삼고 있지만 도발을 도발이라고 말도 못하는 실정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했을때 우리는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국군은 한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했다.
하산길에 바라본 유학산 정상
평화롭기만 하고 봄을 맞이하는 유학산 산정을 보면 자유평화가 얼마나 값진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1950년 8월 13일 북한군이 먼저 유학산을 점령했고 대구로 가는 중요 길목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다부동에서 유학산을 누가 먼저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달렸을 만큼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55일간 유학산에서는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벌어졌고
유엔군의 B-29 폭격기 98대가 칠곡 약목, 구미에 융단폭격을 퍼붓고 최초의 전차전을 벌이면서
전세를 역전시켜 북한군의 총공세를 막아내며 유학산을 탈환하면서 11㎞ 떨어진 대구를 지켜냈다
전망대(성곡리 방향)
발아래는 유학저수지가 마치 작은 연못처럼 보이는데 저 골짜기에도 6.25전쟁시 포성으로 가득 했을것이다
국군 1개 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과 맞서 싸운 다부동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고 한다.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유학산 능선은 당시 전쟁의 상흔은 찾을 수 없으나 백척간두에 서 있는
나라를 목숨 바쳐 지켜낸 호국의 성지임을 잊지 말아야 할곳이다.
도봉사
도봉사는 유학산 중턱 바위절벽아래 자리하고 있으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듯 보인다
대한불교 조계종 동화사 말사라고 하며 현재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 중이였다
하산시 도봉사 방향 표지목에서 우측은 도봉사 방향이며 정상 서쪽으로 S라인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금오산 조망이 보이며 하산은 직진해 헬기장 직전 갈림길에서 왼쪽 도봉사 방향이 올라온 산길이다
도봉사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고 70년 동안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준 책임자에 관한 추궁인데
산행종료
6.25 전쟁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했고 국토는 잿더미인데 되었는데 우리는 이 사실을 외면하고
양 진영 으로 갈라져서 벌이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무슨의미 일까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 했는데 언론에서 보면 최대의 피해자는
어린이들이다 지금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국가와 조국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리고 엄청난 희생 또한 잊어버지는 않아야 겠다.
※ 출처:
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유정열1000명산견문록, 한국의산천 손경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월간 山(아웃도어 매거진).신 산경표 박성태 조선일보사
해설 대동여지도 최선웅 민병준 진선출판사
인문산행 심산 바다출판사.한국1000산 신명훈
명산플러스 경남일보. 산&산 부산일보
칠곡군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및 지역주민 인터뷰 참고함.
바다늑대FORCE [202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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