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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 배향(配享)지 전남 장흥 해동사(長興 海東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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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 배향(配享)지 전남 장흥 해동사(長興 海東祠)

바다늑대FORCE 2021. 12. 26. 13:51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 배향(配享)지 전남 장흥 해동사(長興 海東祠)

■ 장흥 해동사(長興 海東祠)

 위치 :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길25-121

 

■ 장흥 해동사(長興 海東祠)개요 :

안중근 의사 국내 첫 사우 해동사, 1955년 위패 봉안

해동사는 광복 전후부터 건립이 논의되다가 1955년에 장흥 유림과 죽산안씨 문중에서 발의하여

전국 유림과 국민의 동참속에 건립하게 됐다. 유림대표로 의산 안홍천(義山 安洪天, 1895~1994)이 주도를 했다.

이에 앞서 해동사건립기성회(海東祠建立期成會)를 조직하여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기성회장 장흥군수 정재수, 부회장 장흥경찰서장 정주팔, 부회장 장흥교육감 엄을준, 도유사 안형중

부유사 안종덕 안종삼 안병주, 총무 안형순 안협순, 안종채, 장재 안홍천 안병식 안종명

감역 안대순 안희영 안홍국, 간사 안봉채 안상순 안종길 등이다.

고문으로 전라남도지사, 육군교육총감,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등을 추대하였다.

1955년 10월 27일 안중근의사 위패를 봉안하였다. 음력으로는 9월 12일이다.

당일 봉안식은 장흥대교를 지나는 시가 행진을 먼저 하였다.

안중근의사의 딸 안현생은 영정을 모시고 조카 안춘생은 위패를 모시고 참례하였다.

이때의 사진이 전하여 역사성을 반증한다.

봉안례는 기성회장인 장흥군수의 축사에 이어 추념사는 문교부장관, 전라남도지사, 육군교육총감

전남도의회의장 등이 하였다. 문교부는 고등교육국장이 참석하였다. 이어 상향 제향을 유림 주관으로 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해동명월(海東明月)”의 친필 액호(額號)를 내렸다.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60여 향교와 유도회 또는 성씨별 문중 답통(答通)으로 추인을 받았다.

해동사(海東祠)와 만수사(萬壽祠) 전경

만수사(萬壽祠)는 전남 고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있는  안향(安珦) 사당이며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죽산안씨(竹山安氏)문중은 1946년 만수마을에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사당인 만수사(萬壽祠)를 착공해

1951년 완공하였으며 만수사는 고려시대 유교를 일으켜 세우는데 공이 컸던 안향(安珦)을 중심으로

선조들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제례 공간이었다.

만수사를 짓고난 뒤 같은 뿌리인 순흥 안씨 안중근의 후손이 국내에 없어 제사조차 지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장흥향교 전교를 지낸 안홍천(1895~1994)씨가 안 의사 사당 건립을 추켜들었다.

죽산 안씨 문중과 뜻을 같이한 지역 유지들도 성금을 보태1955년 1칸짜리 사당을 세웠다.

만수사에다 안중근 의사의 사우(祠宇)를 지은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안 의사 추모 공간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해동(海東)은 우리 나라를 뜻하고, 명월(明月)은 밝은 달이니, 대한민국을 밝게 비추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려준 글을 따 해동사(海東祠)라 명명했다.

해동사(海東祠)입구

해동사는 안중근 의사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 12일에 추모 제향을 봉행하는

국내 최초의 유일의 사당이며 해동사는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는 있는 상황을 안따까워하며 죽산안씨(竹山安氏) 문중의 발의로

1955년 만수사 부지에 건립되었다.

유림 안홍천옹께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海東明月(해동명월;대한민국을 밝게 비추는 곳) 이라는 휘호를 받아

현판을 걸고 해동사라 명명하게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안중근 의사의 사당을 건립하기 위해 나라의 허락을 받고

가족의 허락을 받아 이 자리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안중근 의사를 모신 해동사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해동사(海東祠)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는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안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안태훈(安泰勳, 安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며 어려서는 안응칠(安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안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海東明月(해동명월)

안중근 의사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가 봉안 되어 있으며 여기서 큰절로 참배를 하였다.

사우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글씨로 알려진 "해동명월(海東明月)"이 전해 온다.

안에는 안의사의 친필 글씨 3점의 영인본이 액자로 걸려 있다.

孤莫孤於自恃(고막고어자시)는 명심보감에 나오는 글이고 오언시는 이백의 시인데 호방한 기상이 나타난다.

“孤莫孤於自恃[스스로 잘난체 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

五老峯爲筆 靑天一丈紙 三湘作硯池 寫我腹中詩(오로봉위필 청천일장지 삼상작연지 사아복중시)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삼아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내 뱃속에 담긴 시를 쓰련다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

極樂(극락)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경술삼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

안중근 의사 손바닥의 깃발

해동사는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 시설이며 여느 사당과 분위기가 다르다. 

해동사 앞에서 깃발 세 개가 펄럭이는데 자세히 보면 태극기와 장흥군기

그리고 안중근 의사 손바닥 탁본기 인데 약지가 짧은 예의 그 손바닥이다.

난 저 깃발을 보면서 안중근 의사가 지켜려 했던 우리 조국을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잠시 생각하게 만들었는데 지금 시국(時局)을 생각하면 참담(慘澹) 하기만 했다

안중근 의사 기록을 보면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의사는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

다시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처음 쏜 4발 가운데 3발은 이토,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다.

이어서 쏜 3발은 비서관 모리타이지로[森泰二郞], 만주철도이사 다나카세이타로[田中淸太郞]를 맞혔다.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안씨 제각(安氏 祭閣)

만수사는 고려시대의 유학자 회헌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1946년에 시작하여 1951년까지 지은 사우이다. 

회헌을 주벽으로 안원형, 안면, 안정생, 주세붕(1495~1554), 안중묵(1556~1607)을 배향하였다. 

신실(만수사), 내삼문(경모문), 강당(여경재), 외삼문, 관리사가 있다.

 해동사의 처음 신실은 만수사 곁에, 중건 신실은 입구에 따로 삼문을 두어 배치하였다.

만수사(萬壽祠

만수사는 고려시대 유교를 일으켜 세우는데 공이 컸던 문성공 안향(文成公 安珦)을 주벽(主壁)으로하여

안씨일문(安氏一門)이 그 선조들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946년에 짓기 시작하여

1951년에 건립하였던 것으로 일호 안원형(一湖 安元衡), 쌍청당 안면(雙淸堂 安勉)

직제학 안정생(直提學 安挺生)을 제향(祭享)하여 오다 1963년에 신재 주세붕(愼齋 朱世鵬)

동애 안중묵(桐厓 安重黙)을 추배하였다

 

만수사(萬壽祠)

만수사 옆 예전 안중근의사 위패를 모신 해동명월 해동사이며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 통감으로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을 격살한 의거의 주인공으로 대한 남아의 기개와 민족정신을 전 세계에 떨쳤던 인물이다.

여섯차례의 재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사형언도를 받고 3월 26일 뤼순(旅順) 감옥에서 형집행으로 순국을 한다.

특히, 사형언도 뒤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동양평화 실현을 위한 논책으로 미완성이지만

죽음을 앞둔 시기의 저작물로서 현재까지도 중요한 평가를 받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만수사의 전경

현재 만수사의 규모는 신실(神室)인 만수사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구는 1고주 5량가이다.

내삼문인 경모문 3칸, 강당인 여경재는 1925년 건립되었는데 전후로 퇴를 둔 1자형 5칸집으로 구조는 7량가이다.

외삼문 3칸, 직사 5칸, 안중근을 배향한 해동사(海東祠)가 1동이며, 기타 부속건물 2동이 있다.

 

徐慶齊(서경제)

안쪽에 보면 서경제라는 편액이 걸있다

안향(1243~1306년)은 고려시대 문신학자로 초명은 유(裕)이며,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충열왕 1년(1275)상주판관을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이 되었다.

충열왕 14년(1288)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이해 왕과 공주를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벼슬은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렀다. 또 문교의 진흥을 위해 육영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등 유학의 학풍을 수립했다. 그의 문하에 백이정, 우탁이 나왔고 그 학풍은

이제현, 이색, 권근 등에게도 계승되었다. 조선 중종때는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웠는데 이는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곡성 도동묘 이외에 장단의 임강서원,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안원형(安元衡)의 자(字)는 경포(敬浦), 호(號)는 일호(一湖), 죽산인(竹山人)이다.

고려 충혜왕 때 밀직사사(密直司事)를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안면(安勉)의 호는 쌍청당(雙淸堂) 공민왕 2년(1353)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안정생(安挺生)은 조선조에 문과에 올라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정남진에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

안중근 의사의 국내 유일한 사당인 해동사에서는 매년 3월이면 제향을 모시고 있으며

전라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71호호 지정 관리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0년 죽산안씨 문중의 독지가가 동산건리비에 전액을

기탁하겠다는 헌성이 있어 이에 민족의 표상인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

정남진은 한반도 정남쪽으로 대륙의 이운과 해양의 웅비가 조화롭게 교차되는

장흥군의 상징이기에 여기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군민의 기원이 내재되어 있다

희망의 정남진 장흥에서 통합과 통일의 시대를 소명하고 오대양으로 약진하는 기상을

향유하여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정남진 전망대에 안중근의사의 고결한 정손이 함께 할것이다

2011년7월26일 장흥군

 

■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 배향(配享)지 전남 장흥 해동사(長興 海東祠)를 참배 하고서

   사진과 글을 옮겨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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