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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 작약산(芍藥山)이라 불렀던 함박산에서 영산(靈山)의 호국정신을 보다 본문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
작약산(芍藥山)이라 불렀던 함박산에서 영산(靈山)의 호국정신을 보다...........!
▲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
높이 : 501m
위치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걸쳐 있는산.
▲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 산행일 :
201년03월10일 수요일, 날씨 : 맑음
▲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 나의 산행코스
영산 석빙고 주차장→→함박공원 →→ 함박산 약수터→→약수암→→영산호국공원갈림길
→→함박산 정상 →→영산호국공원 갈림길→→영산호국공원→→영산 석빙고 주차장
4.70km 2시간19분 (트랭글 앱 기준)
▲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 개요 :
함박산은 경상남도 창녕군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서, 둥근 보름달과 같은 산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산세는 능선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흙산이며, 동쪽으로 종암산, 덕암산과 이어져 있고
북쪽으로는 영취산 너머로 구룡산, 관룡산, 화왕산까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망은 우수하여 북쪽으로 영취산과 병봉의 암릉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로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의 산골마을이 그림처럼 바라다 보인다.
동쪽으로는 창녕군의 드넓은 들판이 평화롭게 다가오고
남쪽으로는 야산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정상 북서쪽 기슭에는 일명 '영산 약천(藥泉)'이라 불리는 "함박산약수터"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약수(藥水)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이 약수터는 동국여지승람에 신라시대 때 효심이 지극한 나뭇꾼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전해오는데
이곳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전국 7개의 청정약수' 중 최고로 선정되었다.
2등은 청송의 달기약수, 3등은 인제의 개인약수, 4등은 무주의 선풍령약수
5등은 부여의 고란약수, 6등은 구례의 당을샘약수, 7등은 청도의 정상약수라고 한다.
또한 약수터에서 좀더 내려가면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여름까지 보관하여던
조선시대의 냉장고인 석빙고(石氷庫)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사적 제169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함박산이라는 이름은 산에 함박꽃이 많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함박꽃 작(芍), 약 약(藥)"자를 사용하여 작약산으로 부르다가
순우리말인 함박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등산지도
▲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등산 나의 트랭글(TRANGGLE) 궤적도(軌跡圖)
▲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 찾아가는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부산방면→→남해고속도로 산인jc→→중부내륙고속도로 영산톨게이트
→→영산계성로 대구방면→→원다리길→→영산 석빙고 주차장
72km 50분소요.
→→→→→→2021년 03월10일 수요일 대한민국 구석구석 산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당번근무를 마치고서 가까운 산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오늘은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함박산이며 함박산은 순수 우리말이라고 하며 특히 영산 석빙고가 들머리 지점이라
석빙고를 둘러 보고싶은 이유중 하나이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많은듯 하고 코로나-19로 인하여 세상이 뒤숭숭한 가운데
코로나-19예방 백신인 아스트라제네카 접종이 시작 되어서 그런지 코로나가 많이 전파되던 때보다
미세먼지가 심한듯 하고 미세먼지에 파란하늘이 숨어 버린듯 하다.
창녕영산 석빙고(昌寧靈山 石氷庫)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함박산 산행 들머리가 석빙고 지점이라 역사 건축물을 함께 볼수 있어 좋다
영산 석빙고는 보물 제1739호. 지정면적 3,769㎡. 빙실(氷室) 길이 10m, 높이 3.35m으로
영산 만년교쪽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의 남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작은 하천의 상류에는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기에, 현재는 개울물이 대체로 말라 있다.
얼음방인 빙실의 바닥은 경사져 있는데
얼음이 녹은 물은 경사를 따라 배수구를 통하여 개울로 흘러나간다.
이러한 구조는 경상도 지방에 건립된 석빙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 이용 방식이다.
얼음방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는 동쪽으로 나 있으며 기둥돌 위에 이맛돌을 얹고
위아래에 문지도리[門樞] 홈을 판 모습이어서 문을 달았음을 알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디딤돌을 딛고서 얼음방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바닥에는 잔돌이 깔려 있지만 배수로의 흔적은 없다.
얼음방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3개를 틀어올린 다음,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긴 돌을 걸쳐 천장을 구성한 모습이다. 천장 위에는 흙을 쌓아 덮었는데
봉토 사이로 2곳의 환기 구멍이 설치되어 있다.
창녕영산 석빙고(昌寧靈山 石氷庫) 안내판
석빙고 입구를 보기전에는 꼭 옛 고분(古墳) 같이 보이지만 환기구도 있어 석빙고임을 알수 있다
안내 사료(史料)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석빙고는 봄 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로 겨울에 강이나 하천에서
깨끗한 얼음을 떼어 내 저장 하였다. 석빙고를 만들때는 땅을 판다음 돌로 벽을 쌓고
바닥은 앞을 높이고 뒤를 낮게 하여 경사를 만들어 물이 잘 빠지도록 했다.
천장은 기다란 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고 바람이 잘 통도록 돌을 맞추어 지붕을 얹고 구멍을 냈다.
석빙고 얼음은 일반 백성은 쓰지 못하고 양반이나 관에서 썼다.
현재 남아 있는 석빙고는 모두 경상도 지역에 있는데 전부 조선시대에 만든 것들이다.
창녕 영산 석빙고는 영산면 동쪽 함박산 자락에 있는데 언제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른 석빙고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원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함박산 공원 종합 안내도
석빙고 바로 뒷편 길위에 있는 함박농촌테마공원이며
위치는 창녕군 영산면 교리489-1 이며 2018년 개장식을 하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돼 있는 영산 약천(약수터)은 신라 경덕왕 때 체증(위장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노모를 둔 효성이 지극한 나뭇꾼이 백방 수소문을 해 여러 가지 약을 써봤지만
효과가 없어 노심초사하던 차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함박꽃(작약)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조언을 듣고
함박꽃이 둘러싸인 계곡에서 솟아나는 청수를 마시고 노모에게 떠다 드려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창녕군은 2012년부터 영산면 교리 398-1 일대에 60억원을 투입해 작약 4만여 포기를 심는 등
함박공원을 조성해 2018년5월16일 개장식을 열고 군민들과 창녕군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에게 함박꽃과 약수의 좋은 기운을 제공하고 있다 한다.
함박공원 테크계단(함박산으로 가는길)
함박산 산정으로 가는곳은 함박 약수터 방향인데 그 아래는 함박 농촌테마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테크계단을 약수터 방향으로 오르면 영산면 조망이 펼쳐지며 겨울이라 그런지 함박꽃 단지는
어디에 조성되어 있는지 알수는 없지만 자녀가 있는 가정은 놀이터 시설이 많아 하루정도 소풍코스로
적당 할듯 하고 불교신자라면 약수암에서 기도 리고 하루 힐링을 해도 좋을듯 싶다
함박 약수터
마을 아주머니들이 약수를 받고 있었고 약수터 우측은 약수암 사찰의 산령각(山靈閣)이다
함박산 약수터 유래와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본 약수터는 신라 경덕왕때 발견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 지역에 홀어머니와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 아들이 살았는데
어머니께서 오래토록 속병을 앓게 되어 아들은 어머니의 속병을 고치기 위해
좋다는 약은 다 써 봤으나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없고 몸이 점차 쇠약해져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어느날 효자 아들은 땔감을 구하러 함박산에 와서 나무를 한짐 해놓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손뼉을 치며 부르는 꿈을 꾸다 깨어 사방을 살펴보니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도 꿈이 이상해 꿈속에서 노인이 부르던 곳으로 가니
바위틈 속에 함박꽃이 피어 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흘러내려 목이 말라 그 물을 마셨더니
물맛이 좋고 속이 편안하여 점심으로 싸왔던 꼬막단지에 물을 가득 담아와서
병든 어머니게 드렸드니 그 물을 마신후로 어머니의 속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한다.
함박꽃 모양의 약수꼭지
그때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 함박산 약수를 이용하게 되었으며 많은 환자가 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 소문이 궁중까지 전해져 당시 불치병에 걸린 왕자가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으나 병은 고치지 못하고 있다가
함박산 약수터 소식을 전해듣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이 지역에 머물면서 약수를 매일 마셨더니
왕자의 병이 완쾌 되었다고 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함박산 신령님께 기도를 드리고
밀양 표충사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함박산 약수는 마음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는 더욱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온다
오랜 세월동안 약수터의 형태가 많이 바뀌었으나 한국관광공사가 조사한 결과
전국 청정약수터 7선중 함박산 약수터가 첫 번째로 뽑혔으며 두 번째 경북 청송 달기약수
세번째 강원인제 개인약수 네번째 전북 무주선풍령 약수 다섯번째 충남 부여 고란약수
여섯번째 전남 구례 당을샘약수 일곱번째 경북 청도 정상약수
특히 영산 함박산 약수는 전국 약수터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약수터로 유명하다.
함박산 초입 등산로
함박산 약수터에서 약수암 대웅전 옆길에 있으며 본격적인 산길로 이어지는 곳이다
여기서 함박산 까지는 0.8km 라고 안내 표지목에 안내 되어있다
0.8km 라면 산길좀 걸었다는 산행자들에겐 한발치도 안되는 거리이지만
원래 짧은 코스는 다 짧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며 거리가 짧다고 우습게 보았다간 큰코 다친다
함박산 탐방로
함박산은 소나무로 빼곡한데 처음부터 45도각의 오르막길 연속이다
함박산 공원이 있는 창녕군 영산면 교리(校里)는
영산향교가 있는 마을이므로 교리라 한 것이하 하며 영축산성을 오르는 입구는 영산신씨(靈山辛氏)의
오랜 세거지로 시조를 모시는 대종실이 있다고 한다
신씨 부호의 옛 영화를 말해주는 전통 한식 기와집이 많아
옛 가옥의 배치와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이들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한다.
끝없는 오르막길 목계단
함박산은 하마디로 가파른 산길의 연속이다 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코스가 짧으면 이렇게 45도각 이상의 가파른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목계단은 일반적인 테크계단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포름알데히드 처리한 나무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수목 속아내기 가지치기의 부속으로 나온 목재 같아 보였다
소나무 숲사이로 오전 10시의 햇살이 비춰 들어와 태양을 안고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영산호국공원 갈림길
함박산 산정 밟고서 하산시 영산 호국공원으로 하산할 계획이다
함박산은 약수터 유래처럼 바위틈에서 함박꽃이 피어나고 산 모양이 함박꽃 같다하여
함박산 예전에는 작약산(芍藥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함박꽃은 한자어로 작약(芍藥) 이라 하는데 작약과 작약속에 속하는 관속식물로
흰색이나 빨간색 또는 여러 가지 혼합된 색의 꽃은 5~6월에 원줄기 끝에서 1개가 핀다.
중국이 원산지로 관상용이나 약초로 재배되며 토양이 깊고 배수가 잘 되며
약간 그늘진 곳에서 잘 자란며 어린 잎은 식용하며 뿌리는 한방에서 약재로 사용한다.
함박산 바윗돌
함박산은 흙산으로 영취산이나 영축산 처럼 암릉구간이 없는 순수 육산이라 하겠다
함백산은 열왕지맥(烈旺枝脈)에 속한다고 하며 낙동정맥 사룡산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비슬지맥이
비슬산을 솟구치고 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비티재를 넘고 화왕산으로 향한다.
비티재에서 7km되는 거리에 천왕산(619m)이 있으며 천왕산에서 비슬지맥에서 따로 분기하여
남으로 내려가면서, 동으로 청도천을 가두어 낙동강으로 흘려보낸다.
주요봉우리는 천왕산(619.2) 열왕산(662.5) 영취산(738.7) 종암산(546) 덕암산(543.9)
처녀봉(446.2) 비룡산(352)있다.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501m
함박산 산정에 오를때 까지 평지 하나 없는 45도 각도의 오르막길 연속이었다
함박산이란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이름의 산이다. 용인, 평택, 양산, 경주, 음성, 창녕, 부산 기장면
밀양 등 여러 곳에 함박산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존재하는 산이 있고
내려오는 전설도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여러 조선지도가 읍치를 사이에 두고 영취산과 마주한 작약산(芍藥山)을 그려 놓았다.
오늘날 함박산(501m)이다며 지도에서는 멀리 떨어뜨려 놓았지만
사실은 영취산과 이어진 한 줄기다.
창녕 함박산(昌寧 함박山)501m
함박산의 옛 이름은 ‘크게 밝은 뫼’다. 산봉우리가 마치 해나 달처럼 둥글게 잘 생긴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여기서 ‘한밝 뫼’로, 다시 함박산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로는 한밝과 음이 비슷한 함박꽃 작(芍)을 써서 작약산이라 옮겨 적은 듯 하다.
요즘에는 산에 함박꽃이 많다고 함박산이라 부른다는 말도 있다.
함박산 중턱에 있는 약수터는 위장병에 좋다 하여 예로부터 이름이 나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영산(靈山) 약천(藥泉)’이라 하여 신라시대 효성 지극한 나무꾼이
함박산 약수로 어머니 위장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영산 사람은 고을을 둘러싼 영축산과 함박산을 모두 신령스럽게 대했다.
영취산 정상에는 북악기우단(北嶽祈雨壇)을, 작약산 정상에는 남악기우단(南嶽祈雨 壇)을 만들어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옛 기록이 그 증거라고 한다.
하산길에 바라본 낙동강(洛東江)
중국산 코로나-19 주춤하니 중국산 미세먼지가 파란 하늘을 가렸다
낙동강은 본류의 길이 525.15㎞이며 남한에서는 제일 긴 강이다
북한을 포함하면 압록강 다음으로 길며 총유역면적은 2만 3860㎢로
남한면적의 4분의 1, 영남면적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함백산에서 발원한 본류는 남류하다가 안동 부근에 이르러 반변천(半邊川, 116.1㎞)을 비롯한
여러 지류와 합류, 서쪽으로 흐르다가 함창과 점촌 부근에서
내성천(乃城川, 107.1㎞)과 영강(穎江, 69.3㎞)을 합류한 뒤 다시 남류한다.
커다란 꿀밤나무 아래 휴식
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렸지만 유유자적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 보면서
코로나-19와의 긴싸움 바이러스는 이렇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에게
보이지도 않는 무기로 한판승을 거둔 셈이 되었다
사람과 거리도 2m 그리고 5명 이상 사적모임도 못하고 다중이용업소 출입도 금지다
단체산행은 옛말이고 이제는 혼산이 일상화 되어 버렸다.
함박산의 봄
노랗게 생강나무가 꽃을 피웠다 세상은 코로나-19(COVID-19) 한겨울 같은 느낌이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은
우한 폐렴,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이라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 질환으로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며
증상이 거의 없는 감염 초기에 전염성이 강한 특징을 보인다.
감염 후에는 인후통, 고열, 기침,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거쳐 폐렴으로 발전한다.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가 팬데믹을 선언했으며
우리나라는 오늘까지 1648명이 사망하였다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함박산의 봄(빗살현호색)
빗살현호색은 양귀비과의 여러해살이풀이며 잎은 세 개씩 갈라지고 작은 잎은 손가락처럼 깊게 갈라진다.
현호색의 종류를 총칭하는 학명은 콜리달리스다. 종달새란 뜻의 희랍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러한 특징이 종달새의 머리의 깃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호색의 뿌리를 거두면 그 중간에 덩이줄기가 달려 나오며 이 덩이줄기는
현호색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른 봄 밥상에 올라와 입맛을 돋우는 달래 뿌리처럼 생겼지만
두 배쯤 크며 크게는 현호색 중에서 빗살무늬가 그어져 있으면 빗살현호색
잎이 대나무 잎과 같이 길쭉한 것은 댓잎현호색, 잎이 잘게 갈라져 있는 애기현호색
잎이 크게 작게 서로 다른 크기로 갈라져 있으면 그냥 현호색
셋으로 갈라져 있으면 외현호색, 등등 아주 많다.
三一 독립운동기념비
영남지역에서 23인의 결사대가 주축이 돼 3·1만세운동이 최초로 일어난 경남 창녕 영산지역이다.
일제의 폭력적인 무단통치에 맞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영산에도 애국지사 23인의 결사대가
일제의 조국침략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난 영산지역 독립운동은 1919년 3월13일 이곳 남산봉에서 시작되어
영산면 일대와 창녕읍에 이르기까지 맨주먹으로 일본 경찰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쳐
영남지방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를 부른 23인의 결사대를 추모하고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56년3월11일 연지(硯池)옆의 로터리에 높이 4.6m의 기념비를 건립하였다가 1980년 현 위치로 옮겼다
매년 3.1절에는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23인 결사대)
구중회 김추은 장진수 하은호 박도문 임창수 박중훈 이기석 장정수 김두영 구남회 하영규
남용희 이수철 구판진 구판돈 서점수 김찬선 신암우 김금영 최봉용 권재수 조삼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 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 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 (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 (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 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 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 (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 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 (탁락) 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 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 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 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 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공약 삼 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朝鮮民族代表
영산지구전적비
안내표지판에 있는 영산지구 전적비 안내글은 다음과 같다
영산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지역 공격하기 위하여 북한군이 막바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유엔군의 결사 방어로 남침이 저지된 격전지이다.
1950년6월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남으로 침공을 계속하여
8월초에는 낙동강을 끼고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최정예 부대인 제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 지역에서 기습적으로 도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8월11일에는 이 곳 영산지역까지 침공하였다.
이에 미 제24사단은 이들의 밀양지역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증원 가능한 부대들을 이곳으로 집중시켜
공방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을 강서쪽으로 격퇴하고 방어진지를 회복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사에 길이 빛날 중용한 전적지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산화한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고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교통부 주관으로 국제관광공사가 집행을 맡고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1979년4월30일 이 비를 세웠다.
영산지구전적비
6·25전쟁 당시 낙동강전선을 지킬 때도 영산은 적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다.
여기를 통해 밀양을 거쳐 부산까지 침공하거나, 대구를 포위 공격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북한군의 8월 공세는 이를 위한 첫 시도였다.
하지만 박진나루를 건너 영산 방면으로 침공하는 북괴군 제4사단의 파상 공격은 미 제24사단과
그를 지원한 미 2사단 및 해병대에 의해 격퇴됐다.이렇게 되자 북한군은 사단을 교체해 재차 공세를 기도했다.
그것이 바로 북괴군 9월 공세였다. 영산 방면에 대한 북괴군의 공격은 8월 31일 자정을 기해 감행됐다.
북괴군 4사단을 대신해 주공을 맡은 9사단이 다시 박진나루를 건너 침공한 것이다.
당시 영산지역 방어는 미 제2사단이 맡고 있었다. 적군의 발악적인 최후 공세로 초기 전황은 위급했다.
영산과 밀양을 잇는 도로를 차지할 정도로 적의 기세는 거셌다.
하지만 9월 2일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가 지원 병력으로 참전하면서 전세를 만회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9월 3일부터는 역습을 실시해 적군의 영산 점령을 막았고
백병전까지 벌이며 실지를 회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북괴군의 9월 공세를 막아내 낙동강전선을 굳건히 지키고 전세 대반전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날의 전공을 기리는 영산지구 전적비는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산 4번지 함박산 끝자락 남산마루에 위치해 있고
호국공원으로 꾸며진 남산 정상에 세워진 전적비는 낙동강을 향해 돌격하는 두 용사의 형상과
백병전을 벌이는 병사들의 모습으로 조성돼 매우 역동적인 느낌을 주고있다.
영산면 소재지와 연지못
영산면소지지가 아름다운 연지못이 아름답게 펼쳐진 하나의 풍경사진과 같다
영산(靈山)이란 낱말의 뜻 풀이를 하면,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넋이나 신령이 깃든 산이 되는데
그것이 고을의 이름으로 붙여져 고유명사로 바뀐다해도 원래의 뜻이 쉽사리 가셔질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곳 영산은 지리학적으로 애초부터 그런 이름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고장이기 때문이라 하는데
서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지대에 올라가서 영산을 굽어보면 소나무 숲에 가려 마을 전경은 보이지 않고
평지에서 갑자기 돌출하여 피라미드 신전처럼 우뚝 솟아 있는 산들과 눈이 마주친다.
이 고장의 진산인 영취산은 산세가 가파르고 깍아지른 절벽이 정상까지 이어지면 멀리서 보면 마치 매가
날개를 펼치려고 움찔하는 것 같으며 그리고, 영취산과 마주보고 있는 함박산은
마치 밥사발을 엎어 놓은 것 같아 덩치에 비해 몸매가 부드럽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연지"라는 못이 있는데 못안에 있는 5개의 섬은 용알을 상징한다 하며
좌청룡인 남산의 머리가 벗겨져 만들어졌다는 풍수지리설이 있다.
그래서 가뭄을 막기 위해 연지못을 만들었다는 이유와 달리 그 배경에는 용신사상이 깔려 있음을 알게된다.
게다가 경주의 안압지가 여신의 성기를 상징하고 있듯이 용알이 둥둥 떠있는 연지못에는
풍요를 비는 농민들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영산은 바로 연지못의 수신과 영취산의 산신이 합일하여 새로운 세계,풍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산이란 땅에는 어려운 국난에도 탈이 없으며 비도 많이 내리고 풍작을 이룰 것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믿음이 깔려있고 그것을 상징화한 것이 영산 줄다리기 라고 한다.
영산 만년교(靈山 萬年橋)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돌다리 로서 보물 제564호이며
홍예 너비 110㎝, 높이 500㎝, 다리 너비 450㎝. 남천에 가설된 다리이므로 남천교라고도 한다.
석교비에 의하면 이 다리는 1780년(정조 4) 석수 백진기가 축조했으며
1892년(고종 29) 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중수했다고 한다.
마을을 끼고 흐르는 하천 양쪽의 자연암반 위에 화강석으로 반원형의 홍예(虹霓)를 구축하고
그 위에 둥근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다음 맨 위에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다리의 상승각도가 원만하며 다리의 앞뒤를 연장하여 양안에 자연석을 쌓아 만든 석축 통로와 연결했다.
지금도 주민들이 통행로로 사용하고 있다. 이 다리는 선암사 승선교· 벌교홍교와 함께
희귀한 유구인 동시에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홍예다리 축조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라고 한다.
남천석교비(南川石橋碑)
6.25전쟁때 파손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것 이라고 하고
남천석교비가 세워진 곳은 처음에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던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큰비가 오면 물이 넘쳐 다리가 무너져 매번 물을 건너는데 애로가 있었으므로 경자년(1780년 정조4년)
3월에 고을에 사는 김윤관(金允寬)이 현감(縣監)의 명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재물을 모으고 다른산의 돌을 깍아
이 다리를 축조(築造)한것이라 한다.
비문에는 석교의 축조한 이유와 축조를 위해 재물을 내고 역사(役事)에 참여 했던
사람들의 성명을 기록하고 있다 석교비 글씨는 13세 소년이 글을 썼다는 이야기가 구전 되어 전해진다.
(비문해석)
수레나 교량은 온 백성이 교통하기에 편리한 것이었던 만큼 과거에도 또한 왕정에 있어서 한낱 큰 일이 었다
따라서 태 나라의 하교나 진나라의 부교가 또한 그런 것이었다
지금 읍의 남쪽에 있는 계곡은 촌락을 안고 흘러서 읍 터의 수문이 되고 있으며 큰 길이 그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길은 사신들이 유물을 바치러 지나가는 터라 이런 까닭으로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든것이 아주 오래전 부터였다
그러나 물이 넘치면 나무다리가 무너져 늘 건너기가 어려운 병태가 있었다
하루는 읍민들이 서로가 의논하기를
다리가 오래 견딜수 있는 계책으로 돌로서 다리를 만드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고 하였다
읍민 김윤관(金允寬)이 승후(承候)의 명을 받들어 백성으로 부터 재물을 모으고 먼 산의 돌을 깍아
이 다리 쌓았는데 몇 개월 뒤에야 비로소 일이 끝났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물을 건너지 못하는 걱정거리가 없어졌으며 읍에는 압진의 리가 되었으니
이는 돌이 천년을 지나도록 변치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돌에 새길 글을 부탁하니 나는 문사가 부족하나 사양치 못하고 명을 지었으니
가로되 락(鉻)을 지었으니 가로되 다리를 돌로 만듦은 오래가기 위함이니 그 모임은 무지개형으로
만들었네 오래 오래 견디려니 그 공을 알겠네<서기1991년8월 영산사적보존회>
석빙고앞 함박산 산행종료
함박산 산행은 창녕군 영산면의 역사와 호국정신을 볼수 있었던 장소 였다
함박산 효자의 약수터 이야기 부터 영남지역에서 23인의 결사대가 주축이 돼 3·1만세운동과
6.25전쟁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격전지 이며 연지못 그리고 남천석교와 석빙고
정말 자부심을 느낄정도의 영산면(靈山面)이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근교산&저너머(국제신문), 명산플러스(경남일보),산&산(부산일보),한국1000산 신명훈,
유정열1000명산견문록, 한국의산천, 창녕군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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