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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인천의 주산(主山) 계양산성(桂陽山城)을 따라 계양산 산정에 서다 본문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
인천의 주산(主山) 계양산성(桂陽山城)을 따라 계양산 산정에 서다.....!
▲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
높이 :395m
위치 :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양산로75번길 26 (계산동) 있는 산
▲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 나의 산행일
2021년01월15일. 금요일 . 날씨 : 흐림(미세먼지 많음)
▲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 나의 산행코스
계양산성박물관→→돌계단 →→계양산성터→→桂城亭(계성정)→→테크계단→→계양산 정상
원점회귀 3.50km 1시간30분 소요.
▲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개요 :
계양산은 해발 395m로 인천을 대표하는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이다.
계양산 동쪽 기슭 봉우리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계양산성(桂陽山城)이 있고
서쪽으로는 조선 고종 20년(1883년)에 해안방비를 위해 부평고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축조한 중심성(衆心城)이 징매이고개(景明峴) 능선을 따라 걸쳐 있었다.
계양산이란 이름은 지명의 변천에 따라 고려 수주 때에는 수주악(樹州岳)
안남도호부 때에는 안남산(安南山), 계양도호부 때에는 계양산(桂陽山)으로 부르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한 때는 아남산(阿南山), 경명산(景明山)이라고도 하였다.
계양산의 산명 유래는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1944년 1월 8일 인천시 최초의 도시자연공원(계양공원)으로 결정되고
그 후 계양산은 시지정 제1호 공원이 되었다.
▲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등산 지도
▲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등산 나의 트랭글(TRANGGLE) 궤적도(軌跡圖)
▲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찾아가는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진주jc→→대전통영간고속도로 산내JC→→경부고속도로 비룡JC
→→평택제천고속도로안성JC→→영동고속도로 군자JC→→무네미로 장수IC→→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계양IC
→→계양산로 →→계양산성박물관 인근 주차장
358.4km 3시간55분소요.
→→→→→→2021년 01월15일 금요일 대한민국 구석구석 산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딸아이 영국KCL유학 출국 때문에 연가를 내고 새벽4시경 출발하여 인천국제공항제2여객터미널에 도착해서
오전 9시30분경 출국 수속을 밟고서 출국 게이트로 나갔다
코로나-19 변이감염바이러스가 猖獗(창궐)하는 영국으로 보네는 마음이
아프기만 하지만 딸애 배웅을 마치고
인근 30분 거리에 있는 인천의 主山(주산)인 桂陽山(계양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양산 등산로 종합 안내도
계양산박물관 인근 도착하여 마땅히 주차할 장소가 없어 두리번 거리다가 유로 주차장도 만차라 이용할수도 없고
건너편 마을 도로 주차선이 있는곳에 주차를 하고서 계양산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다.
계양산의 이름은 고려 초기 수주악(樹州岳)이라고 하였다 하며
고려 의종 이후 안남산(安南山)으로 불리다가 고려 고종 때 계양도호부가 설치된 후
현재의 계양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그러나 한편 조선시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제13첩 인천편에서
여전히 안남산(安南山)으로 표기된바있다.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이 서식하여 계양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으나
이들 나무는 인천 일대에 자생하지 않는 종이어서, 실제로는 계양도호부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진산 또는 안남산으로 표기하였다.
계양선언문(계양 정명800년의 힘 비상하는 천년의꿈)
계양산성박물관앞 2차선 도로에서 보면 계양산성이란 안내판을 따라 좌측길을 올라가다 보면
우측에 있는 휴식처와 화장실 그리고 계양선언문이란 초석이 있다.
계양 선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명 800년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계양 선언문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려 고종2년 계양의 지명이 탄생했고
오늘 계양은 2015년 정명 800년이 되는 새로운 전환점에 섰다.
계양산을 진산(鎭山)으로 안고, 먼 옛날 주부토(主夫吐)에서부터 장제(長堤), 수주(樹州), 안남(安南)
계양(桂陽), 길주(吉州), 부평(富平)으로 변천해왔으니, 이 지명들은 높고 위대하며
상서롭고 신성하다는 뜻으로 지역의 형승과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계양은 인천만과 한강에서 개경과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이자 연안과 섬을 관할하는 요지였다.
옛 도호부와 향교는 행정과 교육의 중심지로 발전해왔으며
곳곳에 서려 있는 백운거사 이규보와 정조대왕의 체취는 계양의 긍지이다.
또한 계양산성은 수도를 방비하는 교통과 국방의 요충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6·25전쟁의 참화를 극복한 구국의 현장이요, 황어장터는 1919년 온 주민이
결연히 일어나 대한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던 숭고한 민족정기를 아름답게 꽃 피운 충의의 표상이다.
이처럼 유서 깊은 역사를 지녀 온 계양은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면서 효성 계산 작전 서운 계양 등
12개 동 35만여 구민과 함께 역동적인 계양, 희망찬 행복도시 건설을 위하여 매진하고 있다.
내일의 계양은 역사와 문화 및 생태를 보존하는 한편, 전통과 현대가 상생·소통하는
가교의 공간으로서 이제 천년의 희망찬 미래를 향해 새롭고 힘차게 비상하고자 한다.
2015년 10월 5일 인천광역시 계양구민 일동
계양산 초입 돌계단
자연석 돌계단이 길게 뻗어 있다 지역주민들이 운동삼아 많이 오르내리고 있었고
코로나-19로 인하여 산책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풍경으로 변해 버렸다.
계양산을 오르는 길에는 곳곳에 자연석 계단을 많이 설치해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다고 하며 계양구 계산동 연무정에서 시작해
팔각정을 돌아 내려오는 길은 총연장 1.1km, 소요시간 2시간과
계산2동의 계양공원 관리 사무소에서 출발해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코스는
총연장 0.8km, 소요시간 2시간정도 된다고 한다.
계양산 초입 돌계단
방축동 한성아파트에서 올라갔다 내려오는 코스는 총연장 1.3km, 소요시간 2시간이 있다고 한다
계양산 관리사무소 근처엔 야조사가 있다고 하며 공작새와 칠면조 등 14종의 새가 있어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한다
그리고 윗몸 일으키기 등 체육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시민의 운동장소도 최적이라고 한다.
하산해서 내려오는 주민에게 산정 탐방로를 물어 보니 경상도 사투리가 특이해서 그런지
경상도 어디에서 왔냐 오히려 되물어 보았다.
계양산성(桂陽山城) 터
돌계단을 오르니 넓다란 평지처럼 잔듸구장 처럼 넓은 터가 나오는이 이곳이 계양산성 터라고 한다.
계양산성(桂陽山城)은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양산(桂陽山)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성곽
산성으로 국가지정문화재라고 한다.
계양산성은(桂陽山城)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부평도호부 고적조에 “계양고산성은 석축 둘레가 1,937척으로
전하기를 삼국시대에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부평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서
석축 둘레가 1,937척이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두 기록을 통해 계양산성의 초축 시대가 삼국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지방명승 계양산 고적지조에는 “현존하는 성벽의 일부는 340여 년전
고니시[小西行長]가 명군에 대항하기 위해 쌓았다고 하나 잘못된 것이다”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계양산성 터에서 바라본 인천시 계양구(桂陽區)
미세먼지가 뿌옇게 하늘을 가리고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 코로나-19로 때문에 마스크를
쓰기보다도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쓰야 되겠다
중국발 미세먼지에 코로나-19 우리나라 이웃국가들은 하나 같이 민폐만 끼친다.
인천 계양구는 계양산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지대와 하천이 흐르고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인천동북부 지역의 역사적 중심지였다.
계양은 고려시대 계양도호부, 조선시대 부평도호부를 거쳐 부천군 부내면
인천부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계양구로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계양산성(桂陽山城)
계양산성은 계양산의 주봉(395m)에 축조된 것이 아니고 주봉의 동측에 있는 봉우리(202m)를
에워싸는 형상으로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주봉의 산정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서쪽으로 서해바다를 볼 수 있고
동쪽으로 김포평야 일대와 강서구 및 양천구 일대를 확인할 수 있다.
날이 맑은 날에는 여의도까지 조망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행주산성을 비롯하여
일산 신도시 아파트 단지까지 확인이 가능하다.
계양산성(桂陽山城) 제1집수정 안내판
계양산성은 삼국시대 테뫼식으로 축조된 성곽이라고 하는데
퇴뫼식 산성이란 마치 띠를 두르듯 산 정상부를 빙 둘러 가며 쌓아 올린 산성을 이야기 한다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의 성곽 중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것으로 총 길이가 1,184m이다.
성벽은 능선에서 사면부로 연결되면서 여러 지점의 계곡부분을 감싸안고 축조 되었고
성의 형태는 북서-남동의 장타원형에 가깝다.
계양산성(桂陽山城) 제1집수정
집수정이란 두 개 이상의 수원(水源)이나 못, 우물로부터 물을 모아 하류로 보내는 큰 우물을 이야기 한다.
계양산성 성곽의 시설로는 성벽 일부만이 육안으로 확인되고 있었으나
조사를 통해 성문, 치성(雉城), 집수정(集水井), 건물터, 구들 유구 등이 발굴되었다.
산성은 수직에 가깝게 양쪽에서 돌을 쌓아 만든 내외협축식 성벽으로 만들어졌고
성벽에 사용된 성돌은 계양산 인근에서 채취되었다.
성곽의 각 시설들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이후 구간별로 개보수되어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북문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하여 변형된 듯한 문 입구도 조사되었다.
계양산성 탐방로
계양산성을 둘러볼수 있도록 야자매트를 깔아 산책로 처럼 잘 조성 되어 있다.
계양산성에서는 많은 유물도 출토 되었다고 하는데 시기를 알 수 있는 각종 토기, 기와, 석제품
철기들이 출토 되었다고 하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성내에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마련한
집수정에서 출토 된 목간이라고 한다.
목간은 다듬은 목재에 먹글씨를 쓴 것인데 계양산성의 목간은 백제나 신라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간의 기록 내용은『논어(論語)』의「제5편 공야장(公冶長)」부분으로
이와 똑같이 기록된 목간이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논어의 습서용 목간은 당시 유학이 전래되어 학습되었음을 말해 준다.
계양산성에서는 이른 시기의 유물로 백제시대 주로 사용되었던 둥근바닥 항아리와
고구려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암문토기편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토기와 기와는 신라시대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는 이 시기 한강 유역에 분포한 삼국시대 산성들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계양산성과
교통로로 연결되는 호암산성, 양천고성 등에서도 모두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7~8세기에 사용되었던 토기와 기와류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계양산성과 계양구(桂陽區) 조망
계양산 일대는 고려시대 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육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고 하는데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1168~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에는
계양군에서 나가는 길은 오직 한 길이 육지에 통할 뿐, 세 면이 모두 물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물가였던 계양산 주변은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모두 개간되어 육지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주변이 물가였을 정도로 지대가 낮았던 부평 지역에 솟은 계양산은 인근 지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인천의 북부와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성을 축조하여 군사적으로 공격과 방어가 용이하도록 한 것이 계양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9~1674)와 같은 문헌에 의하면
옛사람들은 계양산성이 삼국시대에 쌓여진 석성이며, 1,937척의 길이로 축조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는 아마 조선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온 기록일 것이다.
桂城亭(계성정)
계양산과 계양산성은 산책코스로 적당하며 잠시 휴식과 조망을 위해 桂城亭(계성정)이란 편액이 걸여 있는
팔각정에 올라 조망을 보는것도 좋을듯 싶다.
계양산성의 성벽은 비슷한 크기의 돌을 한층씩 쌓아올린 것으로
성벽 아래 부분에는 힘을 받쳐주는 보축 시설도 설치되어 있고 계양산성에서 발견된
성벽 중 가장 많이 남는 곳은 높이가 7m이라고 한다.
城(성) 내부에는 집수정이란 산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물며 살 수 있도록
물을 가두어 저장해놓는 시설이 있어 산행시 많은 산성을 보았지만
집수정 이란 시설은 계양산성이 처음인듯 싶다.
계양산 산정의 조망
계양산성을 둘러보고 계양산 산정을 향해 걸어가면서 풍경을 담아 보았다
계양산성 지표조사를 보면 1997년 인천광역시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2001년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가 계양산 일대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하였으며
2003부터 2008년까지 1~3차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특히 3차 발굴조사 결과 집수정 유구에서 목간들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2009년 겨레문화유산연구원에서 4차 발굴조사를 진행하였으며 북문지, 배수시설
건물지, 내벽보축 등 총 26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한다.
계양산 산정방향 탐방로
목계단으로 쭉 이어 져 있으며 참나무와 소나무가 주 수종을 이루고 있는듯 하다
계양산에는 산림욕장도 있다고 하며 위치는 계양구 임학동 산10번지 일원이며
면적은 73,379㎡라고 하며 2017년 12월 조성완료 하였다고 한다.
시설물은 출렁다리(25m) 1개소, 휴게․전망 14개소 , 정자 2개소가 설치 되어 있다고 하며
수목은 교목으로는 편백 3,496주, 자작나무 등 14종 846주 식재되어 있다고 한다.
경인여자대학교와 계산2동 조망
발아래는 인천시의 콘크리트 숲이 도시전체가 펼쳐지고 발 아래는 경인여자대학교라고 한다.
인천광역시에 있는 2·3년제 사립 여자 전문대학으로서 1990년 백창기씨가 학교법인 태양학원을 설립했고
1991년 설립인가를 받아 1992년 경인여자전문대학으로 개교했다한다
1998년 경인여자대학으로, 2012년 경인여자대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학교법인 태양학원이 운영하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대학은 간호보건복지계열·유아아동계열·관광식품계열·사회실무계열·예체능계열
정보계열·디자인계열과 4년제학사학위과정, 교양교육센터로 구성되어 있다.
간호보건복지계열에는 간호학과, 피부미용과, I Belle헤어과(쟈끄데상쥬), 보건의료관리과, 사회복지과
보건환경과 등 6개 학과가 있다. 유아아동계열에는 유아교육과, 아동보육과, 아동미술과 등
3개 학과가 있으며 관광식품계열에는 항공관광과, 호텔·카지노과, 관광영어과, 관광일본어과
식품영양과, KWPPA 웨딩플래너과 등 6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사회실무계열로는 세무회계과, 차이나비즈니스과, 국제무역과, 비서행정과, 금융서비스과
경영과 등 6개 학과가 있고 예체능계열에는 아동체육과와 실용음악과 2개 학과가 있다.
정보계열에는 영상방송과, e-비즈니스과, 스마트미디어과 등 3개 학과가 있고 디자인계열에는
광고영상디자인과, 패션·문화디자인과, 시각디자인과, 광고디자인과 등 4개 학과가 있다고 한다.
산정으로 가는 테크계단
계양산 산정으로 가는 탐방로는 대부분 테크계단길이다
무릎이 불편한 사람들은 조금 어려울 듯한 테크계단이 산정까지 이어져 있어
시민들의 운동코스로는 정말 좋을듯한 거리의 탐방로 였다.
계양산은 1944년 1월8일 조선총독부가 관보 제13호로 계양산 전체를 공원으로 지정하였다고 하며
1988년에 인천시 시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계양산의 높이는 395m로 인천시 도심 지역에서 가장 높으며 초보 등산객이 오르기에 적합한 규모이다.
인천지하철 1호선 계산역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도보로 5분 거리라고 한다.
등산로는 입구의 연무정에서 시작하며 중간에 팔각정이 있으며, 하느재고개를 지나
경사진 계단을 오르면 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계양산 군사시설 벙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군사시설 이지만 출입은 통제되어 철조망이 쳐져 있다.
계양산이 위치하고 있는 인천 계양구(桂陽區) 자연환경을 보면
계양구 남쪽에는 부평지역의 중심지였던 부평도호부가 입지하고 있었고
부평도호부는 일제강점기에 경인선 철도와 경인국도가 개통되면서 부평역 인근 지역이
상업 및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함에 따라 구읍으로 전락했다.
계양산과 그 남서쪽으로 뻗은 천마산을 경계로 서구와 맞닿아 있으며
임꺽정의 전설이 남아 있는 경명현(장명이 고개)을 통해 서구지역으로 교통로가 개설되어 있다.
계양산 남쪽과 동쪽으로는 계산천과 굴포천이 흘러 부평평야를 이루어 과거에는
대규모로 벼농사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계양산 북쪽지역은 5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매우 발달해 있고, 그 분수령의 산록을 따라
시천천이 흘러 황해로 흘러들며, 귤현천과 계양천 등은 북쪽으로 흘러간다.
그 골짜기들은 충적층으로 덮여 있으며 논으로 이용된다.
전체적으로 계양산 북쪽 지역은 임야와 경지가 널리 분포해 있고
남쪽 지역은 대지 및 공장용지로 많이 이용된다.
계양산 정상부 조망
산정부분은 팔각정과 송신철탑이 우뚝 서 있으며 계양구 역사를 보면
계양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의 유물 및 유적이 출토된 바 없다.
다만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도끼 두 점이 계산동 일대에서 수습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고구려가 470년 주부토군(主夫吐郡)을 설치하면서 계양구 지역이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마한의 영역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는 주부토군(主夫吐郡)이 장제군(長提郡)으로 개칭되었다.
9세기 말 통일신라의 세력이 쇠퇴하여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웠을 때
궁예는 905년 계양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였다고 하며 따라서 후삼국시대에
이곳은 후고구려의 판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란기였기 때문에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지는 못하였고
그 대신 이 고장의 호족이었던 이희목(李希穆)이 계양과 김포 일대를 관장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이희목은 나중에 왕건을 도와 고려의 개국공신에 책봉되었다고 하며
오늘날의 부평 이씨는 그를 시조로 삼고 있다.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395m
계양산 정상 표지석에는 계양산 개요를 새겨 놓았다
계양산은 해발395m로 인천을 대표하는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이다
계양은 과거 기원초 부터 19세기 말까지 읍치(邑治)가 계양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 삼국시대 고현읍(古縣邑)에서 시작하여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 이동하며 마지막 남쪽
조선시대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이르기까지 여섯번 환천(換遷)을 하면서 발전하고 번창 했다.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395m
계양산 동쪽 기슭 봉우리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계양산성(桂陽山城)이 있고
서쪽으로는 조선 고종 20년(1883년)에 해안방비를 위해 부평고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축조한
중심성(衆心城)이 징매이고개(景明峴) 능선을 따라 걸쳐 있었다.
계양산이란 이름은 지명의 변천에 따라 고려 수주 때에는 수주악(樹州岳), 안남도호부 때에는
안남산(安南山), 계양도호부 때에는 계양산(桂陽山)으로 부르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한 때는 아남산(阿南山), 경명산(景明山)이라고도 하였다.
계양산의 산명 유래는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1944년 1월 8일 인천시 최초의 도시자연공원(계양공원)으로 결정되고
그 후 계양산은 시지정 제1호 공원이 되었다.
계양산 산정에서 바라본 조망
경인아라뱃길과 파주 일산등이 조망이 된다 미세먼지로 인하여 맑은 파란 하늘은 볼수가 없다
아라뱃길은 한강 하류에서 서해바다까지 이어진 18km의 물길로 2012년 개통된 국내 최초의 내륙운하이다.
홍수시 아라뱃길 인근 지역의 홍수량을 재빨리 서해 바다로 배제시키는 치수기능, 선박을 통한 물류수송
친수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관광레저 기능을 제공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최초의 경인 아라뱃길 개척시도는 800여 년 전인 고려 고종 때 시작되었다.
당시 각 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중앙정부로 운송하던 조운(漕運) 항로는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바닷길을 거쳐
경창으로 들어가는 항로였으나, 강화도 바닷길은 만조 때만 운항이 가능했고 뱃길이 매우 험했다고 한다.
이에 안정적인 조운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당시 실권자인 최충헌의 아들 최이는 인천 앞바다와
한강을 직접 연결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를 시도하였지만
원통현(현재 인천 원통이 고개) 400m 구간의 암석층을 뚫지 못해 결국 운하건설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운하건설이 계속 추진되었으나, 인력과 기술의 한계로 좌절되거나 급격한 도시화와
지역개발등으로 운하건설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그러다 '87년 굴포천 유역의 대홍수로 큰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하자 방수로를 신설하여 홍수량 일부를 서해로 방류하는 내용의
굴포천 치수대책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후 방수로 시작점(굴포천유역)에서 한강까지 4km 구간을
조금만 더 연결해주면 홍수대비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운하로 활용할 수 있음을 고려하여
1995년도부터는 홍수방지를 위한 방수로와 평상시 운하로 기능할 수 있는 경인운하 사업을 검토 추진하게 되었다.
이 후 오랜기간 동안 경인운하 사업계획 및 타당성에 대한 재검토 끝에
2009년 드디어 첫 삽을 뜨게 되었고, '2012년 마침내 국민들 앞에 경인아라뱃길이 탄생하게 되었다.
산정에서 바라본 인천 계양구(桂陽區)
미세먼지가 도시전체를 덥고 있으며 코로나보다 미세먼지가 더 위험할 정도이다.
계양산 설화에는 계양산 상봉 남쪽 중턱의 장사굴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굴 입구는 비좁아 사람이 기어들어 가야만 되고 안으로 들어가면 5~6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굴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기도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굴에 대하여 세 가지 전설이 있는데, 첫 번째는 옛날 이 굴에서 장사(壯士)가 났는데
어찌나 힘이 세고 컸는지 그 장사는 그 굴에서 나와 남쪽으로 걸어가 영성산(靈城山) 기슭을 지날 때
넓적한 바위를 밟고 지나갔으며 발자국이 그 바위에 패여 남아있다고 전한다.
두 번째로 옛날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평 땅에 침입하여 부평향교에 불을 지를 염려가 있어
유생들이 향교에 있는 공자를 위시해 여려 명현들의 위판을 이 장수굴에 안치하였다가
난이 평정된 뒤에 다시 봉안하였다. 인근 향교는 모두 불에 타니 훗날 이를 표본으로 삼고
다시 제작하여 갔다고 하며 그 위판을 장사굴에 보존한 교생(校生) 박무영(朴茂榮)
박대충(朴大忠), 이언복(李彦馥) 등 세 사람에게는 숭유정신(崇儒精神)의 귀감이 된다 하여
참봉 벼슬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계산동에 사는 도술 철학자인
박거사(朴居士)가 굴에서 도통(道通)하기 위해 장기간 수도한 곳이라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입구가 폭파되어 붕괴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주변에 자갈 무더기가 널려 있을 뿐이다.
하산완료
하산완료는 언제나 먼지털기 이다 계양산 등산은 평생복 차림으로 캐주얼 신발을 신고 올랐다
공기청소기 처럼 생긴 먼지털이 기구가 경남 사천 와룡산에 설치된 먼지털이와 같았다.
끝으로 수지리적으로 계양산의 허함을 보강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오조산(五造山) 이야기가 있는데
오조산이란 인공적으로 만든 조산이 5개 있었다는 의미이며 옛날 어떤 지관(地官)이 와서 하는 말이
부평의 풍수를 살펴보니 안산이 없어 계양산 정기가 새어나가니 만약 인공적으로라도 앞에
산이 있다면 큰 도읍지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평 주민들과 수령은 인공 동산을 축조할 계획을 세우고, 제1차로 두 개의 조산을 만들었고
제2차로 3개를 더 만들어 모두 5개의 조산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고지도에서도 조산이 표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고 다만
그러한 이야기를 기념하여 현재 오조산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인천 계양산(仁川 桂陽山)은 인천의 주산(主山) 계양산성(桂陽山城)을 따라 계양산 산정에서
인천시내를 내려다 품어보고 경인아라뱃길도 조망하면서 산행을 마무리 한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근교산&저너머(국제신문), 명산플러스(경남일보),산&산(부산일보),한국1000산 신명훈,
유정열1000명산견문록, 한국의산천, 인천계양구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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