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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황학산(晉州 黃鶴山). 백두대간(白頭大幹)웅석지맥의 끝점 황학산 까꼬실을 걷다 본문
진주 황학산(晉州 黃鶴山)
백두대간(白頭大幹)웅석지맥의 끝점 황학산 까꼬실을 걷다
▲ 진주 황학산(晉州 黃鶴山) 높이 : 233m
갈마봉(渴馬峯) 높이 : 229.5m
위치 : 경남 진주시 대평면 당촌리와 내촌리에 걸쳐있는 산
▲ 나의 산행일 : 2020년03월30일 월요일.날씨 : 맑음
▲ 나의산행코스 :
까꼬실 주차장→→→→목교→→황학산→→토제비고개→→분토산→→당산
→→꽃동실→→가곡탐조대→→한골→→갈마봉→→주차장갈림길→→까꼬실주차장
9.8km 3시간 20분소요
▲ 산행지 개요 :
웅석지맥(熊石地脈)은 백두대간 지리산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가지를 쳐 중봉 하봉 새재 와
아등재 밤머리재 웅석봉 백운산 칠성고개 마재 황학산 분토산을 지나 진양호 꽃등실에서
그맥을 다하는 도상거리57km 산줄기로 덕천강의 우측 경호강의 좌측 분수령이 된다.
꽃동실은 진주시 귀곡동은 진양호가 생김으로 인해 주거하는 주민을 이주 시키고
상수도 보호지역인 섬아닌 섬이 된 지역이다.
일명 까고실마을로 불리는 귀곡동은 1969년 당시 8개마을 257가구 1,467명이
거주하던 해주정씨 집성촌이었으나 1969년 남강댐 완성으로 진양호가 생기면서
마을이 수몰되기 직전 귀곡동은 8개마을 257가구에 1,467명의 인구가 번창했던 큰마을 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 귀곡동으로 이어지는 차도는 버스가 다니기는 조금 불편하나 승용차는 주차장 까지 운행이 가능하다
이지역에 거주하던 실향민이 고향을 사랑하는 애향심과 어렷을적에 생활을
귀곡동 주차장에서 한골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넓게 정비하고 편의시설을 보완하여
귀곡동을 탐방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까꼬실이란 말은 이 지역 사람들이 귀곡(貴谷)을 이르는 말로 마을 지형이 새 또는
나발주둥이 형상을 닮아 한자로 각구(角口)라고 불리웠던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오늘날 초등학교 구실을 하던 각후재(覺後齋)란 서당이 있었는데 주민들의 향학열이
대단하여 조선시대에는 지역에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고
폐교 전 귀곡초등학교 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고한다
▲ 산행지도
▲ 산행지 차자아가는길
진주역→→진마대로 산청방향→→경서대로 하동방향→→내축로 진수대교→→호반로 대평방향
→→까꼬실주차장
21km 승용차30분소요
→→→→→2020년3월30일 월요일 우리나라 구석구석 산을 찾아 오늘도 길을 나선다
당번근무를 마치고서 오후 늦어막에 까꼬실이란 다소 생소하고
단어자체가 고유의 맛이 풍기고 고향같은 낱말에 까꼬실이란 동네를 찾아
그리고 백두대간 웅석지맥의 끝점인 황학산 꽃동실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대평면 사평마을
네비게이션 주소는 진주시 대평면 내촌리581-3 검색하면 까꼬실 주차장이다
위 사진은 까꼬실 귀곡동으로 가는 사거리 도로 이며 안내 표지목으로 가면 된다
까꼬실 가는 방향을 못찾아 몇번이고 헤메던 끝에 길을 찾아 들어 간곳이다
티맵(T MAP)에는 까꼬실주차장이나 산현주차장은 검색되지 않는다.
사평(砂坪)마을은 댐 수몰이 되기 전에는 92호로 5개 마을로 분동되어 있었다.
현재 수중이 되어 있는 벗들에 28호가 주거하고 있었고 주작물인 벗들무우(대평무우)는
전국에서도 유명하여 옛날에는 나라 임금님께 진상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무 종자를 채종하는데 옥방마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좋은 종자를 100여 가마(1가마 72㎏입)나 생산 하던 곳이다.
수몰 전에는 무가 전국에서 뛰어나게 잘되던 옥토가 지금은 물속으로 변모하였다.
남강댐 수몰 전에는 유명한 벗들무우를 매입하기 위하여 부산, 서울 등지의 상인이
하루 십여 명씩 내왕하여 무를 밭떼기로 매매하는 사람과 하루 20여대의 자동차가 붐비어
주점에 만원을 이루었으며, 개가 십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돈이 흔하던 고장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귀곡동 가는길 표지목
사평 사거리에서 진수대교방향에서 진입하면 우회전하여 직진하면
표지목 부터 비포장 도로의 연속이다 마치 유년기 시절 신작로 시골버스가 지나가면
흙먼지 가득 일어나서 언제나 도로에 물을 뿌려 놓아야만 먼지가 적었던 시절처럼
승용차량 뒤로로 흙먼지 가득이 날리면서 지나가야 했다
작은 비포장 도로를 쭉 따라가면 귀곡동 가는 표지목이 있다
여기서 까꼬실 까지는3.15km이다
까꼬실이 있는 대평면은 옛 부터 한들 또는 큰들이라고 불리었다.
북쪽은 산청군 단성면, 서쪽은 수곡면, 동쪽은 명석면, 서남쪽은 사천군 곤명면, 남쪽은 진양호와 접하고 있다.
조선조 전기 때까지는 진주목(晋州牧) 서면(西面)의 서신대리(西申大里), 침곡리(針谷里)
가을동리(加乙洞里), 대평리(大坪里)이던 것이 임진왜란 후에는 대평리로 통합되고
조선조 후기에는 침곡면(針谷面)과 대평면(大坪面),
또 구한말 때는 침곡면(針谷面), 신풍면(新豊面), 마동면(馬洞面), 대평면(大坪面)이었다.
1914년 3월 1일에는 부령 제 111호 (1913. 12. 29 공포)에 의하여 대평면(大坪面)
신풍면(新豊面), 마동면(馬洞面), 침곡면(針谷面), 곤양군 곤명면 본촌동 일부를 통폐합하여
대평면(大坪面)이라 하고 그 속리를 대평리(大坪里), 신풍리(新豊里), 내촌리(內村里), 당촌리(堂村里)
하촌리(下村里), 상촌리(上村里)등 6개리로 하였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 4774호(1994. 8. 3)에 의거
진양군에 속하였던 대평면이 도농 복합형 진주시로 통합되었다.
까꼬실주차장(산현주차장)
좁다란 시멘트도로가 끝나면 비포장 도로 끝지점이 까꼬실 주차장이다
제법 승용차 100대 정도는 충분히 주차할수 있는 곳이지만 대형버스는 집입자체가 곤란한곳이다
여기서 백두대간 웅석지맥 끝지점 꽃동실을 가기위한 첫 관문인 셈이다.
수몰의 이전인 1914년, 진주군 마동면 내촌동(馬洞面內村洞)으로서 내촌리(內村里)라 하였다.
내촌(內村)은 1969년 남강댐이 되기 전 내촌마을 주거호수는 96호, 족정(足亭)마을 호수는 78호로 2개 마을이었다.
당시 진주에서 평거(平居) 잠수교를 경유, 내촌리 내촌마을, 족정마을을 거쳐 사천, 완사를 경유
하동으로 통행하는 대로였는데 사람, 자동차, 우마차의 왕래가 많아 번화한 거리였다.
특히 내촌마을, 족정마을은 살기 좋은 곳으로 전분공장 또는 큰 상점이 있어 돈이 많이 끌리는 곳이었다.
마을 앞 강변에 규모가 큰 전분공장을 세워 진양군, 사천군, 산청군, 하동군 4개군 6개면 내에서 생산된
고구마, 감자를 전분가공용으로 1일 3만㎏를 수집하여 많은 전분을 생산한 곳이다.
남강댐 수몰 전 족정마을에서 무 종자를 생산하여 많은 소득도 올렸으며
고구마, 감자, 무 등이 특히 많이 생산되던 곳이 지금은 물속으로 변하고
족정마을은 한집도 없이 69년에 철거되었다.
귀곡동(까꼬실) 가는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서 비포장 임도처럼 생긴 도로를 쭉 따라가면 탐방로이다.
귀곡동(貴谷洞)은 경남 진주시 판문동(행정동)에 속하는 법정동으로서
경남 진주시 귀곡동(貴谷洞) 일대는 1970년 남강댐의 준공과 더불어 수몰된 지역이 많은 편이다.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지역에 해당하여 마을 이름과 지명 등에 얽힌 사연과 유적이 산재하는데
1997년 발굴 조사된 ‘진주 귀곡동 귀동유적(晋州 貴谷洞 貴洞遺蹟)’이 대표적이다.
본래 경남 진주군 가귀곡면 지역으로 ‘귓골’ 또는 ‘귀동’이라 부르다가 ‘귀곡리’를 거쳐 ‘귀곡동’이 되었다.
본래 진주군 가귀곡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대촌·게에미·대터·송정을 병합하여
귀곡리라 이름이 붙여졌고, 내동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경상남도 진주시에 편입되었고, ‘귀곡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갑골, 깨골바위(개구리 바위 또는 와암), 부엉산(곤궁), 깟고실(까꼬실 또는 대촌)
꽃똥실, 당산멀랑, 딧덕골(딧덕이), 땡땡이 굴, 분딧골(분릿골), 시포리바우(쉬파리 모양의 바위)
콧등심, 태봉(황학산의 한 봉우리로서 옛날 태를 묻었다고 한다), 항아골, 황학산 등
그 이름과 관련하여 마을의 형성과 역사적 변천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귀곡동의 동쪽에는 남강댐이 1970년에 준공되었고, 이의 영향으로 귀곡동 북쪽에 있던 들녘에는
녹두섬이 생겨났으나 현재는 덕천강에 잠겨 있다.
또한 무절골(절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옛날 무제를 지냈던 곳), 벗들 부엉사터(부엉산의 절터)
불땅골(귀곡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불당이 있었음) 등에는 몇몇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진주 귀곡동 귀동유적은 남강댐 보강 공사에 따른 수몰 예정 지역 중 1992년 경상대학교 지표 조사에 의해 유적군이 확인되었다.
수몰 지역의 확대에 따른 문화 유적의 훼손에 앞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유적의 위치는 경상남도 진주시 귀곡동 산66-19 일대(총 7,812㎥, 약 2,367평)였다.
1997년 1월 10일부터 2월 16일까지 진양호 수면에 인접한 구릉의 경사면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탐방로에 핀 민들레
봄은 노랑색이다 여기저기 노랑색 물감을 풀어 놓은듯 노랑꽃들이 봄바람에 춤을 춘다
민들레는 어디서나 매우 흔하게 보이는 다년생초본로서 바닥에 딱 붙어서 꽃봉오리 하나가 쏙 올라온다.
톱니 모양의 잎새와 눈에 확 띄는 노란 꽃이 인상적이다.
특히 꽃이 지고나면 솜털모양의 깃을 가진 씨앗들이 나오는데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널리 퍼진다
이 중 서양민들레와 붉은씨서양민들레는 이름만 봐도 외래종이다.
유럽 원산의 서양민들레들은 20세기 초에 건너오더니만 이미 완전히 토착화되었다.
때문에 대표적인 토착화한 외래종 즉 '귀화생물'의 예로 손꼽힌다.
서양민들레와 '토종' 민들레의 중간 외형을 가진 민들레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순혈주의 관점에선 어떨지 모르나 자연적 관점에선 당연히 좋은 일이다.
토종 민들레는 충매화로 적절한 매개체가 없으면 씨를 맺기 어려운 데다 환경오염에도 취약한 반면
서양민들레의 번식력은 매우 왕성하고 오염에도 강하기 때문에
도시화가 이루어진 지역의 길가에 핀 민들레는 대부분이 귀화식물 민들레다.
조금만 교외로 나가도 토종 민들레를 찾아볼 수가 있다.
흔히 민들레는 꽃이 노랗지만 흰민들레는 이름 그대로 꽃이 하얗다.
완전히 하얀 건 아니고 조금은 노리끼리하다.
꽃이 하얀 민들레만 토종 민들레라고 아는 사람이 많으나 이것은 흰민들레 이야기다.
흰민들레가 토종인 것은 사실이나 모든 토종민들레가 흰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토종 민들레도 외래종 민들레처럼 꽃이 노랗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정확히 구분하려면 꽃받침을 확인하면 된다.
꽃받침이 바나나 껍질깐듯 뒤로 젖혀져 있으면 서양민들레이고, 꽃을 감싸는 것은 토종 민들레.
유럽에서 건너온 외래종인 서양민들레와 붉은씨서양민들레간 외관상 차이점은 크지 않아 구분하기 어렵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름에서 나타나듯 씨앗이다.
서양민들레는 종자 색깔이 옅은 녹색인 반면 붉은씨서양민들레는 종자 색깔이 붉다.
목교
황학산 가는 목교이다 여기서 부터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는곳 이기도 하며
까꼬실 산행의 시작점이다.
까꼬실은 마을 앞에 까꼬막(가파른 산길)이 있어서 까꼬실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까꼬실의 한자 이름이 가귀곡동(佳貴谷洞)으로 한자어인 ‘가귀곡’을 경상도 발음으로 좀더 강하게
소리내면 까뀌곡이 되고, 한자어 ‘곡(谷)’을 주로 ‘실’이라고 했으니까 까뀌실로 불렀으며
이 단어를 좀더 쉽게 발음한 것이 까꾸실, 다시 까꼬실이 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름답고 귀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라고도 하며
모양이 나팔처럼 생겼다 하여 나팔소리처럼 까꼬실이란 설도 있다.
아뭏튼 토종낱말 이며 정겨운 이름은 분명하다.
양지꽃
치자연(雉子筵), 만산홍(滿山紅) 부르기도 한다
탐방로 주변은 이렇게 봄의 양생화가 발걸음을 반겨준다
봄은 이렇게 꽃으로 반겨주는데 세상속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회적거리두기로 썰렁하다
양지꽃은 뿌리에서 돋는 잎은 비스듬히 퍼지면서 모여나며
3~13개의 작은 잎들로 구성된 깃꼴겹잎이고 잎자루가 길다.
끝에 달린 3개의 작은 잎은 서로 크기가 비슷하고
밑 부분에 달린 작은 잎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작아진다.
작은 잎은 길이 1.5~5cm, 나비 1~3cm의 넓은 거꿀달걀꼴
또는 타원형으로서 맥 위에 털이 많고 양 끝이 좁으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턱잎은 타원형이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치자연(雉子筵)·위릉채(萎陵菜)·소시랑개비라고도 한다.
붉은빛을 띠는 줄기가 옆으로 비스듬히 땅을 기면서 자란다. 풀 전체에 가늘고 하얀 털이 많이 나 있다.
줄기가 중간에서 절단되어도 그 부위가 곧 회복되어 뿌리를 내리고 새순이 돋을 정도로 재생력이 매우 강하다.
양지꽃을 뱀딸기와 혼동하기 쉬운데 뱀딸기의 꽃받침은 꽃보다 큰 반면에
양지꽃의 꽃받침은 꽃보다 작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유사종으로 작은 잎이 3장이면 세잎양지꽃, 바위틈에서 자라고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크면 돌양지꽃
잎이 손바닥 모양이면 가락지나물, 잎이 길게 갈라지면 딱지꽃으로 구분된다.
관상용·식용·약용으로 이용된다.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여 사용한다.
황학산 정상(黃鶴山 頂上)233m
까꼬실의 주봉인 첫번째 봉우리이며 정상표지석은 백두대간 마지막 정기가 모임인황학산
귀곡실향민회 귀곡초등학교동창회 까꼬실산악회가 2015년3월22일 이라고
새겨져 있다.
황학산은 백두대간의 웅석지맥이다
웅석지맥은(熊石地脈)지리산 천왕봉(1915m)에서 북쪽으로 분기해서 중봉(1845m).하봉(1755m)
쑥밭재를 지나 1315m 봉에서 동진하여 왕등재.밤머리재를 지나
웅석봉(1099.3m)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백운산(515m)를 일구고
다시 고도를 낮추어 석당산(291.2m)을 지나 황학산(233m).갈마봉(229.2m).석정산(145m) 지나
진주시 귀곡동 582/2 귀동마을 아래 진양호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62km 산줄기 라고 한다.
황학산 정상(黃鶴山 頂上)233m
정상표지석은 앞면은 黃鶴山233m표기 해놓았고 뒷면은
한글로 황학산이라 표기 해 놓았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정기(精氣)가 모인 황학산이라고 기록 해 놓았다
나도 여기서서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정기를 느껴보자
황학산이 있는 대평면은
조선조 전기시 진주목 서면의 서신대리, 침곡면, 가을동리, 대평리로 칭였고
조선조 후기시 침곡면 대평면으로 칭였다 한다
구한말에 침곡면 신풍면 마동면 대평면으로 칭하였다고 하며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1913.12.29일 공포)로 대평면으로 통합하고 그 속리를 대평면, 상촌리
하촌 리, 당촌리, 내촌리, 신풍리의 6개 법정리로 칭였다 한다
1970년 6월 남강댐 건설로 인하여 청사를 상촌리로 이전하였고
1971년 3월 25일 군조례 166호(1971.3.25일 공포)로 남부출장소를 설치하여
관할구역을 하촌, 당촌, 내촌리, 신풍리를 소관하여 민원을 처리해 오던 중
1978년3월29일 상촌리 741번지에 대평면사무소를 신축하여
1978년 4월6일 군조례(1978.4.6일 공포)로 남부출장소를 폐지하고 본면으로 통합되었다 한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에 의거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되어 현재 진주시 대평면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8년 10월 24일 남강댐 2차 보강 공사로 인하여
대평면사무소가 수몰되어 대평리 이주단지 내517-16번지로
대평면사무소 청사를 이전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231봉
까꼬실 산정은 진달래 향연이다
탐방로 주변에는 진달래 꽃들이 연분홍빛으로 젖어 있고
바닥에도 꽃잎들이 떨어져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진달래는 꽃과 뿌리를 섞어 빚은 두견주(杜鵑酒)라고 하는데
한방에서는 꽃을 영산홍(迎山紅)이라는 약재로 쓰며 해수·기관지염
감기로 인한 두통에 효과가있고, 이뇨작용이 있다.
성인병 예방, 피로회복에 효과와 진통, 해열작용이 뛰어나다
신경통, 두통, 천식에 약효가 있다 여성의 냉증이나 생리통에 효과가 뛰어나다
분홍빛이 아름다운 진달래술은 맛과 향이 좋다
주로 꽃과 잎 뿌리가 약용으로 쓰이며 약용시 꽃의 꽃술은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
편백나무 군락지
231봉을 지나는길 인근에는 편백나무가 빼곡하게 조림되어 있었다
요즘은 편백나무 조림이 유행을 타는듯 여기저기 편백 조림지를 볼수가 있다
편백나무는 일본의 대표적 수목 가운데 하나로서 목질이 좋고 향이 뛰어나 실용성이 높다.
가구 제작은 물론 건물의 내부 벽체, 인테리어용으로 널리 쓰인다.
편백에 함유된 피톤치드가 아토피 치료에 효과가 있음이 알려지면서 베개
벽지, 도마, 장난감 등 편백을 이용한 각종 생활용품이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분토봉 갈림길
까꼬실을 두루고 있는 산봉우리중 하나인 분토봉으로 간다.
까꼬실이라는 깜찍한 이름의 마을이 어디에 있었을까?
오래전 마을은 사라졌지만 형체의 일부는 남아있다.
진주시 판문동에 있었다는 까꼬실은 지금은 진양호에 갇혀버린 ‘귀곡동(貴谷洞)’의 우리말 이름이었다.
한때의 마을이름 ‘가곡(佳谷)’에서 변형돼 까꼬실로 불렸다거나
마을 뒤 황학산의 줄기가 칼코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까꼬실은 섬이 아니면서도 섬으로 알려졌다.
진양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지만 몸체는 황학산을 통해 대평면과 연결돼 있다.
남강댐이 완공된 1973년 이후 이곳은 섬 아닌 섬이 됐다.
목계단
가파른 목계단으로 올라선다
한걸음 한걸음 까꼬실이란 옛 이름따라 걸어 본다
남강줄기 500리 긴 여정을 끝내고 숨을 고르는곳 진양호이다
진양호는 1973년 남강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섬아닌 섬으로 변한 까꼬실이다
지금은 진수대교를 거쳐서 까꼬실이 있는곳을 갈수가 있다
백두산 정기가 모인 까꼬실 황학산 능선길을 걷고 있다
기운 가득히 머금고 까꼬실을 둘러보자
龍(룡)
마치 큰 거북 머리같은 모양을 한 암석이 진양호를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자라가 마치 진양호로 내려가는 형상과 같아 보였으며
암석 머리에는 한자로 龍이라고 새겨 놓았다
용머리 형상이라고 새겼는지 옛날에 새겼는지 근래에 새겼는지는 알수가 없다
형상이 특이하고 한자까지 새겨져 있어 촬영 해보았다.
분토봉(墳土峯)136m
분토봉에는 수목이 빼곡하여 조망이라고는 없는 곳이다
소나무숲 그리고 참나무로 이루어진 식생으로서
아마도 여기 까꼬실에도 송이버섯이 나올듯 해 보였다
천하지낙양 까꼬실은
백두대간이 지리산으로 뻗어내려 황학으로 멎은 자락 으로서
경호강 물과 덕천강이 만나 남강으로 흐르고
비옥한 삼각주 퇴적지를 만드니 황학의 정상은 학의 머리가 되고
석정지는 꽃동실이 좌우 날개가 되니
다섯 마을 봉황이 알을 품어 안은 길지라
배산양수의 천하지낙양 걸출한 인물이 대를 이어 태어나고
소출이 풍성하여 재물이 풍성한 곳이더라 라고 전해진다.
톳재비고개(도깨비고개)
마을 북쪽 뿔당골과 신풍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옛날부터 도끼비가
자주 나타나 혼자서는 넘기가 무서운 고개로 톳재비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우리 유년시절에 도깨비를 톳재비라고 불렀다
우둑어둑 해지면 톳재비가 나타나서 씨름하자 해서 큰 소나무를 안고 밤새 씨름하다
기진맥진 하여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우리는 씨름중 왼배지기를 배웠다
톳재비는 왼배지기를 기술에 넘어지므로 왼배지기 기술을 쓰지 않으면
밤새도록 씨름하다 쓰러진다고 하였다
새벽 닭이 울면 톳재비는 도망 간다고 했는데 씨름하다 없어진 토재비는 대부분 대(竹)빗자루 이거나
마을 버들나무 가로수가 대부분 이였다고 이야기 들었다.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는 어케 만들어 졌을까 하는 궁금도 생긴다
당산으로 가는 목계단
우측 넓다란 길은 큰마을로 가는길이며 목계단은 당산으로 이어진다
당산으로 가는 목계단을 올라서면 밤나무 과수원 같기도 했다
펑퍼짐한 능선이며 밤나무가 군데군데 보이고 벚꽃나무도 있어
벚꽃구경을 하면서 까꼬실 황학산 줄기를 걸었다.
내가 처음 발령받아서 근무했던곳에 수곡 대평사람들이 많았고
해주정씨(海州鄭氏)들이 간부급 이였다
그래서 인지 여기 까꼬실 풍수학적으로 좋은곳인가 보다 세삼 느껴본다
고인돌(지석묘)
인근 안내판을 읽어보면 청동기는 대부분 지석묘라 불리는 고인돌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무덤속에는 주검만을 묻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토기나 석기 청동기 등의
다양한 유물을 넣기도 하므로 무덤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된다
고인돌은 박물관의 전시실이 아닌 자연 현장에서 뚜렷하게 대면할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라고 기록 안내되어 있었다.
당산(堂山) 먼당
큰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이곳 까꼬실 마을과 토지의 수호신을 모셨고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당산제(堂山祭)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곳이다
노송나무에는 옛날 장군이 쏘았다고 전해지는 화살자국도 있다 라고
안내표지목에 있는글을 옮겼다.
하지만 내 눈에는 당산나무라고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곳이 있었나 보다
내 고향에서도 유년기 시절 당산이라고 있었고
우리동네 중촌마을 뒷산에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그 솔나무가 택시 같다하여
우리는 택시나무라 불렀고 그기 택시나무에 동네 친구들이랑 자주 나무를 올라내리며
타잔이라고 한 유년기 시절 기억이 되살아 났다.
꽃동실 가는길
백두대간 웅석지맥의 끝점으로 가는길이다
여기서 꽃동실을 갔다가 다시 돌아와 시부봉으로 가야할 코스이기도 하다
꽃동실로 가는 탐방로는 평평한 능선으로서 걷기가 편안하다
옆으로는 목책 난간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겨울에 떨어진 참나무 낙엽과 소나무깔비가 탐방로에 깔려있어
푹신하고도 편안한 길이다
예전 같으면 이러한 소나무 낙엽 깔비를 끔어다가
불쑤시게 땔깜용이 였는데 정말 세상은 많이도 변해버렸다.
나 역시 지천명(知天命) 나이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백두대간의 끝점 꽃동실
백두산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한반도 등줄기 백두대간이
여기에서 끝을 맺는 곳으로 남덕유산 참샘에서 발원한 경호강과
지리산 천왕샘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이곳에 합수되어
서부경남의 젖줄인 남강이 시작되는 아름다운 진양호반(가호)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곳으로 꽃동실이라 부른다.
백두대간의 끝점 꽃동실
백두대간 웅석지맥의 끝에서 이렇게 인증사진 하나 남겨본다
꽃동실 표시석 뒷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한반도의 정기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가장 큰 산줄기 백두대간이 끝을 맺는 곳이다
귀곡실향민회 귀곡초등학교동창회 까꼬실산악회 2015년3월22일
이라고 새겨져 있다.
가호전망대 꽃동실에서의 조망
진양호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며 저멀리 평거지구 엠코타운 더프라하아파트가 보이며
남강댐을 중앙으로 해서 좌측 벚꽃이 활착 만개한 충혼탑이 있는곳이다.
가호(佳湖)란 까꼬실의 한자식 표기로
경호강(鏡湖江)과 덕천강(德川江)이 합수하는 이곳의 풍광을
아름다운 호수로 비견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오늘날 진양호반의 절경을
조망할수 있는 전망대를 예견한듯 하다라고 안내글에 기록해 놓았다.
진양호는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인공호수로 유역면적 2,285㎢
저수량 1억 3,600만톤으로 7년 6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970년에 준공되었으나
현재는 저수량 3억 1,000만톤 규모의 댐 보강공사가 1999년 10월로 완공되었다.
기타 부대시설을 포함한 전체 보강 사업 준공도 2000년 12월 완공되었다.
이로써 홍수조절과 생활 및 공업용수 공급은 물론
연간발전량은 4,000만kw에서 4,130만kw로 늘어났다.
우익정 그리고 아시아레이크사이드호텔 조망
진양호 365계단을 올라 전망대에서 꽃동실 쪽으로만 바라보았지만
오늘은 반대로 여기서 진양호 공원을 바라보고 있다
진양호 남강댐은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을 가로질러 1970년 7월에 완공한
낙동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 댐이으로서 길이 975m, 높이 21m, 부피 82만 5,000㎥의
중심코어형 필 댐(fill dam)이다. 댐마루와 만수위의 높이가 각각 42m와 39.5m로 2.5m의 여유고가 있다.
댐의 주요시설물은 본 댐을 제외한 초당 1만 570㎥의 계획홍수량을 조절·방류할 수 있는
여수로시설과 발전용량 1만 2,600kW의 남강 수력발전소 및 11㎞에 이르는 인공방수로 등이 있다.
또한 발전소에는 유효낙차 15m로서 수차발전기 2대가 설치되어 있다.
최근 댐 규모를 확대해 홍수조절 효과를 높이기 위한 계획을 추진중이다.
1920~30년대에 실시된 낙동강 개수계획의 일환으로
남강 홍수량을 사천만으로 방류하기 위한 홍수조절 목적으로 1939년에 시공하였으나
중단되었다가 1949년에 재착공하여 댐코어를 시공하는 도중 다시 중단되었다.
그뒤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홍수조절 외에 관개용수
상수도용수 공급 및 발전을 포함하는 다목적 댐으로 건설되었다.
남강댐의 건설로 남강 하류에 있는 농경지 500㎢에 홍수피해를 줄이며
남강 하류와 낙동강 하류에 있는 농경지 98㎢에는 연간 6,000만㎥의 관개용수를 공급한다.
진주시와 삼천포시 일대에는 하루에 약 10만㎥씩 상수도용수를 공급하며
경상남도 일대에 연간 4,300만kWh의 전력을 공급한다.
댐에 의해 생긴 진양호는 만수면적 29.4㎢, 총저수용량 1억 3,630만㎥로 진주시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내 3개군 9개면에 걸쳐 있다.
주변일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광대나물
광대나물꽃이 지천에 피어 있다
줄기 밑에서 많은 가지가 나오고 때로는 가지가 누워 자라기도 하며 키는 10~30cm 정도이다.
줄기는 네모꼴이고 보랏빛이 돈다. 잎은 마주나며 줄기 아래쪽의 잎은 둥글고 잎자루가 있으나
위쪽은 반원형이며 잎자루없이 줄기를 감싼다.
꽃은 4~5월에 붉은 자주색으로 피는데
잎자루가 없는 잎들이 줄기를 감싸는 잎겨드랑이에서 여러 송이의 꽃이 모여 핀다.
꽃은 통꽃이지만 꽃부리는 크게 2갈래로 나누어졌으며
갈라진 꽃부리 아래쪽은 다시 3갈래로 조금 갈라졌다.
3월에 어린순을 캐서 나물로 먹기도 하며
식물 전체를 여름에 캐서 피를 토하거나 코피가 날 때 쓰기도 한다.
밭이나 길가에서 흔히 자란다.
샘터
예전 까꼬실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을듯한 샘물이다
한모금 마셔보니 진양호 물같은 느낌이다
주위에는 아직도 농사를 짓고 있었고 농막도 많이 보였다
아마도 농사 짓는 예전 까꼬실 사람들이 이겠지만 지금은 농사일 왔을때
이용하는듯 보이며 농업용수로도 사용할듯 하다.
선착장
선착장으로 사용하는곳에서 진양호를 바라보았다
진양호 주변에는 많은조류와 동물들이 살고 있다고 하며
산에는 삵 진양호에는 수달이 살고 있다고 한다.
산행중에는 많은 새들이 지저기는 소리들 들었고
고라니 한마리 뛰어오다가 인기척에 놀라 다시 되돌아가는 모습만 보았다
까꼬실의 진양호 주변은 시멘트 포장길 따라 벚꽃나무가 있어
벚꽃이 어느새 만개하고 봄바람에 떨어지는 풍경을 보여 주었다.
가곡탐조대(가곡정)
가곡탐조대에 세워져 있는 안내표지판에는 천하지낙양 까꼬실
그리고 까꼬실(귀곡동) 유래를 설명해 놓았다
까꼬실 지명 변천을 보면
고인돌이 여러곳에 분포하고 신석기시대의 유물들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거주지로 터전을 이루어 통일신라시대의 청주에서 강주로 바뀌어
고려시대의 진주목을 거쳐 조선 태종때에 진주목 서면 가귀곡리(嘉貴谷里)로
까꼬실 최초의 지명이 기록으로 표기 되어있다
임진왜란시에는 진주목 관아의 피난지였고
영조때 해동지도에는 처음으로 가이곡리(加伊谷里) 가귀곡면(加貴谷面)
귀곡리(貴谷里)가 되고 1973년 진주시 귀곡동으로 편입되었다.
覺後濟後裔(각후재후예)귀곡초등학교
까꼬실의 특징을 보면
17세기 중엽부터 임진왜란 의병장충무공 농포 정문부 선생의 후손이
까꼬실에 터전을 잡아 수몰 전까지 약 350여년을 해주정씨 집성촌으로
다른 씨족들과 더불어 250여 가구 1500여명이 오손도손 세거 하였으며
선생을 모신 사당 충의사와 가호서원 문중서당인 각후재가 있어
조선중기 이후 진주향내에서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 하였다
특히 선생의 후손으로 13대를 연이어 문집을 남긴 가문은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까꼬실의 자랑이며
그 향학열이 진학률 높기로 이름난 귀곡초등학교로 맥을 이었다
라고 안내글에 설명해 놓았다
정문부(鄭文孚) 선생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회령에서 국경인과 국세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국세인을 죽이고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여러 읍과 진을 수복했다.
이어 10월말 경 길주 장평·쌍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1월 야인 번호를 격파하고, 2월초에는 백탑교에서 가토의 일본군을 대파해 관북지역을 수복했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의 전공을 보고해주는 사람이 없어 논공행상에는 제외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했다.
그해 10월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한다.
주차장과 한골 안내표지목
오후 늦은 시간대라 시루봉까지 시간이 모자라는 탓에 갈마봉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골은 까꼬실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마을로 뒤로는 까꼬실 마을의 주봉인
황학산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황학산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까꼬실이 인물이 나는 길지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중기 이후
진주 향내에서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곳이라 한다.
까꼬실의 정문부 선생은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아버지는 부사 신(愼)이다.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해 한성부참군이 되었으며
정자·지평 등을 거쳐 1591년 함경북도병마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해 9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정병을 거느리고
북도(北道)에 침공했을 때 부상당해 경성의 유생인 지달원(池達源)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회령에서 국경인과 국세필(鞠世弼)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포박해 가토에게 항복하자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국세인을 잡아죽이고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여러 읍과 진을 수복했다.
이어 10월말경 길주 장평·쌍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고
이듬해 1월 야인(野人) 번호를 격파하고 2월초에는 백탑교(百塔郊)에서
가토의 일본군을 대파해 관북지역을 수복했다.
1594년 영흥부사가 된 뒤 온성부사·길주목사·안변부사·공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1599년 장례원판결사가 되었으며 그해 문과에 급제했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의 전공을 보고해주는 사람이 없어 논공행상에는 제외되었다.
그뒤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남원부사·길주목사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했다.
그해 10월에 지은 시의 내용으로 인해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고문받다가 죽었다.
경성 창렬사(彰烈祠), 부령 청암사(靑巖祠)에 제향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의이다.
渴馬峯(갈마봉)229.5m
오늘 꼬까실 산행 마지막 봉우리인 갈마봉이다
봉우리 이름 한자를 보면 渴목마를갈 이며 馬말마 峯봉우리 봉을 쓰고 있다
목마른 말의 봉우리라는 뜻인데 봉우리 유래는 까꼬실에서 찾아볼수가 없다
까꼬실의 흔적을 보면 대부분 해주정씨 관련한 것들이었다
또한 귀곡초등학교는1940년 9월6일 개교하여
1997년 3월1일날 폐교하였다
귀곡초등학교 사람들은 매년 명절이 되면 고향인 까꼬실을 찾아
진양호에 잠긴 고향따을을 바라보며 조상묘가 있는 까꼬실에
추억을 잊지 않을려고 찾아 온다고 한다.
渴馬峯(갈마봉)229.5m
갈마봉 정상표지석 뒷면은 한글로 새겨 놓았다
귀곡초등학교 동창회에서 까꼬실 봉우리 마다 정상석을 새워놓은 셈이다
이렇게 까꼬실 봉우리마다 정상석을 세워둔 바람에
까꼬실 고향 사람이 아닌 산을 좋아 하는 사람들이
여기 까꼬실을 많이 찾아 오는듯 하다.
갈마봉에서 바라본 진수대교(晋水大橋)
까꼬실 봉우리에서는 조망이 그다지 보이지 않지만 오직 갈마봉에서만 진양호 조망이 보인다
진수대교는 남강댐 건설에 의하여 인공호수인 진양호가 형성되자
내동면 내평리 상촌마을과 수곡면 내촌리 내촌마을을 연결하는 도로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진주에서 수곡면으로 가려면 사천시 완사면을 지나거나
명석면과 대평면을 지나 우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에 진주시에서는 2000년 도농통합 차원에서 진양호를 가로지르는 진수대교와
부속도로를 개통시켜 이 지역의 교통을 원활히 하였다.
공사는 삼부토건에서 맡아 하였으며, 현재 경상남도에서 관리하는 지방도로이다.
진수대교는 진주시내와 주변 농촌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교량으로
1일 통행차량은 1,780대이라고 하며 이 다리가 건설됨에 따라 진서면이나
하동군 지역과의 연결이 원활하게 되었고, 이 지역 일대의 농업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수곡면 일대는 대부분 농가에서 겨울철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딸기농사를 지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진주에서 출발하여 내동면, 수곡면, 대평면, 명석면으로 이어지는
마라톤 코스는 아름다운 진양호반을 일주하는 코스로, 마라톤 애호가들에게는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다.
교량의 길이는 830.0m, 폭은 10.4m, 높이는 17.0m이고
경간 수는 17개, 최대경간거리는 50.0m이다. 총 차선 수는 상행성과 하행선 각기 1차선이고
다리의 상부구조 형식은 PSCH형교이고, 하부구조 형식은 ETC형식이고, 통과하중은 24.0t이다.
제비꽃(오랑캐꽃)
갈마봉 하산길에 있는 제비꽃이다
봄 보라색 야생화 제비꽃 옆에는 비닐이 있는줄 몰랐다 쪼고려 앉아 접사로 찍었는데
비닐이 같이 찍혀 야생화 사진에 흠집이 생겨 버렸다.
제비꽃은 바이올렛·병아리꽃·씨름꽃·앉은뱅이꽃·오랑캐꽃·외나물·자화지정·장수꽃이라고도 한다.
제비꽃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꽃 모양이 물 찬 제비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병아리꽃·앉은뱅이꽃은 풀의 모습이 작고 귀엽다 하여 생긴 별칭이다.
오랑캐꽃이라는 이명은 꽃의 밑 부분에서 뒤로 길게 나온 부리의 모습이
오랑캐의 머리채와 닮았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원줄기가 없으며 뿌리는 황백색 또는 황적색이다.
관상용·향료·식용·약용으로 이용된다.
어린잎과 꽃을 삶아 나물로 먹으며 튀김을 만들어도 맛이 있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거나 생즙을 내어 사용하며
술을 담가서도 쓴다. 내환(內患)에는 주로 열기를 다스리고
날것으로 쓰면 외상 치료에 효험이 있다 한다.
까꼬실 주차장
진주 황학산(晉州 黃鶴山) 백두대간(白頭大幹)웅석지맥의 끝점 황학산 까꼬실을
이렇게 걸어보고 가꼬실 주차장에서 산행을 마무리 한다
양봉 벌통에서는 봄꽃 향연에 벌떼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까꼬실은 풍수학상으로도 좋은터라 해주정씨 가문에 인재들이 많이 나왔나 보다
늦은 오후부터 시작한 산행을 주차장에서 종점을 찍는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근교산&저너머(국제신문), 명산플러스(경남일보),진주시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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