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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원효대사 화엄경 법문을 따라 관룡사 도량을 걷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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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원효대사 화엄경 법문을 따라 관룡사 도량을 걷다

바다늑대FORCE 2020. 3. 24. 19:06


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

 원효대사  화엄경 법문을 따라 관룡사 도량을 걷다


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171

  (옥천리292)

   전화 : 055-521-1747


▣ 사찰기행일 : 2020년 03월24일 화요일. 날씨 : 맑음 미세먼지조금


창녕 관룡사(昌寧 觀龍寺)개요 :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사찰로서 〈사기 寺記〉에 의하면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기도를 드릴 때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 화왕산으로부터 9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은 관룡사, 산 이름은 구룡산이라 했다고 한다.

1401년(태종 1) 대웅전을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7년(광해군 9) 영운이 재건했다.

1704년(숙종 30) 가을 대홍수로 금당이 유실되었으며 1712년(숙종 38) 대웅전과 다른 당우들을 재건했다.

1749년 다시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찰 내에는 보물 제212호인 대웅전, 보물 제146호인 약사전

보물 제295호인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519호인 석불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3층석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다.



▣  창녕 관룡사 찾아가는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진주 나들목―→중부내륙고속도로 칠원JC―→중부내륙고속도로 영산 나들목

―→영산도천로 창녕방향―→계성화왕산로―→화왕산관룡사길―→관룡사주차장

83km  승용차 1시간10분 소요



→→→→→사찰기행시작

산에 오르면 사찰이 있고 사찰에 가면 산이 있다.

언제나 산행을 하다보면 산행의 마무리는 산사를 둘러보는 사찰기행을 겸한다

하지만 오늘은 산사를 먼저 둘러보고 산에 올랐다.


관룡사 석문

마치 산성(山城)을 보는듯하다 돌계단 차곡차곡 쌓아올린 계단길이 있고

산성같은 돌담이 산사 입구를 애워싸고 있는듯하다

석문은 폭 118㎝ 높이 210㎝에 한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작은문으로

좌우로 관룡사 도량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조성시기는 17세기 명부전과 칠성각이 조성될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관룡산의 진산인 화왕산 산성과 연관이 있고도 한다.

관룡사는 화왕산 군립공원 구룡산 병풍바위 아래 있는 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신라 8대사찰의 하나로, 394년(내물왕 39)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583년(진평왕 5) 증법(證法)이 중창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대도량(大道?)을 이루었다.

748년(경덕왕 7) 추담(秋潭)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1401년(태종 1)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당우(堂宇)가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9)에 영운(靈雲)이 재건하고, 1749년(영조 25)에 보수하였다고 전한다.

석문

돌담의 좌측에는 불(佛)자 글을 음각해 놓았다

산성(山城)에서 작은문은 은밀한 작전수행을 위하여 나가는 문인데 사찰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는 모습은 처음이다.

관룡사는 일주문은 따로 없으며 주차장 바로위에 이렇게 돌계단과 돌담이 있어 특이해 보였다

삼국통일 후 원효대사께서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한곳이라 하는데

華嚴經(화엄경)은 본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60권과 80권, 그리고 40권의 세 가지 번역이 있다.

이 중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한다.

화엄경은 세존이 비로자나불과 한몸이 되어 광명을 발하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고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비롯한 수많은 보살들이 장엄한 부처의 세계를 온갖 보살행으로 드러내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석문안쪽

돌담안쪽으로 들어서면 우측은 불사공덕비가 있고 좌측 담장 넘어는 텃밭이 있었다.

관륭사 도량 주 출입구 까지 양측으로 대나무가 있으며 사천왕문이 사문으로 가는 입구이다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 준다는 관용사라고 안내 되어 있다

창녕현 동쪽에 높고 크며 숲이 빼어난 화왕산(火旺山)이 있다

이름을 화왕(火旺)이라 한지가 오래 되ㅐ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수없다

산 동쪽의 아름다운 곳에 관룡사(觀龍寺)라는 사찰이 있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화왕산 꼭대기에 용이 살고 잇는 연못이 있는데

젏을 창건할 때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여러사람들이

신비롭게 여겨 절의 이름을 관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불사공덕비(佛事功德碑)

1938년에 세워진 전현풍군수하재명 숙부인김녕김씨 도장석축유공비

(前玄風郡守河在鳴 淑夫人金寧金氏道場石築有功碑)를 비롯하여

환몽화상유공비(幻夢和尙有功碑)

1985년과 1995년에 세워진 전기불사공덕비(電氣佛事功德碑)

관평산포수군만호자 불사공덕비(鎭管平山浦水軍萬戶者 佛事功德碑) 등

관룡사 중창과 관련된 불사 공덕비이다.


관룡사 사천왕문(觀龍寺 四天王門)

관룡사는 일주문이 없고 사천왕문이 가람 출입구를 대신하고 있다

편액은 火旺山 觀龍寺(화왕산 관룡사) 라고 되어 있다

건물양식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로 1712년(숙종 38)에 대웅전과 함께

건립된 것을 1978년 지금의 모습으로 신축하였다.

건물은 어칸 중앙의 양 측면에 기둥을 세워 대문을 달고

어칸을 통해 출입문을 만든 모습으로 내부에는 사천왕탱을 모신 감실형의 벽체가 남아 있다.  

벽체는 현재 비어 있으나 사적기의 내용을 통해 1713년 천왕문을 단청하면서

사천왕회상(四天王會像)을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양식은 3량가구에 외1출목을 둔 익공양식으로

살미첨차와 보머리는 수서형태로 장식하였으며, 주심도리에는 초각된 운공을 올렸다.



범종루(梵鍾樓)

관룡사 사천왕문 좌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로 원음각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1987년 대웅전 서쪽 요사와 함께 지은 것으로, 2층 누각의 모습으로 하고 있다.

건물의 외부는 1층을 경사지에 석조를 세워 배치하고 그 위로 원주를 세워 팔작지붕을 올린 모습으로,

 2층 누상 주변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고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공포는 2익공 양식으로 초익공과 이익공 모두 수서로 장식하고 내부는 초각하여 운궁을 이루었으며,

내부 가구는 5량으로 마감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1995년에 노천월하(老天月下)스님이 증명하고,

주지 지묵항조(至?恒照) 화상이 조성한 '반야대범종(般若大梵鐘)'이 봉안되어 있다.

범종루는 불전사물(佛前四物)인 범종(梵鐘)·운판(雲板)·목어(木魚)·홍고(弘鼓) 등을 비치하는 사찰당우 중의 하나이며

2층의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라 하고, 불전사물 가운데 범종만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이라고 한다.

이곳에 비치되는 사물은 모두 부처님에게 예배드릴 때 사용되는 불구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벽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저녁예불 때에 사용된다.

이들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하고

홍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보낸다는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이 사물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규모가 작은 사찰이라도 범종만은 반드시 비치하게 된다.

이 당우는 산문(山門)을 들어서서 좌측 편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觀龍寺 藥師殿(관룡사 약사전)

약사전은 보물 제146호로서 건물양식은  앞면 1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주심포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이 건물의 특색은 집채와 지붕의 구성비례에 있는데, 기둥 사이의 간격에 비해 지붕의 폭이 약 2배나 된다.

이러한 예는 거의 없으며 곧고 단정한 외목도리들이 뻗어 나오면서 큰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당초무늬가 새겨진 창방의 뺄목이 소로를 받아 외목도리의 행공첨차를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의 구성은 15세기 건축기법에서 보이는 것이므로 15세기경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천장은 연등이고 바닥은 맨바닥으로 민무늬의 네모난 전을 깔았다.

단칸 법당 안에는 석조불좌상이 있으며 좌우 벽체에 벽화를 그려 장식했다.

약사전 앞마당에는 큼직한 대좌 위에 3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

관룡사 약사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암을 재료로 만든 장방형의 3층탑이며, 바위를 바닥돌 삼아 2층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하층기단은 면석 가운데 우주를 모각하고, 우주 좌우로 얇고 넓은 안상(眼象)을 새겨 넣었으며

상층기단 역시 네 모서리와 면 가운데에 탱주와 우주를 모각하였다.

기단 위의 탑신과 옥개는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한 것으로 석탑의 규모에 적합한 비례감을 지니고 있으며

옥개는 층급받침을 3단으로 간략화하고 낙수면의 끝을 반전시킨 모습이다.

1층 옥개와 상륜부는 결실되어 그 원형을 알 수 없다.

전반적으로 양식과 각부의 수법은 신라석탑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규모가 약 2m 높이로 줄어들고

각부의 양식수법이 간략ㆍ섬약해져 조성시기를 고려시대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사전 석불좌상

보물 제519호. 상높이 110cm이며 삼단의 8각연화대좌 위에 앉은 좌상으로 광배는 전하지 않는다.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편안히 내려놓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놓여 있는데 무엇인가를 받쳐든 듯한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얼굴과 몸에 부드러운 양감표현이 두드러지며 옷주름의 표현도 유연하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며 이목구비가 얼굴 가운데에 몰려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려 전기의 불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목에는 굵은 2줄의 선이 있으며, 목이 밭아 전체적으로 약간 위축된 느낌을 준다.

법의는 통견으로 앞가슴이 벌어져서 속에 비스듬히 입은 승각기가 보인다.

8각연화대좌가 불상에 비해 폭이 좁아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단순한 형태의 연꽃이 저부조로 묘사되어 생략적인 의장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조각양식상 고려초 불상들과의 연관도 보이지만 실제 수인의 표현이 불분명하다든가

또는 생략적인 대좌의 형태 등으로 보아 고려 중엽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觀龍寺 大雄殿 (관룡사 대웅전)

대웅전은 보물 제212호로서 건물양식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인 다포 계통의 건물로 정면 중앙칸이 넓어서 좌우로 안정된 구조를 보여준다.

내부의 중앙 뒷줄에 세운 2개의 고주에 의지해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닫집을 가설했다.

내외이출목으로 출목 바로 위에 있는 살미첨차의 끝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쇠서[牛舌]의 곡선은 짧고 견실하며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은 공포의 제일 앞부분만 보아지의 형태로 변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조선 중기 이전의 공포에서 보이는 특징들이다.

1965년 해체복원공사 때 중앙칸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401년(태종1)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년(광해군 9) 재건했으며, 1749년(영조25)에 다시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보아지 형태란 공포 즉 기둥에서부터 보 아래까지 주두·소로·첨차·제공·한대·살미 등의 부재를 짜넣은 것을 말한다.

공포는 의장면에서도 중요 역할을 한다.

양봉이라고도 한다. 건물을 가구할 때 기둥과 보는 항상 직각으로 만나므로

그 직각 되는 부분에 끼워 보나 기둥의 변형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화반이나 동자주에 짜여 종보를 받거나 기둥·두공·공포에 짜여 대들보를 받거나 하는데

공포에 짜일 때에는 살미가 발달하여 보아지가 되는 경우도 있다.

종보를 받는 보아지는 따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보 배바닥 쪽은 당초무늬를 초각한 형태이며

보머리 쪽은 직절하거나 간단한 형상이 되도록 의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공포가 없는 건물일 경우에는 보통 간략하게 직각으로 잘라 끼운다.


觀龍寺 大雄殿 (관룡사 대웅전)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화왕산을 진산으로 자리한 관룡사의 주법당이며

건물은 화강암을 다듬어 바른층쌓기 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모습으로,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포작을 짜 올렸다.

공포는 어칸에 둘, 퇴칸에 하나씩 놓았으며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다포식을 취하고 있다.

공포의 처리방식은 고식으로, 초제공(初齊工)과 이제공(二齊工)의 살미첨차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으나

안쪽에는 교두형(翹頭形)으로 되어 있어 건실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건물 외부는 삼면을 제외한 전면을 창호로 마감한 모습으로, 정면에 2ㆍ4분합의 띠살문을 두고

어칸에 편액 1기와 주련 4기를 배치하였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에 우물천장을 장엄한 모습으로

어칸 중앙 후열에 두 개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불단을 배치하였다.

불단 위로는 보개의 구실을 하는 닫집을 가설하고

천장을 비롯하여 공포에 금단청을 입혀 고색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昌寧 觀龍寺 圓音閣(창녕 관룡사 원음각)

1985년 11월 14일 경남 문화재자료 제140호 관룡사 원음각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인조 12년에 건립된 원음각은 그 후의 재건 또는 중수의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상량문을 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영조 39년(1736년)에 크게 중건.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숙종 30년(1704년) 가을의 산사태로 인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건물은 정향을 갖지 않고 대웅전의 중심축 선산에서 서쪽으로 약간 기운 특색을 갖고 있다.

원음각에는 범종, 법고가 있었는데 목사자상과 입구 사천왕상을 양산통도사에서 가져갔다.

관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양산통도사 말사이다.

목사자는 1982년까지만 해도 있었으며(김량한), 사천왕상을 1992년까지 있었던 것으로

현제 양산통도사입구에 사천왕상이 4개가 있다. 그중 2개는 관룡사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한다.


安養寮(안양료)

안양료는 현재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앞엔 멍멍이 처사가 지키고 있다.

멍멍이 처사는 내곁에 다가와 바지끝자락 냄세를 맡아본다

불자인지 아니면 도둑인지 구분하는가 일종의 멍멍이 처사만의 행동인가 싶다

보통 사찰에 멍멍이 처사들이 밥값한다고 짖어되는 놈들도 있는데 순하기 짝이없다

그래서 사찰도량을 잘 거닐고 있나 보다.


명부전(冥府殿)

창녕 관룡사 명부전에는 주존불인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이 서 있으며

시왕상, 판관상, 귀왕상, 인왕상 2구 등 모두 17구가 서로 대칭을 이루며 봉안되어 있다.

이 가운데 무독귀왕입상과 제8평등대왕상에서 나온 원문에 의하면

명부전 존상은 모두 효종3년(1652)에

應惠, 戒贊, 密云, 印戒, 笁閑, 海機, 思敏 등 9명의 조각승에 의해 조성되어 관룡사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함께 수습된 후령통과 1638년 밀양 영정사에서 간행된 『묘법연화경 권1』등은

17세기 중반 불상에 납입된 복장유물로서 제작시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관룡사 명부전 지장시왕상과 권속은 긴 신체비례에 방형의 얼굴 그리고 간결한 옷주름 등이 특징이다.

이 지장시왕상과 권속일괄은 봉안처와 조성시기, 조각승이 명확하여 17세기 명부전 존상 연구에 좋은 자료이므로

복장유물과 함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명부전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구, 녹사(錄事) 2구,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이들 중 주존불인 지장보살은 불교의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관룡사 응진전

대웅전 좌측 언덕에 있는 건물로 『관룡사사적기(觀龍寺事蹟記)』에 의하면

1714년(숙종 40)에 16 중수되었다고 하며 전후의 연혁은 알 수 없다.

현재의 응진전은 1983년에 주지 신허스님과 화산스님이 나한전으로 건립한 것을 2000년대 보수한 것이다.

응진전은 견치석으로 쌓은 4벌대의 높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그 위로 원주를 세워 맞배지붕을 받친 모습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외부는 삼면을 벽체로 형성하고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한 모습으로

정면 어칸에는 편액 1기와 주련 4기가 걸려 있으며, 건물 삼면에는 16나한도를 벽화로 그려 넣었다.

공포는 2익공 양식으로, 초익공과 이익공은 꽃새김으로 초각한 수서형이고 보머리는 봉두를 조각하여 달았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였는데

가구는 3량이고 내부천장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불상은 근래 조성된 석조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으며

그 주위로 높이 26~31㎝의 소형 나한상 16구를 배치하였다.

불화로는 삼존상 뒤로 1990년 월하스님이 증명하고 금어 김룡환(金龍煥)이 조성한 영산회상탱을 봉안하였다.

불단에는 석가삼존상을 봉안하고 뒤에는 후불탱을 봉안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석가불좌상은 완만한 상호(相好)로 어깨까지 귀가 늘어져 있으며,

한 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법의(法衣)를 걸쳤다. 손가짐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는데,

그 손이 몸에 비하여 크게 만들어 어색하게 보인다. 좌우에는 보살좌상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단순한 형태의 보관에 화불(化佛)이 새겨진 관음보살과 정병이 새겨진 대새지보살이다.


관룡사 칠성각(七星閣)

칠성은 하늘의 별인 북두칠성을 말한다.

이는 곧 하늘의 일월성진(日月星辰)을 다스리고 천재지변을 통솔하는 주제신(主帝神)으로 승격하여

민간신앙으로 흡수한 경우이다.  

대웅전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이다.

『명부전칠성각상량문(冥府殿七星閣上梁文)』에 의하면, 1652년 건립되어 1912년까지 4중창된 건물로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명부전ㆍ대웅전ㆍ칠성각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견치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은 자연석을 허튼층쌓기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두고 그 위로 원주를 세운 모습으로, 전면에 2분합의

 띠살을 설치하고 삼면을 벽체로 마감한 구조이다.


산령각 (山靈閣) 좌측

칠성각 뒤편에 있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로 관룡사 연혁에 따르면

1882년(고종 19)에 건립된 것이다.

자연석을 치석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운 모습으로

전면과 배면의 경사를 초석의  높낮이로 조절한 특이한 구조이다.

외부는 삼면을 벽체로 구성하고 전면에 2분합의 세살문을 달았는데

내부에 벽체를 가설하여 두 칸의 공간을 만들었다.

산령각의 가구는 3량으로 종도리는 굴도리고 처마도리는 납도리를 사용하였다.

 내부에는 불단을 가설하여 독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였는데, 모두 면 바탕에 채색된 것이다.

독성탱은 1975년 금어 우일(又日)ㆍ인식(仁植) 스님이 조성하였으며

산신탱은 1973년에 조성한 것이다.

독성(獨聖)은 범어로 pindolabharadvaja인데

빈두로파라수(賓頭盧頗羅隨)로 음역되는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이다.

이 분은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한 이후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으로 나반존자(那畔尊者)로 잘 알려져 있다.

붉은 가사를 걸치고 한 손에 염주를 든 나반존자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자리를 잡고 있다.

 



昌寧觀龍寺龍船臺石造如來坐像(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용선대 가는 방향은 관룡사에서 대웅전 우측 현당 옆으로 가는길이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295호로서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관룡사(觀龍寺) 뒷산 오른편 능선인

용선대(龍船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이다.

광배(光背: 붓다의 몸에서 나온 빛의 표현)는 없어졌고

대좌 하대(下臺)의 복련(覆蓮: 연꽃을 엎어 놓은 모습) 일부가 부서졌지만

나머지 부분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이다. 불상은 1.87m이며, 대좌는 1.57m이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에 관한 문헌 기록과 명문이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용선대의 ‘용선’은 ‘반야용선(般若龍船)’에서 유래된 듯하다.

반야용선은 사람이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갈 때 타고 가던 배를 말하지만

이 지명이 석조여래좌상의 성격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昌寧觀龍寺龍船臺石造如來坐像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을 향해 삼배(三拜)로 참배 하였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용선대라는 거대한 자연 암반을 지대석(支臺石: 받침석)으로 하여 그 위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통견(通肩: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 법의(法衣: 불상의 옷)를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한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오른쪽 발바닥 위에 놓여 있다.

이로 보아 수인(手印: 손 자세)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유행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마귀를 항복시키고 이를 지신(地神)에게 증명하게 하는 손 자세로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배 앞에 둠)을 모델로 하였으나

손 자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한 듯하다.

불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이며, 하체도 상당히 볼륨감 있게 표현되어 안정감을 준다.

낮고 편평한 육계(肉髻: 정수리 위에 솟아나온 부분), 큼직큼직한 나발(螺髮: 소라 형태의 머리카락)

커다란 이목구비(耳目口鼻) 등 원만한 상호(相好: 얼굴)를 갖추고 있다.

큰 귀는 어깨까지 닿았으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법의(法衣: 불상의 옷) 주름은 형식화되고 간략화되어 있다.

대좌는 상대(上臺)와 중대, 하대를 갖추고 있는 팔각연화대좌(八角蓮華臺座)이다.

앙련(仰蓮: 연꽃이 활짝 핀 모습) 형식의 상대는 연잎 중앙에 화려한 꽃무늬가 장엄되어 있는

중판연화문(重瓣蓮華文: 연잎이 겹쳐진 모습의 연화문)으로서 화려하고 힘찬 모습이다.

중대는 비교적 높게 조성되었으며,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복련(覆蓮)의 하대는 방형(方形)의 받침 위에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 두 개의 연잎으로 이루어진 연화문)으로 장엄되어 있다.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유행했던 항마촉지인 불좌상을 모델로 하여 조성되었으나

불상의 양식이나 수인(手印: 손 자세), 중대가 길어진 대좌 형식 등을 통하여 볼 때

통일신라시대 9세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昌寧觀龍寺龍船臺石造如來坐像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조망

관룡산으로 등산하며서 석조여래좌상을 바라본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수도 경주(慶州)에서 유행하던

항마촉지인 불좌상을 모델로 하여 조성되었다.

그러나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모습으로 옷을 입는 것) 형식이 아닌

통견 형식으로 옷을 입고 있으며, 수인도 모호하게 표현되는 등

도상(圖像)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였던 듯하다. 비록 상호는 통일신라시대 8세기 불상과 거의 비슷하지만

전체적인 비례와 법의의 주름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산 정상부에 조성되었다는 점과

항마촉지인 불좌상이라는 점에서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조성된

국보 제24호 석굴암(石窟庵) 석굴의 본존을 모델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산 위에서 아래를 조망하면서 조성된 석굴암의 항마촉지인 불좌상의 형식이

9세기에 경상남도 창녕 지방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는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불상의 의의가 있다.


창녕 관룡사의 조망

구룡산 산정에서 바라본 관룡사의 풍경이다

삼국통일 뒤에는 원효(元曉)대사께서 1,000명의 중국 승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고 대도량을 이룩한곳 관룡사이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화왕산(火旺山) 마루의 월영삼지(月影三池)로부터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山에가면 寺刹이 있고 寺刹에 가면 山을 찾듯이

오늘은 원효대사 화엄경 법문을 따라 관룡사를 도량을 둘러 보았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통도사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 문화재청, 창녕군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및 사찰종무소스님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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