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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할미봉(咸陽 할미峰).육십령(六十嶺)고개의 이야기를 따라 할미봉 정상에 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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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할미봉(咸陽 할미峰).육십령(六十嶺)고개의 이야기를 따라 할미봉 정상에 서다

바다늑대FORCE 2020. 3. 23. 12:53


함양 할미봉(咸陽 할미峰)

육십령(六十嶺)고개의  이야기를 따라 할미봉 정상에 서다


함양 할미봉(咸陽 할미峰)

 높이 : 1026m

 위치 :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의 경계에 있는산.


▲ 나의산행일 : 2020년03월21일 토요일 . 날씨 : 맑음


▲ 나의산행코스 :

   육십령휴게소―→육십령마을도로―→산성터―→헬기장―→로프구간―→할미봉

   ―→반송마을 갈림길―→대포바위(원점회귀)

   왕복9.4km   4시간10분소요


▲ 함양 할미봉(咸陽 할미봉) 개요 :

경남 함양군 서상면을 지나 전북 장계면으로 넘어가는 육십령 고개

바로 북쪽에 솟아있는 암봉이 할미봉이다

전북 쪽에서 육립령 고개를 향하여 도로에서 바라보는 기암괴봉의

운치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일대는

철이 바뀔때 형형색색으로 변하여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할미봉은 할미봉 단독 등정 보다는 남덕유산으로 가는 중간 경유지로서 많이 이용되고 있는 산이다.

산행은 육십령 고개 휴게소에서의 백두대간 코스인 능선을 따라서 등정을 하거나

 장계면 명덕리 반송마을에서 광산도로를 따라 오르면 되는데

요즈음은 육십령고개 주차장에 주차한 후 할미봉으로 많이 등정을 하고 있는 경향이다.

육십령 고개에서 군장동 마을을 오른쪽으로 바로 주 능선으로 등정이 시작되는데 경사가 완만하다.

20분정도가면 시야가 확 트이는 바위가 나오는데 잠시 쉬었다가 조금가면 헬기장이 나오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나면서 할미봉 정상에 이르게 된다.

 

▲ 함양 할미봉 등산지도




▲ 산행지 찾아가는길 :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진주jc―→통영대전간고속도로 서상 나들목―→육십령 장계방향

―→육십령휴게소 주차

93km  승용차 1시간10분 소요


→→→→→2020년3월21일 토요일 우리나라 구석구석 산을 찾아 오늘도 길을 나선다

직장동료랑 그리고 동료의친구들이랑 그렇게 육십령 고개에 있는 함양 할미봉으로 향했다

봄기운이 만연한 날씨에 통영대전간 고속로로를 달려

함양서상 나들목으로 나와서 육십령고개 휴게소에 도착 하였다.


백두대간 육십령(白頭大幹 六十嶺)초석(礎石)

경남 함양군 서상면 육십령마을 입구에 있는 백두대간육십령 초석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육십령은 소백산맥의 남덕유산(1,507m)과 그 남쪽의 백운산(1,279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하고

고개의 동사면은 지천을 거쳐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南江)의 최상류 계곡과 통하고

서사면은 평지천을 거쳐 명덕천으로 연결되어 금강의 최상류 계곡과 이어진다.

이들 양 사면을 흐르는 하천은 많은 침식분지를 만들어 동쪽에 함양ㆍ안의ㆍ도천(道川) 등의

산간분지와, 서쪽에 장계(長溪)ㆍ명덕(明德) 등의 산간분지를 형성하였다.


육십령(六十嶺)초석(礎石)

육십령터널을 지나 육십령 휴게소에 있는 초석이며 백두대간육십령 초석 세우기 이전에 있던것며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과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주요한 고개로 도계표시가 서 있으며 높이는 734m이다.

신라 때부터 요해지(要害地)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이 고개를 넘으려면 60명 이상의 무리를 지어서 고개를 넘어야 도둑떼를 피할 수 있다거나

재몬당까지 60여 굽이가 된다고 해서 붙여졌다 한다.

삼국시대에는 나제국경(羅濟國境)의 요새지로서 성터와 봉화대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인근 덕유산 봉우리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되어 등극할 때 제단을 설치하였다는 유적이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육십현(六十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육복치(六卜峙)로 기록되어 있다.


할미봉 들머리

보통 산행자들은 육십령에서 할미봉 서봉 남덕유산을 산행코스중 하나의 이기도 하며

할미봉을 등반할 목적으로는 좀처럼 등산을 하지 않는 편이다

장수군 장계면에 위치한 육십령휴게소에 주차를 하고서 도로를 건너서

백두대간육십령 초석이 있는 마을로 가는길에 약30M 정도가면 들머리가 있다.

안내 화살표가 없다면 마을 텃밭옆이라 조금 구분하기가 힘들다

마을텃밭 밭두렁을 걸어서 가면 할미봉으로 가는 멋진 목계단이 나타난다.


할미봉 초입구간

할미봉으로 가는 초입구간은 소나무가 빼곡하며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진 탐방로이다

들머리가 있는  육십령은

육십현·육복치라고도 하며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며 도적떼가 많아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으려면 60명이 모여야 한다고 해 육십령이라 했다.

소백산맥이 동쪽의 남강 상류와 서쪽의 금강 상류인 장계천의 침식작용에 의해 낮아진 부분으로

남덕유산(1,507m)과 백운산(1,279m)의 안부에 해당한다.

소백산맥이 활처럼 둘러싸고 있어 다른 지방과의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영남지방의 주요교통로로

조령(643m)·죽령(689m)·팔량치(513m) 등과 함께 영남지방의 4대령으로 꼽아왔다.

특히 육십령은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였으며

현재는 전주-대구를 잇는 국도가 지나며 삼국시대부터 이용되었던 고개였으며

당시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다.

함양사근산성(사적 제152호)·황석산성(사적 제322호) 등 삼국시대의 성곽들이 남아 있다.


할미봉 탐방로

봄바람이 꽃향기 가득 담고서 가슴을 스쳐 지나간다

솔향기 가득한 탐방로 주변에는 봄의 전령 진달래 꽃봉우리가 터질듯 하다.

육십령은 소백산맥의 남덕유산(1,507m)과 그 남쪽의 백운산(1,279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小白山脈 (소백산맥)은 길이 약 350㎞, 평균높이 500m.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의 분수령을 이룬다.

형제봉(1,178m)·소백산(1,440m)·국망봉(1,421m)·도솔봉(1,314m)·주흘산(1,106m)

속리산(1,058m)·황학산(1,111m)·민주지산(1,242m)·대덕산(1,290m)·덕유산(1,614m)

지리산(1,915m)·노고단(1,507m)·반야봉(1,732m)·백운산(1,218m) 등의 고봉이 솟아 있고

합천의 가야산(1,430m)은 소백산맥의 한 지맥에 솟아 있다.

기반암은 편마암·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맥의 동부지역에서는 화강암분지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할미봉 산정

기암괴석 암봉을 이룬곳이 할미봉 산정(山頂)이다

수반에 올려 놓은 수석(秀石) 작품같이 보인다

할미봉은 백두대간 줄기에서 우뚝 솟은 암봉이어서

사방이 천길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으며 할미봉 자체가 기암괴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에 형제바위 대포바위 등 경관이 좋은 명소들도 많다.
백두대간을 주름잡는 산돌이들도 힘겹게 할미봉을 오르면 풍광이 아름답고

넓다란 암반이 있어 간식꺼리를 먹어면서 아름다운 조망을 감상할수 있는곳이다.

북쪽으로 남덕유산의 우람한 두 봉우리를 올려다 보게 되고

동쪽으로 월봉산 금원산 황석산을 볼 수 있으며

남쪽으로 갓걸이산 백운산 장안산 왕산 지리산 줄기가 조망된다.

서쪽으로는 무등산 팔공산 덕태산이 보이며 운장산도 보이는곳이다


할미봉 능선길

육십령에서 할미봉 가는 탐방로는 초입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탈진길이다

능선길에 올라서니 참나무가 주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참나무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발목까지 빠지게 만들었다

육십령은 높고 높은 고개여서 구름도 쉬어 간다는 령(嶺)이다.
공식 해발 높이가 730m이며 백두대간의 한 대목이기도 하다.

남덕유산에서 내려와 육십을 지나면 깃대봉이 있고 이어 영취산이 나온다.

백두대간은 영취산을 거쳐 백운산을 지나 지리산으로 이어지지만

영취산에서 갈라진 다른 산줄기는 장안산을 거쳐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이어진고 한다.


암봉구간

할미봉 산정에 가까워 질수록 작은 암봉을 자주 만난다

여기서 부터는 로프를 잡고서 올라야 하고 바위를 넘머어야 하는 난코스이며

마치 장병들의 군사훈련중 유격코스 구간이다.

육십령은 삼국시대때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이며

장수감영에서 육십령까지 육십리 이며 안의감영 지금 함양군 서상면에서

육십령까지 거리가 육십리라고 했다고 전한다

또 크고작은 60개의굽이 또는 고개를 지나야 넘을수 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고도 구전되어 오고 있다.


장수군 장계면 명덕의 조망

한국마사고등학교 경마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마사고등학교(韓國馬事高等學校)는 전북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에 있으며

2002년3월23일 학교법인 월곡학원 설립인가를 바다아 2003년 3월3일에

기수과 승마과 6학급으로 40명 첫 입학을 하였다 한다.

전북 장계면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백해군의 관할구역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군현의 명칭 변경에 따라 백해군을 벽계군으로 개칭하여

장계면은 벽계군의 관할 구역에 있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벽계군이 벽계현으로 격하됐고

995년(고려 성종 14년)에 벽계현이 장계현으로 개칭되었으며

세 조선 1417년(태종 14년)에 장계현이 장수현에 병합될 때까지 장계면은

현청(동헌) 소재지(노평들)로서 교통과 문물이 발달하였다.
근세 조선 말엽 이전에는 부·군·현내에 방을 두었으나 편의상 구역을 확정하는데 불과했다.

이 시기에 장계면은 임현내방으로 부르다 뒤에 노평(현청 소재지) 동쪽을 계동방

또는 임동방, 서쪽을 계서방 또는 임서방으로 불렀다.

근세 조선 1895년(고종 32년)에 23부, 331군을 두는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방을 면으로 고치면서 임현내면으로 고쳐 불렀다.

1917년 면제 공포로 임현내면을 계내면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면은 말단행정기구의 중요 역할을 했다.


장수군 장계면 명덕의 조망

1917년 그 당시 장계천 이남(현 장계리, 동남동<동평들>과 남산마을)은 계남면에 속했으나

그 뒤부터 동남동(동평들)은 장계리에, 남산마을은 삼봉리에 편입되어 장계시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면세가 대폭 확장되었다. 장계면은 태백간(소백산맥)이 남으로 힘차게 뻗다가

남덕유산을 이루는 데 그 발치에 두문봉, 추락봉, 노고봉, 백화산 등

형제봉들이 정답게 둘러싸여 있는 오목한 넓은 분지에 한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렇듯 산간부에서는 보기 힘든 넓은 한들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자급자족은 물론 외화 획득의 주산물이 되기도 한다.
장계면의 지형은 동으로는 육십령과 경계를 이루어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접해있고

남으로는 동평들을 흐르는 실개천이 경계가 되어 계남면과 접해있고

서로는 산정수동하는 동정대재와 경계를 이루어 천천면과 접해있고

북으로는 깁재와 경계를 이루어 계북면과 인접해 있다.
또한 덕유산에서 발원한 장계천과 장안산에서 발원한 유천이

장계면 한들의 젖줄 역할을 하며 천천면으로 굽이쳐 흐른다,

또한 장계면 중심부를 관통하여 동(경남), 서(전주)로 연결되는 26번 국도와

남(남원), 북(무주)으로 연결되는 19번 국도는 면의 중심지인 장계리에 십자로를 형성하고 있어

동부산악권의 교통 요충지가 되고 있다.
또한 1993년 11월 1일 계내면을 장계면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양군 서상면의 조망

반대편으로 돌아서면 함양군 서상면 육십령 마을이 발아래 펼쳐진다

경남과 전북의 도계이지만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서 군사 요충지이다.
지금의 육십령 마을은 1930년 경 경남과 전북을 잇는 국도가 개통되면서 생겨난 마을이며

그 이전에는 북쪽으로 두루봉 뒤 군장동(軍藏洞)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군장동은 북으로 합미봉

남으로 두루봉 골짜기에 자리하여 옛날 군사무기를 저장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남쪽의 두루봉은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으며

적에게 위장하기 위하여 섬꺼치(꺼적데기)를 엮어서 산봉우리를 둘러 덮어

적에게 군량미 노적가리로 보이게 속였다고 한다
육십령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도둑떼가 많아

고개 아래 주막에 육십인 이상 모여야 산을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 했다고 하며

또 하나는 이곳에서 안의 감영까지의 거리가 육십리요 장수감영까지의 거리가

육십리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또 안의에서 이 고개까지 오르려면 육십고개를 돌아오게 된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남진할 때 경남지방에는 이곳으로 제일 먼저 들어왔는데

넘어올 때에 오백여명의 아군이 이곳을 지키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한 곳이다.
1985년 창원KBS에서 세운 호국영령 추모비가 있다 .


할미봉의 암봉(巖峰)들

산정에 가까워 질수록 이렇게 암봉이 하늘을 향에 솟아 있다

가을날 단풍이 물들면 화려한 수석같이 보일것이다

겨울 함박눈에 덮혀져 있다면 한폭의 산수화를 연출할 것이다.

육십령(六十嶺)은 지명유래에 대해서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안의와 장수 읍치에서 고개까지 거리가 60리라는 것이고

60개의 작은 구비를 넘어와야 육십령에 이른다는 이야기와

세번째는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장정 60명이 함께 넘어가야 도적의 위험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에 육십령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고개에 대한 얽힌 전설이나 구전대어 내려오는 이야기는 사뭇 재미있다

옛날 고개마다 산적들이 있었고 고개를 넘을때 호랑이 전설도 있고

고개마루 여우 이야기등 재미있는 설화가 다양하다.



함양군 서상면을 바라보면서 휴식

봄은 바로 코앞에서 진달래 봉우리가 부풀고 있고 새소리 정겹는데

산 아래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두기 감염방지를 위해

애를 쓰고 사람들과 그에 따라 경제는 곤두박질에 또한 힘겹다

전 전세계적으로 pandemic(펜데믹:전염병 대유행)에다 이탈리아에서는 하루 600명이 사망했다는

언론보도도 나오고  중국발원지 보다 더 심각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유럽국가들이다.

딸애도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데 걱정아닌 걱정이 태산(泰山) 같다.


함양 할미봉(咸陽 할미峰)1026m

육십령 고개 이야기를 따라 산정에 올랐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영재우적(永才遇賊)’이라고 해서 지리산과 덕유산 중간의

육십령 통로에 기거하고 있던 도적떼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신라 때부터 요해지였으니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름이 됐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육십령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산이 험하고 고개가 높으면 도적이 많은 것은 흔한 일이지만

들머리에서 60여 명이나 패를 지어 고개를 넘어야 했다니 그 험한 지경을 설명하고도 남는다.

최근들어 전라북도가 장수군 명덕리 일원 백두대간 호영남 경계지역 육십령을

옛 고갯길 주변에 지역특화조림 나무심기 행사를 가졌다하며

옛 고갯길 지역특화 조림은 동부산악권 고원 지역특성에 적합한 향토 수종을 식재

백두대간 기능회복 및 산악 관광자원 인프라구축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함양 할미봉(咸陽 할미峰)1026m

할미봉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 전라북도 전도, 장수군행정지도, 장계지

장수의 마을과 지명유래에 등재되었지만

한국지명총람과 한국지명유래집 등에는 할미봉에 대한 기록이 없다.    
장계지의 할미봉 봉수와 명덕산성불씨로明德山城種火爐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할미봉수는 장계면 명덕리 남덕유산 남쪽에 있으며

주민들은 할미봉(합미봉)으로 부르고 있으며, 불을 피워 신호를 보내는 터가 있다.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가면 돌로 쌓은 석축이 있다는 제보가 있었다.

유물은 정상부의 평탄한 지형에서 회청색 경질토기의 고배편

구연부편, 동채부편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명덕산성은 남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험준한 준령이 전북과

경남의 도계를 이루는 제일 높은 해발 1026m(할미봉을 지칭함) 정상에 있다.

이 성지에서 서쪽 8부 능선에 폐광된 수연광산이 있다.   
1769년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우리전통지리서인 산경표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 고찰해본 할미봉의 산줄기는 이렇다.
백두대간이 백두산 백두봉을 출발해서 북한지역의 두류산, 마대산, 백암산, 오봉산

금강산 등과 남한지역의 향로봉,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추풍령 등을 거쳐

전북 땅의 삼도봉, 대덕산, 덕유산 백암봉, 무룡산, 장수 삿갓봉, 남덕유산

장수덕유산을 지나 할미봉에 닿는다.

그리고 백두대간은 남쪽의 육십령, 구시봉을 지나 영취산으로 뻗어간다.

물줄기는 서쪽은 장계천을 통하여 금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진주 남강으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와 전북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의 경계를 이룬다.



할미봉 산정에서 바라본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상남리에있는 조산(造山)마을의 개척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헌강왕 2년에 영각사가 창건되면서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영서(靈西)로 불려 오다가

조선 세종 4년 무신란때 황산에 살던 창녕조씨가 인척이 난에 연루될 것을 두려워 하여

화를 면하기 위하여 이 곳에 와서 다래덩굴을 헤치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뒤 골짜기에는 궤송정(机誦亭)이 있고 봉황대 암각이 있다.

창녕조씨가 과반수이고 신창표씨, 청주한씨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신기마을은 장구지마을 아래 새로 터을 잡아 마을을 개척하고 살게 되었다 하여 새터(新基)라 한다.

이 새터마을은 풍수지리학상 배설이라 하였고 당산을 배의 돛대라 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 마을에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배의 바닥을 파면 배가 구멍이 나서 가라 앉는다고 해서였다.

옛날 사람들은 이 풍수설을 믿고 마을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 해서

금기로 여기고 불편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남덕유산의 조망

할미봉에서 서봉가는 방향 테크계단에서면 남덕유산 과 장수덕유산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며

덕유산 능선이 할미봉까지 펼쳐져 보인다.

지리적으로 장수덕유산의 북쪽은 장수덕유산과 남덕유산, 삿갓봉과시루봉

그리고 덕유산연봉들이 용틀임을 한다.

동쪽은 서상의 월봉산이 다가오고, 남쪽은 백두대간의 구시봉

덕운봉 너머로 영취산과 백운산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남서쪽은 백화산 너머로 장안산이 우뚝 서 있고

서쪽은 성주산(깃대봉), 두문산, 너머로 금남호남정맥과 성수산이 하늘금을 그린다.  
장수의 마을과 지명유래는 할미봉 주변에 대한 인문지리는 이렇다.  
백두대간 서쪽 기슭의 참샘 터는 삼지三地 옥토가 자연농지를 형성하였으며

할미봉 기암절벽과 지하광물은 동양 제일 큰 관광 개발적지다.

이처럼 아름답고 청정한 자연환경 속에 양삼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영남 과객들이 묵고 갔다는 곳이 할미계곡 물이 합류하는 삼거리 숲 속이라고 한다.      

양삼(陽三)을은 양지마을과 삼거리마을에서 취한 이름이다.

반송(盤松)마을은 반석 위에 큰 소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수연을 캐는 광산촌으로 광부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충청도, 경상도 등 전국에서 외부에 온 500여명의 광부들이 광산에 종사하였고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이북 오도민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에서 탐사를 한 뒤 소와전공주식회사에서 소덕광부터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덕유광산(육십령 쪽), 장수광산을 차례로 채굴하였다.

이들 광산에서는 일제 강점기 징용을 기피하기 위하여 노무종사자로 3천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대부분의 광산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굴병(심폐증)으로 죽거나 다른 일을 찾아 이곳을 등졌다고 전하고 있다. 


대포바위 방향 탐방로에 있는 암봉

커다란 암석 지붕에 큰 돌기둥이 서 있는듯 하다

소낙비라도 피할수 있을듯한 공간이다

할미봉에서 장수 상남마을로 가는 방향에 대포바위가 있으며 길은 가파러다

전북 장수군 근교 유적에는 의병장 김동신의 묘가 있는데 
의병장 김동신은

지리산을 무대로 영호남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의병장으로 창의도원수로 불리는 김동신이다.

의병장 김동신은 1871년 충남 회덕군 탄동면에서 태어나

1906년 홍천에서 기병한 민종산의 부하로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의병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다가 뜻하지 않은 병을 얻어 고향에 숨어 치료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 끝에 1933년 조국 광복의 통한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유족의 신청으로 늦게나마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또 김해 김씨 지비가 있는데 평지마을 숲속에 있는 이 비는 김해 김씨 김중건의 딸이

이순양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일찍 죽었다.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으며 칠성단을 두어 지극정성으로

천지신명께 기도하여 시어머니 눈을 뜨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국가 산림 문화 자산 안내문

지정번호 2017-01 지정일2017.7.7

명칭 대포바위

소재지 전북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산154-1

길이 2.5m 직경 1.3m 소유자 전라북도 라고 기록해 놓았다


대포바위 

대포바위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晋州城)을 함락시킨 왜군(倭軍)이 전주성(全州城)을

치기위해 함양을 거쳐 육십령(六十嶺)재를 넘어와 고갯마루에서

할미봉 중턱을 바라보니 엄청나게 큰 대포가 서 있음에 깜짝놀란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오던 길을 되돌아 운봉을 거쳐 남원방향으로 선회해 장계지역이

화(禍)를 면했는데 멀리서 보면 흡사 그 생김이 대포처럼 보이기 때문에

대포바위라 부르지만 실상 가까이 다가와 보면 남자의 성기와 같아

남근석(男根石) 혹은 좆바위라 부른다.

다만 부르기에 너무 상스럽다 하여 남근석으로 통용되는데 일설(一說)에 의하면

옛날부터 사내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들이 이 바위에 절을하고

치마를 걷어올린 채 소원을 빌면 사내아이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지금도 대포바위 보다는 남근석(男根石) 혹은 좆바위라 부르고 있다.

장수군의 안내표지판 글을 옮긴 글이다.


대포바위 남근석(男根石)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며 격전지였던 할미봉은 험준한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정상에는 테뫼식 석성인 명덕산성과 봉수역할을 하였던 불씨로가 동서남북에 네 개가 있다.

할미봉 정상에서 서쪽의 장계방향으로 내려오면 데ㅐ포바위를 만날수 있다

일명 대포바위 또는 남근바위로 일컫는 암봉은

길이 2.5m, 직경 1.3m의 바위가 비스듬히 장계 쪽을 향하여 서 있다.

이 대포바위가 장계를 향하여 있어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큰 대포로 알고 되돌아가

장계면 쪽으로는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육십령 고개아래 장계쪽으로 포문을 연 거대한 대포같아 진짜 대포였다면

왜군들은 몰살 했을것이라 본다

위치 또한 포 진지처럼 적당한 높이에 숨어서 적을 기다리기 좋은 장소 같아 보였다.



육십령(六十嶺) 생태터널

일제강점기인 1925년 끊어진 백두대간 육십령(六十嶺)이2013년6월24일  88년 만에 복원됐다.

경남 함양군과 전북 장수군을 연결하는 해발 734m의 육십령은

소백산맥 중의 덕유산과 백운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산적들이 많아 60명을 모아야 재를 안전하게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끊어진 백두대간의 맥을 이어 복원한 것은 이화령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에 이어 두 번째다.

육십령 생태축 복원은 길이 43m의 친환경 터널(폭 16m, 높이 6m·사진)을 설치하고

그 위에 흙을 쌓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터널 위에는 육십령을 상징하는 소나무 60그루 등 자생식물을 심었다고 하며

육십령 복원 사업엔 36억원이 투입 되었다고 한다.


육십령 충령탑(六十嶺 忠英塔)

할미봉 산행을 마무리 하고서 육십령 휴게소에 있는 충령탐에 참배(參拜) 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국군 8사단, 수도사단에서 덕유산지구 공비토벌을 위해 산화한

국군영령들의 혼을 기리기 위해 1954년 6월 16일 장계 남산공원에 세웠다.

그 뒤 백화여고 설립으로 1991년에 덕유산이 인접한 육십령으로 이전하였다.

비문에 “육군 소령 신창식 이하 55명은 덕유산 지구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고이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렇게 하여

함양 할미봉(咸陽 할미峰)산행은 육십령(六十嶺)고개의  이야기를 따라

할미봉 정상과 대포바위에 얽인 이야기를 보고 산행을 마무리 해본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근교산&저너머(국제신문), 명산플러스(경남일보),함양군,전북 장수군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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