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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방어산(咸安 防禦山), 묵신우 장군(墨神佑 將軍)전설이 있는 방어산 정상에 남강을 바라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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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방어산(咸安 防禦山), 묵신우 장군(墨神佑 將軍)전설이 있는 방어산 정상에 남강을 바라보다

바다늑대FORCE 2020. 3. 13. 15:13


함안 방어산(咸安 防禦山)

  묵신우 장군(墨神佑 將軍)전설이 있는

  방어산 정상에 남강을 바라보다


함안 방어산(咸安 防禦山)

   높이 : 532m

   위치 : 경남 함안군 군북면과 진주시 지수면 경계에 있는 산


▲ 나의산행일 : 2020년08월13일 금요일 . 날씨 : 맑음(미세먼지)


▲ 나의 산행코스 :

   진주 지수면 토실마을―→관음사―→매봉―→마당바위―→방어산 정상―→헬기장

  ―→마애불삼거리―→마애불―→비로자나불―→능선삼거리―→임도―→큰골

  ―→토실마을 주차장

  5.5km  3시간 소요


▲ 함안 방어산(咸安 防禦山) 개요 :

1993년 12월16일 군립공원으로 지정 (경남고시 제 '93-338호 )된 방어산은

이름 그대로 兵亂(병란)과 왜구를 무찌르고 방어했다는 산이다.

괘방산과 접해 있으며 함안군과 진주 지수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산의 형태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는 마당바위, 기차굴, 흔들바위, 우물등이 있어

봄,가을에는 외지의 많은 등산객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산 위에는 석성이 있고 산 서쪽에는 장군당이 있으며 아래에는 마제현이 있고

북쪽에는 장군의 철상이 있으며 동쪽에는 고사의 유기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로는 홍무십일년, 봄에 왜병이 반성에 침입하여 이 산정에 올라와서

책을 세우고 스스로 보전하려 하니 상원사 우인열이 박경수, 오언과 더불어 합하여 에워싸고 공격하여

목 삼십사급을 베었다고 한다. 혹은 말하기를 이절 이름을 망일암이라 하였고 장군의 성명을 목신우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군은 효용이 절인하고 두 겨드랑에 날개가 있어 깍아지른 듯한 구렁을 날아서 오르며

힘은 능히 삼백근이나 되는 활을 당기더니 마침 왜적의 대란을 만났다.

장군은 군사 삼천명을 거느리고 또 승인 혜성이라는 사람을 얻어 성으로 가서 산정을 지키면서

적이 이르는 것에 대비하고 앞 봉수리를 바라보고 진을 쳤다.

장군은 성벽을 굳게 닫고 몇 달을 나오지 아니하다가 천 개의 활을 쏠 것을 명령하니

대전이 비오듯하여 맞은 자는 불타죽고 죽은자가 삼대와 같았다.

적은 신병이라고 하여 물러나 도망하니 당시에 사람들이 이를 사모하여

장군과 혜성의 유상을 만들어 모시고 철마십여필도 바위 위에 남겨두었다.

이리하여 말들과 싸움에서 흘린 피가 지금까지 석면에 아롱져 있어서 옛발자취가 완연한 것이 어제와 같다.

산을 방어라고 일컷고 봉우리를 산성이라고 이름하여

재에 마제라는 것이 있고 리를 승어라고 이름한 것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방어산은 이름그대로 6.25사변시에는 괘방산과 같이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을 선멸한 산이기도 하다.


▲ 방어산 등산지도 :



▲ 산행지 찾아가는길 :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지수 나들목―→용봉로 지수방향―→지수로 함안 의령방향

―→지수로 우회전 ―→토실마을주차장

22km  승용차 20분 소요





→→→→→2020년3월13일 금요일 우리나라 구석구석 산을 찾아 오늘도 길을 나선다

남해고속도로 지수 나들목을 지나 근무지로 출퇴근길에 들머리가 있는

함안군 군북면과 진주시 지수면 경계에 있는 방어산에 오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방어산은 유년기 시절 나무하러 갔던 곳이고 뽈통 따먹어러 칡캐러 왔던곳 이기도하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방어산 아래 지실절(용화사)이라 히여 그 사찰 어머니께서 자주 가시던 곳이였고

그래서 방어산은 그러한 이유로 자주 올랐던 산이기도 하다.


토실마을

지수면 소재지에서 의령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남해고속도로 굴다리 아래로

토실마을 진입로가 있다.보통 근교산 산행자들은 함안군북 어석재에서 부터 괘방산과 방어산을

연계해서 산행을 많이 하고 군북에서 오르면 군북 하림에 있는 마애사에서 부터 시작하면 된다

마애사는 함안군 군북면 하림2길181-78 네이게이션 길찾기 주소 검색 하면 된다

그리고 진주에서 오르는 지수면 토실마을은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 토실로 하면되며

또는  방어산 관음사 분기점으로 하면 된다.


토실마을 방어산 주차장

토실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시멘트포장도로 임도를 따라 쭉 올라오다 보면

Y자형 길이 나오는데 우측길로 20 m정도 가면 주차장이며 게속 올라가면

방어산2코스 구간을 만나지만 주차할곳은 여기 뿐이다

여기 주차장은 승용차 20대는 주차 가능할것으로 보였다.

주차를 하고서 관음사방향으로 걸어나와서 1코스 구간의 관음사로 가면 된다.


방어산 1코스 구간 안내표지판

관음사 방향이 1코스 구간이다 이표지는 Y자길목에 서 있다.

방어산은 괘방산과 더불어 산악회 산꾼들에겐 다소 생소한 곳이지만 가족산행지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방어산과 괘방산은 500m급의 산에 불과하지만 능선의 굴곡이 심한데다 군데군 데 암반을 올라야 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소나무터널이 산행의 묘미를 한층 더 하게 해 준다.

여기다 방어산 7부능선에 터잡은 보물 159호 `마애약사삼존불' 도 만날 수 있고 능선에 오르면

남강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봄바람을 맞으며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방어산 정상은 성채마냥 큰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장군대라 한다.

정상에서 200m 아래 흔들바위가 있고 남쪽으로는 상여바위가 있다.

흔들바위는 서쪽 진양 사람과 동쪽 함안 사람들이 서로 자기 족으로 바위를 기울 게 해 놓는데

기우러진 쪽으로 부자가 난다는 전설 때문이다. 동네에서는 끄덕바위라 부른다.


관음사(觀音寺)

관음사는 방어산 매봉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이다

일반적으로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을 모신 도량을 관음사라고 많이 부른다

불교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보살로서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로

모든 곳을 살피는 분이나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졌다.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보는 이의 정신 수준에 따라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하며 널리 숭상되며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관세음보살의 공덕과 기적은 관음경,법화경등

많은 불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정토교(淨土敎)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 설정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은 죽은 이들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도하는 모습으로 곧잘 묘사했다.

이러한 신앙은 3~5세기 무렵에 한역된 정토계 경전들에 근거하고 있다.


산신각(山神閣)

방어산등산로는 산신각 옆으로 탐방로가 개설되어 있다

산신각에 오를때까지 관음사 멍멍이 처사는 밥값한다고 귀가 따갑도록 짖어 되었다

돌계단 주변은 마삭줄이 푸르게 햇살을 받고 있고 대나무는 초록을 뽐내었다.

산신각(山神閣)은 우리나라 사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일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먼저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다가, 후대에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되찾게 된 것이다.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畫)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한다.

산신신앙은 불전(佛典) 안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차 나타나기 시작한 산신각은

하근기(下根機)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산신은 가람수호신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산속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外護神)으로서도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하여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현재 이 산신각에서는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산신 기도가 많이 행하여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다.



매봉가는길 장승표지목

장승에는 매봉들(갈미봉)이라고 새겨 놓았다.

매봉들이란 토실마을 북쪽에 있는 들판을 가리킨다고 하며

여기서 부터는 탐방로가 흙으로 이루어 져 있다

코로나19로 난리(亂離)아닌 난리인 지금에 솔향기 가득 머금고 산에 오른다

인간들은 무기개발에 힘쓰왔고 이제는 핵 확산 방지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윗동네 밥을 굶어도 핵은 만들고 있다 그러한 탓에 바이러스란 재앙에는

그다지 핵과 비교 했을때 미비 하였다.

그래서 코로나19가 팬데믹(Pandemic)에 휩싸여 있다

pandemic(팬데믹)이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정의한 신종 인플루엔자 경보 단계 중

최상위 단계로 감염병 또는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는 것을 말한다.

유행병은 감염병이 지역 사회 내에서 발병하는 것을 뜻하지만

팬데믹은 2개 대륙 이상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병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팬데믹 선언으로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유행이 있다.

팬데믹이라는 용어가 2019년 12월 발생한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으로 자주 사용되면서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2020년 3월 2일부터 4일까지 열린 새말모임을 통해

팬데믹의 대체어로(감염병)세계적 유행’을 선정했다.



솔바람

솔바람 향기가 좋아서 잠시 멈추고 남강을 바라보면서 쉬었다

소나무 숲사이로 지수면 들판이 보인다

큰형님들 이야기엔 방어신에서 지수동네 아이들 그리고 군북 아이들이

방어산에서 많이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가 말하는 텃세 때문에.......!

방어산의 옛설화에는 아주 오옛날 천지개벽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높은 산의 꼭대기만 남았다 한다

방어산 꼭대기는 방앗고 만큼 남아 '방아산'이라고 했다가

방어산이 됐고 달음산은 달만큼 남아 달음산이 됐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설화는 방어산 뿐만 아니라 진주 초장동에 있는 장대산이 그렇고

함안 청룡산이 그렇다 함안 칠원 청룡산은 작대산이라고도 한다

대홍수로 산 꼭대기에 작대기만 남았다고 라는 설화는 비슷한곳이 더러 있나 보다.



전망바위의 소나무

흙하나 없는 평탄한 암봉(岩峰)위에 소나무 하나 서 있다

바위틈사이로 뿌리를 어케 내렸을까  긴 시간동안 어떻게 지탱 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식물들의 생존본능이 장난이 아니다

바윗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소나무 보다 우리는 더 연약 한가 보다

신종 바이러스에 쓰러지고 경제(經濟)가 곤두발질 친다

바위돌에서 자라는 소나무에게서 생존능력을 배워야 겠다

영양분이 되는 흙도 수분도 딱딱한 바위를 뚫어야만 얻을수 있다

인고(忍苦)고통이 있었기에 이렇게 푸르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것이다.


병풍바위

방어산에 오르면 산정부분에 가까워 질수록 암봉들이 위엄을 드러낸다

바위틈에는 새파란 이끼가 파릇파릇하다 산정 부근인데도 물끼가 드러 있나 보다.

유년시절 방어산에 오르는길은 군북 데미(죽산)로 걸어가서 지실(지곡)로 가는

논두렁길을 다녔다

지금은 길이 잘 포장되어 있어 승용차로 가면 지곡마을 마을버스 정류소에서

우측으로 진입하면 방어산 이보인다

지곡마을회관 옆으로 가다보면 육송정(六松亭)이 나오는데

과수원길을 빨간지붕 주택 뒷편 우측에 등산로 입구 표지판이 있다


절벽에 붙어있는 부처손(석련화:石蓮花)

깍아지는 직벽위에 부처손이 가득하다

부처손은 부처님의 손이라는 뜻이다. 잎이 오므라졌을 때, 그 모습이 주먹을 쥔 손 모양과 비슷해서 붙여졌다.

이 식물이 약재로 쓰이면 나쁜 것을 없애고 좋은 것을 북돋워 주는 작용을 한다는데

부처손이란 한자명인 ‘보처수(補處手)’에서 온 이름이다 한다.

호랑이 발처럼 생겼다고 하여 한자로 ‘표족’이라고도 한다

부처손은 상록 여러해살이풀로, 겨울철에는 성장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꼭 얼어 죽은 듯 보인다.

그러나 봄에 기온이 점점 올라가면 새파랗게 바뀐다. 그래서 만년초, 불사초, 장생불사초, 회양초라고도 한다.

또 잎이 붙은 모양이 주먹을 쥔 것 같고 잣나무잎 같다고 권백(卷柏)이라고도 한다.

부처손은 제주도와 울릉도, 남부, 중부, 북부 지방의 돌 틈에서 자라며

키는 약 20㎝ 정도이고, 잎은 길이가 1.5~2㎜이다.

잎 끝이 실 같은 돌기로 되어 있고 4줄로 빽빽하게 있으며 달걀형이다.

부처손의 효능은

무독성이며 장기 복용하면 몸이 가벼진다고 한다.

부처손을 채취시에는 칼이나 전지가위 등을 사용하여 뿌리가 상하지 않게 잎 부위만 채취해서

훗날에도 이 약초가 계속적으로 살아있어 자생할 수 있게 채취해야 한다.

부처손을 암 환자에게 사용하고자 하여 채취하려 한다면, 가급적이면 바위(암)에 붙어있는

부처손이 훨씬 더 약효의 효능이 좋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손의 잎을 깨끗이 씻어 물1000cc 정도의 분량에 바위손 잎은 중간크기의 한포기 비율로 중불에 30분정도 달인다.

이렇게 다려진 물이 녹차 우려낸 물보다 조금더 진하게 우러나면 식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수시로 마시고 가려운 부위에 자주 바르고 물맛은 녹차마시는 느낌이며

아토피가 심한 경우에는 생잎을 짖찧어서 바른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 계속하면 아토피에 도움이 된다 한다.

부처손을 다려서 우려내고 난 건데기는 말려 분말가루로 만들어서 환자의 밥 반찬에 섞어 요리하여 먹으면 되며

다려서 우려낸 성분은 부처손 전체의 약효 성분 중 불과 20%정도만 추출하여 섭취하게 되는 것이므로

나머지 80%의 약효 성분은 다려서 우려내고 난 나머지 건데기에 포함되어 있는 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다려서 우려낸 나머지 건데기는 태양광에 잘 건조시켜 분말로 만들어서

환자의 밥 반찬에 섞어 요리해 먹으면 된다고하며 아주 귀한 약초이므로 버릴게 하나도 없다 한다.


지수면 토실마을

발아래는 자나온 매봉 아래로 토실마을과 저멀리 지수면소재지가 보인다.

지수면은 조선조 전기까지는 진주목 동면 용봉리,청원리,승어산리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청원, 승어산리는 용봉리에 합해져 이래로 용봉리라 하였다.

고종1년(1864) 이래로는 용봉면이라 하다가 갑오경장 이후는 하봉면, 상봉면(일부)이라 하다가

광무10년(1906) 9월24일자 칙령 제49호에 의하여 함안군으로 이속되었다.

1914년 3월 1일 함안군 하봉면, 상봉면 일부등을 통폐합하여 지수면이라 하였다.

그리고 하봉면 청담리, 승산리 각 일부로서 청담리라 하고 하봉면 동지리, 용봉리

압현리 각 일부로서 용봉리라 하고 하봉면 압현리, 구사리 각 일부로서 압사리라 하고

하봉면 승산리, 임내리 각 일부로서 승내리라 하고 하봉면 청원리로서 청원리라 하고

상봉면 필동리, 뇌동리, 하봉면 구사리 일부로서 금곡리라 하여 6리로 개편되었다.

1995년 11월 1일에는 시조례 제149조에 의하여 승내리는 승산리로 개칭되었다.

그리하여 지수면은 6리를 소관하고 있다 한다.



마당바위

넓다란 마당바위 위에서 봄햇살 마음것 쪼여보자

안내판을 보면 이곳은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깎은 바위

일명 너럭바위 또는 마당바위라 불려진다.

바위 주변의 평수만 합쳐도 300평 정도 되는 넓은 공간으로

산정상까지 가는 사람들의 필수 휴식처인 곳이다.

맞은 편에 방어산 마애불이 보이고 마애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며

손으로 뻗으면 하늘에 닿을 듯한 느낌의 공간으로

지수면을 탁 트인 한장의 풍경사진처럼 조망할수 있다.

이곳 마당바위는 방어산 등산에 없어서는 안되는 코스중 한곳이다.

라고 안내판에 기록해 놓았다.


마당바위 돌탑

누군가가 마당바위 입구 즈음에 돌탑을 쌓아 놓았다

마삭줄이 돌탑을 얽어 자라고 있어 더욱 튼튼하게 보인다

돌탑은 지수면소재지와 들판을 내려다 보고 있다.

아래 청담리(淸潭里)는

남강이 서북으로 흐르고 방어산 서쪽편 기슭에 청담이라는 동리가 있었는데

1914년에 청담, 덕암, 무듬실, 마실, 들말, 토실, 염창 7개 자연마을을 행정구역상 청담리라고 하였다.

이후 행정구역 변경으로 들말, 토실, 염창을 평촌이라 하였다가

1990년 마을이름 되찾기에서 행정리동인 청담마을로 개칭되었으며 무듬실, 허떡골

남은골 3개 자연마을을 합해서 무등마을로 되었다.

마실, 덕암 2개 자연마을을 덕암마을로 하였다고 전한다.


방어산 산정(防禦山 山頂)

안내표지목은 지곡1.7km 박곡2.2km 마애불1.2km라고 안내되어 있고

표지목은 함안군이라고 해놓았다.

방어산 산정에는 방어산성터가 있는데

산 서쪽에는 장군당이 있으며 아래에는 마제현이 있고

북쪽에는 장군의 철상이 있으며 동쪽에는 고사의 유기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로는 홍무십일년, 봄에 왜병이 반성에 침입하여 이 산정에 올라와서 책을 세우고

스스로 보전하려 하니 상원사 우인열이 박경수, 오언과 더불어 합하여 에워싸고 공격하여

목 삼십사급을 베었다고 한다. 혹은 말하기를 이절 이름을 망일암이라 하였고 장군의 성명을 목신우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군은 효용이 절인하고 두겨드랑에 날개가 있어 깍아지른 듯한 구렁을 날아서 오르며

힘은 능히 삼백근이나 되는 활을 당기더니 마침 왜적의 대란을 만났다.

장군은 군사 삼천명을 거느리고 또 승인 혜성이라는 사람을 얻어서 성으로 가서

산정을 지키면서 적이 이르는 것에 대비하고 앞 봉수리를 바라보고 진을 쳤다.

장군은 성벽을 굳게 닫고 몇 달을 나오지 아니하다가 천개의 활을 쏠 것을 명령하니

대전이 비오듯하여 맞은 자는 불타죽고 죽은자가 삼대와 같았다.

적은 신병이라고 하여 물러나 도망하니 당시에 사람들이 이를 사모하여 장군과 혜성의 유상을 만들어 모시고

철마십여필도 바위 위에 남겨두었다.

이리하여 말들과 싸움에서 흘린 피가 지금까지 석면에 아롱져 있어서 옛발자취가 완연한 것이 어제와 같다.

산을 방어라고 일컷고 봉우리를 산성이라고 이름하여

재에 마제라는 것이 있고 리를 승어라고 이름한 것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함안 방어산(咸安 防禦山)532m

방어산 정상 표지석은 晋州望京山岳會(진주망경산악회)라고 새겨져 있고

一九六九年 五月十日 創立(1969년5월10일 창립)

一九八八年 四月十七日 建立(1988년4월17일 건립) 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렇게 산정에 오르다 보면 정상 표지석을 민간 산악회에서 세운것을 드러 있다.

방어산 설화에는

정상는 城(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墨神佑(묵신우) 장군의 용맹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온다

장군의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달려 절벽과 골짜기를 날아다니면서 3백 근 짜리 활을 잡아 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중에 兵亂(병란)이 일어나 적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장군은 3천명의 군사와 중 慧聖(혜성)의 도움을 받아 방어산 봉우리에 성을 쌓고 적과 맞섰다.

적은 방어산 맞은편 봉우리에 진을 치고 공격해 왔으나 장군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한 달을 버티다가

 적이 지칠 무렵에 火箭(화전)으로 공격, 일시에 적을 무찔럿다. 장군의 공격 지략을 본 적은

이는 필시 神兵(신병)의 兵術(병술)이다." 며 도주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장군과 중 혜성의 공을 기리기 위해 鐵像(철상)과 鐵馬(철마)

절을 세웠는데 방어산 정상의 북쪽에장군 철상, 동쪽에 望日菴(망일암)이란 절터가 아직도 남아 있고

장군의 軍馬(군마)가 흘린 말굽과 핏자국이 아직도 바위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

정상아래의 馬蹄峴(마제현, 말발굽고개)이란 이름이나 勝禦(승어, 지금의 지수면 승내)등도

모두 방어산에서 롯된 것이다. 실제 방어산에 대한 기록은 고려 때부터 나타난다

고려禑王(우왕) 5년(1379) 5월 왜구가 班城(반성)을 거쳐 이 산에 올라 목책을 세우고 진을 쳤다.

이때 上元師(상원사) 禹仁烈(우인열)은 朴景修(박경수), 吳彦(오언)과 더불어 왜구를 포위·공격하여

 34급을 베고 산을 탈환, 왜구를 방어했다.

해에 왜구는 晋陽(진양)·泗川(사천)·山淸(산청)·咸陽(함양)을 돌며 분탕질을 했다.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방어산 산정에서 남강(南江)조망

발아래는 남강이 굽이굽이 흘러 간다

옛날에는 하류지방에 수해가 잦았으나 1970년 남강댐을 건설함으로써

홍수조절 및 남강·낙동강 하류지역을 관개하고, 진주와 진삼공업지구(晉三工業地區)에 전력과 용수를 공급한다.

유역에서는 쌀·맥류·잡곡 등이 생산되고 있다.

남강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덕유산(德裕山)에서 발원하여 덕천강(德川江)을 합하고

진주에서 북동으로 유로(流路)를 바꾸어 함안군 대산면에서 낙동강(洛東江)과 합류하는 강이다.

남강 상류지역의 운봉·산청·함양·생초·안의·서상 등지에 분지를 형성하여 지방 중심지가 발달하고

하류지역에는 진주평야를 비롯한 충적평야가 분포한다.

북쪽에 소백산맥(小白山脈)이 있어 여름에 서남쪽에서 오는 저기압이 이 산맥에 부딪쳐 지형성강우(地形性降雨)가 많다.

유역면적 349.3㎢, 유로 186.3㎞. 남강은 서부 경상남도의 동맥으로서

임천(瀶川)·위천(渭川)·양천(梁川)·덕천강(德川江)·빈영천(瀕穎川)·함안천(咸安川) 등의 지류(支流)를 가지고 있다.


지수평야지와 지리산 천왕봉 조망

남강변 주변으로 들판이 잘 조성되어 있고 저멀리 까마득하게 천왕봉도 가물가물하다

방어산을 배경으로 남강이 흐르는 그림같은 지수면이다

지수면의 특산품인 마,우엉 집산지이며 미맥과 시설채소 등을 재배하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미세먼지로 시야가 멀리까지 가지는 않지만 지리산 천왕봉도 보인다

방어산에 서면 사방팔방 조망이 좋다.


산청 둔철산과 황매산 조망

봄이 만연해지면 황매산에는 철쭉꽃으로 화원으로 변하는곳이다

이놈 코로나19로 인해 황매산 철쭉축제도 취소할려지 모르겠다

진해 벚꽃 군항제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취소되었다

근무지인 의령에도 의령 홍의장군 축제도 취소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었다 나역시 오늘 대학원생모임인

마산에서 하는데 불참 한다고 통보를 하였다.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의 많은 기능들이 정지됐다. 대학은 개강을 연기한 데 이어

당분간 온라인 강의로 대체하는 곳이 많아 졌다고 한다

기업들도 원격근무 체제로 전환하고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다.

대규모 모임은 자제하는 분위기이고 미국에선 프로농구를 비롯한 상당수 경기들이 취소됐다.

프로야구 시즌 개막도 연기되고 사회가 겨울잠에 빠져드는듯 하다

정말 바이러스 하나로 세계가 늪에 빠져들는듯 보인다. 


광양 백운산 조망

미세먼지 사이로 까마득히 광양 백운산이 희미하게 있다.

광양 백운산에도 두번에 걸쳐서 봉우리를 종주 했다

백운산 자연휴양림에서 추억도 있고 백운산 고로쇠물도 먹었다

이렇게 산에 오르면 지나간 산정이야기들이 세록새록 새싹처럼 돋아 난다.

이렇게 오르다 보면 산봉우리 마다 내 발자국을 남기게 되겠다.

광양 백운산은 여수순천10·19사건과 6·25전쟁을 전후하여

백운산 살쾡이로 불렸던 공산주의자 김선우 일당의 소굴이기도 한곳이다.


함안 군북면의 박곡리 영운리의 조망

고향마을이 저멀리 희미하게 다가오며 발 아래는 군북면 영운리와 박곡리 이다.

군북면은  면적이 80.6㎢로 경남에서 가장 큰 면이며 지리적으로 남해 고속도로와 경전선철도

국도79호선, 지방도1004호선 등이 인근 창원과 진주를 동서로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여항산 줄기를 이어 받은 백이산과 방어산을 중심으로 원효암,의상대,공룡발자국

서산서원,방어산마애불,남강의 정암루,와룡정 등

도처에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어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지역이다.

일찍이 남강변으로 토질이 비옥하여 수박,방울토마토,마,우엉 등이 유명하며

특히, 수박의 재배면적은 경남의 7.8%를 차지할 만큼 시설하우스 재배의 원조로

전국 어디서나 군북면 수박을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헬기장

2코스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대체로 방어산 탐방로는 잘 정비 되어 잇고 헬기장도 마찬가지이다.

여기는 군북면지역인데 군북면은

당초 대곡, 평관, 산팔, 죽산, 아도, 남산산의 6개리로 나뉘어져 있는데 1586년 당시

함안군수로 재직한 정구에 의해 대곡리(와요동, 본동, 마항촌, 막근현, 사랑산, 심암, 마이동, 목곡, 전사동, 압곡

다로곡, 오곡, 일명당, 상앙방 관할), 평광리(장안동, 지현동, 모영동, 명지동, 사리동)

산족리(원북동, 하림동, 신동, 우말이동, 건천동, 지곡, 박곡, 안월라촌, 가은대)

죽산리(모로곡, 사두곡, 월라촌, 대산촌)

안도리(지두촌, 마라지촌, 오장동,당동, 대대동, 소대동, 요암동, 중동, 하동, 주음법촌)

남산리(장존동, 조여촌, 국곡, 우개촌, 지동, 부동, 남현, 유전촌)로 바뀌게 되고

조선후기에 리가 면으로 변하면서 6개리가 모두 면으로 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군면 폐합시 대곡·평광·안도 3개면이 덕대리에 터를 잡아

군북면으로 죽산, 남산, 산족 3개면은 죽산동에 터를 잡아 죽남면을 탄생하게 되며

군북면 은 7개리를 죽남면으로 10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후 덕대리가 있던 군북면소가 중암리(현 경로당)로 옮겨지고 1933년 1월 1일 죽남면이 군북면에 병합되면서

면소도 현 덕대리 392-2번지로 이전 되었다.

1980년 5월 22일 월촌출장소가 설치되고 1983년 2월 15일 덕촌이 덕촌과 지두

모로가 모로와 여명, 장지가 남산과 장명, 유현이 유현과 봉덕으로 각각 분동되었으며

1999년 1월 15일 월촌출장소가 월촌민원센터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17개리 37개동 120반 92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현 면사무소는 함안군청 소재지로 부터 서쪽으로 8.2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애불 삼거리

마애불 삼거리는 흙산이며 소나무숲으로 솔향기가 가득했다

여기서 어석재 까지는 5.1km라고 안내 해 놓았다

예전 어르신들은 우리동네에서 어석재까지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하러 간곳이다

형들을 따라서 손수레로 나무하러 갔던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손수레를 리아카라고 했다

리아카도 없을땐 이웃집에 빌리려 갈때도 많았다

어석재는 유년기시절 어씨고 라고 했고 어두우면 여시(여우)가 나와

사람을 홀킨(혼을 뺀다)다고 했다

해가진 어석재를 내려오면 무서워서 나무 작대기를 머리위로 올렸다 왜냐하면

여시가 사람 머리위를 세번 뛰어넘어면 혼이 빠진다고 하여

여시가 뛰어 넘을때 날카로운 나무꼬챙이가 여시 배를 가른다 하여 그렇게 했다

정말 전설의 고향에 나올듯한 옛추억의 이야기 이다.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咸安 防禦山 磨崖藥師如來三尊立像)

마애불에 내려오니 보살 한분이 자리를 펴고 기도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아들로 보이는 20대초반  남자가 멀찍이 앉아 있었다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마애불을 향해 삼배(三拜)을 올렸다.

좌측 협시보살옆에 쓰여져 있는 글씨있는데 貞元十七年辛巳三月 이란 글씨가 있다

이 글씨가 신라 애장왕 2년(801)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며 천년이 지난 바위 자국의 글씨이다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咸安 防禦山 磨崖藥師如來三尊立像)

소재지 :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산 131

규모 : 본존불 높이 5m

좌협시보살상 높이 2.45m

우협시보살상 높이 2.64m

경남 함안군 방어산에 있는,남북국 시대 신라의  불상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159호 방어산마애불(防禦山磨崖佛)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방어산 절벽에 새겨진 마애약사삼존불입상으로 통일신라 애장왕 2년(801)에 만든 것이다.

본존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상임을 알 수 있으며 얼굴이 타원형으로 길게 표현되었다.

어깨는 거대한 몸에 비해 좁게 표현되었고, 힘없이 표현된 신체에서는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

이는 불상 양식이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에서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쪽의 협시보살은 모두 본존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서 있다.

왼쪽은 일광보살로 남성적인 강렬한 인상이고, 오른쪽은 월광보살로 눈썹사이에 달무늬가 새겨져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글이 새겨져 있어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으며

통일신라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라고 한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마애불에서 직진으로 내려가면 마애사가 나오고 마애불에서 좌측으로

50m가면 비로자나불이 나오는데 2코스 하산길이기도 하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은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이다.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하여 비로자나라고 한다.

법신은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부처를 신(身)이라고 하였을망정 평범한 색신(色身)이나 생신(生身)이 아니며

갖가지 몸이 이것을 근거로 나오게 되는 원천적인 몸을 뜻한다.

이 부처님을 형상화시킬 때는 천엽연화(千葉蓮華)의 단상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가볍게 들고 있다.

불상의 화대(華臺) 주위에 피어 있는 1,000개의 꽃잎 하나하나가 100억의 국토를 표현한 것으로

이 부처님이 있는 세계의 공덕무량함과 광대장엄함은 헤아릴 길이 없음을 조형화한다.

또, 큰 연화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세계 가운데에는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하여

흔히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라고 한다.

이 연화장세계의 교주는 곧 삼천대천세계의 교주이며,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는 비로자나불이 허공과 같이 끝없이 크고 넓어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득 차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진주 토실에서 2코스 날머리(들머리)

비로자나불에서 좌측 경사면을 타고 오르면 능선을 만나는데

여기서 앞으로 가다보면 삼거리 안내표지목을 만나는데

이곳이 희망이고개라고 하며 관음사 방향으로 하산하면 된다.

하산길이 경사가 심했고 여기저기 소나무재선충 방재한곳도 보이고

재선충에 의해 죽은 소나무를 조사한곳이 많이 보였다

소나무 빼곡한길 소나무피톤치드 가득 먹고서 하산 하였다

아침도 굶고 등산한 길이였지만 소나무 향기 마음것 마셔 배고프지 않았다.


멋진 소나무숲

깨끗하게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을 만났다

소나무숲에는 잡목하나 없이 개끗하고 소나무 낙옆이 수북하게 깔려있어

스펀지 같이 푹신 하긴만 하였다

인위적으로 관리를 한 흔적이 여기저기 나타나 있어 소나무 조림지 같아 보였다.

여름날 같어면 여기 돗자리 펴고 낮잠이라도 즐기고 싶은곳이다

이런 소나무숲엔 청설모도 후다닥 뛰어 다닐텐데

산에 가면 청설모 녀석 모두 멸종 했나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정각(亭閣)

정각을 만든지 오래되지 않아보였다 내부고 모두 깨끗해서 차마 신발을 신고 올라가기는 거북스런곳이다

여름날 수박 한덩이 가지고 와서 벗님들이랑 시원하게 수박 나눠먹고 담소나 나누었으면 좋을 장소다

옆 안내판엔 2018년 산림유역관리사업(진주 지수 청담지구) 라고 해놓았다

방어산은  墨神佑(묵신우) 장군의 전설의 이야기도 있는곳이다

묵신우 장군은 전생의 신(神)으로 불리웠다.

방어산 일대에는 묵신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묵신우는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다. 

이것 뿐만 아니라 활을 당기는데만 300근이나 되는 활을 마음대로 쏘아댈 수 있었고  

300근을 지금으로 환산하면 180kg이니, 하나 쏠 때마다 180kg의 힘을 내야 하는 활을 쏜 셈이다. 

이 묵신우라는 사람은 그냥 혼자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산성을 지키는 장군이었는데  

어느 날에는 이 산성으로 수 많은 적들이 쳐들어왔었때  

묵신우는 3천 명의 병사와 함께 산성에서 외적들을 막아서 싸웠는데  

이 묵신우한테는 '혜성'이라는 이름의 일종의 참모 역할을 해주는 승려가 있었다.  

이 혜성이라는 이름의 승려는 묵신우를 뒤에서 서포트해주면서

성의 방비를 철저히 하는 한편, 불화살을 여럿 준비 하였다고 하며  

묵신우는 혜성과 함께 성에서 한달동안 우주방어를 펼치다가 적이 지친 틈을 노려  

적이 지친 틈에 묵신우는 불화살을 들고 하늘로 날아서 하늘에서 적들을 향해서 막 쐈는데  

결국 지치다 못해 적들은 후퇴를 하고, 적들은 이 성을 떠나면서 신의 도움을 받는 군대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산림유역관리사업

자연스럽게 잘 만들어진 사방댐이다 이렇게 계곡을 잘 정비 해 놓으니

토사도 흘러내려 가지 않고 폭우가 와도 산아래 사람들은 안전할것이다

정각에 앉아서 한참이나 사방댐을 만들어 놓은 곳 물 흐르는 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방어산은

본래 소삼현(召三縣)이었으나 경덕왕이 현무(또는 正武)로 개명하여 함안군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초에 소삼부곡(召三部曲)으로 강등되었다.

이곳의 위치를 하림리일대로 보는 것은 『대동여지도』에서

현무의 진산(鎭山)을 방어산(防禦山)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이 풍수지리설에 의한 북현무(北玄武)에 해당되는지 고증하기 어려우나

지형상으로 가야산(伽倻山)에서 뻗은 산줄기가 남강(南江)에 의하여 끊긴 뒤 방어산이 우뚝 솟아

진주와 함안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해안까지 달리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명이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동쪽으로 장안천(長安川)을 건너 파수역(巴水驛)을 지나 함안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동현(東峴)을 넘어 진주에 다다른다.

지형상으로는 남쪽이 백이산(伯夷山)으로 막혀 있으며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남강에 이르게 되는 계곡분지의 형태를 보인다.

당시에는 함안의 서창(西倉)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 지역일대의 물산이 집결되었던 것으로 본다.

지금의 군북면 지역으로 추정된다.



하산완료후 방어산의 조망

암봉으로 이루어진 방어산이 마치 기암절벽을 이룬듯 보인다

묵신우 장군(墨神佑 將軍)전설이 살아 있고 산정에서면 남강(南江)굽이굽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좋은 방어산 산행을 마무리 해본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근교산&저너머(국제신문), 명산플러스(경남일보),함안군,진주시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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