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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 생가(白山 安熙濟 生家)부자의 삶을 실천한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 생가를 가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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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 생가(白山 安熙濟 生家)부자의 삶을 실천한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 생가를 가다

바다늑대FORCE 2020. 2. 12. 11:29


백산 안희제 생가(白山 安熙濟 生家)

 부자의 삶을 실천한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 생가를 가다


백산 안희제 생가(白山 安熙濟 生家)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로2길 37 (부림면) 


■ 문화재 지정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3호(1993.01.08 지정)


■ 탐방일 : 202년02월11일 화요일.날씨 : 맑음


백산 안희제 생가(白山 安熙濟 生家) 개요 :

독립운동의 선봉장, 백산 안희제 선생

백산 안희제선생은 1885년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창남학교를 창설하고 1908년 의신학교를 창설, 1909년 동래구명학교 건립

대구교남학교 건립 등으로 신학문 보급에 힘썼다.

27세때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소련으로 망명하여 독립순보를 간행하였다.

30세에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본금을 마련하였으며, 기미 육영회를 조직하고

1926년 언론창달을 위해 시대일보를 인수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금되었고

1943년 만주대종교단 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출옥 4시간만인 1943년 9월 2일에 순국하였다.


조선 후기 주택의 특징을 보여주는 곳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는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조와가 및 초가로 되어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구조이다.

실내는 왼쪽에서부터 마루, 방, 대청 2칸, 방, 부엌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동향으로 있어 남측면이 남향으로 1칸 마루가 사랑의 역할을 한다.

평면도 전후 툇간이 발달하여 겹집 형식으로 발전하여 기능이 다양한 방이 필요하지만

별동(別棟)을 만들지 않고 한 건물 안에서 처리한 조선 후기 주택의 특징을 보인다.

사랑채는 안채 정면에 안채와 같이 동향으로 배치하여 대지가 좁지 않은데도 안채와 바짝 붙어 있다.

정면 4칸의 전후 툇간으로 구성된 3량 초가집으로 안채처럼 남측면에 마루를 두었다.


■ 찾아가는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군북tg→→의합대로 적포방향→→→입산로→→백산안희제 생가 주차장

54km 승용차 50분 소요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오늘은 의령군에 있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이다

의령(宜寧)은 한자 뜻을 풀어보면 宜마땅할의 寧편안할령

말 그대로 "마땅히 편안한 곳"이라는 마음에 쏙드는 지명이며

그래서 그런지 근무하기가 편안한듯 하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를 찾아 둘러보고 우리 선조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와 부림면 지리숙지(地理熟知)를 겸한 발걸음이다.


입산문화역사마을 초석

입석마을 입구에 있는  초석인데 초석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18 의병장 한분이신 지헌(止軒)안기종(安起宗) 장군의 유허비긱을 비롯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내시고 항일애국지사이셨던 수파(守坡)안효제(安孝濟)선생과 수파선생의 제씨로

항일애국자이신 송은(松隱)안창제(安昌濟)선생의 사적비가 서 있고 뒷산자락에는 문중의 효열행을 현창하는

팔효각(八孝閣)과 초대 문교장관을 역임하신 한뫼 안호상(安浩相)박사의 공적비가 있다.

1km쯤 돌아가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지로 알려진 설뫼(立山,雪山)마을이 있는곳인데

이곳 명문고촌(名門古村)에는 일제 강점기 동안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줄기찬 한일독립에

헌신하신 겨레의 스승 백산(白山)안희제(安熙濟)선생의 생가와 묘소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최초의

사립학교로서 나라의 동량재를 양성했던 창남학교(剙南學敎)의 유허지와 한뫼님의 생가

제헌의원을 지내신 안준상(安駿相)님 생가를 비롯하여  유서깊은 수파정(水坡亭)과 고산재(高山齋)등

여러가지 문화유적과 조선시대 반가(斑家)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자랑스런 마을로서 정부에서 이 마을을 문화역사 마을로 지정하였다.

이천칠년 시월삼일

글 향산(鄕山) 허백영(許百榮)


입산마을 입간판

의령 입산리 안희제 생가 . 의령 입산리 탐진안씨 종택

의령 입산리 안준상 고택.의령 입산리 안호상 고택

의령 입산리 안범준 고택. 의령 입산리 상로재,고산재 라고 안내 해 놓았다.

탐진안씨(耽津安氏)는

《만성보(萬姓譜)》와 1845년 탐진안씨 족보 을사보 서문에는 탐진 안씨의 시조가 안우(安祐)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안우(安祐, ? ~1362년)는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고, 전리판서(典理判書)·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奇轍)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해 의주(義州)·정주(靜州) 등지가 함락되자 서북면부원수(西北面副元帥)로서 적을 대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 고선주(古宣州)에 이르러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상원수(上元帥)가 되었고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博州)·영변(寧邊)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현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조 안원린(安元璘)은 고려 공민왕때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셋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내고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안원린이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문학 등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등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순흥 안씨의 분파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안씨족보(安氏族譜)를 보면 순흥(順興)죽산(竹山)광주(廣州)탐진(耽津)분파로 되어 있으며

탐진은 삼파(三派)에 속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사종(安士宗)의 아들 안지(安止)가 14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찬진하였으며, 공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고

중추원영사(中樞院領事)·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이밖에 중종 때 효행으로 이름난 안우(遇), 임진왜란 때 유곡(柳谷)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안기종(起宗), 임진왜란 때 어용(御容)과 실록(實錄)을 정읍(井邑) 내장산(內藏山)에 봉안한 안의(義)

고종 때 시문으로 명성을 날린 안찬(鑽) 등이 있다. [위키백과 참조]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白山 安熙濟 先生 生家) 안내 입간판

의령 부림면 입석 큰들 중앙 포장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좌측에 안내 입간판이 있다

임석마을은 아마도 탐진안씨의 집성촌으로 보였다

탐진 안씨(耽津 安氏)강진 안씨(康津 安氏)로도 불리우며 순흥안씨(順興 安氏)와 분파라고 하는데

아니다 라고 주장도 하고 있다

순흥 안씨(順興 安氏)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을 본관이며

탐진 안씨(耽津 安氏) 또는 강진 안씨(康津 安氏)는 전라남도 강진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白山 安熙濟 先生 生家)

생가 앞은 넓다란 주차장이 조성 되어 있으며 주차장에서 보면

대문은 본체 중앙이 아닌 우측 중간쯤에 만들어 져 있었다.

담장은 유년시절 흙담장 높이와 비슷하고 담장위에 기왓장으로

빗물에의한 흙담의 흙이 씻겨내리 가지 않도롣 되어이쑈는 예전 부잣집 담장이다


대문 지붕

대문형태는 목조로서 맞배지붕이며 주소는 임산로2길37이라고 최근 주소판이 붙어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것이 우물이며 대문옆에는 사랑채인줄 알았는데 화장실이였다.

안희제 선생은 1885년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 유래를 보면

입산(立山)마을의 원래 한자 지명은 설산(雪山, 설뫼)인데 쉬운 토박이말로는

「설미」라고 불렀고 큰 도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있는 마을이 경산(景山, 볕뫼)인데

역시 쉽게 부르면서 「별미」라고 해 왔다.

두 마을은 안씨와 이씨, 정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데 마을이름을 두고 어느쪽이 좋다거니 하면서 갈등을 빚어 왔다. 

설미는 눈 온뒤의 산이 아무리 보기좋다해도 햇볕이 나면 녹아 버리고 마는 것이니

경산이 좋은 이름이라는등 부질없는 실랑이를 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설뫼마을 사람들이 눈(雪)대신 꼿꼿이 서다(立)라는 글자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채

사랑채는 초가지붕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ㄴ 형태의 마루가 되어 있고

축담은 그렇게 높지 않고 디딤돌도 보여 유년시절 시골집과 흡사하다
안희제 선생은 1909년 윤세복 서상일 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듬해 한일 병한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1차 망명한 뒤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독립 운동을 위해서는 자금을 모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귀국한 후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실업가로서 독립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본채 좌측에 있는  편액 백산구저(白山舊邸)

백산구저(白山舊邸)는 백산선생의 옛집이란뜻이며

방문위에는 모두 똑 같은 크기의 시렁이 만들어져 있다

우리 유년기 시절 주택에서 보던 시렁은 주로 소쿠리에 식재료를 말려놓거나

음식을 상하지 않게 올려 두었는데 여기서의 시렁은 어떤은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궁금하다.

안희제 선생의 일대기를 보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해서 각지에 배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 해에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확대 개편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조달기관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해 다수의 애국청년학생들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이러한 장학생들 중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5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해 중앙일보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어 일본의 총독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1927년이시목(李時穆) 등과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1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 300여 호를 유치해 토지를 분배해주고

5년분할상환 조건으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발해농장 안에 발해학교를 설립해 농민들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대종교를 신봉해 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해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하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일거에 체포한 임오교변사건이 일어났을 때 투옥되었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혐의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목단강병원에서 순국하였다.


우물

우물은 사각형태이며 자연석을 사각으로 잘라 쌓아 만들고

내부는 원형흄관 형태인데 물은 사용치 않아 그런지 음용은 할수 없을듯 하다

안희재 선생 생가가 있는 입산마을은

약 450년전(명종9년) 임란직전(1,550년경) 터를 잡고 세거(世居)한 탐진(耽津)안씨 집성촌으로

연육세(連六世) 8효자(八孝子) 정려를 받은 효행의 가문으로 시작하여 임란공신이자 중시조이신

지헌(止軒) 안기종 의병장 이후 근세(近世) 조선말부터 해방이전에는 독립유공자 세분을 비롯하여

제헌의원 등을 배출하였고 초대 문교부장관도 나신 교목세가(喬木世家)이자 유서깊은 마을로

전통 한옥이 즐비한 부촌이자 명문 고촌이었고 또한 개화의 물결이 가장 먼저 들어온 개명마을이라고 알려져있다.


장독대와 맷돌 그리고 절구통

전통적인 장독대 모습이다 민속촌이나 오래된 고찰에가도 장독대 모습가 비슷하다

의령지역에는 애국지사와 부자들이 많이 나오는듯 하다

안희제 선생을 비롯한 의병 곽재우 장군등 근래의 성 이병철 회장등이 그렇다.

입산마을은  최초에 청도김(金)씨가 살았다고 하나

약 600년전 관향조(貫鄕祖)이신 탐진안씨 시조가 개성 장단에 사시다가

이성계 역성혁명(易性革命)때 창녕 영산으로 피난 하였으며

다시 서울에서 3대로 관직에 봉직하다가 1,500년초에 경산 안골(內谷)로 이주하셨고

600년초에 한 고승의 예언에 쫓아 길지로 알려진 입산으로 이주하여

10대로 종가(宗家) 천석지기 부자집안으로 대를 이어온 마을이다.


본채 뒷쪽모습

본채는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이다.

왼쪽에서부터 마루·방·대청·방·부엌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규모의 초가로 안채와 바짝 붙어 있으며

두 건물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으로 마루를 1칸씩 구성하고 있어 특이하다.

또한 다양한 기능을 가진 방이 필요함에도 별도의 건물을 두는 것이 아닌

한 건물 내에서 해결하는 조선시대 후기의 주택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백산고가(白山古家)편액

은초(隱樵) 정명수의 글씨 라고 한다

(隱樵 鄭命壽 1909~2001)라는 은초 선생은 추사파의 대가였던 성파 하동주 선생에게서

서예을 배워, 추사체를 이은 진주의 대표적 서예가로

진주 촉석루의 남장대 편액과, 해인사 해탈문의 주련(기둥에 건 글씨)을 남겼다.

안희제 선생의 생가는 조선후기 주택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2동으로서 안채는 정면4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며 사랑채는 정면4칸으로 초가로 되어 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21세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봄에 양정의숙(養正義塾) 경제과로 전학해 24세에 졸업하였다.

1907년 동래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에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창설하였다.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해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처를 제공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해서 각지에 배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안희제 선생은

1925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해 중앙일보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어 일본의 총독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1927년 이시목(李時穆) 등과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1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 300여 호를 유치해 토지를 분배해주고

5년분할상환 조건으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발해농장 안에 발해학교를 설립해 농민들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대종교를 신봉해 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해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하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일거에 체포한 임오교변사건이 일어났을 때 투옥되었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혐의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목단강병원에서 순국하였다.

대종교에서는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으로 추존하였고,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사랑채 굴뚝

사랑채 처마아래 나즈막하게 굴뚝이 마치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보통 굴뚝은 지붕위에까지 가는게 보통이며 낮즈막한 굴뚝은그으름을 방지하기 위해

건물가 조금 떨어져 있기 마련인데 사랑채 굴뚝은 안채 마당 앞에 나즈막히 있는게 특이했다.

안희재 선생께서 신봉한 대종교는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로서

단군의 상을 모신 천전(天殿)을 중심으로 하여 종단의 최고책임자인 총전교와

부전교가 상주하며 전체 교무행정을 총괄하는 대일각(大一閣)이 최고기관으로 존재하고 있고

교무행정의 사무기관인 교사(敎司), 의결기관인 의회, 교육기관인 도원(道院)으로 나누어진다.

교사기관으로는 총전교의 명령을 집행하는 총본사가 있고 총본사 밑에는 각 도에 도본사(道本司)가 있으며

그 밑에는 지사(支司), 또 그 밑에는 시교당(施敎堂)이 있다.

일제 때는 4대 본사와 외도본사(外道本司)를 설치, 운영하였으나 광복 후 남도본사만이 존속하게 되어

남한의 행정구역에 따라 도본사가 설치되었고, 지금은 전국에 22개의 시교당이 운영되고 있다.

도원은 삼일원(三一院)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수도원·선도원(宣道院)·종리원 등의 기구가 있어서

삼일원장은 각각 원주(院主) 한 명을 두어 소관사무를 통괄한다.

그리고 종무행정을 위해서 종무원을 따로 두고 그 아래에 전강실, 전범실, 전리실을 설치하여

사무회의를 통해 종무행정을 처리한다.

원로원은 대종교 발전에 공로가 많은 사람을 추대하여 총전교의 자문구실을 하도록 하는 곳이다.

의회기관은 교의회(敎議會)라고도 부르며 대종교의 최고의결기관이다.

교역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종리대학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교인들은 다섯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런 등급을 교질(敎秩)이라 한다.

교질은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정교(正敎)·사교(司敎)의 순으로 올라간다.

참교는 입교한 지 6개월 이상된 사람으로서 모범이 될만한 자 중에서 선발되며

지교는 참교된 지 1년 이상인 사람으로서 교리를 강술할 능력이 있는 자 중에서 선발된다.

상교는 지교가 된 지 2년 이상인 사람 중에서 선발되며, 정교는 상교가 된 지 5년 이상인 사람 중에서 선발되며

대형(大兄)이라는 존칭이 뒤따른다.사교는 정교가 된 지 5년 이상인 사람으로서

교단발전에 커다란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며 도형의 칭호가 뒤따른다.

사교 이상의 존칭으로 종사와 대종사가 있는데 종사는

성통공완(性通功完)한 사람에게 붙여지며 철형(嚞兄)의 칭호가 뒤따른다.

대종사는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에게만 쓰이는 칭호로 신형(神兄)이라는 존칭으로 높여 부른다.

교인들끼리는 서로 형제·자매로 부르며 성직자로서는 선도사(宣道師)·시교사(施敎師) 등이 있다.



사랑채 모습

ㄴ 형식의 마루 측면에는 디딤돌 되신에 답판(踏板)가 있어 특이해 보였다

저 구조물은 어린아이나 나이드신 어른들이 오르내리기 쉬운 발판역활이라고 하며

햇살 좋은 봄날 탯마루에 걸터 앉아 담소 나눌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또하나의 실용적인 갖춤이 있는데 다름아닌 포쇄 걸이였다.

긴 여름 장마가 끝나고 나면 사대부가에서는 서책을 꺼내어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습기를 없에

책에 좀벌레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데 이것이 바로 포쇄(曝曬)이다.

나무 다섯개의 만들어 져 있어 선인들의 지혜가 보인다.


사랑채는 안채 정면에 안채와 같이 동향으로 배치하여 대지가 좁지 않은데도 안채와 바짝 붙어 있다.

정면 4칸의 전후 툇간으로 구성된 3량 초가집으로 안채처럼 남측면에 마루를 두었다.


안채와 사랑채의 조화

안희제 선생의 생가는 조선후기 주택모습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주택 유형은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으나

부분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서 발전을 하였다.

상류주택은 물리적인 기능보다는 가정생활의 전통적인 개념이나 사회계급에 따른

인문적 배경이 주거건축 구성에 영향을 미쳐 풍수지리()와

양택(:산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을 지을 때의 원칙들을 음양오행과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개념이며

이에 대응되는 은 묘소를 가리킨다)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배치는 북쪽에 산을 등지고 남쪽이 넓게 터져 있으며 왼쪽으로부터 앞쪽을 강이 굽이치면서 흐르는 곳을 택하여

주거의 중요부분을 남향()과 동남향으로 배치하는 것을 가장 좋게 여겼다.

주거공간은 거주자의 신분과 성별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확실히 구획되어 사용된다.

첫째 대문 ·노비숙소 ·창고인 행랑채와 행랑마당, 둘째 주로 남자 주인의 거처로 쓰이는 사랑채와 사랑마당

그리고 여자들과 유아들의 점유공간인 안채와 안마당이 그것이다. 

 이 3개의 공간구획은 점차 강한 폐쇄성을 이루며 서로 연관되어 배치되었다.

구조는 일반적으로 석축기단() 위에 목구조로 세우며, 지붕은 주로 합각지붕을 이루고

행랑채와 일부 부속건물은 맞배지붕 또는 우진각지붕으로 이었다.

조선 전기부터 가사규제()가 계속되어 신분계급에 따른 주택 규모와 형식이 제한되었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해지고 궁전의 침전건축(殿)을 모방하거나 서민들도 상류주택을 모방하였다.

자연과 풍토에의 대응이 보다 긴요하였던 민가는 간략한 목구조와 초가로 이루어지는 형식이며

지역별 특성에 따라 각기 그 유형을 달리한다. 즉, 함경형()과 서북형(西)

중부형과 서울형, 그리고 남부형으로 구분되는 이 유형들은

주로 북부의 것이 밭 전자()형의 평면으로 정주간이 특색이며

중부의 것들은 ㄱ자형에 대청이 중심을 이루고, 남부의 것은 한일자()형에 마루와 툇마루로서

중 ·북부보다 개방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대체로 3∼5칸의 규모로서 더 큰 작업공간과 부속사들을 갖추고 있었다.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모습

안희제 선생의 생가가 있는 부림면 풍수지리를 보면

부림면 소재지에서 약 4km쯤 남쪽으로 떨어져 있고 유곡천이 경산, 구산, 난동 등의 사이를 두고

서남쪽에서 동북간으로 흐르는 역수(역류)의 특이한 지역으로

대충신 아니면 역적이 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을 뒷받침하듯 역사상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애국지사 안효제, 안창제, 안희제선생등 세분 항일 독립운동 유공자를 비롯하여

제헌의원 안준상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가 나신 곳으로

1,700년초에는 설산제(雪山齊)라는 고산서당(高山書堂)을 지어 많은 석학과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백산 안희제선생의 주선으로 1910년 사립 창남학교(創南學校)를 지금의 상로제(霜露齊)에 세워

경남에서 최초의 신학문 사립학교를 운영하기도 한 유서깊은 마을이다. 

입산마을 뒷산을 북쪽으로 좌청룡, 남쪽으로 우백호로 칭하며 좌청룡 끝부분 바위에

설산동문(雪山洞門)이라는 음각된 암각문 표식이 있고

우백호 끝부분 바위에 범눈깔(범눈알) 바위가 있어 우백호라 하였으며

동리 앞 마주보는 산이 기러기산으로 기러기 목 끝부분에 꾀꼬리 바위가 있어 경치를 더해주며

역류(역수)하는 유곡천의 하류부근에 장풍수구의 비보(裨補) 차원의 숲이

경지정리와 도로개설 등으로 없어진 것이 아쉬울 뿐이며 동리 뒷산 중턱에 백산 산소가 있고

고산 서당 부근에는 장군샘이라는 옥천(玉泉)이 2003년 매미 태풍의 사태로 덮혀버린 것을

2008년 문중에서 입산문화역사마을 조성시에 복구하였다.


백산 안희제 생가(白山 安熙濟 生家)부자의 삶을 실천한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 생가를 둘러보고

역사가 주는 의미를 가슴에 담아 본다.

안희제 선생은 1962년에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부산시는 안희제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4년 4월에 백산상회가 있던 거리를

백산 거리로 지정하였고, 1995년 백산 기념관을 만들어 유품과 관련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어 이렇게 선생의 역사를 둘러 볼수있었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의령군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민족문화대사전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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