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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장대산(晉州 將臺山). 대홍수(大洪水) 전설이 깃든 장대산을 걷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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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장대산(晉州 將臺山). 대홍수(大洪水) 전설이 깃든 장대산을 걷다

바다늑대FORCE 2020. 2. 16. 09:43


진주 장대산(晉州 將臺山)

 대홍수(大洪水) 전설이 깃든 장대산을 걷다


진주 장대산(晉州 將臺山)

   높이 : 204.6m

   위치 : 경남 진주시 초장동 과 집현면에 걸쳐있는 산


▲ 나의산행일 : 2020년02년15일 토요일. 날씨 : 맑음


▲ 나의산행코스 :

 장재성당→→→장대산들머리→→→체육공원→→→갈림길→→→장대산 정상

→→→갈림길→→→복지재→→→남인수 묘소→→→연꽃단지→→→장재성당

6.2km  2시간30분 소요


▲ 장대산 개요 :

장대산(將臺山)으로 불리는 잔대산(盞臺山)은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집현면 사무소를 중심으로 놓고 볼 때 남쪽으로 높게 솟은 산이다.

옛날에는 집현면 자체가 홍수로 해마다 수해를 겪어야만 했던 지역이어서

홍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천지가 개벽되어 사방천지가 다 물에 잠겼다.

중국의 하나라도 이때 홍수를 만나 어쩔 줄을 몰랐다.

이 소식을 들은 단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고

부루는 부왕의 명을 받고 중국 한족에게 치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삼한 땅도 홍수로 큰 난리를 치르게 되었다. 낮은 곳은 다 물에 잠기고 윗부분만 남게 되었다.

집현면의 장대산도 예외가 아니어서 낮은 산은 모두 물속에 잠겼고

장대산도 아랫부분은 모두 물에 잠기고 꼭대기가 되는 윗부분만 남았다.

사방 물바다 속에서 남은 윗부분의 모습이 제사 지낼 때 잔대만큼 남았다고 하여 ‘잔대산’이라 했다.

그 뒤 세월이 흐른 뒤에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산꼭대기에서 군사들이 있으면서 적정을 감시하였다고 하여

마치 군사 요충지의 지휘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하여 ‘장대산’으로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 장대산 등산지도



▲ 산행지 찾아가는길

  진주역→→→ 가호로→→→ 진산로→→→ 진산로 장재삼거리→→→ 장재성당

  9km  승용차 20분소요


→→→→→2020년 02월15일 토요일 대한민국 구석 구석을 향해 길을 나선다 .

진주에 살면서 장대산이 있다는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어쩌다 검색창에 장대산이 있어 인터넷창으로 보니 낮은산이지만 정상표지석도 있어

이렇게 산책삼아서 길을 나서본다

몇년전만 하여도 여기 지역을 장재실이라 했고 주로 시설농업이 주된 업(業)인곳이다

초전동과 장재동을 통합하여 초장동으로 지명 이름이  바꿔졌으며 초장동에는

진주예술고등학교와 경남자동차고등학교가 있다.


장재성당(長在聖堂)

장대산 들머리 지표가 되는 장재성당인데 처음에는 성당이 제법 큰건축물인줄 알았는데

주택처럼 보이는 작은 성당였다.

장재성당은 진주시 진산로357번길10 이며

장재성당은 천주교 마산교구 진주지구 소속의 성당으로

관할구역은 진주시 장재동과 집현면 신당리·죽산리·월평리·봉강리 전역이다.

주보성인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이다

장재성당은 1956년 진주시 옥봉동 본당에서 분리되었다.

장재성당의 초기 역사는 상당히 애매모호한데, 기록에 따라 1931년에 건립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대체로 설립 계기는 대구교구 시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서류가 대구교구에는 전무했다.

탐문을 거듭한 결과 1871년에 문산 신자가 이곳에 처음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1898년까지 신자가 꾸준히 증가하여 150명 정도 되자 비로소 초대신부가 부임하였다.

1900년 2대 신부로 정수길[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을 신축하고 대구교구 주교가 헌당식을 하였다.

1938년 5월에 본당으로 승격된 장재동 본당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10여 년 간 목자 없는 성당으로 있었다.

이 때 옥봉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던 이탈리아 선교단 소속의 주 콘스탄시오 형제가

60만 원을 들여 성당을 수리하고 옥봉성당과 장재성당을 왕래하며 미사를 봉헌하였다.

1970년 6월 20일부터 장재성당에 이탈리아 선교단의 방 알벨또 형제가 사목을 맡았으며

10여 년의 사목을 마치고 마산교구로 본당을 이양하였다.

2019년 현재 신정목우르바노 주임신부가 재직중 이라고 한다.


장대산 안내표지

장대산은 장재성당을 바라보는 쪽에서 좌측 있는 시멘트 포장길을 보면 안내표지판이 있다

초장동 시민들이 이곳을 이용하여 장대산 산책을 하는 주 코스이기 때문이다.

장재동은 원래 진주부(晋州부) 장재곡면( 長在谷面洞) 장재곡동(長在谷洞)

사죽면(沙竹面) 장흥동( 長在洞). 동물곡면(冬勿谷面) 하촌동(하촌동) 지역이다.

1914년 3월 1일에는 이들 각 일부를 통합하여 도동면(道洞面) 장재리(長在里)라 하였다.

1938년 7월 1일 에는 진주읍(晋州邑)으로 편입되고, 도동면(道洞面)은 해체되었다.

1949년 8월 15일에는 장재동(長在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7년 7월 1일 초전동(草田洞)과 장재동(長在洞)을 통합하여

현재 초장동(草長洞)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도 중간 장대산 들머리 목계단

임도를 따라 20m정도가면 좌측에 장대산으로 가는 목계단이 있으며

시멘트 포장도로를 쭉 따라가도 들머리가 나온다

계단 오르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임도를 따라 쭉 가면 들머리이다

임도에 들어서면 대밭이 있어 초록의 색이 눈을 시원하게 만든다.


장대산 들머리

마을 어르신들이 벌서 장대산 한바퀴 하고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좌측에는 에어건도 있어 의복이나 신발에 뭍은 먼지를 터는곳도 있었다

들머리는 마당처름 넓어서 여러사람들이 편하게 쉴수도 있고

편을 갈라서 배드민턴도 할수 있겠다.

장대산에는 장단산성(將檀山城)터도 있다고 하며

장대동에 위치한 이 성은 장재산의 상봉에 있으며 장재동과

집현면 봉강리를 경계로 하는 둘레 500m의 석축성이라고 한다.

축성 시기는 알수 없으나 산정(山頂)에 큰 석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지금은 축석은 흩어지고 묘지로 약간 변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산성보다는 용치(龍峙)산 봉화 대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망경산 봉수대와 집현산 봉수대를 연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대산정상2.5km

장대산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2.5km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산책코스로 딱 알맞는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어르신들이 산책하는것을 많이 볼수 있었다.

장대동에는 붕덤이산 전설이 있는데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와서 세상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버렸다.

낮은 곳의 모든 것은 다 떠내려가 버리고 심지어는 작은 산도 물에 이기지 못해 떠내려갔다.

초전 들판에도 작은 산 하나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동네 높은 곳에 오두막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때 마침 여자아이 하나가 솥에 불을 지피다가

부지깽이를 들고 부뚜막을 두드리며 산이 떠내려간다고 고함을 지르니깐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 산이 멈춰버렸다 한다.

초장동과 집현면의 경계에 있는 『붕덤이산』이 바로 그 산 이라고 하며

그 산이 그냥 떠내려갔더라면 초전 들판과 집현면 신당, 대곡면 단목 들판이 합쳐

넓은 들판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장대산 체육공원

들머리에서 50m지점에 위치하며 시설에 운동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산행중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어르신들이였다.

장대산이 있는 진주(晋州)는

가야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2년(983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 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어 시장(市長)을 두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책하기 좋은 산길

산책로 곳곳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 어르신들이 걷다가 쉬기 편하게 만들어 져 있다.

소나무숲으로 이루어진 산이라 그런지 재선충 방재한 곳이 여기저기에 있다

소나무재선충 병은 나무가 단기간에 붉게 시들어 말라죽는 병으로서

솔수염하늘소, 북방수염하늘소 성충이 매개충이 되며

건강한 나무의 수피를 갉아먹을 때, 소나무재선충이 나무로 이동하면서 확산된다.

소나무, 해송, 잣나무, 섬잣나무 등이 주로 피해를 입는다.

재선충에 감염된 나무는 송진 분비가 멈춰지며

수분과 양분의 흐름에 문제가 생겨 말라 죽는다.


장대산의 빼곡한 솔숲

산책로를 제외한 장대산은 이렇게 소나무로 빼곡하다

솔나무 향기가 피부와 가슴 깊숙히 까지 파고드는듯 하다.

산림청이 한국갤럽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나무를 물어본 결과

절반에 가까운 46퍼센트가 ‘소나무’라고 답했다.

뒤이어 2위를 차지한 은행나무는 8퍼센트에 그쳤다.
우리나라는 어디에서나 고개를 들어 산과 마주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나무가 소나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태어나면서부터 소나무와의 인연은 시작될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소나무로 지어진 집의 안방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소나무 장작으로 데워진 온돌에서 산모는 몸조리를 했다.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금줄에는 솔가지가 끼워진다.

아이가 자라면서 뒷동산의 솔숲은 놀이터가 되고 땔감을 해오는 일터가 되기도 한다.

명절이면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茶食)을 먹고

양반가라면 십장생도가 그려진 병풍을 치고 꿈나라로 들어간다.
가구를 비롯한 여러 생활필수품에도 소나무는 빠지지 않았다.

선비로 행세를 하려면 송연묵으로 간 먹물을 붓에 묻혀 일필휘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세상살이가 끝나면 소나무로 만든 관 속에 들어가 땅속에 묻힌다.

그러고도 소나무와 인연은 끝나지 않는다.

도래솔로 주위를 둘러치고는 다시 영겁의 시간을 소나무와 함께 한다.


솔나무 향기에 젖다

장대산을 오르면서 솔나무 향기에 험뻑 젖어본다

장대산은 진주 초장동과 집현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진주시 집현면은 경상남도 진주시 중북부에 위치한 면(面)으로서

집현면(集賢面)지역 내에 있는 집현산(集賢山)이 있는데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집현산(集賢山)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

진양지(晋陽誌)의 산천(山川)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전기까지는 진주목(晋州牧) 북면(北面)에 속해 동물곡리(冬勿谷里)

모태곡리(毛台谷里), 정곡리(井谷里), 신당리(新塘里), 사죽리(沙竹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정곡리가 모태곡리와 합해지면서 동물곡리, 모태곡리, 신당리, 사죽리라 하였고

고종 1년(1864) 이후에는 집현면, 동물곡면, 모태곡면, 사죽면으로 불렸다.

1914년 3월의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물곡면(冬勿谷面)

모태곡면(毛台谷面), 집현면(集賢面), 사죽면(沙竹面), 장재곡면(長在谷面)

장재곡동(長在谷洞) 일부 등을 통폐합하여 집현면(集賢面)으로 하였다.


장대산 삼거리

장대산 정상 1.0km 집현면 장흥마을0.4km 라고 안내되어 있다.

집현면에는 말(馬) 무덤과 선비라는 전설이 있는데 전설을 보면

집현면 사촌리 기동마을 앞 도로 맞은 편에 보면 탕건모양을 한 돌무덤이 있다.

이 돌무덤은 옛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의 말무덤이라고 전해온다.

이 말무덤 위에는 서 너 개의 돌이 있는데

그 모양이 꼭 선비들이 갓 안에 쓰던 탕건과 같이 생겨 탕건 말 무덤이라고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말이 죽었다고 해서 말 무덤을 만든 것도 특이하지만

말 무덤 위에 있는 돌이 탕건과 비슷해, 선비의 목숨을 구해주었거나

과거에 급제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줘서 말 무덤을 만들어 준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능선에 있는 참호(塹壕)

참호쪽에서 아래를 내다보면 집현들판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숲으로 인하여 시야는 좋지 않다

내가 보기엔 박격포 진지 같기도 하다.

참호(塹壕)란 야전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시설로, 보통 땅을 파고서 만든 것을 지칭한다.

참호(塹壕)는참호를 설치함으로써 병사들은 적의 총포격에 대한 노출 면적을 줄이1차세계대전 노잼전며

총기의 거치를 쉽게 하여 사격하기 용이하게 하며, 다른 참호나 후방 또는 통신 시설에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유용성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호를 이용한 전투가 급증하여 참호전을 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1인에서 3인 정도 들어갈수 있도록 땅을 파고, 파낸 흙으로 주위를 보호하는데 사용한다.

땅을 파낸 경계를 구불구불하고 그 깊이를 깊게 할수록 방어력이 증대된다.

이때 지표면의 흙과 파낸 흙은 색이 다르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관측될 수 있으므로 위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후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나무나 흙을 채운 쌀포대  드럼통

타이어 등을 참호 벽면을 따라 쌓아서 보강할 수 있으며

시간과 자원이 충분할 경우 콘크리트나 벽돌, 철판으로 보강하여 영구진지형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돌이나 바위를 여러 개 쌓아서 보강하는 경우도 있으나

포탄이 참호 인근에 떨어질 경우 바위가 흐트러지고 파편이 튀어 피해를 오히려 키울 수 있기에

포탄 위협이 있는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덮개를 덮어 유개호(有蓋壕)를 만듦으로서

기존의 무개호(無蓋壕)보다 참호 외부의 파편에 대한 안전성을 증대할 수도 있다.


마삭줄

장대산 산책로 주변 솔나무 숲아래는 이렇게 마삭줄이 즐비하다

옛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묶을 때 쓰이는 밧줄은 필수품이었다.

농산물을 수확하여 옮길 때는 물론이고

산에서 나무 한 짐을 등에 지고 내려오려 해도 튼튼한 줄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출세를 하고 큰일을 하려면 ‘줄’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삭줄이라 불리는 덩굴나무가 있는데

마삭(麻索)이란 원래 삼으로 꼰 밧줄을 뜻하는 삼밧줄의 한자식 말이다.

마삭줄은 삼밧줄 같은 줄이 있는 덩굴나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마삭줄의 줄은 간단한 밧줄로 쓸 수는 있지만, 삼과 비교할 만큼 튼튼한 덩굴은 아니다.

다만 남부지방의 숲속에서 흔히 자라는 탓에 쉽게 만날 수 있는 덩굴나무로서

삼밧줄처럼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마삭줄은 절골초(折骨草)낙석(絡石), 운영(云英) 라고도 부르며

줄기에서 뿌리가 내려 다른 물체에 잘 달라붙어 올라간다.

줄기와 가지는 적갈색이 돌고 털이 있다.

줄기에서 나오는 유즙에는 디기탈리스 종류와 비슷한 유독 성분이 있다.

유사종으로 줄기와 잎에 털이 없는 것을 민마삭줄, 전체가 대형인 것을 백화등이라 한다.

꽃은 향기가 매우 좋다. 관상용·약용으로 이용된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여 사용하며, 술을 담가서도 쓴다.


장대산 목계단

장대산 장쪽 골을 연결하는 목계단인데 제법 가파르다

목계단만 오르면 장대산 정상이다

여기 골짜기 우측이 모두 집현면에 속한다

집현면에는 집용디미와 빈대 전설이 있는데 전설을 보면

집현면 정수리(亭水里) 검정골 안쪽에 있는 높은 산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용디미(덤)라고 부른다.

옛날에 용(龍)이 승천(昇天)하다가 떨어져서

산의 정상(頂上)부분이 크게 둘로 나누어져 용디미라고 부르는 이곳에

옛날에는 절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용디미 어딘가에 큰 사찰(寺刹)이 있었는데

이 사찰이 들어선 곳은 그야말로 명당(明堂)자리인지라

한때 많은 풍수가(風水家)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자, 사찰 주변으로 묘(墓)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어느 누군가가 절에 빈대를 많이 잡아넣었다.

이후 이 절에는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이 망하고

응석사로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주 장대산(晉州 將臺山) 산정(山頂)204.6m

장대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은 시골 마당처럼  생겼다

정말 큰 홍수가 와서 꼭대기 부분만 남을만 하다

집현산의 대표적인 산(山)중의 하나인 장대산도 홍수와 관련해 이름이 붙여 졌는데

잔대산은 집현면 사무소를 중심으로 볼 때 남쪽으로 높게 솟아 있는 산이다.

잔대산은 옛날 천지개벽이 되어 사방천지가 다 물에 잠기고 작은 산들도 그 모습을 감추었는데

잔대산 만은 꼭대기까지 다 잠기지 않고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잔대'만큼 남았다 해서 '잔대산'이라 했다고 한다.

집현면 사촌(沙村)마을에는 산 정상에 구시바위가 있다.

마을주민에 의하면 천지개벽 때 마을 전체가 물바다였는데

이 바위만큼은 물에 잠기지 않고 소(牛)의 여물통만큼 남았다 해서 구시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진주 장대산(晉州 將臺山) 산정(山頂)204.6m

장대산은 또 다른 전설이 있는데

옛날 나라에 불행한 일이 닥치면 장대산이 울거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외침(外侵), 내란(內亂), 국상(國喪), 대흉작(大凶作) 등

나라에 불길한 징조가 보일 때면 장대산이 떨면서 "우릉 우릉"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한다.

또한, 장대산의 신령(神靈)이 여신으로 둔갑하여 밤새 긴 치마꼬리를 날리면서 골짝을 누비다가

봉황골의 첫 닭이 울면 난무(亂舞)하던 여신의 흔적이 흔적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봉황골과 장대산 사이의 골짝을 여신의 난무와 연결지어 '첫닭골'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처럼 장대산에 얽힌 이야기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지명유래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덕곡마을에서 장대산을 눈앞에 두고 봉황골로 넘어가는 소릿길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덮고개라 부른다. 옛날, 이 고개에는 칠송지(七松枝)라고 하는 큰 소나무가 서 있었는데

사시사철 그 소나무 일곱 가지가 고개를 덮고 있다 해서 덮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덮고개 오른쪽으로 좁은 골짜기를 부무골(浮舞谷)이라 하는데

이 부무골 역시 장대산의 여신이 난무(亂舞)할때 그 춤바람이 이 골짝까지 스쳐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대산의 정기(精氣)를 이어받아 이루어진 마을이 봉황골이다.

그래선지 봉황골은 예부터 유서깊은 곳으로 인식돼 왔다.

'봉황골(鳳凰谷) 뒷산에 봉(鳳)이 내렸다' 라는 신비스러운 말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곳이 바로 봉황골이다.

우리 조상은 무덤(墳墓)이나 고분(古墳)의 자리를 정할 때

그 주변의 지리적 환경조건을 고려하고 자리를 쓰는데

봉황골 뒷산에는 조선 시대 것으로 추측되는 고분이 소재하고 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장대산의 지맥(地脈)이 봉황골 뒷산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했기 때문에

이곳에 고분을 썼을 것이라는 예상도 제기되고 있다.

몇 년 전 봉황골 뒷산에 아파트를 세울 때 굴착기로 고분을 파헤쳐 보았더니

그 속에서 많은 토기(土器)가 출토되었다.

전문가들이 발표한 바로는 이 토기들은 조선 후기의 토기로

사료적인 가치는 적은 편이라는 결론을 끌어냈으나

지금은 애석하게도 그 고분은 없어지고 광(鑛)터라는 이름만 남아서 전해올 뿐이다.

지명유래뿐 아니라 장대산은 봉강(鳳降)지역의 각종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조선 시대 신당서원 지족당의 증손인

봉강선생(鳳崗先生)이 봉황골에서 한평생 살았다는 기록이 임천조씨(林川趙氏) 족보에 실려 있으며

일제 강점기 진주에서 만석꾼으로 이름난 정양선이 봉황골에 재실을 짓고 봉강재(鳳崗齋)라 하였다.

이 같은 사실들을 볼 때 봉황골을 기반으로 해서

장대산의 정기를 이어받고자 했던 풍수 지리적인 관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게 주민의 의견이다.

장대산은 그 능선이 북쪽으로 길게 늘어져서 봉황골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봉황골에서 장대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을 능선이 길다는 뜻에서 진등재라고 부른다.


진주 장대산(晉州 將臺山) 산정(山頂)204.6m

정상표지석 뒷면에는 최백수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아마도 표지석을 기증하고 세운분 같다

장대ㅔ산 정상에서 보면 숲으로 인하여 그다지 시야는 나오지 않지만 집현면은 보인다

정상에서 직선으로 가면 집현면 봉강리로 연결 된다

봉강리(鳳降里)는 조선조 전기 진주목방리(晋州牧坊里)에는 정곡리(井谷里) 봉강동(鳳岡洞)에 속해 있었다.

광무 10년(1906)에는 집현동면(集賢洞面) 봉강촌(鳳降村)에 속했다가

1914년 진주군 집현면 봉평동(鳳坪洞)·덕동(德洞)·원동(院洞)

모태곡면(毛台谷面) 혈암동(穴岩洞)일부가 봉강리가 되었다.

봉강리에는 아랫골, 양달, 음달, 덕곡, 배실, 원골, 박들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집현면 시설하우스 단지와 집현현대아파트 조망

정상에서 집현 봉강 쪽으로 하산해서 삼거리 쪽에서 문수봉(남인수 추모길)쪽으로 가면

드무실 소류지가 나온다

드무실이라는 말은 하촌동을 총칭하는 말이다.

원래 이 골짜기의 동네는 물이 아주 풍부해서 가뭄을 모르고 지낼 정도였었다고 하는데

언제나 물을 담아 놓는 드므(독) 같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남인수 추모길로 가면 남인수 묘가 나오는데

가수 남인수는 본명 강문수로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다.
부친 강영태 모친 장하방 사이에 태어난 남인수는 ‘가요황제’로 불리다
1962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사망 후 진주 장재동 산 49번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남인수 장남 강대우, 차남 강대익이 미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묘를 관리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가요황제 남인수전승보전회’에서 2004년부터 묘 단장을 하는 등 직접 관리해 왔다.
그런 다음 보전회 회원들은 남인수 타계 50주년을 맞아 2012년 6월 23일 묘소를
진주시 초장동 하촌리에 있는 진주 姜씨 문중 선산으로 이장했다.
가요황제 남인수(강문수)가 묻힌 진주 姜씨 문중 선산은 진주시 하촌로 96번길
하촌 마을 뒤편에 있다. 강씨 문중 선산이 있는 하촌 마을은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진주시 초전동으로 통하는 고개인 말티고개를 넘어 진주화장장 3거리에서 좌회전 한 다음
처음 나오는 4거리에서 좌회전 해 100m 정도 직진하면 나온다.
선산의 묘역은 마을 안 골목길로 접어들어 30m 가량 올라가면 대숲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서 70m 쯤 올라가면 바로 보인다.
역의 초입에 진주 강씨 선산임을 표시하는 자연묘지 비석이 있고 그 바로 옆에 가요황제 남인수 묘소가 있다.


장대산 들머리에 있는 에어 먼지털이

산행종료는 먼지터는것으로 종료한다 원래 산행전에 의복이나 신발에 뭍은 먼지를 터는것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외지 산행자들은 의복에 뭍은 풀씨들이 그 지역에 생태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해서 그렇다

하촌쪽으로 하산하면 초장연꽃농원이 나온다

여기서 장재성당으로 가면 장대산 산행이 마무리되는 코스다


이렇게 해서 진주 초장동 옛이름 장재실에 있는 장대산 산행을 마무리 해본다

작은 산이지만 그속에 있는 전설과 이야기들이 많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근교산&저너머(국제신문), 명산플러스(경남일보),진주시,집현면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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