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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장군 생가(郭再祐將軍 生家).홍의장군(紅衣大將軍) 호국정신을 가슴에 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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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장군 생가(郭再祐將軍 生家).홍의장군(紅衣大將軍) 호국정신을 가슴에 담다

바다늑대FORCE 2020. 2. 17. 17:58

곽재우 장군 생가(郭再祐將軍 生家)

 홍의장군(紅衣大將軍) 호국정신을 가슴에 담다


곽재우 장군 생가(郭再祐將軍 生家)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2동길 33 


▣ 여행일 : 2020년02월17일 월요일

     날씨 : 맑음


곽재우 장군 생가(郭再祐將軍 生家) 개요 :

곽재우 장군 생가 터에는 근년 조선시대 초기 건축양식으로 안채 등

7동의 건물과 부대시설을 갖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별당, 대곡간채, 곡간채, 대문간채와 중문간채, 화장실, 우물

그리고 장독대 등이 있다. 생가 부근에 임진왜란 당시 큰

북을 매달아 의병을 불러 모아 훈련시켰던 느티나무 현고수가 자라고 있다.

※곽재우 장군

 망우당(忘憂堂), 홍의장군(紅衣將軍)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여,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운 의병장으로서

본관은 현풍,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으로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 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곽재우 장군 생가 평면도


 곽재우 장군 생가 찾아가는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부산방향 →→→군북나들목→→→의합대로 적포방향→→→세간2길

망우당곽재우 생가 주차장

53km  승용차45분 소요.


□□□□→→대한민국 구석구석 여행 시작해보자

오늘은 의령군이다 의령군은 경상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으로서

땅이 기름지고 거주 환경이 양호해 청동기시대부터 상당한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와 전통이 있고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 뿐만 아니라 나라사랑 호국정신이 깃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은 날씨가 맑지만 바람이 불고 추웠다

인근 거창군 함양군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 졌다고 하고

거제도 통영시는 강풍이 분다고 하여 날씨가 한겨울 날씨보다 더 추웠다.



의령  세간리 현고수(宜寧 世干里 懸鼓樹)느티나무

곽재우 장군께서 이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 시켰던 장소라고 한다

세간리 현고수 느티나무는

2008년 3월 12일에 천연기념물 제493호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450년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높이는 20m, 뿌리 근처의 줄기둘레는 8.4m이다. 수관 폭은 동서 방향이 16m, 남북 방향이 15m이다.

나무는 뿌리둘레 주위보다도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오히려 크게 보일 정도로 줄기의 하부가 울퉁불퉁하게 굵어져 있으며

지상 약 2m 높이 이상에서는 갑자기 가늘어진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나무는 세간리 마을 입구의 길가에 위치하지만 나무 주위를 넓은 공지로 조성하였기 때문에 생장 환경이 좋은 편이다.

줄기는 내부가 썩은 것을 외과처리 한 듯 큰 충전 부위가 있고, 약 4~5m 높이에서 큰 줄기 하나가 거의 수평으로 생장하였다.

이 가지가 크게 수관을 형성했기 때문에 이쪽 가지 곳곳에 지주를 받쳐 놓았다.

나무 주위에 사각형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완자형 철제보호책을 설치해 놓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인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당시 41세의 유생이던 곽재우(郭再祐)가 4월 22일에 이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세간리 마을 입구에 위치한 노거수로서 나무 모양이 전체적으로 거의 ‘ㄱ’자형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나무만 보고도 이 나무가 ‘북’을 걸었던 나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북을 매달았던 나무’라는 뜻으로 현고수(懸鼓樹)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해마다 열리는 의령 홍의장군축제 행사를 위한 성화가 이곳에서 채화되고 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타이완,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 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가장 뛰어난 기능을 했던 것이 느티나무였다.


망우당 곽재우장군 생가 안내판

주변은 의병활동 체험장도 만들어 놓았고 주차장도 넓어 관광버스 많이 주차할수 있는 공간이다

임진왜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장군

곽재우(郭再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한가로이 시를 읊고 술과 낚시로 세월을 보내던 시골 선비였다.

학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그 인연으로 조식의 외손녀와 혼인했다.

1585년(선조 18)에는 34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응시해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글의 내용이 선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곽재우는 그때 벼슬에 대한 뜻을 접었다.

그런 그가 칼을 들고 세상에 나서게 된 것은 임진년에 수십만 일본 대군이 조선 땅을 유린하며 침략해 왔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무인 출신은 아니었지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의병활동 체험장 에 있는 곽재우 장군 동상

체험장은 넓다랗게 잔듸로 잘 가꾸어져 있고 그네도 보이고 늘띄기도 보이고 승마사진촬영장도 꾸며 놓았다

정각에는 전통북도 걸려 있어 의병소집 북도 쳐 볼수 있을듯하며 인근에는 관광안내소 건물까지 있었다

곽재우 장군은 1552년(명종 7)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셋째 아들이다.

평생 은거하며 살려고 했던 곽재우에게 전쟁 소식이 전해진 것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포를 점령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곽재우가 살고 있던 의령은 부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또한 한양으로 북상하거나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전쟁의 화가 크게 미치는 곳이었다.

그런데 관군(官軍)이 일본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일본군의 점령지가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곽재우는 관군을 믿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 사재를 털어 의병 모으기에 나섰다.

곽재우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설득했다.

"적병이 이미 박두했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는 장차 적병의 포로가 될 것이다.

우리 동네에 나이 젊어 싸울 수 있는 자가 수백 명은 될 것이니

만약 마음을 같이 해 정암나루(鼎岩津)에 의거해 지킨다면 우리 고장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

처음에 곽재우를 따라 모인 병사들은 십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곽재우가 용력 있는 자들을 수소문해 모았다.

리하여 심대승(沈大升) 등 장사 50여 명이 모여 부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자 전쟁 초기 흩어졌던 패잔병들도 합세해 제법 세를 이루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모인 의병을 이끌고 곽재우는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일본과의 결전에 나섰다.


세간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2호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은행나무 화석이라 할 정도의 큰 은행나무가 홍의장군 생가에 인근에 자리 하고 있엇다

아마도 가을날 은행열매가 서너포대는 나올듯 하다.

안내글을 보면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21m 가슴높이 둘레 10.3m로서 밑둥에서

2m부터 가지가 뻗어 있다.

바로 옆의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

특히 남쪽가지에서 자란 두개의 짧은 가지[돌기]가 여인의 유방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 들여 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곽재우 장군 생가 솟을대문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시 유격전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곽재우는 의령을 중심으로 거름강(岐江) 등에서 지형과 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을 주로 펼쳤다.

의병들은 정예부대인 일본군에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훈련이 부족했고 무기도 허술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치고 빠지는 유격전이 전술적으로 유리했다.

싸움을 할 때면 곽재우는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 백마를 탄 채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의병들을 진두지휘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본명보다도 '홍의장군'으로 더 잘 알려지기도 했다.

곽재우의 의병부대가 거름강 싸움 등 소규모 전투에 이어서 빛나는 승리를 거머쥔 것은 정암진(鼎岩津)전투였다.

1592년(선조 25) 6월, 이순신의 해전 승리로 전라도로 가는 바닷길이 막혔다.

그러자 일본군들이 육로를 이용해 전라도로 진군하기 위해 함안을 거쳐 의령을 공격해 왔다.

정암진의 지형을 잘 알고 있던 곽재우는 이를 이용해 강을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고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을 막았다. 이후에도 거름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낙동강을 이용하는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과 창녕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곽재우가 싸움을 하는 모습을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재우는 적병의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앞으로 달려들었다.

재우는 싸울 때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입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을 갖추고

스스로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이라 일컬으며 말을 달려 적진을 스쳐 지나가곤 했는데

숨었다 나타났다 종적이 없어 적이 그 단서를 잡을 수 없게 한 뒤

말을 돌려 돌아와서 북을 치며 천천히 행진하니 적은 그 병력의 많고 적은 것을 알지 못해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조차 못했으며, 잇달아 척후(斥候)를 두었으므로 적이 백 리 밖에 이르면

우리 진중에서 먼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대처하기에 편하고 수고스럽지 않았다.

또 사람을 시켜 적이 바라볼 수 있는 산 위에서 다섯 가지(枝)로 된 횃불을 들고

밤새도록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게 하니, 천만 명이나 있는 것 같았으므로 적의 무리가 바라보고 곧 도망쳤으며

정예한 군사를 뽑아 요해처에 숨겨 두었다가 적이 이르기만 하면 문득 쏴 죽이니

적이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언덕에 올라오지 못했다.

- 《연려실기술》 권 16, 선조조 고사본말 -


사랑채

주택에서 가장 앞쪽에 자리하며 바깔주인이 주로 거처하는 방이 있는 집채 라고 안내 해 놓았다

ㄴ 형식의 팔작지붕이며 건물 중앙부에 대청 마루가 있다

생가는 조선중기 사대부의 사저로서 전형적인 구조를 본떠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가의 집으로 2005년 복원하였다.

4월이 되면 경남 의령에는 임진왜란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17장령과 수많은 의병을 추모하기 위해 의병제전이 개최된다.

사대부(士大夫)란

중국 고대의 봉건제도에서는 그 신분층이 천자·제후·대부·사·서인 등 5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군주를 제외하면 대부와 사가 서민과 구분되는 지배계층이었다.

이러한 사대부계층은 고대 유교에 불교·도교의 형이상학을 가미한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았다.

사대부계층의 성리학은 원의 통치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고려 말기에 혁명파와 온건개혁파로 양분되었던 사대부계층은 조선이 개국한 뒤 양반관료체제를 구성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사림파로 갈라지기도 했다.

특히 사림파는 성리학 본래의 이념에 따라 중소지주층의 자율성이 최대로 보장되는

정치·경제·사회 구조의 확립을 추구했다.

이들은 중앙정계뿐만 아니라 지방사회까지도 장악하여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큰문간채

큰문간은 사대부층과 향반층의 주택에는 모두 솟을대문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대문이 달려있고 헛간과 집사들이 거처하는 방을 두었다.

의병 곽재우 장군은 정암진 전투(鼎巖津戰鬪)는 유명한데

1592년 음력 5월24일 최초로 의병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로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고 곽재우 장군(郭再祐)의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규합되었다.

의령은 진주로 가는 길목에 있고 북으로는 합천  동으로는 함안 남으로는 고성이 위치한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후 9일째 되던 4월22일 현고수에 북을 매달고 북을 치면서 의병을 모았다

하지만 그를 따라 나섰던 사람은 자신의 노비10명이었다 한다

4월22일은 모리모토가 이끄는 왜군 3만명이 김해 창원을 점령하고

현풍으로 들어오던 날이였다.

그후 이불을 찢어서 깃발을 만들고 붉은 관복을 입은 다음 가산을 정리하여 곳간을 열고

사람들에게 곡식을 마음대로 퍼가게 하였다.

곽재우 장군은 평소 눈여겨본 지략과 담력을 가진 젊은이 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설득한 결과 가까스로 수십명을 모았다고 한다.

곽재우 장군은 5월4일 왜군의 척후선 3척이 남강을 거슬러 온다는 보고를 받고

선봉장 심대승을 비롯한 날래고 힘좀쓰는 부하10명을 인솔하여 거름강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강가 갈대밭에 궁수를 매복시키고 강속에 통나무와 밧줄등의 장애물을 설치하고

기다리다가 왜병들의 선박이 걸려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틈을 타 공격명령을 내렸다

의병들의 공격에 힘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모두 죽고 침몰하였다.

거름강은 현재 창녕군 남지읍과 함안군 칠서면 의령군 지정면이 위치한곳이다

이곳은 6.25전쟁때 낙동강 돌출부 전투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큰곳간

곡식 물건 농자재 등을 저장하는곳 이러고 안내판 안내글이며

건물 구조는 맞배지붕으로 정면4칸 형식으로 만들어 져 있다.

곳간 혹은 곡간(穀間)은 가을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간수하기 위해 지은 창고를 말한다.

규모가 크거나, 농기구 등의 각종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의 경우에는 광이라고 한다.

곳간에는 벼 외에도 살림살이나 여러 물건을 보관하였다.

곳간은 추수 후에 거두어들인 벼를 저장하므로 규모를 크게 짓고, 습기를 조절할 수 있으며,

쥐를 비롯한 해로운 짐승들이 접근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옛날에는 현물이 가치가 있어서 가지고 있는 물건에 따라 경제력이 평가되었고 부잣집에는 그 만큼 곳간이 많았다.

한옥에서 곳간을 따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행랑채가 곳간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공간이 부족할 경우에는

안행랑, 중행랑, 바깥행랑 등으로 행랑채가 늘어나곤 했다.




안채

우리나라 주택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하며 주로 아녀자들이 기거 하는 생활공간이 있는 집채.


1592년 6월 함안을 점령한 왜군 2만명은 의령을 공격하기 위해  정암진에 도착해서

가을 건너기 위한 작전을 시도 했다 당시 이순신 장군께서 바다를 가로막는 바람에

해안으로 상륙하는것이 어려워 지자 육로를 통해 전라도를 침범할 계획을 세운것이다

왜군은 정암진 전투에서 2만에 가까운 왜군들이 전멸하다시피 참패 하였다.


작은곳간

부녀자들이 가정생활에 사용하는 작은 가사용 자재도구 음식물등을 보관하는 장소다.

주택구조를 보면 대부호 집안인것은 분명하며

곽재우 장군께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분이다 라고 생각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프랑스어: 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한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 말은 사회지도층들이 국민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문제를 비판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장독대

근간에 복원해서 그런지 고풍스런 이미지와 미술적 이미지에도 잘 어울린듯 하다

그 옆에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물통이 더 멋스러 보였다.


의령군의 유곡면 세간마을 유래를 보면

유곡면 소재지에서는 동북쪽에 위치해 있고 부림면 경산과 입산마을 그리고 지정면 일부지역과 접해 있는 마을이다.

옛 문헌에도 정곡(定谷, 정실)의 세간동(世干洞)이라 했는데 보통 부를 때는「니차이」라거나「미차이」라고 한다.

이 지명에 대한 어원이나 유래는 알 수 없다. 옛날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도랑방천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낮은 지대라서 뻘구디기(진흙벌이 쌓여 있는 물렁한 땅을 뜻하는 토박이말로

이토(泥土)말함)였다해서 그런 지명을 썼다는 얘기도 있었다.

니차이, 미차이란 지명은 잊혀졌고 남아 쓰이는 경우로는 택호에 니차이띠기, 니차이어른이란 말 정도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큰 동네라 하리골과 본동의 동녘을 묶어서 일구(一區)로 하고 현고수 있는 곳에서

서쪽 일부와 길 건너 마을인 야산과 고송골을 아울러 이구(二區)로 획정했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안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민중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곽재우(郭再祐)장군의 생가가 있고 북을 매달고 크게 울리면서 의병을 모으고 조련을 시켰다는

역사적인 현장인데 지금은 망우당 생가는 없고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만 남아 있는데 현고수(懸鼓樹)라 이름 붙였다.

1999년 관심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망우당생가복원사업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큰 도랑물은 서쪽으로 흘러와

동북간 방향으로 역류(逆流)를 하는 유곡천은 강을 지나 낙동강 큰물에 이른다. 

이 동네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동네인 화류골(하리골)동네 안골의 나직한 산에 참꽃(진달래)이 많아서

꽃밭등이라 하고 산등성이 너머에 또다른 산봉우리가 살며시 솟아 있는데

그 형상이 어머니 등에 없힌 아기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 같아서 양택지로서는 썩 좋다는 것이다.

또한 큰도랑 옆으로는 버들숲이 썩 좋아서 꽃(참꽃)과 버들을 뜻하는 지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두마을에는 여러 가지 유적과 기념물이 많은데 망우당생가터, 현고수와 은행나무도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망우당곽재우장군 유허비와 정암(定菴) 곽선생유허비(郭先生遺墟碑), 경충당(景忠書堂)

용연정(龍(淵亭)을 비롯하여 전의 이(李)씨 문중의 사미정(四美亭), 과천정(過川亭), 우모재(寓慕齋)

행남재(杏南齋) 등 유서깊은 정재가 많이 있다. 

일찍이 분성 배(裵)씨와 진양 강(姜)씨가 들어왔고 뒤이어서 여러성바지가 들어왔다는데

지금은 전의 이씨가 30가구로 가장 많고 조(趙)씨가 3가구, 임(林)씨, 정(鄭)씨, 박(朴)씨가

한두집씩으로 모두 52가구가 남아 있다.


우물

우물井자 모양으로 대리석으로 복원 해놓았는데 내부에는 원통형이며 물의 흔적은 없다

처음부터 물이 없었던 곳에 복원 했던지 물이 말랐던지 둘중 하나겠다.


별당

몸채와 떨어져서 따로 지은 별채로 처녀나 새댁이 거처하는 방이 있는 집채이다.


초야에 묻힌 홍의장군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김덕령이 체포되었을 때 곽재우의 이름도 거론됐다.

다행히 곽재우는 죄가 없음을 인정받아 곧 풀려났다.

그러나 본래 관직에 뜻이 없는 선비였던 곽재우는 억울한 누명을 당하고 교유하던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출사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더구나 통제사 이순신이 죄 없이 잡혀 오는 것을 보고서는 더욱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계속 관직을 내렸지만 곽재우는 정유재란 때를 제외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경상좌도 방어사를 맡고 밀양과 양산, 창녕, 현풍을 지키는 데 힘을 쏟았다.

이때 곽재우는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성을 증축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군을 맞아 수성전을 펼쳐 적을 물리쳤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1600년(선조 33)에 당쟁을 비판하고 '어부(漁夫)로 대하시어 벼슬로 속박하지 마소서'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린 뒤 직을 사양하고 낙향했다.

1604년(선조 37)에 조정에서 공신을 취품할 때 첫 26인의 선무공신 후보에는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선정된 선무공신 18인에서는 제외됐다. 하지만 곽재우는 개의치 않고 고향에 은거했다.

광해군 때는 왕의 간곡한 부름에 경상우도조방장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러나 영창대군에 대한 탄핵이 제기되자,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고 역시 사직했다.

※정유년 가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해 왔다.

재우가 방어사로서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면서 사수할 뜻을 보이니 온 군중이 벌벌 떨었다.

적병이 이미 성에 다가왔는데도 재우는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하고

다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며 말하기를

"제 놈들도 병법을 알 테니 어찌 경솔하게 덤벼들기를 좋아하겠는가." 하더니

과연 1주야를 지나자 적이 싸우지 아니하고 강을 건너갔다.

- 《연려실기술》 권 16, 선조조 고사본말 -



귀강정(歸江)

강정으로 돌아오다


오락진애중(誤落埃中) 혼탁한 세상 속에 내려와

삼천수백발(三千垂白髮) 흰 머리만  길게 드리워졌네

추풍야국향(秋風野菊香) 가을 바람에 들국화 향기 로운데

책마귀강월(策馬歸江月) 달밤에 말을 달려 강정으로 돌아왔네



의병활동 체험공원

곽재우 장군은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맞지 않는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황해도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경상남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5월 경상남도 함안군을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에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의 공으로 1592년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 곧 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해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다.

1593년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였고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는데

그 후 부총관(副摠管),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이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억울한 죄명으로 한양으로 붙잡혀가고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휘말려 죽은 일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였다.

이후 창암(蒼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곽재우 장군의 생가 전체모습


이렇게 해서 충의의 고장 의령에 있는 곽재우장군 생가를 둘러보고

가슴에 호국정신을 담아 본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의령군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민족문화대사전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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