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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벽화산(宜寧 碧華山) 의병(義兵)의 전승지 벽화산성이 있는 벽화산에 서다 본문
의령 벽화산(宜寧 碧華山)
의병(義兵)의 전승지 벽화산성이 있는 벽화산에 서다
▲ 의령 벽화산(宜寧 碧華山)
높이 : 522m
위치 : 경남 의령군 의령읍 중리에 걸쳐있는 산
▲ 산행일 : 2020년01월31일 금요일.날씨: 맑음
▲ 나의산행코스 :
척곡마을회관→→→우측마을도로 →→→임도→→→ 임도준공비→→→ 동문터
→→→- 벽화산성→→→ 삼거리→→→ 벽화산 →→→ 임도→→→ 척곡마을 회관
7.5km 2시간 10분소요
▲ 의령 벽화산(宜寧 碧華山) 개요:
벽화산 양봉에는 각기 대규모의 석성이 있는데 이 산성이 도지정 기념물 제64호인 벽화산성이다.
벽화산성은 성곽이 904m로 홍의장군 곽재우가 축성한 산성으로
조선 고종 13년(1876)에 현감 송기노가 수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산성 동문지가 위치하는 능선에 고분 3기가 있는데
이 고분군은 도굴이 심하여 개석과 일부 벽석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이다.
고분군에 대하여는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정확한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노출된 상태로 보아 가야의 수혈식 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의 경우 산성과 고분군이 세트를 이루는 경우가 많아 이 고분군과 산성이 연관이 있다면
산성의 수축연대가 삼국시대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벽화산 하부에는 보물 제373호인 보천사지 삼층석탑과 보물 제472호인 보천사지 부도가 있으며
용국사와 더불어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산행 길잡이를 보면 벽화산은 일반 등산코스는 아직 개설되어 있지 않지만 임도가 있어
등산하기에도 그리 어렵지 않아 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용국사를 관람한 후
자연스럽게 등산할 수 있는 산으로 산성에 올라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호국정신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느껴볼수 있다.
▲ 등산지도
▲ 벽화산 찾아가는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부산방향→→→진주TG→→→지수로(의령방향)→→→화정로(의령방향)
→→→ 홍의청소년수련원 좌회전→→→척곡마을회관
29km 승용차 30분소요
→→→→→2020년 1월31일 금요일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길목에 있는 벽화산 벽화산성을 둘러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의령은 곽재우 의병장의 전승지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곳이다
진주에서 지수면을 거쳐서 의령으로 가다보면 홍의청소년수련관이 있는데
여기서 좌회전 해서 가다보면 운곡마을회관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 척곡마을이다
운곡마을회관 근처는 공터가 있는 반면에 척곡마을회관에는 주차할 공간이 없기에
버스나 차량으로 이동할시에는 운곡마을회관 공터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의령 山은 백두대간에서 불거진 진양기맥이 북쪽에서 담을 친 의령 땅에는 내로라하는 명산이 제법 있다.
조선의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랐다는 의령의 자굴산이 좌장이라면
봄이면 진달래, 철쭉으로 온 산에 '불이 난다는 한우산이 그 뒤를 따른다.
국사봉과 천황산 등 굵은 산들과 나란히 선 미타산도 명산에 속한다.
산꾼이라면 의령 하면 자굴산·한우산·미타산을 이야기 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벽화산을 물어보면 위치는 모를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생소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듯 벽화산의 자리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고 하는데
자굴산을 지난 진양기맥이 벽화산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남강 쪽으로 빠로 빠지는 바람에
얕은 산줄기 하나조차 대지 못했다. 이 산의 남쪽으로 낙남정맥이 산 물결을 이루지만
남강 물줄기가 가로막았다. 정맥, 지맥, 기맥과 한 오라기의 인연도 없다 보니 태생부터 평지에 홀로 선 외로운 산이다.
인적 드문 지맥을 골라 찾는 종주 꾼들의 발길도 비껴간 산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벽화산을 '베일에 싸인 산'이라고 의문표를 단다고 하며
오늘 산행은 베일에 싸인 벽화산 탐방을 하면서 하나하나 살펴 보기로 한다.
척곡(尺谷)마을 벽화산 등산로 입구 정상3.6km
척곡마을회관에서 윗쪽으로 50m지점에 벽화산 등산로 입구라는 입간판이 있다
우측 마을도로를 따라 100m지점 까지 직진하면 되는데
마을도로라 농민들이나 마을주민에게 피해를 주는 고성방가나 쓰레기 투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척곡(尺谷)마을 유래를 보면
의령읍에서 서남방으로 약 십리길인데 쑥 들어앉은 동네로서 세 뜸이다.
요즘은 모두「척곡」으로 부르지만 옛 이름으로는 「자고개」「자실」이었다.
이 동네 사람으로 출가한 분들의 택호가 모두 「자실띠기」(자실댁)다.
동구 밖 한길가에는 삼충각(三忠閣)과 효열절부비 등만 보아도 덕곡면 제촌(諸村)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가산란(嘉山亂)에 전공을 세운 제경욱(諸景彧)장군, 임란때 용전순절한 제말(諸沫) 제홍록(諸弘祿) 두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왕명으로 세운 정려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동네가 있고 바로 뒤가 벽화산이다.
남향받이 뜸은 「양지말」이고 그 아래가 「중말(중간마을)」이고 맨 아래 뜸이「음지말(음지뜸)」로 큰 동네는 아니다.
동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인데 잣대모양으로 길쭉한 골짜기라서 잣골=자실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남북으로 높은 산줄기가 솟아 있을 뿐 아니라 골이 좁아서
잣대를 걸칠 수 있다해서 잣대고개=자고개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마을을 지나 골안 깊숙이 들어가면 안골이라는 곳으로 처음 동네터였고 「약물새미」가 유명하다.
한겨울엔 김이 솟고 오뉴월이면 냉천으로 변할 뿐 아니라 수량도 한결같고 속병 다스리는 약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안골재를 「새미꼬(샘고개)」라고도 하는데 화정 석천마을로 통한다. 조금 위가 절터다.
옛날 규모가 큰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나직한 고개라서「작은재」, 길마모양의 지형이라「질매재」, 벽화산성 중허리의「큰재
수암마을로 통래하던 「산꼬(산고개)」등 민초들의 애환이 담긴 소로잿길이 많았다.
산고개 밑쪽에 「느러더미」란 큰 덤이 있는데 병풍처럼 죽 늘어서 있는 덤(바위)이란 뜻이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장개터」란 곳으로 지금은 목장이다.
그 곳에서 어느 지체 높은 분이 은둔생활을 했던 터가 장자터란 말이 변음돼서 「장개터」가 되었다고 한다.
산성 및 산자락에는 「비륵」이라 부르는 큰 덤이 있는데 영험 있는 바위로 보고 있다.
마을 앞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산줄기를 「똥매산」이라는데 동산 동뫼가 경음화 해서 된소리가 된 것이다.
산자락은 「찰방멧등」이라 부른다. 아마 찰방벼슬을 했던 어느 분의 묘인 것 같다.
동네 뒷산은 제씨종산으로「뒷모」라 부른다. 역시 뒷산 뒷뫼 뒷모로 변한 것 같다.
이 곳 산등성이가 온통 고분이며 도굴이 극심했다. 벽화산성 바로 밑에도「몰무덤」또는
「고래장터」라는 대형 고분 몇 기가 있지만 철저하게 도굴된 상태다.
몰무덤은 말무덤이란 말이며 고래장터는 고려장을 했던 사람 무덤이란 뜻이다.
이 고분 주위에서 수습된 토기편이나 유구의 형태로 보아서 가야시대의 고분으로 보고 있다.
이곳 세뜸에는 칠원제씨가 아닌 타성받이는 석집이상 불어나지도 않는 다는 속설이 있어서
그런지 제씨는 37집으로 대성인 반면 주씨·박씨가 두어집씩이고
왕·노·안·홍씨등 여러 성받이가 있지만 그저 한두집씩이다.
별다른 문화유적은 없지만 주위에 분포돼 있는 고분은 더 늦기전에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벽화산 들머리 정상까지3.6km
척곡마을도로 끝지점 임도가 시작되는 부분에 벽화산 등산로 표지판이 있으며
마을입구 입간판 하고 똑같고 거리도 같다
여기서 부터 벽화산 정상까지는 3.6km 이라고 표기 해 놓았는 마을정자나무 표지판이랑 같다
임도를 따라 가다보면 양측으로 단감나무 과수원으로 조성 되어 있고
의령 척곡마을은 전형적인 벼농사 위주의 농촌임을 알수 있다.
산아래는 감나무 과수원이며 평지는 논으로서 시설원예하우스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 농촌 할것없이 농촌은 조용하다 노령인구가 증가하고
젊은사람들은 대부분 대도시로 떠났기 때문이다.
벽화산 임도
임도는 시멘트포장도로서 소나무가 빼곡한 숲길이다
벽화산이 있는 의령은 충절(忠節)과 화식(貨殖)의 고장이다.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1552~1617)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고
일제강점기 백산 안희제(1885~1943)선생께서 민족자본을 일궈 국부의 기초를 닦고
항일운동의 재정적 숨통을 틔웠던 충절의 고장이라고 할수있다.
백산선생은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해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들을 적극 도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군민들과 봉기를 도모하는 한편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로 확대 개편해 상해임시정부의 운영자금을 조달했다.
기미육영회를 조직해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고
만주로 건너가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에 발해농장을 세워 한국인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육성하는 등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고 한다.
임도 준공기념비
초석에는 竣工記念(준공기념)이라고 새겨 놓았다
뒷면 글귀는 다음과 같다
'이 길을 따라 산정(山頂, 산꼭대기)으로 오르면 곽재우 홍의장군 휘하(麾下, 소속)의
의병들이 임진왜란 때 가야 시대 고성(古城, 옛성)을 수축(修築, 고치고 쌓음)하여
지키면서 왜적을 무찌른 전승지(戰勝地, 전쟁에서 이긴 장소) 벽화산성에 닿습니다.
이 일대는 호국(護國, 나라를 지킴)의 얼이 깃든 벽화산성지(山城址, 산성터)와
가야 고분군(古墳群, 옛날 무덤들이 무리를 이룬 곳)이 있는
유서(由緖, 예전부터 전해져오는 역사) 깊은 유적지(遺蹟地, 선조들의 자취가 서린 땅)입니다.
그러나 이 성채(城砦, 성과 요새)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대로 돌보지 않고 던져져 있었습니다.
이곳 출신으로 일본에서 주식회사 광건설을 경영하는 류광웅 사장께서
이를 안타깝게 여겨 성채를 잘 보존하고 또 정화(淨化, 깨끗하게 만듦)하기위해
거액의 정재(淨財, 깨끗한 돈)를 희사(喜捨, 기쁘게 기부)함으로써
임도(林道, 산속에 낸 길) 1.7km가 개설되었습니다.
조국과 향토를 위하는 그의 지극한 정성과 남다른 덕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여기 작은 돌비 하나를 세웁니다.
1988년 2월 14일 의령군수 손태병
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의 옛 흔적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곳이 의령 이곳 뿐이겠는가 마는
지금도 둘러본 결과는 정비나 관리는 제되로 되지 않는듯 보인다
만약 조금더 예산을 들여 역사 테마공원을 조성한다면 산행과 역사를 겸할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본다면 지금보다 훨신더 좋을것이라 생각해 본다.
향토문화유적 벽화산성 고분군 비(碑)
임도 준공기념비 인근에 벽화산성고분군 비가 있다
고분이 어디 있는가 두리번 그렸지만 빼곡한 잡목과 소나무 뿐이였다
한때 능선 주변에 가야시대 고분들이 있었지만 도굴과 훼손이 심해 지금은
흔적만 겨우 남았다 하는데 내 눈에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굴범들은 역사적으로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서야 전국 방방곡곡 고분을 훼손과 도굴 안당한 곳이 있나 할 정도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쳐 도굴할 일은 없을것이다.
동문터와 벽화산성 갈림길
좌측은 벽화산성과 벽화산 정상으로 가는길이며
우측은 벽화산성동문터와 벽화산 우물터 이다
먼저 동문터와 우물터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와 벽화산성을 보고난후에
벽화산 정상으로 가야한다
벽화산성동문터에서도 벽화산성 가는 길이 없으며 벽화산성에서도
벽화산 정상 가는 길이 없다 그르므로 산성을 둘러보고 다시 나와서
묘지가 있는 곳으로 가다보면 산행자들의 깃표가 있어 그것을 보고 따라가면 되며
만약 여름철 초목이 우거져 있어도 산행로는 쉽게 찾을수 있으리라 본다.
碧華山城東門址(벽화산성동문지) 초석
벽화산성 동문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벽화산성(碧華山城)은
의령읍성이 위험에 처하였을 때에는 이곳으로 입성하여 농성하였고
의령읍의 주위에 있는 산성들은 의령의 외곽방어를 위해 축조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즉 벽화산성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승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단순한 피난처라기보다는
적극적인 방어를 위해서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벽화산성은 6세기 중엽에 창녕을 점령한 신라가 함안과 의령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6세기 말 무렵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산성의 주된 사용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사용된 이후에는
완전히 폐기되어 성의 기능을 상실하였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부터 성 내부에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그래서 인지 벽화산성 인근에 묘지가 많은것을 볼수가 있다
이것도 하나의 일제하에서 민족적 역사를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는게 분명하다.
碧華山城東門址(벽화산성동문지)
우측 자연석은 地方記念物 第六四號(지방기념물제64호) 라고 새겨져 있고
중앙은 스테인레스 안내표지판인데 이걸보면 처음 찾는 산행자들은 속을수 있기에 무시해야 한다
벽화산성 안내 표지가 동문터 아래 0.20Km 안내되어 있어
화살표 진행방향 따라 내려가면 우물터가 끝이다
0.20Km라는 거리가 있기에 우물터에서 더 내려 갔다간 조난된다
길도 없을뿐만 아니라 잡목과 능쿨이 우거져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다
나 역시 화살표 진행 방향 따라 내려갔지만 길이 없고 위험해 보여 다시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안내표시판 하나만 보아도 탐방로가 관리가 잘되는지 안되는지의 척도가 된다
따라서 벽화산 탐방로나 벽화산성터 역시 마찬가지 였다.
우물터(샘터)
우물터는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벽화산성에서 사용한 우물터 같으나
지금보면 테크로 만든 쉼터같은데 개인의 기도처 인지 구분은 안된다
우측엔 이동식 화장실 있고 그리고 하우스로 만든 거처와
우물터에는 향로 촛불켠 흔적 그리고 우물터 덮게 위에는 막걸리병 소주병이 즐비하며
산행자에게 판매한 빈병인지 아니면 주거하는 사람 제수용으로 사용한건지 알수는 없다
거처에는 인기척도 들리지 않아서 사람이 지금은 없나 보다.
벽화산 산죽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가다보면 산죽이 보이는데 이곳에 벽화산성과 정상으로가는 길이다
벽화산정 부근에는 잡목 그리고 아카시아 나무와 참나무가 많았고
여기저기 칡능쿨이 많아 아마도 식생 변화에 영향을 끼친듯 하다
벽화산도 한우산 처럼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이지만
일단 산성 복원을 하고 고분군도 복원해서 임진왜란 역사와 의령 역사를 연계한
산행지를 만들면 아마도 한우산 처럼 인기 명산이 될듯해 보인다.
벽화산 산행 안내도
안내표지판에는 산죽이 자라나 산죽을 손으로 치워야 제되로 볼수 있다
아마 여름철이면 초목이 자라 이보다 더할것 같다
그래도 벽화산성이 있어 산성까지 가는길은 정비 해놓은 모습이 보인다.
가파른 계단은 인근 돌로 만들어 져 있는데 우수(雨水)로 인하여 패이고 무너진 곳도 보인다
의병의 혼이 깃든 벽화산에 찾는 사람이 적은 탓인지
예산이 없는 탓인지 모르겠지만 한우산 보다 너무 빈약하다.
의령 벽화산성지(宜寧 碧華山城址)
벽화산에 있는 벽화산성터이며 안내판이다
안내판의 소개글은 다음과 같다
이 벽화산성은 의령읍 중리 척곡 마을의 북쪽 벽화산 8-9부 능선을 두른
테뫼식 산성으로 산성둘레는 약 800m정도이다.
산성 내부는 일제시대 이후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대부분 민묘로 채워져 있으며
산성 남으로 7부 능선 정도에 벽화산성 고분군이 위치한다.
벽화산성 복원정비를 위한 2000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경남문화재연구원의 시굴조사에 의하면
벽화산성은 축조시기를 달리하는 2개의 성
즉 삼국시대성(하한은 통일신라시대)과 조선시대 성이 축조되어 있으며
후대에 설치된 조선시대 성은 삼국시대 성이 폐기된 이후 폐성을 기단으로 하여 축조되었다.
삼국시대 성은 대부분 높이 0.5m ~ 2m 정도 남아있으며, 구간에 따라 축성기법을 달리함이 확인되었다.
후대에 설치된 조선시대 성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수축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벽화산성에서 왜적 수천명을 섬멸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 후 조선시대 말기인 고종 13년(1876년)에
의령현감 송기노가 대대적으로 성을 정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라고 소개 되어 있다.
성을 축조한 돌을 보면 근래에 인위적으로 반듯하게 자른 돌을
가져다가 쌓은 것으로 보이며 그렇게 옛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의령 벽화산성지(宜寧 碧華山城址)
산성은 약100m정도 길이로 복원되어 있으며 산성에서 보면 의령읍이 관측된다.
벽화산성은 의령읍 하리 적곡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해발 378m의 하벽하산 정상부를 두르고 있는
6세기 말 또는 7세기 무렵에 축성된 테뫼식산성이다.
벽화산성의 둘레는 약 800m 정도이고, 벽화산의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타원형의 형태이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어 그 형태만 알 수 있지만, 성의 북동쪽과 북서쪽
그리고 남동쪽의 일부분은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벽화산성은 의령읍성(宜寧邑城)이 축조되기 이전까지 의령의 치소 역할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었다.
벽화산성은 6세기 중엽에 창녕을 점령한 신라가 함안과 의령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6세기 말 무렵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산성의 주된 사용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사용된 이후에는
완전히 폐기되어 성의 기능을 상실하였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부터 성 내부에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의령 벽화산성지(宜寧 碧華山城址)
벽화산성은 2000년 지표조사에서 체성(體城)과 문지(門址), 치(雉), 장대지(將臺址)
건물지 등의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2001년에는 체성과 문지 2개소를 중심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벽화산성의 체성은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내외의 경사가 큰 곳에는 편축으로 축조하였고, 경사도가 작은 곳은 협축으로 축조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체성의 폭은 1.2~1.8m 정도이다.
체성은 축조방법의 뚜렷한 차이로 인하여 시기가 다른 2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 시기에 성을 축조하고 난 다음(이하 성1)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이후
앞선 시대의 성을 기단부로 활용하여 다시 축조하였다(이하 성2).
즉 벽화산성이 위치하는 산 정상에 성이 축조되고 난 이후에 이미 축조된 체성을
기단부로 활용하여 다시 그 위로 성벽을 수직으로 축조하였다.
성1은 길이 30∼60㎝, 두께 10㎝ 내외의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품(品)자형으로 쌓아 올린 성으로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1m 정도이다.
성벽의 하단에 점토와 세석을 혼합하여 다짐처리를 하였는데 높이는 50㎝ 정도이며
그 위로 다시 돌을 쌓아 보강하였기 때문에 원래 보축의 높이는 1m를 넘었을 것으로 보이고
단면은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2는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2m 가량이지만 원래의 높이는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체성의 내벽은 30∼50㎝ 정도의 대석을 성벽과 직교하게 설치하였고
그 위로 폭 1.5m 내외, 높이 70㎝ 정도로 협축하였다. 외벽은 내벽에서 1.5m 정도 떨어져 확인되었는데
현재 7∼10단 정도 남아 있으며 높이는 1.8∼2.2m 정도이다.
문지는 동문지와 남문지가 조사되었는데
동문지의 폭은 약 3m 정도이고 성2의 문지 역시 성1을 기단으로 활용하였다.
남문지는 성1의 체성 위에 약 50㎝ 가량 들여쌓았으며, 최근까지 사용하다가 폐기된 상태이다.
출토유물은 토기류, 자기류, 와당류로 크게 구분되는데
가장 빠른 것은 6세기 후반 무렵, 늦어도 7세기 초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8세기대를 중심으로 하는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은 출토된 반면에 조선시대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의령 벽화산성지(宜寧 碧華山城址)바라본 의령읍(宜寧邑)
참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로 인해 조망이 막혀 버렸다
여름철이면 아예 의령읍 조망을 본다는것은 포기 해야 할것 같다
벽화산성은 산성으로는 보기 드문 내성과 외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중으로 이루어진 성이거나 해발 526m의 상벽화산과 하벽하산을 독립적으로 두른
쌍성의 구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표조사 결과 하벽화산의 정상부를 두르고 있는 테뫼식산성으로 확인되었다.
테뫼식 산성은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것으로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다고 해서 발권식(鉢圈式) 산성
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성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다고 해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한다.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이 이에 속하며, 부여의 증산성과 청마산성
함안의 성산산성, 김해의 분산성 등이 있다.
멧돼지의 흔적
벽화산성을 지나 정상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기저기 멧돼지 먹이찾는 흔적이 보였는데 이것은 약초꾼이 갱이로 판듯 한데
멧돼지 흔적과 같이 있어 인위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벽화산성 위로는 묘지가 많았는데 일제강정기에 산성내로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곽재우 장군께서 왜군을 대파 하였는데 이 전승지를
마을주민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로 의병이 일어난 의령 땅의 의기와
정기를 끊으려고 일본인들이 일부러 묘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일본은 우리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정기를 끊고자 쇠말뚝고 많이 박아 놓았다
근래 들어서 지리산에도 쇠물뚝을 제거해 법계사에 전시하고 있다.
묘지부근에 식생은 아카시아나무 참나무 칡능쿨이 잡목이랑 엉켜져 있다.
등산로 표식
참나무에 의령군에서 노란색으로 삼각깃표를 나무에 스테이플러로 찍어 놓았다
조금더 예산을 투자해서 안내표지를 세웠으면 하는 바램이며
임시방편으로 나무에 스테이플러로 찍어 놓아서 보기에도 좀 그렇다.
공동묘지를 지나 벽화산 정상으로 가는길은 산꾼들이 지나가 제법 길이 휜하게 보였다
벽화산 산행안내 표지
안내표지의 삼거리 방향을 따라 5분쯤 내려서면 안부(이정표)에 닿는다.
여기서 5~6분 거리에 탐방로 바닥에 깔린 반석 지대가 나오고 425봉까지 10분을 더 가야한다
탐방로 주변에는 소나무가 빼곡하고 솔향기 가득 하다.
바닥은 솔깔비 가득한데 예전 같으면 깍꾸리로 끌거서 떌깜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벽화산은 흙산이라 한 발씩 걸어도 보행이 편하다.
벽화산 솔나무 숲길
묘지부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솔나무를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빼곡한 솔나무 숲길을 걸어면 솔향기 가득하고 솔향기에 취해
마음은 깨끗하게 정화된듯 하다
이렇게 산길을 걸어면 진정 산에 오르는 맛을 느낀다
그래서 늘 이렇게 시간이 있으면 산에 오른다.
산은 늘 그자리에서 사계절 따라 옷을 갈아 입고서 산행자를 반겨준다.
오늘따라 유난히 산새들이 많이 지저귄다 아마도 자기 구역에 모르는 사람이
침범해서 그런가 보다.
벽화산 삼거리 해발고도 279m
벽화산 정상까지는 아직 1.24km 더 걸어가야 한다
시내에서의 버스정류장 한구간 거리쯤 된다
시내에서는 두정거장 구간정도는 예사롭게 걸어 가지만 산길 한구간은 예사롭지 않다.
2020년 1월31일 금요일이며 요즘 언어로 불금날이다
어느새 1월도 쏜 화살처럼 지나갔다
2020년 올해는 몇개의 산에 올라 정상표지석과 인증 사진을 찍을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올해 첫 산행은 산청 꽃봉산 공개바위 부터 시작해서
강원도 평창 선자령 그리고 능경봉, 의령 남산산행 하였고 벽화산은 5회째 이다.
벽화산 솔나무 숲길
솔나무는 우리나라 대표적 수목이다
집을 지을때도 장작 땔깜으로도 하나부터 열가지 우리의 전통 깊숙히 살아있는 솔나무 이다
유년기 시절 봄날이면 솔가지 하나 꺽어 송구라 하여 껍질을 벗겨먹고 했다
유년기 시절 군것질이며 간식꺼리 였다.
솔잎은 추석날 송편을 무쇠솥에 찔때 바닥에 깔아 솔향기 가득하게 만들었고
여름날 솔나무껍데기 배 만들어서 송진을 찍어서 물에 띄우면 송진이 물에 번지면서
배가 출력을 얻어 움직이게 만들었다
솔나무는 어린애들에겐 장난감이 되어 주었고 어른들에게는 건축자재가 되어 주었다.
碧華山 頂上(벽화산 정상) 522m
벽화산 정상에 올랐다 산행 1시간 30분정도 소요 되었다
겨울날씨 속에서 오랫만에 땀흘려 보았다
올 겨울은 유난히 봄처럼 따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표지석은 의령교육청산악회 세웠는지 정상표지석 아래 의령교육청 산악회라고 새겨져 있고
2007년에 여기에 세웠나 보다.
벽화산 정상에는 주위 조망은 전혀 없다
산정은 높게 솟은 봉우리가 아니고 그냥 아줌마 엉덩이 처럼 펑퍼짐 하다
그래서 어머니 산이라 부르는가 보다
산정 나무에는 산행자들의 깃표가 많이 매달려 있다
제법 인기 명산처럼 말이다.
碧華山 頂上(벽화산 정상) 522m
산정에 서면 북쪽으로 자굴산이 가까이에 있고
그 능선 너머로 멀리 가야산 산줄기가 아련히 보인다 하는데 보이나...모르겠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면 화왕산이 보인다고 하는데 막혀있어 보이지도 않고
남쪽으론 낙남정맥의 여항산 그리고 무학산이 조망된다했는데
눈이 가물가물 하다.
벽화산 정상에서 잠시 작은 배낭 풀어 놓고
쌂은계란 그리고 연양갱 카톤우유를 점심겸 간식으로 당(糖)을 보충하면서
정상에 서서 솔바람 맞으면서 쉬어 본다.
하산길
벽화산 산정에서 등산한 반대편 안내표지판 임도방향으로 하산했다
하산길 여기저기에도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이 산재해 있었다.
벽화산은 솔나무 숲산이다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솔나무 사이 가벼운 걸음으로 하산한다
벽화산의 한자 碧은 푸를벽을 쓰는데 솔나무 숲으로
사시사철 푸르기만 해서 푸를 碧 그리고 빛날 華를 쓰는가 보다
의령의 산 산행은 자굴산 한우산 미타산 국사봉 남산 그리고 지금 벽화산 산행으로
이름있고 정상표지석이 있는 의령의 산을 완등한 셈이다.
척곡마을3.46km
여기서 원점지인 척곡마을까지 3.46km이라고 안내해 놓았다
조금 빨리가기 위하여 산불감시 초소가 있는 벽화산2봉 쪽으로 가지 않고
임도를 따라 조금 빠른걸음으로 하산길을 재촉 하였다.벽화산이 있는 의령읍은
군의 중심부에 있는 군청소재지로 관문의 역할을 하면서 행정, 상업의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이다.
남강을 사이에 두고 함안군 군북면과 연접하고 뒷편에는 봉무산
앞에는 남산 을 사이에 두고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남강변은 비옥한 평야로서 쌀을 비롯 하여 수박, 부추, 참외 등 시설채소로소득을 높이고 있다.
특히 덕실지구는 산간 농촌지대에서 덕실정보화마을, 수암녹색체험마을 개관으로
농촌체험 관광마을로 변신을 꾀하여 타 농촌마을의 모범사례가 되고있다.
시가지 앞 남산 아래 의병의 혼을 모시고 있는 충익사는
선조의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는 호국정신 함양 터로서 관광명소가 되었다.
특히 남강변의 정암루는 절경일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때 정암전투의 전적지로 이름났다.
원래 의령읍은 조선 태종13년에는 본군이 의령현으로 승격되면서 풍덕면 이었으나
1922년 덕곡을 병합 의령면이라 칭하고, 1935년 13개면으로 조정될 때 화양면의 중촌(대산)
하촌(만천)을 병합하였고, 1979년 5월 1일 의령읍으로 승격되었다 한다(의령군청)
향수고개(임도)
척곡에서 석천리로 넘어가는 길을 향수고개라고 하는데 왜 향수개인지 알수없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각도가 높은 지대를 깔닥고개라고 하고
부모와 또 연인이 헤어지는 고개라 해서 이별고개라 이름이 많이 붙여져 있는데
향수고개란 이름도 많지만 그 어원은 마을주민들도 모른다고 한다.
보통 향수고개는 백두대간까지 물길한번 건너지 않고 땅 길로만 백두산까지 가는길이라고 한다.
이길로 쭉 내려가면 운곡(雲谷)마을과도 연결 되어있다.
봄의소리
임도 절개지 암벽에서는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암벽에 빗방울 처럼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얼음이 녹아 떨어지는듯 해 보였다.
아마 벽화산에도 물이 많은 곳인가 보다 제법 높은 지대인데 이렇게 물이 줄줄 흐르니 말이다.
마을이 가까워 졌는지 개짙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벌서 사람냄세를 맡은가 보다.
척곡삼거리 척곡1.5km
산행도 종점에 다가간다 원점까지 1.5km남았다
뒷편에는 벽화산 정상과 걸어온 능선이 펼쳐져 있다
산 이름처럼 솔나무 숲으로 늘 푸르고 빛나는 산이다
안내표지목도 지치는가 쓰러질듯하다
얼마 못가서 밑둥이가 부식되어 넘어지겠다
걸어온길을 돌아보면 저 만큼이나 걸었나 하는 감탄이다.
근교산 나즈막한 산이라도 이렇게 걸어면 산행 자체가 운동과 힐링 두가지를 얻는다.
척곡마을과 척곡 소류지
임도에서 바라본 척곡소류지이다
전형적인 시골농촌의 풍경이다
척곡마을엔 노인요양원건립 결사반대란 현수막이 걸여 있었다
아마도 공기좋고 조용한곳에 노인요양원을 건축하려는데
마을주민이 결사반대란 현수막을 걸었나 보다
요양원도 혐오시설일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마을 가까이 다가오자 개짙는 소리가 더 요란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개 사육장이 있었다 이렇게 짇어 되는데 마을 민원이 일어나지 않나 보다.
척곡마을회관 산행 마무리
의령 벽화산 산행을 마무리 해본다
2020년 1월 마지막날 1월산행 5회째 마무리이다
벽화산은 역사가 있는산이며 벽화산성 우물터 그리고 빼곡한 소나무숲과의
힐링(healing)의 山이다.
늘 그렇듯이 농촌마을은 조용하기가 그지없다
벽화산 533m의 척곡마을 뒷산 한바퀴하고서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근교산&저너머(국제신문), 명산플러스(경남일보),의령군 홈페이지등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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