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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능가사(高興 楞伽寺),부처님 몸에 법비가 흐르는곳 능가사 법향기에 젖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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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능가사(高興 楞伽寺),부처님 몸에 법비가 흐르는곳 능가사 법향기에 젖다

바다늑대FORCE 2019. 10. 28. 19:27


고흥 능가사(高興 楞伽寺)

 부처님 몸에 법비가 흐르는곳 능가사 법향기에 젖다


고흥 능가사(高興 楞伽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위치 : 전남 고흥군 점암면 팔봉길 21(점암면)

   전화 : 061-832-8090


▣ 사찰기행일 : 2019년10월28일 월요일. 날씨: 맑음


▣ 능가사 개요 :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417아도화상(阿道)께서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조선 인조22(1644)에 벽천(碧川)정현대사(正玄大師)가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벽천은 원래 90세의 나이로 지리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절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라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능가사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1768(영조 44)1863(철종 14)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993년에 응진전을, 1995년에 사천왕문을 각각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보물 제1307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당·종각·천왕문(天王門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350여 년 전에 나무로 만든 뒤 개금한 불상 8위와

나무로 만든 뒤 도분(塗粉)한 불상 22, 보물 제1557호로 지정된 높이 157의 범종(梵鐘)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인 4.5m의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 귀부(龜趺) 위에 세워진

높이 5.1m의 사적비(事蹟碑)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중 사적비는 1726(영조 2)에 건립한 것으로 불교의 유래와 절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귀중한 자료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비석은 원래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술을 부려 절 뒤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절의 경내에는 광희(廣熙사영당(泗影堂추계당(秋溪堂) 등의 부도(浮屠) 8기가 있다.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일본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의 태자가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이 절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7일 만에 승려가 나타나서 태자를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며

 절의 승려들이 법당 벽에 그 모양을 그려놓았던 것이 영조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부속암자로는 만경암(萬景庵)과 서불암(西佛庵)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 사찰기행 가는길 :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순천방향→→→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고흥로 고흥방향

→→→우주항공로 고흥도양방향→→→ 공흥로 정암방향→→→능가사주차장

  123km  승용차  1시간30분 소요.


→→→→→사찰기행시작

산에 오르면 사찰이 있고 사찰에 가면 산이 있다.

늘 그렇듯이 팔영산 산행후 능가사를 둘러보고 참배하는것으로 산행과 사찰 기행을 겸해본다


八影山 楞伽寺(팔영산 능가사) 초석

팔영산 능가사 천왕문 가가전에 이렇게 능가사 초석이 일주문을 대신해서 서 있다

능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417년(눌지왕 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였다 하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창건자의 신빙성은 없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1644년(인조 22)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한다.


능가사 천왕문(楞伽寺 天王門)

능가사에는 일주문이 없으며 바로 천왕문이 능가사의 입구이다

보통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가기전에 천왕문이 있으며 천왕문 전각에는

사천왕은 불교 이상 세계의 중심 수미산 제석천을 섬기며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라 하며

봉황문이라고도 하고 본래 맑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문이다.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깨서 삼보(三寶)를 지키시는 문이다.

나쁜 것을 깨 버리고 올바른 길을 펼치려는 마음을 일깨워 주고 있는데 그 뜻이 있다.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들고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잡았으며 광목천왕은 용관, 여의주(如意珠)

또는 견색(絹索; 새끼줄)을,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대체로 이들 사천왕은 왼쪽에 동.남천왕, 오른쪽에 서.북천왕이 배치된다.

이 사천왕들은 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재래의 神(신)인데,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서 사방을 지키게 된 것이다.

일정한 모습이 처음부터 규정된 것이 아니어서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중앙 아시아나 중국

우리 나라로 전파되는 동안 무인상(無人像)으로 변형되었다.



천왕문 편액

八影山 楞伽寺(팔영산 능가사) 편액도 걸여 있다

천왕문 직전으로 대웅전 바로 보인다 그야말로 일직선상에 있다

대웅전 뒷편은 팔영산이 능가사를 보호하듯이  봉우리가 둘러 쌓여 있고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법 향기가 세속의 떼를 씻어주는듯 하다.


高興楞伽寺木造四天王像(고흥능가사사천왕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 능가사 천왕문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 4구의 사천왕상이다.

좌우 2구씩 목책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천왕문 입구 왼쪽 앞쪽에 북방 다문천왕이, 뒤쪽에 서방 광목천왕이 배치되고

오른쪽 앞쪽에 동방 지국천왕이, 뒤쪽에 남방 증장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사천왕상 중 동방 지국천왕상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능가사사적비 등에

이 사천왕상이 1666년(현종 7)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천왕상이 안치된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1995년 천왕문 해체 복원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1666년에 건립된 후

1824년(순조 24)과 1931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천왕상은 나무로 제작되었고 서 있는 입상이 아니라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의 의좌상(椅座像)으로

높이는 450㎝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연화문이 그려진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머리 양 옆으로 보관에 달린 끈이 휘날린다.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부드럽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천왕상은 갑옷을 입은 무장형으로 어깨 위로 한 가닥의 천의(天衣)가 휘날리고 있다.

천왕이 든 지물은 북방 다문천왕이 당(幢)을,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보주를

동방 지국천왕이 비파를, 남방 증장천이 칼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형 사천왕상은 중국 원대와 명대에 갑옷을 입고

위협적인 얼굴을 한 용맹스런 장수의 모습에 비파, 용과 보주, 당, 탑 등의 다른 지물을 가지고 있다.


능가사 대웅전(楞伽寺大雄殿)

능가사 대웅전 터를 보면 많이 널단느것을 알수있다

오래전에는 많은 가람이 배치 되었으리라는 나름 생각해본다.

능가사 대웅전은 18세기 중엽에 중건된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건물이다.

보물 제13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능가사는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사찰이 모두 소실되어서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44년(인조 22) 정현대사(正玄大師)가 산의 남쪽에서 옛 절터를 발견하여 중창하고

그의 제자들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도 이때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능가사 대웅전의 이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건물로

한 단의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배흘림이 약하고 거친 두리기둥을 세웠다.

원주에 비하여 조그마한 주두가 창방과 용두를 지지하고 있으며

그 위에 다시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장식한 용두가 외삼출목·내사출목의 공포를 받쳐주고 있다.

살미첨차 앙서의 굽면은 완만한 곡면을 이루고 위로 올라갔으며, 첨차의 곡면 역시 약간 경사를 두고 비스듬히 깎여 있다.

어간(御間)은 4분합문으로 주간포가 3구 있으며, 협간(夾間)은 2분합문으로 주간포가 2구

툇간은 외여닫이문으로 주간포 1구가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조그마한 닫집이 4개의 고주에 결구되어 있으며, 넓은 공간을 4개의 대량과 4개의 고주가 받치고 있다.

내부 공포는 운공형(雲工形)으로 조식되어 있는 살미첨차가 커다랗게 결구되어 있으며

맨 밑에는 용의 몸통 부분으로 받쳐지고 있다.

천장은 층단천장으로 된 우물천장이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창호는 빗살무늬를 하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이며 직경이 큰 서까래가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설치되어 있다.


능가사 대웅전(楞伽寺大雄殿)

능가사의 건물의 배치는 현재 사찰의 정문격인 사천왕문(四天王門)이 사역의 맨 앞쪽에 있고

뒤쪽으로 대웅전이 들어서 있다.

지형은 거의 평탄하며 건물은 남북의 종축선상에 들어서 있다.

조선후기의 건물이지만 규모가 크며

건물의 좌향(坐向)이 입구의 방향 때문에 북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능가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외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영광의 불갑사 대웅전

부안의 개암사 대웅전과 그 맥을 같이 하며

포벽 수장재에 도드라지게 새긴 첨차는 사찰건물에서 보기 드문 예에 속하는 등

조선 중·후기 호남지역 사찰건축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물로서 학술적·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능가사 대웅전(楞伽寺大雄殿) 주련

象彼雷驚花入牙(상피뢰경화입아) 코끼리가 우뢰에 놀라니 꽃이 어금니로 들어가느니라.

犀因玩月紋生角(서인안월문생각) 물소가 달 구경하니 문체에 뿔이 생기고

二三千處管絃樓(이삼천처관현루) 수많은 관현루에 음악소리 같은데

四五百條 花柳䘕(사오백조화류항) 사오백 그루의 늘어진 버드나무 숲

樓閣重重華藏界(누각중중화장계) 겹겹이 늘어선 누각은 연화장 세계요


*설법[說法: 선문580칙]

앙산이 누웠는데 어떤 중이 물었다.

스님: "법신도 설법을 할 줄 압니까?"
앙산: "나는 말할 수 없다. 따로이 다른 사람이 말 할 것이니라."

스님: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에 앙산이 목침을 내밀었다. 나중에 위산이 이 말을 전해 듣고는

위산: "앙산이 칼날 위에서 희롱을 하는구나!"

 *운문고가 상당하여 염하였다.

"위산이 참으로 사랑하는 아기의 추한 꼴을 모르는구나.

목침을 밀어 낸 것이 이미 허물을  드러냈거늘, 다시 이름을 붙여서 칼날 위의 일이라 하였으니

말이나 배우는 무리들이 오인하여 헛된 메아리를 잘못 알아 퍼지게 하였다.

묘희는 비록 물을 빌어 꽃을 바치는 것 같으나 진리를 잘못 판단하지 않으리니, 지금긍정

하지 않는 이가 있는가? 있다면 다시 묻노니, 목침을 밀어낸 것이 법신이 설법한다는 말에 해당하겠는가?"

 *송원이 상당하여 이 이야기를 들고는 염하였다.

"앙산이 평상시에 무쇠 같이 단단하더니 중에게 연거푸 시달림을 받고는 땅에 꼬꾸라졌고

위산은 잠시를 참지 못하여 한쪽 눈을 잃은 줄도 몰랐다. 듣지 못했는가? 물소는 달구경을

하다가 뿔에 문채가 생기고, 코끼리는 우뢰에 놀라 꽃이 어금니로 들어가느니라.

○법신이 설법을 하지 않으면 누가 있어 천지만물 일체중생을 제도하며 이끌겠는가?

그렇다고 법신이 설법을 하는가를 따진다면 정신나간 멍청이가 틀림없다. 이런 정신나간 중은

물음을 던지자마자 삼십방을 내려서 혼쭐을 내야 하리라. 

인간사 모든일이 법신의 설법을 따르지 않는것이 있는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이 하는 일들은 법신 즉 우주의 이치를 보고 듣고 따르는 것이 아니던가?

눈있는 자는 볼 것이요, 귀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

삼가 스스로 믿음을 가진 자는 세상과 함께 하겠지만, 믿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자신을 찾으리요.

 목침을 밀러낸 앙산의 용기는 무모하여 위태로웠지만

그래도 제자에 대한 위산의 믿음은  과히 종풍을 드날리기에 충분합니다.


능가사 대웅전(楞伽寺大雄殿) 목조삼체불

높직한 수미단을 마련하여 봉안된 불상으로 목조에 개금을 하였다.

삼체불 중 본존불은 나발의 머리에는 조그마한 원형 육계가 보인다.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원만한 상호(相好)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이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어깨선을 타고 내려온 옷주름이 두껍게 나타난다.

가슴은 양연형의 내의자락이 표현되어 있고 그 아래로 띠매듭을 둘렀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무릎은 오른발이 올라가는 길상좌(吉相坐)이며

하체 정면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이 유려하게 무릎 전체를 덮고 있다.

좌우에서 협시를 이루며 서있는 보살은 문수와 보현으로 추정되는데 , 도난 당하여 다시 조성한 불상이다.

예전의 보살입상은 3체불과 수인만 다를뿐 비슷한 양식이었다.

중앙의 본존불 왼쪽에 모셔져 있는 불좌상은

아미타의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결한 당당한 모습의 불상으로 목조에 개금을 하였다.

뒤에는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있는 후불탱이 걸려 봉안되어 있다.

삼체불의 오른쪽(향좌)에 모셔져있는 불좌상은 목조상에 개금을 하였다.

단 위에 결가부좌하여 아미타의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결하고 있다.

뒤에는 화려한 색채로 그려진 거대한 후불탱이 걸려 봉안되어 있다.



능가사 요사

능가사의 창건설화는

417년(눌지왕 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였다 하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창건자의 신빙성은 없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1644년(인조 22)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벽천은 원래 90세의 나이로 지리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절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라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능가사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각각 중수하였다 한다.



능가사 요사

능가사 대웅전 목조불상은 색난은 유명한 조각승이다

색난(色蘭)

조선후기 통정대부, 가선대부 등의 공명첩을 받은 승려이다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전라남도 고흥군 점안면 팔영산 능가사에 거주하면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사찰에 목조삼존불좌상과 나한상,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을 제작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공명첩을 받았다.

그의 계보는 일기, 하천 등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가장 중요한 조각승 계보를 이루고 있다

색난이 만든 불상의 양식은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이 가슴까지 완만하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세 겹으로 접힌 주름이 단(段)을 이루면서 비스듬히 늘어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이 결가부좌한 양다리 밑으로 늘어져 완만한 곡선으로 펼쳐지고

그 뒤로 세 가닥의 옷 주름선이 규칙적으로 흘러내린다.

소매 자락은 왼쪽 무릎을 완전히 덮어 연판형(蓮瓣形)으로 처리되고

대의(大衣)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가슴까지 올려 묶어 상단(上段)이 연판형을 이룬다.

색난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만든 불상 양식은 18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세부 표현이 생략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진심시불(眞心是佛) 초석

능가사 연못 중앙에 서 있는 진심시불의 초석이다

삼계화택(三界火宅) 진심시불(眞心是佛)란

三界熱惱 猶如火宅, 其忍淹留 甘受長苦! 欲免輪廻 莫若求佛

若欲求佛 佛卽是心, 心何遠覓 不離身中. 色身是假 有生有滅

眞心如空 不斷不變. 故云; "百骸潰散 歸火歸風, 一物長靈 盖天盖地".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화택과 같거늘

거기에 차마 오래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으랴! 윤회함을 면하고자 할진대 부처를 구함만 같지 못하고

만일 부처를 구하고자 할진대 부처는 곧 마음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리오?

각자의 몸 가운데를 여의지 아니하였도다.

색신은 거짓이라 생함도 있고 멸함도 있거니와

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없어지지도 아니하고 변하지도 아니하나니라.

그런고로 "일백 뼈는 무너지고 흩어져서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되

한 물건은 길이 영령하여 하늘도 덮고 땅도 덮었다"고 하였나니라.
수심결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에 대하여 잠깐 얘기를 나누고자 한다.
불교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고

마음을 상황에 따라 균형을 잘 잡아서 원만하게 사용하면 마음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계에 끌려 요란하고 어리석고 바르지 못한 마음을 사용할 때도 많으니

그 마음을 부처라 할 수 있을까?'번뇌 즉 보리'라고 했으니, 그 근원은 같은 것일까?

근원은 하나인데 발현할 때는 강하게 끌어 당기거나 또는 선호하는 쪽으로 선택해서 나가는 것일까?

뿌리의 마음과 가지의 마음이 원래 하나에서 두 가지 다른 경향성을 띄는 것이라면

근원의 마음도 본래 보리와 번뇌, 불심과 중생심, 도심과 인심의 두마음이 한마음처럼 공존하는지 아니면

본래 청정하고 고요하고 밝은 한마음 뿐인데

인간이 사회적 환경속에서 무리를 지어 경쟁생활을 하다보니 분별과 집착

선악과 호오에 물들어서 원래의 진심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여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착각하며 살게 된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던져보며 〈수심결〉에서 마음에 대한 이해와

번뇌로 가득찬 마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보조는 〈수심결〉 첫구절에서 이 세상을 번뇌로 가득찬 불타는 집에 비유하고 있다.
번뇌는 화를 불러 일으키는 불쏘시개와 같으니, 활활 타오르는 불난 집과 같다는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다.

불난 집이 곧 고해요, 윤회의 수레바퀴다.

그 수레에서 뛰어내려 번뇌와 윤회를 벗어나려면 참마음(眞心)을 찾아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18C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비교하고 우열을 가려서 상대심을 일어내는 인간의 심리를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발효상태'와 같다고 했다.
이렇듯 인간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들쭉날쭉 뒤죽박죽 상태라는 것을 모두 다 인정하고 있다.
그러한 변덕스런 마음을 치료하는 묘약으로 보조는 부처를 찾으라고 처방을 일러주었다.
마치 큰바위 얼굴을 찾으러 멀리멀리 길을 나서야 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보조는 부처를 찾겠다고 집을 나가서 고생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찾으라고 너무 쉽게 정답을 일러주었다.

멀리 가서 헤매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너에게서, 오감과 의식을 총동원해서 찾으면 된다고 한다.
만약에 '아하'하고 보물찾기에 성공한다면

그 보물은 '텅 비어 있되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 차있고

없어지거나 변하지 않는 물건'이 맞는지 정답확인을 해보라고 자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高興楞伽寺秋溪堂─泗影堂浮屠(고흥능가사추계당 및 사영당부도) 

조선시대 후기의 승려 추계당과 사영당의 석조 부도 2기로

2004년 9월 20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능가사 사천왕상 복장기(1667년) 등에 “추계당 성추계당 부도의 규모는

총높이 173㎝, 탑신 높이 125㎝, 기단부 크기 129×121㎝이며, 사영당 부도의 규모는

총높이 225㎝, 탑신 높이 62㎝, 기단부 크기 152×125㎝이다.

추계당 부도는 석종형으로, 기단부는 방형의 하대석 위로 8각의 복련을 새겼다.

16엽 연화문으로 별 화려한 문양이 없어 오히려 소박한 편이다. 그 위에 원형의 홈을 파고 탑신부를 얹었다.

탑신부는 크게 상대와 하대로 구분되는데, 하대에는 돌아가면서 물고기와 게 등이 조각되었다.

탑신 중앙에는 네 군데의 유곽과 그 안에 9개의 유두가 돌출되고 있으나 그 기법도 매우 간략화되었다.

북쪽 2개의 유곽 사이에 방형의 위패형(61×17㎝)을 새기고

그 안에 자경 9㎝의 ‘秋溪堂(추계당)’이라는 당호를 새겼다.

상대는 문양이 없고 바로 천판으로 연결되는데 희미한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상륜부는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구름문양을 새겨 장엄을 더했다.

사영당 부도는 석종형과 8각원당형의 양식에서 벗어난 이형(異型) 부도이다.

방형의 큼직한 하대석을 앉히고 귀퉁이에 각기 사방을 향하고 있는 용두를 조각하였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역동감이 감돌고 있다. 입에는 여의주가 보이지 않는 대신

양쪽 눈을 크게 부각시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턱 밑으로는 역린이 선명하며, 목 뒤로는 굵은 비늘을 새겨 사실성이 뛰어나다.

그 위로는 한 돌로 연결된 복련이 이어지고 있는데, 각 면이 2엽씩 모두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다시 복련 위로는 8각의 중석이 연결된다. 8각의 중석은 정교하면서도 장식성이 부각되고 있다.

 연꽃의 모습은 처음에는 막 피어오르는 꽃망울부터 시작하여 점점 그 꽃망울이 벌어지는 모습으로 전개하다가

 맨 마지막에는 활짝 만개한 상태로 표현되었다. 탑신은 중앙 몸통 부분이 배가 부른 편구형이다.

북쪽에는 직사각형의 위패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자경 6.5㎝의 ‘泗影堂(사영당)’이라는 당호를 새겼다.

옥개석은 방형인데 상단에 팔작지붕형의 합각을 나타냈으며 기왓골 없이 우동(내림마루)만을 각출했다.

상륜부는 옥개석과 한 돌로 하여 연결되는데, 노반 없이 복발과 보주가 이어지고 있다.

안(性安)의 제자 사영당 신희(信熙)……”라는 기록이 있어 조성연대는 추계당 부도가 17세기 중반, 사영당 부도는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능가사에는 10기의 부도가 있는데, 이 중 추계당과 사영당의 부도 2기는 원위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고 있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고흥군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및 사찰종무소스님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9.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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