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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능가사(高興 楞伽寺),부처님 몸에 법비가 흐르는곳 능가사 법향기에 젖다 본문
고흥 능가사(高興 楞伽寺)
부처님 몸에 법비가 흐르는곳 능가사 법향기에 젖다
▣ 고흥 능가사(高興 楞伽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위치 : 전남 고흥군 점암면 팔봉길 21(점암면)
전화 : 061-832-8090
▣ 사찰기행일 : 2019년10월28일 월요일. 날씨: 맑음
▣ 능가사 개요 :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417년 아도화상(阿道)께서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조선 인조22년(1644년)에 벽천(碧川)정현대사(正玄大師)가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벽천은 원래 90세의 나이로 지리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절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라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능가사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993년에 응진전을, 1995년에 사천왕문을 각각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보물 제1307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당·종각·천왕문(天王門)·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350여 년 전에 나무로 만든 뒤 개금한 불상 8위와
나무로 만든 뒤 도분(塗粉)한 불상 22위, 보물 제1557호로 지정된 높이 157㎝의 범종(梵鐘)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인 4.5m의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 귀부(龜趺) 위에 세워진
높이 5.1m의 사적비(事蹟碑)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중 사적비는 1726년(영조 2)에 건립한 것으로 불교의 유래와 절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귀중한 자료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비석은 원래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술을 부려 절 뒤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절의 경내에는 광희(廣熙)·사영당(泗影堂)·추계당(秋溪堂) 등의 부도(浮屠) 8기가 있다.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일본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의 태자가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이 절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7일 만에 승려가 나타나서 태자를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며
절의 승려들이 법당 벽에 그 모양을 그려놓았던 것이 영조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부속암자로는 만경암(萬景庵)과 서불암(西佛庵)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 사찰기행 가는길 :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순천방향→→→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고흥로 고흥방향
→→→우주항공로 고흥도양방향→→→ 공흥로 정암방향→→→능가사주차장
123km 승용차 1시간30분 소요.
→→→→→사찰기행시작
산에 오르면 사찰이 있고 사찰에 가면 산이 있다.
늘 그렇듯이 팔영산 산행후 능가사를 둘러보고 참배하는것으로 산행과 사찰 기행을 겸해본다
八影山 楞伽寺(팔영산 능가사) 초석
팔영산 능가사 천왕문 가가전에 이렇게 능가사 초석이 일주문을 대신해서 서 있다
능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417년(눌지왕 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였다 하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창건자의 신빙성은 없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1644년(인조 22)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한다.
능가사 천왕문(楞伽寺 天王門)
능가사에는 일주문이 없으며 바로 천왕문이 능가사의 입구이다
보통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가기전에 천왕문이 있으며 천왕문 전각에는
사천왕은 불교 이상 세계의 중심 수미산 제석천을 섬기며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라 하며
봉황문이라고도 하고 본래 맑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문이다.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깨서 삼보(三寶)를 지키시는 문이다.
나쁜 것을 깨 버리고 올바른 길을 펼치려는 마음을 일깨워 주고 있는데 그 뜻이 있다.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들고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잡았으며 광목천왕은 용관, 여의주(如意珠)
또는 견색(絹索; 새끼줄)을,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대체로 이들 사천왕은 왼쪽에 동.남천왕, 오른쪽에 서.북천왕이 배치된다.
이 사천왕들은 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재래의 神(신)인데,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서 사방을 지키게 된 것이다.
일정한 모습이 처음부터 규정된 것이 아니어서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중앙 아시아나 중국
우리 나라로 전파되는 동안 무인상(無人像)으로 변형되었다.
천왕문 편액
八影山 楞伽寺(팔영산 능가사) 편액도 걸여 있다
천왕문 직전으로 대웅전 바로 보인다 그야말로 일직선상에 있다
대웅전 뒷편은 팔영산이 능가사를 보호하듯이 봉우리가 둘러 쌓여 있고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법 향기가 세속의 떼를 씻어주는듯 하다.
高興楞伽寺木造四天王像(고흥능가사사천왕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 능가사 천왕문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 4구의 사천왕상이다.
좌우 2구씩 목책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천왕문 입구 왼쪽 앞쪽에 북방 다문천왕이, 뒤쪽에 서방 광목천왕이 배치되고
오른쪽 앞쪽에 동방 지국천왕이, 뒤쪽에 남방 증장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사천왕상 중 동방 지국천왕상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능가사사적비 등에
이 사천왕상이 1666년(현종 7)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천왕상이 안치된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1995년 천왕문 해체 복원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1666년에 건립된 후
1824년(순조 24)과 1931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천왕상은 나무로 제작되었고 서 있는 입상이 아니라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의 의좌상(椅座像)으로
높이는 450㎝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연화문이 그려진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머리 양 옆으로 보관에 달린 끈이 휘날린다.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부드럽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천왕상은 갑옷을 입은 무장형으로 어깨 위로 한 가닥의 천의(天衣)가 휘날리고 있다.
천왕이 든 지물은 북방 다문천왕이 당(幢)을,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보주를
동방 지국천왕이 비파를, 남방 증장천이 칼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형 사천왕상은 중국 원대와 명대에 갑옷을 입고
위협적인 얼굴을 한 용맹스런 장수의 모습에 비파, 용과 보주, 당, 탑 등의 다른 지물을 가지고 있다.
능가사 대웅전(楞伽寺大雄殿)
능가사 대웅전 터를 보면 많이 널단느것을 알수있다
오래전에는 많은 가람이 배치 되었으리라는 나름 생각해본다.
능가사 대웅전은 18세기 중엽에 중건된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건물이다.
보물 제13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능가사는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사찰이 모두 소실되어서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44년(인조 22) 정현대사(正玄大師)가 산의 남쪽에서 옛 절터를 발견하여 중창하고
그의 제자들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도 이때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능가사 대웅전의 이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건물로
한 단의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배흘림이 약하고 거친 두리기둥을 세웠다.
원주에 비하여 조그마한 주두가 창방과 용두를 지지하고 있으며
그 위에 다시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장식한 용두가 외삼출목·내사출목의 공포를 받쳐주고 있다.
살미첨차 앙서의 굽면은 완만한 곡면을 이루고 위로 올라갔으며, 첨차의 곡면 역시 약간 경사를 두고 비스듬히 깎여 있다.
어간(御間)은 4분합문으로 주간포가 3구 있으며, 협간(夾間)은 2분합문으로 주간포가 2구
툇간은 외여닫이문으로 주간포 1구가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조그마한 닫집이 4개의 고주에 결구되어 있으며, 넓은 공간을 4개의 대량과 4개의 고주가 받치고 있다.
내부 공포는 운공형(雲工形)으로 조식되어 있는 살미첨차가 커다랗게 결구되어 있으며
맨 밑에는 용의 몸통 부분으로 받쳐지고 있다.
천장은 층단천장으로 된 우물천장이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창호는 빗살무늬를 하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이며 직경이 큰 서까래가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설치되어 있다.
능가사 대웅전(楞伽寺大雄殿)
능가사의 건물의 배치는 현재 사찰의 정문격인 사천왕문(四天王門)이 사역의 맨 앞쪽에 있고
뒤쪽으로 대웅전이 들어서 있다.
지형은 거의 평탄하며 건물은 남북의 종축선상에 들어서 있다.
조선후기의 건물이지만 규모가 크며
건물의 좌향(坐向)이 입구의 방향 때문에 북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능가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외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영광의 불갑사 대웅전
부안의 개암사 대웅전과 그 맥을 같이 하며
포벽 수장재에 도드라지게 새긴 첨차는 사찰건물에서 보기 드문 예에 속하는 등
조선 중·후기 호남지역 사찰건축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물로서 학술적·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능가사 대웅전(楞伽寺大雄殿) 주련
象彼雷驚花入牙(상피뢰경화입아) 코끼리가 우뢰에 놀라니 꽃이 어금니로 들어가느니라.
犀因玩月紋生角(서인안월문생각) 물소가 달 구경하니 문체에 뿔이 생기고
二三千處管絃樓(이삼천처관현루) 수많은 관현루에 음악소리 같은데
四五百條 花柳䘕(사오백조화류항) 사오백 그루의 늘어진 버드나무 숲
樓閣重重華藏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