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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연화산(남산)固城 蓮華山(南山). 산책삼아 연꽃을 닮은길을 걸어 남산에 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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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연화산(남산)固城 蓮華山(南山). 산책삼아 연꽃을 닮은길을 걸어 남산에 서다

바다늑대FORCE 2019. 6. 16. 19:57



고성 연화산(남산)固城 蓮華山(南山)

  산책삼아 연꽃을 닮은길을 걸어 남산에 서다

▲ 경남 고성 연화산(남산)

   남산높이 :427m

   위치 : 경남 고성군 개천면에 걸쳐 있는산


▲ 산행일 ; 2019년6월16일 일요일  날씨 : 맑음


▲ 나의 산행코스

   옥천사 주차장→→→청련암 돌계단 →→→청련암→→→황새고개→→→남산

→→→갓바위→→→황새고개 →→→청련암→→→옥천사주차장

왕복 2km  1시간 5분 소요


▲ 산행지 개요 :

남산은 연화산의 한 봉우리 이다.

고성의 연화산은 도립공원임에도 불구하고 산세와 자락이 생각보다 장엄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은 곳으로

수수하고 아기자기한 보통 이상의 산이라 여기면 된다.

연화산은 산의 형상이 연꽃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옥녀봉, 선도봉, 망선봉의 세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의 북쪽 기슭에 옥천사와 백련암, 청연암, 연대암 등의 암자가 있다.

연화산을 등반하는 재미중의 하나는 연화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는

옥천사를 둘러보는 것으로 천년고찰의 이 절은 가람의 배치가 섬세한 화엄 10대사찰의 하나다.

주변 풍광도 아름답지만 절 곳곳에 전통의 향기가 피어올라 순례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곳이다.

연화산에 오르면 동쪽으로 쪽빛 바다의 당항포가 한눈에 들어오고

연봉속에 파묻힌 옥천사의 전경과 불교유물전시관을 볼 수 있다.

산세가 순탄하고 길이 잘 닦여 산행이 수월한 산이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옥천사 대웅전 뒤에 위치한 옥천샘은 위장병,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소문나 있다.


▲ 연화산(남산) 등산지도



▲ 산행지 찾아가는길

진주ic삼거리→→→진마대로 창원방향→→→문산 영오방향→→→연화산1로→→→옥천사 주차장

23km 승용차 30분소요



→→→→→2019년6월16일 일요일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서

오후 옥천사 사찰을 둘러보고 운동삼아 남산에 올랐다

오늘따라 일요일이라 그런지 산악회 단체 산행자들이 많았다.


옥천사에서 청련암 가는길옆 계곡

옥천사 계곡엔 청수같이 맑은물이 졸졸 흘러내려 가고 있다

바위틈사이 작은 골을 만들어 한줄기 흘러 내리는 모습은 부처님의 감로수와 같아 보였다

연화산은

연화산(蓮華山)은 경남 고성군에 있는 산으로 옥녀봉, 선도봉, 망선봉의 세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1983년9월29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비슬산이라고 불렸는데 이 비슬(毘瑟)은 산의 동북쪽에 선유(仙遊), 옥녀(玉女)

탄금(彈琴)의 세 봉우리가 둘러있어 마치 선인이 거문고를 타고

옥녀가  비파를 다루고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조때 학명대사가 연화산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연화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형상이 연꽃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진다.


남산과 청련암 가는 계단길

삼나무가 우거진 돌계단을 10여분 걸어가는 청련암이 나오며

청련암우측길로 가면 남산가는 등산로가 평탄하게 잘 닦여져 있다

6월의 짙은 초목이 하늘을 찌를듯 하고 솦에 가려 하늘도 가려져 있다

이길을 걷다보면 기운이 청정해지고 시원하게 공기가 폐속으로 녹아 내린다.


청련암 가는길

한발 한발이 수행의 길이며 번뇌를 씻어내는 나만의 수행길이다

간간히 우거진 나무 사이로 햇살이 부처님 가피(加被)처럼 느껴진다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

청련암을 찾기위해 이길을 많이도 올랐다

내자와도 오르고 딸아이와도 올랐다.


蓮華山 靑蓮庵(연화산 청련암)  慈悲無敵(자비무적)

청련암 오르는길 좌우 초석에는 자비무적이란 글이 있다

자비무적이란 무서운 세상에서 자기를 보호할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상대를 미워하지 않는 자비로운 사랑이란 듯이다

자비무적(慈悲無敵)에 대한 설화를 보면

어느 마을에 아름다운 소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산적들이 그 마을을 몽땅 털어가기 위해 쳐들어와

그 소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 위협하며 뒤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산적 두목은 목이 말라 "야 이놈들아, 목이 탄다. 우선 물이나 좀 마시고 하자."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 소녀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불을 밝히고

물을 떠서 대접에 따르면서 대접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산적 두목은 화가 나서 "물은 왜 들여다보느냐. 어서 가져오기나 해." 산적은 큰 소리로 호통을 쳤으나

소녀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이 물에 티끌이나 머리카락이 있으면 크게 결례가 될 것 같아서요.

" 산적은 뜻밖이라는 듯 어리둥절해하며 "뭐라구? 우리는 산적이야.

너희 마을을 털어 갈려고 왔는데 물 떠다주는 일에 왜 그리 마음을 쓰지?"

소녀는 다시 "여러분은 산적으로 남의 재물을 털어가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여러분은 제 집에 오신 손님입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마음을 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 산적은 마침내 물이 깨끗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 물을 받아 마시면서 기분이 좋았다.

 "너는 참 착하구나. 내 여동생처럼 귀엽구나. 언제까지나 그 고운 마음으로 살아라.

 "그러겠어요." 소녀는 이어 "지금 두목님께서는 저를 여동생처럼 귀엽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남의 것을 털어가고 사람을 다치게 하다가 왕에게 잡혀 목을 베인다면 저는 얼마나 슬프겠어요?

진심으로 저를 동생처럼 생각하신다면 제발 그런 슬픈 소식일랑 듣지 않도록 해 주셔요."
그날 밤 이 마을에서 산적들에게 재물을 털린 집은 한 집도 없었다.

그 다음날부터 이 마을에서 산적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옛날 산적들보다 더 지능적이고 흉악한 떼강도들이 대낮에도 설쳐대기 일쑤다.

때문에 도시에 사는 가정주부들은 대낮이라도 벨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세상이다.

그 원인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우리 국민들의 정서와 마음속에 자비와 지혜가 사라지고

원한과 어리석음이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는 말이 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면 원수나 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산적과 소녀>에서 보여준 이 설화는 지혜와 자비심이 많은 한 소녀의 행동이

흉악한 산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한 마을 전체를 구했고

나아가서는 도적들에게 개과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데 더욱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 설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주인의식이다.

소녀는 산적이 목이 마르다고 할 때 선뜻 물을 떠 왔다.

그것은 비록 도적들일망정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이기 때문에 주인 노릇을 한 것이다.
둘째는 자비심이다.

소녀는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손님을 대하는 평상심으로 돌아가

깨끗한 물을 준 이점이 흉악한 산적두목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셋째는 지혜다.

산적두목이 소녀에게 마치 누이동생처럼 귀엽다고 하자 소녀는 비록 그가 산적 두목이지만

그를 오빠로 여기고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강도질의 결과를 상기시킴으로써 그 일을 중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악인에게 베푸는 자비는 절복(折伏)으로 회향되기도 한다.

<절복>이란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가진 사람의 옳지 않은 사상을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절복시키는 데는 어디까지나 자비심에 바탕을 둔 좋은 방편을 써야지 폭력이나 사술(邪術)을 써서는 안 된다.

선방편(善方便)이란 올바른 수단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행동이 가정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나라 전체로

나라에서 세계로 확산될 때 이 지구는 바로 신음에서 벗어나 바로 정토가 되는 것이다.


청련암 옆 남산 들머리

여기서 부터 연화산 남산으로 가는 초입이다

일반적으로 산행자들은 연화산 1봉에서 시작하여 연화산을 거쳐 남산을 찍고 옥녀봉까지

산행을 하는 코스로 하는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냥 저냥 산책삼아 오늘도 남산에 올라 본다.


남산 초입구간

남산 초입구간은 황새고개까지 그냥 평탄한길이다

그냥 둘레길 처럼 가볍게 걸을수 있는 코스이며

녹음이 짙은 그늘 사이로 건는것만으로도 마음의 정화가 이루어 진다

여름이면 상사화(꽃무릇) 여기저기에서 피어나 산행길을 꽃길로 만들어 준다

연화산 산행은 4코스로 이루어 져 있는데

1코스는 주차장에서 매봉을 거쳐 연화산 정상과 운암고개를 지나

남산과 황새고개를 거쳐 주차장으로 오는 코스인데 6.9KM이며 4시간20분정도 소요된다


황새고개

여기서 부터 옥녀봉과 남산의 갈림길이다

남산으로 가는길은 여기서부터는 급경사지 즉 깔꼬막 길이다

급경사지만 오르면 바로 남산 정상이다

연화산 산행 2코스는

주차장 매봉에서 느재고개를 지나 싸리재를 거쳐서 연화산 정상찍고

남산을 거쳐 청련암으로 하산하는 코스인데7KM이며

대략 4시간 정도 소요된다.


황새고개

잠시 솔나무에 기대어 청련암쪽을 바라본다

우리의 삶에는 휴식이 필요하다 휴식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산에 오르는것이 나만의 휴식이다

다리도 아프고 땀도 흘러내리고 육신은 피로하지만 마음은 휴식이기 때문이다

연화산 산행 3코스는

옥천소류지에서 옥천사 백련암을 거쳐서 남산과 상사화 군락지를 지나 옥천소류지까지이다

4.9KM인데 대략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남산가는 탐방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우거진 수목에 가려져 시원함이 밀려온다

고성 연화산은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 속하는데 산에 오르면 그다지 100대명산 다운

아름다움이나 조망은 없다

연화산이 품은 천년고찰 옥천사가 있어 그를것이다

옥천 소류지에서 부터 옥천사 까지 가는길은 사계가 너무 아름답다

여름에는 녹음이 가을에는 단풍이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남산가는 탐방로

여기서는부터 남산정상 까지는 급경사를 이룬다

경상도 사투리로 깔꼬막이 심하다

등산이 익숙하지 않은 산행자들은 헉헉거려야 하고 한걸음 옮길때 마다

다리가 아플것이다.

예로부터 도립공원 연화산

주변에 연화팔경(蓮華八景)을 정해 두어 그 산의 가치를 높여 놓았

옥천사 사찰 뒤 높은 봉우리에 아침햇살이 제일 먼저 들고 온산이 거울처럼 보인다 하여

1경으로 응봉초경(鷹峰初景)이라 했고

연화산 남쪽 봉우리인 물무덤재의 낙조가 천하일품이라 2경으로 수등낙조(水嶝落照)라고 불렀다.

북쪽으로 뻗은 봉우리인 장군봉 혹은 사자봉의 거석이 장관을 이룬다 해 3경으로

장군거석(將軍巨石), 기암괴석중 크기와 모양이 특출한 일곱바위를 칠성기암(七星奇岩)으로 4

산속 외딴 암자에서 피어오르는 취사연기가 마치 한 폭의 그림같아서 5경 연대취연(蓮擡翠煙)으로 지칭됐다 한다.

이밖에 골짜기 안개가 마치 춤을 춘다해 운암낙하(雲庵落霞·6)

봄꽃이 지천에 늘려 중춘앵화(仲春櫻花·7)

늦가을 단풍이 절경이라 모추풍엽(暮秋楓葉·8)이라 했다.


남산427M

남산은 연화산의 한 봉우리이며

연화산은  옥녀봉·전도봉·만선봉 등 3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위에 시루봉(542m)·덕산(278m) 등이 있다.

1983년 9월 개천면·영현면을 포함한 주변일대를 연화산도립공원(총면적 28.72㎢)으로 지정했다.

산정을 중심으로 사방이 비교적 완만한 경사이다.

별로 특징이 없는 흙산이지만 소나무와 대나무 등의 상록림이 울창하며

계곡과 주변의 사찰·문화재 등이 조화를 이룬다. 특히 백년노송이 일품이다.

백련암·청련암 등과 북쪽 기슭에는 옥천사가 있다.

옥천사 경내에는 옥천사임자명반자(보물 제495호)·옥천사자방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옥천사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옥천사향로(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 등의 문화재와 고승 청담의 사리탑이 있다.


남산427M

옥천사 주변은 송림이 울창하지만

산 중턱으로 올라가면 의외로 규모가 큰 대밭이 펼쳐져 있어 경관이 좋다.

특히 이곳에서 자생하는 복분자딸기·송이버섯과

복분자술 등은 보양과 이뇨에 약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성리-옥천사-성고개(황새고개)-연화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잘 정비되어 있어

또 산림청 선정 100대명산이라 산행자들이 많이 찾고있는 산행지 이다.


남산 돌탑

연화산 옥천사는 조산후기 通佛敎(통불교) 사찰의 표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 말사이다

신라의 성인 원효대사와 함께 쌍벽을 이룬 의상조사는 당나라 유학시 그곳 종남산에서

지엄선사로부터 화엄의 오묘한 뜻을 깨닫고 귀국하여 화엄대의를 선양하면서

국내의 영지를 가려 불찰을 많이 세웠는데 그것을 화엄십찰이라고 일컬었고

옥천사는 그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창건되었다.

경내에 달고 맛있는 물이 끊이지 않고 솟는 샘이 있어 절 이름을 옥천사라 불렀다 한다.


갓바위 쪽 암봉

갓바위 쪽으로 가다보면 암봉하나가 탐방로 중간 능선에 우둑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탐방로 주변에는 멧돼지가 먹이를 찾느라 여기저기 스셔 놓은 흔적이 즐비 하였다

연화산은 옥천사 로 인하여 산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옥천사는

창건 이후 수차례 중창하였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완전 소실되었다가

인조 17년(1639년) 학명대사가 대둔리 촌락에서 유숙하다가

신인이 지시하는 곳에 대가함의 도국이 나타나는 영몽을 꾸고 다음날 이곳을 찾아

명당의 절터를 알고 의오대사와 힘을 합하여 7번째의 중창을 시작하였다.

이때 건립한 것으로는 인조 22년 (1644년)에 동상당을 세웠고

같은 23년에 심검당을 세웠으며 효종5년에는 법당과 궁선당을 세우고 현종 5년에는

성요, 승안, 돈계화상 등의 원력으로 정문을 건립하여 그 규모를 확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옛 신라고찰의 맥을 잇고 면목을 갖추었고

그 뒤 숙종3년에 묘욱선사가 법화외사를 열고 대중을 모아 묵루각, 향적전, 만월당을 세우고

다음 해에는 관음전, 청계당, 옥련암을 세웠으며 한해 넘어서는 동상당을 중창하고

그 다음에는 승당과 선당, 정문, 시왕전, 백련암을 중창하였으며

영조 40년에는 자방루를 건립하였으니 이것이 8번째의 중창이다.

임진왜란 이후로 두 번째의 환란을 입은 천년고찰에 구제의 손길을 펴신 분은

화농화상이었고 때는 고종 25년이었다.

화상은 난동으로 황폐해진 경내를 정돈하고 적묵당과 탐진당을 중수하였으며

각 암자도 면목을 일신케 하였는데 옥천사의 오늘을 있게 한 위대한 공이 아닐 수 없다.

이때를 9번째 중창으로 부르고 있다.


찰피나무(고성 북평리)

염주보리수 나무라고도 하며 청련암 우측 남산 산행 들머리에 있으며

찰피나무는

피나무과의 큰키나무로 높이가 20m 정도까지 크게 자란다.

우리나라에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산지에 분포한다.

학명은 Tilia mandshurica Rupr. & Maxim.이다.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에 있는 찰피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흔히 피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는 우리나라만 해도 9종이나 되며 서로 구별이 쉽지 않다.

대개 열매로 구분하는데, 둥글고 표면에 줄이 없는 것이 피나무, 둥글고 열매의 아래 부분에

희미한 줄이 있으면 찰피나무, 타원형이고 끝이 뾰족하며 5개의 줄이 밑에서 열매 끝까지 있으면 염주나무

둥글고 밑 부분에만 5개의 줄이 있는 것을 보리자나무라고 한다.

줄기는 곧게 올라가서 원형의 수형을 만든다.

짙은 회색의 나무껍질은 매끈하며 오래되면 세로로 길게 갈라진다.

어른 손바닥만큼 큰 잎은 어긋나기를 한다.

잎의 밑부분은 심장형으로 오목하고 가장자리에는 뾰족한 톱니가 있다.

꽃은 양성화로 6∼7월에 잎겨드랑이에서 연한 황백색으로 핀다.

둥근 열매는 포에 붙어 있어서 떨어질 때 프로펠러처럼 날아서 이동한다.

양수지만 음지에서도 잘 견딘다. 습하고 비옥한 토양에서 잘 자란다.

추위와 공해, 병충해에 내성이 있지만 건조에는 약하다.


化主 裵功德華功積碑(화주 배공덕화공적비)

청련암 도량 우측에 화주 공덕비가  남산 들머리에 있다

보통 시주(施主)라는 단어를 잘알지만 화주 될화 化 주인 주主로 세겨져 있다.

청련암에는 많은 전설이 많이 있는데

사찰경내에 황소바위는

청련암에 들어서면 황소바위가 사바로 보이며

이 바위는 황소가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황소바위라 불리운다.

오른 쪽 윗부분을 두드리면 소 엉덩이를 두드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난다.

어느 때 통행에 지장이 있다하여 석수를 시켜 목 부분을 잘라내려 하자 바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날 밤 감원 스님의 꿈에 황소가 나타나 슬피 울더라고 한다.

그리하여 바위를 그대로 두게 되었는데 손상된 부분에는 지금도 피가 흐른 흔적이 있다.


청련암 입구

청련암은 옥천사의 첫손가락 꼽을 수 있는 산내암자이다.

창건년대는 1678년(조선, 숙종4년)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창건주는 묘욱선사(妙旭禪師)라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묘욱선사는 1677년 대규모 중창불사를 하여 가람을 새롭게 일신한 대공덕주였는데

이 무렵 청련암도 창건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청련암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 중건되었겠지만 1895(고종32)에

化主수룡 화용스님에 의해 중창된 사실은 기록에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1901년에는 청련암의 아미타여래도가 조성 봉안되었으니,

이 불사는 금남치구(錦南致口)스님이 도감의 소임을 맡고

기운과연(奇雲斗演)스님이 화주가 되어 이루어졌다.

청련암이 창건된지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고승 대덕이 주석하며

법등을 이어 왔는데, 특기할 만한 사실로는 서봉(瑞峯)스님의 방광(放光)과

기운스님·영송(永松)스님의 이적(異蹟) 및 서응(瑞應)스님의 만일계(萬日契) 결성 등을 들 수 있다.

현 감원인 승욱(昇旭)스님 소임을 맡으시 이후로 큰 법당의 개수와 천불전

요사채, 산신각 등을 건립하여 가람을 쇄신함과 더불어

1997년 서응스님의 만일계 정신과 동체대비의 근본정신을 살려

“정토만일봉사회”를 결성하여 불교사회복지를 실천하고 있다.



대웅전과 닥종이 솥

옥천사는 정조 말기에 "어람지 진상사찰"로 지정되어

철종14년(1863) 해제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 닥종이 제조 부역에 시달렸다.

스님들은 공양만 먹으면 닥나무 껍질을 벗겨 끓인 후

이를 찧어 계곡물에 일렁거려 종이를 뜨는 노역에 시달렸다.

노역에 질린 스님들은 하나 둘 떠나기 시작

정조말기에 340명을 헤아리던 스님 숫자가 철종 15년 해제될 때는 10여명이 남았다 한다.

옥천계곡에서 자라는 닥나무는 품질이 좋은데다

색색으로 물을 들여 진상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옥천사 닥종이를 최고로 쳐주었다.

이 때에 쓰던 유물로서 유일 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지금 청련암에 무쇠솥이 남아 있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 이 솥에 넣어 끓이던 유물이다.


청련암 삼성각 및 장독대 은행나무

청련암 은행 나무  오랫동안 청련암을 지켜주는 나무인듯 보였다

장독대는 시골집 고즈넉함이 뭍어 있고 그 위 계단따라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청련임에는 고승 이야기가 있는데

고종16년(1879)년의 일이다. 청련암에 서봉(瑞峯)스님이 계셨다.

서봉스님은 환갑을 지난 나이에 출가하여 참선이나 간경을 하지 못하게 되자 염불을 하기로 결심하고

매일 조석으로 정화수를 떠놓고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지송하였다.

세월이 흘러 입적이 가까웠을 무렵에는 중풍이 와서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고 대소변을 받아내었다.

시봉도 하루 이틀이지,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게되자

방에서 아무데나 대소변을 누는 형편이 되어 방안에 구린내가 진동했다.

큰절에서 끼니때마다 공양을 지어다 날랐는데 공양을 들고 간 행자들이 냄새 때문에

서로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싸우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원스님과 부전스님의 꿈에 화관을 쓴 불보살들이 꽃가마를 운반해 와서

서봉스님을 가마에 태워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꼭 같은 꿈을 꾼 두 분 스님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청련암에 울라가 서봉스님의 방문을 열어보았더니

스님은 앉은 채로 입적하셨고 구린내 나던 방은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였다.

그리고 서쪽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다비하는 날 밤에는 청련암은 물론 온 산중에 대낮같이 밝은 서기가 뻗쳤다.

절에서는 방광 사실을 몰랐는데 동네 주민들이 옥천사 근방의 하늘이 대낮같이 밝으므로

필시 불이 났다고 생각하고 물통 등 소방도구를 챙겨 부리나케 절에 올라왔으나  불은 나지 않았다.

소란 소리를 듣고 스님들이 나가보았더니 옥천사 부엌이 훤했다.

그리고 어디서 빛이 나는지 알 수 없고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로소 옥천사입구 다비장에서 뻗어 오른 방광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사리가 방광을 하는 것으로 주민들은 절에서 불이 난 것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이에 감명을 받은 옥천사 스님들은 자신도 모르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이 나왔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옥천사 입구(버스 주차장입구) 바위에

 “서봉인오방광탑(瑞鳳印悟放光塔)”이라는 7자의 각자를 새겨 놓았다.

 비슷한 시기에 꼭 같이 방광하신 스님이 한 분 더 계신다. 혜우(惠雨)스님이시다.

혜우스님도 서봉스님과 마찬가지로 늦게 출가하여

청련암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지극 정성으로 구송하더니 입적시에 방광을 하였다.

서봉스님 방광탑 옆에 “혜우방광탑(惠雨放光塔)”이란 각자가 따로 새겨져 있다.

두 스님의 이야기는 실화로서 일념으로 염불하면 이처럼 사리에서 방광(放光)을 하는 수가 있다.

이 같은 영험은 옥천사 뿐 아니라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대원사 등 여러 사찰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청련암 주차장 도량에 있는 불상과 불탑

청련암에 얽힌 전설과 연화산의 한줄기인 남산을 운동삼아 걸어보고

산행길을 마무리 해본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고성군,청련암등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19.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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