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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주흘산(聞慶 主屹山).문경새재(聞慶鳥嶺)를 넘어 문경의 진산 주흘산에 서다 본문

바다늑대/山 & 旅行

문경 주흘산(聞慶 主屹山).문경새재(聞慶鳥嶺)를 넘어 문경의 진산 주흘산에 서다

바다늑대FORCE 2019. 5. 26. 21:32

문경 주흘산(聞慶 主屹山)

문경새재(聞慶鳥嶺)를 넘어 문경의 진산 주흘산에 서다

▲ 문경 주흘산(聞慶 主屹山)

    주흘산 주봉 : 1076m

    주흘산 영봉 : 1106m

    치 :  경북 문경시 문경읍에 있는산


▲산행일  : 2019년05월26일 일요일  날씨 : 맑음

▲나의산행코스 : 

 제1코스

새재주차장 - 제1관문 - 여궁폭포 - 혜국사 - 전좌문 - 주흘산 주봉

 - 주흘영봉 - 계곡 갈림길 - 조곡골 - 제2관문 - 왕건세트장 - 제1관문 - 새재주차장

편도 14.1km  6시간 13분 소요

 

▲산행지 개요:

문경의 진산(鎭山)인 주흘산은 ‘우두머리 의연한 산’이란 한자 뜻 그대로 문경새재의 주산이다.

남쪽의 중부내륙고속도로나 3번 국도를 타고 진남교반을 지나 마성면 너른 들판에 들어서면

앞쪽으로 기세 당당한 산이 하나 버티고 있다. 양쪽 귀를 치켜 세우고 조화롭게 균형미를 갖춘 산세이다.

영남(嶺南) 지방이라 할 때 영남이란 충청도와 경상도를 나누는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영(嶺)의 남쪽에 있다하여 영남이라 불렀다.

주흘산은 10m 높이의 여궁폭포와, 혜국사, 팔왕폭포, 문경 1,2,3관문등이 있다.

비구니의 수도 도량인 혜국사는 신라 문성왕 8년 846년 보조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창건시 범흥사라고 하였으나

고려 공민왕이 난을 피해 행재(行在)하여 국은(國恩)을 입어 혜국사로 개칭. 주흘산 등산로변에 있다.

주흘산과 조령산의 사이로 흐르는 조곡천 동쪽면에는 주흘관(조령 제 1관문)

조곡관(조령 제 2관문), 조령관(조령 제 3관문)의 세 관문과 원터,성터 등

문화재가 많으며 주막도 있고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새재계곡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경새재도립공원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다. 이 일대를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주흘산을 가면 정상이 주봉인지 영봉인지 헷갈린다는 사람들이 많다.

주봉 표지석에는 "주흘산"이라고 표시되어 있고

영봉 표지석에는 "주흘영봉"이라 표시되어 있을 뿐아니라, 주봉은 주위경관과 전망이 뛰어나고

영봉은 봉우리 같지도 않으며 지나치는 등산로 같고 조망도 없기 때문이다.

주봉은 산 봉우리 중 그 산을 상징하는 주봉우리이고, 최고봉은 산줄기 중 최고 봉우리이다.

지형도에 의한 정확한 높이를 표시하게 되면서부터 보다 높은 최고봉을 주봉으로 표시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영봉을 정상으로 표시한 것 같다.

이전에는 주봉을 주흘산의 정상으로 여겨왔다. 주봉과 최고봉 개념의 혼돈으로 영봉을 정상이라고 하지만

정상은 주봉, 최고봉은 영봉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전국 산 높이 정비사업"에 의하여 2007년 12월 발행한 "한국의산지" 산명사전편에는

영봉(1,108m)을 정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인기명산  73위이묘 10-11월 가을에 많이 찾지만 봄, 여름에도 두루 인기 있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이고

문경새재 등 역사적 전설이 있으며, 여궁폭포와 파랑폭포 등 경관이 아름답고

월악산 국립공원구역인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야생화, 오색단풍, 산죽밭이 유명하며, 조선조 문경현의 진산으로 문경 1, 2, 3관문이 있다.


▲  주흘산 등산지도


▲ 산행지 찾아가는길

진주Ic삼거리 →→→ 907지방도 →→→광주대구 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고령jc

→→→ 문경새재 충주방향 →→→ 문경새재 도립공원 주차장

218km  승용차 2시간 30분소요



→→→→→2019년5월26일 일요일 

새벽같이 일어나 산행준비를 하였다

문경에 있는 주흘산 산행을 위해 배낭 꾸려 길을 나선다.


문경새재 아리랑비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에 문경새재아리랑비가 우뚝 서있다

초석은 2013년8월13일에 제막식을 가졌고 한다.

민족 고유의 민요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채록한
호머 헐버트의 아리랑이 새겨진 비석이 문경새재에 세워졌다. 
문경시는 13일 문경옛길박문관 야외전시장에서
세계 최초의 아리랑 기록인 헐버트의 아리랑 악보를 돌에 새긴 문경새재아리랑비 제막식을 가졌다 한다
지금까지 아리랑은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와
아리랑의 역사를 알기에 턱없이 사료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1896년에 기록된 헐버트의 아리랑 악보가 발견되면서
현재 우리가 아는 아리랑은 근대에 만들어졌음을 확인했다. 
헐버트가 기록한 악보의 가사에는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가사가 명확하게 기재돼 있으며 이 노래가 기록된 조선유기 잡지 중
`한국의 소리음악 Korean Vocal Music`에 의하면 “아리랑은 한국인에게는 쌀과 같은 존재다.
다른 노래들은 말하자면 반찬에 불과하다.
이 노래는 어딜 가도 들을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이 곡은 삼천오백이십일 전인
1883년부터 유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노래는 즉흥곡의 명수인 한국인들이 끝없이 바꿔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후렴구는 바꾸지 않고 항상 다음과 같이 부른다”며 채록되어 있다.
헐버트가 서양악보로 채록했던 아리랑에 문경새재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경복궁 중건과 맞물려 근대에 가장 많이 불렀던
아리랑이 바로 문경새재아리랑임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한다.
<출처 : 경북매일>

문경새재 과거길

주흘산(主屹山·1106m)과 조령산(鳥嶺山·1025m) 사이 좁은 골 따라 난 길을 따라

옛날 선비들은 희망을 품고 장원급제를 꿈꾸며 선비들이

굳이 이 길을 택해 한양 땅으로 향했는가 보다

주흘산은 문경새재 과거길을 따라 제1관문을 지나서 우측에 주흘산 주봉으로 가는 들머리가 있으며

문경새재는

고갯길로 잘 알려져 있다. 새재에서 먼 한반도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진도에서 부르는

진도아리랑에도 사설의 첫 대목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도 관련이 깊은 곳이다.

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로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제1대로였던 영남대로에 위치하고 있다.
‘새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매우 다양하다.

고갯길이 워낙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고갯길 주변에 새(억새)가 많아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갯길을 의미하는 ‘새(사이)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이 있고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새재의 어원에는 많은 유래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지리학자들이 말하는 ‘새로 낸 고갯길’이다.
문경새재는 영남과 기호 지방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옛길이었다.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로

문경(聞慶)이라는 이름과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경사로운 소식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의미도 과거길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문경새재는 급제를 바라는 많은 선비들이 좋아했던 고갯길이었다.

그래서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했다.

《택리지》에도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곳을 왕래하였음을 헤아릴 수 있다.


주흘산 주봉 들머리

문경새재도립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과거길을 따라 1관문(주흘관)을 통과하면

우측에 들머리가 있다

여기서 주흘산 주봉까지는 4.5km 이다

이길로 가면 여궁폭포와 혜국사가 위치해 있다.

문경새재는

태종 13년(1413)에 개통되었다. 새재가 열리기 전까지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계립령의 하늘재가 주요 교통로였다.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는 세 개의 관문을 따라 옛날 선비들이 다니던 길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약 10km에 이르는 구간이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초점(草岾),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충청도의 한강 유역과 경상도의 낙동강 유역을 가르는 주된 도로였다.

새재는 임진왜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영남내륙을 지나 올라오는 왜군과 맞선 신립 장군은 새재를 버리고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크게 패하고 탄금대에서 투신했다.

전후 조정에서는 새재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이곳에 전쟁 대비 시설이 없음을 한탄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서애 유성룡은 관문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후 선조 30년(1597)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자 일자형의 성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령산성이 축조되었다.


여궁폭포(女宮瀑布)

5월 날씨 치고는 너무 더운 여름날씨 같았다

여궁폭포 물줄기에 더운기운이 씻겨 내려 가는듯 하다

여궁폭포는 주흘산의 대표적 폭포이다

높이는 20m정도 되며 옛날에 7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곳이라고 한다

폭포의 모습을 보면 여인의 하반신과 비슷하다고 해서 여궁폭포라고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큰바위 양쪽으로 벌어진 틈사이로 옥수(玉水)가 흘러 내리고

폭포를 자세히 올려다 보면 여성의 특정부위와 비슷해서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알수 있다.

여궁폭포 이름외에 여심폭포 또는 파랑쏘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다.


혜국사 0.7km

주흘산 주봉으로 가다보면 좌측에 혜국사가 있다

곧장 올라가면 헤국사를 거치지 않지만 잠시 발길을 돌려

혜국사 경내를 둘러보고 잠시 쉬었다 가는것도 좋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가 있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초입을 지키고 있는 주흘산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하늘의 구름도 잠시 쉬면서

그 경관을 즐기는 곳 바로 밑에 ‘혜국사(惠國寺)’ 사찰을 둘러보기 위하여 정상 가는 반대의 길로 접어 들어 본다.


주흘산 혜국사(惠國寺)

주흘산 혜국사는 통일신라(統一新羅) 문성왕 8년(846) 보조국사(普照國師) 체증선사가

주흘산 기슭에 법흥사(法興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말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파천(播遷)한 것을 계기로

나라가 은혜를 입은 절이라는 의미에서 혜국사로 불리게 되었다. 

사적기(寺蹟記)가 없어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1873년 송장선사와 지장선사가 중창을 했고, 근래에 여러 불사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혜국사(惠國寺)대웅전

혜국사(主屹山 惠國寺)의 주요 건물로는 금강문(金剛門), 대웅전(大雄殿), 만덕전(萬德殿), 산왕전(山王殿)등이 있다.

암자로는 안적암(安寂庵)과 은선암(隱仙庵), 용화사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적암만이 보전되어 있다.

1979년 산중탱화에서 사리(舍利)가 나와서 봉안하고 있으며 

자영당대사성연출세탑(慈影堂大師性演出世塔), 해월당여상지탑(慧月堂呂尙之塔)

해월당탑(海月堂塔), 연곡당사신지출세탑(淵谷堂思愼之出世塔)등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혜국사 대웅전앞 도량

큰나큰 솔나무 두그루가 혜국사 역사를 말해주는듯 하고

대웅전 앞 마당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일품이 였다

비구니 스님과 도량에 들어온 멧돼지 동영상도 보여 주셨고 산과 사찰에 대한 몇 담소 나누고

도량앞을 지키는 멍멍이 보살도 주지스님처럼 순하기가 거지없다.

혜국사에 관련한 재미있는 전설을 보면

조선 태종 때 문경현감이 긴급히 조정에 치계(馳啓)해야 할 안건이 있어

날 센 역졸을 시켜 상계(上啓)할 장계를 가지고 급히 다음 역까지 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감의 명령을 받은 역졸의 답을 기다리다 소식이 없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니

랑이가 먹다 남은 역졸의 신체일부와 행장을 발견하게 되어 호환(虎患) 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감은 이 사실을 조정에 상보(上報)했다.

이 장계를 받은 태종은 대노하여 즉시 봉명사(奉命使)를 차원(差員)하여

문경새재 산신령을 잡아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봉명사는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문경새재에 도착하여

산신령을 포착하려고 하나 산신령을 잡을 묘안이 나지 않았다.

궁여일책으로 새재 산신사(山神祠)에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한 후

제문을 불사르고 ‘혜국사’에 머무르면서 하회(下廻)를 기다렸다.

그날 밤 만월로 월광이 교교하여 잠도 못 이루고 전전반측(轉轉反側)하고 있는데

삼경쯤 되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 호랑이 울부짖음이 일어나더니 잠잠해지고

그 이튿날 앞마당에 여산대호(如山大虎) 한 마리가 죽어 있었고

그 후부터 문경새재에는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정상으로 가는 탐방로의 녹음

5월은 게절의 여왕답게 녹음이 짙어 눈이 시리다.

여름산은 이렇게 녹음이 짙어 좋다 코끝에 닿는 촉목의 내음이 너무 좋다

시원하게 내리는 초록물결속에 걷는것 만으로도

마음은 어느새 신선이 되었다.


대궐샘

대궐터 샘물에는 주흘산 백번 오르니 이 아니 즐거우랴 라고 새겨 놓았다.

산행길에 샘물 먹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한모금 마셔 보는데 엄청 차갑고 시원했다.

대궐터 약수터는 고려말 공민왕이 피신와서 여기에 대궐을 지어려 했다는 데서 유래 했구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사랑해서 왕위를 버려야 했던 왕으로서 청량산 까지 피신한 왕이다.

문경시의 자연환경을 보면

서쪽과 북쪽에 태백산맥에서 흘러나온 소백산맥이 뻗어 내리며 북쪽의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동쪽의 태백산맥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나온 소백산맥의 중앙부에 속하는 험준한 지역으로

동북부는 험산준령(險山峻嶺)이 둘러 있고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분지상(盆地狀)으로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부는 석회암지역으로 카르스트(Karst)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산계(山系)는 일반적으로 산세가 험준하고 고도가 높아서 대략 700m 이상의 기복차를 나타낸다.

시의 중앙부 남쪽 오정산(烏井山, 811m)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부운령(富雲嶺, 535m)

단산(檀山, 956m)·조항령(鳥項嶺, 673m)·운달산(雲達山, 1,097m)·마전령(馬轉嶺, 946m)

대미산(大美山, 1,115m)이 있고, 대미산에서 동쪽으로 황정산(黃庭山, 1,077m)

황정산 남쪽으로 공덕산(功德山, 913m)·천주봉(天柱峰, 845m)이 있으며

이들 산령(山嶺)이 형성하고 있는 산맥은 북쪽으로 이어진다.


천계단(1,000계단)

주흘산 산행의 최고의 묘미 천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래서 천계단 아래 대궐터에 샘이 있나보다

물 단단히 마시고 천계단을 올라가야 하기에 있나보다.

테크계단이 끝이 안보인다

그렇지만 경사가 그렇게 심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인 계단 코스다

무릎이 안좋은 산행자들은 늘 계단앞에서 한숨이 나오기 마련이다

신록이 물던 주흘산 천계단을 올라보자


천계단(1,000계단)

신록으로 물던 주흘산 정상을 향해 계단을 밟아 본다

천천히 천개의 계단을 하나 하나 밟고서 오른다

여기저기 초록으로 물든 산은 싱그러운 내음만 그득하다

문경새재로 잘 알려진 곳이다

문경시의 북서부에는 대미산(大美山, 1,115m)에서 시작해 포암산(布巖山, 962m)·

주흘산(主屹山, 1,106m)·마패봉(馬牌峰, 925m)·조령산(鳥嶺山, 1,017m)·이화령(梨花嶺)

갈정산(葛霆山, 991m)·백화산(白華山, 1,064m)·희양산(曦陽山, 998m)이 있다.

남서부에는 장성봉(長城峰, 915m)·대야산(大耶山, 931m)·둔덕산(屯德山, 969m)

조항산(鳥項山, 951m)·청화산(靑華山, 970m)이 있다.

운달산과 공덕산에서 시작되는 대하천(大下川)과 황정산에서 발원한

동로천(東魯川)이 산북면 대상리에서 금천(錦川)에 합류해 산북면·산양면을 관류해

영순면 달지리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남서부산지에서 발원한 양산천과 농암천은 가은천(加恩川)으로 흘러든다.

조령에서 시작되는 조령천(鳥嶺川)과 대미산에서 시작되는 신북천(身北川)은 문경읍 마원리에서

소야천(蘇耶川)에 흘러들고 마성면의 중앙부를 관류해

진남교(鎭南橋)에서 가은천과 합류해 영강(潁江)을 이룬다.

영순면과 산양면 지역에 들어서면, 주변에 띠모양의 길고 좁은 약간의 평야지대를 이루고

문경 도심지 남쪽에서 이안천(利安川)과 합류해 영순면 남쪽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이 영강은 관산(觀山)·견탄(犬灘)·주평(舟坪)·장평(長坪)·영순(泳順) 들판의 농업용수로 공급되었다.

또 2018년 공장 폐쇄 전까지 문경시멘트공장의 공업용수로 공급되었다.

문경시민의 식수로도 이용되고 있다.


천계단(1,000계단)

뒤따라 오르는 일행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걸을수 있을때 열심히 걸어다니자는 생각으로 틈만 나면 산행길에 오른다

썬크림이 땀으로 타고내려서 눈이 따갑다

손목에 손수건으로 땀과 눈가에 썬크림을 닦아내어 본다

천계단 오르면 문경 농산물 홍보 글귀가 좋다

문경 오미자 조금만 힘내세요

문경사과 사과 받으세요


천계단(1,000계단)의 끝 903

100단위로 숫자를 기록해 놓았다

903계단 인가 보다

경남 마산 무학산은 365일 계단이라 하여 하루 하루 글자를 재미있게 해놓았다

진주에 진양호 공원에도 일년계단이 소원계단이 있다

요즘은 이렇게 계단에도 의미를 부여한곳이 많다.


국가지정번호

주흘산에서는 위치표지목이  전혀 없으며 갈림길 안내표지목도 부족한편이였다

초보 산행자들에겐 조금  위험 할수도 있었다

물론 인기명산이라 산행자가 많아서 따라만 가면 되겠지만

그런게 주흘산이 좀 아쉬웠다.

문경시 역사를 보면

문경의 초기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산북면·호계면 등의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보아

이 시기에는 인간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발전을 통해 이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소국(小國: 城邑國家)이 형성되었는데, 진한의 근기국(勤耆國: 지금의 산양면)이 이곳에 비정되고 있다.

근기국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156년(아달라왕 3) 신라에 의해

계립령로(鷄立嶺路: 문경새재 북쪽)가 개통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신라 지배집단이 남하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을 통과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내물왕대 이후 신라가 비약적으로 팽창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의 영역에 들어가

관문현(冠文縣, 또는 高思曷伊城, 冠縣: 지금의 문경읍), 가해현(加害縣: 지금의 가은읍), 호측현(虎側縣 또는

 拜山城: 지금의 호계면) 등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시 이들은 각기 관산현(冠山縣)·가선현(嘉善縣)·

호계현(虎溪縣) 등으로 개명되어 고령군(古寧郡: 지금의 상주시 함창읍)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이 때 산양면 일대는 가유현(嘉猷縣)으로 예천군에 속해 있었다.



신록의 탐방로

제법 많이 걸었다 이제는 정상이 가까워 지고  초록색 속으로 빠져든다

주흘산 등산 코스는

1코스는 주흘산 주봉을 찍고 영봉을 거쳐 하산하는 길

2코스는 주흘산 종주 코스로서 가장 긴 코스다.


주흘산 주봉130m

주흘산 주봉까지는 130m이다 정상에 바로 앞이다

여기 갈림길이 주흘산 영봉으로 가는길이기도 하다

주흘산 정복이 눈앞에 있다.

주흘산 산행은

새재길을 기점으로 이어지며 가장 인기 있는 산길은 곡충곡~주봉(1075m)~조곡골 제1관문 원점회귀 코스(6시간)

최정상인 영봉은 주봉에서 30분 정도 더 가야 하는데

조망과 산세가 주봉에 비해 뒤져 대개 주봉 산행으로 끝낸다.

조곡골은 폭우시 계곡물이 불면 위험하다.

큰비를 만난다면 혜국사를 거쳐 사찰 임도를 이용하도록 한다.

준족에 모험심이 많은 사람은 부봉 암릉을 잇는 산행도 해볼 만하다고 전한다.

주봉에서 영봉을 지나 계속 능선을 따르다가 부봉 안내판이 서 있는 백두대간 갈림목에서

왼쪽 바윗길로 접어들면 부봉 암릉을 탈 수 있다.

제6봉 철계단 길 직전 왼쪽 길로 내려서면 제2관문으로, 제6봉을 넘으면 동화원으로 내려선다.

동화원까지 이으려면 8시간은 잡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흘산 주봉 50m

주흘산 주봉(主峰)이 50m앞...정상에서는 먼저온 산행자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옛 기록에는 영남(嶺南)이니 교남(嶠南)이니 하는 명칭이 다 이 산과 관련된 것이라 적고 있다.

영남(嶺南) 지방이라 할 때 영남이란 충청도와 경상도를 나누는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영(嶺)의 남쪽에 있다하여 영남이라 불렀다.

또한 교남(嶠南)이란 중악(中嶽)인 주흘산 남쪽의 지방을 일컬어 교남이라 불렀다.

조령과 주흘산이 큰 산줄기에 함께 위치하고 있어

영남이나 교남이나 같은 의미로 영남지방을 뜻하는 말로 보면 된다.

옛 기록에는 주흘산은 돌산이 치솟아 그 기세가 웅장하고 뛰어나며

영남의 산천은 성질이 중후하여 명현(名賢)을 배출한 동방인재의 부고(府庫)라고 말했다.


문경 주흘산(聞慶 主屹山)1076m

주흘산은

고려 때 공민왕이 이 산에 피난했다하여 임금님이 머문 산이란 뜻으로 주흘산이라 칭하였다.

주흘산은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를 이루었던 산이며

북동쪽사면은 급사면이나 서쪽사면은 이보다 완만하다.

산록에는 846년(문성왕 8)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창건한 혜국사(惠國寺)가 있으며

또 서쪽 상초리에는 주흘산사(主屹山祠)가 있어 나라에서 봄ㆍ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영남과 기호ㆍ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조선시대의 애사가 깃든 유서깊은 곳이다.

서쪽의 조령산(鳥嶺山, 1,017m)과의 사이에 조령 제1ㆍ2ㆍ3관문(사적 제147호)을 끼고 있고

조령일대는 1981년 6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문경 주흘산(聞慶 主屹山)1076m

문경을 지켜주는 영산, 주흘산
주흘산은 조령산, 포암산, 월악산 등과 더불어 소백산맥의 중심을 이루며

산세가 아름답고 문경새재 등의 역사적 전설이 담겨 있다

또한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中嶽)으로 우러러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스런 영산(靈山)으로 받들어 왔다.

문경의 진산(鎭山)이기도 한 주흘산은 ‘우두머리 의연한 산’이란 한자 뜻 그대로 문경새재의 주산이다.
남쪽의 중부내륙고속도로나 3번 국도를 타고 진남교반을 지나 마성면 너른 들판에 들어서면

앞쪽으로 기세 당당한 산이 하나 버티고 있다.

한눈에 비범한 산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이 후련할 정도다.

양쪽 귀를 치켜세우고 조화롭게 균형미를 갖춘 산세에

주변의 모든 사물이 이 산의 기세에 그만 압도당하고 만다.


문경 주흘산(聞慶 主屹山)1076m

주흘산의 동쪽과 서쪽에서 물줄기가 발원하여 신북천과 조령천으로 흘러드는데

이 물줄기들은 곳곳에 폭포를 형성한다.

그중 유명한 것이 발원높이 10m의 여궁폭포와 파랑폭포이다.

산기슭에는 혜국사(惠國寺)가 있고

주흘산과 조령산 가운데에 난 계곡을 따라서는 문경관문(聞慶關門)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발 520m에 위치하는 혜국사는 신라 문성왕 8년(846) 보조국사 체징(體澄)이 개창한 고찰로

고려 말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이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었다는 일화로 유명한 절이다


문경 주흘산(聞慶 主屹山)1076m

주흘산 정상석의 뒷면에는

聞慶鎭山(문경진산) 一九八八,三月(1988.3월 )문경군청 등산회 라고 새겨 놓았다.

주흘산은

문경의 진산(鎭山)인 주흘산은 ‘우두머리 의연한 산’이란 한자 뜻 그대로 문경새재의 주산이다.

남쪽의 중부내륙고속도로나 3번 국도를 타고 진남교반을 지나

마성면 너른 들판에 들어서면 앞쪽으로 기세 당당한 산이 하나 버티고 있다.

양쪽 귀를 치켜 세우고 조화롭게 균형미를 갖춘 산세이다.

영남(嶺南) 지방이라 할 때 영남이란 충청도와 경상도를 나누는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영(嶺)의 남쪽에 있다하여 영남이라 불렀다.

비구니의 수도 도량인 혜국사는 신라 문성왕 8년 846년 보조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창건시 범흥사라고 하였으나 고려 공민왕이 난을 피해 행재(行在)하여

국은(國恩)을 입어 혜국사로 개칭. 주흘산 등산로변에 있다.

주흘산과 조령산의 사이로 흐르는 조곡천 동쪽면에는 주흘관(조령 제 1관문)

조곡관(조령 제 2관문), 조령관(조령 제 3관문)의 세 관문과 원터,성터 등 문화재가 많으며

주막도 있고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새재계곡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정상에서 문경도심을 바라보면서

정상에서면 백두대간을 지붕처럼 얹고 있는 문경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도열해 있다.

뒤돌아보면 바위봉우리인 부봉과 그 뒤로 월악산 영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수십 길 벼랑 아래 긴 능선이 납작 가라앉고 그 능선 끝자락에 문경읍이 살며시 올라앉아 있었다.

바위 사이로 문경읍이 내려다보이는 전좌문(殿座門)을 지나 주봉에 올라섰다.

주흘산은 새재길 옆에 솟아오른 봉이 아니었다.

날개 활짝 펼친 수리매 형국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우리는 그 수리매 등에 올라타 신선이 되어 선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경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며 산악지대가 많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삼국시대 이전의 유적·유물은 타지역에 비해 빈약하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호계면 호계리 등지에 고인돌이 있고, 유물로는 산북면 서중리에서 출토된 마제석촉이 있다.

또 삼국시대 유적으로는 호계면 호계리고분군과 문경읍 하초리고분군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산성으로는 고모산성(姑母山城)·마고산성(麻姑山城)·희양산성(曦陽山城)·작성(鵲城)

조령산성(鳥嶺山城)·어류성(御留城)·고부산성(姑夫山城)·가은고성(加恩古城)

노고성(老姑城)·화장성(花庄城) 등이 있다.

사찰로는 587년(진평왕 9)에 창건한 대승사(大乘寺)를 비롯해 김룡사(金龍寺)·봉암사(鳳巖寺)

혜국사(惠國寺)·운암사(雲巖寺)·심원사(深源寺)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산북면 전두리의 대승사목각탱및관계문서(보물 제575호)

가은읍 원북리의 봉암사극락전(鳳巖寺極樂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산북면 김룡리의 김룡사대웅전(金龍寺大雄殿,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5호)이 있다.

또 산북면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문경내화리삼층석탑(聞慶內化里三層石塔, 보물 제51호)

가은읍 원북리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보물 제137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보물 제138호)·봉암사삼층석탑(鳳巖寺三層石塔, 보물 제169호)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 보물 제171호)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보물 제172호)·환적당지경지탑(幻寂堂智鏡之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함허당득통탑(涵虛堂得通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4호)·봉암사석종형부도(鳳巖寺石鐘形浮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5호)

문경읍 갈평리의 오층석탑(葛坪里 五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5호)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봉덕사지삼층석탑(鳳德寺址三層石塔), 문경읍의 관음리삼층석탑·상리삼층석탑 등이 있다.


천관문

하늘로 가는 가장 큰문인데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좋고

문경시를 조망할수 있게 시야가 좋았다

천관문을 보며 주흘산 영봉으로 걸었다.

문경의 역사를 보면

내물왕대 이후 신라가 비약적으로 팽창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의 영역에 들어가

관문현(冠文縣, 또는 高思曷伊城, 冠縣: 지금의 문경읍), 가해현(加害縣: 지금의 가은읍)

호측현(虎側縣 또는 拜山城: 지금의 호계면) 등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시 이들은 각기 관산현(冠山縣)·가선현(嘉善縣)·호계현(虎溪縣) 등으로 개명되어

고령군(古寧郡: 지금의 상주시 함창읍)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이 때 산양면 일대는 가유현(嘉猷縣)으로 예천군에 속해 있었다.

후삼국의 쟁패기에는 이 곳 가은현 출신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우자

이 지역은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나, 뒤이은 후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927년(태조 10) 왕건(王建)이 친히 근암성(近巖城: 지금의 산양면)을 함락시켰는데

이 때 고사갈이성 성주(城主) 흥달(興達)이 귀부해 오자 크게 우대하였다.

이를 계기로 후백제에서 파견되어 온 관리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의 지배체제에 들어가 관산현은 문희군(聞喜郡)으로, 가선현은 가은현(加恩縣)으로 개명되었다.

1018년(현종 9) 이들 지역은 모두 상주(尙州)의 속현으로 편입되었으며, 문희군은 뒷날 문경군으로 개명되었고

산양현에는 감무가 설치되었으나 1180년(명종 10) 폐지되었다.

 1390년(공양왕 2)문경군에 감무가 설치되면서 가은현을 속현으로 하였다.

이후 조선 1413년(태종 13)문경현에 현감이 설치되면서 상주 소속의 호계현이 내속하게 되었고

8도체제가 정비되면서 신구(新舊) 경상도관찰사의 교대 장소인 교구정(交龜亭)이 이 곳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당시 문경현의 토지는 척박했으며, 풍속은 검솔(儉率)했다고 하며

호구수는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161호 2,564인이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으로 통하는 새재[鳥嶺]로 인해 적의 주력이 이 곳으로 진격해 왔는데

이 때 이 곳의 관병(官兵)은 대구(大丘)를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은 수십 명의 관병을 이끌고 현청을 수비하다가 패배해 적의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항거하다가 순국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새재가 국방상 요새가 됨으로 인해 이곳이 계속 중시되어서, 1708년(숙종 34) 조령산성(鳥嶺山城)이 축조되었고

1752년(영조 28)에 독진(獨鎭)이 설치되어 현감이 수성장(守城將)을 겸하다가 다음 해에 별장(別將)을 두었다.

1871년(고종 8) 이필제(李弼濟)·정기현(鄭岐鉉) 등의 지도하에 민중항거가 일어나 지방관과 향리의 불법을 규탄했고

1877년에는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시 다른 군현과는 달리 군이 되지 못했으나

다음 해에 13도제가 실시되자 군으로 독립하였다.


주흘산 영봉으로 가는길

주흘산 주봉을 찍고서 이젠 주흘산 최고봉인 영봉으로 향한다

녹색물결 속으로 헤엄쳐 가는듯한 그린샤워 하면서 탐방로를 걷는다

여름에 걷는 산행은 녹색에 빠져서 좋고

겨울에 걷는 산길은 낙엽을 밟거나 하이얀 눈을 밟는 소리가 좋고

가을엔 울긋불긋 단풍이 있어서 좋다

봄은 새싹의 기운이 하나둘식 피어나 연두색으로 변하고

진달래 철쭉이 잇어서 좋은 산이다

산은 늘 그 자리에서 사계절 옷을 갈아입고서는 산객을 맞이한다.


주흘산 영봉 30m

주흘산 주봉과는 1.2km 떨어져 있다

산행자들은 주흘산 영봉 주봉 그리고 부봉 조령산과 같이 연계하여 산행한다

이렇게 종부하면 25km정도에 12시간 정도 소요 된다고 한다

우리처럼 하루 당일치기로 종주하기엔 벅찬 코스이기에

주흘산 1코스를 탐방 하기로 한것이다.


주흘영봉(主屹靈)1106m

주흘산 영봉은 주봉보다 30m나 더 높다

지리산 삼신봉도 내삼신봉 외삼신봉이 있지만

삼신봉 보다 내삼신봉이 더 높다.

더 높아도 주봉에서 밀려난 봉우리들이 드러 있다

옛날 왕도 첫째가 왕위를 물러 받지 못한 경우도 많다


주흘영봉(主屹靈)1106m

문경의 교욱 및 문화를 보면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392년(태조 1)문경읍 교촌리에 창건된 문경향교(聞慶鄕校)가 있다.

이 향교는 임진왜란중에 소실되었으나 1598년(선조 31)에 대성전을 중건하고

1676년(숙종 2)에 명륜당을 재건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사학기구인 서재는 고상안(高尙顔)이 조선 중기(선조∼광해군)에 설립한

영고서재(潁皐書齋)가 있었으나 서재적 기능을 못하고 있다.

서원으로는 1544년(중종 39)에 산북면 근암리에 설립된

근암서당을 1655년(효종 5)에 근암서원(近嵒書院)으로 승격시켰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년에 복원하였다.

이외에도 1677년에 설립한 한천서원(寒泉書院), 1713년에 설립한 소양사우(瀟陽祠宇)

1795년(정조 19)에 설립한 능연서원(能淵書院) 등이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되었다.

서당으로는 가은읍 작천리에 옥봉서당(玉峰書院), 산북면 창구리에 창구서당(蒼邱書堂)

산양면 반곡리에 반곡서당(盤谷書堂), 호계면 견탄리에 호계서당(虎溪書堂)이 있으나 서당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구한말에 세워진 것은 없으며, 1912년에 문경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의 전신은 1910년 4월에 설립한 경원학교를 읍내의 육영학교와 병합한 경옥학교였다.

1921년에 농암면에 농암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한 뒤 1면 1개교 설립정책에 따라 1930년문경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산북면에 산북공립보통학교, 1934년 문경서부공립보통학교·영순공립학교·호서남공립보통학교

1935년호계면에 호계공립보통학교, 1943년 유곡간이학교 등의 여러 학교가 세워졌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48년 문경중학교, 1949년 문경농림학교, 1951년 문경고등학교

1952년 산북중학교, 1954년 청암중학교, 1955년 동로중학교

1956년 문경여자중학교, 1957년에는 가은중학교 등이 각각 설립되었다.


하산길의 계곡 제2관문 거리2.4km

주흘산 산행도 마무리 단계이다

우리 산행 일행들이 하산코스를 들머리로 잡았다면 정말 개고생 할번한 코스다

하산길이 급경사지를 이루고 있어 등산길로 잡았다면

그야말로 땀삐질에 숨소리 헉헉 거리는 코스이다.


꽃밭서들

너드랑길을 멋지게 이름을 붙여 놓았다 꽃밭서들 이라고

이곳에는 많은 산행자들이 지나가면서 만든 돌탑인지

소원 하나 하나 쌓아올려 돌탑 지대가 되어 있다.

꽃밭서들이란 이름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참꽃, 벚꽃, 개나리같은

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서 붙여진 유래와 바위언덕을 가리키는 '서들'이란 말을 합친 곳이라는 설과

예전에 기자치성을 위한 연등을 많이 달았는데

그 장면이 꽃으로 만발한 듯 했다고 해서 꽃밭서들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곳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소원성취를 위해 서들을 이용해 많은 탑을 쌓아 놓았는데

아들을 못 낳은 여인이 이곳에서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영험이 있는 곳이라 하여 많은 무당들이 찾기도 한다

한편 이 골짜기에는 일본인들이 만든 철도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철광을 캐기

위한 목적으로 일제 강점기때 만든것이 아직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골짜기에도 화전민이 살고 있었으나 1970년경 대성산업이 국가로부터 땅을 사들이면서 모두 떠났다 한다.


조곡관(鳥谷關) 제2관문

편액은 조곡관이라 되어 있다

영남지방과 서울 간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인 문경관문(聞慶關門)은 고려시대 초기부터

‘조령(鳥嶺)’이라 불리면서 수도 서울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상주에서 이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을 격파하고 북상해온 일본군 제1군은 문경으로 향했다.

일본군이 서울로 가려면 조령, 죽령, 추풍령 세 곳 중 한 곳을 지나야 했는데 제1군은 조령, 즉 문경새재를 택했다

한편 경주에서 북상해온 일본군 제2군은 이곳에서 제1군과 합류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인 이곳 문경관문에서 합류한 고니시 부대(제1군)와 가토 부대(제2군)는

모두 이 관문을 거쳐 조령을 넘어 충주로 진격했다.
신립 장군은 당시 조정의 기대와는 다르게 조령에서 일본군을 막지 않고

주력부대를 충주 탄금대로 후진 배치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참패했다.
그 후 조정에서는 조령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관문 설치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1593년 12월 영의정 유성룡이 조령에 관문을 설치할 것을 다시 주장하니

임금도 조령 설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조곡관(鳥谷關)뒷면  嶺南第2關(영남제이관)

조곡놘 뒷편 편액에는 영남제2이으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6월, 조정에서는 이곳에 관문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전란 중의 어려운 재정형편과 조정내부의 논란으로 설치가 지연되다가 그 이듬해에 조곡관에 관문을 설치하게 되었다.

1594년 신충원이 파수관(把守官)으로 임명되어 응암 근처에 일자성(一字城)을 축조했는데 이 성이 지금의 조곡관이다.

조곡관은 세 개의 관문 중 가장 먼저 설치되었지만 명칭 상으로는 제2관문이 된다.

1708년에 조령산성을 쌓을 때 옛 성을 고쳐 쌓고, 중성(中城)을 삼아 이 관문을 조곡관이라 했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면적 5.3㎢이며,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문경관문과 주흘산·조령산 일대의 사적지 및 자연경관을 포함한다.

조령은(642m)은 이화령 북쪽 약 7km 지점인 신선봉(967m)과 조령산(1,017m) 사이에 있다.

철도교통 이전에는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험한 지세를 이용했던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본래 양반이 다녔던 옛고개와 보부상들이 다녔던 큰고개·작은고개

평민들이 다녔던 가장 험준한 하늘고개 등 4개의 고개가 있었다.

현재 이 길은 이화령에서 수안보로 통하는 국도가 뚫린 후 사적지로 바뀌었다.

이 고개를 이루는 산릉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동쪽 산곡의 조령천을 따라 나 있는 옛 길에 1708년(숙종 34) 남북 8km를 돌로 쌓고

길 중간에 조령 제1·2·3관문을 세웠다.

이 관문들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로서 박달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제1관문은 주흘관(主屹關)으로 현재에도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제2관문은 조곡관(鳥谷關)으로 양쪽 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으며, 지금은 문루가 없어진 채 관문만 남아 있다.

제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다.

숙종 때 북적을 막기 위해 조령산성을 쌓았으며,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육축(陸築)만 남은 채 불타버렸다.

1976년 복원되어 사적 제147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문경새재 도립공원내 물레방아

20세기 초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이화령 고갯길이 만들어지면서 문경새재는 폐도가 되었다.

그러나 새재에 설치된 관문과 더불어 새재 고갯길은 옛 모습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

새재길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와 임지를 떠나 새로 부임하는 신구 경상도 관찰사가 만나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교귀정터가 남아 있다.

관문을 지나 오르는 옛길에는 아름다운 주변의 경치와 함께 산불을 막기 위해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서 있고 정자와 주막터, 성황당 등이 있어

다양한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음미할 수 있다.
오늘날 새재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조성 및 재현되어 있다.

제2관문에서 조곡계곡을 따라 4km 정도 올라가면 산허리에 돌무더기를 세로로 쌓은 뒤

그 위에 작고 넓적한 돌을 얹어 마치 장승처럼 만든 곳이 있는데 이를 꽃밭너덜이라고 한다.

또한 새재길 옆에는 용추라는 폭포가 위치하고 있다.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해지는 용추폭포는 사면과 바닥이 모두 돌로 되어 있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바위에는 용추(龍湫)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구지정이 숙종 25년(1699)에 쓰다(己卯具志禎書)”라고 각자되어 있다.

이 밖에도 옛날 7명의 선녀가 구름을 타고 와 목욕을 했다는 여궁폭포,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와 상인들이 한잔의 술로

여독을 풀고 정분을 나누었다던 주막도 위치하고 있다.


산불됴심 표석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지나가듯이 직업을 못속인다는 탓에

산뷸됴심 표석을 찍어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불조심은 중요하다

표석 안내문을 보면

표석의 설치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 비석이다.

현재 문화재 위치는 처음 세워질 당시의 장소로 보이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에방과 주흘산의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국내에 고어(古語)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 산불됴심 표석을 제와 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한글 비석이라 할수 있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여름엔 시원해서 좋겠고 가을엔 단풍이 아름다울것 같다.

새재길에서는 주흘산과 조령산의 다양한 식생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수림터널 등 매우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접할 수 있다.

그래서 문경시에서는 ‘옛길 걷기체험’, ‘과거길 재현’ 등의 다양한 행사를 매년 개최하여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및 선비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제1관문 안쪽의 하천 건너에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설치되어 있다.

사극을 촬영하기 위한 시설로 수십여 채의 전통한옥이 있고

관문의 풍경과 조화가 빼어나 많은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문경새재는 옛길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고갯길로서 옛날의 분위기를 느끼며 한번쯤 걸어볼 만하다.

그 옛날 이 길을 넘던 수많은 선조들의 감흥과 애환을 떠올리며

새재를 걷는 것은 매우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줄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새재를 넘으며 이렇게 읊고 있다.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嶺路崎山虛苦不窮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危橋側棧細相通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長風馬立松聲裏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盡日行人石氣中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幽澗結氷厓共白
눈 덮인 칡덩굴엔 마른 잎 붙어 있네
老藤經雪葉猶紅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到頭正出林界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西望京華月似弓
-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冬日領內赴京 踰鳥嶺作)〉


문경새재촬영장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1037(상초리288-1)

문경새재 도립공원에 있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은 한국방송공사에서 고려 시대 배경을 가진 사극을 촬영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2000년 당시 65,755㎡의 부지에 왕궁 2동, 기와집 42동, 초가 40동, 기타 13동으로 세운 국내 최대 규모의 사극 세트장이다.

이곳에 세트장을 설치하게 된 이유는 문경시 가은이 후백제 견훤의 출생지이고

주변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조영, 태조왕건,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공주의 남자, 광해, 낭만자객 등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주목을 받았다.

현재는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트장을 허물고 70,000㎡ 부지에 광화문, 경복궁, 양반집 등

103동을 건립하여 조선 시대 모습으로 새롭게 건설되었다.

또한 이곳은 문경새재 도립공원 안에 있어 다양한 유적을 경험하고

자연생태공원과 옛길 박물관 등 여러 문화시설을 즐기기 좋다.


이렇게 하여 문경에 있는 주흘산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 하나인 주흘산 정상석을 하나 인증사진 하나 남기면서

산행을 마무리 해본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문경시등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1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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