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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修德寺),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충남예산 덕숭총림 수덕사를 걷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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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修德寺),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충남예산 덕숭총림 수덕사를 걷다

바다늑대FORCE 2018. 2. 14. 19:10


수덕사(修德寺),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충남예산 덕숭총림 수덕사를 걷다...!


▣ 수덕사[修德寺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79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덕숭총림

041-330-7700 

♣ 사찰기행일 : 2018.2.10(토) 날씨:약간흐림

♣ 수덕사  개요:

수덕사는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 수덕사 안내도


 

♣ 나의 사찰기행 가는길


晉州 문산ic삼거리 -→남해고속도로 진주jc -→ 익산포항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 수덕사2교차로→수덕사주차장

283km 승용차 3시간 소요




→→→→→사찰기행시작

산에 오르면 사찰이 있고

사찰에 가면 산이 있다

덕숭산에 정상에서 수덕사를 안아보고

하산해서 수덕사 도량을 걸어본다.........!


↗수덕사 선문(禪門)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 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수덕사 유료주차장 앞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란 한글 편액이 있는

근래 건축한 일주문이 위용을 과시하듯 덕숭산 대문을 상징하는듯 하다

선문은 禪을 상징하는 뜻으로 대웅전 건축 7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총림이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을 갖추고 수행승들이 모여 수행하는 큰 사찰로서

승려들의 참선을 위한 시설인 선원,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

계율 교육 기관인 율원 등을 갖춘 사찰로써

우리나라 5대 총림에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가 있다.



↗수덕사로 가는길

수덕사에는 중요문화재들이 있는데

수덕사대웅전(국보 제49호) 수덕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수덕사7층석탑 육괴정, 황하루, 근역성보관, 사리탑 등이 있다고 한다.

↗수덕여관 가는길

 일주문 가기전 죄측편에 수덕여관이 있다.

수덕여관은

이응로선생사적지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1996.11.30 지정되었다고 하며 

고암 이응노 화백이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 사용한 집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다.

그는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 공간에서 작품활동을 했다고 전한다.

 


↗수덕여관 현판과 대문

여관은 정면 5칸이 길에 접해 있으며 반대편으로 각각 6.5칸과 4칸이

ㄷ자형 날개를 이룬다.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에서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로 새긴 것이 여관 북쪽 귀퉁이에 남아 있다.

그에 앞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불교에 심취해 묵었던 집이다.


↗수덕여관

수덕여관이야기

신시(新詩)의 효시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빠른 1907년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

사실상 우리나라 신시의 지평을 열고 구 한말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불가에 귀의하여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가부장적인 사회인습에 숨 막혀 하던 김일엽은 여성은 남성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라고 절규했고

여성은 남성을 위한 장식물이 아니라고 부르짖으며 몸을 던져 연출한 행위 예술가이며 전위 예술가였다.

또한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기독교 신화에 반기를 든 용기 있는 반란이었다.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 자락을 찾아들었다. 거기에는 나이도 같은 동갑이고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파란만장한 32년의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있다는 전갈을 받은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지만 답은 똑같았다.

몇 년전 경성에서 만났을 때,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아이로니칼 하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에는 인습과 사회제도가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텅 빈 여관방에는 지친 몸을 누이던 나혜석의 체취는 간데없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시위하던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 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찾아왔다.

그 소년이 누구냐 하면 김일엽이 일본 유학시절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이며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진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에게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 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에는 팔  베게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주었다.

이때 나혜석 역시 모성에 주려있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이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은 중노릇을 못 할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덕사일주문

수덕사 창건이야기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수덕사 금강문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수덕사 금강문 편액 디자인은

세 송이의 꽃이 삼각구도로 겹쳐 있고 그 주변에 크고 작은 잎사귀가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꽃은 다양한 크기의 꽃잎들이 둘러져 있는데 국화와 유사한 모양을 가진다.

세 송이 모두 같은 형태이고 크기도 비슷하다.

꽃 주변에는 덩굴처럼 끝이 둥글게 말린 큰 잎사귀와 끝이 둥글고

통통한 작은 잎사귀가 양 갈래로 갈라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 수덕사 사천왕문

사찰에 들어갈 때 일주문, 금강문 다음에 거쳐야 하는 문(門). 천왕문이라고도 한다.

이 곳에는 수미(須彌)산의 4주(洲)를 수호하는 신(神)인 사천왕상을 안치하여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천왕문에는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 등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각각 불국정토의 동, 서, 남, 북을 지키는 신들이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손에는 보검을 쥐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붉은 관을 쓰고 있으며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잡고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왼손으로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이다



덕숭총림 3대 방장 원담[圓潭]대선사탑


2008년 덕숭총림德崇叢林 수덕사 방장方丈 원담진성 대종사[元老議員]가

3월 18일 오후 9시  수덕사 염화실拈花室에서 원적圓寂에 드셨다고 한다

법납法臘 76세 세납歲臘 83세.

나 역시 처사계가 원담(圓潭)이다

같은 수계명이라 좀 한참이나 기도하게 하였다.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은 요즘 유행처럼 사찰 입구마다 만들어 져 있다.

포대화상이란

중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속의 스님으로 장정자라고 하며 이분이 포대자루를 들고 다니면서

가는 뒷통수를 지팡이를 두드린다고 한다.

그러면 뭔가 달라는 신호로 알고 아는 사람들은 그분에게

먹을 것을 드리는데 과자나 사탕을 주기도 하고 

혹은 과일을 드리는데 반은 먹고 반은 자루에 넣는 것이다.

그러니까 허기가 지면 그렇게 밥을 얻어 자시면서 다니는데  안 먹은 건

자루에 넣어서 아이들한테 나눠 준다고 하며 그리고 포대화상은 임종 직전

시를 남겼는데 마지막 시에 보면 미륵 참 미륵이여  천백억으로 몸을 나투나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

하는 시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내용으로 인해 포대화상은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존중받고 서유기에 나온 미륵불도 그래서 뚱뚱한 모습이다.

또한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재물신인 조공원수 즉 조공명

복마대제 관성제군과 함께 재물신에 들어간 대상이 포대화상으로

포대화상은 이제 막 신앙을 모으기 시작했고 배가 뚱뚱하면서도 후덕하게 웃고 있으니

재물신의 이미지로 딱 적합했던 것 같다.


↗황화정루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재위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제26대 왕 고종(高宗) 2년(1865)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하정루는 정면7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익공구조로 1고주 9량집이다. 현재 이 누각의 지하는 근역성보관인 박물관으로

지상일층은 박물관 사무실로 이층은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황화정루 편액

황화정루 편액에는 선지종찰수덕사[禪之宗刹修德寺] 라고 되어 있다.

수덕사 3대 방장 스님인 워누담스님의 글씨라고 하며

황하정루(黃河亭樓)의  황(黃)은 부처님의 정신을 뜻하고

하(何)는 큰강이 흐르듯 정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수덕사 3층석탑

수덕사 3층석탑

유형문화재 제103호

신라 문무왈 5년에 건립되었으며,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되며

높이 4m. 기단부는 3단의 기단받침 위에 높은 이중기단으로 처리하였고

면석에는 상하에 모두 3개씩의 동자주(童子柱: 세로로 세운 작은 기둥)가 각출되었으며

갑석 상면 네 모서리에는 각을 주고 면석받침은 2단으로 몰딩(moulding: 테두리장식)을 하였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부는 체감률이 정연하며

탑신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를 양각하였다.


↗수덕사 3층석탑[修德寺三層石塔 ]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게 다듬어져 있고

네 모서리에는 반전을 약간씩 두었으며 처마선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옥개받침은 4단을 조출(彫出)하였고 옥개석 상부에는 탑신받침을 생략하였다.

상륜부는 2개의 보륜과 함께 보개(寶蓋)·앙련(仰蓮)

노반(露盤)이 찰주(擦柱) 없이 포개져 있는데

노반은 방형(方形)으로 탑신부의 최상층 옥개석과 1매의 석재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이 석탑은, 기단과 탑신 및 상륜 일부가 잘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잘 갖춘 탑으로

1층과 2층 옥개석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다.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49호. 앞면 3칸, 옆면 4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를 올린 전형적인 주심포(柱心包)계 건물로

11줄의 도리를 걸친 11량(梁)의 가구(架構)를 갖추었다.

건물은 곱게 다듬은 긴 댓돌을 여러 겹으로 포개어 쌓은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단의 좌우에는 건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놓았다.

네모나게 다듬은 주춧돌의 윗면에는 기둥을 받치는 둥근 기둥자리가 낮게 마련되어 있다.

기둥은 둥근 기둥으로, 가운데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정도가 뚜렷하지만

건물 옆면의 가운데기둥은 단면이 네모나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昌枋)이 둘러져 있고

네 모서리기둥과 창방이 맞물려 있는 위치에는 앞면과 뒷면 쪽으로만 첨차(檐遮)를 끼워 놓았다.

첨차는 기둥머리 위에 짜인 쇠서[牛舌] 모양의 제공(諸工)을 받치고 있는데

제공의 끝부분 위에는 짧은 장여를 놓아 외목(外目)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기둥머리 위의 첨차는 뜬장여와 장여, 주심(柱心)도리를 차례대로 받치는데

뜬장여는 앞면 창방 위의 포벽(包壁)을 가로지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 측면4칸

수덕사 대웅전은

한편 옆면의 가구는 건물을 설계할 때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결구(結構)한 모습을 보여준다.

곧 창방 위의 유연한 맞배지붕 처마선 아래에 보이는 박공(牔栱) 부분의 구성은 참으로 일품이다.

협간(夾間) 중에 앞면 쪽에는 외짝의 빗살문을 달아서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창방 위쪽의 기둥머리에는 덩굴 무늬인 당초문(唐草紋)이 이어진 파련(波蓮) 모양의 받침을 놓아서

단면이 항아리 모양인 충량(衝樑)을 받았으며

그 위에는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얹어 고주(高柱) 윗몸에서부터 나온 가로 부재를 받쳤다.

또한 그 위에는 지붕의 무게를 전달하는 동자 기둥을

받치는 보인 우미량(牛尾樑)이 놓여 있는데, 지붕의 무게가 마루보 밑의 우미량에서

대들보 위에 얹힌 우미량으로 전달되고, 다시 파련대공으로 받치고 있는 우미량으로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 우미량의 율동적인 구성은 마루보 위쪽에서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는 솟을합장의 곡선미

2중량(二重樑)의 중량감있는 곡면(曲面)과 더불어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부재 사이의 작은 벽에는 수생화도(水生畵圖)·

나한도(羅漢圖)·소불삼례도(小佛三禮圖)·극락조도(極樂鳥圖) 등의

불화(佛畵)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건립된 불교건물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는 불화는

 지금은 모두 없어진 채, 벽은 노란색을 칠한 빈 벽으로 되어 있다.


↗수덕사 대웅전 참배를 마치고..!

수덕사 대웅전은

건물 앞면의 3칸에는 모두 3짝의 빗살문이 달렸고

뒷면에는 양쪽 칸에 창을 설치하고서 가운데칸에는 널빤지로 만든 판장문(板長門)을 두었다.

건물 안의 바닥에는 원래 전돌이 깔려 있었지만 지금은 우물마루가 덮여 있고

뒤쪽벽의 가운데 고주 사이는 막아서 불화를 그리고 그 앞에 불단(佛壇)을 놓았다.

불단은 3개로, 가운데에 6각형 불단이 높게 자리하고 있으며

양쪽에는 약간 낮은 4각형 불단이 위치해 있다.

건물 안의 천장은 서까래가 모두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1937년에 건물을 뜯어서 수리할 때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다.

이에 의하면, 이 건물이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므로

건립 연도가 확실한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이 건물의 양식적 특징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 내지 후기에 건립된 건물에 대한 편년이 시도되었다.

그 결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등이 더 오래된 건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제작 연도가 명확하고 형태미가 뛰어난

한국 목조건축사상 매우 중요한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 불상

수덕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수리되었다.

이때 고려 후기인 1308년에 건축되었다는 확실한 건축연대를 알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임이 밝혀졌다.

대웅전 건물은 고려시대에 지어졌지만 그 안의 삼세불상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수덕사 대웅전

삼세불상은 1639년(인조 17)에 남원 풍국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로 구성되었다.

남원 만행산 풍국사의 대웅전과 보광전의 불상으로 조성했는데 

어느 땐가 귀정사로 이운되었지만 그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1938년 11월14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 남원 귀정사 주지인 배정순 스님이

수덕사에 삼세불상을 양도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덕사 대웅전의 해체 수리 작업이 끝나면서

남원 귀정사에서 수덕사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수덕사에 주석하고 있던 만공스님에 의해 폐사 상태의 귀정사의 불상이 수덕사로 이운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 삼세불상에서는 2003년 개금할 때 많은 양의 복장품이 확인되었다. 

불상의 복장유물로는 조성발원문을 비롯한 <법화경> 등 전적류와 후령통, 오색실, 복식 등이 있다.

세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은 불상의 조성 배경과 조각승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불상조성기에는 먼저 봉안 장소와 불상의 명칭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은 풍국사 대웅전에, 아미타여래상은 풍국사 보광전에 모셔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세 불상이 한 세트로 조성되었다는 것은 약사여래상과 아미타여래상의 크기가 같고

좌우대칭을 이루는 수인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불상의 원 봉안 사찰이었던 ‘만행산 풍국사’와 수덕사로 옮겨지기 전

봉안처였던 ‘만행산 귀정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풍국사는 아마도 ‘풍곡사(風谷寺)’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남원의 읍지인 <용성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용성지>에는 풍곡사는 만행산에 있으며 법당, 정루, 선당, 승당, 관음전, 상실, 부도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1752년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용성지>의 기록으로 보아

 풍국사에서 귀정사로 불상이 옮겨진 것은 18세기 이후로 여겨진다. 

석가여래상의 발원문에는 불상 조성의 목적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어려서 출가하여 삼교(三敎)에 통달하고 청정한 수행으로 항상 정법을 설해 사람들로 하여금 듣게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마음 전하기를 가섭존자와 같이 하고, 부처님 말씀 전하기를 아난존자와 같이하며

대자대비는 관세음보살처럼 하며, 큰 서원과 원력은 지장보살과 같이 지녀, 삼악도를 모두 없애고자 합니다.

모두 정토에 왕생해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 함께 깨달음을 얻어 세상이 다할 때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수덕사 대웅전 삼세불상 조성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시주물의 종류이다. 

이 가운데 대좌 시주자를 통해서는 불상 조성 때 대좌까지 함께 조성되었던 사실을

세 불상의 백호 시주자를 통해서는 보석으로 백호를 별도로 삽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특히 부처님의 얼굴을 개금하는데 시주한 면금(面金) 시주자가 있다. 

세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은 수연스님, 영철스님, 성민스님, 사인스님, 신관스님, 명혜스님, 인종스님 등 모두 7명이다. 

수조각승 수연스님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유파의 수장으로 수연파 양식의 계승자인 

영철스님을 거쳐 17세기 후반에는 운혜스님에 이르러 수연파 불상 양식은 꽃을 피운다. 

그는 1615년 김제 금산사의 칠성각 독성상 조성에 보조 조각승으로 참여한 이후

 1618년 서천 봉서사 아미타삼존상 조성부터 1639년 수덕사 삼세불상까지 수조각승로서 자신의 유파를 이끌었다.

수연스님은 전북·충남·경기도의 서쪽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그가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작품은 서천 봉서사 아미타삼존상(1618년), 강화 전등사 대웅전 삼세불상(1623년)

 나주 다보사 석가삼존상 및 16나한상(1625년), 익산 숭림사 영원전 지장보살삼존상과 명부 권속(1634년),

강화 전등사 지장보살삼존상과 명부 권속(1636년), 예산 수덕사 대웅전 삼세불상(1639년) 등이다. 

수덕사 삼세불상은 정면에서 보았을 때는 등을 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머리와 상반신을 앞으로 숙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시대 부처님이 이처럼 등을 굽히고 있는 것은

 억불숭유 정책에서 핍박받는 불교계를 상징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조선 후기 2층 불전과 높은 불단에 부처님을 봉안하면서 예배자는 아래에서 위로

 부처님을 올려봐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구도의 불상을 조성한 것이다. 

수연스님이 조성한 불상의 특징은 먼저 상호에 잘 나타나 있다. 

눈썹에서 위로 한참 올라간 머리칼 표현은 이마를 더욱 넓게 보이게 한다. 

두 귀가 턱 밑까지 내려와 다소 긴 목을 효과적으로 보이게 하는 등 전체적으로 차분한 인상을 준다. 

머리와 육계를 구분하지 않고 중앙에는 타원형의 중앙계주를, 정상에는 삼각형의 정상계주를 표현하고 있다. 

1635년에 무염스님이 조성한 영광 불갑사 삼세불상과 1639년에 청헌스님이 조성한 

하동 쌍계사 석가불상과 비교해 상체가 다소 세장한 느낌을 준다.

 또한 무릎 아래 파도처럼 물결치는 끝단의 옷 주름 표현은 수연파의 큰 특징이다.

 중앙의 석가여래는 오른쪽 어깨를 살짝 가린 변형 우견편단을 하고 

좌우 두 불상이 통견을 취한 것은 이 시대 다른 불상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수덕사 대웅전 삼세불상은 17세기 전반기 대표적인 불교조각이면서

 조각승 수연스님의 기년명 마지막 작품으로 수연파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1639년에 남원 만행산 풍국사에서 조성되어 인근에 있던 귀정사로 이안되었으며

1938년에 수덕사 대웅전으로 옮겨진 사실을 통해 불상의 이동을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불상의 이동이 근대의 고승 만공스님에 의한 수덕사 중창 불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주목된다. 

[불교신문3343호/2017년11월8일자] 


명부전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를 상징하는 사찰 당우 중 하나로서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구, 녹사(錄事) 2구,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이들 중 주존불인 지장보살은 불교의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 시왕은 지옥에서 죽은 자가 지은 죄의 경중을 가리는 10명의 왕이며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지옥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염라대왕도 이 10명의 지옥왕 가운데 다섯번째 왕이다.

원래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뒤에는 100일·소상(小祥)·대상(大祥)까지 열 번에 걸쳐 각 왕에게 살아 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을 심판받게 된다고 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위하여 절에서 재(齋)를 모시게 된다.

이 때 명부전에서 재를 모시게 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자비를 빌려 시왕의 인도 아래 저승의 길을 벗어나

좋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데 있다. 명부전에 봉안하는 후불탱화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로

지장보살 뒤에는 지장탱화를 봉안하고 시왕 뒤편에는 명부시왕탱화를 봉안한다.

궁극적으로 이 명부전은 지장신앙과 명부시왕신앙이 결합되어 불교적으로 전개된 법당이다.

명부의 시왕은 일차적으로 불교의 수호신으로 신중신앙(神衆信仰)에 속해 있었지만

나중에 시왕이 지니고 있던 원래의 모습인 명부 심판관의 성격이 다시 강조됨에 따라 독립된 것이 명부전이다.



↗법고각

수덕사의 법고각은 종무소 조인정사 앞에 있으며 범종각과 같은 규모로 정면3칸 측면2칸 다포계집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이며 법고각은 소리를 통해 뭇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사물이 봉안된 곳이다.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고 수행정진해야 하는 수행납자들을 경책하는 의미로

만들어진 목어는 처음에는 단순한 물고기 모양에서 차츰 용두어신(龍頭漁身)의 형태로 전이 되었다.

수덕사의 목어는 물고기 형상이나 입안에 여의주를 물고 잇으며

법을 전하는 법고는 법고대가 조수좌(鳥獸座)의 일종으로

거북등모양(龜鉀紋)이 조형되어 있고

법고의 높이는 297cm 이고 직경은 100cm로 천의를 날리며 주악을 울리는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전체모양이 구름형상으로 만들어진 운판은 수덕사에는 구름아래 마음심(心) 하나더 있다.

하늘을 나는 생명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으며

운판이 울리면 날짐승 중생을 제도되고 무주고혼은 천도될수 있는것이다.



↗관음바위 와 관음상

수덕사 관음바위의 설화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상궁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
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속으로 사라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경향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으나, 수덕사는 근대 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이를 더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心願)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神通妙用)한

가피(加被)가 얻어지기를 기원하며 근래에 관음상을 봉조하게 되었다. 


↗대웅전 도량에 있는 감로수

수덕사 감로수 한잔으로 여태 지었던 구업[口業]도 씻어낼겸

한모금 마셔본다

추운겨울이라 그런지 이까지 시려 온몸에 퍼진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백련당

백련당의 주련에는 아래와 같다.


假借四大以爲身 (가차사대이위신)

心本無生因境有 (심본무생인경유)

前境若無心亦無 (전경약무심역무)

罪福如幻起亦滅 (죄복여환기역멸)  

사대를 잠시 빌려 이 몸이 이루어졌으니

마음은 본래 생겨남이 없고 경계의 인연으로 있을 뿐이라.

앞의 경계가 없다면 마음 또한 없는 것이니

죄와 복도 환상이 일어났다가 없어짐과 같다.


↗수덕사 대웅전 도량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며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가 창건하었다고 전한다. 

30대 무왕 때 혜현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국보 제49)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을 비롯한

백련당청련당염화실조인정사무이당심우당황하정루천왕문금강문일주문범종각등이 있다.


늘 그렇듯

山에가면 절이 있고 절(寺)에가면 산이 있다

이렇듯 늘 산행과 사찰 기행을 겸한다.......!




수덕사(修德寺),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충남예산 덕숭총림 수덕사를 걷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충남,예산군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홈페이지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8.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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