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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王山],가락국 산자락을 따라 산청 구형왕릉이 있는 왕산을 걷다. 본문
왕산[王山]
가락국[駕洛國] 산자락을 따라 산청[山淸]구형왕릉이 있는 왕산을 걷다.
▲왕산[王山]
높이 : 923.2m
▲나의산행코스 :
산청 금서면 화계리 구형왕릉→→→수정궁터→→→ 류의태약수터 →→→갈림길
→→→왕산 →→→소나무휴식터→→망바위→→→망경대→→→구형왕릉
▲왕산 개요: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시천면 경계를 이루는 지리산 천왕봉(1,915.4m)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약 2km 거리인 하봉(1,781m)에서 북동으로 방향을 틀어나간다.
이 능선은 쑥밭재를 지나간 1,315.4m봉에서
거의 동쪽으로 휘돌아나가다 약 2km 거리에서 다시 북동으로 방향을 바꿔
약 2km 거리인 왕등재에 이르러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나가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북동으로 가지를 쳐 나가는 능선이 있다.
왕등재에서 북동으로 달아나는 능선이 약 6km 거리에 이르러
빚어놓은 산이 해발 925.2m인 왕산이다.
왕산에서 계속 북진하는 능선은 약 1km 거리인 905.3m봉에서
북동으로 휘어져 내리다가 틉톱재에서 잠시 가라앉았다가 봉화산(526m)을 들어 올린 다음
그 여맥을 임천강과 경호강에다 모두 가라앉힌다.
왕산 동릉 상 1.5km 거리에는 뾰족하게 솟은 암봉이 있다.
바로 필봉산(848m)인데, 왕산에 올랐다면 필히
이 봉까지 가보게 되는 인기있는 봉우리여서, 왕산과 함께 항상 산행이 연계된다.
왕산은 옛날 가락국의 궁궐 이름인 태왕궁에서 이름을 따서 태왕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수로왕이 말년에 이 산에서 휴양했다고 가락국 양왕 신도비에 새겨져 있기도 한
이 산은 가락국의 왕과 많은 사연이 있음을 알려주는 지명인 왕등재
국골, 깃대봉 등이 각종 기록이나 문헌에도 나와 있다.
▲왕산 등산지도
▲찾아가는길
晉州 문산ic삼거리 -→남해고속도로 진주jc -→ 남해고속도로 산청ic
-→금서면 특리 동의보감로 -→ 덕양전―→구형왕릉주차장
60km 승용차 50분소요
→→→→→2018년 2월5일 월요일
우리나라 구석구석 그리고 산을 찾아 깊은 겨울날에
길을 나서본다.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왕산이다.
↗산청 왕산 안내판
구형왕릉 입구 주차장에 산청 왕산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소개글은
산청의 방장산(지리산)중 왕산은
장대한 지리산맥의 동북쪽 끝으로 가락국시조대왕 김수로의 태왕궁지이다.
162년 김수로대왕은
첫째 왕자인 거등 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가락지품천 방장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태후와 함께 이거하여
왕의 호를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 왕후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로
궁은 태왕궁(太王宮)으로 산은 태왕산으로 명명하였다.
.......이하생략
↗구형왕릉(仇衡王陵)
가락국의 자취, 덕양전과 구형왕릉은
도로변에 자리해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는 덕양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은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521~532 재위)과 왕비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구형왕은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준 후 왕산 수정궁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사후 이곳 덕양전에서 구형왕을 기리는 향화가 이뤄졌다.
전쟁 등으로 소실되었던 것이 1798년 중건 되면서 향례를 계속해왔고
1898년 수로왕의 능침이 승선전으로 사액될 때 덕양전도 그 이름을 얻게 된다.
지금의 건물은 1991년 문화재 정비사업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덕양전을 우측에 두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오르면
구형왕릉과 왕산 들머리가 있다.
↗구형왕릉(仇衡王陵)
구형왕릉은
사적 214호로 관리되고 있는 구형왕릉은 높이 7.15m로서 7단으로 되어 있다.
양편에 문무인석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고
돌무덤 구형왕릉은 돌과 돌을 잇대어 쌓은 것이 마치 피라미드의 축소판 같으며
각 단 앞부분 양쪽에는 모서리가 분명하지만 뒤쪽은 경사면에 돌을 쌓아 모서리가 없다.
네 번째 단에는 가로 세로 40cm 깊이 68cm의 감실이 설치돼 있다.
높이는 총 7.15m다.
감실이란 주로 신주나 등잔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구형왕릉 감실은 아직도 그 용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무덤 앞에는 ‘가락국 양왕릉’이라 새겨 넣은 비석이 있고
문인석·무인석·돌짐승·상석·장명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모두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흔히 구형왕릉 앞에 ‘전(傳)’자를 붙이는데 ‘구형왕릉 무덤이라 전한다’는 뜻일 뿐
거대한 돌무더기가 무덤인지 석탑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구형왕을 양왕으로 부르는 이유는 신라에 나라를 넘겨주었기 때문인데, 일설에는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히겠는가. 돌로 덮어 장사 지내 달라”는 왕의 유언에 따라
병사들이 임금의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잡석을 하나씩 포개었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구형왕은 신라에 투항한 후에도 30년을 더 살았다 하여
이 이야기조차 크게 신빙성은 없다고 전한다..
↗가락국 양왕릉 비(碑)
금관가야국 제10대 '구형왕' 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 이라고도 하며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 이다.
521년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재위 11년만인 532년 신라 법흥왕의 침공을 받자 ‘토지를 다투어 백성을 전화에 끌어들일 수 없다’는 이른바
양민지도(良民之道)를 내세워 신라에 나라를 선양(禪讓)했다.
신라 법흥왕은 구형왕을 상대등으로 대우하고 그 나라를 식읍으로 삼고 ‘금관’이라고 하였으나
구형왕은 이를 거절하고 산청의 옛 수정궁에 은거하니 가락국은 10세 491년만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구형왕이 산청 지리산 자락 왕산 수정궁에 은거한 지 4년만(535년)에 승하하자
백성들이 왕산에 석릉(石陵)으로 모셨다.
후에 손자 서현이 궁을 절로 만들었으며 왕대에 수로왕의 왕묘를 세우고
이 절을 구형왕의 사당으로 세워 원찰로 삼았다.
증손자 김유신은 7년간 능을 지키며 높은 담을 쌓아 활쏘기를 익혔는데
지금은 사대비(射臺碑)만 남아 있다. 김유신이 출전하면서 승도들에게 왕묘를 봉안케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승도들이 신주를 묻고 유물을 비밀스럽게 감추니 궁은 왕산사로 바뀌었다.
구형왕릉 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이 무덤은
그 형식에 있어 일반 분묘들과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국내 유일의 피라밋 형태의 석릉으로 각 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으로 축조되었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리는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의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석렬은 전면에서조차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도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면 중앙에서부터 높이 1m 내외의 담이 두러져 왕릉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면 전체의 높이는 7.15m로 되어 있고, 하단의 길이는 25m이다.
동쪽 4단의 중앙에 가로, 세로 40cm, 깊이 68mdml 석문(石門, 감실)이 마련되어 있어
영혼이 쉬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되고 있다
↗문인과 무인의 석상.
구형왕릉을 왕릉이라고 하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현 산천조에 '왕산(王山)'이 있고
그 각주(脚注)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에 있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처음 보이는데
근처에 있는 왕산사에 전해오고 있는 '산사기권'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다른 자료인 '산청현유지'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승려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
이 기록에 의하면 200년 이전부터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들이 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비롯한 유물들이 전해오고 있지 않다.
다만 최근에 완성한 구형왕의 영정만이 있을 뿐이다.
↗왕산 구형왕릉에서의 들머리
여기서 왕상정상가지 거리는 4.8km라고 되어 있다.
남한 내륙에서 가장 높은 지리산 천왕봉(1915m)을 서쪽 경계에
세워둔 경남 산청군은 1000고지가 넘는 웅석봉(1099m)과
황매산(1104m)을 비롯 20여 개의 높고 낮은 산들을 곳곳에 배치시키고 있다.
산의 대부분은 지리산의 위성봉이자 황매산의 곁가지가 된다.
천왕봉·웅석봉·황매산과 마름모꼴로 이어진 금서면 왕산(923m)은
지리산 왕등재에서 뻗어 내린 봉우리다.
↗솔나무 식생(솔나무 숲길)
왕등재는 천왕봉을 출발해 쑥밭재~새재~외고개를 넘어 960고지에
커다란 습지를 만들어낸 생명의 땅, 이 봉우리에서 북으로 발을 넓혀 왕산을 세웠고
왕산은 다시 필봉산(848m)까지 이어져 경호강에 의해 길고 긴 걸음을 멈춘다.
왕등재와 왕산, 굳이 두 지명에 ‘왕’자를 넣은 까닭이 궁금한데
산행은 그 이유를 설명하듯 구형왕릉 돌무더기 앞에서 시작된다.
↗ 산청 왕산사지(山淸 王山寺址)
수정궁터
경상남도 기념물 제164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 31, 산음현(山陰縣) 불우조(佛宇條)에 보이는
왕대암(王臺菴)이 바로 이 절터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는 전(傳) 구형왕릉(仇衡王陵) 조금 못 미쳐 왼쪽으로 임도를 따라 2㎞쯤 올라가면 남아 있다.
4곳의 건물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초석과 돌담, 석축, 우물 등이 남아 있고
비석의 대석(臺石)과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등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양의 기와조각과 그릇조각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와 존폐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산사지와 관련 있는 가락국양왕신도비(駕洛國讓王神道碑)에 따르면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손자 대각간(大角干) 김서현(金舒玄)이
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하는 태왕궁(太王宮) 오른쪽에 시조 수로왕과
구형왕의 묘당(廟堂)을 세워 그곳에 승려를 두어 수호하게 하였다고 한다.
왕산사지에서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이 7년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대(臺)를
쌓아 활쏘기 등 무술을 익혔으며, 676년(문무왕 16)에 왕이 납전(納田) 30경(頃)을 내려
향사(享祀)를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수정궁터의 부도4기
1200년(신종 3)에는 왕이 교지를 내려 능원(陵園)과 승사(僧舍)를 수리하게 하였는데
이후로는 왕산(王山) 일대가 완전히 승려의 도량으로 크게 변모하면서
가락국의 자취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1798년(정조 22) 영남에 큰 가뭄이 들어 마을사람 민경원(閔景元) 등이 왕산에 기우제를 지내고
왕산사에 유숙하였는데, 승려의 말에 따라 이 절에서 비장(秘藏)한 상자를 열어 보니
영정 2본(本)과 소지했던 물건 및 고승 탄영(坦瑛)이 지은 사기(寺記)가 들어 있었으며
모두 구형왕과 관련된 유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사찰을 둘러싸고 가야계 후손들과 승려들이 대립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예조판서 조인영(趙寅永)과 판부사 이병정(李秉鼎)이 승려들을
엄히 징계하는 훈칙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상은 왕산사는 가야왕족의 원찰로서 기능을 갖고 있었으나
아마 조선 후기에 이르러 왕산사의 사세(寺勢)가 약화되면서
가야계 후손들에게 사찰 소유의 토지를 빼앗겨 버린 것을 알려 주는 기록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절이 폐사된 시기는 정조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류의태 약수터 방향 돌계단
예전에는 그다지 약수터 가는길이 좋지는 않았는데
금서면 동의보감촌이 생기고 그에따라 여러가지 정비 되어
약수터 가는길도 돌계단으로 잘 정비된듯 하다.
↗ 류의태 약수터
류의태약수터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로는
류의태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난치병도 "천인수(千蚓水)" (만인수(萬蚓水)라고도 함)를 먹어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신의 류의태의 가르침 속에 무릇 물에는 서른세가지 종류가 있고
그 약효가 달라 의원은 약효를 내는데 물을 가려써야 한다며
물 중에 정화수(井華水)에 이어 두번째로 치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온(溫)한 "한천수(寒天水)"로 장복하면 반위(反胃:胃癌)를 다스린다는
물로 왕산의 약수가 이에 해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눈이 내린 한겨울에도 왕산의 약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맛이 참으로 좋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류의태 선생 활동시 한약제조에 사용되었던 샘터(일명:약물통)의 약수는
돌너덜 아래 자리잡은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용하는 곳이다
↗류의태 약수터에서 휴식
구형왕릉에서 류의태 약수터까지 마을사람 산책 코스로는 적당하게 느껴진다
운동삼아 걸어와서 약수 한모금 마시면
정말 좋을듯 하다..
↗류의태 약수터 내부
추운겨울이라 내부 꽁공 얼어 붙었다
누군가 얼음구멍을 내었는데
역시 그속도 얼어 붙어 있다
그래서 물맛은 보지도 못하였다.
↗ 칼바람속 휴식
오늘따라 바람이 세차다
바람소리가 솔나무 숲사이로 씽씽 소리내며 들려 온다.
↗평전샘터 갈림길
이곳 샘터에서 왕산으로 바로 갈수도 있고
능선을 올라 전망바위를 경유하여 왕산으로 가는 두갈래 길이 있다
능선에 올라서면 지리산 주변과
덕유산을 비롯한 유명산들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겨울답게 잔설이 여기저기 있다.
↗정상부 솔나무 숲길
왕산 식생은 솔나무 군락을 이룬다
칼바람이 싱싱 솔나무 숲사이를 비집고
내 얼굴을 지쳐갈땐 얼굴이 얼어버릴 듯한 추위다....
↗ 잔설
여긴 제법 음지라 그런지 잔설이 많다.
잔설 지역은 미끄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잔설지역에서 낙상은 위험하다
골절이나 척추손상까지도,,이어질수 있다.
↗정상(왕산923.2m)
왕산 정상이 보인다...
왕산은
정상에 서면 남서쪽으로 지리산 줄기가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뻗어나온 동부능선이 왕등재 웅석봉으로 이어지고
잘 알려진 함양의 독바위와 새봉도 손에 잡힐 듯 다가서고 세걸산 만복대 바래봉으로 물결치는
서북능선도 그 너머그 도중에 왕등재에서 북으로 가지를 쳐서 왕산을 만들어 놓았다.
↗왕산
가락국의 멸망을 지켜본 구형왕의 능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활쏘기를 했다는
사대(射臺)가 있는 왕산과 선비의 고장인 산청을 상징한다는 필봉산은 산청군 금서면 일대에 높이 솟아있다.
왕산의 옛 이름은 태왕산이라고 하였는데
아마 가락국의 궁궐 이름도 태왕궁이 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추측되고
수로왕이 만년에 이 곳에 와서 휴양했다고 가락국 양왕신도비에 새겨져 있으며
왕산은 가락국의 왕과 많은 사연이 있음을 알려주는 지명
즉 왕등재, 국골, 깃대봉, 각종 기록이나 문헌에도 있어 왕산이라 하였던 것 같다.
여우고개에서 보이는 필봉의 모습은 독특하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산의 이름대로 붓끝을 연상해 필봉(筆峰) 또는
문필봉(文筆峰)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혹자는 여인의 가슴을 연상해 유방봉, 유두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높이는 이웃한 왕산보다 75cm가 낮지만 산의 모습이 인상적이라 시야에는 필봉산이 먼저 들어온다.
필봉산 정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바윗덩어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다 뾰족하고 사방이
가파른 급경사라 여우재쪽 외에는 접근하기가 까다롭다
↗정상 표지석에서
월요일이며 주중이고 추운날이라
산행자가 우리 일행 뿐이어서
마냥 정상에서 칼바람 맞아가며 즐겼다...
그리고
하산은 망경대 방향으로 하였다.
↗생수가 얼었다
칼바람속의 산행길엔 생수도 얼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추운지
방한복 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가슴속을 차갑게 만든다....!
↗전망대
여기서보면 필봉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여름 같으면 그냥 벌러덩 드러누워서 시원함을 만끽 해보고싶겠지만
필봉산 정상을 바라보면서
올해도 좋은 하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필봉산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산의 이름대로 붓끝을 연상해 필봉(筆峰)
또는 문필봉(文筆峰)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어떤이는 여인의 가슴을 연상해 유방봉, 유두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높이는 이웃한 왕산보다 75cm가 낮지만 산의 모습이 인상적이라 시야에는 필봉산이 먼저 들어온다.
필봉산 정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바윗덩어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다
뾰족하고 사방이 가파른 급경사라 여우재쪽 외에는 접근하기가 까다롭다.
↗분재같은 솔나무
높은산에 이렇게 분재같은 큰소나무가 덩그라니 자리하고 있다
산행자들이 나처럼 앉아 인증사진을 찍어서 그런지
앉은곳은 사람의 흔적에 반질하다
왕산은 식생이 대부분 솔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재선충의 피해가 없기를 바랄뿐이다.
↗소왕산(小王山) 905.8m
소왕산은 왕산 망경대와 왕산정상 사이에 있다
높이는 해발907m이다.
경남 진주 산오름 산악회에서
표지석을 만들어 설치 했나 보다
표지석엔 진주 산오름 산악회2015 라고 새겨져 있다.
↗망바위
망바위 뜻은 망을 본다 전망좋다는 뜻인가 싶다
망바위에서 전망을 보게 테크로 만들어 놓았다.
테크에서 망을 보듯 무엇이 보이는지 보자
↗망바위 테크
먼저 문에 들어오는것은 산청 동의보감촌 전체가 조망된다
동의보감촌은
2010년 5월 개관한 동의보감촌(산청한방테마파크)는
한의학박물관과 연계하여 전통한의학(한방)주제를 다섯 마당으로 구성하였다.
주제공원의 곰과 호랑이 캐릭터를 비롯하여
각종 오브제, 기념동상, 수경시설, 상징물, 연출물 등을
친환경 소재에 의해 전통한방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국내 최초 한방테마공원이다.
그리고 저멀리 차황면 황매산도 조망된다.
↗망경대(望京臺)
망경대란 이름은 여러 산마다 있다
특히 설악산 망경대를 비롯하여 청계산 망경대 태백산 망경대등
알만한 산엔 망경대란 이름이 있다.
산청 왕산 망경대는
바위 위에 '망경대(望京臺)'라 적힌 비석 글자를 보면
경치 경(景)자가 아니라 서울 경(京)자를 쓴 것에서 그 내력을 더듬어 볼 수 있다.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를 지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선생이
조선 건국에 반대해 산청군(당시 산음현)에 칩거해 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이곳에 올라 정북 쪽인 개경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 또한 패망한 왕국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북쪽 멀리 황석산과 기백산이 보인다.
↗망경대
왕산(王山 925m)의 북쪽능선 2km지점에 '망경대(望京臺)'가 있다.
이곳은 고려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고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생몰년 미상.본관 驪興.자 榮叔)선생이
두문동에서 산청 생초면 대포리로 남하 이거(移居)하여
매월 초하룻날 이곳에 올라 개성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하여 명칭되었다.
두문동 72현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고려에 충절을 지킨 유신(儒臣)들을 가리키지만 박문수(朴門壽)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曺義生)‚ 성사제(成思齊),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외는
이름이 모두 전하지는 않는다.
태조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경복궁에서 친히 과장(科場)을 열었으나
아무도 응시하지 않자 진노하여 산에 불을 놓아 72인이 모두 타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민안부(閔安富)등 일곱 유신들은 개성부 성균관 서쪽에 있던 표절사(表節祠)에서 제향되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있으며
부조현(不朝峴) 또는 괘관현(掛冠峴)으로 불렸다.
두문동을 거쳐 경상도 산음(山陰.산청의 옛이름) 땅으로 이거했던
농은과 그 후손들은 모두 출사하지 않고 학문을 강마(講磨)하며 세거(世居)하였다.
농은의 후손들은 1879년 이곳에 망경대 비(碑)를 수립(竪立)했다.
몽오(夢梧) 김종수(金鍾秀)의 문집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집에 기록된
농은 민안부 묘표문과 신도비명(병서)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잘 가꾸어진 솔나무
농은 민안부 묘표문과 신도비명(병서)의 원문
高麗禮儀判書閔公墓表 / 夢梧集卷之六
維慶尙道山淸縣北松衢。直頭流山之右麓。前對鏡湖。而墳高五尺面艮者。高麗禮儀判書閔公安富之藏也。舊有短表。字漫滅不可識。
可識者表面職姓五字及表陰農隱與杜門等字而已。後孫累數百人。謀改竪新表。使宜洙來日長山下千里。乞文於余。
盖公事高麗。官至禮儀判書。見麗運將訖。遯于萬壽山之杜門洞。及 聖祖龍興屢徵不起。遂逾嶺而南之山陰之大浦家焉。
自號農隱。遺戒子孫。勿赴擧。其見於野史者止此。按公家乘無所得。得詩二十字曰。不義之富貴。
於我如浮雲 。石田王春在。携鋤朝暮耘。嗚呼。此農隱之所以自號也歟。公字榮叔。驪興人。遠祖諱稱道。尙衣奉御。
傳六世至諱基。官至吏部尙書門下平章事。於公曾祖。祖諱孺。戶部員外郞。考諱栯。都僉議舍人。公娶靑松沈氏。\
閤門祇侯淵之女。生一男綏。入我 朝除同福縣監。不赴大浦之西。有山北折而隆起曰望京臺。故老傳公每月朔。
登焉以望松京。故名云。革代之際。公私掌故多失其傳。往往以疑傳疑。然公出處大節之傳而有徵者。
猶足以補國史之闕也。噫。如公之爲。但求無愧於其心與其先王而已。初非求知於後人者。
而乃後之人必欲闡發幽潛而表揭之者。將以愧夫千百代之下。爲人臣子而賣國。以邀己利者也。
余故特書之。俾歸而刻諸石。山淸。本山陰縣。後改以今名云。
↗구형왕릉까지 0.86km
사진 찍어가며 천천이 쉬엄쉬엄 왕복3시간 소요 되었다
왕산은
'민족의 영산' 지리산 자락의 동북쪽 끝에 솟아오른 왕산과 필봉산은
정상 사이의 거리가 불과 1㎞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탓에 일반적으로
한꺼번에 묶어서 산행을 하게 되는 형제산이라 할 수 있겠다.
내친 김에 서열을 정해보자면 해발도 높고 산세도 후덕해 보이는 육산인 왕산을 형으로
날렵하고 재기발랄함을 갖춘 암봉인 필봉산을 동생으로 삼는 것이 무리가 없겠다.
특히 가락국(금관가야) 10대 왕이자 가야제국 최후의 왕인 양왕(구형왕)과
그 증손자 김유신 장군에 얽힌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와 유적을 품고 있는 왕산이다 보니
아무래도 두 산 가운데는 형님산으로 대우해 줘야겠다.
그 뿐인가. 왕산은 조선 건국에 반대한 고려의 충신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인
농은 민안부의 충절이 서려 있는 망경대를 품고 있고
허준의 스승인 조선 중기의 명의 류의태가 머문 산이기도 하다.
왕산[王山]
가락국[駕洛國] 산자락을 따라 산청[山淸]구형왕릉이 있는 왕산을 걷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경상남도, 산청군,한국의산하홈페이지 카페 블로그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8.02.06] 스마트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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