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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붕사[一鵬寺],세계 최대 동굴법당 기네스북에 등재된 경남의령 일붕사에 가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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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붕사[一鵬寺],세계 최대 동굴법당 기네스북에 등재된 경남의령 일붕사에 가다

바다늑대FORCE 2017. 6. 26. 13:51

일붕사[一鵬寺]

세계 최대 동굴법당 기네스북에 등재된 경남의령 일붕사에 가다..!

 

♣일붕사 [一鵬寺] 

경상남도 의령군 궁유면 청정로1202-15

대한불교 일붕 법왕종 총 본산

055-572-7777

 

♣ 일붕사 가는길

부산출발-남해고속도로진주방향-함안 ic-법수,정곡-궁류 일붕사
대구,밀양출발- 창녕- 영산-신반-봉수 또는 유곡- 궁류 일붕사
진주,합천출발-쌍백-궁류 일붕사

 

♣ 사찰기행일 : 2017.6.25(일) 날씨:맑음

♣ 일붕사 개요:

일붕사는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에 있는 절이다.

천혜의 자연요건을 갖춘 봉황대에 위치한 일붕사는 영국 기네스북 세계 최대의 석굴법당으로 등재되어 있다

727년에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전신이다 

대한 불교 일붕 법왕종 총 본산인 일붕사에는 세계최대의 석굴법당과

바위틈에 자리잡은 나반존자, 병풍바위 밑의 약사여래불, 삼천불의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는지장전이 있으며

83과의 일붕존자 진신자리가 모셔져 있다.

또한 서경보 스님의 유품이 마련된 기념관도 있다.

일붕사가 소재한 봉황산은

신라시대 삼국을 통일에 기여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첫 요새지로서

신라최고의 군사부대였던 봉황대의 이름을 따 봉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727년 신라 성덕여왕 26년에 혜초 스님이 중국과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오던 중 꿈에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절벽에서 지장보살님이 환하게 웃으며 이곳에

호국영령들을 위로해 줄 불사를 하면 훗날 큰 보배가 될 것이라 듣게 된다.

스님은 귀국하는 길로 성덕여왕께 말씀드리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 헤매다가

꿈에 본 기암절벽과 모습이 흡사한 이곳 봉황산에 사찰을 건립하여

당시 성덕여왕의 이름을 따 성덕사라고 하던 것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라 전해진다.

 

-일붕 서경보스님 약력-

83세를 일기로 1996, 6월 25일 입적한 일붕 서경보스님은

독특한 선수행과 포교활동으로 불교 계 안팎의 주목을 받아왔다.

1914년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난 스님은

19세때 산방굴사에서 혜월스님을 은사로 불가에 입문했다.

31세에 일본 경도의 임제 전문학교 전문학부에 입학,

33세에 졸업했으며 37세에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53 40세에 진주해인대학 교수,

43세에 동아대 철학과 주임 교수,

49세에 동국대 불교대 교수로 후학을 길러온 스님은 56세에 동국대 불교대학장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스님은 62년 불국사 주지,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을 역임하는 등 한때

조계종의 중진과 원로스님으로 활동했다.

 

 

♣ 나의 사찰기행 가는길

 진주--→합천쌍백--→의령궁유--→일붕사 49km  50분 소요

 

 

→→→→→사찰기행시작

경남의령에 가볼만 한곳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일붕사를 둘러보기위해 길을 나섰다..!

 

 ↗ 일붕사 주차장에 있는 약사여래불상

주차장에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고 쇄석으로 되어 있었다

한쪽엔 일붕스님 기념관 건축중에 있으며

주차장에 있는 석불은

아마도 약사여래불 같다...!

주차장에서 일붕사까지는 15m정도이다.

 

↗입구에 있는 석물

주차장에서 입구로 들어서면 돌탑과 포화대상등 석물이 있다.

봉황산 일붕사는

기상이 천태만상으로 기기절묘한 봉황대가 있는 궁유면에 위치하며

의령군의 북쪽에 위치하며 의령군과 합천군의 경계지점이 있다.

 

↗공덕비

국암담양전공행적비(局庵潭陽全公行跡碑)

일붕사가 소재한 봉황산은

신라시대 삼국을 통일에 기여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첫 요새지로서

신라최고의 군사부대였던 봉황대의 이름을 따 봉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727년 신라 성덕여왕 26년에 혜초 스님이 중국과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오던 중 꿈에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절벽에서 지장보살님이 환하게 웃으며

이곳에 호국영령들을 위로해 줄 불사를 하면 훗날 큰 보배가 될 것이라 듣게 된다.

스님은 귀국하는 길로 성덕여왕께 말씀드리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 헤매다가

꿈에 본 기암절벽과 모습이 흡사한 이곳 봉황산에 사찰을 건립하여

당시 성덕여왕의 이름을 따 성덕사라고 하던 것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라 전해진다.

 

↗일붕사 공덕비들

일붕사는 사찰대지 16,529m²(5천평)

임야 99,174m²(3만여평), 신도수 2천여세대

석굴 대웅전 456.2m²(138평), 석굴무량수전 297.5m²(90평)

제1요사, 제2요사, 조사전, 약사전, 북극전, 나한전

산신각, 종각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일붕사

일붕사에는 일주문이 없이 사천왕문과 2층의 범종루로 되어 있다.

일붕사는

창건이래 몇번의 화재가 있었고

1984년 화재로 완전 소실된후 1986년 지금의 동양 최대 법당인 대웅전과 무량수전이 건립되였다.

↗사천왕문과 범종루

사천왕문 우측에는 창건유래 안내판이 설치 되어있다.

 

↗일붕사 사천왕문[지국천왕-우측. 증장천왕-좌측]

지국천왕은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支局天王)은 온몸이 청색이며 비파줄을 튕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으며

백옥 같은 아를 드러낸채 환한 미소를 띠며 비파를 타고 있는 모습은 진리를 들으면서 샘솟게된다.

법영을 모든 중생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는듯하다.

어둠속에 방황 하는 중생제도를 위해 천왕문에 자리한 것이다.

증장천왕은

남쪽을 수호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몸은 적색을 띠고있고

오릉손에는 칼을쥐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대고 있으냥

보석을 손바닥에 오려놓은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천왕은 자신의 위덕을 중장시켜 만물 소생 시키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일붕사 사천왕문[광목천왕-우측. 다문천왕-좌측]

광목천왕은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몸은 백색이며 분노한 눈을 가진다.

오른손에는 용을 꽉움켜 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위로 들어 엄지와 중지로 여의주를 살짝 쥐고 있다

이천왕은 선한자 에게는 복을 악한자 에게는 벌을 주면서

인간을 복을 악한자 에게는 벌을 벌을

주면서 인간을 고루 보살피고 국토를 수호 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다문천왕은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몸은 흑색이며

웅변을 통하여 삿된 말,이간질 하는말,상스러운말,속이는 말등

입으로 짓는 업을 물리친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입으로 벌리고 있다.

손에는 삼지창 과 보탑을 들고 있다

이천왕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여 도심 일으키도록 하는서원 세웠다.

 

↗일붕사 종무실

일붕사 종무실과 무인 공양물 판매대가 설치되어 있다.

일붕사 이곳에는

신라 성덕왕때 혜초스님이 지장보살님을 알현하고

이곳에다 절을 지었는데 성덕왕의 이름을 따 성덕사라고 지었다.

성덕사가 워낙 불이 잘 나니까 일붕스님이 봉황산이라 산의 기가 너무 세어 사찰이 부지 못하니

기를 줄이기 위해 굴을 파야 한다고 해서

지금의 주지 혜운스님이 동양 최대동굴법당인 455㎡ 규모의 대웅전과

297㎡에 이르는 제2동굴 법당 무량수전의 대불사를 시작하게 되어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큰 법당을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불자들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 도량으로

하루 평균 2백여 명의 불자들이 오고 있다고 전한다.

 

↗9층석탑과 폭포

일붕사 도량에 들어서면 먼저 9층석탑과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9층석탑은 일붕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시원하게 쏱아지는 폭포수

무더운날 폭포수만 보아도 시원하다

자세히 보니 인공적인 폭포수 였다.

 

↗일붕사 대웅전

이 동굴법당인 대웅전은

7년간의 굴착작업 끝에 1996년 준공됐으며

높이 8.5m, 폭 12.7m, 길이 27.5m에 면적이 456㎡에 달하는 규모로

같은 해 ‘국내최대 동굴 법당’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공식 등재된 곳이다

 

↗대응전 내부

본존불로 가는 법당내부 좌우에는 12지신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십이신장(十二神將) 또는 십이신왕(十二神王)이라고도 한다.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이다.

이들은 열두 방위(方位)에 맞추어서 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돼지·개·쥐·소 등의

얼굴 모습을 가지며 몸은 사람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도교(道敎)의 방위신앙에서 강한 영향을 입은 것이라고 한다.

 

↗법당내 천정에 그려져 있는 용[龍]벽화

입구 천정에는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벽화가 웅장함을 자아낸다.

사찰의 상징인 용은 

부처님과 불법을 외호하는 수호신…극락세계로 인도하는것으로

사찰의 법당 기둥과 천장을 비롯해 처마와 추녀 밑, 닫집, 벽체, 계단 소멧돌 등에

장식된 용은 사찰 장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용의 외형을 살펴보면 머리는 소, 뿔은 사슴, 배는 뱀, 꼬리는 물고기를 닮았고

수염, 여의주, 발톱을 갖춘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어

중국 전래의 용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성격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용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불전 어칸(御間, 전면 중앙의 칸) 양쪽 기둥머리에 조각해 놓은

용과 추녀 밑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용이다.

어칸 용의 경우에 머리는 바깥에, 꼬리는 실내에 두고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고

추녀의 경우 구례 천은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듯이

법당 앞쪽 추녀에는 용두, 뒤쪽 추녀에는 용꼬리를 조각한 경우도 있다.

 

↗십이신장(十二神將)

우리나라의 십이지신앙은 약사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선덕여왕 때 이미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약사경』을 읽어 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약사경』을 호지(護持)하는 이인(異人)과 교분을 나누었다.
이 십이지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서 그 신격이 변모해 갔다.

즉, 탑을 만들 때 그 기단부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경주 원원사지(遠願寺址)에 있는 삼층석탑은 그 효시가 되고 있다.

조형예술로서 십이지신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 원원사탑이 건립된
8세기 중반 경덕왕 때의 일이다. 이것은 탑이 불교 건축에서 구심점으로 인식된

삼국통일 후의 일반적 경향에 따른 창출물이었다.

 

 ↗일붕사 대웅전 본존불

법당은 38평이며 여름이라 그런지

내부에는 에어컨을 켠듯이 시원했다.

 법당 정면에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좌우에 모셔져 있다.

 

↗일붕사 본존불인 비로자나불[Vairocana .毘盧遮那佛]

비로자나불은

비로자나불은 대승불교에서는

화엄경〉에서 시방제불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법신불로 등장한다.

밀교에서는 아득한 옛날에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5선정불의 중앙에 위치하는 부처로 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비로자나불만을 따로 모시기도 한다.

회화에서 비로자나불은 흰색으로 채색되고 손은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용 또는 사자를 타고 다니고 수레바퀴를 상징으로 하며

5온 중에서는 색을, 소리로는 '아' 또는 '옴'이라는
음을, 우주의 구성요소로서는 공간을, 감각으로는 청각을, 감각기관으로는 귀를 담당하고 있고

인체에서의 위치는 머리이다

비로자나불은 동아시아의 유가사들이 널리 모신다.

전설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초인적 존재인 금강살타에게 요가의 가르침을 전했고

금강지가 719년 중국에 그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법당내부의 문수보살 상

법당내부에는 좌우 8대 보살상을 모셔 놓았다

문수보살은

법당본존불이 석가모니 불상일경우 왼편에 모시며

지혜를 맡아 보는 보살이다.

 

↗법당내부의 관세음보살 상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 구제하고 제도한다는 보살이며

중생 고난 열심히 이름 외면 구제 받는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보는 이의 정신 수준에 따라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로 ‘모든 곳을 살피는 분’이나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졌다.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하며 널리 숭상된다.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세음보살의 공덕과 기적은 〈관음경>, 〈법화경〉 등 많은 불교 경전에 나타난다.

이 경전들은 대중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경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 무렵 백제와 신라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뚜렷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주로 현실적인 이익을 위한 성격을 띠지만

관세음보살이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돕는다고도 보았다.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대중과 가장 친근한 신앙으로 정착되었다.

 

 

↗지장보살

일붕사 담장위에는 작은 지장보살상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것은 아마성덕여왕 26년에 혜초 스님이 중국과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오던 중 꿈에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절벽에서 지장보살님이 환하게 웃으며 이곳에

사찰 창건 유래에서 보듯이

지장보살이 화현하셔서 그런가 보다.

 

↗일붕사 대웅전

봉황산[鳳凰山] 일붕사[一鵬寺]는 대한불교 일붕선교종의 총 본산이며

대웅전을 둘러보고 출입문 앞에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무더운 여름날 대웅전은 더위 시키는 장소였다

시원하며 자연 에어컨속에서 기도할수 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제2동굴 법당

불교에서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건물이며

극락보전ㆍ극락전ㆍ무량전ㆍ보광명전(普光明殿)ㆍ아미타전 등이라고도 한다

 

 

↗무량수전의 내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본존불로 하고 지장보살 삼천불이 있으며

동굴법당 내부는 90평 정도라고 한다.

 

일붕사 창건유래와 걸어온 길을보면

서기 727년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다.

일붕사는 약 1330년 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때 최고의 격전지였다.

당시 왕군이 봉황대 영역 안에 이 지역의 수많은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찰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의 삼왕자가 계셨던 궁소 봉황대의 사찰에서 비로자나불을 안치시켜

호국 일념으로 성덕왕의 덕을 기렸고

성덕대왕이 봉황대의 산세가 빼어남과 선당의 얼이 베인 곳을

천추만대에 기념하자는 뜻에서 자신의 왕호를 내려 성덕사라는 귀족적 사찰을 지었으니

과히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반존자[那畔尊者]와 산신각

나반존자는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한다.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 보이지 않고

불경 속에서도 그 명칭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이다.

 

 ↗일붕대종사[서경보] 동상

일붕스님의 약력을 보면

법명은 일붕이며 1950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거쳐
1969년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말레이시아 불교 종단으로부터 명예대승정

1973년 타이베이원화대학[臺北文化大學]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충남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1980년 미국 히드대학에서 명예종교학박사 학위 등
67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보유했다.
동국대학교 교수(1962), 불국사 주지(1963),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1969)

세계선학회 회장(1976), 한중불교학술연구회장(1982), 자비원장학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으며, 주요저서로는 〈불교입문강화佛敎入門講話〉(1948)

불교사상〉(1979) 등 다수와 〈부처님의 위대한 열반〉(1979) 등의 번역서가 있다.

서경보 스님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제주도 서귀포에서 출생했다.

1935년 전북 위봉사에서 사미, 사미과 수료 후 주지로 있던

유춘담(春潭)스님으로부터 그의 법제자가 되었다. 22세 때 ‘일붕(一鵬)'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한다.
일붕이란 법호를 83세 입적 동안 61년 간 애칭했기에

의령 궁유 봉황대를 와서 보고는 이곳 지명과의 인연이 되었다.

하루에 9만 리를 나른다는 대붕(大鵬)과 봉황은

상서로운 상상의 큰 새로 일맥 상통의 같은 의미를 지니는 새이다.
제주도 출신인 일붕 스님은 제주도 한라산 북단의 관음사의 연고를 마다하고

의령의 봉황대를 원하여 이곳에서 다비식을 했기에 '일붕존자행적비'와 부도탑이 조성되어 있다.

봉황대에 일붕이 찾아 깃든 사찰이 된 셈이다.

 

↗칠성각

칠성은 원래 중국에서 도교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형성된 다음
우리나라에 유입된 신으로, 처음에는 단순한 수호신으로 불교 속에 수용되었다가

다시 수명신 본래의 모습이 강조되고 불교화됨에 따라 독립된 칠성각을 만들어 봉안하게 되었다.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 중의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 수있는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칠성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전국 대부분의 사찰에 건립되어 있다.
억불(抑佛)의 시대에 수명의 연장을 기원하는

하근기(下根機)의 중생을 접수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칠성은 수명신의 구실과 함께 가람수호신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이 칠성각에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인 칠성탱화(七星幀畫)만을 봉안한다.

 

 ↗독성각[獨聖閣]

일붕사 보시함은 철재금고로 뒤어있어 좀 어색하지만

특이 하였다...!

 

독성은 독수선정(獨修禪定)하여 도를 깨달은 자로서

일반적으로 독성각에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봉안하는 것을 통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독성신앙에 특유의 단군신앙을 가미시켜 새롭게 수용하고
전개시켰다. 따라서 이 독성각은 우리나라 사찰 특유의 전각 중의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일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인 독성탱화(獨聖幀畫)를 모시게 되는데

사찰에 따라서는 탱화만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독성각이 토속신앙과의 접합에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널리 건립되어 사찰의 한 당우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가 핍박받게 되고 말법시대(末法時代)라는 자각이 강하게 대두됨에 따라
말법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현재에도 일반 서민층에서는 대웅전 등의 중심 당우에서보다
독성각에서 불공을 드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독성각 중 유명한 것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운문사(雲門寺)의 부속암자인
사리암(舍利庵)과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의 삼성암 등에 있다.

 

↗아미타불

일붕사엔 아미타불의 큰 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거북에서 시원한 감로수가 나오고

약수터와 대불조합으로 사진에 담아 보았다.

 

 

↗일붕사 아미타불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다.

다섯 구원불 가운데 하나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을 가졌다.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정토에 태어나 복을 누리며 살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아미타불 신앙으로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는 선덕여왕 때 자장이 〈아미타경소〉를 계기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역사상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관세음보살은 그가 현화된 것으로 간주된다.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색은 빨강, 상징하는 자세는 선정인, 타고 다니는 것은

공작,배우자는 판다라, 성은 라가, 상징하는 요소는 물, 상징하는 방향은 서쪽, 상징하는 감각은 미각, 상징하는

감각기관은 혀, 인체에서 머무는 장소는 입이다.

 

 

↗아미타불 불상앞에서

일붕사는

이조 성종25년 국령으로 불사 33개소를 회합함으로서 그 영향을 받아 승려를 학대하고

사찰을 파괴함으로서 봉황대 성덕사는 어쩔 수 없이
사찰을 궁류면 운계리 팔사곡 자사산으로 옮겨 정수암으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그 후 (148년전)에 장사곡 출신의 어떤 인물이 들어와 승을 축출하고 암자를 파괴할 때

쇠망치로 수없이 내려쳐도 미륵불상 한불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주승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며 그 불상을 업고 합천군 연호사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연호사 불상 중 일부분이 성덕사 불상이라고 전해온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암자로 있다가 1934년 8월 26일 당시의 면장이 산주와 더불어

봉황대의 덕경을 도우기 위하여 벚꽃나무를 심고 관세음보살상과 여래불상을 모셨으나
소실되어 다시 이야용 스님이 법당을 짓고 성덕사라 하였다.

 

 

↗관음전[觀音殿]

일붕사 관음전은 팔각형으로 건축 되어 있으며

아마도 최근에 건축한것으로 보인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의 공덕이 주원융통하다는 의미에서 원통전이라고도 한다.

이 안에는 관세음보살을 홀로 모시거나, 양류관음이나 해수관음 또는 천수관음 등을 모시기도 한다.

관음상은 대개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하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찰에 관음전이 있다.

 

↗극락보전[殿]

일붕사 극락보전은 관음전에서 약500m윗쪽에 있다.

극락보전은 연못위에 건축 되어 있어 이체롭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를 축소시켜 묘사한 곳으로
아미타전(阿彌陀殿) ·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극락전(極樂殿)은 주로 동쪽을 향하고 있어

예배하는 이들은 서쪽을 향하게 된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신다. 아미타불의 인계에는 9품(品)이 있다.

이는 극락에 태어나는 자들의 수준에 따라 상품(上品) ·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나누고, 다시 각각 상생(上生) · 중생(中生) · 하생(下生)으로 나눈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 하품의 자세를 하고 있다.

즉, 오른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을 무릎 근처에 놓은 모양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의 인계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이
그 예이다. 후불탱화로 극락의 법회를 묘사한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나

극락구품탱화(極樂九品幀畵)를 걸어 극락의 정경을 보여준다.

 

 

↗연못위의 극락보전

 

↗극락보전 우측 뒷편 독성각과 용왕당

 

↗극락보전 좌측 뒷편에 있는 산신각

일붕사의 서경보 스님은

대선사(大禪師)로 조계종 불국사 주지를 지내고 동국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지만

조계종에서 독립해 대한불교일붕선교종을 새로 열어 75세의 나이로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며

79세의 나이에 세계불교 법왕청을 만들어 초대 법왕이 되었다가

1996년 여름에 열반하여 일붕사에서 다비식을 하였다고 한다.

 

↗봉황대에서 바라본 일붕사와 궁유 평촌들녘

의령의 궁유 평촌리에는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는 거대한 암산(巖山)의 암벽 모습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혹은 봉황이 깃들어 집을 짓는 누대같은 높다란 바위가 봉황대이다.

 

↗봉황루[鳳凰樓]

재건축을 위해 파괴 하였는지

그냥 세월에 의해 너무져 내린것인지 모르지만 봉황루는

지금 이렇게 쓰러져 있다.

 

봉화대 돌계단을 따라서 오르면 암벽사이로 자연 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을 지나면 좁은 석문(石門)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 석문을 간신히 빠져 나서면서 또 다시 동굴을 만나게 되는데

이 곳에서 사시사철 넘쳐 흐르는 약수터가 있어 봉황대를 찾는 이들은 여기서

일단 목을 축이기도 한다.
봉황대 중턱에는 약간의 평지를 깎아 누대(樓臺) 하나를 마련해 두었으니 이름하여 봉황루(鳳凰樓)다.
이 봉황루에서는 인근의 유생들에 의해 작은 사회 모임도 있었다고 하니 지

금은 가고 없는 옛 사람들의 풍류를 잠시 엿보는 듯 하다.
봉황루 조금 아래로 내려오는 길목에 성덕암(聖德菴)이라는 암자가 하나 있었으나

최근에 불타고 없어졌다.
이 봉황대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봄철의 경관도 사뭇 일품이지만

여름철 녹음이 우거졌을 때의 시원한 맛으로도 그 진가에 한몫을 더한다.
그러나 봉황대의 진면목은 가을의 단풍으로 꼽히는데 만산홍엽에 뒤덮인

봉황대에 비끼는 석양노을의 정취는 가히 선경이라 한다고 전한다.

 

↗봉황대[鳳凰臺]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이곳에서 벽계저수지를 향해 꺽어드는 길 초임의 산과

바위 그리고 정자 이름이 모두 봉황대다.

의령읍에서 동북간으로 의령 기점 약20km지점 이 봉황대는 한마디로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일대장관이다.

설악의 절경인들 이에서 더 하랴

가히 금강산 절경의 부분 축소판이라 할 것이니

신비한 자연의 조화 앞에는 누구라도 넋을 빼앗기기에 꼭 알맞은 경관이다.

 

 

↗세계불교 초대법왕 일봉존자 행적비와 부도

 

 

일붕사가 소재한 봉황산은

신라시대 삼국을 통일에 기여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첫 요새지로서

신라최고의 군사부대였던 봉황대의 이름을 따 봉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727년 신라 성덕여왕 26년에 혜초 스님이 중국과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오던 중

꿈에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절벽에서 지장보살님이 환하게 웃으며 이곳에

호국영령들을 위로해 줄 불사를 하면 훗날 큰 보배가 될 것이라 듣게 된다.

스님은 귀국하는 길로 성덕여왕께 말씀드리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 헤매다가

꿈에 본 기암절벽과 모습이 흡사한 이곳 봉황산에 사찰을 건립하여

당시 성덕여왕의 이름을 따 성덕사라고 하던 것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라 전해진다.

 

대한 불교 일붕 법왕종 총 본산인 일붕사에는

세계최대의 석굴법당과 바위틈에 자리잡은 나반존자, 병풍바위 밑의 약사여래불

삼천불의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는지장전이 있으며, 83과의 일붕존자 진신자리가 모셔져 있다.

또한 서경보 스님의 유품이 마련된 기념관도 있다.

 

일붕사[一鵬寺]

세계 최대 동굴법당 기네스북에 등재된 경남의령 일붕사에 가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일붕사, 의령군청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홈페이지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7.06.26]

스마트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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