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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麻谷寺], 신록[新綠]가득한 공주 마곡사에서 봄(春)청취(淸趣)에 젖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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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麻谷寺], 신록[新綠]가득한 공주 마곡사에서 봄(春)청취(淸趣)에 젖다

바다늑대FORCE 2017. 5. 3. 21:16

 

마곡사[麻谷寺]

신록[新綠]가득한 공주 마곡사에서 봄(春)청취(淸趣)에 젖다...!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

041-841-6220

♣ 찾아가는길

    남해고속도로(진주ic)→통영대전고속도로-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지선→당진영덕고속도로

- 마곡사ic출구-→사곡교차로-→공주 마곡사

   

♣ 사찰기행일 : 2017.4.29(토) 날씨:맑음

♣ 마곡사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이다.

이곳의 물과 산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祕記)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절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설은 640년(선덕여왕 9)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선덕여왕에게서

하사받은 전(田) 200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通度寺)·월정사(月精寺)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은 신라의 승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麻谷普徹)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약 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1172년(명종 2)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각순(覺淳)이

대웅전과 영산전·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本山)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또한 이 절은 김구(金九)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한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

지금도 대광명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다.

현재 이 절은 충청남도 70여 개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교(極樂橋)를 사이에 두고 보물 제801호인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과

보물 제800호인 공주 마곡사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802호로서

천장의 무늬가 아름다운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大光寶殿), 강당으로 사용하는
흥성루(興聖樓), 해탈문, 천왕문, 16나한과 2구의 신장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명부전이 있으며

응진전 맞은편에는 요사채인 심검당(尋劍堂)이 ㄷ자형으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 마곡사 가는길 

 진주--공주마곡사 235km  2시간30분 소요[정체포함]

 

 

 

▲ 마곡사 안내도

 

→→→→→사찰기행시작

토요일 내자[內子]랑 공주에 있는

춘마곡[春麻谷]이라 부르는 마곡사로 길을 나섰다......!

 

 

↗태화산 마곡사 일주문

一柱門은

사찰에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문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서 지어진 것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한다.

문 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 설 때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마음을 촉진시키는 데 그 뜻이 있다.

현상 면에서 나타난 것은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하나가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인 본질 면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반야(般若)와 번뇌(煩惱)가 둘이 아니다.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도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 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일주문이 세웠진 것이다 라고 한다.

 

↗마곡사 일주문 편액

태화산마곡사[泰華山 麻谷寺] 라고 되어있다.

 

↗태화산 마곡사 매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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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마곡사는 물의 흐름과 산세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어서

난세에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이자,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라 할 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이다.

또한 공주 마곡사는

조계종의 대전,충남지역 70여개 사찰을 관장하고 있는 규모가 큰 사찰이다 

이 사찰은 백제때 창건되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고려말 불교개혁운동을 이끈

보조국사가 크게 중건하여 불교계에서 현재 위상을 가질수 있게 된것으로 보인다.

↗마곡사 가는길

 

춘마곡[春麻谷]봄에는 마곡사라는 뜻인데

춘마곡처럼 신록이 눈이 시리도록 연두색 물감을 풀어 놓은듯 하다.

마곡사란 절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이

설법을 할 때 삼밭의 삼(麻)처럼 많은 군중이 몰려와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지만

선초부터 사곡면(寺谷)이라는 고을이름이 생길 만큼 유명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곡사는 백제의 옛도읍인 공주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지역이며

차령산맥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것으로 보인다. 

 

↗마곡사 유등

 

석가탄신일이 얼마남지 않아서 그런지

길 양쪽엔 연등과 유등을 걸어 놓았다..

보통 오래된 사찰 아래에는 음식점, 숙박시설 등 사하촌(寺下村)이 형성되기 마련이지만

마곡사 입구는 장승마을과 온천개발지로 더욱 성황이다.
일주문으로 들어가면 길 오른편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태극 문양처럼 굽이치는 것이 인상적이며

개울을 따라 약 400m쯤 올라갔다가 다시 휘감듯하는 물길을 따라서

돌아가면 해탈문과 천왕문(문화재자료 제62호)이 있다.

그런데

마곡사는 일반적인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 대웅전 의 가람배치와 달리

해탈문이 앞에 있고, 그 다음에 천왕문이 있다.

 

↗마곡사 표지석 & 템플스테이 안내표지목

 

아마도 요즘은 사찰마다 템플스테이가 대세인듯 하다

큰 사찰 마다 템플스테이 시설을 갇추고 있기 때문이다.

마곡사는 공주에서 금강을 지나

북서쭉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주에서 아산과 예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옛날 이지역을 여행하던

사람들이 묵을수 있었던 곳 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지금의 마곡사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서 마곡사 입구에는 넓은 무료주차장이 있으며

계곡옆으로 포장도로를 걸어가야 마곡사로 갈수 있다.

 

 

↗마곡사 해탈문

마곡사의 정문인 해탈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를 들어가게 되고

해탈할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한다.
마곡사는 일반적인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 대웅전의 가람배치와 달리

해탈문이 앞에 있고, 그 다음에 천왕문이 있다.

해탈문은 1984년5월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 되었고

마곡사 해탈문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 6월에 중수했다는 명문이 편액에 적혀 있어

마곡사 천왕문의 중수 시기와 같다.

그 후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다.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지붕 구조는 무고주 5량집이다.

내부 양 협칸의 경우, 홍살로 칸을 막은 다음, 동쪽 칸에는

금강역사와 문수동자, 서쪽 칸에 금강역사와 보현동자를 안치하였다.

기단은 방형 치석을 외벌대로 만들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주를 세웠다.

기둥 윗부분에는 창방으로 기둥 사이를 걸고 기둥 위에 1조씩 일출목 삼익공식 공포를 짜 올렸다.

앞뒷면 공포 사이에는 화반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초익공은 창방 위치에서 앞뒤로 걸었고, 이익공은 주두 위에 걸리게 하였다.

그 위에 삼익공을 올리고 대량을 걸었다. 외부 제공 끝 안장에는 연화를 새겨두었고

보머리에는 봉황 머리를 조각하였다.
제공의 내부는 보밑까지 경사로 이어졌고

연화두 문양을 새겨 보를 받치도록 했다.

대량 위에는 양쪽에 하나씩 동자주를 세웠고, 종보를 걸쳤다.

종보 위에는 화려한 파련대공을 세웠고, 그 위에 종량을 걸었다.

대량의 양 측면에는 대량에서 휘어져 내려온 충량을 걸었다.

충량 위에도 동자주를 세워 도리를 걸었고

측면 서까래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창호는 앞뒷면 어칸에는 달지 않고 공문(空門)으로 두고, 나머지 벽은 모두 판벽으로 막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홍성루

 

↗매화당

해탈문 옆 담장 쪽문으로 들어가면

매화당인데 태화선원으로 되어 있다.

마곡사 선원이 개설된 이래, 1922년에는

보월(寶月)[1884~1924] 선사가 마곡사 선원 조실로 머물며 납자들을 제접하였다.

1936년에 만공(滿空)[1871~1946] 선사가 마곡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선원의 부흥이 일어났다.

이후 마곡사에는 박고봉·적음·서운선사들을

비롯한 많은 명안 종사들이 주석하면서 선지(禪智)를 펼쳤다.

영산전 옆에는 벽안당(碧眼堂)과 매화당(梅花堂)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염화당(拈花堂)·연화당(蓮華堂)·매화당(梅花堂) 등 승려가 거처하는
요사채가 매우 많다. 이들 건물 중 영산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대표할만한 것이다.

그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金時習)을 만나기 위해서 이 절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이라 한다. 

 

매화당과 영산전으로 가는 쪽문

 

↗마곡사 영산전[麻谷寺靈山殿]

공주 마곡사 영산전은 마곡사 안의 불전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수행 가람의 중심 건물이다.

‘영산(靈山)’은 영취산(靈鷲山)의 준말로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 부근에 있는 산으로서 석가모니가 설법을 한 곳이다.
공주 마곡사 영산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이 강한 원주를 세웠다.

기둥 윗부분에는 창방을 끼우고 주상에만 공포(栱包)를 짜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공포와 공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워두었다.

공포는 앞면과 뒷면이 조금 다르게 짜여 있는데

앞면과 뒷면 모두 이출목 삼익공식이지만 앞면은 제공 끝을 운공 형식으로 조각하였고

뒷면은 제공 끝을 첨차 형식으로 마무리하였다.

따라서 앞면의 공포는 매우 화려하게 보인다.

양 측면에는 풍판을 달지 않았고, 박공판으로 마감을 하여 측면 구조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지붕은 1고주 5량집 구조이며, 천장은 우물반자를 2단으로 처리한 층급 천정이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내부 불단은 ‘⊓’자 모양으로 조성하였고

삼존불과 천불을 병렬 배치하였다. 창호는 앞면 모든 칸에 삼분합문을 달았는데

어칸 살은 교살문이고, 나머지는 ‘정(井)’자살문이다.

측면에는 앞면 쪽으로 출입문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마곡사 영산전[麻谷寺靈山殿]내부 천불전

해탈문 왼편에 있는 영산전(지방문화재 제12호)은

다양한 불상 1000개(보물 제800호)가 있어서

‘천불전’이라고도 하는데

 영산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효종 2년(1651) 중수한 것이지만

 마곡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특히 영산전 편액은 조선 초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 반대해서 생육신으로 전국을 떠돌던 김시습이

마곡사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그를 설득하러 친히 이곳까지 왔을 때 써준 것이라 하고

불상들은 원래 나뭇결 그대로여서 다양한 모습이 또렷했지만

언젠가 모두 금칠을 하여 마네킹처럼 특징 없게 변해 버렸다 하는데......!

영산전은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이 큰 전각으로서

특히 어진 정승과 용맹스런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군왕대의 모든 기운이 모여 있는곳으로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묵불 7구가 있다. 


↗마곡사 천왕문[麻谷寺天王門]

 

마곡사의 2번째 대문인 천왕문은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다

천왕문에는 대개 사천왕상이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네 곳을 관장한다고 믿었던

고대 인도의 신화적인 존재다. 사천왕은 수미산 기슭을 지키면서

그곳 중생들이 바른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천왕들이다.

 

 

 

↗동방은 지국천(持國天)으로 손에 칼을 들고 있고

서방은 광목천(廣目天)으로 탑을 들고 있으며

 남방은 증장천(增長天)으로 용을 붙잡고 있다.

또한 북방은 다문천(多聞天)으로 비파를 들고 있다.

이런 신앙은 『리그베다(Rigveda)』 등 인도의 옛 문헌에 나타나 있다.

 

↗ 천왕문인근 수목들

봄기운 가득 담은 수목들이 봄의 마곡사란 이름답게 연초록색깔이 좋다.

나무에 매달린 연등은 마치

큰 꽃망울 처럼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마곡사 4월에는 신록축제가 있다.

2004년 4월에 처음으로 개최된 마곡사신록축제는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마곡사를 배경으로 다양한 불교 문화와

대중 문화가 어우러지는 축제이다.

축하 사찰 행사로 영산재가 열리며, 길 놀이, 불교 예술인 공연, 난타 공연, 강령탈춤

연예인 축하 공연, 댄스페스티벌, 7080콘서트

마곡사 신록 노래 자랑, 한마당 축제 등이 펼쳐진다.

외 부대 행사로는 불교 예술인 작품전, 전시회, 제기 차기

투호 던지기, 관광객 인물화 제작 등이 있다.


 

↗극락교

마곡사 천왕문을 지나면 사찰 중앙으로 하천이 있으며

해탈문 천왕문 영산전과 대웅보전을 이어주는 중앙다리가 극락교이다.

석재로 만들어진 극락교는 아마 최근에 만든 교량 같고

예전엔 돌다리나 섶다리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천에 있는 거북 조형물

 거북이는 십장생 하나로 만들어 놓았을까

아니면 그냥 분수대 꾸미기 위한 단순한 것일까........생각도 해본다.

 

↗마곡사 범종루

마곡사 범종루는 열삽자형(十)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최근에 불사해서 건축 한듯 하며

범종루 반 지하에는 불교용품 판매소가 설치되어 있다.

 

↗마곡사 오층석탑

마곡사 대웅보전이 있는 중심구역중 도량 중앙에 있으며

탑은 고대 인도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를 한자로 음역하면서 솔도파(率堵波)

솔탑파(率塔婆)라 하다가 탑파(塔婆), 탑이라는 줄임말로 부르게 되었다.

스투파의 원래 뜻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묘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사원의 중심에 탑을 하나 세워 불사리를 봉안하였으나

나중에는 탑을 두 개 나누어 세우기도 하고, 사원의 중심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에 세우기도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탑에 불사리뿐만 아니라 불상, 불경 등을 함께 봉안하기도 하였다.
지대석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상에 노출된 상단에는 안상을 조각하였고

몰딩으로 장식하였으나 상, 하대 갑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장판석으로 조성하였다.

기단은 방형 중층 기단이며, 상·하층 기단의 폭은 거의 비슷하다.

폭에 비해 높이가 높아 얼핏 보면 단층 기단인 듯하다.

각 층의 옥신과 옥개는 단일 석재로 치석하여 올렸다.

초층 옥신 모서리에는 우주를 새겼고, 앞면에는 자물쇠를 조각하였다.

2층 옥신 4면에는 사방불을 양각으로 조각하였다.

3층에서 5층까지는 옥신에도 모서리에 우주를 양각으로 새겨두었다.

각 층의 옥개석은 모두 2단으로, 층금을 만들어 옥신과 맞물리게 하였고

처마와 추녀는 곡선으로 급격히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5층 옥개석에는 추녀 끝에 풍경이 달려 있다.

상륜부에는 라마탑 형식의 청동제로 만든 풍마동을 올려놓았다.

이 때문에 탑의 전체적인 모습이 특이해 보인다.
공주 마곡사 오층 석탑은 다른 석탑과 비교해 볼 때, 조형적으로 우수하지 않다.

특히 부재 중 많은 부분이 새로 교체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탑의 상륜부에 라마교 불탑에서 보이는 청동으로 만든

풍마동(風磨銅)이 있어 밀교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석탑은 건립 연혁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때 도괴되기도 하였고, 인접한 목조 불전의 화재로 손상을 입기도 하여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 현재 보물 제7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층석탑은 풍마동다보탑(風磨洞多寶塔)이라고도 하는데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도 하나 라마교 탑과 비슷하여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임진왜란 때 무너져 탑 안의 보물들이 도난당한 지 오래이나

1972년에 수리할 때 동제 은입사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이탑은 전 국민의 3일 기근을 막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인도·중국 등 세계에서 3개밖에 없는 귀중한 탑이라고 한다.

탑신의 이층 몸체에는 사면으로 사방불(四方佛)이 조각되어 있고.

사방불은 모든 공간에 부처님이 항상 거한다는 불신상주(佛身常住)의 상징이라 한다.

↗백범당[白凡堂]

김구선생은 한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선생은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

지금도 대광명전 앞에는 김구선생께서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다.

 

 ↘김구선생 식수한 향나무

↗템플스테이(Templestay)-요사채

전국의 유명 전통사찰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서

2001년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종의 사찰체험관광프로그램이다.

단순히 하루 혹은 이틀 사찰에 머무르면서

산사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현재는 보다 구체적인 일정과 프로그램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내용은 사찰안내 등 입재식이라 부르는 오리엔테이션으로 시작하여

발우공양, 예불, 참선, 포행(산책) 등으로 구성된다.

유려한 자연경관과 전통문화의 숨결이 고스란히 간직된 산사에서의

템플스테이프로그램은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면서 체계화 되었으며

2009년 11월에는 OECD의 「관광 산업에 미치는 문화의 영향 연구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가장 성공적인 문화관광상품으로 선정되었다. 

 

 

↗요사채

템플스테이 시설 건물인접해 있는 요사채인데

고저넉한 옛날 양반집 같은 분위기이며

두 여성분이 아마도 템플스테이 참가한 모양이다.

 

↗관음전

마곡사 관음전은 2016년11월23일날에

새롭게 조성하여 관세음보살 원불 점안법회를 봉행했다. 

연화당으로 사용하던 큰방을 관음전으로 조성하고 

신도 15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관세음보살 원불 640분의 점안법회를 봉행하였다 한다. 

 

↗관음전앞 삽살개

털 모양새를 보아 우리나라 토종 삽살개 같다

코 앞에서 근접 촬영을 해도 그냥 빤히 쳐다만 본다.

 

↗심검당[尋劒堂]

심검당은 대광보전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한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이며,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1층의 기단을 형성하고 

주춧돌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운 건물이다. 

 

↗대웅보전앞 중앙 도량에서

 

 대웅보전은 1651년에 각순이 중수한 것으로

현판은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특이한 2층 건물로 조선 중기의 사원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며
건물의 기둥을 안고 한바퀴 돌면 6년을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 밖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69-1호로 지정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과 보물 제270호로 지정된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 보물 제799호로 지정된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보물 제1260호 공주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마곡사 동제 은입사향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마곡사 동종 등이 있다.

↗마곡사 대광보전[麻谷寺大光寶殿]

마곡사 대돵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지붕가구는 무고주 칠량집이다.

내부의 주불은 비로자나불을 독신불로 봉안하고 있다.

불상은 정면에 두지 않고, 서쪽 면에 안치해 두었다.

자연석 허튼층쌓기로 기단을 만든 위에 덤벙주초로 초석을 삼았다.

기둥은 서로 굵기가 다른 민흘림 원주를 사용하고 있는데

하단부를 비교해 볼 때 굵은 것은 직경이 1m에 가까운 것도 있고

가는 경우 0.42m인 것도 있다.

공포는 다포계이며, 외 3출목 5포작, 내 4출목 7포작이다.

 정면 외부로 뻗은 제공은 쇠서 위에 연화를 새기고 내부는 운공으로 조각하였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창은 우물반자이며

 주불단 위쪽에는 다포계 공포로 짜 만든 화려한 닷집이 있다.

정면 창호는 삼분합 들여 열개인데 꽃살 문양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각이 매우 견실하고 기법이 우수하다.

 

↗대광보전內 비로자나불

 일반적으로 주불은 법당 중앙에 위치하나

대광보전의 비로자나불은 건물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도록 특이하게

봉안되어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진리의 몸이 온누리에 두루 비치는 광명의 빛을 내어

모든 이들에게 지혜의 길로 이끌어 준신다고 한다.

↗대광보전 편액

 

↗대광보전內 삿자리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다.

지금은 카펫트로 깔려 있는데 한쪽에 삿자리가 보이고

삿자리 사이에 누군가 사탕을 먹고 버린 사탕비닐도 있다.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이름 없는 앉은뱅이가 이절을 찾아와서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는 불구를 고치기 위해서 백일기도하는 동안 틈틈이 이 삿자리를 짰다.

이 삿자리는 참나무를 한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 줄로 완성한 것인데

그는 이 자리를 짜면서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줄 것을 기도하였다.
백일 뒤 일을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문을 걸어나갔다고 한다.

 

↗대광보전 금강역사 신장벽화

 대광보전 서쪽 외벽에는 4개의 금강역사 신장이 그려져 있다

모두 파란색 천의를 휘날리며 눈을  부릅뜬 모습으로 서 있다.

 ↗마곡사 대웅보전[麻谷寺大雄寶殿] 뒷모습

  대웅보전 뒤에서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마곡사 대웅보전[麻谷寺大雄寶殿]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651년 각순대사와 당시 공주목사가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처음에는 대장전으로 지었다는 기록이 「중수기」에 나타나 있다.

그 후 언제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광보전을 중건한 1813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중층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크고 작은 자연석 허튼층쌓기로 기단을 축조한 다음 덤벙주초로 초석을 삼았다.

배흘림기둥에, 내진 고주가 상층까지 뻗어

위층의 변주가 되는 통층 구조라 내부 공간이 매우 넓어 보인다.

기둥머리에서는 창방 위에 평방을 놓았고, 공포는 다포식으로 짜 올렸다.

공포구조는 상하층 모두 내외 3출목이며, 제공은 쇠서형이고

상부에 연화와 봉황머리를 조각해 두었다.

네 모서리 추녀에는 상하층 모두 활주를 세워두었다.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우물반자이다.

 창호는 정면과 측면 일부에만 달았다.

정면 아래 가운데 3칸에는 세살문 3분합문을 달았고

양 측면 협칸에는 정자살 분합문을 달아두었다.

위쪽에는 3칸 모두 횡으로 긴 교살문 광창을 달았다.

측면에는 하층 정면 쪽 협칸에만 정자살 홑문을 달아두었다.

뒷면의 경우 하층 가운데 3칸에만 골판분합문을 달았다.

 

↗굴뚝

대웅보전 가는 계단 옆에 있는 굴뚝이다

봄꽃과 조화가 잘되어 하나의 예술품 같다.

어디 아궁이로 연결된 굴뚝인지는 모르겠다

굴뚝의 연기가 건물에 그을름이 뭍지 않도록 멀리 배치하고

열기가 목재에 전도되어 화재위험도 미리 예방에 조상들의 지혜가

하나의 굴뚝에서도 보인다.

↗마곡사 응진전[麻谷寺應眞殿]

응진전은 나한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산스크리트어 아라한(arhan)에서 음역된 말이다.

본래의 뜻은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다.

일반적으로 불전들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비해 응진전은 조금 다르다.

불전에 있는 개성이 강한 나한상 때문이다.

마곡사 응진전을 처음 건립한 시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마곡사 응진전을 1852년(철종 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건물 내부에 걸린 편액에 나타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식 건축이다.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어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석가의 존자인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정면 어칸은 10자로, 양 측면은 8자로 만들어 어칸의 폭이 크다.

 기단은 방형 치석을 이용하여 외벌대로 만들었고

 덤벙주초로 초석을 놓은 다음 원주를 세웠다.

기둥 윗부분에는 창방과 평방을 걸고, 그 위에 다포식으로 공포(栱包)를 짜 올렸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주간포는 각각 1조씩 올려두었다.

공포는 1출목 3포식으로, 제공의 끝은 쇠서 모양으로 마감하였고

쇠서 안장에는 연화를 조각하였다.

외부로 나온 보머리 끝에는 봉황을 새겨 달았다.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대량과 중보를 기준으로 단을 둔 층급 천장이다

창호는 건물 정면에만 달아 출입토록 하였고

나머지 3면은 회사벽으로 마감하였다.

정면 어칸에는 삼분합문을, 양 협칸에는 하단에 머름을 설치하고 분합문을 달았다.

 

↗산신각 가는길

 산신각 가는길엔 군왕대와 백범명상길과 연결된다.

보통 산신각은 절 뒷편에 위치하는게 일반적인데

이곳 마곡사 산신각은

본당을 바라볼수 있는곳에 위치 하고 있다

↗마곡사 산신각

산신각은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내깃에는 마곡사에서 기[氣]가 제일 강한곳이라 소개 되어 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기를 받기위해

산신각에서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산신각내부 탱화에는

남자 산신령 여자 산신령 같이 그려져 있어

부부산신령인가... 궁금을 자아낸다.

 

↗징검다리

대광보전에서 도량을 바라보는 우측에 하천이 흐르는데

마곡사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며

징검다리가 있어 건너면

템플스테이 수련관이 건설중에 있다...↘

↗건설중인 템플스테이 수련관등

 마곡사[麻谷寺], 신록[新綠]가득한 공주 마곡사에서 봄(春)청취(淸趣)에 젖어보며

사찰기행을 마무리 한다.....!

 

마곡사[麻谷寺]

신록[新綠]가득한 공주 마곡사에서 봄(春)청취(淸趣)에 젖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마곡사, 공주시청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홈페이지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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