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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충열사(南海 忠烈祠),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충(忠)을 생각하며 걷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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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충열사(南海 忠烈祠),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충(忠)을 생각하며 걷다

바다늑대FORCE 2015. 4. 10. 10:53

 

남해 충열사(南海 忠烈祠),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충(忠)을 생각하며 걷다

▲남해 충열사

    위치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   

     

▲여행일  : 2015년4월08일,  날씨: 흐림

▲남해 충열사: 

남해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노량충렬사라고도 한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열’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 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인조 10년(1632) 유림들이 옛 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60년이 되던 효종 9년(1658)에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준 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 충무이공묘비가 사당 곁에 있으며,

비문은 현종 2년(1661)에 송시열이 썼고, 1663년에 박경지 등이 세운 것이다.
옛날에는 이 사당 곁에 호충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화방사의 승려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병이었다.

충렬사는 충무공의 노량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의 사당이라 할 수 있다.
경내에는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묘가 남아 있으며,

1948년 정인보가 쓴 충열사비가 있다.

 

▲남해 충열사 위치도

 

하트3→→→충무공 정신을 보며 걸어보자

 

↗벚꽃이 몇일 내린 봄비에도

남해대교 그리고 남해바다와 조화를 이루며 봄의 멋스런 자태를 뽐낸다

 

↗ 남해 충열사 입구

  예전 내가 남해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입구가 여기에 있지 않았는데 .........아름답게 조경해 놓았다.

 

남해  충열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1545~1598년) 모신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34년이 되는 1632년 지역의 선비들이

노량해전과 충무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던 조그마한사당 에서 시작 되었다

1659년 통제사 정의을 다시 지었고 1662년 에 나라에서  충열사로 이름을 내렸다

충열사 옆에 있는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는데충열사 의 상세한 유래 가 적혀 있다

 옛날에는 충열사  옆에호충암  승장1명과 승려 10명이 교대로

지켰으며 봄과 가을에 제사을 지냈다 충열사 남해바다을 지키는 수호신의 사당으로 밭들어져 왔다

현재의 사당에는 비각 내삼문 외삼문 재실 강당 일각문 가묘 등이  있다

 

↗자암 김구 비

 

자암 김구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이다.

1507년(중종 2)에 생원 진사 양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조좌랑을 거쳐

사간원과 성균관에서도 일을 하셨다고 한다. 

한 때 성균관에서 재임중 휴가를 받아 옥당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느날 밤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을 무렵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임금이 서 있고

그 옆에 별감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는군요.

깜짝 놀라 엎드리니 중종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기에 왔노니 어찌 군신의 예가 필요하리요"

하며 술을 같이 마셨다 한다. 
이후 선생은 곧 승정원 동부승지에 오르고 좌승지로 승진 되었다가 부제학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중종은 조광조, 김구, 김식, 김정등 젊은 인재를 등용하여 성리학을 장려하고 문민정치를 구현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종전의 제도를 혁신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곤 등의 모함에 걸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때 나이 31세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곧 남해로 귀양중 화전별곡을 지었는데

문학적인 작품으로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삼도 통제사 이태상 비

 

이태상의 본관은 덕수 자는 래숙으로

숙종 27년(1701년)에 출생하였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이다

이태상이 진주 병마사로 재직중인 영조36년(1760)에 남해충렬사를  참배하고 청해루를 세웠다.

이 비는 1882년 전 판관 문경일의 감독 하에 건립된 것으로

이순신장군의 전공을 기리고,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 준 선정을 칭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외삼문

근래에 세워진 삼문인데 원래 사당 영역에 정문인 솟을삼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내삼문이 되고 지금은 이 문이 외삼문이 되었다.

 

↗청해루

현재 이충무공 탄신 제례하는곳으로 사용되고있으며

이충무공 탄신제례는 1545년 4월 28일 이순신장군의 탄신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로

그의 충의를 전승하고 민족자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매년 남해군의 지원을 받아 실시되고 있다.

 

 

 

↗ 내산문

충열사 사당 입구의 솟을삼문(내삼문)의 전경으로 예전엔 이것이 정문이었다.

앞의 사진과 비교하면 보이듯이 전체적인 구조가 매우 독특한 솟을삼문 형태이다.

내산문을 들어서면 바로 현판이 나오는데

박정희 대통령께서 친히 쓰신 친필 현판이라고 한다.

 

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 증시 충무이공묘비인데 이수를 단청을 해 놓았다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가묘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진왜란중 노량해전에서 참전

1598년11월 19일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하였으며

 공의 유구는 최초에  관음포에안치 되었다

고금도을 거쳐 충남아산 현충사로 운구하고 이곳은 전의  가묘이다.

 

 

↗충열사에서 바라본 남해대교

 

↗↘충열사 앞 거북선

 

 

 

↗거북선을 옛날 기록 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복원함

거북선 관람시간

하절기 03월 10월  09:00~1800

동절기 11월 02월  09:00~1700

 

↘거북선 내부

 

 

 

 

 

 

 

이순신장군 명언

1)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여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2)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첫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3)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4)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수 없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5)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마라.

    나는 평생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6)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러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였다.


7)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마라.

    나는 스스로 논과 밭을 일구어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번 싸워 스물세번 이겼다.


8)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은다고 불만갖지마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채 옥살이를 해야했다.


9)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마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척의 낡은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10) 옳지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스므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11)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12)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기를 각오하면 살것이요,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다.

남해 충열사(南海 忠烈祠),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충(忠)을 생각하며 걷다

※인용글 :  남해군 홈페이지 및 인터넷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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