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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사[碧松寺], 한국 선불교의 종가 지리산 백송사를 걷다 본문
벽송사[碧松寺]
한국 선불교의 종가 지리산 백송사를 걷다
♣ 벽송사[碧松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지리산 칠선계곡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있는 전통사찰
♣ 찾아가는길
남해고속도로(진주jc)→ 대전통영간고속도로 → 생초ic → 함양 백무동 방향
마천면 추성리 → 벽송사
♣ 사찰기행일 : 2014.11.15(토)
♣ 벽송사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벽송사사적기〉에 의하면 1520년(중종 15)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그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람배치는 전면에는 산문(山門)과 종루가 있고,
보광전(普光殿)의 좌우에는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뒤편에는 산신각이 있다.
현재의 절 위치에서 50m 위에 있는 옛 절터에는 보물 제474호로 지정된 석탑이 있다.
♣ 지도
사찰기행시작→→→→→
지리산에 첫눈이 왔다는 소식도 있고
가을 끝짜락에서 함양 백무동 으로 향했다
↗ 주차장 언덕에 있는 석탑
주차장은 벽송사와 서암정사를 찾는 사람들의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즐비하였다
대부분 삼사순례를 하는 불자들이 많았다.
↗ 벽송사 전경
6·25전쟁 와중에 벽송사의 건물들은 대부분 불타버렸고 현재의 가람들은
196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고한다.
전래되는 설화로는 승려 서룡(瑞龍)의 이야기가 있다.
만년에 이 절에 머물렀던 서룡은 1890년(고종 27) 12월 27일에 문도를 불러서 입적할 것을 고하였으나,
제자들은 그믐의 바쁜 일이 끝나거든 입적할 것을 청하였다.
정월 초이튿날 다시 입적하려고 하자 제자들은 불공하러 오는 신도들이 많다는 이유로
다시 며칠을 미루도록 하였다.
4일에는 "이제 가도 되겠느냐?"고 물은 뒤 제자들을 불러 "불법을 닦을 때 생사를 해탈하려면,
먼저 생사가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하고(知無生死),
둘째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야 하며(證無生死),
셋째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안국당(安國堂)
벽송사 입구 서쪽에 새로 조성한 선방이고
이래층은 현대식 건물의 공양간이다.
↗청허당(淸虛堂)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덮힌 들판을 걸어갈진댄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
※휴정 (休靜)본관 완산(完山). 속성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속명 여신(汝信). 안주(安州) 출생. 서산대사라는 호로 잘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유(儒)·불(佛)·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 지리산 벽송사 벽송선원
벽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신라말경에 창건된후
조선 중종 경진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碧松 智嚴大師)가 중창, 『벽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이전에 한국선맥을 이어온 벽계정심(碧溪正心)과
벽송지엄(碧松智嚴), 부용영관 뿐만 아니라
환성지안(喚醒志安), 서룡상민(瑞龍祥玟)등 조선 선맥을 여덟분의 조사가
이 벽송사에서 수도 정진한 도량으로써 한국선(禪)과
벽송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숙종30년(1704) 실화(失火)로 소실(燒失)되었다가 환성지안(喚醒志安)대사가 중건하였고,
철종 원년(1850)에 서룡당 상민(瑞龍堂祥玟)대사가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동란때 다시 소실되어
1960년 원응 구한(元應 久閒)스님이 쓰러진 가람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원통전(圓通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전면에는 산문(山門)과 종루(鐘樓)를 배치하였고, 후면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또한 경내에는 보물제474호인 『벽송사3층석탑』과 민속자료 제2호인 『벽송사 목장승』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인 벽송당 지엄영정(碧松堂智嚴影幀), 경암집책판(鏡巖集冊版),
묘법연화경책판(妙法連華經冊版)등의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사찰은 1950년대 전란(戰亂)시 빨치산 루트로 사용되는 등
처참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벽송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절 뒤쪽의 창건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으로 미루어볼 때 그 시기를 신라말이나 고려초로 보고 있으며
현재 3층석탑은 보물 제4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종 15년(1520)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벽송사라고 전하여지며
한국전쟁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적도 있으며
이때 불에타 소실된 이후 곧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계 정심의 맥을 이어 조선 불교태고 선맥의 5대 정통이 되었고
부용영관, 원오, 일선등 60여명에게 선을 가르쳤던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간월루[看月樓]
↗식수터
목마른 중생을 위한 식수터.......!
↗원통전 과 산신각
↗원통전[圓通殿]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
관세음보살의 공덕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다는 의미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이 안에는 관세음보살을 홀로 모시거나, 양류관음이나 해수관음(海水觀音) 또는 천수관음 등을 모시기도 한다.
관음상은 대개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하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찰에 관음전이 있다
↗산신각
↗원통전과 산신각 올라가는 계단
계단의 연꽃문양이 예사롭지 않아 찍어 보았다.
↗범종루
↗장승각
벽송사 나무장승은 그 풍부한 표정에서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승가운데 하나이며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나무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솜씨도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정도 되는데, 예전에는 지하에 1m 정도가 묻혀 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가 더 묻혀 있어
드러나 있는 것은 2m 정도였으나 현재는 벽송사 경내에 정려를 지어 보관하고 있다.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금호장군' 이라 음각돼 있고,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음각돼 있다.
두 장승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