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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늑대 FORCE
경주 남산(慶州 南山),지붕없는 불교박물관 남산을 걸어며 붓다법문을 보다 본문
경주 남산(慶州 南山)
지붕없는 불교박물관 남산을 걸어며 붓다법문을 보다
▲경주 남산(慶州 南山) 468m
신라의 옛 수도였던 경상북도 경주시 경주평야의 남쪽에 솟아 있는 산.
위치 : 경북 경주시 인왕동
▲산행일 :2014.10.25
▲남산주요산행코스 :
① 삼릉→상선암→금오암→용장사지 코스
② 칠불암→백운암→천룡사지→틈수골로 연결되는 코스
③ 화랑교육원→금오산→약수골→금오사 코스 등
④ 삼릉→냉골→상선암→상사바위→이영재→칠불암→염불사지 코스
⑤ 남산 삼릉(주차장) → 상선암 → 금오산(468m)→ 약수골(마애대불) → 금오사→ 삼릉
▲나의산행코스 :
서남산주차장→삼릉→석조여래좌상→선각육존불→석불좌상→상선암→상사바위→금오봉(468m)
→마애석가여래좌상→ 배리삼존불→ 서남산주차장(원점회귀)
▲산행지개요:
경주평야의 주위에는 서쪽에 선도산(仙桃山), 동쪽에 낭산(狼山)과 명활산(明活山)
북쪽에 금강산(金剛山) 등 많은 산들이 성벽처럼 둘러서 있는데 그중에 크고 높은 산이 남산이다.
남산에는 높이 494m의 고위봉(高位峰)과 468m의 금오봉(金鰲峰)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계곡과 산발들을 합쳐서 경주 남산이라 부른다.
까치봉[鵲峰]이나 황금대 부근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반달형돌칼·돌살촉 등이 발견되고
오산골[鰲山谷] 어구에는 고인돌이 남아 있다.
또한 암석신앙의 유적인 남산부석(南山浮石)·천룡암(天龍岩)·큰지바위[大地石]·상사바위[想思岩] 등이 있으며
진평왕대(579~632)에 쌓은 남산신성(南山新城)이나 고허성(高墟城) 같은 국방시설의 터도 남아 있다.
남산신성 터 안에는 2곳의 무기창고터와 1곳의 식량창고터가 남아 있는데 식량창고터의 길이는 100m이며
지금도 비가 오면 탄화된 쌀알들이 발견된다.
무기창고도 길이 50여m가 넘는 큰 건물이었는데 모두 밑으로 바람이 통하는 다락식 건물이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居西干)이 탄생한 나정(蘿井)과 신라의 종막을 내린 포석정(鮑石亭)도 이곳에 있다.
그외에 왕릉들도 이곳의 여러 군데에 있어 이 산을 신라 역사와 유적의 산이라 부른다.
더욱이 6세기초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로는 부처의 산으로 신앙되어 많은 절과 탑이 세워지고 불상들이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이며,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체를 헤아린다.
절터의 수는 암자로 짐작되는 곳도 독립시켜 계산한 것이므로 정밀히 조사하면 달라지겠지만
40여 계곡 중 절터가 없는 계곡은 거의 없다.
61기를 헤아리는 석탑 중에는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 높이가 7m 가량 되는 큰 것, 5~6m 되는 것
3~4m 정도의 작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중간 것이 제일 많다.
평지가람(平地伽藍)에서는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남산의 절에는 법당의 위치와 상관없이 대개 보기 좋은 바위 봉우리 위에 세워져 남산의 탑들은
바위산과 연결되어 구름에 걸린 듯 솟아 보인다.
남산 불상 중에는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상(磨崖佛像)이 51체이다.
큰 것은 10m 가량 되는 것도 있지만 보통 4~5m 되는 것이 많다. 또 작은 것은 1m 정도 되는 것도 있다.
부처골 감실여래좌상(龕室如來坐像)이나 배리삼존불(拜里三尊佛)이나
장창골삼존불[長倉谷三尊佛]처럼 6세기말~7세기초에 조성된 것도 있고,
삼국의 통일을 기원하여 조성한 탑골부처바위도 있으며,
통일된 나라의 영광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칠불암(七佛庵)불상군도 있다.
그리고 왕정골[王井谷]여래입상이나 삿갓골여래입상(파편)처럼
우리 민족예술의 황금시대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도 있다.
또 보리사[菩提寺]여래좌상처럼 화려하고 섬세하던 8세기말 내지 9세기 초반의 것도 있고,
9세기 중엽의 것들도 있어 수백 년 이어온 신라 불교미술의 흐름을 이곳에서 모두 볼 수 있다.
마애불상이 많은 것은 우리 조상들이 불교수입 이전부터 믿어온 암석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쳐진
우리 불교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태고부터 바위신앙이 있었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 사람들은 부처에게 큰 영검이 있다고 믿었다.
바위 속에 영검이 있다고 믿어온 신라사람들은 바위 속에 부처(영검)가 있다고 믿게 되어
많은 마애불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냉골 마애대좌불(磨崖大坐佛)은 머리는 입체에 가까운 조각인데 비해 몸체는 바위 위에 선각으로 되어 있다.
몸체가 반자연·반인공으로 되어 불상이 바위면에서 튀어나오지 않고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위 속으로이끌어 부처의 영(靈)에 예배하도록 되어 있다.
냉골 석가여래삼존상이나 아미타여래삼존상은 다듬지 않은 바위면에 새겨놓았다.
尹京烈 글
▲ 등산지도
불교문화유적지 지붕없는 박물관을 향해
경주남산 산행을 위하여
진주06시40분출발 아침안개가 자욱한 마산행 국도를 달렸다
경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앞 도착 07시20분
일행과 함께 2번버스승차 08시 20분→→
↗토요일이라 그런지
차량정체가 심하였다...그래도 경주에 도착
↗산행시작
솔향기 가득 가을향기 가득히 맞으면서
삼능골을 따라 붓다의 품속 금오봉으로 향해 걸어본다
↗ 삼능골 따라 남산의 처음 만나는 불상
불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목을 잘려있다
손도 잘려 있고 목도 잘려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의연하기만 하다
높이1.6m 무릎너비 1.56m정도이다
원래 이불상은 계곡에 뭍혀있었는데 발굴하여 여기에 옮겨 놓은것이라 한다
경주남산은 총길이가 : 8Km 폭이 : 4km 인데 그 속에 질터가 110~147 개가 있고,
60~96 기의 석탑이 있고,80~118체의 불상이 있다고한다.
그래서 남산은 지붕없는 노천 법당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삼릉계 석조여래좌상(三陵溪 石造如來坐象)
☞ 안내표지판의글↘
계곡 어귀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라 하는데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고 부른다.
계곡에는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으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 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을 동여맨 끈,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왼쪽 산등성이 바위 벼랑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져 있고,
위쪽으로 오르다 보면 선각의 여섯 부처님과 마애여래좌상,
석가여래좌상, 그리고 남산에서 좌불로는 가장 큰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만날수 있다.
1997년(불기2541년) 6월 29일
청정운동추진위원회, 신라문화원이 세우다.
↗ 삼릉계곡 선각육존불(三稜溪谷 線刻六尊佛)
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6존상으로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다.
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이 2구의 마애삼존상은 만들어진 시대나 조각자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오른쪽 암벽의 정상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 금오봉 정상까지1.5km
정상까지의 산행로는 급경사로 이루어 져 있다
나즈막한 산이긴 하나 경사가 심해..힘든코스이기도 하다
↗ 삼릉계(三陵溪) 석불좌상
보물 제666호인 경주 남산 삼릉계(三陵溪) 석불좌상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풍화되거나 무너져 훼손됐다.
8~9세기에 만들어진 삼릉계석불좌상도 그 중 하나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에 한 차례 복원됐으나 정확한 고증없이 이뤄져
불상의 안면은 콘크리트 모르타르로 적당히 보수됐다.
불상 뒤편으로 넘어진 광배(光背), 즉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원광 역시 온전히 복원되지 못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7년 3월 불상복원에 나섰다.
통일신라 시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산 삿갓골 제1사지 석불입상,
남산 미륵곡석불좌상(보물 제136호), 안계리 석불좌상(문화재자료 제92호),
남산 용장계석불좌상 등 비교적 안면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석불과 유사 양식의 석불을
참고해 불상의 불두 안면의 턱 부분과 깨진 광배를 복구하여
삼릉계(三陵溪) 석불좌상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 남산오르는 산행자들
유난히 산행자가 많다....아마도 밀여서라도 올라가게 된다...!
↗ 상선암
남산에서 제일 높은곳에 있는 사찰
산행자들이 쉬기도 하고 법당에서 참배 하기도 한다.........!
↗상사바위
경주남산 금오산 정상에는 금송정이 있고, 금송정의 동쪽에는 상사바위가 있다.
"상사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그 크기가 일백 열발이 되는데 그 생김새가 가파르게 솟아있어 휘어잡고 오를수가 없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은 이 상사바위에서 기도를 하면 병이 낫는다.
산아당은 금오산에 있는데 아기를 낳은 모양을 돌에 새겨 놓았다.
신라때 자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하는데 상사바위에 가위와 칼자국이 남아있다."
위의 기록이 동경잡기에 실린 상사바위에 대한 기록이다.
이 상사바위의 동쪽면에 감실이 패여있다. 지금도 사람들이 감실에 촛불을 밝히고 기도한다.
감실 아래엔 머리없는 작은 불상이 있다. 옷매무새로 보아 삼국시대에 속하는 오래된 불상이다.
이 상사바위는 옛날부터 위력있는 바위로 신앙되어 오다가 불교와 합쳐서
우리 고유의 토속 신앙이 되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상사바위의 전설 :
옛날 국사골 어귀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외롭게 사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보면 손자를 보는 듯 귀여워하였다.
동네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따랐다.
그 중에서도 이웃집에 사는 피리라는 소녀를 퍽 귀여워 하였고 피리도 할아버지를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하였다.
할아버지가 80세를 넘었을 때에는 피리도 자라서 어느덧 꽃다운 처녀가 되었다.
피리는 철이 들면서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히 생각하여
맛난 음식이 생겼을 때나 햇과일이 날 때면 언제나 몰래 할아버지께 갖다 드려 기쁘게 해드렸다.
그러던 어느 해 봄에 피리네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돌봐주던 피리가 없으니 견딜 수 없을 만큼 쓸쓸하였다.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할아버지는 피리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는 때와 마찬가지로 방안에 앉아 피리를 줄곧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반가운 피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피리의 환상이었다. 그 후부터 할아버지 눈에서는 피리의 환상이 사라지지 아니했다.
그저 자식처럼 귀여워서가 아니고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처녀 피리를 사랑하고 있다 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제 며칠 안 가서 낙엽처럼 질 몸이 꽃봉우리같이 피어나는 피리를 사랑하다니
안될 일이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짐해 봐도 헛일이었다.
피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뱀처럼 기어 나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피리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과 피리를 아내로 삼겠다는 욕심이
서로 머리속에서 쉴새없이 싸웠지만 끝내 양심을 져버리고
무서운 욕심이 할아버지 마음을 다 차지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국사곡 산정에 올라가서 피리가 이사간 마을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무에 목을 메어 죽어버렸다.
할아버지의 혼은 그곳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후부터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큰 뱀이 몸을 칭칭 감고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그 무서운 꿈은 한번만 꾸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눈을 감으면 또 다시 되풀이되고 하니 피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볼품없이 되어 가는데
동리 사람들 사이에는 수군수군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피리를 생각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워하던 생각이
상사뱀이 되어서 피리를 찾아 오는 거라는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여 괴로움에 지쳐 있는 피리가 어느 날
몽롱하게 잠이 들었는데 몸을 감고 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하면서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아 죽어 버렸는데 죽어서도
또 잊혀지지 않아 피리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오.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더니 이제 죽었으니 죽을 길도 없구료.」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힘없이 국사곡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꿈을 꾸었다.
피리는 자기를 생각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피리는 조용히 일어나서 할아버지가 힘없이 가던 길을 따라
국사곡으로 들어가서 정상에 서 있는 그 바위에 올라서서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섰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상사바위라 한다.
지금 큰 바위부분에 붉게 보이는 반점이 있으니 그것을 피리의 피 자국이라 한다.
이상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상사바위에 기도를 드리면 사랑이 이뤄진 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 금오봉 바로 아래 119긴급구조 표지목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 금산 금오봉 도착
11시54분을 가리킨다
정상에는 마치 재래시장을 방불케하듯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정상기념 촬영을 위해서는 오랫동안 차례를 지켜서 찍었다
각종 산악회 단체사진 개인사진 찍느라고.........!
☞경주 남산의 유래: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금오산의 정상의 높이는 466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북으로 뻗어내린 산맥에는 상사암(想思巖)·해목령(蟹目嶺)·도당산(都堂山) 등의 봉우리가 있고,
남으로 뻗은 산맥에는 높이 495m의 고위산이 있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서남산의 계곡은 2.5㎞ 내외이고, 동남산은 가장 긴 봉화골[烽火谷]이 1.5㎞ 정도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
이 계곡들에는 석탑·마애불·석불·절터 등이 산재해 있다.
또한 남산은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蘿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었다.
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이 현신해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어느 날,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이 홀로 이것을 보았다.
왕은 스스로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였던 것이다.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했던 것이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하여 방탕한 생활이 더욱 심해졌던 까닭에 나라는 마침내 멸망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신라인의 산악숭배에 있어서
남산이 특히 호국의 보루로서 존숭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 하산길에......!
↗ 바둑바위에서 바라본 경주 내남면 들녁
황금빛 들녁 풍요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넓은 들녁덕분에 신라가 융성했으리라 본다
앞에 보이는 기린천은 흘러 형산강과 합류하고
형산강은 포항앞바다 동해로 흐른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 磨崖釋迦如來坐像)
마애 석가 여래 좌상은 상선암(上禪庵) 뒤쪽 150m 정도 떨어진 암벽에 남쪽을 향해 있다.
불상의 높이는 521㎝, 너비는 420㎝에 이른다.
육계는 낮고 머리는 소발로 되어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은 편이다.
눈은 가늘고 눈썹은 초생달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되어 있고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다.
이 석가 여래 좌상은 남산에 있는 좌상 중에서 가장 크고 통일 신라 후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릉 계곡 마애 여래 좌상은 5m가 넘는 대형불상으로 자연 암벽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조각 수법에 있어서도 얼굴 부분은 환조로 되어 있고,
그 아래로는 부분적인 환조가 나타나지만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상과 같은 세련됨은 없지만 차분한 느낌과 종교적인 경건함은 느낄 수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불상 주변의 풍화와
암반의 균열로 인한 대규모 낙석 발생으로 훼손이 우려되고 있어 보호를 위한 작업중에 있다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慶州 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
남산 기슭 내남면 용장리에 있는 신라의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다.
우리나라 보물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자리에 흩어져 누워 있던 것을 1923년에 한데 모아 세워놓은 것이다.
세 석불들의 기본 양식이 똑같아 본래 삼존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 산행 마무리............
노랗게 물든 단풍잎앞에서...남산속에 붓다의 법문 보고 산행 마무리
↗ 첨성대
시간이 남아서 첨성대 를 둘러보고.......!
☞ 첨성대: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이다.
정확한 건립년도는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재위 632~646) 때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30㎝ 두께의 돌 362개를 27단으로 쌓아 올린 술병 모양의 형태이며,
한가운데에는 네모난 창이 뚫려 있고, 맨 위에는 2단의 정자석을 올려놓았다.
이 정자석 위에 혼천의와 같은 관측기구를 설치하고
별을 통해 동지·하지·춘분·추분 등의 24절기를 측정한 것으로 보인다.
동양에서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경주 남산(慶州 南山)
지붕없는 불교박물관 남산을 걸어며 붓다법문을 보다
※인용글 : 문화재청,경주시 홈페이지 한국의산하 산행자료등 인터넷사전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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