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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矗石樓).미국 CNN에서 한국 방문시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된 진주성(晋州城)을 가다 본문
촉석루(矗石樓).미국 CNN에서 한국 방문시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된 진주성(晋州城)을 가다
연일 폭염에 남강변 시원함을 찾아
집근처 250번 시내버스를 타고
포시즌예식장 앞에서 하차하여
촉석루로 향했다..
남강 굽이 흐르는 진주는 나의 제2의 고향이다.
진주의 8경중
제1경인 촉석루 와 진주성은
미국 CNN에서 한국 방문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된 촉석루는 남강변 벼랑 위에 우아하고 위엄 있게 서있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남강과 의암, 진주성과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며 진주 8경 중 제1경을 자랑한다. 벼랑 위에 높이 솟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촉석루는 전쟁 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상시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활용되었다.
남강건너편에서
촬영하였다...
촉석루(矗石樓)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7월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최경회,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 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하였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촉석루 내부에 걸려있는 편액들
의기사(義妓祠)
의기사(義妓祠)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왜군의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진주시 본성동 500-17번지 촉석루 입구에서 뒷쪽으로, 정면에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의기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는 한옥 사당으로, 촉석루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1721년 경종원년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지역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고,1740년 영조 16년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다.
1779년 정조 3년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고, 사위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게 《의기사기》를 지어 걸도록 하였다.
1823년 순조 23년 진주목사 홍백순(洪百淳)과 경상감사 이지연(李止淵)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춘추(春秋)로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1868년 고종 5년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이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한 이래로 현재까지
여성들만 제관이 되어 논개의 의로움을 기리는 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 의암별제는 일제강점기 때 잠깐 단승되었다가 최근에 복원이 이루어져 진주논개제의 메인 테마로 시행되고 있다
1950년6·25전쟁으로 의기사는 완전 소실되었다가 1960년 사단법인 진주고적보존회가 재건하여
현재의 촉석루 옆 건물로 유지되고 있다.
정면 의기사라는 간판 좌측에 일제 때의 명기 산홍(山紅)의 시가 걸려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산홍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을사오적으로 악명이 높았던 친일파 이지용이 천금을 가기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비록 첩이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의 구실을 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며 꾸짖은 의기높은 기생이었다. 정면 우측으로는 경상우병사 홍화보의 사위였던 다산 정약용의
《의기사기》와 《의기사중건기》 시 1수가 판각되어 걸려 있다.
의기사 입구에 논개의 충절을 찬양한 〈의랑 논개의 비〉는 개천예술제의 창시자이자,지방 향토 시인 설창수가 1954년 글을 짓고, 오제봉이 글을 썼다. 또한 진주성 입구에는 변영로의 《논개시비》가 서 있다.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235호)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이라 불리다가 임진왜란때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후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하여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진주시 망경동에서 바라본 진주성과 촉석루
촉석문
진주성(晋州城)
사적 제118호.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한다. 남강을 끼고 있는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약 4㎞이다. 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따르면 조선시대 이전인 것이 분명하다. 구조는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수문·암문(暗門)·장대·포루와 촉석루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진주는 고려 말기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방어시설의 보완이 시급했는데 그후 성벽 축조가 시작되어 1437년(세종 19)에 성을 새로 쌓아 완성시켰다. 이때에 3개의 못물을 성 북쪽에 모이게 하고, 그 사이에 참호를 파서 적의 접근을 막는 일종의 해자(垓字) 구실을 하게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선조 25)에는 이 성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했다. 진주는 아군 군량의 보급지라 할 수 있는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므로 이곳을 빼앗기게 되면 전라도지방을 방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주성민은 굳게 뭉쳐 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성을 지켰다. 제1차 진주전투 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데, 이러한 승리는 남강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험준한 성벽에 힘입은 바 컸다.
♣↘↓ 진주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하나하나 접하는것들이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느낄수 있다.!
공북문(拱北門)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나와 있는 진주성의 정문으로, 공(拱)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며, 북(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2002.5.1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하였다.
김시민 장군 동상
(높이 7m, 면적 255㎡)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호국충절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한 진주성 수호상으로
2001년 1월 1일 제막하였다.
김시민[金時敏] 장군
임진왜란 당시 3대첩(三大捷) 중 하나인 진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군.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죽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리며,조선 광해군 10년(1618년) 창건하여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의 정문이었으며, 경남도청이 옮겨지기전까지 도청의 정문이기도 했다.
진주성 비석군
조선조 선조37년(1604)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열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
효종10년(1656)목사 성이성의 창덕 유애비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군이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시내각처에 있던것을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가 모은것이다.
청계서원(淸溪書院)
청계서원(淸溪書院)은 정신열 공과 정천익 공을 배향한 서원으로, 사적 제118호로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청계서원은 정신열 선생과 정천익 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정신열 선생은 고려 때 병부상서로 거란의 난을 물리친 공으로 진양부원군 은열공 시호를 받았으며, 정천익 선생은 문익점 선생의 장인으로 1364년 고려공민왕 13년 이 땅에 목면종을 처음 심어 그 중 한 알을 살려 번식 배양하고 씨아와 물레와 베틀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듯한 목면 베옷을 입게 한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이다.
조선 순조 33년 영호남 유림들이 선생에게 제사를 지내 보은하고자 진주 서쪽 남강변에 청계서원을 세웠다. 예조에서는 해마다 봄가을로 관원을 보내 생폐와 향촉을 봉진해 예를 갖추었다. 168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처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1961년 후손들이
진주성 내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년까지 숭은사와 전사청을 재건하여 청계서원으로 복원되어 매년 음력 3월15일에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청계서원 오른쪽으로는 정절사가 있고, 뒷쪽으로는 북장대가 있고, 앞으로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경절사(擎節祠)
경절사는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하공진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곳이다
하공진 선생의 출생은 언제인지 알려지지 않았고, 1009년 목종 12년 중랑장의 신분으로 강조의 강조의 정변에 참가하여,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워 상서좌사랑중이 되었다.
1010년 현종 원년에 동서 양계(東西兩界)를 지키면서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를 당하였다. 그 해 거란이 목종의 시해를 빌미로, 고려에 또 다시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거란이 쳐들어오자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하였다. 그는 현종의 사절로 거란 성종을 만나서 스스로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고영기와 함께 거란에 스스로 볼모로 잡혀가 요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나, 여러 차례 탈출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연경으로 이송되어 양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고 살았다.
국립진주박물관
진주 남강변의 진주성 경내에 위치한 이 박물관의 계획에는 주어진 진주성의 경관을 파괴하지 않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주변 경관보다 낮게 보이도록 규모를 낮추고, 기본적 처리에 필요한 조형도 하나의 지붕에 의해 느껴지는 거대한 스케일감을 피하도록 분절하였으며, 주변과의 조화를 도모하도록 접지되는 부분에 대하여는 진주석을 주재료로 하여 건물 자체가 하나의 조경요소로 느껴지도록 처리하였다. 내부동선은 관람객을 두 홀에서 2층으로 유입시킨 후 1층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호국사(護國寺)
전통 사찰 제70호로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 고려 말에 왜구를 막기 위한 승병을 기르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때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현재의 호국사는 진주성을 정비하면서, 일주문(一柱門)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건립한 것이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임진왜란 때 전몰한 장수들을 배향한 창렬사가 바로 정문에서 왼쪽 편에 붙어 있고, 오른 편으로는 서장대가 위치해 있다. 입구에는 사천왕상과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정면으로는 대웅전이 있다. 항상 독경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서장대(西將臺)
장대는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이 장대는 진주성 서문에 속하는 곳이다.
『여지도서』에 보면 회룡루로 나오며, 규모는 작으나 진주성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씨가 새롭게 고쳐지은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목조 기와집이다.
김시민장군 전공비
촉석정충단비
촉석광장 안의 정충단에 서 있는 비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충절을 다한 이들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과 비몸을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머릿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머릿돌이 유난히 커서 전체가 사다리꼴로 보인다. 머릿돌은 두 마리의 용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그 밑면에 꽃을 조각하여 이채롭게 장식하였다. 비문은 아래쪽이 닳아서 그 부분만 판독하기가 힘들 뿐 대체로 양호하며, 『조선금석총람』에 그 기록이 실려있다. 주로 진주성에서 싸우다 숨진 이들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그들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특히 3장사(三壯士)라 일컫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을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정충단은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2년(1686)에 마련한 제단으로, 비도 이때 함께 건립되었다. 비문은 이민서가 글을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만중이 썼다. 비의 옆에는 제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전공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호)가 함께 서 있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임진년(1592년)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건립
호국종각
촉석루(矗石樓).미국 CNN에서 한국 방문시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된 진주성(晋州城)을 가다
2012런던 올림픽 열기가 한여름 폭염같이......우리나라와 영국 축구경기
새벽잠까지 설쳐가며 응원한 보람도 느끼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촉석루와 진주성
카메라 들고 나서서야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보았다...!
2012.8.5 일[바다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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