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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경산향교의 오성위패(五聖位牌)를 보호해준 山 경산 성암산에 오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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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경산향교의 오성위패(五聖位牌)를 보호해준 山 경산 성암산에 오르다

바다늑대FORCE 2023. 11. 25. 19:39

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경산향교의 오성위패(五聖位牌)를 보호해준 山 경산 성암산에 오르다

 

▲ 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높이 : 469m

      위치 : 경북 경산시 서부동과  대구광역시 수성구 옥수동에 걸쳐 있는 산

 

▲ 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나의산행일 :

     2023년11월25일 토요일, 날씨 : 맑음

 

▲ 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나의 산행코스 :

     경산시현충공원주차장→성암산들머리 →제3체육시설 →쉼터 →제6체육시설 →성암산

      →범굴 →성암사 →경산시현충공원주차장

     2.91km 1시간9분소요(트랭글앱기준)

 

▲ 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개요 :

성암산은 경산소재지 서쪽의 주산으로 대덕산맥의 기류이며

경북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성암산 정상석 뒤면에 유래를 살펴보며는 임진왜란 때 경산 향교가 있던 오성(五聖)
위패를 이 산의 8부 능선에 있는 " 범굴 " 옮겨 전쟁의 화를 면하고 부터

성서러운 바위굴이 있는 산이라 하여 성암산(聖岩山) 이라 이름 하였다

성암산은 해발이 높지 않은 산으로 경산시 서남쪽을 감싸고 있으며 정상에서

경산시를 한눈에 볼수 있는 전망대와 같으며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산지역과

경산 시민들이 즐겨 찾는  체육공원 같은 편안하고 언제든지
갈수 있는 접근성이 좋아 남녀 노소 누구나 이용이 가능한 자연공원이다.

 

 

▲ 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산행지도

▲ 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나의 트랭글(TRANGGLE) 궤적도(軌跡圖)

→→→→→→2023년 11월25일 토요일 대한민국(大韓民國) 구석구석 산(山)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도심속에 있는 작은 산하나 선택하였다 내자(內子)의 친구 자녀 결혼식이 경산 아트라움 에서 하기에

경산으로 가는길에 나는  그 근처 도심속 작은산을 발견하여 성암산 산행을 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武功殊勳者功績碑(무공수훈자공적비)

경산시 현충공원에 있는 武功殊勳者功績碑 (무공수훈자공적비)이다

현충공원은 경북 경산시 사정동297 또는 경산시현충공원을 네비게이션이나 티맵을 검색하면

여기로 안내되며 주차장은 무료이며 주말이라 그런지 운동삼아 오르는 시민들이 많이 보였다

경산시는 국가유공자ㆍ유족의 자긍심 고취를 위해 사정동 일원에 현충공원을 조성 했다 하며

사업비 55억원으로 경산시 사정동 8,162㎡ 부지에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시민들의 애국정신과 안보의식 함양, 역사교육을 위해  현충공원을 만들었다고 하며

현충공원은 관내 3,500여 명의 보훈가족의 오랜 숙원사업으로 1963년 건립해 노후된 충혼탑을 이건하고

6ᆞ25 참전기념탑.월남참전기념탑.무공수훈자전적비 등 추모시설이 들어서 있다.

성암산 들머리

성암산은 경산시 서부동과 대구시 수성구 옥수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며 
성암산 산정은 대구시의 영역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등산객은 경산시현충공원에서 등산을 시작하며

나 역시 현충공원을 들머리로 하였다. 

부지런한 시민들은 벌서 산 한바퀴 돌고 먼지를 털고 있는 모습들이 보이고

하산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들머리 사진 촬영하는데 좀 기다려야 했다

성암산 들머리에 있는 등산안내도

등산로 안내도 처럼 한바퀴 돌기로 하고 산길을 쭉 훌터보았다

현충공원 주차장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성암산 들머리이며 왼쪽 수정사 방면

우측의 넓다란 산길은 쉼터와 체육시설이 많은 곳인데 먼저 넓다란 산길을 따라

낙엽이 소복하게 쌓인길을 걸어본다

성암산 초입구간

야자매트로 산길을 조성하여 걷기가 편안하며 가을 끝자락 낙엽들이 바람결에 우수수 떨어진다

경산시민들이 운동삼아 딱 걷기 좋은 산길이며 그다지 높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구간이다

여름이면 수목이 우거져서 시원한 바람과 그늘도 제공해 줄것이며 산은 늘 변함없이 편안함을 안겨준다

목계단길

경산시민들의 휴식공간답게 산길 하나 하나가 잘 가꾸어져 있었고 경산의 지명 유래를 보면

경산(慶山)은 삼한(三韓)시대에 본디 압량(押梁) 또는 압독소국(押督小國)이었는데

신라의 파사왕(婆娑王) 23년(102)에 합병되었고, 선덕여왕 11년에 신라의 한주(州)가 된다.

처음 군주(軍主)는 김유신 장군이었다고 한다.
신라 35대 경덕왕 17년(757)에 다시 장사군(獐山郡)으로 고쳐 장산군 읍내면이라고 부르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장산현(章山縣)으로 하여 경주에 속하게 되며
그러다가 고려 충선왕(忠宣王) 2년에 경산현으로 다시 바뀐다.

다시 공양왕 3년에 들어 경산군으로 승격을 시킨다.
1395년 조선왕조 태조 4년에 이르러 경산현으로 되돌려 지며

이어 선조 34년(1601)에 대구에 딸리게 된다.

데크계단

성암산으로 오르는 길은 이렇게 길게 하늘을 향해 뻗은 데크계단길이 있고

야간에도 산길을 밝혀줄 가로등도 보인다

도심속의 야산은 시민들의 운동공간이고 휴식공간이다 내가살고 있는 진주의 도심속 산은

비봉산 선학산등  여러 산들이 진주를 둘러 쌓고 있어 산 주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정착 되었다

제6체육시설

성암산길을 걷다보면 여러곳에 체육시설이 되어 있는데 산정 바로 아래 있는 제6체육시설물이다

성암산 들머리가 있는 서부1동(西部1洞)은 경산시(慶山市)의 서극에 자리 잡은 지역으로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의거 경산읍(慶山邑)이 경산시(慶山市)로 승격됨에 따라

당시 경산읍(慶山邑)의 옥곡1동(玉谷1洞), 옥곡2동(玉谷2洞), 사정1동(士亭1洞), 사정2동(士亭2洞),

옥산동(玉山洞), 중산동(中山洞), 정평동(正坪洞)을 편입하여 서부동(西部洞)으로 개칭한 후

1995년 1월 1일 경산시와 군이 도농통합됨에 따라 통합 경산시(慶山市) 서부동(西部洞)으로 개칭되었으며

2004년 10월 18일 서부1동(西部1洞), 서부2동(西部2洞)으로 분리되었다. 

경산시 조망

성암산 산정이 가까워 지는듯 시내의 풍경이 펼쳐진다

옥곡동(玉谷洞)은 현 경산역 일대와 경산역에서 남쪽으로 철길의 서쪽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며

이 마을은 임진왜란전 초계정씨 삼형제가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들 삼형제가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당시의 충절을 기려 후손들이 삼의정 이라는 제당을 짓고 조상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이 마을에 전하는 전설로는 "영동당"과 효자각에 대한 전설이 남아있다.

영동당은 마을의 남쪽 구일리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길가에 있는데

동래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당을 불태우자 그 재가 지금의 "영동당"이 있는

남천면(南川面) 송백리(松栢里)에 내려앉았다고 한다.

"효자각"에 얽힌 전설로는 옛날 어느 집에 불이 나자 그 집 며느리가

자기 아들을 먼저 구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먼저 구하고 죽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를 기려 "효자각"을 세웠다고 한다. 

경산시 서부동의 풍경

옥산청구 아파트 우측로는 성암산신동아아파트등 어딜가던 도심은 아파트 빌딩숲이다

사정동(士亭洞)은 경산역 서쪽 성암산(聖岩山) 아래 마을로 유적지로는 수정사

충혼탑, 경산시민헌장비가 있으며 현 사정 2동(士亭2洞)에는 서부1동사무소, 통신공사

경산전화국 농산물검사소 등이 모여 있으며

일대에는 아파트 숲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인구 밀집지역이다. 

경산시  풍경

경산시 중앙동(中央洞)은 본래 경산읍(慶山邑) 중방3동(中方3洞) 과 삼북(三北)1, 2동을

1989년 1월 1일 경산읍(慶山邑)이 법률 제4050호로 경산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중앙동이라

새로운 행정구역을 구성하면서 이에 편입 된 동이다. 
편입 당시는 경산시 오거리를 중심으로 경산시장과 삼북동(三北洞) 구 동헌부지 일대가

그의 행정구역에 포함되었다. 편입 당시는 한국전력 경산지점, 연초경작조합 등이 소재해 있었다. 
이 지역의 자연마을단위 지명은 구 중방3동(中方3洞)  지역에는 " 앞들", "피리구디", "수리보", "꿀밤산" 등이 있고

삼북동 지역에는 "공동새미", "연당걸", "찬물샘"` "갈모가지" 등이 있다.
특히 구 삼북동(三北洞) 구역에는 경산현(慶山縣) 당시 읍성(邑城)이 존치하고 있었으며

읍성(邑城)이 있었다는 주변지역에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기와집들이 즐비하였다.

현재에도 삼북동(三北洞) 일대에는 "성뚝"이라 하여 당시 경산현(慶山縣)읍성(邑城)이 있었던

성 둑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며, 당시에 옥사가 있었다는 지점도 현 동광상회 뒷골목 쪽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밖에도 읍성(邑城)의 북면이 있었다는 "북창"`과 망북루의 흔적지가 전해지고 있다. 

산정으로 가는 능선

산정엔 팔각정이 있는데 성암정이며 산정은 마치 큰 성곽같이 이루어진 능선같아 특이해 보였다

성암산은 경산향교 오성위패를 석굴로 옮겨왔다고 한다

1390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되었다.

1550년에는 현령 박세린(朴世麟)이 중수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3년에 현령 박창(朴敞)이 중수하였으며,

1681년에 현령 홍처공(洪處恭)이 감사 이수언(李秀彦)에게 건의하여 교궁(校宮)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1702년에는 현령 이발(李渤)과 교임 유포(柳浦)가 보수하였고,

1715년에 현령 심용준(沈龍浚)과 교임 조동기(趙東箕)·한두산(韓斗山)·나학해(羅學海)가,

1721년에는 현령 이정량(李廷亮)이, 1725년에는 현령 윤해(尹楷)가 각각 보수하였다.

1753년 현령 김정겸(金貞謙)과 교임 서도벽(徐道璧)·정두빈(鄭斗彬)이 명륜당을 보수하였고,

1803년에는 현령 이지순(李志淳)과 교임 손홍점(孫弘漸)이, 1808년에는 현령 박종서(朴宗恕)와

교임 이경(李璟)이, 1837년에는 현령 성재호(成載護)와 교임 정진방(鄭鎭邦)·장용복(蔣容復)이,

1850년에는 현령 강의영(姜義永)이 각각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1862년에는 기와를 보수하였고, 1911년경산공립보통학교(慶山公立普通學校)를

설립할 때 부지의 일부를 학교에 제공함에 따라 명륜당과 동서재를 해체하였다.

1919년 대성전 서편에 모성당(慕聖堂)을 신축하였다가 1946년 다시 동편으로 이건하였으며,

현재에는 이 건물을 명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대제를 지내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다.

 

경산 성암산(慶山 聖岩山) 469m

성암산은 경북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성암산 정상석 뒤면에 유래를 살펴보며는 임진왜란 때 경산 향교가 있던 오성(五聖)
위패를 이 산의 8부 능선에 있는 " 범굴 "옮겨 병화를 면하고 부터 성서로운 바위굴이 있는
산이라 하여 이름을 성암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성암산은 해발이 높지 않은 산으로 경산시 서남
쪽을 감싸고 있으며 정상에서 경산시를 한눈에 볼수 있는 전망대와 같으며 대구광역시 수성
구 고산지역과 경산 시민들이 즐겨 찾는  체육공원 같은 편안하고 언제든지
갈수 있는 접근성이 좋아 남녀 노소 누구나 이용이 가능한 자연공원이다.

성암산 표지석

성암산 표지석에는 높이가 469.1m라 표기 되어 있고 뒷면은 성암산 유래를 새겨 놓았다

반면 성암봉 정상표지석에는 469m표기 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높은게 좋은듯 국토지리원이나 등고선 지도

산 높이가 많게는 3m정도 차이가 있게 기록한곳도 종종 볼수가 있는데 여기는 0.1m 차이 이다

성암봉 표지석엔 해발469M로 표기 되어 있는데 영문자 미터는 소문자 m 표기해야 맞는 표기이다

하신길

범굴방향으로 하산길은 성암정 바로 돌면 하산하는길이 가파르고 험한길이 이지며

범굴방향이 아닌 곧 바로 능선을 따라가면 옥실봉이 나온다

경산향교에 현존하는 건물은 박공지붕 겹처마인 5칸의 대성전과 5칸의 명륜당,

삼문·중문과 최근에 새로 지은 4칸의 모성당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경산향교는 본래 경산시 신교동에 있었으나 1997년 9월 경산시 향교길 14-19(중방동 760)로 이전했으며,

이 향교의 대성전과 삼문은 201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산시의 풍경

경산시를 바라보면서 범굴 방향으로 하산하는데 연못이 보이는데

그 연못 이름 남매지이며 그 앞은 경산시의 남매공원이다

위치는 경산 시청 바로 앞, 경산 보건소 바로 옆에 있는데 내비게이션 치면은 쉽게 도착할 수 있다.

주차장도 공용 주차장 무료로 이용 가능한데 협소하여 길가에 주차라인이 있는 곳은 가능하다한다

주말에는 길 건너 경산 시청 주차장을 이용이 가능하며 경산 시청 주차장은 엄청 넓어 이용하기가 좋다고 한다

경산 남매지

남매지를 줌으로 당겨서 촬영해보았다 남매지의 면적은 32만 9,700㎡이다.

수혜 면적은 158.6㏊, 유역 면적은 80㏊, 만수 면적은 38㏊이라고 하며 총 저수량은 118만㎥이고,

유효 저수량은 112만㎥이다. 제방의 높이는 8.5m, 길이는 520m이다.

경산 남매지의 유래는 오누이에 얽힌 애틋한 전설이 있는데  조선시대 어느 마을에 홀어머니와 

남의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입신 출세를 꿈꾸는 오빠와 여동생이 살고있었는데  여동생이 오빠를 출세 시키려고

마을의 부자집에 식모 살이를 약속하고 돈을 구해 오빠를 한양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랑배인 황부자의 아들이 여동생을 겁탈해 여동생은 마을의 커다란 못에 몸을 던졌고 

딸을 건지려다 엄마 마저 숨지고 말았다.장원급제한 아들이 금의환향했으나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잃은

아들도 이 연못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이 불쌍한 오누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못을 '남재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범굴

조선시대때 세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까지 휘몰아치는 어느 추운 겨울밤에

어둠을 헤치고 마을에 가서 그 이틀날 먹을 양식을 구해 범굴암으로 오르고 있는

한 노승이 있었는데 큰 호랑이를 만나  호랑이는 아낙네를 잡아먹다가 목에 큰 비녀가 걸려

과로워하는 큰 호랑이가  노스님에게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자

목에 큰 비녀를 빼 주며 호통을 치자 잘못을 뉘우치며 그 뒤로 동자승과

한 식구처럼 착하게 살다가 죽어 성암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입구에 설명되어 있다

성암사 전경

범굴 유래에 나오는 그 성암사 인듯 싶다 

대웅전 건물이 아주 소박하며  여느 큰 사찰들의 산신각 만큼크기 같다.

암산은 '덕이 있다(有德)'고하는데

덕등절구의 1∼2행을 통해 '성암산에는 덕이 있다 하여   덕등(德嶝, 덕이 있는 산)이라 부르니

헛된 이름이 아니로다' 하고 말한다. '덕등절구' 전문은 다음과 같다.

聖巖山有德(성암산유덕)

성암산에는 덕이 있다 하여

德嶝非虛名(덕등비허명)

덕등이라 부르니 헛된 이름이 아니로다

林深無猛獸(림심무맹수)

숲은 깊어도 사나운 짐승이 없으니

樵竪任孤行(초수임고행)

나무하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혼자서 다니네

하산길

성암산은 본래 옥산이었던 경산의 진산이 성암산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 유래를 알았고

그 유래는 임진왜란 때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성현들의 위패를 지게에 지고 옥산 정상부 바로 아래

가파른 절벽까지 올라 범굴에 무사히 보존시킨 향교 노비 강개명의 역사가 서려 있는 일화이다.

전쟁이 끝난 뒤 강개명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면천(免賤, 천민에서 풀려남)된다.

범굴은 경산향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역사의 현장이다

먼지털기

물병하나에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로 횡하니 한바퀴 하고서 신발 그리고 의복에 뭍은 먼지를 털어본다

성암산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노승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부지한 호랑이가 교육까지 받은 후

산신령이 되어 경산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전살의 내용이 의미가 깊다

정기연이 성암산을 찬미하는 시 '덕등 절구'에서 '(성암산은) 숲은 깊어도 사나운 짐승이 없으니

나무하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혼자서 다니네'라고 노래한 까닭이 이제야 온전히 이해가 되는 전설이다

성암산 호랑이는 이 설화가 탄생한 조선 시대 이래 산신령이 되어 경산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으니

맹수가 아니고 수호신 같은 존재임을 알수 있었다. 

산행종료

작지만 경산의 진산 성암산은 경산향교의 오성위패(五聖位牌)를 보호해준 역사적 이야기와

범굴의 호랑이와 노스님 전설이 경산을 지켜주는 주산임을 알았고

임진왜란 때 다섯 분 위패들을 성암산 범굴로 대피하여 안전하게 지켜낸 모범적인 선행담

그리고 경산향교와 성암산 범굴, 꼭 한번 찾아볼 만한 임진왜란 관련한

역사문화유산의 산행길임을 추천하고싶은 경산의 성암산이다

 

※ 출처:

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유정열1000명산견문록, 한국의산천 손경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월간 山(아웃도어 매거진).신 산경표 박성태 조선일보사

해설 대동여지도 최선웅 민병준 진선출판사

인문산행 심산 바다출판사.한국1000산 신명훈

경산시청 홈페이지 지역신문 및 지역주민 인터뷰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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