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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황석산(咸陽 黃石山).정유재란(丁酉再亂)의 역사가 살아있는 황석산에 오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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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황석산(咸陽 黃石山).정유재란(丁酉再亂)의 역사가 살아있는 황석산에 오르다

바다늑대FORCE 2020. 8. 6. 09:10

함양 황석산(咸陽 黃石山)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역사가 살아있는 황석산에 오르다.

 

함양 황석산(咸陽 黃石山)

    높이 : 1192m

    위치 : 경남 함양군 서하면과 안의면에 걸쳐 있는 산.

 

▲ 나의 산행일 : 2020년 08월 5일 수요일. 날씨 : 흐림

▲ 나의 산행코스

 우전마을→→사방댐 →→피바위→→동북문지→→건축지→→북장대추정지

→→황석산 정상→→거북바위→→동북문지→→사방댐

5.8km  3시간 10분 소요.

 

함양 황석산(咸陽 黃石山) 개요 :

황석산은 높이 1,192.5m로서. 소백산맥 중의 한 산이다.

덕유산(德裕山, 1,614m)의 남쪽 산각(山脚)에 솟은 산으로

월봉산(月峰山, 1,288m)·기백산(箕白山, 1,331m)과 비슷한 높이의 산이다.

동쪽 사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게 지우천(智雨川) 하곡으로 기울어지며

산록의 넓은 완사면은 논으로 이용된다.

남쪽 사면은 남계천(灆溪川) 하곡에 임하고 있고 북서쪽에는

월봉산·거망산(擧網山, 1,184m) 등이 있으며 남계천의 상류 분지와 접한다.

남쪽 사면의 계류들이 남계천에 흘러들고 남계천은 남강의 상류를 이룬다.

백두대간 줄기에서 뻗어 내린 네 개의 산 기백, 금원, 거망, 황석 가운데 가장 끝자락에

흡사 비수처럼 솟구친 이 봉우리는 덕유산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가을철에는 거망에서 황석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광활한 억새밭이 장관이다.

금원, 기백산과의 사이에는 그 유명한 용추계곡이 있으며  6.25 때 빨치산  정순덕이 활약했던 곳이

바로 이웃의 거망산이며 황석산성은 함양 땅 안의. 서하 사람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이들이 성이 무너지자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천 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지금껏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인근의 정자가 유명하며 특히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 군자정 등 경상도의 정자 문화를 대표한다.

 

함양 황석산(咸陽 黃石山) 등산지도

 

함양 황석산(咸陽 黃石山) 찾아가는 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진주 jc →→통영 대전 고속도로 서상 TG→→서상로 안의 함양 방향

→→우전길 →→우전길 우회전 →→우전마을회관 주차장

94km 승용차 1시간 10분 소요

→→→→→2020년 08월 05일 수요일 8월이 시작되었다 새삼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 하니

 피부로도 느낄 수가 있는 빠른 시간 속이다

중부지방엔 폭우로 인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수재민도 발생하였다

여기 남부 쪽은 장맛비 그친 이후로 연일 폭염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틈만 있으면 산을 찾는데 오늘은 100대 명산의 하나인 함양 황석산으로 발길을 돌려본다

황석산은 극기훈련 그리고 직장동료와 함께 산행하였고 오늘 산행은 세 번째인 셈이다

코스를 우전마을로 정하고 함양으로 출발했다.

산청을 지나니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이런 날씨면 다시 되돌아와야 하나 생각했지만

함양 즈음에는 흐린 날씨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서하면 우전마을

우전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있는데 관광차 50대분은 주차 가능한 공간이었다

우전마을은 황석산 아래 위치한 마을로써 임진왜란 때에 왜구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불행하게도 성이 함락되자 성을 사수하던 군관민이 서문을 탈출하여 층암절벽 위에서

수백 명이 뛰어내려 자결하였다고 하며 그때 그 소리가 우뢰 소리같이 천지를 진동하여

뒤흔들었다고 하여 우뢰터로 불리어 왔다.

그 후 우라터로 음이 변하여 불리고 있었으며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뇌전(雷田)으로 부르다가

현재의 우전(于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황석산성은 정유재란 때 격전지로써 국가지정 문화재인 사적지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이 마을은 이 성의 남문으로 오르는 최단거리에 있는 마을로

많은 관광객들과 등산객들이 경유하여 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황석산 정상 5.6km

우전마을 대형주차장에서 주차를 하면 5.6km 걸어가야 황석산 산정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우전마을에서 황석산 코스는 최단 코스인데 안내표지목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더 가야 한다

대형버스는 갈 수 없지만 시골 마을 진입을 상상하면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함양군은  소백산맥의 최고봉이며, 영남의 진산(鎭山)인 지리산을 남쪽에 두고 있으며 지형은 대체로 

남북이 길고 동서 간의 거리는 남북의 반 정도인 目字形이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간곡수는 림천(臨川), 엄천(嚴川)이 되어 마천면, 휴천면, 유림면 등지를 지나서

 산청군계에 이르고, 백운산에서 발원한 위천(渭川)은 백전면, 병곡면, 함양읍을 지나서 수동에 이르렀고

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錦川)은 서상면, 서하면을 거쳐 안의면에 이르러 황석산에서 발원하여

안의면으로 흐르는 장수(長水)와 합류되어 람계(濫溪)로 흘러 수동면에서 다시 위천수와 합쳐서 

산청군계에 이르러 임천과 합류하여 남강으로 흘러내려 간다. 

지질은 편마암층이 주로되어 있으며, 북부와 중부에는 화강암이 지리산과 덕유산에는

선암(線岩)이 일부 노출되고 있다.

우전마을 회관 인근 주차장

우전마을회관인근 마을주차장엔 이렇게 100대명산 황석산 관광안내도가 설치 되어 있다

경남대행정대학원산사회 회원들과 100대명산 도전시 근무로 인해 참여하지 못해

오늘은 100대명산 도전 밀린 숙제를 하는셈도 된다.

황석산은 함양 땅 ‘안의’ 사람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이들이 성이 무너지자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왜군에게 죽느니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순절(殉節)한 곳이며

지금껏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은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역사의 현장이 있는 곳이다.

사방댐 황석산 들머리2.6km

여기서 정상까지는 2.6km인데 최단코스 이기도 하다

마을 주차장에서 안내표지목을 따라 10여분 정도 임도를 따라 올라오면 사방댐이 나오는데

계곡 작은 다리를 건너 작은공간 주차장이 있으며 그기에 주차를 하면 된다

날씨는 흐리지만 습도가 높아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황석산 우전마을 들머리 초입구간

우전마을에서 황석산 방향의 초입구간은 대채로 경사도 심하지 않고 걷기 좋은 탐방로 이다

여름날 매미소리 귀가따가울 정도로 소리가 울창하고 계곡물소리도 우렁차다

초목이 짙어 그린샤워하듯 촉촉한 길을 걸어본다.

황석산은 정유재란의 역사가 잇는 곳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조선과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일본은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침략하여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구례를 거쳐 남원을 점령한 후 좌, 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남쪽으로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 권율·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은 직산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막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 역시 12척의 함선으로 300여 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에서 대파하였다.

수륙 양면에서 몰린 일본군은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었다.

1598년 1월 권율 지휘하의 조선군은 울산의 가토군을 공격했고, 각 지역에서 일본군 잔당들을 섬멸했다.

11월 이순신 휘하의 수군이 노량에서 일본의 퇴로를 차단하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자주꿩의다리꽃

첫번째 만나는 황석산 여름 야생화이다

꿩의다리는 그 종류가 아주 많고 서식지가 꿩의 서식지와 비슷하며

줄기의 모양이 꿩의 다리와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꽃이나 잎이 어떤가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많은데, 자주꿩의다리는 줄기가 자주색이며, 꽃도 자주색으로 핀다.

우리나라 각처의 산지에서 나는 여러해살이풀로, 물기가 많은 돌 틈이나 반그늘인 곳의

유기질 함량이 많은 곳에서 자라며, 키는 약 50㎝이고 전체에 털이 없다.

가늘고 양끝이 길며 뾰족한 모양의 뿌리가 여러 줄 나 있다. 줄기는 곧게 서고, 가지가 갈라진다.

잎은 어긋나며, 모양은 심장상 난형인데 원형인 것도 있으며 잎의 뒷면은 회청색이고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으며 3갈래로 갈라진다.

피바위

황석산성 대첩은 당시는 경상도안음현, 지금은 경남함양군서하면에 위치한 황석산성에서 

안음현, 거창현, 함양현, 합천현, 삼가현, 초계현, 산음현 등 7개현의 

노약자 부녀자, 농민, 사냥꾼, 피난민 등 7천여 명이 1597년 8월14일부터18일까지

5일 동안 일본 우군(右軍)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7만5천3백명을 70% 이상

4만8천3백명을 궤멸시킨 전투로  7년 임진전쟁 중 

가장 많은 일본지상군을 궤멸시킨 전투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원과 전력 모두에서 절대적인 열세였던 상황에서 애초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임한 전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전에 분전을 거듭했지만 안타깝게도 곽준과 유명개 및

그 아들들은 전사하고 조종도는 스스로 전장에서 자결했다.

더욱이 격전 과정에서 돌을 나르며 사력을 다해 도왔던 부녀자들은 왜군들로부터

치욕을 당하느니 절개를 지키기 위해 절벽 아래 바위로 몸을 던져 순절했다.

바로 오늘날 황석산 피바위의 실존하는 유래이다.


피바위

안내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조30년 정유년(1597)에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군 14만명중

우근 2만7천명이 그해 음력8월16일에 왜군의 가또,구로다 등의 지휘로

이곳 황석산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안의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는 소수의 병력으로 인근 7개 고을의 주민들을

모아 성을 지킬것을 결의하고 관민남여 혼연일체가 되어 조총으로 공격하는 왜군에 맞서 활과

창칼 혹은 투석전으로 처절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음력 8월18일

황석산은 함락되고 말았다.

왜구와의 격전이 벌어지면서 여인들도 돌을 나르며 부서진 병기를 손질하는 등

적과의 싸움에 온갖 힘을 다하였으나 황석산성이 함락되자 여인들은

왜적에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개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차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십척의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꽃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벼랑으로 몸을 던졌으니 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많은 여인들이 흘린 피로 벼랑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피맺힌 한이 스며들어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그 혈흔은 남아 있어

이 바위를 피바위라 한다.

무더위

무더위에 습도까지 높아 얼굴엔 땀방울이 물 흐르듯 흘러 내렸다

황석산성에서 8월 무더위에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피땀을 흘렸을까

단순 산행이 아닌 하나 하나에 선조들의 충절을 느끼면서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되새겨 보고 단순 산행지가 아닌

역사적  알아야 할 황석산 산행지가 되어야 할것이다.

황석산 탐방로

산에 오를수록 황석산은 돌무더기이다

탐방로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바윗돌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석산성 전투도 이러한 돌을 이용해서 조총앞에 투석전을 했을것이다.

정유재란은 왜조정은 조선정부와의 강화

(즉,명이 중재한 조선에서 왜병이 철수하되 조선의 왕은 풍신수길이한다 라는것에 대한 조선정부의 반대)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2월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략했다.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邢 )를 총독,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5만 5,000명의 원군을 보내왔다.

이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부대를 경주에

곽재우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부대를 추풍령에 각각 배치했다.

7월초 일본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秀包]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대장 모리[毛利秀元] 이하 가토·구로다 등으로

좌군은 대장 우키다 이하 고니시·시마즈[島津義弘] 등으로 편성한 뒤

하삼도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황석산 정상1.3km안내표지목

1.3km남았다 땀은 온몸을 다 적셔버렸다 매미소리는 황석산야에 울려퍼지고

가끔 천둥소리도 들려온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아마도 비가 올듯 하다.

정유재란시 왜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복남·이춘원·김경로 지휘하의 수성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왜군은 전주에 집결한 후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약탈을 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부대는 여산·은진·진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이시언부대도 회덕에서 일본 좌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정기룡(鄭起龍)부대는 고령에서, 조종도(趙宗道)부대는 황석산성에서

일본 우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9월 5~6일 권율·이시언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해생(解生) 지휘하의 명나라 연합군은

직산에서 가토군·구로다군을 대파했고 이에 왜군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고니시군은 순천, 가토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그해 11월 명의 형개가 4만 명의 병력을 3로로 재편하자

조선군도 이시언·성윤문(成允文)·정기룡이 각각 1영(營)씩 지휘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황석산성(黃石山城 ) 동북문지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에 있는 삼국시대 관방의 요새지에 축조된 포곡식 성곽으로서

사적 제322호지정되었고 지정면적 446,186㎡. 높이 3m, 둘레 2.5㎞이다.

소백산맥을 가로지르는 육십령(六十嶺)으로 통하는 관방(關防)의 요새지에 축조된

삼국 시대부터의 고성이다.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에 수축한 바 있었고, 정유재란시 커다란 싸움이 있었던 유서깊은 성터이다.

1597년(선조 30)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이 성이 호남과 영남을 잇는 요새이므로 왜군이 반드시 노릴 것으로 판단하여

인근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성을 넘어 도망하자 왜군이 난입하여

끝까지 싸우던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안음현감 곽준(郭䞭)은 전사하였다.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피바위가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아 전략적 가치가 큰 곳임을 알 수 있다.

황석산성(黃石山城 )

안내글에는 다음과 같다

함양 황석산성은 안의면과 서하면 경계에 위치한 황석산(해발1190m)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으로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을 따라 전북 장수와

진안으로 가는 길목에 축성되어 있다.

형식은 계곡을 감싸듯이 쌍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인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해 쌓았던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가지 고쳐 쌓았고 정유재란(1597)때에는

이곳 황석산성에서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의현감 곽준 등이 왜군과 격전을 벌여

500여명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750m 높이는 3m 정도이고 산성의 면적은 444.609㎥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산성의 둘레가

29.240척(약8.9km)이며  성 안에는 창고가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성문은 동,서,남,북쪽의 4곳에 있으며 산성 안의 계곡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황석산성(黃石山城 )

정유재란 결과로 16세기말 동아시아 3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전국 8도가 전장으로 변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었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고

전쟁 전에 170만 결에 달했던 토지결수도 54만 여 결로 줄었다.

이는 물론 양안(量案)에 등록된 결수(結數)이므로 실제 경작면적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에 비하면 1/3도 안 되는 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기 위한 개혁이 정권의 급선무였다.

제도적 개혁으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원래 비변사는 군사만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지만

영의정 이하 삼공육조판서(三公六曹判書)가 모두 당상제조(堂上提調)에 임명됨으로써

서정일반에 관여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어 국가의 모든 국사가 국방문제와 관련되어 처리됨에 따라

의정부·육조의 업무 대부분까지 비변사가 담당함으로써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황석산성 건물지

안내글을 보면 아래와 같다

황석산성 안의 계곡 주변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 되었다

지표조사에서 군대의 창고인 군창이 잇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황석산성 관련 문헌에도 약 70석의 군량미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평상시에 인근 고을 군창을 황석산성에 두어 긴급한 상황에 대비하였고

정쟁시에는 주민들이 대피하여 적군과 맞서 싸웠다.

등골나물

황석산성 건물지에는 야생화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다년생 초본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하며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산지나 들에서 자란다. 

원줄기는 높이 90~180cm 정도이고 가지가 갈라지며 자줏빛의 점과 꼬부라진 털이 있다. 

마주나는 잎은 길이 9~18cm, 너비 3~8cm 정도의 난상 긴 타원형으로 양면에 털이 있으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7~10월에 산방꽃차례로 피는 꽃은 백색 바탕에 자줏빛이다. 

수과는 길이 3mm 정도의 원통형이고 선과 털이 있으며 길이 4mm 정도의 관모는 백색이다.

골등골나물과 달리 잎자루가 있고 ‘벌등골나물’에 비해 근경이 짧고 잎뒤에 선점이 있으며

줄기에 꼬부라진 털이 있어 까끌까끌하다. 관상용이나 밀원으로 심는다. 

연한 잎과 줄기를 삶아 나물로 먹거나 데쳐서 무쳐 쌈으로 먹고 된장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가는장구채

다른 식물에 비해 유난히 꽃자루가 가늘고 길어서 장구채라는 이름을 얻은

이 식물은 워낙 가늘어서 약한 바람에도 몸을 흔들곤 한다.

장구채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더욱 가늘게 자라는 것이 바로 가는장구채이다.

가는장구채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산지에서 자라는 한해살이풀로

반그늘 혹은 양지에서 자라며 토양이 비옥한 곳에서 잘 자란다.

키는 약 50㎝이고 잎은 길이가 1.5~3㎝, 폭이 1~1.5㎝로 양끝이 좁고

윗부분이 뾰족하며 마주난다.

짚신나물

다년생 초본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하며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들이나 길가에서 자란다. 

모여서 나오는 원줄기는 높이 60~120cm 정도이고 윗부분에서 가지가 갈라지며 

전체에 털이 있으며 모여 나는 근생엽과 어긋나는 경생엽은 우상복엽으로 

밑부분의 소엽은 작고 윗부분의 소엽 3개는 긴 타원형으로 양면에 털이 있으며

가장자리에 큰 톱니가 있고 6~8월에 개화하는 총상꽃차례는 황색의 꽃이 피며

성숙하면 갈고리 같은 털이 있어 다른 물체에 잘 붙는다. 

연한 잎을 삶아 나물로 먹거나 튀김, 볶음으로 먹는다. 

다른 나물에 같이 데쳐서 무쳐 먹고 뿌리는 커피대용으로 먹는다 한다.

황석산성 북장대추정지

황석산 산정 부근에 있는 북장대 추정지이다

지금 정상부로 가는 테크계단 공사중이였다.

황석산성 북장대추정지 안내글을 보면 동북문지 안내글과 동일했다

함양 황석산성은 안의면과 서하면 경계에 위치한 황석산(해발1190m)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으로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을 따라 전북 장수와

진안으로 가는 길목에 축성되어 있다.

형식은 계곡을 감싸듯이 쌍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인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해 쌓았던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가지 고쳐 쌓았고 정유재란(1597)때에는

이곳 황석산성에서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의현감 곽준 등이 왜군과 격전을 벌여

500여명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750m 높이는 3m 정도이고 산성의 면적은 444.609㎥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산성의 둘레가

29.240척(약8.9km)이며 성 안에는 창고가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성문은 동,서,남,북쪽의 4곳에 있으며 산성 안의 계곡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황석산 남봉(黃石山 南峰)

황석산 산정에서 바라본 황석산 남봉이다

황석산성은 정상부 능선을 따라 남봉까지 이어 있다.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는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다시 조선을 공격하였다.

1597년(선조 30) 8월 16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

적의 맹장들은 황석산성에 도착, 수만의 군사로 성을 공략하였다.

당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황석산성이 호남과 영남의 길목이므로

왜놈이 반드시 차지하려는 곳이라 여기고, 주위의 군사를 예속시켜

안음현감 곽준(郭䞭)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적군이 공격해 오자

곽준은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며 성을 보수하는 등 전력을 다하였다.

성 안에는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 등이 백성들과 합세해

성을 지킬 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적들은 성을 포위해 가토는 남쪽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서쪽에서, 구로다는 동쪽에서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성 안에서는 곽준·조종도를 비롯한 장수들과 백성들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적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백사림은 가족을 성밖으로 피신시킨 뒤 성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곽준은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와 함께 끝까지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황석산 정상(黃石山 頂上)1192m

정유재란시 선조들의 피의 역사가 있는 황석산 정상에 올랐다

황석산전투는 1597년 안음현(현 안의면)과 거창현, 함양군 등 7개 군현의

백성·관리·관군 7000여명이 10배가 넘는 왜군에 맞선 전투로

왜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혀 사실상 정유재란을 종식시킨

백성의 전쟁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황석산 정상(黃石山 頂上)1192m

황석산은 남덕유산 남녘에 솟은 산이며

백두대간 줄기에서 뻗어 내린 네 개의 산 기백·금원·거망·황석 가운데

가장 끝 자락에 흡사 비수처럼 솟구친 이 봉우리는 덕유산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가을철에는 거망에서 황석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광활한 억새밭이 장관이다.

황석산과 기백산 사이에는 그 유명한 용추계곡이 있고

6.25전쟁시 빨치산 정순덕이 국군과 전투를 한곳이 바로 이웃의 거망산이다.

황석산성은 함양땅 "안의" 사람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이들이 성이 무너지자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지금껏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은

핏빛으로 물들어 피바위라 부러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본 우전마을

운무에 가려져 시야는 나오지 않았지만 산정에서 맞이하는

공기로 숨을 쉬는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황석산은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 속하는데

거망산에서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는 광활한 억새밭 등 

경관이 아름답고 황석산성 등 역사적 유적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고 한다.

운무에 가려진 산야

여기서 보면 금원산과 기백산 조망이 펼쳐지는곳인데 운무에 가려져 버렸다.

이 암릉길을 따라 북봉(北峰) 거북바위로 향했다.

운무속에 가려진 황석산 주위는 온통 산 山 산들 뿐이다

황석산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이름없는 산이 아니라

국립공원을 비롯하여 모두 명산에 반열에 속해있는 산들이다

북으로는 덕유산 삿갓봉 무룡산 남덕유산 금원산 기백산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줄기인 배개운산 괘관산 남쪽으로는 지리산 영봉

동쪽으로는 가야산과 보해산 오도산등 첩첩산둥 산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거북바위

황석산은 세게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남봉 정상 그리고 북봉인데

북봉으로 가는곳에 이렇게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마을을 향해 내려다 보고 있다

황석산 산정은 모두 암봉으로 이루어 져 있고 정상부 능선 또한 암릉이로 되어 있다.

황석산의 자랑꺼리는 용추계곡이며 용추계곡은 황석산 남서쪽의 화림동계곡과

수승대로 유명한 금원산 기백산 천천계곡과 함께 예로부터 거창 함양의

3대 계곡으로 일명 화림삼동(花林三洞)으로 불리고 있다.

운무에 갇혀버린 황석산 정상

북봉쪽에서 바라본 황석산 산정부분은 어느새 운무속에 갇쳐 버렸다.

황석산이 있는 함양 안의면(安義面)은 소백산맥의 영향으로 

안의면의 북서부는 금원산(1,353m)·기백산(1,331m)·거망산(1,184m)

황석산(1,100m) 등의 높고 험준한 산지를 이루며

안의면의 남동부는 300~600m의 저산성 산지를 이룬다. 

안의면의 남동부를 흐르는 지우천 등의 소하천 연안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분포하며

남부의 남강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했다. 

쌀·보리 이외에 사과와 양파가 지역 특산물로 생산된다. 곳곳에 관개용 저수지가 많다. 

하산완료

사방댐 원점으로 하산했다  하산하자 마자 장대비가 쏱아져 내렸다

황석산은 정유재란의 깊은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였다

100대명산이라 풍경속 구석구석에 살아 있는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보는 산행이였다.

黃石歌(황석가)

黃石山城(황석산성)天府金湯(천부진탕)
險固且堅(험고저견)異乎帶方(이호대방)
大笑軒 郭存齋(대소헌 곽존재)殉忠仗節眞可傷(순충장절진극상)
小豎白思廉(소수백사렴)何事一任西門防(하사일임서문방)
開此門賊兵亂入皆國殤(개차문적병난입개국상)
于時槊上示其母(어시삭상시기모) 思廉到此難得堂(은렴도차난득당)

황석산성은 / 산천이 험준하여 천연의 요새로
험하면서 견고하니  / 대방과는 다르나
대소헌곽존재는 
충성으로 절개지켜 참되게 죽었구나
저 녀석 백사렴에게  / 무슨 일로 서문 막는 일 시켰는가
이 문 열자 적병 난입하여 나라 망하다
이때 창 위에 어머니 보이니
/ 사렴이 왔으나 어찌할 수 없구나 

* 충신 : 대소헌 - 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 1537~1597, 호 대소헌(大笑軒)),

곽존재 - 안음현감 곽준(郭遵, 1550~1597, 호 존재(存齋)), 시호 충렬공

역적 : 백사렴 - 백사림(白士霖, 출 미상~졸 미상)

출처: 김수민(신장섭 역), ‘한국 기동악부 주해’(서울: 국학자료원, 1997), 262쪽.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근교산&저너머(국제신문), 명산플러스(경남일보),한국1000산 신명훈,함양군 안의면 서하면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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