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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유마사(和順 維摩寺). 유마운과 그의 딸이 창건한 유마사에 가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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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유마사(和順 維摩寺). 유마운과 그의 딸이 창건한 유마사에 가다

바다늑대FORCE 2020. 6. 9. 09:21

화순 유마사(和順 維摩寺). 유마운과 그의 딸이 창건한 유마사에 가다.

 

■ 화순 유마사(和順 維摩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

  위치 : 전남 화순군 남면 유마리 321

  전화 :  061-374-0050

 

■ 사찰 기행일 :

    2020년06월07일.일요일  .날씨 : 맑음

 

■ 화순 유마사(和順 維摩寺)개요 :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627년(무왕 28)에 중국에서 건너온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부속암자인 귀정암(歸靜庵)·금릉암(金陵庵)·운성암(雲城庵)

사자암(獅子庵)·오미암(五味庵)·은적암(隱寂庵)·남굴암(南窟庵)·동암(東庵) 등과 함께

수많은 승려들의 수행도량으로 이용되었다.

17세기 무렵 경헌(敬軒)이 중건하였고, 그로부터 약 50년 뒤에 가안(可安)이 나한상을 조성하였다.

1889년(고종 26)에는 전라도관찰사 김규홍(金奎弘, 1845∼?)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때 이 절과 부속암자들은 모두 소실되었고

그 뒤에도 오호연·김해은 등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최근에 주지 박상규가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3칸의 대웅전과 산신각·백운당(白雲堂)·종각·요사채 2동이 있다.

원래 이 절에 있던 범종은 구례 화엄사로 옮겨졌으며, 현재 종각에는 종이 없다.

절의 서쪽 계곡에는 널따란 바위다리가 놓여 있는데

그 바위 한쪽 편에는 ‘維摩洞川普安橋(유마동천보안교)’라고 새겨져 있다.

이 보안교는 보안이 옮겨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보안교를 놓기 위하여 모후산 중턱에서

많은 인부들이 이 바위를 운반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으나 험한 산길이라 작업 진도가 부진하였을 때

보안이 치마폭에 이 바위를 싸더니 유유히 들고 와서 놓았다는 전설이다.

보안은 적벽근처에 보안사를 창건하였으며, 유마사의 약수인 제월천(濟月泉)에 얽힌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보안교 건너 서쪽으로 150m 지점에는 해련탑(海蓮塔)과 또 하나의 부도가 있는데

모두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81년 화순군에서 복원하였다.

이 중 해련탑은 보물 제11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창건자 유마운의 부도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도 절 입구에는 높이 1.5m의 경헌대로사리탑(敬軒大老舍利塔)이 있는데

대석의 네 모서리에는 사자·호랑이·돼지의 조각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또한, 옛 절터에는 많은 기와조각들이 산재하고 있어 거찰이었던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 화순 모후산(和順 母后山)유마사(維摩寺)찾아가는 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순천방향 →→호남고속도로 송광사 TG→→벌교 방향→→고인돌 보성방향

→→모후로 화순 방향→→유마로→→ 유마사 주차장

129.3km 승용차 1시간 40분 소요.

 

→→→→→사찰 기행 시작

山에 오르면 寺刹이 있고 寺刹에 가면 山이 있듯이

산행을 하고나면 사찰에서 참배로 기원(祈願) 하면서 산행 마무리와 사찰 도량을 둘러본다

오늘은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모후산(母后山)에 있는 삼국시대 유마운과 딸 보안이 

창건한 유마사를 둘러본 이야기 이다. 

 

유마사 주차장 옆에 있는 모후산과 유마산 안내도

 

초록의 싱그러움이 더하고 그에 따라 한여름 햇살처럼 무더운 날씨다

그래도 초목들의 싱그러운 세상 속에서 잠시 부처님 품으로 들어 가본다

유마사는 화순군 남면 유마리 321번지 모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승보종찰 송광사의 말사 이라고 한다.

광주 벌교간 도로에서 이정표를 따라 약 6km정도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위치하고 있으며

동복읍지 유마사향각변건상량문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무왕 28년(627년)중국 당나라의 고관이었던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그가 수행하기 위해 지은 암자가 지금의 귀정암의 옛터로서 뒤쪽에
아직도 유마운 탑의 유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유마운의 딸 보안보살 역시 불법을 깊이 깨달았는데
동복 이서면의 보산뒤에 보안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유적은 남아 있다고 한다.

 

유마사(維摩寺) 표지석

유마사 표지석 건너편은 모후산 산행 들머리가 있으며 표지석 위로 시멘트 포장길이

유마사로 가는길인데 시멘트 포장길 좌측에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에

유마사 일주문이 있어 좀 어아했다.

현재 유마사 경내에는 보안보살이 채로 달을 건져 올려 비구승을 공부시켰다는 제월천과

보안보살이 치마폭에 싸 옮겨 놓았다는 보안교(普安橋)가 1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현존하고 있다.
그 뒤 유마운을 이은 선사가 잇달아 나타나 부근에 귀정암, 사자암, 금릉암

은적암, 운성암, 동암, 오미암, 남굴암 등의 8암이 있었으며 승려들의 수도장으로 이용하였다 하며

17세기 무렵 경헌(1542-1632)스님이 절을 중건했고

그로부터 50년 뒤에 가안선사가 나한상을 만들었는데

가안선사가 만든 나한상은 특히 뛰어나 세상에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고 전한다.

 

유마사 일주문(維摩寺 一柱門)

편액에는 母后山維摩寺(모후산 유마사) 라고 걸여 있다

맞배지붕의 다포계 형식의 건축물로서 단청은 되지 않았다

일주문 근처에 유마사 보안교가 있는데

그냥 납작한 큰 바위돌을 올려 놓은듯 한 다리 이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크기는 가로가 가장 좁은 동쪽은 200cm이고 

넓은 서쪽은 315cm에 이른다. 세로는 약 310cm이고 

두께는 약 35cm로 윗면은 잘 다듬어져 있다. 다리 위에는 두개의 명문이 있는데

계곡 아래쪽에 '維摩洞天普安橋'가 계곡의 북쪽에 '觀世音普薩 梁蓮浩'라고 쓰여 있다. 

글씨의 크기는 17~24cm이다. 관세음보살의 옆에는 한글로 '관세음보살'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白雲居士書'라고 쓰여 있다. 

 

유마사 해련부도(和順維摩寺海蓮 浮屠)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유마사에 있는 고려전기 승려 해련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 부도로서

보물 제1116호로 지정 되어 있다

높이 2.5m정도 되며 승탑은 유마사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마사 절에서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석재가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6·25전쟁 뒤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고 한다.

몸돌 앞면 윗부분에 ‘해련(海蓮)’, ‘지탑(之塔)’이라고 새긴 2행 4자의 글자가 있어서

승탑의 주인공이 해련임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승탑을 ‘해련탑’이라고 부른다.

승탑은 단면이 8각인 바닥돌 위에 8각의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8각 몸돌과 지붕돌을 차례로 올린 전형적인 8각원당형(圓堂形) 부도이다.

받침돌은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로 구성되었다.

아래받침돌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맨 아래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을 새긴 돌을 놓았고

그 위의 돌에는 덮개돌 모양을 새겼으며, 맨 위의 돌에는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 8개와 귀꽃이 각 모서리마다 조각되어 있다.

아래부분에 두툼한 굄을 새긴 가운데받침돌에는 각 면에 큼직한 안상이 1구씩 새겨져 있다.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의 윗부분과 반대로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를

돋을새김한 모습인데, 연꽃잎 안에는 또 다른 꽃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가안선사지탑(可安禪子志塔)

유마사 입구 좌측에있는 부도인데 불자들의 기원 흔적 작은돌이 많이 올려져 있다

이 부도는 석탑부쟁화 섞여 있어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지대석은 3단층급의 석탑 옥개석을 뒤집어 놓았다

그 위에는 11엽 앙련을 양각한 탑신 괴임을 두었다

옥개석도 지대석 처럼 층급 받침이 3단인 탑 옥개석을 올리고

그 위에 석탑 삼층 옥개석으로 보이는 부재를 꺼꾸로 올려 놓았다

탑신은 세장하고 배흘림이 표현 되었으먀

중앙에 가안선자지탑 이라는 명문이 음각 되어 있다

탑신 받침의 연꽃잎 안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겼다.

 

봉향루(奉香樓)

일반적으로 사찰을 구성하는 한 형태로서  대중법회시 대웅전내 가지 못하는

일반신도들이 법회를 보는곳이다.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는 유마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지만

1998년 순천 대학교에서 실시한 정밀 지표 조사에서 고려 초기의 해무리굽 청자 파편과

고려 전기의 유물로 판단되는 해련탑, 석탑, 석등 등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고려 시대 전기에는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시기의 고려 청자와 기와 편 등으로 볼 때 고려 시대에는

꾸준하게 법통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1656년과 1670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1826년에는 『진언집(眞言集)』을 간행하였다.

 

봉향루 법당쪽에서 바라본 모습

편액에는 설천구민루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설법한자와 경청하는자 모두 사라졌다는 말이다.

유마사(維摩寺)는 주변에 흔치 않은 여성승려들이 수행하는 비구니(比丘尼) 사찰이며

유마사는 고려 공민왕이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는데 어머니의 품 속 같아 

덕스러움이 모후(母后)와 같다고 하여 원래 나복산(蘿葍山)이라는 이름 대신하여

모후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이곳 동복현감으로 부임했을 때의 이야기다. 

김성원이 노모를 구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고 하여 

나복산을 모호산(母護山)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모호촌으로 불렀다고 한다.

 '호남읍지'에 "본래 이름은 나복(蘿葍)으로 현 동쪽 15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모후산은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고

 유마사(維摩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마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한 두가지가 아닌데

듣고 있노라면 그것이 설화인듯 실화인듯 묘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특히 이 사찰의 창건과 관련된 내용은 자못 흥미롭다. 

중국 요동(遼東)지역에 보안(普安)이라는 처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요동의 태수인 유마운(維摩雲)이었다. 

사람들을 죽여가면서까지 많은 재물을 모았는데

이를 지켜본 딸 보안(普安)의 간청으로 깊이 뉘우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전재산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미련 없이 길을 떠나게 되었다. 

산 넘고 물 건너 걷고 또 걷다보니 모후산 아래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관음전(觀音殿)

유마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관음전이 대웅전을 대신 하고 있다

지금 대웅전 창건 불사 중이였다.

관음전 한 단 아래의 대지 양쪽에 2개씩 1조를 이루어 괘불지주가 있다.

상부는 각을 없애고 호형으로 다듬어 모나지 않게 마무리하였다.

상부와 하부의 두께가 거의 일정하며 단면의 형태는 세장한 방형이다.

각각 상하에 구멍이 뚫려 있고 문양이나 명문은 없으며 면이 매우 거친 편이다.

조성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되며, 이를 통해 유마사에도 괘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마사 창건설화중 유마운은 그이곳에 정착하고 나무를 베어 장에 팔아 생계를 이어 나갔다. 

보안이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전라도 무진(武珍)고을 원님이 순방을 나왔다가 

유마운과 보안의 소문을 듣고 모후산을 찾았다. 

그들을 만난 원님은 뭔가 도와주고 싶은 생각으로 그곳에 절을 세워주고 경작할 밭을 마련해 주었다. 

이후 절에서 부전스님과 함께 기거하게 되었는데

그는 염불에 힘쓰기보다 보안(普安)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유마운이 돌연 세상을 떠나고 보안과 부전스님만 절에 남게 되었다. 

보안은 부전이 자신을 흠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부담을 느낀 나머지

어느 날 밤 부전에게 편지를 썼다. '발원(發願)을 등지고 윤회(輪廻)의 강에 탐닉하는 것은 

짐짓 불자(佛者)의 바른 행위가 아닌 줄 아오나, 스님께서 정히 그렇게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아까워 드리지 못할 것도 없사오니, 내일저녁 열 두시에 아랫마을 개울가로 나와 주세요'

이튿날 약속장소에 나온 부전에게 보안은 뜰채 하나를 건네면서 말하기를

'스님, 저 물 속에 둥근 달이 보이시나요? 저 달을 이 뜰채로 건져내는 일입니다.

스님이 달을 건져내고 제가 그 달을 건져도 좋고, 둘다 건지지 못하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건져내지 못하고 제가 건져내게 된다면 우리들의 약속은 멀어지는 것입니다.

예상한대로 부전스님은 뜰채로 달을 건져내지 못했고, 보안은 쉽게 건져냈다.

상심한 부전은 상사병이 깊어져 갔는데 그를 낫게 해줄 사람은 보안 뿐이었다.

어느 날 보안이 아파 누워있는 부전을 찾아가 법당 안에 모셔진 탱화를 뚝 떼어 마룻바닥에 깔고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부전은 차마 옷을 벗지 못했다.

제아무리 사랑이 깊다한들 스님이 탱화를 깔고 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안이 격노하며 말했다. '그대는 사람이 그린 그림에 불과한 부처는 무섭고

진짜 살아있는 부처는 무섭지 않느뇨?'

그런 후 보안은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로 변해 승천했다고 한다.

 

유마사 산신각(山神閣)

유마사 산신각은 관음전 뒷편에 남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맞배지붕의 정면 1칸 측면1칸으로 단출한 건축물이다

산신각 주변은 돌담으로 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띠살창으로 짠 2분합의 문이 있다

산신각 내부는 산신탱1점이 봉안되어 있고 흰수염을 기른 산신이 부채와 영지를 들고 있다

옆에는 우측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그림이며

뒷쪽은 동자와 동녀가 시립해 있다

동자는 호리병이 달린 산신의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동녀는 과일을 담은 쟁반을 들고 있는 그림이다.

 

범종각(梵鍾閣)

유마사 범종각에는 범종이 없으며 범종 설치 불사 중에 있었고

종각에 있던 범종은 지리산 화엄사로 옮겨져 있다고 한다.

유마사 초입에는 설화의 주인공인 보안이 세웠다는 투박한 옛 다리 하나가 있는데

모후산 깊은 숲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 위에는 보안이 만들었다는 

보안교(普安橋)가 1400년의 역사를 품은 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계곡 위에는 널따란 바위돌이 통째로 걸려 있고 계곡물은 청아하여 

금방이라도 물속에서 바위틈을 비집고 해맑은 달이 솟아오를 것만 같다. 

다리바닥 한쪽 편에는 '유마동천보안교(維摩洞天普安橋)'라고 새겨져 있는데 

눈여겨보지 않으면 쉬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보안교에 얽힌 이야기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을 만큼 흥미롭다. 

모후산 중턱에서 많은 인부들이 바위를 운반하려고 애썼으나 

험한 산길이라 작업이 부진하자 보안이 직접 치마폭에 바위를 싸더니 

유유히 들고 와서 단번에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이다.

곧이곧대로 믿기야 어렵겠지만 어쨌거나 

보안(普安)은 여러모로 신통방통한 면모를 지녔었던 것 같다. 

 

문수전(文殊殿)

유마사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전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보살에 대한 신앙이 삼국시대 이래 널리 전승되었다.

문수는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문수시리(文殊尸利)의 준말로

범어 원어는 만주슈리(Manjushri)이다. ‘만주’는 달다[甘], 묘하다, 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福德)이 많다, 길상(吉祥)하다는 뜻으로, 합하여 훌륭한 복덕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인도에서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한 이로서

항상 반야지혜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는 ≪반야경≫을 결집, 편찬한 이로 알려져 있고, 또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요 부모라고 표현되어 왔다.

이는 ≪반야경≫이 지혜를 중심으로 취급한 경전이고

지혜가 부처를 이루는 근본이 되는 데서 유래된 표현이다.

 

 

육화료(六和寮)

유마사 승가대학

유마사 승가대학은 2000년 일장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본사인 송광사와

비구니 승가대학을 설립키로 합의하고 7년에 걸친 불사 끝에 이뤄지게 되었다고 한다.

폐사나 다름없던 유마사가 복원되고 승가대학 설립 소식이 전해지자 지역주민들도

사평초등학교 동문회(회장 박영용)를 중심으로 후원회를 구성하고

대학 건립불사에 적극 동참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서울(삼선포교원), 경기(봉녕사), 충청(동학사), 영남(운문사, 청암사)에 이어

호남에서도 비구니 전문교육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모후산 유마사


維摩寺(유마사) 의 원래 터는 普安橋(보안교) 서쪽 구릉이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석탑 부재들과 건물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자기 파편과 기와 편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의 절터는 1875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며, 1879년에 김경담(金景潭)과

관찰사 김규홍[1845~?]이 중수하였다.

김규홍은 1864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89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1891년 형조 판서, 1892년 예조 판서, 1893년 공조 판서와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다시 사찰이 쇠락하였던지 1919년에 주지 김영운(金榮雲)이 봉향각(奉香閣)을 창건하고

주당(廚堂)을 건립하였으며, 1928년에는 주지 오호연(吳浩然)이 법당 앞에 요사 9칸을 건립하고

밤·대추·감나무 등 과실수를 많이 심었다.

그 뒤 유마사는 꾸준하게 사세가 이어져 여러 문헌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다가 6.25 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주지 박상규가 재건하기 시작하여

명맥을 이어오다가, 1999년 주지 일장(日藏)의 부임 이후 대대적인 불사가 이루어져

오늘의 면모를 갖추었고, 2020년 현재도 대웅전과 범종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송광사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 문화재청, 유마사, 화순군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및 사찰종무소스님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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