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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정암루(宜寧 鼎巖樓)&솥바위.정암진(鼎巖津)전투의 전승지 정암루에서 남강을 보다 본문
의령 정암루(宜寧 鼎巖樓) & 솥바위
정암진(鼎巖津)전투의 전승지 정암루에서 남강을 보다
▣ 의령 정암루(宜寧 鼎巖樓) & 솥바위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남강로 686
▣ 여행일 : 2020년04월21일. 화요일
날씨 : 맑음(강풍)
▣ 의령 정암루(宜寧 鼎巖樓)개요 :
정암루는 의령의 관문인 정암철교 바로 옆 언덕에 위치한 누각이다.
정암루는 조선시대의 정자 취원루가 있었던 자리에 있는데 취원루는 소실되어 없어졌고
1935년 이 고장 유림과 유지들이 그 자리에 정암루를 건립했다.
정암루 바로 아래가 정암나루가 있던 자리인데, 1592년 임진왜란 때 곽재우장군이 이끄는 의병들이
이곳에 매복하여 있다가 일본군 장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이끄는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의령읍 정암리에 있는 정암진(鼎巖津)은 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의 도선장(渡船場) 명칭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둔 전승지이기도 하다.
의령읍내에서 남해고속도로 방향으로 가다 보면 백야 오거리가 나온다.
백야마을을 거쳐 정암마을에 들어서면 정암철교와 어우러진 정암루가 나온다.
정암철교 입구 오른쪽에 홍의장군 전적기념비가 있고, 정암루에 올라 남강을 바라보면
정암철교 아래 강물 속에 솥 모양을 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가 바로 ‘솥바위’이다.
정암(鼎岩)이라고도 부른다.
▣ 의령관광안내도
▣ 의령 정암루 찾아가는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진주나들목(부산방향)→→남해고속도로 군북나들목→→남강로→→남강로7길 좌회전
→→정암루주차장
35km 승용차 30분 소요.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찾아 길을 떠나보자
일요일은 곡우(穀雨)였다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는 절기라 그런지
봄비가 소나기처럼 많이 내린 탓인지 산야에 초록으로 진하게 물들어 간다.
화요일인 오늘은 야간근무 날이라 출근길 조금 일찍 길을 나서 의령의 관문인 정암루와
남강(南江)에 우뚝솟은 정암(鼎巖) 솥바위의 전설
그리고 정암진 전투 전승을 이룬곳을 찾아 보기로 했다.
의령관문 정암교(宜寧關門 鼎巖橋)
의령 삼원휴게소에서 바라본 정암교이다
바라보는 쪽은 군북면 월촌이며 남강을 가로질러 정암교를 지나면 의령군이며
정암루가 있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 곽재우 장군이 전승을 거둔곳이다
정암교를 지나자마다 곧바로 우회전 하면 정암루 주차장으로 갈수있으며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서 제일먼저 정암철교를 만난다
정암철교 위에 바로 정암루가 위치하고 있고 풍경 또한 좋으며 야경도 좋다고 한다.
정암루(鼎巖樓)
경남 의령군의령읍 정암리에 있는 정암진(鼎巖津)은
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의 도선장(渡船場) 명칭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둔 전승지이기도 하며
건축물 형식은 팔작지붕 정면4칸 측면 2칸 짜리 건축물이다.
정암루는 의령의 관문인 정암철교 바로 옆 언덕에 위치한 누각이며
정암루는 조선시대의 정자 취원루가 있었던 자리에 있는데 취원루는 소실되어 없어졌고
1935년 이 고장 유림과 유지들이 그 자리에 정암루를 건립했다.
정암루 바로 아래가 정암나루가 있던 자리인데
1592년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이곳에 매복하여 있다가
일본군 장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이끄는 일본군을 격퇴시킨곳이다.
정암루(鼎巖樓)편액
정암진 전투는 1592년 5월 24일 의병이 일본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이며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았으며,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가 곽재우의 의병을 중심으로 규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전라도 침공작전을 지휘했으며
고바야카와의 부하 안코쿠지 에케이는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경상남도 의령으로 진군했다.
곽재우는 이때 남강 북안의 정암진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5월 24일 안코쿠지의 병력은 정암진 맞은편에 도착해 지역 백성을 동원해
도하 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를 하는 한편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했다.
이를 알게 된 곽재우는 한밤중에 의병을 동원하여 나무 푯말을 늪지대로 옮겨 꽂아두고
정암진 요소요소와 숲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안코쿠지의 선봉대가 남강 도하를 시작하려 했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의병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전멸했다. 이어 안코쿠지의 주력부대가 남강을 건널 때
매복해 있던 의병군이 기습공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이번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 부대는 전라도 진격을 포기했고
전라도 지역은 보전될 수 있었다.
승리를 거둔 곽재우 의병부대는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도움으로 의령현과
삼가현을 곽재우의 지휘 아래에 편입시켜 병력이 1,000명이나 되었고
전 목사 오운과 박사제 병력 3,000명까지 합세해 총 4,000명의 병력으로 증원되었다.
정암철교(鼎巖鐵橋)
정암루에서 바로본 정암철교 이다
정암철교(鼎岩鐵橋)는 경암 의령군과 함안군 군북 월촌을 연결하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철교이며 2014년 10월 30일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639호로 지정되었다.
정암철교는 1935년 철골트러스교로 준공되었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된 후
1958년 남아있던 2개의 경간을 그대로 살려 상부는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재건하면서
완전히 파괴된 부분은 새로운 교각을 세워 7개의 경간을 지닌 철근콘크리트 T형 보로 재건하였다.
솥바위(鼎巖)
남강에 우뚝솟은 솥바위 이다.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정암마을에 있으며 의령읍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지나
정암교 바로 우측에 촌동네 치고는 다소 큰 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은 정암마을 이라는 이름 보다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찌른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인 정암진(鼎巖津)으로 더 유명하다.
이같이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마을 앞에는 천기가 서린 곳이 있어 유명세를 더하고 있다.
의령군과 함안군을 경계로 흐르는 남강 가운데에 4m 높이로 솟아 있는 솥처럼 생긴 바위다.
바위 모양새가 ‘솥’을 닮았다 해서 솥바위(鼎巖)라고 불러진다. 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솥바위(鼎巖)
솥바위에 서린 천기를 보면
남강 물위에 드러나 있는 부분은 솥뚜껑을 닮았고, 물아래에는 세개의 발이 받치고 있다고 한다.
세개의 발은 남쪽, 북쪽,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고 전해져 내려 오고 있으나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의령군 충익사관리사무소 윤재환 소장은 “몇해 전 모 방송국에서 실제로 3개의 다리가 존재하는지
다리 방향이 남쪽, 북쪽, 동남쪽을 보고 있는지 수중탐사를 했으나
물이 탁해 끝내 확인하지 못하고 철수했다”고 말했다.
아마 천기가 서린 솥바위가 자신의 신비를 확인하려 한 인간에게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나 싶다.
솥 정(鼎)은 세 갈래의 발이 달린 솥의 모양을 본 뜬 글자다.
원래 중국 고대국가에서는 세발 달린 솥을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래서 솥바위를 ‘존귀함과 부귀함’을 나타내는 바위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여러가지 속설에 따르면 솥(鼎)이란 비록 작은 그릇이지만 왕(王)의 보물로 귀중한 기물로 여겼고
솥발(鼎足) 3개는 삼공(三公), 삼정승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솥바위의 기운을 받아 역사상으로 큰 자취를 남길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져 왔다.
솥은 밥을 하는 그릇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솥은 부를 상징하는 의미로 여겨졌다.
그래서 솥바위는 부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창업과 시험합격 등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면 성공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동전을 던지고 정성을 다해 기원하고 있다.
따라서 나역시 삼배(三拜)를 올리고 기원(祈願)했다.
솥바위(鼎巖)
군북면 월촌방향에서 렌즈를 당겨서 촬영해 보았다.
솥바위의 전설은 솥바위 인근 주민들사이에서는 예로부터
솥뚜껑을 받치고 있는 3개 다리의 방향으로 반경 20리(8㎞) 이내에
큰부자 3명이 난다는 예언이 전해져 왔다.
조선말 한 도인이 이 솥바위에 앉아 머지 않아 이 바위를 중심으로
국부 3명이 태어난다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이곳 마을사람들은 섣달 그믐날이나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 바위에 왼새끼줄(금줄)을 치고는
동신제, 용왕제, 기우제 등을 올리기도 했고
집안에 우환이 있는 사람들은 한밤중에 촛불을 밝혀 놓고 무당굿을 하거나
비손을 했던 곳이었으며 옛 시절에는 함부로 올라가지 못하게 말렸던
금기의 대상인 바위섬이었다고 한다.
정암철교(鼎巖鐵橋)
정암교(1935년5월)와 더불어 남지교(1932년12월), 낙동교(구포교 1933년1월), 적포교(1935년7월)등은
일제 당시 경상남도 일제시대 토목과장이었던 우에다 마사요시(上田 政義)가 츠노다(角田), 이야마(井山)등
고교후배들을 불러 경남의 주요교량 공사를 맡겨 시공한 것이다.
정암교 길이는 259m,폭6m이며 2006년부터 새 교량이 건설 됨에 따라서
지금은 보행만 하게 되었고 탐방로 역할만 하고 있다.
지금 교각준공석에 보면 단기 4291년(1958년)에 재 준공된 철교임을 알수 있고
정암철교 아래 솥바위는 한때 사라질 위기도 있었다 한다
솥바위는 일제에 의해 교각 받침이 될뻔 한 역사도 안고 있다.
1930년 초 일제는 정암교를 설계하면서 솥바위 위에 다릿발을 놓으려 했다.
수중 자연암석인 솥바위를 활용하면 다릿발을 줄일 수 있고 교량이 튼튼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일본을 대표하는 경관파 교량 엔지니어인 가바시마 마사요시(樺島 正義, 1877~1949)가
1931년 정암교 건설 예정지를 찾아 주변 경관을 관찰한 뒤
정암교의 위치를 솥바위에서 위쪽으로 40~50m 떨어지게 설계를 변경했다고 한다.
솥바위를 보존하고, 다리에서 정암을 바라볼 수 있게
또 솥바위와 다리가 경관적으로 조화되게 설계 변경을 유도한 것이라 하고
가바시마 마사요시 때문에 솥바위는 사라질 위기를 겨우 면했다 한다.
정암철교(鼎巖鐵橋)
오늘따라 강풍이 불어서 여유있게 걷기엔 좀 그렇지만 걸어보면서
남강 그리고 정암루와 솥바위를 감상해본다
정암철교는 보행자들만 갈수있게 차량은 안전상 통행금지 시켰다
남강 절벽위에는 정암루가 고풍스럽게 자리하고 있고
저 위에서 내려다 보면 남강이 한눈에 조망이 된다.
의병 홍의장군께서 잠복해서 전승을 거둘만큼 요충지 같아 보였다.
솥바위(鼎巖)
정암철교를 걸어면서 바라본 솥바위 이다
진주촉석루앞 남강에 있는 의암(義巖)보다 훨신 크다
저 솥바위 아래는 3개의 다리가 삼각으로 되어 있다는데 쏘가리도 많다해서 해병대특수수색대 전역후
잠수사모임에서서 나온 이야기 이지만 잠수해서 쏘가리 잡아러 가자는 말도 있었다.
3개 다리의 방향으로 반경 20리(8㎞) 이내에 큰부자 3명이 난다는 예언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예언 탓인지 공교롭게도 재벌 창업주 3명이 솥바위 근처에서 태어났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이다.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이병철 생가(솥바위로부터 8km·북쪽)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구인회 생가(7㎞·남쪽)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조홍제 생가(5㎞·동남쪽)
예언 처럼 솥바위에서 반경 20리내 위치하고 있다. 예언이 현실로 된 것이다.
정암루(鼎巖樓)
정암진 전투는 음력5월26일 안코쿠지 에케이(安寺 瓊)의 2000명 병력은정암진 대안에 도착해
지역 주민을 동원해 도하 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를 해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했다. 이에 밤 사이에 곽재우 의병장은 군사들을 동원해
나무 푯말을 늪지대에 꽂아두고 정암진 요소요소와 숲에 군사들을 매복시켜두었다.
날이 밝자 안코쿠지 에케이(安寺 瓊)일본군 선봉대가 도하를 시작했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의병장 곽재우의 의병군에게 선멸되었고 안코쿠지 에케이(安寺 瓊)의 주력군이
남강을 도하했으나 미리 대기하던 곽재우장군 의병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 6부대는전라도 진격을 포기하여
임진왜란 참전 일본군 부대 중 유일하게 전라도에 진출하지 못한 부대가 되었다.
의령관문(宜寧關門) 조망
정암철교에서 바라본 의령관문이다 편액은 宜寧關門(의령관문)이라고 새겨져 있다.
경남 의령군은 경상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으로서
땅이 기름지고 거주 환경이 양호해 청동기시대부터 상당한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1960년 이후 산업화의 물결로 인구의 전출이 심해 군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행정구역은 의령읍, 가례면·칠곡면·대의면·화정면·용덕면·정곡면·지정면·낙서면·부림면
봉수면·궁류면·유곡면 등 1개읍 12개면 116개리가 있다
군북면 월촌에서 바라본 정암루와 솥바위
옛 정암철교는 걸어서 남강을 볼수가 있고 남강절벽위에 정암루도 볼수 있어 좋다
정암루와 솥바위도 함께 촬영해 보았다.
솥바위 지형은
솥바위의 주변 지형은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 용덕천, 서쪽으로 의령천, 동쪽으로 남강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백야, 정암 등이 있으며 백야는 정암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정암은 정암리의 본마을로 솥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정암이라 하였다.
그리고 남강에 떠 있는 솥바위의 형세는 과거와 현재 모습이 크게 다르다.
과거 솥바위의 양쪽 뭍과의 거리는 오른쪽과 왼쪽 간격이 거의 비슷하였다.
지금은 솥바위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 뭍과의 간격이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왼쪽 뭍(정암마을)은 솥바위에 거의 접근해 있다.
과거 정암마을은 매년 비가 많이 내리게 되면 남강의 물이 범람하게 되어
상습적으로 침수피해를 입는 상태였다. 1970년 이후 남강댐이 조성되면서
침수는 피해왔으나 댐의 수위조절을 위해서 대량 방류할 때에는 마을 침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침수를 막기 위하여 2000년경에 마을 밖으로 둑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 때 만든 둑으로 인해 솥바위는 거의 뭍에 붙게 됐다.
따라서 현재에는 솥바위의 옛날 경관은 찾기 어렵다고 한다.
군북면 월촌
정암철교를 건너오면 군북면 월촌이다
군북면은 당초 대곡, 평관, 산팔, 죽산, 안도, 남산의 6개리로 나뉘어 있는데
1586년 당시 함안군수로 재직한 정구에 의해 대곡리, 평광리, 산족리, 죽산리, 안도리
남산리로 바뀌게 되고 조선후기에 리가 면으로 변하면서 6개리가 모두 면으로 되었다.
1914년3월1일 부군면 폐합시 대곡 · 평광 · 안도 3개면이 덕대리에 터를 잡아
군북면으로 죽산, 남산, 산족 3개면은 죽산동에 터를 잡아 죽남면을 탄생하게 되며
군북면은 7개리를 죽남면으로 10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 후 덕대리가 있던 군북면소가 중암리(현 경로당)로 옮겨지고
1933년1월 죽남면이 군북면에 병합되면서 면소도 현 덕대리 392-2번지로 이전 되었다.
1980년5월22일 월촌출장소가 설치되고
1983년 2월15일 덕촌이 덕촌과 지두, 모로가 모로와 여명, 장지가
남산과 장명, 유현이 유현과 봉덕으로 각각 분동되었으며
1999년 1월15일 월촌출장소가 월촌민원센터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17개리 37개동 120반 92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정암루 아래있는 고목나무
정암루에서 솥바위로 내려가는 곳에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여름엔 시원한 자리를 마련해 근처에 앉아서 굽이굽이 흐르는 남강을 볼수 있겠다
남강(南江)은 유역면적 349.3㎢, 유로 186.3㎞이다.
남강은 서부 경상남도의 동맥으로서 임천(瀶川)·위천(渭川)·양천(梁川)·덕천강(德川江)
빈영천(瀕穎川)·함안천(咸安川) 등의 지류(支流)를 가지고 있다
남강 상류지역의 운봉·산청·함양·생초·안의·서상 등지에 분지를 형성하여 지방 중심지가 발달하고
하류지역에는 진주평야를 비롯한 충적평야가 분포한다.
북쪽에 소백산맥(小白山脈)이 있어 여름에 서남쪽에서 오는 저기압이
이 산맥에 부딪쳐 지형성강우(地形性降雨)가 많다.
宜寧余氏 享祭時到錄 및 始祖祭 壇碑
(의령여씨 향제시도록 및 시조제단비)
정암루 아래에 있는 의령여시 시조제단비 이다
처음엔 홍의장군 과 임진왜란에 관련한 단비인줄 알았는데 옆에 안내문에는
宜寧余氏 享祭時到錄 및 始祖祭 壇碑(의령여씨 향제시도록 및 시조제단비)라
안내글에 있었다.
안내글을 보면 의령여씨 형제시도록은 시조제단비와 비각이 설치된 경위와
제향의 시행 등을 상세히 기록한 고문서로 제향과 관련한 지역별 종회 참여율
소요경비 출자금액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당시 의령여씨 가문의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과 지역경제 상황 등을
살펴 볼 수있는 자료로 현재 의병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이다.
시조제단비는 의령여씨 시조 여선재(余善才)공을 제향하던 제단으로
1807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김한동(金韓東)이 짓고 이의선(李宜瑄)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족보기록 근거로 시조 묘소를 찾기 위해
여러 곳의 장소를 수차례 방문 하였지만 끝내 묘소를 찾지 못하여
족보에 기록된 우음곡을 우무실과 같이 보아 정곡(井谷)으로 비정하고
다시 정곡은 정암으로 추정하여 지금의 정암진 인근 언덕에
제단비를 마련하고 제향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祐) 동상
정암루에서 의령관문으로 가는곳 남강이 훤히 보이는 곳에 동상이 서 있다
백마를 타고 붉은옷을 입은 장군의 모습이 마치 지금도 외놈을 무찔러는듯 하다.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여,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운 의병장으로서
본관은 현풍,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으로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 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祐) 동상
홍의장군은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뜻이며
붉은 옷을 입은 장군라는 뜻의 홍의장군은 의병장 곽재우를 일컫는 별칭이다.
이 별칭은 장군 본인이 직접 지었다. 홍의 장군 네 글자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사례를
영조와 정조 때의 기록은 제외하고, 선조 당시의 기사에서만 찾아 읽어보면
현풍 사람 곽재우는 (중략)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 장군"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려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 없었다.
충의롭고 곧고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원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임기 응변에 능하여 (그의 수하에서는)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수정선조실록> 1592년 6월 1일 기사-
곽재우는 (전국 의병 중) 가장 먼저 (1592년 4월 22일) 군사를 일으켜 (중략)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서,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왜적에게 사로 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 장계 -
정암진 승전도
안내글에는 다음과 같다
서기 1592년 임진년 5월말 왜장 안국사혜경이 왜군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전라도 침공을 위해
그 길목인 정암진을 도하하기 위하여 장군의 의병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 하였는데
장군은 늪지와 절벽으로 된 강 언덕 지형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한
유격전법으로 왜군의 침략을 저지하고 격퇴하여 왜군의 전라도 침입로를 차단 하였으며
그 후 왜군은 다시 정암진을 침입하지 않았다.
이 곳이 의병전 사상 유명한 홍의장군 승전지 정암진 전투였다
정암진 전투는 단순한 왜군 격파 뿐만 아니라 주요 수송로인 낙동강 수로를 차단하고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미리 저지하는 한편 우리군사에게 승리의 자신감을 안겨준
전략적인 큰 의미를 가진 승전 이었다.
곽재우 의병장과 17장군 부조
안내글에 보면 다음과 같다
좌측부터 군관 조사남(曺士男)위관급 장교. 기찰 심기일(沈記一) 헌병장교. 치병 허언심(許彦沈)훈련교관
돌격장 권란(權鸞)특전장교. 선봉장 신대승(沈大承)대대장. 수병장 오운(吳澐) 병력책사
영장 윤탁(尹鐸) 연대장. 곽재우 장군(郭再祐) 의병장. 도총 박사제(朴思齊) 군무총괄책사
수병장 이운장(李雲長) 병력책사. 선봉장 배맹신(裵孟伸) 대대장. 독후장 정연(鄭沇)기무대장
조군 정질(鄭咥)해군장교. 전향 노순(盧錞)군수보급관. 군기 허자대(許子大)무기제조관
복병 안기종(安起宗)정찰대장. 군관 주몽룡(朱夢龍)위관급장교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
의령관문에서 바라본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이다
4월의 따스한 햇살이 동상을 비추고 봄바람에 군깃발이 펄럭 거리고 있다
의령은 입구에서 부터 의병장 홍의장군의 충절이 있는곳이다
의령9경 중 정암루(鼎岩樓)의령 제5경에 속하며
그 옛날 선인들이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던 나루터지만 임진왜란 때는 나루에서
곽재우 장군이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寺 瓊)가 이끈 2천의 왜적을 잠복 끝에 몰살시킨 승전지이다
지금은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되어 이렇게 그 현장을 둘러보고 남강을 바라볼수 있다.
곽재우 동상이 남강을 내려다보고 있고 오래전 의병부대에서 사용했던 의병깃발이 세워져 있어
마치 그날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한 길을 걸어본다.
의령관문에서 바라본 정암루와 정암철교
의령관문 공원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면
남강에 낚싯대를 던지고 싶은 마음도 생각나며 여유로워진 시간에 자신을 보게 된다.
왼쪽으로 자리한 가마솥을 닮은 솥바위는 구한말 한 도인이 솥바위를 보고
반경 30리(12㎞)안에서 3대 부자가 나온다고 예언했는데 삼성과 엘지 효성 등
창업주가 탄생해 전설이 현실화 된 곳이다.
이 때문에 부자전설로 많이 알려진 정곡면 호암 이병철선생 생가는 의령 제9경이며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 세계를 경영한 기업가의 오래전 모습을 보고자
관광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남강(南江) 그리고 방어산(防禦山) 조망
남강이 굽이굽이 흘러내리고 있고 강건너 군북 월촌마을이다
그리고 진주와 군북의 경계에 우뚝 솟은 방어산도 보인다
방어산 8부 능선에는 마애불(보물 제159호)도 있어, 자연·역사·종교를 아우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마애불은 높이 5m가량의 수직 절벽에 선각으로 새긴 삼존불이며
가운데는 약합을 손에 든 높이 2.85m가량의 약사여래불, 그 좌우에는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이 서 있고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라고 하며 월광보살의 팔꿈치 부분에 새겨진 명문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한다.
방어산은 1993년12월16일 함안군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팔각정
팔각정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보고싶었지만 출입금지이다
팔각정 중심으로 주변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비석엔
의령 9경을 소개해 놓았다.
의령 8경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이며 목조와가인 안채와 초가지붕인 사랑채 2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박하고 정갈한 가옥은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원길을 걸어면 의령 9경을 돌비석에 하나 하나 안내글을 새겨 놓았다
忠翼公紅衣將軍 戰積紀念碑(충익공홍의장군전적기념비)
곽재우 장군은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 솥바위 나루)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수십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다.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계획한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쳤다.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접근을 막았다.
의령9경 안내 돌비석
9경 안내 돌비석에 쓰인 글을 읽어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해본다
제6경은 탑바위 인데 의령읍에서 동쪽으로 10km떨어진 정곡면 죽전리 남강변에 있다
깍아지는 벼랑위에 남강을 바라보고 기암괴석의 탑바위이다
퇴근길에 들여 작품사진도 촬영해보고 소망도 빌어보자
오늘 봄바람은 봄바람난 봄처녀를 시셈하듯 강풍이 불었다
의령 정암루(宜寧 鼎巖樓)& 솥바위.정암진(鼎巖津)전투의 전승지 정암루에서 남강을 보다
초등학교 시절 단체관람했던 홍의장군 영화가 생각났다
왜군들이 조총쏘자 솥뚜껑으로 총알 방패를 하던 모습
지금 생각하면 기발한 아이디어 같았다.
이렇게 정암진(鼎巖津)얽힌 홍의장군 전승 이야기 그리고 솥바위(鼎巖)의 부자전설 이야기
남강이 흘러가는 것처럼 세월따라 나역시 흘러가고 있었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의령군 함안군 홈페이지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사전 ,민족문화대사전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및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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