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늑대 FORCE

진주 봉대산(晉州 鳳臺山).봉황이 살았다는 낙남정맥 구간 봉대산을 걷다 본문

바다늑대/山 & 旅行

진주 봉대산(晉州 鳳臺山).봉황이 살았다는 낙남정맥 구간 봉대산을 걷다

바다늑대FORCE 2020. 2. 21. 16:43

진주 봉대산(晉州 鳳臺山)

 봉황이 살았다는 낙남정맥 구간 봉대산을 걷다.


진주 봉대산(晉州 鳳臺山)

   높이 : 409m

   위치 : 진주시 금곡면 과 사천 정동면 고성 영현면에 걸쳐있는산


▲ 나의 산행일 : 2020년02월21일 금요일. 날씨 : 맑음


▲ 나의산행코스 :

   진주 금곡 남악서원→→죽곡다리→→독립가옥→→임도→→묘지→→낙남정맥→→객숙치→→봉대산

   →→공터→→낙남정맥→→죽곡마을

   8.5km  3시간20분소요


▲ 봉대산 개요:

해발 409m의 낙남정맥의 중간에 위치한 봉대산은 진주시와

사천시, 고성군의 3개 시.군에 걸쳐있으며

진주시 금곡면의 주봉(主峰)이기도 하며 금곡면 죽곡리에  위치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죽곡에는 옛날에 큰 대나무밭이 있었는데
그 대밭에는 봉황새 한마리가 살고 있었다 한다.
어느날 큰 홍수가 나자 봉황새가 봉대산 꼭대기로 날아가 앉았는데 나중에 물이 빠지고
난 자리에는 대밭도 없어지고 깊은 골짜기가 생겨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사람들이 대나무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죽곡이라 하고 봉황새가 날아와
앉은 산이라 하여 봉대산이라 부른다.


▲ 봉대산 등산지도




진주 봉대산 찾아가는길

진주역→→→남해고속도로 진주jc→→→통영대전고속도로연화산 TG →→→월아산로→→→금곡면죽곡길

→→→금곡면 남악서원 주차장

23km 승용차 20분 소요.



→→→→→2020년 02월21일 금요일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찾아 길을 나선다

산길을 접어 들때에 휴대폰에 재난문자가 갑자기 날아들었다

코로나바이러스19가 경남 합천까지 뚫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코로나19 경남 확진환자 4명이 발생했다 하며
합천에 거주하는 96년생 남성(1번 환자)과 48년생 여성(2번 환자) 등 2명과
진주에 거주하는 2001년생(3번 환자)과 2006년(4번 환자) 형제 등 모두 4명이
코로나 19 확진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경남도는 아직 확진환자의 번호를 부여하지 않아 일단 확진자 4명을 ‘경남 1~4번째 확진자’로 통칭했다.
경남 1,2번 확진환자는 국가지정 입원치료병상기관인 진주 경상대병원 음압병동에, 3~4번 확진환자는
지역거점 입원치료 병상기관인 마산의료원 음압병동에서 각각 격리치료중이다.
경남도는 확진환자들의 건강상태는 양호하다고 라는 언론과 보건소 도청에서 연이어 문자가 날아왔다.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한 감염지역은 뒤숭숭하다 그렇지만 건강을 위하여
1000산 도전을 위하여 오늘도 산을 찾아본다.

진주시 금곡면 죽곡마을

낙남정맥 봉대산 들머리가 있는 죽곡마을이며 진주 금곡면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조 전기까지 진주목(晋州牧) 남면(南面) 송곡리(松谷里), 인담리(麟淡里), 금동어리(金冬於里)

성을산리(省乙山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금동어리(金冬於里) 는 송곡리(松谷里)에 합했다가 인조 1년(1623년)에 다시 나누었다.

순조 32년(1832년)에는 인담리(麟淡里)를 성을산리(省乙山里)에 합하여 송곡리(松谷里)

금동어리(金冬於里), 성산리(省山里)라 하다가 고종1년(1864년) 이후

구한말 때까지는 송곡면(松谷面) 금동어면(金冬於面), 성산면(省山面)이라 하였다.

1914년 3월 1일, 진주군(晉州君) 송곡면(松谷面), 금동어면(金冬於面)

성을산면(省乙山面) 등을 통폐합하여 금곡면(金谷面)이라 하였다.

그리고 송곡면(松谷面) 정자동(亭子洞), 홍정동(鴻亭洞), 이곡면(耳谷面) 이곡동(耳谷洞)

성을산면(省乙山面) 하인담동(下仁潭洞), 금동어면(金冬於面) 검암동(儉岩洞)각 일부로서 정자리(亭子里)라 하고

송곡면(松谷面) 일부로서 송곡리(松谷里)라 하고, 송곡면(松谷面) 송곡동(松谷洞), 홍정동(鴻亭洞)

금동어면(金冬於面) 검암동(儉岩洞), 가토동(佳吐洞), 각 일부로서 검암리(儉岩里)라 하고

금동어면(金冬於面) 우봉동(牛峰洞), 가토동(佳吐洞), 검암동(儉岩洞) 각 일부로서 가봉리(佳峰里)라 하고

성을산면(省乙山面) 상인담동(上仁覃洞), 하인담동(下仁覃洞), 송곡면(松谷面) 홍정동(鴻亭洞)

금동어면(金冬於面) 검암동(儉岩洞) 각 일부로서 인담리(仁覃里)라 하고, 성을산면(省乙山面)

동례동(東禮洞), 신대동(申大洞), 두문동(斗文洞), 금동어면(金冬於面) 검암동(儉岩洞) 각 일부로서

동례리(東禮里)라 하고, 성을산면(省乙山面) 두문동(斗文洞), 석계동(石界洞), 성산동(省山동)

신대동(申大洞), 고성군(固城郡) 오읍곡면(吾邑谷面) 동동(東洞), 서동(西洞) 각 일부로서 두문리(斗文里)라 하고

성지산면(省之山面) 장지동(長芝洞), 죽곡동(죽곡동) 성산동(省山洞) 각 일부로서 죽곡리(竹谷里)라 하고

성을산면(省乙山面) 성산동(省山洞), 덕계동(德溪洞) 각 일부로서 성산리(省山里)라 하여

법정리 9리(里)에 행정리 21개리(里)를 다음과 같이 명명

[검암리(儉巖)에 엄정(儉巖), 운문(雲門), 차현(車峴), 신담(新潭), 가봉리(佳峰)에 가봉(佳峰), 우봉(牛峰)

송곡리(松谷)에 송곡(松谷), 정자리(亭子)에 정자(亭子), 홍정(鴻亭), 시평(枾坪), 인담리(仁潭)에 인담(仁潭)

상인담(上仁潭), 동례리(東禮)에 동례(東禮), 신대(申大), 두문리(斗文)에 두문(斗文), 세경(洗鏡)

석계(石界), 죽곡리(竹谷)에 장재(長財), 죽곡(竹谷), 성산리(省山)에 성산(省山), 덕계(德溪)] 하였으며

1939년 10월 1일 진주군이 진주시와 진양군으로 분리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진양군과 진주시가 도농복합형의 진주시 금곡면으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악서원(南岳書院)

죽곡마을에는 문화재자료 제12호로서 진주시 금곡면 죽곡길102에 위치하고 있다

대문에 굳게 닫혀 있어서 내부 관람은 하지 못했다.

남악서원(南岳書院)은 1919년 개국공(開國公) 김유신(金庾信)의 사당이 있었던 곳에 지방 유림들이 중건한 서원이다.

남악서원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설만 전해지지만 서원으로 승원하면서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의 사례에 따라서

유학자인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과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을 함께 제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의 명칭은 동일한 인물들을 제향하고 있던 서악서원을 본 딴 것이며

시습당(時習堂)·도남문(道南門) 등의 건물 명칭도 유사하다.

1983년 7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전설에는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전략상 요지를 찾아다니다가

현재의 남악서원 자리에서 신령을 만나 삼국통일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남악서원의 기원은 680년경에 세워진 김유신의 사당에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서원으로 완성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남악서원(南岳書院)

남악서원(南岳書院)은 건물들은 사당·서원·솟을대문이 남북의 축상에 놓여 있고

서원 좌우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동·서재가 각각 마주 보고 있는

口자형 좌우대칭 배치의 전학후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솟을대문인 도남문을 지나면 정면에 강당이 위치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오량가구(五樑架構) 팔작지붕으로 대청이 없고

툇마루가 확장되어 대청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강당의 서편 협실은 봉양재(鳳陽齋)이며, 강당의 정면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는 편액이 없지만 서재는 시습당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강당 뒤편 돌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인 내사문(內祠門)이 있다.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남악사(南岳祠)가 있는데

김유신·설총·최치원의 위패와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있다.

남악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3량 구조 팔작지붕이며, 전퇴간(前退間)이 없다.

향사일은 매년 음력 3월 18일이다.

남악서원이 중수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이미 그 이전부터 김유신의 내력이 전해오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한국의 여러 위인들이 사당에 함께 모셔져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유래가 깊은 서원이라 볼 수 있다.


죽곡리(竹谷里)죽곡마을에서의 들머리 찾기

남악서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서 맞은편 큰도로를 나오면 오른쪽으로 죽곡다리를 건너서

오른편으로 가면 산으로 가는  좌측농로를 이용한다.

독립가옥 주택이 보이는 곳으로 가면 봉대산 가는 임도와 만난다

이정표나 산행자들의 깃표가 전혀없기 때문에 들머리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다.

죽곡은 1914년, 진주군 성을산면 장지동(省乙山面長芝洞)·죽곡동(竹谷洞)·성산동(省山洞)

일부로서 죽곡리(竹谷里)라 하였다 한다.


임도 갈림길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단감나무 과수원이 나오고

좌측으로 가면 봉대산 가는 임도가 끝없이 펼쳐진다

만약에 과수원길로 올라갔다면 끝까지 올라가야 한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과수원 울타리 개구멍이 보인다

개구멍을 지나면 묘지가 나오는데 묘지옆 임도와 만난다.

일반적으로 봉대산을 찾는 산행자는 드물지만 낙남정맥 종주하는 산꾼은

필히 봉대산을 거치기 때문에 정맥산꾼들에게 많이 알려진 산행지 이기도 하다.


시멘트임도 따라

죽곡마을에서 봉대산 산행로는 임도 뿐이다

단감과수원가는 시멘트 포장도로 좌측에 잇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오면

묘지가 있는데 이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야 한다.

봉대산은 낙남정맥(洛南正脈)의 한 구간으로서은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지리산의 영신봉(靈神峰)에서 김해 분성산(盆城山)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이며 오늘날에는 동신어산을 기점으로 한다.


 

임도에서 바라본 봉대산

낙남정맥 능선을 따라 봉대산 정상까지 가야한다 아래서 보니 길이 까마득 하다

낙남정맥은 조선시대 조상들이 인식하던 한반도의 산줄기체계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정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이들 맥은

10대강의 유역을 가름하는 분수산맥을 기본으로 삼고 있어 대부분의 산맥 이름이 강 이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낙남정맥은 낙동강 남쪽에 위치한 정맥으로,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끝나는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남강의 진주와 남쪽의 하동·사천 사이로 이어져

동쪽으로 마산 창원 등지의 높이 300∼800m의 높고 낮은 산으로 연결되어 김해의 분성산(360m)에서 끝난다.

서쪽에서는 섬진강 하류와 남강 상류를 가르고, 동쪽에서는 낙동강 남쪽의 분수령산맥이 된다.

연결되는 산은 옥녀산(玉女山, 614m)·천금산(千金山)·무량산(無量山, 579m)·여항산(餘航山, 744m)

광로산(匡盧山, 720m)·구룡산(九龍山, 434m)·불모산(佛母山, 802m) 등으로 그 길이는 약 200km이다.


봉대산가는 임도

시멘트 포장도로가 끝이나니 넓다란 임도가 나타나는데 임도를 개척한지

얼마되지 않은듯 비포장이고 여기저기 흙이 신선해 보였다

임도를 따라가다보면 가족묘지가 나오면 넓다란 임도는 끝이난다.

임도 주변은 솔나무 숲으로 이뤄져 있으며 폭신한 흙이 느낌이 너무 좋았다

아마도 비라도 내린다면 진흙구덩이가 되어 발이 빠지겠지만

흙으로된 길을 걸어니 새마을 운동 하기전 마을도로 같은 느낌이라 좋았다.


갈림길

넓다란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으로 빠지지 말고 무조건 직진해야 한다.

여기서 부터는 오솔길 산행로이며 울창한숲과 바닥엔 낙엽이 가득 쌓여 있어 미끄럼에 주의해야 한다

봉대산은 낙남정맥이 지나가는 곳으로 진주시 지도를 보면 최남단 정점에

진주배(晉州船)처럼 달여 있는 산이 바로 봉대산(鳳臺山)이다

봉대산은 고성경계를 파고 들어간 형태이며  고성구간도 낙남정맥이 지나간다.


산족제비고사리

겨울산에 오르면 늘 푸르게 볼수있는것이 산족제비 고사리이다.

전국적으로 분포한다상록성 다년초로 온대성 양치식물이다.

엽병은 엽축과 더불어 비늘조각이 밀생한다.

비늘조각은 흑색 또는 연한 갈색이며 막질로서 밑부분이 넓어진다.

엽신은 난상 타원형으로서 점차 좁아져서 끝이 뾰족하며 짙은 녹색을 나타낸다.

깃조각은 긴 타원상 피침형이며 비스듬히 위를 향하고 밑부분에는 대가 긴 것도 있다.

우축에 달린 비늘조각의 밑부분은 주머니처럼 부풀며

잔깃조각 뒷면 주맥에 달린 비늘조각은 거의 둥글고 주머니같다.

잔깃조각은 우상으로 얕게 또는 깊게 갈라지며 열편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약간 뒤로 말린다.

음지에서 재배하며 토양은 물빠짐이 좋은 사질토양에 부엽을 충분히 섞어 사용하고

배수성과 통기성을 좋게 하는 것이 좋다.

중부지방에서 겨울철 산행시에 계곡의 낙엽수림하에서

상록으로 볼 수 있는 양치식물은 족제비고사리가 대부분이다.


좁아진 산행길

봉대산으로 가는 산행로가 더 좁아졌다 옛어른들이 지게 짊어지고 땔감 나무하러가던 길 같다

금곡에 있는 봉대산은 봉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진주에는 예전부터 봉황이 많이 살았나 보다

진주 비봉산 전설도 봉황전설의 맥락이다

그러나 진주 비봉산은 무학대사 조선창건에 방해되는 인물이 나올것 같다하여

봉대산(鳳臺山)을 비봉산(悲鳳山)으로 바꿔서 봉황이 날아가버리게 했고 봉지(鳳池)를

가매못에 봉을 쌂는다는 뜻으로 가매못으로 이름을 바꾸어 봉황새가 접근도 못하게 한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비봉산도 금곡 대봉산 처럼 원래는 대봉산 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낙남정맥을 만나다

낙남정맥 안내표지목은 밑둥이 썩어서 넘어져 있었다

인증촬영을 위해 세워서 찍고 인근 나무에 기대어 놓았다.

낙남정맥 산행자들은 구간 들머리인 부련이재 부터 많이 시작한다

진주와 고성 그리고 사천시를 지나는 낙남정맥 봉대산 일반적 들머리는

진주 금곡면 죽곡마을에서 시작을 많이 하지만

들머리 안내판이 없어 나 역시 들머리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산성터(山城터)

산성터 인가 아니면 에전 사람이 살던 주거지 터인가 모르겠지만 돌로 차곡차곡 쌓은 모습이

담장이나 산성터 같이 보였다.그러나 봉대산 산성에 대한 사료는 없다.

봉대산 낙남정맥 능선을 걸을때 빼곡한 숲으로 인하여 조망은 나오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만 걸어갔다

아마 여름철 수목이 울창한 시기에 오면 산행로도 잘 보이지도 않겠다

능선에 오르니 참나무 솔나무 그리고 능쿨등 잡목들이 울창하였다.


돌기둥

산성터옆을 지나면 골짜기에 이처럼 기동모양 암봉이 서 있다

누가 인위적으로 세워둔듯 망부석처럼 지나가는 산행자를 지켜주는듯 하다.

봉대산 산행은 계리재 들머리에서도 산행할수 있다

진주시 문산면과 정촌면을 연결하는 3번군도로 옛날에 이곳에 닭과 살쾡이가

주변에 많아서 鷄(닭계)狸(삵리)재라 했다.

아마도 양계농업을 많이 하다보니

당연이 농가 닭을 노리는 삵괭이들이 많을수 밖에 없으르 것이다.

오늘날  진주시와 사천시를 경계를 두고 봉두산까지 정맥산군들의

주 탐방코스라 생각하면 된다.


생강나무 꽃

어느듯 봄이 왔나 보다 이렇게 노랗게 생각나무 꽃이 피었다

온통 잿빛의 삭막한 겨울 숲도 들판에 완연한 봄이 찾아오면

긴 겨우살이를 털고 새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인간 세계에 선각자가 있듯이 나무나라에도 봄이 오고 있음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생강나무라는 초능력 나무가 있다.

예민한 ‘온도감지 센서’를 꽃눈에 갖추고 있어서다.

생강나무는 숲속의 다른 나무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날 꿈도 안 꾸는 이른 봄

가장 먼저 샛노란 꽃을 피워 새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숲속에서 자연 상태로 자라는 나무 중에 제일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나무가 바로 생강나무다.

가느다란 잿빛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꽃들이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점점이 박혀 있는 화사한 꽃 모양은 ‘봄의 전령’이라는 그의 품위 유지에 부족함이 없다.
생강나무는 지름이 한 뼘에 이를 정도로 제법 큰 나무로 자라기도 하지만

우리가 산에서 흔히 만나는 나무는 팔목 굵기에 사람 키를 약간 넘기는 정도의 자그마한 것이 대부분이다.

인가 근처의 야산에서는 2월 말쯤에, 좀 깊은 산에서는 3~4월에 걸쳐 꽃을 피운다.

한번 피기 시작한 꽃은 거의 한 달에 걸쳐 피어 있으므로

나중에는 진달래와 섞여 숲의 봄날을 달구는 데 한몫을 한다.


낙남정맥 능선을 걸어면서

진주 금곡 죽곡마을부터 시작한 산행은 제법 코스가 길다

산행자들이 많이 찾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칡능쿨등이 얽혀서 정글도를 꺼내서 걸었다

죽곡마을엔 남악서원이 있는데 김유신 삼국통일과 관련이 있는 서원이다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전략상 중요한 지역을 찾아다니다가

이곳 금산(金山)아래 진(陳)을 치고 휴식을 하던중 꿈결에 신령이 나타나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라 한다.


능쿨을 뚫고 산길을 지나며

산행 시간이 지날수록 산속은 더 깊어지기에 탐방로에는 잡목과 능쿨로 인하여

앞으로 진입하기에도 곤란하였다

낙남정맥 산행자들은 여름에 이길을 어케 알고 지나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정 산꾼이기에 보이지도 않는 산길을 전문가 이기에 조난되지 않고 가는 것일것이다

아마 여름철에 왔다면 개고생 할뻔한 봉대산 가는 길이다.


객방(客坊)저수지 조망

제법 높게 올라왔나 보다 주위 조망이 보이기 시작 했다

저멀리 사천시 정동면 객방저수지가 보였다

사천시 정동면은 조선 초기까지 사천현의 읍기인 치소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상주내면과 동면을 사천읍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읍동면이라 하였고

그후 행정구역 명칭 변경시 정동면이라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객방(客坊)옛날에 철을 캐던 야철지로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취락을 이루어 살았다하여

손님 客자를 넣어 객방이라 불렀다 한다.


객숙재(낙남정맥 부련이재2.67km) 

일명 객숙치(客宿峙)라고도 한다.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대실 남쪽에서 사천시 정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쉽게 이야기 하자면 소곡리 방면에서 객방골을 올라와 금곡 죽곡리로 이어주는 고개이다

산세는 험하지 않고 낮지만 옛날에 골이 하도 깊고 멀어서

손님이 고개를 넘으려면 자고 넘었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이 골을 객숙골이라고도 한다

사천시 정동면은 조선 초기까지 사천현의 읍기인 치소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상주내면과

동면을 사천읍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읍동면이라 하였고

후 행정구역 명칭 변경시 정동면이라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상가는 목계단

봉대산 정상이 가까워 졌나 보다 이젠 산이랑 하늘이 맞닿아 있다

정상가는 목계단이 가파르게 펼쳐졌다

여기까지 두번아니 오르내림이 있었다 정말 정상가는 길이 멀었다

지루하긴 하지만 산길을 걷는게  다 이른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상가는 목계단이 낙옆과 능쿨로 덮혀있다

정말 정맥종주 산꾼이 아니면 이 산행길을 어찌 찾아오겟는가

진주하면 월아산이요 산책길은 비봉산에서 산학산인데 이름조차도 알수없는 봉대산이다.


봉대산(鳳臺山)409m

마치 정글을 뚫고 정산을 올라온 기분이다

정상에는 많은 지맥산꾼들의 흔적인 깃표들이 단풍잎 처럼 붙어있다

봉황새가 여기 정상에서 살았는가 싶을 정도다.

산아래 죽곡은 봉황이 대나무 열매를 먹고살기에

대나무가 많아서 죽곡마을이라고 한다

봉대산 초입구간 임도주변에 대나무가 많이 보이긴 하였다.

죽곡마을은 근래에 들어와서는 삼베마을로 더 유명한곳이다


봉대산(鳳臺山)409m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의 해발 409m인 봉대산은 진양, 사천, 고성 3개 군을 포옹하여 웅장하게 솟은 명산이다.

죽곡에 위치하였으나 이 산은 금곡면의 주봉이며 전설도 많다.

죽곡에는 옛날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면 그 대밭에는 봉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한다.

그 후 천지개벽이 있자 봉은 봉대산 꼭대기로 날아가 앉았다.

그 후 물이 빠진 자리에는 대나무도 없어지고 깊은 골짜기가 이루어져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봉이 앉아있는 밑이라는 뜻에서 여기를 봉하죽임이라 불렀다 한다.

그 이후 대나무가 있는 골이라는 뜻에서 죽곡으로 불리어 오늘에 이른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대나무가 있다. 등로에서 6m 정도 벗어나 표지석이 있으며 사천시와 진주를 경계하고 있다.


봉대산(鳳臺山)409m

봉대산 산정의 정상표지석은 사천시에서 2010년11월에 세웠고 낙남정맥 봉대산이라 되어있다

봉황이 살았다는 봉대산 정상에서 두손모아 나만의 기원(祈願)해본다

봉황(鳳凰)새는 어떤새 일까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로 기린·거북·용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여겼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그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五色)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악집도(樂汁圖)』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동물로 봉황의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주서(周書)』에는 봉의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다.

이처럼 봉황의 모양은 한결같지 않다.

그러나 상서롭고 아름다운 상상의 새로 인식된 것만은 확실하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四海)의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한다.

그래서 봉황은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천자가 거주하는 궁궐문에 봉황의 무늬를 장식하고 그 궁궐을 봉궐(鳳闕)이라고 했으며

천자가 타는 수레를 봉연(鳳輦)·봉여(鳳輿)·봉거(鳳車)라고 불렀다.

중국에서 천자가 도읍한 장안(長安)을 봉성(鳳城)이라 하였고 궁중의 연못을 봉지(鳳池)라고 불렀다.

이처럼 봉황이 천자의 상징이 된 까닭은 봉황이 항상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 나타난다고 믿어

천자 스스로가 성군(聖君)임을 표방한 데 연유한다.

한유(韓愈)의 「송하견서(送何堅序)」에서는 “내가 듣기로 새 중에 봉이라는 것이 있는데

항상 도(道)가 있는 나라에 출현한다(吾聞鳥有鳳者 恒出於有道之國).”라고 했다.


대야곡소류지 조망

사천시 정동면 감곡골에 있는 소류지이다

감곡(甘谷)마을의 유래는 감(甘)자는 달다라는 뜻이 아니라

"크다"라는 뜻인데 대곡처럼 큰골짜기라는 뜻이다.

산에 올라 이렇게 발아래 펼쳐진 조망을 본다는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수채화처럼 골짜기의 동네와 바둑판처럼 논밭들이 마음을 풍요하게 만든다

우리가 자라고 뛰어놀던 유년기 시절의 풍경이다

어느듯 지천명(知天命)후반을 달리는 나이에 세월이 순식간임을 느낀다.


죽곡마을(竹谷)

하산길에 죽곡마을을 촬영해보았다

봉황새 먹이인 대나무 열매 이기에 죽곡마을엔 대나무숲이 많다

대나무 열매는 꽃이 피야 열매가 열리는데 옛날 어르신들은 대나무꽃이 피면

대나무가 죽는다고 하였고 유년기 시절에 말라죽은 대나무도 보았다

죽곡마을은 낙남정맥 표시판에는 삼베마을로 표기해 놓았는데

근래에 삼베로 더 알려진 마을이라고 한다.

봉황새가 산다고 생각하여 봉산(鳳山)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었는데

진주의 비봉산과 금곡의 봉대산이 그렇다

전설에 따르면 봉황새는 오동나무에 깃들고, 성질이 고결하여 굶주려도 좁쌀은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竹實]를 먹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는 오동나무를 심고 강가에는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마늘밭과 마을 할머니들

하산길에 마을 논에서 마늘밭 김메는 할머니들을 보았다

요즘 농촌들녁은 젊은 아낙네는 없고 60세 후반은 젊은청에 속한다.

우리 유년기 시절엔 마늘보다 보리를 많이 심었다

우리들 어머니들은 이렇게 농촌에서 힘든줄 모르고 농사지어 자식들 공부 다 시켰다.

이렇게 나이 들어서 자식을 키우니 부모님 고된마음 알수있으니

세월은 부모에게 효도할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죽곡마을회관앞 진주시관광안내도

마을회관이 관공서 같이 큼직한게 이색적이다

긴 발걸음으로 낙낙정맥 봉황이 살았다는 봉대산을 걸어보았다.


이렇게 해서 근교산 정상표지석하나 담아 보고 산행을 마무리한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근교산&저너머(국제신문), 명산플러스(경남일보),진주시,사천시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CE[2020.02.2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