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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용추사(咸陽 龍湫寺) 新羅향이 가득 있는 함양 용추사에 가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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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용추사(咸陽 龍湫寺) 新羅향이 가득 있는 함양 용추사에 가다

바다늑대FORCE 2019. 7. 29. 08:27

함양 용추사(咸陽 龍湫寺)

   新羅향이 가득 있는 함양 용추사에 가다

▣ 함양 용추사(咸陽 龍湫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덕유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각연이 창건한 사찰

   위치 :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962

   전화 : 055-962-4638


▣ 사찰기행일 : 2019년7월28일 일요일. 날씨: 흐림 가끔비


▣ 용추사 개요 :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에 각연(覺然)이 창건하였고, 고려 말 무학(無學)이 중수한 뒤 은거하여 수행하였다.

그 뒤 1681년(숙종 7)에 운흡(雲洽)과 전 주지 수오(秀悟) 등이 합심하여 절을 아래쪽으로 이전하였고

1684년에는 문찬(文贊)이 법당을 지었으며

다음해에는 문감(文鑑)이 소상(塑像)을 이룩하고 사주 이영생(李英生)이 시왕상(十王像)을 조각하였다.

또, 1686년에는 김상운(金尙雲)이 누각을 지었고

다음해 지찰(智察)이 팔상전과 팔상탱화를 조성하였으며, 천왕문과 요사채를 이룩하였다.

1734년(영조 10)에는 실화로 인하여 대웅전과 서상실(西上室)·향각(香閣) 등이 타버렸는데

호경(護敬)을 중심으로 두인(斗仁)·영우(靈祐)·삼준(三俊)·광연(廣衍) 등이 합심하여

같은 해에 불탄 전각을 모두 중건하였다.

또, 『법화경』 등 100여 권을 찍어 두개의 목함 속에 잘 장식하여 보관하였다.

산내암자로는 동쪽에 도솔암, 서쪽에 백련암이 있고

북쪽으로는 용추암·서흥암·원적암·견성암·영악암·보제암·천진암·무주암 등의 유허지가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된 일주문이 있다.

 

▣ 사찰기행 가는길 :

 진주IC삼거리→→→남해고속도로 진주JC→→→통영대전간고속도로→→→지곡TG

 →→→거함대로→→→용추계곡로→→→용추사주차장

86.1KM  승용차 1시간10분소요


→→→→→사찰기행시작

산에 오르면 사찰이 있고 사찰에 가면 산이 있다.

날씨가 쨍쨍 하였다가 비가 내리다가 남부지방엔 장마가 끝이라는데

도무지 날씨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15시경 가족들이랑 함양 용추사와 용추계곡으로 길을 나섰다.

용추사인근에 들어서자 피서객 차량으로 도로와 주차장은 빼곡하였다

다행이 주차할곳 하나 있어 주차를 하고서 내리자 갑자기 비가 쏫아졌다

흐린날씨 무덥덥 했지만 한줄기 소나기가 시원함을 주었다.


德裕山長水寺曺溪門(덕유산장수사조계문)

장수사 절터로서 일주문만 남았는 상태이다

487년(신라 소지왕9년) 각연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장수사가 있었다.

장수사는 신라시대의 원효와 의상을 비롯해 조선시대 무학, 서산 등 여러 고승이

수도한 이름있는 절이였고 용추사는 원래 장수사에 딸린 작은 암자였다

그런대 6.25전란 때 장수사가 일주문만 남고 타 버리자 1959년에 중건하면서 이름을 용추사로 바꾸었다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이라고 쓰여있는 일주문 현판만이 장수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이 일주문은 1702년(숙종28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의 일주문이 그렇게 크지 않은 보통의 맞배지붕으로 만들어진대 비해

이 일주문은 화려한 다포계 팔작지붕의 양식을 하고있는 점이 특이하다.

기둥간격 4m, 직경 1.2m가 넘는 튼튼한 기둥에 떠 바쳐진 일주문은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의 지붕때문에 기둥이 오히려 작아 보인다

혀를 말아 올린듯이 길게 뻗어나간 장식들은 기둥위에서 구름과 연꽃으로 피어 오르고

기둥 머리의 봉황조각은 길게 돌출된 서까래와 함께 처마선을 타고 올라

천상세계가 바로 여기라고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德裕山長水寺曺溪門(덕유산장수사조계문)

옛 장수사(長水寺) 터

장수사는 지금으로 부터 1500여년 전인 신라(新羅) 소지왕(炤智王) 9년(서기487년)에

각연조사(覺然祖師)에 의해 창건(創建)된 고찰(古刹)로서

지리산과 덕유산에 산재한  많은 사찰 말사(末寺)로 거느렸으며

이 곳 심진동(㝷眞洞) 계곡에만에도

열개가 넘는 암자를 둔 대찰로서 계곡 어디에서나 낭랑한 염불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한다.

장수사 경내에는 대웅전 산신각 천왕문 명부전 서신당 동신당 사천왕문 일주문 등으로

그 규모가 해인사에 버금갈 정도 였다고 하며 이곳에 기거하는 승려만 해도

항상 이백여명에 달했다 한다.

그러나 강희 19년(1680)에 첫번째 화재를 입은후 2번의 화(화)를 더 입었으나

그때마다 모구 합심하여 복원을 하였으나 아쉽게도 6,35전란때 장수사는 물론

계곡마다 즐비했던 암자들은 소실 되었고 일주문만이 현존되고 있으며

용추암을 복원하여 용추사로 불리우고 있다.


용추사 초석

장수사 예터에서 좌측 계곡따라 길이 있으며 용추사가는 길이다

용추사는 세 곳의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곳이라 하여

‘안의 삼동’이라 불리는 함양과 거창의 경계인 안의면에 있다.

이곳 기백산의 비경을 자랑하는 용추계곡의 용추폭포 바로 위에 용추사가 자리 잡고 있다.

용추계곡 입구에 들어서면 심진동의 진수라 불리는 유학자 돈암 정지영이

노닐던 곳에 세운 수수하고 고풍스런 정자인 심원정이 있다.

심원정에서 계곡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오르면 장수사 조계문이 외롭게 솟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수사 조계문을 뒤로 하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용추사에 들어서기 직전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떨어지는 용추폭포를 만날 수 있다.

폭포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오르막길을 오르면 용추사가 자리하고 있다.


용추폭포(龍湫瀑布)

비오는날 용추폭포의 우렁찬 물소리와 비와 폭포수가 함께 비옷을 험벅 적시게 만든다

물은 발이 시리도록 차갑다 소나기는 오지만 비옷입은탓에 덥덥함은 여름 날씨 참맛이다

용추폭포물에 발 한번 담구고 차가운 기운이 시원함을 전해 주었다.

용추폭포는 높이 5m 정도의 작은 폭포이지만 수량은 많은 편이다.

여기에 흐르는 물의 맑기가 구슬같이 흰 바위들과 어울려 뭍이 흐른다기 보다는 바위가 흐른다는 느낌을 준다.

이 기암괴석을 이름하여 와룡추라 하듯이 흡사 하늘에서 내려 온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이다.

지금도 가끔씩 용녀가 내려와 목욕을 한다고 믿어지고 있을 정도이니 그 신비스런 경관을 상상할 수 있다.

이곳을 옥계동이라 부르며 용추폭포로 시작하여 아홉군데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니

이를 옥계구곡이라 부르는데 다음과 같다.
①와룡추 ②무송암 ③탁령뇌 ④고실탄 ⑤일사대 ⑥추월담 ⑦청풍협 ⑧귀유연 ⑨농완계
용추폭포는 가평읍에서 북서쪽으로 계곡을 따라 6km쯤 올라간 곳에 위치하며

폭포가 있는 주차장(조옥동)에서 북서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장장 10km가 넘는 계곡이 올라갈수록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한다.

특히 입구에서 30분쯤 올라간 지점의 크게 휘어져 들어간 굽이가 아름답다.

암벽과 능선을 바짝 끼고 굽이쳐 흐르는 물살이 보기 좋고 자연 풀장을 이룬 탕이 지나가는 사람을 부른다.

이후로도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정경이 각각 특이한 멋을 나타내고 있고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호젓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용추사 초석

용추폭포로 내려가는 길 건너편에 용추사의 초석이 사찰의 수호신 처럼 서 있다

용추사 가는길동안에는 소나기가 제법 내렸다

용추사 앞에서는 용추폭포의 우렁찬 폭포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에 저절로 진리삼매에 빠져드는 이곳에 신라 소지왕 9년(487)에 

각연대사(覺然大師)가 장수사와 4대 부속 암자를 세웠다.

옛 불심의 흔적들은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유일하게 용추사만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용추사는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닫기 직전 덕유산에서 동남 방향으로

월봉산을 넘어 용추폭포를 사이에 두고 뻗어 내린 기백산과 거망산 줄기를 마주하고 안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인근 영각사(靈覺寺)에 화엄경판을 봉안했던 설파당 상언대사(雪坡大師)의 비문에

 “33세에 용추 판전에서 강좌에 올랐다”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옛 장수사 못지않은 용추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용추사 대웅전의 전경

소나기가 내리는 날씨 이지만 비에젖은 용추사 경내가 평화롭기만 하고

마을 당산나무처럼 느티나무 또한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용추사는

신라시대에 각연(覺然)이 창건하였고, 고려 말 무학(無學)이 중수한 뒤 은거하여 수행하였다.

그 뒤 1681년(숙종 7)에 운흡(雲洽)과 전 주지 수오(秀悟) 등이 합심하여 절을 아래쪽으로 이전하였고

1684년에는 문찬(文贊)이 법당을 지었으며, 다음해에는 문감(文鑑)이 소상(塑像)을 이룩하고

사주 이영생(李英生)이 시왕상(十王像)을 조각하였다.

또, 1686년에는 김상운(金尙雲)이 누각을 지었고, 다음해 지찰(智察)이 팔상전과 팔상탱화를 조성하였으며

천왕문과 요사채를 이룩하였고 1734년(영조 10)에는 실화로 인하여 대웅전과

서상실(西上室)·향각(香閣) 등이 타버렸는데

호경(護敬)을 중심으로 두인(斗仁)·영우(靈祐)·삼준(三俊)·광연(廣衍) 등이 합심하여

같은 해에 불탄 전각을 모두 중건하였다.

또, 『법화경』 등 100여 권을 찍어 두개의 목함 속에 잘 장식하여 보관하였다.



용추사 대웅전(龍湫寺 大雄殿) 

대웅전 편액 좌우로 용머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대웅전 편액은 누가 쓴글인지는

알수가 없다 그냥 편액은 대웅전(大雄殿) 이라고만 판각되어 있다.

건물형식은 팔작지붕에 정면3칸이고 측면 또한 3칸이다

그리고 대웅전은 보통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도 하며 항상 사찰의 중심에 있다.

대웅전에는 사바세계의 교주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에 두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脇侍)로 봉안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할 때는 주불로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시며

각 여래상의 좌우에는 제각기 협시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또한 삼세불(三世佛)과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삼세불로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羯羅菩薩)이 협시하게 되며

 다시 그 좌우에 석가의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상을 모시기도 한다.

갈라보살은 정광여래(定光如來)로서 과거불이며

미륵보살은 미래에 성불하여 미륵불이 될 미래불이므로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는 삼세불을 봉안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용추사 대웅전(龍湫寺 大雄殿)  내부 삼존불

용추사 대웅전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문수보현보살을 협시 봉안하고 있다

대웅전의 중심에 불상을 안치하고 있는 불단을 수미단(須彌壇)이라고 하는데

이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그 중심에 위치한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부처님이 앉아

자비와 지혜의 빛을 발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대웅전 내에는 많은 탱화들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의 후불탱화로는 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봉안되는데

이는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제자들을 모아 설법하는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주존불에 삼신불 또는 삼세불이 봉안될 경우 삼여래탱화(三如來幀畫)를 모시게 된다.

또한, 신중(神衆)을 모신 신중단과 영가(靈駕)를 모신 영단을 함께 마련하게 되는데

신중단에는 신중탱화를, 영단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畫)를 봉안한다.

대웅전의 내부는 다른 어떤 건물보다 화려하고 장엄하게 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목조보개(木造寶蓋:불단 위 천장에 있는 구조물 닫집이라고도 함) 및

불단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여 목조공예의 진수를 찾을 수 있게 한다.

불단 주변은 여러가지 화문(花文)과 천의(天衣)를 날리는 비천(飛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주불 위에는 닫집을 만들어 화엄의 여의주(如意珠)를 입에 문 용과 극락조(極樂鳥) 등을 장식한다.

천장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과 연화문(蓮華文) 등을 조각하여

불전(佛典)에 나오는 천우보화(天雨寶花)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대웅전에 갖추어지는 불구(佛具) 중에는 촛대와 향로 외도 중생의 업을 비추어보는

업경대(業鏡臺)가 불단 양편에 놓이는 경우가 많은데

업경대는 동판으로 만들어지며 주로 목조사자(木造獅子)가 업고 있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용추사 대웅전(龍湫寺 大雄殿) 벽화 심우도(尋牛圖)

용추사 대웅전 벽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심우도는 십우도 라고도 하며

수행자가 정진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차자는 일에 비유해서 그린 선화로

그 단계를 10단계로 구분하고 있어 십우도 또는 목우도라고도 한다.

소는 道家에서는 유유자적, 儒家에서는 義를 상징했지만

불가에서는 ‘인간의 본래 자리’를 의미했다.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비유한

‘심우도’가 이같은 의미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소는 다른 그 어떤 동물보다 불자와 친숙하다. 대부분의 법당 벽화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고

불경 곳곳에 소를 비유한 상징들이 들어 있다. 선사들도 이러한 소를 수행의 채찍으로 삼아왔다.

고려때의 보조국사 지눌은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했다.‘소를 기르는 사람’ 즉 참다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뜻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도 만년에 서울의 자택을 심우장(尋牛莊)이라 했다.

‘불성을 찾기에 전념하는 곳’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심우도’는 동자와 소를 등장시켜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때 소는 인간의 진면목인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 표현하기 때문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심우도는 중국 송나라 때 보명(普明)스님의 심우도와

확암스님의 십우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두종류의 그림이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확암스님의 십우도가 법당벽화로 주로 그려지고 있다.


용추사 삼층석탑

석탑은 근래에 들어와서 조성한것으로 보인다.

용추사 도량을 살피는 동안 내자와 딸아이는 대웅전에 들어가서 한참이나 기도하고 있다.

함양은 산이 깊고 물좋기로 유명하다

서부경남에서 함양 산청에서 나오는 쌀도 평지에서 나오는 쌀보다 가격이 더 비싸다

그 만큼 골이 깊어 쌀이 맛이 있기 때문이다

용추사는 6,25 전쟁때 소실되어 1953년 안의면 당본리에 있는 봉황대에 별원을 차려 주변 경관이 수려한

자연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장수사의 흔적을 간직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

덕유산장수사조계문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명부전(冥府殿 )

용추사의 명부전 전경이다 대웅전 우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명부전 좌측에는 산신각이 있다

명부전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구, 녹사(錄事) 2구,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이들 중 주존불인 지장보살은 불교의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咸陽龍湫寺地藏十王像(함양용추사지장시왕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80호

용추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 지장시왕상으로, 2002년 10월 24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80호로 지정되었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도명존자상(道明尊者像), 우측에 무독귀왕상(無毒鬼王像)으로 구성된 삼존과

그 좌우에 시왕상이 각 5구씩 배치되어 모두 13구의 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장기를 통해 1694년(숙종 20)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본존인 지장보살상은 높이가 1.6m로, 얼굴을 약간 내민 자세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오른손 역시 같은 손모습에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수인형식을 취하였다.

머리는 민머리형이며 목이 매우 짧고, 넓은 어깨에 비해 무릎이 좁은 비례감을 보인다.

얼굴 인상은 좁은 이마와 가늘게 좌우로 긴 눈, 네모진 얼굴 형상으로 근엄한 모습이다.

착의는 편삼을 입고 그 위에 편단우견의 대의를 걸쳤으며, 가슴에는 꽃잎형으로 주름을 잡은 군의가 보인다.

옷주름은 좌우대칭으로 딱딱하게 표현하여 엄숙한 얼굴 인상과 더불어 도식화된 느낌이다.

좌협시인 도명존자는 민머리형에 왼손에 석장(錫杖)을 쥐고 서 있으며

그 위에 대각선의 가사와 장삼을 걸쳤다.

우협시인 무독귀왕은 머리에 용머리로 장식된 금잠(金簪)이 있는 화려한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착의는 주색 포(袍)를 걸치고 가슴 부위에서부터 길게 수(綬)를 늘어뜨리고 서 있다.

삼존 좌우에 앉아 있는 시왕상들은 등받이와 팔걸이, 족대가 있는 의자에 앉아서 정면을 향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표현기법은 거의 유사한데, 무독귀왕의 경우와 같이 머리에는 원유관을 쓰고 관복 형태의 포를 걸친 모습이다.

시왕상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입을 다물고 근엄한 표정이지만 제3대왕과 제7대왕은 익살스럽게 웃고 있으며

손에 홀을 들거나(제1·2·5대왕상), 수염을 만지거나(제8대왕상), 손에 경서(經書)를 들고 있는(제3·6대왕상) 등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발모습도 대부분 두 다리를 가지런히 족대 위에 올리고 있으나

제4대왕은 코끼리를 밟고 있고, 제7·8대왕은 반가사유상처럼 왼쪽 다리를 내리고

그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었으며, 제9·10대왕처럼 한쪽 발을 살짝 든 상도 눈에 띈다.

앉아 있는 의자는 각각 조립하여 구성하였는데, 등받이 양측에 용두장식이 있고

손잡이 양측에는 봉황머리를 장식하였다.


삼성각(三聖閣)

용추사 삼성각은 대웅전과 명부전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산악 숭배 관념이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일찍부터 신성한 곳으로 믿어지는 산에 제사를 드리고,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신라 때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다섯 산, 곧 동 토함산, 남 지리산, 서 계룡산, 북 태백산, 중

팔공산을 오악(五岳)으로 지정하여 국가가 주재하는 제사를 올렸으며 이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전통신앙의 산악 숭배가 사원 내부에 자리잡은 것이 산신각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이나 유물이 조선 전기로 올라가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사원의 규모 유지와 발맞추어 불교 이외의 신앙들을 흡수해 들일 때 수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미 수나라 때에 천태산 국청사에 가람의 수호신으로

산왕각(山王閣)을 두었고 당대에는 산지가람에 산왕을 다투어 봉안하여 도량의 외호를 기원하였다고 하니

우리 나라의 경우도 보다 이른 시기에 산신 숭배 신앙을 사원에서 수용해 들였을 것이다.

산에는 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우리의 머리 속에 호랑이의 위력을 당해낼 짐승은 없다.

그래서 산신은 곧잘 호랑이와 같은 양 이해되기도 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의 위세도 많지만 사람을 보호하고 덕을 주는 존재로 비친 경우도 많다.

이렇게 호랑이와 산신을 나란히 그린 것이 산신탱이다.


삼성각(三聖閣) 내부

중앙에는 칠성여래를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좌는 산신탱 우측은 독성탱을 봉안 하고 있다

독성탱은 염주와 지팡이를 들고 수행하는 모습으로 표현 하고

산신탱은 오른손에 산삼을 쥐고 호랑이 머리에 손을 올려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모두 목각형태이며 양각 조각물이다.


원음각(圓音閣)

용추사 원음각에는  운판 목어 범종이 있는데 법고만 없었다

원음각(圓音閣)은 절에서 의식이나 행사, 법회를 행할 때 사용하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의 사물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범종은 지옥 중생을 비롯하여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해

법고는 축생(畜生)의 고통을 쉬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법구이다. 

목어는 수중 중생을 위해, 구름 모양을 새긴 운판은 허공 세계에 사는 중생인 날짐승의 해탈을 염원하면서 친다.

원음각의 목어는 부릅뜬 눈과 굳게 다문 입에서 돌출된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잉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용추사 요사채

용추사 도량에는 불교용품 판매소도 있다 아마도 산행자들이 용추사를 거쳐서

기백산등 산행코스 이기에 산행자들의 왕래가 많으니 있을 만도 하다.

함양에 장수사가 2번의 화재에도 중수하여 보존되었다고 하는데

6.25 전쟁으로 인하여 조계문만 남고 모두 소실 되었다 하니 참으로 아타까울 뿐이다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이가 무력으로 남한을 침공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이렇게 문화유적도 파괴 되었다

지금은 핵무장과 미사일로 전쟁의 야욕은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안보관은 어떠한가 다시 뭍고 싶다.


용추사 약수터

약수터 돌머리에는 좋은글이 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버릴것은 오직 간택뿐

밉다 곱다는 마음 없으면

탁 트이어 명백 하리라

-善海(선해)-

대웅전앞 담장의 박주가리꽃

비에젖은  박주가리 능쿨이 대웅전앞 담장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제법많이 자라 아랫쪽은 잎이 무성하였다

어릴적인 박주가리 열매속에 흰 씨앗을 불어 낙하산이다 하고날려 보네곤 하였는데

박주자리는 세사등(細絲藤)이라고도 하며

마디마다 2개씩 마주나며 길이 5~10cm, 나비 3~6cm의 긴 심장형 또는 달걀 모양의 심장형으로서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끝이 뾰족하다. 양면에 털이 없으며 뒷면은 분처럼 흰색을 띤다.

잎자루의 길이는 2~5cm이다.

7~8월에 연한 자주색 꽃이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꽃대 끝에 총상 꽃차례로 달려 핀다.

넓은 종처럼 생긴 꽃부리가 수레바퀴살처럼 5개로 깊게 갈라져 끝이 뒤쪽으로 말리는데 안쪽에 털이 빽빽이 난다.

갈라진 꽃부리 조각은 넓은 댓잎피침형이다.

녹색의 꽃받침은 5조각으로 깊게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은 송곳처럼 끝이 날카롭다.


함양용추사는

각연대사(覺然大師)가 창건한 옛 장수사와 4대 부속 암자중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이다.

6.25동란때 소실되어 1953년 안의면 당본리에 있는 봉황대에 별원을 차려 놓았다가

옛터의 복원을 추진하여 1959년 재건하였다.

주변 경관이 수려한 자연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장수사의 흔적을 간직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인

『덕유산장수사 일주문(德裕山長水寺 一柱門)』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으며

이곳 장수사에서 설파상언대사(雪坡 尙彦大師)가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놓고

화엄경(華嚴經)을 강의 했던 유명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용추사 뒤편 용추계곡 상류에는 기백산군립공원과 용추자연휴양림이 있고

서북쪽 산정상에는 정유재란때 왜구와의 혈전이 벌어졌던 황석산성(사적 제322 호)이 있는 곳이다. 

일요일 오후 고속도로를 한시간 달려온길 함양 용추사에서

가족과 사찰기행을 하고 참배하면서 기행을 마무리 해본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함양군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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