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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미타산(宜寧 彌陀山),깨달음의 산 미타산 山頂에 오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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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미타산(宜寧 彌陀山),깨달음의 산 미타산 山頂에 오르다

바다늑대FORCE 2019. 7. 23. 17:29


의령 미타산(宜寧 彌陀山)

  깨달음의 산 미타산 山頂에 오르다


▲ 의령 미타산(宜寧 彌陀山)

    미타산 높이 : 662m

    위치 :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 걸쳐 있는산


▲ 산행일 : 2019년 7월13일 토요일  날씨 : 흐림 약간 비


▲ 나의산행코스 :

   마타로 능선 미타산 표지목 →→→ 불관사  →→→ 소나무 임도 →→→ 국사봉 갈림길

 →→→ 미타산 헬기상 →→→ 미타산성 →→→ 팔각정 →→→ 미타산 정상(원점회귀)

편도4.5km  3시간 4분 소요


▲ 산행지 개요 :

미타산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새봄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장관을 이루어 등산객의 발걸음을 즐겁게 하고 있다.

9부능선에는 약 2㎞에 이르는 토석 혼축으로 된 미타산성이 있는데

삼국시대 축성된 것으로 보아 당시 합천 대야성과 함께 중요한 군사 요충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타산 기슭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년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 유학사가 있다.

미타산 북방향 9부능선에는 약 2㎞에 이르는 토석 혼축으로 된 성곽이 있는데

이것이 도지정기념물로 지정된 미타산성이다.

삼국시대 축성된 성으로 성곽 둘레가 2㎞, 높이 3.5m, 폭이 3m로 축성 규모로 보아 군사적 요충지로서

삼국사기에 김유신 장군이 성열성에서(미타산성) 백제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의 각축장으로 합천 대야성과 함께 중요한 군사 요충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 정상에는 둘레 20m, 높이3m, 폭12m의 조선시대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미타산 기슭에는 지금으로부터 약1300여년전 통일신라시대 때에 창건되었다는 고찰 유학사가 있다.

유학사는 원래 미타산의 8부능선에 자라잡고 있었으나

조선초기 태조 이성계의 왕사를 지낸 무학대사가 유학사에 들러 사찰이 앉은 위치가 풍수지리에 맞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위치에 절을 옮겨왔다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미타산의 8부능선 예전의 사지에는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완연히 남아있다.

미타산의 중턱에는 구 묵방초등학교를 절로 개조한 불관사가 위치하고 있는데

목마른 등산객들이 약수 한그릇 마시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등산길은 부림면 신반리 감암 마을에서 오르는 길과 부림면 여배 마을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감암 마을로 오르는 길은 미타산 중턱에 있는 불관사까지 차량으로 이동이 가능하며

여배 마을로 오르는 길은 유학사까지 차로 이동하여 유학사를 관람한 후 본격적인 등산을 하게된다.


▲ 미타산 산행지도


▲ 산행지 찾아가는길

진주Ic삼거리 →→→남해고속도로 군북ic →→→의합대로 적포방향 →→→ 대한로 부림방향

→→→ 미타로 2길 →→→ 묵방마을 주차장

61.7km 승용차 1시간20분 소요



→→→→→2019년7월13일 토요일 1000산 탐방 계획아래 오늘도

의령지구 산을 찾아 길을 나선다.

차 유리창엔 빗방울이 떨어졌다  계속 가야하나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왕 나온길 비를 맞더라도 가자....!


미타산 들머리

미타산 들머리 찾는것도 보통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선행자들의 리뷰를 보고서 잘 등산을 하지만 어디가 들머리인지 찾기가 힘들었다

늘 힘들면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고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경남 의령군의 미타산(彌陀山·663m)은 깨달음의 산이다.

서방 극락정토에 산다는 아미타불의 '미타'에서 산 이름을 따왔다.

아미타는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의 지혜 광명을 상징하는 부처다.

그 부처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깨치게 하는 산이다.

부처의 가피가 산줄기로 흘렀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며

미타산은 국사봉과 천황산 등 예사롭지 않은 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미타산 불관사

산에가다보면 늘 사찰이 있기 마련이다 불관사는 부림면 미타로2북길133에 있으며

그다지 오래된 사찰은아니면 사찰형식을 보면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였다

이왕 사찰에 들렸으니 여기저기 도량을 둘러 보았다

신발을 벗고 참배를 하자니 내 신발은 늘 군화이다

여름산행이나 겨울산행은 늘 군화를 신고 간다

발 아래 독사때문에 군화를 착용한다


불관사 대웅전과 탑

여기저기 둘러보니 주지스님의 노력이 깃던게 보였다

다시 미타산 산행을 위해 불관사 산길을 찾아 헤집고 올라갔다.

능선길을 걸었는데

어느새 임도와도 만나 걷다가 다시 임도를  쭉 걸었다

자칫하면 길을 잃을수 있는 코스 였다

불관사는 대한불교 관음종이다

.

임도의 소나무숲길

좌우로 빼곡한 소나무가 울창하고 윗쪽엔 간벌 작업구간도 보였다

미타산은 '칼부림의 산'이라고도 한다.

고려 무인정권기에 세력을 떨친 천민출신 장군 이의민이 미타산에 숨어들었다가

최충헌 형제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산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칼 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역사를 보여주는 산이다.

장군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을 주살했다.

최충헌은 처음에 용감한 성품을 지녀 별초도령(別抄都領)에 임명되었고 공을 세워 승진해 장군에 이르렀다.

그 아우 최충수(崔忠粹)는 시샘하고 음험해 날래고 사나워 이 때 동부록사(東部錄事)가 되었다

때마침 이의민의 아들 장군 이지영(李至榮)은 최충수의 집비둘기를 빼앗았고

최충수는 반환을 청하였는데 그 말이 심히 사납고 패려했다.

이에 이지영이 노하여 가동에게 명해 결박하기에 최충수가 "장군이 손수 묶지않으면 누가 감히 결박하겠소."라고 하자

이지영은 이를 장하게 여겨 놓아줬다.

최충수는 곧 최충헌에게 나아가 고하기를 "이의민 4부자(이의민과 아들 이지영, 이지광, 이지순)가

실로 국적이니 내가 참하려 하는데 어떻습니까? " 라 하기에 최충헌이 난색을 표했는데

최충수가 말하길 "내 뜻은 이미 결정했으니 중지할 수 없습니다." 하자 최충헌 역시 그리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왕(명종)은 보제사(普濟寺)로 행차하였는데 이의민은 병을 칭해 어가(御駕)를 호종하지 않고

몰래 미타산(彌陀山) 별장에 갔고 최충헌, 최충수, 그 생질 대정(隊正) 박진재(朴晉材), 인척 노석숭(盧碩崇) 등은

소매에 칼을 감춰 별장 문 밖에 이르러 기다렸다.

이의민이 곧 돌아가려고 문을 나와 말을 타려 할 때에 최충수가 돌입해 손수 칼로 쳤지만 맞지 않았고

최충헌이 곧장 전진해 참하자 종자 수십여 인은 모두 흩어졌다.

노석숭으로 하여금 수급을 가져가게 하며 입경하여 저자에 효수하자

이를 보고 들어 놀라 시끄러이 떠드는 소리가 도성 아래에 진동했다.

호종하는 자는 변을 듣고 몰래 달아나서 왕 역시 어가를 재촉해 환궁했다.

최충헌 형제는 말을 달려 칼을 뽑고 십자가에 이르러 감행령장군(監行領將軍) 백존유(白存儒)를 보며

사실을 고하자 백존유는 기꺼이 좇아 군졸을 불러 모았고

이의민의 아들 대장군(大將軍) 이지순(李至純), 장군 이지광(李至光)은 어가를 좇던중 말을 달려 돌아와

가동을 인솔해 길에서 싸웠는데 이지순은 최충헌 등을 돕는 최충헌 형제는 군사를 인솔해

궁문에 가서 상주하기를 "국적 이의민은 일찍이 시역(弑逆)의 죄를 지었고

백성을 사납게 해하였으며 보위를 엿보앗으니 신 등은 이를 미워한지 오래됐고 이제 국가를 위해 토벌했지만

일이 발설됨을 염려해 감히 명을 칭하지 못하였기에 죄를 청합니다. " 하자 왕은 그를 위로하며 타일렀고

이에 최충헌이 대장군 이경유(李景儒), 최문청(崔文淸) 등과 함께 잔당 토벌을 청해

드디어 그들과 시가(市街)에 앉아 군을 불러 모아 장사들은 기뻐하며 따랐고

이에 여러 위(衛)의 장졸들 역시 모두 모여 무릎 꿇어 걷고 명을 들어 감히 우러러보지 못했으며

이에 성문을 닫은후 군사를 나눠 진격해 잔당을 다 잡았다.

이지영은 이 때 벽란강(碧瀾江)의 보달원(普達院)을 원찰(願刹)로 삼아 강을 걸쳐 다리를 만들려 하고

기생들을 이끌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현 해주)에 가서 아전과 백성에게 그 비용을 조력하라 명해

아전과 백성이 화가 두려워 백금(白金) 70근 추렴했고 백성은 그 폐를 견디지 못했다.

최충헌은 장군 한휴(韓休)를 보내 가서 잡게 하자 한휴는 밤에 침입해

부(府, 도호부)에 들어갔고 때마침 이지영은 태수(太守) 허대원(許大元)과 잔치하고 있었는데

한휴는 곧 사람을 부려 참해 그 머리를 서울로 전하니 안서(安西)

백성은 기뻐 왈, "이지영이 죽었으매 우리 무리는 근심없노라." 했다.

(최충헌 등이 또 청해 지후(紙候) 한광연(韓光衍)을 경주(慶州)에 보내 이의민의 삼족을 멸하고 여러 주에 사신을 보내

그 노례와 무리에 붙은 자를 주살하고 이현필(李賢弼)은 원주(原州)에 유배했다.

이지순, 이지광은 인은관(仁恩館)에 가서 죄를 빌었는데 최충헌이 이르길 "이들은 재앙의 근본이다.

관대히 다스릴 수 없다." 하고 참했다.  )

- 고려사절요 명종 광효대왕, 고려사 명종세가, 열전 이의민, 열전 최충헌 -


국사봉과 미타산 갈림길

소나무숲에서 휴식을 취해본다

이슬비가 왔다 갔다하는 날씨 이지만

비 그치고 습도가 올라와 더위가 한층더 심해졌다

벤치에 앉아서 잠시 소나무 향을 맡고서 더위를 씻어본다

미타산은 고려무신정권의 이의민이가 주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는곳이고

또한 미타산은 산꾼들에게 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새봄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장관을 이루어 등산객의 발걸음을 즐겁게 하고 있다고 한다

9부능선에는 약 2㎞에 이르는 토석 혼축으로된 미타산성이 있는데

삼국시대 축성된 성으로 성곽 둘레가 2㎞, 높이 3.5m, 폭이 3m로 축성 규모로 보아 군사적 요충지로서

삼국사기에 김유신 장군이 성열성에서(미타산성) 백제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의 각축장으로 합천 대야성과 함께 중요한 군사 요충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 정상에는 둘레 20m, 높이3m, 폭12m의 조선시대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다.


미타산 헬기장

일반적으로 헬리포트는 헬리패드를 포함하는 헬리콥터 이착륙 비행시설 뿐만아니라

인적,물적 자원의 안전한 이동경로를 고려하는 특히 인명과 관련하여

추가적인 연관 관련시설의 규격을 만족하는 헬리콥터 전용 비행장을 아울러 지칭하는데 사용될수있다.

미타산 헬기장은 넓직해서 등산객 끼리 족구 한판이라도 해도 좋을듯한 공간이다

미타산 기슭에는 지금으로부터 약1300여년전 통일신라시대 때에 창건되었다는 고찰 유학사가 있다.

유학사는 원래 미타산의 8부능선에 자라잡고 있었으나

조선초기 태조 이성계의 왕사를 지낸 무학대사가 유학사에 들러

사찰이 앉은 위치가 풍수지리에 맞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위치에 절을 옮겨왔다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미타산의 8부능선 예전의 사지에는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완연히 남아있다 한다. 


의령미타산성(宜寧彌陀山城)

미타산성은 미타산(표고 662m) 정상부를 성내로 삼고 그 주변 9부 능선상에 체성을 약2km에 걸쳐 배치한 테뫼식(山頂式)

석축석으로 성내에서 북쪽으로 초계분지가 내려 보이고 남동쪽에는 신

동쪽으로는 멀리 창녕, 서쪽으로는 천황산(표고 656m)과 국사봉(표고 688m), 남쪽으로 봉산(표고 563m)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은 지세에 맞추어 축조하였으므로 평면이 곡선적이다.

성내는 북쪽과 서쪽은 급경사지이며 동쪽과 남쪽은 비교적 평탄하다.

성바깥 역시 남쪽과 동쪽은 평탄하나 북쪽과 서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내에는 봉수대와 사지가 있으며 사지에는 현재 건물은 없고 초석과 샘물터만이 남아 있다.

 외에 남동쪽 암문앞과 성내에 민가가 있다.
성내 곳곳에서 수습되는 기와편과 토기, 자기편을 참조한다면 상당 기간동안 사용된 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현재 성내에는 정상부 넓은 평탄부 곳곳에서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다.

조선시대 관방사 연구에 귀중한 유적이라고 한다.


의령미타산성(宜寧彌陀山城)

의령 미타산성(宜寧 彌陀山城)은 경남 의령군 부림면 미타산 에 있는 산성이다.

2001년 2월 2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산성을 한참 둘러 보있는데 최근들어서 복원작업한 흔적이 보였다

산성위에는 평탄한 흙이며 산성위에 서면 아래 조망도 좋다

물론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산야가 탁 트윈 조망으로 의령의 산골짜기가 시야가 들어온다


의령미타산성(宜寧彌陀山城)

미타산성의 평탄한 부분에는 개망초꽃이 많이 피어 있고 잡초가 무성 하였다.

개망초꽃은 나라를 망하게 한꽃으로 불리운다

망초는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철도가 건설될 때 사용되는 철도침목을 미국에서 수입해 올 때

함께 묻어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철도가 놓인 곳을 따라 흰색 꽃이 핀 것을 보고

일본이 조선을 망하게 하려고 이 꽃의 씨를 뿌렸다하여 망국초라로 불렀고 다시 망초로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망초보다 더 예쁜 꽃이 나타났는데 망초보다 더 나쁜 꽃이라 하여 개망초라고 불렀다 한다.

미타산성<면적(面積) 55,214㎡>은

합천군(陜川郡) 적중면(赤中面)과 의령군(宜寧郡) 부림면(富林面) 사이

미타산(彌陀山)<표고(標高) 662m> 정상(頂上)에 있다.

원래(元來) 적중면 묵방리(墨方里) 관내(管內)였으나 1983년 적중면 묵방리와 권혜리(券惠里)가

의령군 부림면에 편입(編入)됐다. 2001년 2월 22일 경상남도(慶尙南道) 기념물(記念物) 제231호로 지정(指定)됐다.

성내(城內)에 봉수대·절터·초석(礎石)<주춧돌>·샘터가 있고, 성내에서 기와·토기(土器)·자기(磁器) 조각이 수습(收拾)됐다 한다.

나라에 병란(兵亂)이 있을 때 연기(煙氣)를 이용(利用)한 신호(信號) 수단(手段)이었던 봉수대<봉화(烽火) 둑>는

전국(全國)에 600개 이상(以上)이 있었고, 조선말기(朝鮮末期)까지 사용(使用)됐다 한다.

성내와 암문(暗門)<성벽(城壁)에 누(樓)가 없이 만든 문> 앞에 민가(民家)가 있다.

미타산·천왕산(天王山)<표고 656m>·국사봉(國師峰)<표고 688m>이 서쪽으로 연이어 있다.

천왕산이 천황산(天皇山)으로도 불리는데 양옆의 미타산·국사봉 명칭(名稱)이 불교(佛敎)와 관련(關聯)이 있음을

고려(考慮)하면 천왕산이 타당(妥當)하다. “미타(彌陀)”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준말이고

 “국사(國師)”는 고려(高麗) 및 조선초기(朝鮮初期) 때 덕행(德行)이 높은 중에게 주던 최고(最高) 승직(僧職)이고

 “천왕(天王)”은 불교에서 욕계(欲界)·색계(色界) 등 온갖 하늘의 임금을 일컫는 말이고

 “천황(天皇)”은 도가(道家)에서 옥황상제(玉皇上帝)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미타산성에서 정상가는길

미타산성 평지부분은 예초기로 풀을 많이 베어 내어 깨끗하고

작업진행중인지 예초기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봉화터와 샘터가 있다고 하는데 시력이 안좋은 탓인지 찾지를 못하고 정상으로 발길을 돌였다

정상가는 길은 제법 등산로 처럼 보였다

여태 길이 아닌길 길인듯한 길을 몇번이고 오르내리락 거리면서

잘못길을 들면 길을 잃어 조난 신고를 해야 할 정도의 미타산길이다.

미타산성에는 옛 절터라 그런지

지금도 별장 같은집 암자가 하나 있다 미타산성을 보호하고 있는데

암자가 건축되었는지는 알수는 없지만 사유지라 그런것을까 한참 생각하게 만들었다.


미타산 암봉

암봉에 올라 지나온길 그리고 산아래 펼쳐진 조망을 감상해 본다

비가 그친뒤라 그런지 운무가 시야를 가려 하이얀 구름만  나그네 처럼 움직인다.

미타산의 이름을 보면

미타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약칭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무량광불(無量光佛), 무량수불( 無量壽佛 )이라고도 부른다

정토종 근본 경전의 하나인 〈무량수경 Sukhāvatῑ-vyūha-sūtra〉에 따르면

오랜 옛날 법장이라는 비구가 48개의 서원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18번째 서원에서 자신이 부처가 되면 그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그가 건설한 정토에 태어나서 열반에 이를 때까지 지복을 누리며 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법장은 자신의 서원을 모두 이룬 뒤 아미타불로서 '극락'(極樂 Sukhāvatῑ)이라는 서방 정토를 주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믿음을 강조하는 아미타불 신앙은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고, 곧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한국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소 阿彌陀經疏〉를 저술하면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특정 종파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일본에서는 12세기에 형성된 정토종과 13세기에 형성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오늘날까지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티베트와 네팔에서는 구세주로서의 아미타불에 대한 숭배가 동아시아에서와는 달리 유행하지 못했지만

영원히 존재한다는 다섯 구원불(→ 선정불) 가운데 하나로 아미타불은 매우 존중되어왔다.

이 사상에 따르면, 역사상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관세음보살은 그의 화현으로 간주된다.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색은 빨강, 상징하는 자세는 선정인(禪定印 dhyāna-mudrā), 상징하는 사물은 발우

그가 타고 다니는 것은 공작, 배우자는 판다라(Pāṇḍarā), 성(姓)은 라가(Rāga),

를 상징하는 요소는 물, 그를 상징하는 음절은 '바'(ba) 또는 '아'(āh)

그를 상징하는 온(skandha:존재를 구성하는 근본요소)은 상(saṇjnā:감각적 대상에 대한 지각)

그를 상징하는 방향은 서쪽, 그를 상징하는 감각은 미각, 그를 상징하는 감각기관은 혀

인체에서 그가 머무는 장소는 입이다 라고 한다.


미타산 바위채송화

정상부분으로 가는길은 암릉이고 암봉도 드러 있었다

바위틈에 바위 채송화 한군락이 노랗게 만개 해 있다.

전국의 산 바위 겉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세계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에 분포한다.

줄기는 가지가 많이 갈라지고 바닥을 기면서 자라서 높이 7-9cm 정도이다.

잎은 어긋나며, 뒷면의 잎줄이 뚜렷하다.

꽃은 6-8월에 2-3가지로 갈라지는 안목상 취산꽃차례에 달리며, 노란색을 띤다.

꽃받침은 깊게 갈라지며, 피침형, 녹색, 다육질이다. 수술은 2줄로 배열하며

꽃밥은 노란색, 수술대는 연한 노란색이다. 열매는 삭과이며, 씨는 갈색이다.

가뭄에 강하고, 바위 등에 붙어 자라는 특성을 이용하여 건물의 지붕이나

옥상에 식물을 자라게 하는 녹색 지붕을 만드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미타산 산정

아래서 보면 미타산 정상은 암봉으로 이루어 져 있다

한여름의 녹음이 짙게 암봉을 둘러 싸고 있으며 간간히 지나가는 운무가 운치를 더 했다

산을 잘 타는 산군들은 일반적으로 국사봉에서 미타산까지 환종주 산행을 많이 한다

미타산의 봉수지는 산성의 서북쪽 최정상부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평탄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발국조사팀의 보고서를 참고 하여 읽었는데

봉수지가 어디에 있는지 흔적도 알수도없고 단지 별장같은 암자만 보였다.


미타산 정상부근 팔각정

산행자들의  휴식처로 만들었지만 그다지 많은 산행자들이 쉬고 가지 않아

몇년 못가서 나무가 썪어버릴듯한 느낌을 주었다

미타산 주변 명소로는 유학사가 있는데

유학사는

미타산(彌陀山, 높이 662m)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약 13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고찰(古刹)이다.

조선 개국 직후 왕사를 지낸 무학대사 자초(自超 1327~1405)가 1399년(정종 1년) 창건하였다.

무학대사는 660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미타사(彌陀寺)로부터 조금 떨어진

지금의 유학사 자리에 사찰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남향으로 자리 잡은 극락전을 중심으로 맞은편에 만세루, 극락전 왼쪽에 종각

극락전 오른쪽으로 요사 두 동이 아래·위로 배치되어 있다. 칠성각은 요사 뒤쪽의 계단 위쪽에 있다.

주법당인 극락전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내부 불단에 금동아미타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다.

원래 오동나무로 만든 목조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다가 1980년대에 어디론가 이운되었다 한다.

그때 삼존불 중 주존불을 본떠 석고상으로 남겨 두었는데 2002년 새로 조성한 현재의 주존불은

그 석고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만세루(萬歲樓)는 루(樓)의 입지 즉 사찰의 정문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지만 실제 누각 형식의 건물이 아니다.

단층 건물인 데다 누문도 없으며, 툇마루가 달린 요사채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건물 뒤편에 걸려 있는 편액도 유학사(留鶴寺)라고 되어 있지만 사찰에서는 만세루라고 부른다.

이 건물에는 1900년 이태현(李泰鉉)이 지은 ‘법당중수기’ 등 유학사의 연혁을 알려주는 현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 무학대사와 유학사의 이야기 -
원래 유학사는 미타산의 8부 능선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조선초기 때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를 지낸 무학대사가 이 유학사에 들려 사찰이 앉은 위치가 풍수지리에 맞지않다고 하여

지금의 위치에 절을 옮겨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다.

무학대사는 풍수지리에 무척 밝았기 때문에 당시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개국과 함께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일화는 누구나 다 알고있는 사실이니

유학사의 전설 또한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닐 것으로 믿어진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부근의 형세가 마치 날아가 학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고

예전에 유학사가 있던 자리는 그 학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였다하니

학의 머리에 절이 앉아서는 아니되고 지금의 위치에 사찰이 있어야만 학이 마치 절을 품고 있는 형상이 되어서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의 이름도『학이 절을 품은 채 머무른다』는 뜻으로 유학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 때가 조선초기 정종2년(1399년)이라 알려지고 있으며 그 뒤 무학대사는

오랫동안 이 유학사에 머물고 있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 말은 지금에 와서 상고할 길이 없고, 다만 그러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는 사실만 기록할 따름이다.


미타산 산정에 있는 산행표지판

미타산 산정을 아래서 보면 커다란 암봉인데 산정에 서니 넓다란 흙산이다

1000산을 등산계획하고 근교산 먼산 할것없이 또 명산 뒷산 할것없이

정상석이 있다면 산에 오르기로 하였다

30~40 젊은 날엔 깊은 푸른바다 스쿠바다이빙을 즐겼지만은

물에서 뭍으로 노는장소를 빠꾸어 보았다

걸을수 있을때 많이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렇게 산에 오른다.


미타산 산정에 있는 산행자들의 흔적

미타산 산정에 오르니 많은 산행자들의 흔적이 있었다

미타산도 산행자들에게는 인기가 있는듯 보였다

미타산은 부처의 산이고 역사가 있는 산이다

고려 이의민 부터 최충헌이야기가 있고 미타산성과 무학대사와 유학사 이야기가 그렇다.


의령 미타산(宜寧 彌陀山),깨달음의 산 미타산 山頂에 오르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줄여서 미타(彌陀)라고도 한다.

이 아미타불의 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 정토교(淨土敎)이다.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신 아마타불을 염원하면서 미타산 산정에서

무학대사의 풍수지리 그리고 고려의 무신정권 역사적 이야기도 있ㄴ느곳이다

아미타불을 주제로 한 경전으로는 ≪무량수경 無量壽經≫

≪관무량수경 觀無量壽經≫·≪아미타경≫ 등이 있다.

이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일찍이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이 이 세상에 있을 때

법장(法藏)이라는 이름의 보살이었다.

그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을 세우고 살아 있는 모든 자를 구제하고자 48원(願)을 세웠다.

그는 오랜 기간의 수행을 거쳐 본원을 성취하고 부처가 되었는데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10겁(劫) 전의 일이다.

그 뒤 아미타불은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십만억불토(十萬億佛土)를 지나서 있는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현재까지 설법을 하고 있다.

 이 극락세계는 고통이 전혀 없고 즐거움만 있는 이상적인 세계로

 대승불교에서는 정토(淨土)의 대표적인 장소로 삼았다고 전한다.


의령 미타산(宜寧 彌陀山)662m

미타산 정상석은 큼직해서 좋다

이름난 명산도 아니고 시골오지에 이렇게 큰 정상석은 아마 의령군 뿐인듯 하다

의령군은

경상남도 중앙부에 있는 군. 땅이 기름지고 거주 환경이 양호해 청동기시대부터

상당한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1960년 이후 산업화의 물결로 인구의 전출이 심해 군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행정구역은 의령읍, 가례면·칠곡면·대의면·화정면·용덕면·정곡면·지정면·낙서면

부림면·봉수면·궁류면·유곡면 등 1개읍 12개면 116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238개리)

군청소재지는 의령읍 의령읍 충익로 63이며 면적 482.80㎢이라고 한다.


미타산 산정에서 바라본 조망


미타산은 부처가 있으며 깨달음의 산이고 고려 무신정권기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있으며

무학대사의 풍수이야기가 있는 산 그야말로 역사와 깨달음이 있는 산이였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한국의 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 의령군등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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