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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부처의 나라 불국사에서 新羅건축 웅장함에 빠지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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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부처의 나라 불국사에서 新羅건축 웅장함에 빠지다

바다늑대FORCE 2019. 7. 23. 11:09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부처의 나라 불국사에서 新羅건축 웅장함에  빠지다

▣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의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 사찰기행일 : 2019년7월6일 날씨 : 맑음


▣ 불국사 개요 :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신림(神琳)·표훈(表訓) 등

의상(義湘)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기록에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대성의 중창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구역이다.

이 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큰 건물로는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 32칸)·천불전(千佛殿, 25칸) 등이 있고

이 두 개의 건물만큼 크지는 않아도 중요한 건물로는 시왕전(十王殿, 5칸)·십륙응진전(十六應眞殿, 5칸)

문수전(文殊殿, 5칸) 등이 있다. 또한 승방이라고 생각되는 동당(4칸)·서당(4칸)·동별실(5칸)

서별실(5칸)·청풍료(淸風寮)·명월료(明月寮)·객실·영빈료 등이 있었으며, 그 밖에 누·각·문·고·욕실 등이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중수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887년(진성여왕 1)과

1024년(현종 15)에는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고, 1172년(명종 2)에는 비로전과 극락전의 기와를 갈았으며

1312년(충선왕 4)에도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다. 1436년(세종 18)에는 대웅전과 관음전(觀音殿)과 자하문(紫霞門)을 중수하였고

1470년(성종 1)에는 관음전을, 1490년에는 대웅전과 각 절을 중수하였다.

1514년(중종 9)에는 극락전의 벽화를, 1564년(명종 19)에는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左兵使)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와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극락전·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광해군 4)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인조 8)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효종 10)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 밖에 안양문(安養門)·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뒤 또다시 퇴락되어 가던 이 절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毘盧殿)·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泛影樓)·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나의 사찰기행 가는길

진주Ic삼거리 →→→ 남해고속도로 창원방향 →→→중앙고속도로 대동ic →→→ 울산고속도로 안양ic

→→→ 동해고속도로 남경주tg →→→ 감불로 감포방면→→→ 불국사주차장

179.5km  승용차 2시간 소요


→→→→→사찰기행시작

산에 오르면 사찰이 있고 사찰에 가면 산이 있다.

천년의 땅 토함산 산행을 마치고 석굴암을 참배하고 불국사에 들렸다.

불국사 사찰기행은 이번이 네번째 이다

첫번째는 고교시절 수학여행 이였고 두번째는 내자와 불국사

그리고 세번째는 딸아이와 가족 여행 오늘은 내자와 불국사를 찾았다


세계유산 불국사 초석

불국사 일주문 좌측에 유네스코 등재를 기념하는 초석이 있다

불국사는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745m)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찬란한 신라 불교문화의 핵심으로 신라 법흥왕 15년에 그 어머니 뜻에 따라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하여 세워졌으며

그 후 신라 경덕왕 10년(751) 때 재상 김대성이 다시 지어 절의 면모을 새롭게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건물은 물론 값진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국보 7점을 간직한 오늘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약 3km (포장도로 석굴로는 9km)정도 올라가면

동양 제일의 걸작으로 알려진 여래좌상의 본존불이 동해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유명한 석굴암이 있다.

불국사.석굴암은

1995년 12월 6일 해인사 장경판전과 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되어 국제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불국사 일주문

편액은 佛國寺라고 새겨져 있다

일주문 편액 글씨 불국사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씨라고 한다.

1868년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난 김규진은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그후 1913년 다시 그 사진관 안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화랑을 개설하여

표구 주문과 함께 서화매매를 알선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의 서예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근대서화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193366세로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한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많은 관광객 불자들이 불국사를 많이 둘러보고 있었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에서 첫번째의 문으로 일주(一柱)라는 명칭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하겠다.

사찰에 들어서기 전 세속의 번뇌를 불법으로 깨끗이 씻고 진리의 세계를 향해 일심으로 들어오라는 의미이다.

불국사 일주문은 원래 자리는 아니지만 1973년 중창 때 진입의 편의를 위해 현 위치에 조성되었다. 

조선시대 다포식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다른 사찰에 비해 규모가 크다 하겠다


천왕문(天王門)

사대천왕(四天王門)안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셔 놓고 있다.

천상계(天上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천왕천에 살면서 제석천왕의 지시에 따라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지역을 관장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래서 사바 속세와 경계지간 가까운 곳에 마련 되었다.

천상의 수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불법과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을 봉안한 문으로써 가람(伽藍)의 삼문(三門) 중의 하나이다.

비파를 지니고 있는 신(神)은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손에 칼을 쥐고 있는 신(神)은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이다.

서쪽을 지키는 신(神)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龍)을 쥐고 있고

북쪽을 지키는 신(神)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塔)을 들고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

관광객이 너무 많아 없는 틈을 이용해 사진촬영 하려니 무척 어려움이 있었다

좋은앵글을 잡기위한 생각은 아예 접어야 했다

세계문화 유산 답게 그리고 천년의 신라 향기가 뭍어 있는 불국사를 보면

그 웅장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신라(新羅)

고대 삼국의 하나로서, 7세기 중엽에 백제·고구려를 평정하였으며

698년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이른바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신라의 역사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시대구분을 참작해 여섯 시기로 세분할 수 있다.

그런데『삼국사기』에서는 이〔표〕중 제1기에서 제3기까지를 상대(上代), 제4기를 중대(中代)

제5기 이후를 하대(下代)로 구분하고 있으며,『삼국유사』에서는 제1기와 제2기를 상고(上古)

제3기를 중고(中古), 제4기 이후를 하고(下古)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주로 왕통의 변화에 따른 독자적인 시대구분이지만

불교의 공인 혹은 율령의 제정 같은 중요한 사건도 참작한 것이므로

신라 역사의 발전대세를 가지고 시대구분할 때도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앵글 잡기

다보탑과 석가탑 두개를 하나의 앵글에 잡기 위해 폰카메라로 배경을 잡을때

집사람이 이러한 모습이 웃기는지 이렇게 찍어 놓았다.

신라는

국호 신라는 사로(斯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나벌(徐那伐)·서야(徐耶)·서야벌(徐耶伐)

서라(徐羅)·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새로운 나라, 동방의 나라, 혹은 성스러운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 수풀의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그 중 한자의 아름다운 뜻을 가장 많이 가진 신라로 확정하였다고 하지만

414년에 건립된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에 이미 신라의 사용 예가 보인다.

삼국사기찬자에 의하면, 신라의 ‘신(新)’은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라(羅)’는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각기 취했다고 하는데, 이는 후세의 유교적인 해석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우리에게는 석가탑(釋迦塔)로 이름 알려진 탑이다

국보 제21호. 높이 10.4m. 석가탑 또는 무영탑이라고도 한다

이 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백장암3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해 결실된 부분을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은 유례가 드문, 주목할 만한 예이다.

해체수리 때 2층 옥신의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여러 개의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慶州佛國寺多寶塔 (경주불국사다보탑)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 이라고도 한다

국보 제20호.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석가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근거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즉 다보여래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하기 위해 보탑의 형상으로 솟아나 공중에 머물며 찬양한 후

탑내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나란히 앉았다는 내용이다.

『불국사 사적기』에는 다보탑을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으로

석가탑을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으로 지칭한다.

1966년 석가탑 해체수리시

2층 탑신 사리공에서 『무구정광대다리니경』과 함께 발견된 두루마리 묵서지편에 탑을 중수하면서 넣은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1024년)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1038년) 등이 발견되었다.

이 문서에서 탑은 신라 혜공왕대에 건립되었으며, 고려 현종 15년(1024)과 정종 4년(1038)에 중수되었는데

1024년 중수기를 다보탑의 중수기로 보고 있다. 이 탑은 192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완전 해체·보수되었는데

이때 탑에서 불상을 포함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는 짧은 기록이 있으나 탑의 수리에 대한 내용이나

사리장엄구에 대한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다. 이후 1972년의 옥개석 위 돌난간의 일부 보수가 있었으며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2월에 걸쳐 상륜부의 일부 해체수리와 일제 강점기에 사용된 시멘트 모르타르를 제거하고

균열부를 메우는 등의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졌다.

이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신라의 전형석탑과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어 이형 석탑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탑의 층수에 대하여는 사각의 옥개석, 팔각의 옥개석을 사이에 두고 사각

팔각난간을 별도의 층으로 해석하는 등 여러 가지 해석으로 2층설, 3층설, 4층설 등 다양하다.

기단은 방형 평면을 기본으로 사방에 계단을 두어 전체적인 평면이 ‘亞’자 모양을 하고 있다.

계단에는 본래 난간이 가설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계단 윗부분 갑석 모서리에는 4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다.

탑신은 사각의 옥개석과 팔각의 옥개석을 중심으로 상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하단은 5개로 이루어진 석주로 구성하고 옥개석을 받는 석주의 상단은 끝부분을 호형으로

마치 목조건축의 첨차(檐遮)처럼 처리했다. 옥개석은 총 5매로 결구되었는데 중앙에 넓은 판석을 놓고

그 외곽에 엇물림식으로 4매를 돌려 놓았다.

그 위로 팔각 옥개석까지는 사각난간, 팔각난간, 연화문 앙련대의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단은 장방형 대석을 깔고 외곽에 난간을 설치하여 소로(小累)형태의 난간대 모서리에는 뺄목까지 표현해 정교함을 더하였다.

난간 안쪽으로는 기대 모양의 8개 기둥을 세워 감실형을 나타내었다.

중단에는 팔각의 난간대를 설치하고 그 내부로는 8개의 대나무형 기둥을 세워 상대의 연화문 앙련대를 받치고 있다.

상단의 연화문은 총 16엽으로 앙련대 위에는 1석으로 만든 팔각대석이 놓여져 있으며

그 위로 8개의 꽃술모양의 석주를 세워 위에 8각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팔각 옥개는 1석으로 옥개받침은 생략되었으며 처마 저면을 들여 다듬어 물끊기의 기능을 하고 있다.

전각부에는 풍경공이 합각선과 전각부 양쪽에 각 1개씩 총 3개가 남아 있다.

상륜은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노반은 옥개석과 같은 팔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복발은 편구형이다.

복발은 네 방향에 꽃무늬를 조각하고 각 문양은 2조의 띠매듭으로 연결되었으며 상부에는 앙련을 새겼다.

앙화는 다시 팔각으로 얹었으며 그 위로 3개의 보륜과 정상에 보개를 덮고 최상단에 보주를 놓았다.


佛國寺大雄殿 (불국사 대웅전)

보물제1774호

불국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釋迦牟尼佛)를 모신 법당이며, 대웅(大雄)은 석가모니불의 덕이 큰 것을 표현하는 덕호(德號)이다.

수미단(須彌壇) 가운데 안치되어 있는 목각(木刻)의 석가모니불상 좌우에는 목각의 미륵보살(彌勒菩薩)상과

갈라보살(羯羅菩薩)상이 협시(脇侍)하고 있고, 그 좌우에는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弟子像)이 모셔져 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은 미래의 부처이며, 갈라보살(羯羅菩薩)은 과거의 부처이다.

이는 과거.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부처님이 불국사라고 하는 부처 세계에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가상(釋迦像)과 두 보살상(彌勒菩薩 . 羯羅菩薩) 그리고

두 제자상(像)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복장기(腹藏記)에 의하면 이 5구(五軀)의 상(像)은 681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3년 임진왜란 당시 대웅전이 소실(燒失)되었을 때, 함께 불에 탓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다섯 구의 상은 1659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730년과 1769년에 각각 도금(鍍金)을 하였다.

대웅전은 681년 4월 8일 낙성(落成)되었으며1436년-1470년 . 1564년에 중건하였고, 1765년에 중창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쌓은 기단 위에 정면5칸, 측면 5칸에 다포계(多包系)의 팔작(八作)지붕 건물이며

내고주(內高柱)와 뒷면 고주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하여 벽화(壁畵)를 그렸다.

조선 후기 불전(佛殿) 건축의 대표적 건물이다.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대웅전 내부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를 표현하는 일곽의 중심을 이룬다.

현존하는 건물은 1765년(영조 41)에 중창된 것이나

그 초석과 석단 등은 대체로 신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대웅전 안의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竭羅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의 외관은 중앙의 어칸을 협칸(8.7尺)이나

퇴칸(8.2尺)보다 배이상 넓은 주칸(17.7尺)으로 꾸며졌다. 

공포는 다포로 어칸에 3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었고, 협칸과 퇴칸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어 있다.

살미첨차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를 조각하였고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웅전 정면의 어칸은 사분합꽃살문이고, 협칸과 퇴칸은 쌍분합교살문이며

양측면의 문은 삼분합띠살문으로 꾸며졌으며, 후면의 어칸은 사분합정자살문이며

협칸은 벽체로 막았고 퇴칸은 분합정자살문으로 20칸중 10칸은 문을 설치하여 개방 했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기단의 사면 중앙부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 양측의 소맷돌은 측면을 삼각형 문양으로 가공하였다.

천정은 우물 천정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佛國寺大雄殿 (불국사 대웅전)

불국사 대웅전 편액 이야기는

사찰이나 전통 건축물에는 나무판에 글씨나 그림을 새겨 문 위 또는 건물내부에 달아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틀어 현판(懸板)이라 한다

이 현판(懸板)은 편액(扁額), 주련(柱聯), 시판(詩板)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편액(扁額)은 건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표지이므로 건물의 정중앙 처마 아래에 부착을 하며,

주련(柱聯) 은 건물의 기둥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이거나 새겨서 거는 것을 말한다.

정자나 누각 건물의 마루 위에 보면 시(詩)나 예찬하는 글을 나무에 새겨 달아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시판(詩板), 문판(文板)이라고 한다.

현판 중에는 특별히  왕이 써서 내리는 경우도있는데 이를 사액(賜額)이라고 한다.

따라서 '숭례문' '토함산 불국사' 처럼 건물의 가운데 달아놓은 것은 편액(扁額)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명칭이다.  

'편(扁)'은 글씨를 쓴다는 뜻이고 '액(額)'은 '건물 앞부분 높은 곳'이란 뜻으로

건물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한 곳 밖에 없기 때문에 편액(扁額)은 건물마다 하나뿐이며 그 건물을 대표한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하고 거기에 글을 새기거나 무늬를 넣아 단청을 하고

조각을 하여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대부분이다.

편액을 역대 제왕(帝王)이나 당대의 명필·문인의 필적이 담긴 것을 건다는 것은

건물의 품격을 높이는 화룡점정이기 때문에 건물을 지으면 좋은 편액을 달기 위해 애를 쓴다.

편액(扁額)은 시대별로 현판의 모양이나 장식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시대의 특징을 잘 전해주고 있으며 

특히 편액의 글씨는 금석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글씨의 특별한 서체(書體)와

서풍(書風)을 다양하게 살필 수 있어 더욱 소중한 문화재다.

현존하는 편액 중에는 고려 공양왕에서 부터 역대 임금들의 글씨, 추사, 이광시 등

당대 유명한 문필가들의 글씨가 많이 있으나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國家指定文化財)로 지정된 경우는 하나도 없어

다른 문화재에 비해 푸대접을 받고 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유일하게 추사 김정희가 별세하기 3일 전에 남겼다는 서울 봉은사의 ‘판전(板殿)’이라는 편액이

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불국사 대웅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는 큼직한 편액이 달려있다.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힘이 느껴지는 글씨가 전면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낙관(落款)이나 글쓴 이의 이름이 없어 누가 썼는지

또 이 편액 글씨가 언제 어떻게 걸리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일반적으로 편액에는 글쓴 이의 호와 이름, 날짜가 적혀 있고 낙관이 찍혀 있어 글을 쓴 사람을 알 수 있기 마련인데

불국사 대웅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불국사 대웅전도 숙종 3년(1677)에 기와를 새로 바꾸고 숙종 34년(1708)에는 서쪽 기둥을 교체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당시에 숙종의 글씨를 하사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는 송림사 편액의 글씨를 모사해와서 편액을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676년에는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칙명으로 자수 비로자나불탱을 만들어 불국사에 봉안케 했다는 기록이 있어

어쩌면 이 때 불국사의 편액을 하사받은 후 송림사에서 모사해 갔는지도 알 수 없다.

같은 글자를 똑같이 다시 쓰기는 어려우니 어느 쪽이 먼저이던 한쪽은 모사된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조선 초기(1400년경) 건축양식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은 이승에서 고난받는 중생의 소리를 눈으로 보고

그 고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이와 같은 관음보살의 신앙은 대표적인 민간신앙의 하나다.

원래 992년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1674년과 1701년 그리고 1796년에 각각 개금(改金)을 하였기에 이로써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관음전이 불에 탈 때도 관음상은 안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관음전 문살은 연화문으로 되어 있다.


비로전(毘盧殿)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모신 법당이다.

751년경 18칸으로 건립되었으며,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탄 것을 1660년에 중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불국사 복원 당시 신라 때의 기단과 초석 위에 세웠다.

건축 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한다.

비로자나부처(毘盧舍那佛)님은 화엄세계(華嚴世界)의 본존불(本尊佛)로서

부처의 지혜가 태양과 같이 밝고 광대무변함을 상징한다.

이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국보 제 26 호로 8 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당시의 탁월한 주조(鑄造)기술을 보여주는 이 불상의 높이는 1m77cm이다.

원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리탑舍利塔(보물  제61호)

불국사 비로전 좌측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극락전(極樂殿)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모시는 법당.

이 법당은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한 750년경 6칸으로 건립되었으나

1593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1750년에 중창에 중창하고 1925년에 중수하였다.

건축양식은 조선 후기의 다포계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이 건물은

안에 높은 기둥 네 개를 세웠고, 안쪽 두 기둥 사이에는 후불벽(後佛壁)을 세워 벽화(壁畵)를 그렸다.

본래의 벽화는 1514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고, 지금의 후불벽화는 1973년 중건 때 조성한 것이다.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세 줄로 된 16단의 계단이 있으며

이 48개의 계단은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大願)을 표현한다.

극락전 앞 석등(長明燈)이 단아하면서도 매우 아름답다.

장명등은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을 중생들에게 밝혀주는 등불이다.

대웅전 앞 석등과 그 모양이 똑 같아 동시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는 극락정토(極樂淨土)이므로 법당 이름을 극락전이라고 한다.

이 법당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은

국보 제27호로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당시의 탁월한 주조(鑄造)기술을 보여주는

이 불상의 높이는 1m77cm로 본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국사 가람배치는 당우를 보면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리던 불국(佛國),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옮겨놓은 것이다.

불국을 향한 신라인의 염원은 세 가지 양상으로 이곳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일곽과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놓았다.


석단(石壇)과 석교(石橋)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이 석단은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나타낸다.

석단의 멋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에 있고, 대척적(對蹠的)으로 병렬된 2단의 석주(石柱)에 있다.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고, 굵고 굳센 돌기둥과 돌띠로 둘러 견고한 통일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반석 같은 굳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經樓)와 종루(鐘樓)를 만들어서 한없이 높은 하늘을 향하여 번져가는 묘음(妙音)의 위력을 나타내었다.

이 석단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국보 제23호인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와

극락전을 향하는 국보 제22호인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청운교·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교·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운교·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계단은 33천(天)을 상징하는 것으로 욕심을 정화하여 뜻을 두고 노력하는 자들이 걸어서 올라가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1686년(숙종 12)과 1715년(숙종 41)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고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없어졌던 돌난간도 복원하였다.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국보 제22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범영루(泛影樓)

범영루는 750 년경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건립하였고

1593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것을 1612 년과 1688 년에 각각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3 년 불국사 복원 때 정면 1 칸, 측면 2 칸, 3 층의 옛모습 그대로 중건한 것이다.

범영루에 지금은 법고(法鼓)가 매달려 있으나 원래는 범종각(梵鐘閣)으로써 범영루는 범종각의 이름이다.

누각의 모양을 하였으므로 루(樓)라 하였고 범영(泛影)은 범종의 소리를

그림자에 비유하여 범종의 소리가 온 누리에 번져서 넘치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최초의 이름은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한다.

이는 수미산(須彌山) 모양의 팔각(八角)정상에 108 명이 앉을 수 있도록 누를 짓고

아래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설계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정상은 욕계(欲界)33 천의 위이다.

108 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번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수미범종각이라는 이름은 소리가 33 천의 온 세상에 울려 퍼져 인간의 모든 번뇌를 씻어 없애주는 것을 뜻한다.



자하문과 회랑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있다.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이다. 이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도 하므로 불신에서 발하는 자주빛을 띤 금색 광명이

다리 위를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에서 자하문이라 한 것이다.

세간의 번뇌를 자금색 광명으로 씻고 난 뒤, 들어서게 되는 관문이다.

자하문의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의 중건 때에 만든 동서회랑이 있었지만 1904년경에 무너졌다.

회랑의 양 끝에 역시 경루와 종루가 있었지만, 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

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 복원 때에 좌경루(左經樓)와 더불어 옛 모습을 찾았다.

이 회랑은 대웅전의 옆문과 통하게 되어 있는데, 회랑의 구조는 궁중의 것과 비슷하다.

국왕은 세간의 왕이요, 불(佛)은 출세간의 대법왕이라는 뜻에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회랑을 건립하는 수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참배객은 최초의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정면문으로 출입하지 않고

이 회랑을 통하여 대웅전으로 나가게 된다.


慶州五陵(경주 오릉)

불국사를 둘러보고 참배도 하고서 귀가하는길에 오릉이 있어 들러보고

참배도 하였다 오릉을 향해 뻗은 소나무가 꼭 릉을 보호하는듯 하였다.

소나무 숲이 너무 아름답고 여름날 솔향기 맡마가며 걷는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오릉(五陵)은

사적 제172호. 지정면적 8만 9,950㎡.『삼국사기』등 문헌에서는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모두 5기가 있으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閼英), 제2대 남해차차웅

제3대 유리이사금, 제5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제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은 제2릉의 동쪽에 표주박 형태[瓢形]를 이루고 있으며 높이는 약 7.2m이다.

제4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실시된 바 없어 각 능의 구조를 알 수 없으며

경주일대에서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원형봉토분의 구조형식이 확인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재 알려진 피장자와 직접 연관시키기는 아직 이른 실정이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경주시,불국사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 홈페이지 자료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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