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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미숭산(陜川 美崇山),안동장군 이미숭(安東將軍 李美崇) 절개가 있는 합천 미숭산에 오르다 본문
합천 미숭산(陜川 美崇山)
안동장군 이미숭(安東將軍 李美崇) 절개가 있는
합천 미숭산에 오르다.....!
▲ 경남 합천 미숭산(陜川 美崇山)
미숭산 높이 : 757m
위치 : 경남 합천군 야로면 고령군 고령읍 경계에 있는 산
▲산행일 : 2019년03월23일 토요일 날씨 : 맑음
▲나의산행코스 :
합천 야로면 학생종합야영장 주차장 →→ 귀원갈림길 →→ 미숭산성 →→ 고령주산 갈림길
→→ 미숭산 정상(원점회귀)
왕복3.4KM 1시간43분소요
▲산행지개요 :
미숭산(美崇山.757m)은 고령 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령군의 최고봉으로
옛날의 상원산(上元山)이다. 이 산정의 꼭대기에는 4정(町) 6반(反)의 고위 평탄 면으로 되어 있으며
주위는 험준한 급경사이고, 가장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석성(石城)에 쌓여(둘레 397步)있었으며
샘, 못, 군창(軍倉) 등이 있었다.
고려말 정몽주의 문인인 안동 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이 이성계와 접전하다 순절한 산이다.
이미숭 장군이 이 산을 근거지 삼아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해 가며 이성계에 대항했고 그 절개를 기려
산의 이름이 이렇게 바뀌게 되었다 한다.
미숭산은 고려말 이미숭 장군이 군사를 모아 성을 쌓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항하며
고려를 회복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한 곳으로 전해온다.
정상 주변은 미숭산성의 성문과 성터의 잔해가 있고 샘물이 성문터 옆에 있다.
이 미숭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조선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한다.
정상에 밀면 흔들리는 까닥바위가 있다. 동남쪽 고령군 쌍림면 쪽에 고찰 반룡사가 있으며
산 남쪽 고원지대인 상대마을에 있는 수련원 뒤로 미숭산 정상까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미숭산 북쪽의 문수봉 일대는 고사리가 많다.
산행은 반룡사- 미숭산- 문수봉- 모로현으로 하여 우거로 내려와
월광사의 보물 129호인 삼층석탑을 보고 가면 좋다.
산행 길잡이 고령 방면
산행 코스는 고령 시외버스 터미널-주산 산림욕장 입구(인근에 대가야 유물 전시관)
주산 정상-청금정전망대(412m봉)-반룡사 하산로 고갯길-733.5m봉-미숭산 정상
-임도-고령읍 신리마을 하산으로 이어진다.
산행 시간은 4-5시간 가량 소요된다. 고령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면 읍내간선 도로를 따라
고령 경찰서와 고령 향교 입구, 성주 소방서, 고령 파출소를 지나쳐 주산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서 이어지는 오른쪽 길로 올라서면 된다. 표지판이 잘 구비돼 있어 길 찾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등산로 표지판에 나와 있는 주산-미숭산 전체 거리는 약 8Km. 주산 정상까지 약 20분
산 정상에서 직진하듯 5분 정도를 내려선다. 능선을 타고 가는 도중에 시원한 사방 조망이 계속되며
진행 방향 정면의 우람한 봉우리가 가야산이다.
정상에는 큰 달각 바위라는 큰 바위와 초소 가건물이 있다.
가야산 매화산 의상봉 별유산등 합천 거창쪽 산세가 시원하다.
하산 길은 초소에 닿기 직전에 오른쪽 숲 속으로 열린 길을 따라 내려서면서 열린다.
25분 정도면 신리로 내려가는 임도에 닿는다.
▲ 미숭산 등산지도
▲ 산행지 찾아가는길
진주Ic삼거리 →→→ 진주동부로 미천방향 →→→20번국도 →→→ 마령로 거창방향
→→→ 미숭산로 →→→ 합천종합야영수련장 주차장
81km 승용차 1시간20분 소요
→→→→→2019년3월23일 토요일 10시 즈음에 진주서 출발하여
합천에 있는 미숭산을 찾아 해병동지회 후배겸 높은산길에 회원과
함께 합천 미숭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합천종합야영수련원(경상남도 교육청)
미숭산 탐방로중 그다지 힘들지 않게 오를수 있고 잛은 코스가
수련원에 있는 들머리가 좋다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바윗돌이 한눈에 들어온다 호연지기 란 사자성어에서
학생종합야영수련원임을 알수 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란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元氣), 자유롭고 유쾌한 마음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운 바 없는 용기 등을 뜻한다.
「공손추(公孫丑)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齊)나라의 경상(卿相)에 오르셔서 선생님의 도를 펼치실 수 있게 된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제나라 임금을 패왕(覇王)이 되게 하시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마음이 동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맹자(孟子)가 말했다.
“아니다. 내 나이 사십 세가 되어서부터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공손추가 말했다.
“그러시면 선생님께서는 맹분(孟賁)보다 훨씬 더 뛰어나십니다.” 맹자가 말했다. “이것은 어렵지 않다.
고자(告子)도 나보다 앞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어 맹자는 진정한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용기가 있었던 사람들을 예로 들며 진정한 용기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不動心)이라고 말했다.
······ 그러자 공손추가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선생님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의 부동심에 대하여 들려주시겠습니까?
” 맹자가 말했다. “고자는 ‘남이 하는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마음에서 구하지 말며
마음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기(氣)에서 구하지 말라.’고 했다.
마음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기에서 구하지 말라 함은 옳지만
남이 하는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 함은 옳지 않다.
대저 뜻은 기의 통수(統帥)요, 기는 몸에 가득 찬 것이다. 뜻이 확립되면 기가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을 올바로 지켜서, 자기의 기를 해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공손추가 말했다.
“뜻이 확립되면 기가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하시고 나서, 또 자기의 뜻을 올바로 지켜서
자기의 기를 해치지 말라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뜻을 오로지 하나에만 쓰면 기가 움직이고
기를 오로지 하나에만 쓰면 곧 뜻이 움직인다. 이제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달음질하는 것이 기이기는 하나
그것이 도리어 마음을 동하게 한다.” 공손추가 말했다. “감히 묻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것을 잘하십니까?” 맹자가 말했다. “나는 말을 알며,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르노라.” 공손추가 말했다.
“감히 묻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 맹자가 말했다. “말로 하기가 어렵다.
그 기(氣) 됨이 다시없이 크고 다시없이 강하여 곧게 기르는 데 해(害)하는 것이 없으면 곧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
그 기는 언제나 의(義)와 도(道)에 짝하여 함께하니 이것이 없으면 허탈이 오게 된다.
(公孫丑問曰,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覇王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 孟子曰, 否. 我四十不動心.
曰, 若是, 則夫子過孟賁遠矣. 曰, 是不難, 告子先我不動心.
······ 曰, 敢問夫子之不動心, 與告子之不動心, 可得聞與. 告子曰,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不得於心, 勿求於氣, 可.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可.
夫志, 氣之帥也. 氣,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 敢問夫子惡乎長.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
曰, 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於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고자는 맹자와 같은 시기의 사람으로 성은 고(告)이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일설에 의하면 불해(不害)라고도 한다. 고자는 유가와 묵가의 도를 겸비했다고 한다.
맹분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용사이다.
미숭산 들머리
미숭산들머리는 학생종합야영수련장과 인접해서 그런지
조경석으로 계단과 화단등으로 단장하여 공원에 산책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경남 합천군과 경북 고령군 경계에 있는 미숭산은
옛 이름 상원산(上元山)에서 미숭산(美崇山)으로 부르게된것은
고려 말 위화도에서 요동정벌를 위해 진군하던중 회군하여 정몽주 선생 제거후
고려 왕조의 충신,왕족을 제거하는등 혈육마저 정치 권력을 위해 제거한
조선(朝鮮) 이성계의 반란군에 끝까지 맞서다 순절한 안동장군 이미숭의
지조와 얼이 살아있는 역사의 산이라고 전한다.
미숭산 초입구간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우수관로를 만들어 침식을 막은듯 하고
산객들이 자주찾는 곳인지 탐방로는 넓고 지반은 단단하다
산 아래는 봄기운이 만연하다
나무가지마다 가득 새싹을 머금고 있고 썸타는 새소리 요란하였다.
봄바람은 차갑다 일기예보에는 오후늦게 비가 온다 했는데 햇살은 쨍쨍하다.
미숭산 소나무
미숭산은 소나무로 빼곡하다 이미숭 장군의 지조와 기개를 상징하듯
솔향기 가득 내뿜고 사시사철 푸르게 미숭산을 지키고 있다
소나무 군락지라 아마도 송이버섯이라도 많이 나올듯한 미숭산 모습이다
미숭산은 고령과 합천의 경계로서 삼국시대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미숭산 인근인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에는 월광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29호)이 있으며
이 석탑은 월광사지 동서로 배치된 쌍탑으로 서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최근에 다시 세웠다.
이 중 기단에 삼층 몸돌을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탑의 모습을 보이며 높이는 5.5m이라고 한다.
두 탑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만든 방법은 약간의 차이가 있어
같은 연대에 세워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고 있다.
월광사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월광태자)이 창건했다고 해서
월광사라고 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미숭산 진달래꽃
미숭산에는 진달래가 여기저기 많이 피어 있었다
산행하면서 유년기 시절 생각이나 진달래꽃닢을 몇개 따먹어 보았다
어릴적엔 창꽃이라 하여 어른들은 담금주를 담그기 위해 꽃닢을 채취도 하였고
진달래 화전도 하여 얻어먹은 기억도 새록하다.
진달래 이후에 피는 철쭉은 먹어면 그라야노톡신 독성이 있어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야 하므로 구분해서 잘 먹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달래축제를 하는 명산들이 많다
여수 영취산을 비롯해서 거제 대금산 진해 시루봉 창원 천주산 무학산 창녕 화왕산도 유명하다.
미숭산 생강나무꽃
봄에는 노란색꽃으로 물든다. 봄의 전령은 노란색꽃이다
생강나무꽃은 쌍떡잎식물 미나리아재비목 녹나뭇과의 낙엽 관목으로 한국, 일본
중국의 산지 계곡이나 숲속 냇가에서 자란다.
3월에 노란 꽃이 피고,열매는 9월에 흑색으로 익는다. 나무껍질은 약재로 쓴다.
인간 세계에 선각자가 있듯이 나무나라에도 봄이 오고 있음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생강나무라는 초능력 나무가 있다.
예민한 ‘온도 감지 센서’를 꽃눈에 갖추고 있어서다.
생강나무는 숲속의 다른 나무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날 꿈도 안 꾸는 이른 봄에
가장 먼저샛노란 꽃을 피워 새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꽃말은 ‘매혹, 수줍음’이다.
※ 생강나무 특징과 사용방법
납매(蠟梅)·새앙나무·생나무·아위나무라고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동백나무라고도 부르는데
동백나무가 없던 지역에서 생강나무의 기름을 짜서 머릿기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나무껍질은 회색을 띤 갈색이며 매끄럽다. 새로 잘라낸 가지에서 생강 냄새와 같은 향내가 나므로 생강나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생강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 나무껍질과 잎을 말려서 가루를 내어 양념이나 향료로 썼다고 전해진다.
유사종으로 잎이 전연 갈라지지 않는 것을 둥근잎생강나무, 잎이 5개로 갈라지는 것을 고로쇠생강나무
잎의 뒷면에 긴 털이 있는 것을 털생강나무라 한다. 관상용·식용·약용으로 이용된다.
꽃은 향기가 좋아 생화로 쓴다. 열매는 녹색→황색→홍색→흑색 순으로 익어가므로
다양한 색의 열매를 관상할 수 있으며 단풍도 볼 만하여 관상수로 적합하다.
열매는 기름을 내어 머릿기름으로 사용하는데 특히 이 머릿기름을 사용하면 흰 머리가 생기는 것을 막아 준다고 믿어 왔다.
어린싹은 작설차(雀舌茶)라 하여 어린잎이 참새 혓바닥만큼 자랐을 때 따서 말렸다가 차로 마신다.
또 연한 잎을 따서 음지에서 말린 뒤에 찹쌀가루를 묻혀 기름에 튀기면 맛있는 부각이 된다.
어린가지를 말린 것을 황매목(黃梅木)이라 하며 약재로 쓴다. 약으로 쓸 때는 주로 탕으로 하여 사용한다.
빼곡한 솔숲에서
바람이 오늘따라 많이 차갑다
이미숭장군의 고려를 잃은 슬픔이 봄바람따라 흘러 왔는지 차갑기만 하다
※ 가뭄도 비껴가는 미숭산과 기우천
가뭄도 비껴가는 미숭산과 기우천은 고령군 쌍림면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에 위치한
미숭산으로부터 발원한 기우천(祈雨川)에서 키를 들고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행동을 했다는 기우제 행위담이다.
미숭산은 원래 상원산으로 불렸는데, 고려 말 안동장군 이미숭(李美崇)이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후에도 소환에 응하지 않고 이 산에서 순직하자
그때부터 이 산을 미숭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월막리는 마을 뒷산이 달과 같이 생겼다는 뜻에서
혹은 달이 뜰 때면 뒷산의 모양이 막(幕)을 친 모양과 같다는 뜻에서 생겼다고 전한다.
월막리에는 미숭산에서 발원하여 마을 앞을 지나는 시냇물이 있는데 이름이 기우천이라고 전한다.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에는 미숭산에서 발원하여 마을 앞을 지나는 시냇물이 하나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시냇물을 ‘기우천’, 즉 ‘비 오기를 비는 시내’라고 부른다.
마을에 가뭄이 들어서 농사를 짓지 못할 정도가 되면 기우천 앞에 마을 아낙들이 아이 키만 한 ‘키’를 들고 모인다.
동네 아낙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다 모이면 아낙들은 키를 들고 기우천으로 들어간다.
기우천에 들어가서 다 말라가는 시내에서 키로 물을 떠내는 흉내를 하고
또 그것을 머리 위에서 붓는 흉내를 낸다. 마을의 모든 아낙들이 그런 행위를 반나절 정도 하면
검은 비구름이 몰려 와서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미숭산 탐방로 나무계단
초입구간을 약간 비켜 지나자 가파는 산길로 이어졌다
산길 하나하나에 이미숭 장군의 이야기가 있다.
가뭄도 비껴가는 미숭산과 기우천의 주요 모티프는 ‘미숭산에서 발원한 비 오기를 비는 시내’이다.
농경에 의존했던 전통 사회에서 기우제는 나라 전반의 중요한 사안이었으며
그 형태도 다양하였다. 국왕이 사묘에 비는 방식,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방식, 죄수를 방면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방식, 여러 가지 금기를 행하는 방식, 동물을 희생으로 바치는 방식
장시를 옮기는 방식, 무당이 굿을 하는 방식, 용을 그려 비를 기원하는 방식
줄다리기를 하는 방식, 물병을 거꾸로 거는 방식, 부녀자들로 하여금 산천에 방뇨하는 방식 등이 있었다.
고령 지역에서는 유교적 제의 절차에 따른 헌공축원형과 영험 있는 산 정상에서 불을 피우는 산상봉화형
그리고 부녀자들이 냇가에서 물을 퍼내는 시늉을 하는 것이 기우제의 주된 방식이었다.
월막리 기우제는 고령 지역 기우제의 일반적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기우천에 들어가서 다 말라가는 시내에서 키로 물을 퍼내는 시늉과 그것을 머리 위에서 붓는 흉내는
고령 지역 주민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행위 예술 창조’라 할 수 있다
미숭산 정상 1.2km
이제 중간즈음 산행 했다보다 정상이 1.2km남았다
차가운 봄바람 덕에 땀은 커녕 춥기만 하다 봄이 오다 차가운 바람에 밀려 나갔나 보다.
이미숭 장군은
고려 말 우왕 때 벌어진 요동정벌 때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의 급진적 개혁파와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건국하였다.
그 과정에서 신왕조의 개창에 반대한 정몽주(鄭夢周)는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선죽교에서 격살됨으로써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켰다.
정몽주처럼 죽음으로써 항거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두 임금, 나아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조선에서의 벼슬을 마다한 채 지방으로 낙향하여 끝까지 절의를 지킨 이색, 길재 등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의 사서류와 문집류를 살펴보면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의 개국에 반대한 세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김천 등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의 덕대산성과 관련된 전설에는
구성면 흥평리와 대항면 향천리 방하재 사이에는 덕대산[811m]이 있는데
이 산에 석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흥평2리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말 정몽주의 문하 안동장군 이미숭과
진서장군(鎭西將軍) 최신(崔信)이 이성계와 조선 왕조의 개국에 반대하여 관군과
충청도 미산(尾山)에서 접전했다가 패하고, 덕대산에 들어와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퇴하여
성주를 거쳐 원산(元山)[가야산맥]에서 접전 끝에 전사하였다.
귀원삼거리
귀원삼거리는 고령에서 산행하는 길목과 합천에서 산행하는 지점이 맞닿는 곳이다.
고령에는 대가야테마파가 있어 대구에서 많이 찾는다고 하며
오늘도 대구에서 온 산객들이 몇분 보였다.
고령에 있는 미숭산에 얽힌 이야기는 덕대산전투와 관련된 전설과 내용을 달리 한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말 이성계의 집권에 항의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저버리지 않은
이미숭이 미숭산 정상에서 높이 3m, 둘레 1.5㎞의 석성을 쌓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후일을 도모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울분을 참고 거사를 포기하여 산중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원래의 산 이름은 상원산(上元山)이었으나 이미숭의 이름을 따서 미숭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미숭은 1346년에 태어났지만 사망 연대는 전해지지 않는다.
본관은 여주, 호는 반곡(盤谷)이며, 어머니는 평강 채씨(平康蔡氏) 채윤(蔡允)의 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충절과 의리에 대한 언행을 일삼았고
정몽주에게서 경학을 배웠다. 이미숭은 고려가 쇠퇴해 가는 것을 한탄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속으로 새겼는데
무반으로 등용되어 관원으로 출세한 뒤에도 늘 병서를 읽고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산객들의 흔적
깃표중에는 대구 산악회가 몇개 보인다 아마다 고령은 대구와 입접해서 그런가 보다.
고령에서 전해지는 이미숭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숭은 북방 오랑캐의 침략과 왜구의 노략질이 있을 때마다 전장으로 나아가 무찔렀으며
마침내 안동장군이란 직책을 받았다. 결국 고려 왕조가 멸망하자
스승의 뜻을 받들어 충의군을 조직하여 덕대산전투 등을 통해 태조의 군대에 저항하였다.
임진왜란에는 주민들이 덕대산에 피난하여 성을 수축하고 전쟁에 대비했으나 접전은 없었다고 전한다.
이미숭장군의 기개같은 솔숲을 걷다
솔향기 가득하다 산에 오르는 맛이 여기에 있다
폐 깊숙히 파고드는 솔향기 처럼 마음도 편안하다.
※ 이미숭 장군과 애마(愛馬)
「미숭장군과 애마」는 고려 말 장수인 이미숭의 비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물담이자
고려의 재건에 실패한 미숭 장군의 한이 서린 미숭산의 지명과 관련한 지명유래담이다.
미숭산은 대가야읍의 주산(主山)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고려 말 이성계에게 끝까지 저항하며 지조를 지킨 안동장군 이미숭이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1982년 고령군에서 출간한 『대가야의 얼』과 1988년 고령문화원에서 발행한
『우리 지방의 민담·전설 및 지명 유래』, 그리고 1997년 고령문화원·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에서
간행한 『고령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각각 실려 있다.
이는 고령군청 문화공보실에서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 주민 조용찬[남, 87]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고려의 재건을 위해 미숭산에서 이성계 군사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이미숭 장군이
어느 날 아주 훌륭한 준마 한 필을 얻었다.
장군은 이 말의 기능을 시험해 보기 위해 미숭산에서 4㎞ 떨어져 있는 월광사 탑을 향해 화살을 쏘아 놓고 말을 달려
그 탑에 이르고 보니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장군은 말이 너무 느린 것을 책망하여 말의 한쪽 발을 칼로 치는 순간 “쌩~”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서
그 탑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다. 장군은 과연 애마의 날쌤이 화살보다도 더 빠른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후 이 애마는 이미숭 장군과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한다.
「미숭장군과 애마」의 주요 모티프는
‘화살보다 빠른 애마와 운명을 같이한 미숭 장군’이다.
이 이야기는 미숭 장군의 죽음과 그의 애마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서사화한 모티프를 갖고 있는
인물담이자 지명유래담이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장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배한다는 전설은 아주 흔하다.
대표적인 예가 「아기장수 전설」이다. 이 전설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그 아기가 역적이 되리라는 두려움과 뛰어난 인물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가 아기를 죽인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미숭장군과 애마」 역시 아기장수 전설의 기본 모티프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실수를 알고 장수가 죽게 되었다는 결말도 보편적이다.
장수와 애마의 비극은 단순한 실수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적·시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미숭산성 (美崇山城)서문
우리 일행은 미숭산성 서문으로 정상을 향해 걸었다
잠시 미숭산성의 얽힌 유래를 읽어면서 역사를 상기 해보았다
이미숭장군은 그는 정몽주의 문인으로 진서장군 최신과 함께 미숭산을 근거지로
이성계에 항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절벽에서 투신했다.
그가 항전했던 미숭산 정상부에는 미숭산성(경남 기념물 제67호)이 있다.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8부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1325m에 이르며 삼국시대에 축조돼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보축됐다.
산성 내에는 동문 서문 남문을 비롯해 갑옷과 칼을 묻었다는 갑검릉, 말을 달리던 주마대
망향대, 달각암, 연병장, 순사암, 봉수대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성은 고려시대 원나라의 침입 때나 왜구의 침입 때 인근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됐고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설치돼 통신의 거점으로 이용됐다.
미숭산성(美崇山城)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하빈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서
길이 1.45㎞, 지정면적 5,024.70㎡. 경상남도 기념물 제67호이다.
미숭산의 정상부를 자연지세를 따라 돌로 둘러쌓은 산성으로 지금은 다 무너져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498m이고, 성 안에 못 하나와 우물 여섯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분군이 있어서 가야시대에 이미 이 고장의 중심지였다고 여겨지며
신라 때의 야로현(冶爐縣) 이전에 적화(赤火)라고 부르던 시대의 유적으로 생각된다.
고려 말기 미숭장군(美崇將軍)이 조선왕조의 성립에 불만을 품고 항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가야와 신라와의 관계에서 전해오던 전설이 후대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된 것인 듯하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나 왜구의 침입 때 인근주민들이 이곳에 들어와 생명과 재산을 보전하였다 하며
조선시대는 봉수(烽燧)가 설치되어 통신을 연결하였던 점에서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이었음을 알 수 있는 유서깊은 성터이다.
미숭산성(美崇山城)서문에 있는 기둥세웠던 흔적
미숭산의 원래 이름은 상원산이었는데 이성계의 조선 왕조 개창에 항거한
이미숭이 고려 왕조 부흥에 뜻을 두고 이곳에서 군사를 조련하며 힘썼으나
웅지를 이루지 못하고 휘하의 장군들과 함께 순절하여
후인들이 이미숭을 추모하여 미숭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미숭산성의 전설로 보아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성안의 채집 유물 가운데 대가야 토기편이 많고, 조선시대 백자편과 옹기편도 있다.
기와편도 7세기 중엽의 것부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것이 여럿 포함되어 있어
미숭산성이 오랜 세월 동안 유지,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채집되는 유물과 주변 지역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대가야시대에 축성된 산성이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쌍림면 용리와 합천군 야로면 하빈리의 경계 부분에 위치하며
대가야 도성의 배후성인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는 주산성으로부터 5㎞ 정도 떨어져 있지만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접근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