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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이방산(山淸 二坊山),임진왜란 의병(義兵)의 발자취 따라 이방산 정상에 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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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이방산(山淸 二坊山),임진왜란 의병(義兵)의 발자취 따라 이방산 정상에 서다

바다늑대FORCE 2018. 12. 22. 21:18

산청 이방산(山淸 二坊山)

 임진왜란 의병(義兵)의 발자취 따라 이방산 정상에 서다


▲ 경남 산청 이방산(山淸 二坊山)

   이방산 높이:716m

   치 :  경남 산청군 삼장면에 있는 산. 


▲산행일  : 2018년12월22일 토요일  날씨 : 맑음


▲나의산행코스 : 

산청 삼장면 체육공원주차장-→ 덕교마을 들머리→ 밤나무임도→상사바위

→ 굴바위 → 깃대봉갈림길 →이방산 정상(원점회귀)

편도2.8km  왕복 2시간 05분 소요

▲ 이방산 행지 개요:

감투봉, 이방산(二方山)은 구곡산 같이 지리산 위성봉으로서

천왕봉 산행이 곤란할때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매력있는 산인데 등산로가 명확하지 않아

독도에 자신이 있어야 즐거운 산행이 보장되나 무엇보다 원시림 그대로이기 때문에

매력만점 산행지로는 손색이 없는 산이다.

이방산 등산로 입구의 덕교리 마을 앞에는 파구정이란 곳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손씨 3형제가 이끄는 의병들이 잠복하였다가 왜적을 맞아서 싸워 이긴 곳으로

왜구를 파멸시켰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유래하였다.

삼장면과 시천면 사이에 우뚝 솟은 이방산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유서 깊은 곳으로서 그 발자취가 역력하며

삼장면 덕교리에서 해발 600미터에 이르는 이방산을 넘어서면

시천면 사리인 마근담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웅석봉에서 남으로 뻗은

지맥이 갈라진 골짜기로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이다.

산행 길잡이는

시천면소재지에서 대원사 가는 길을 가다가 삼장면 소재지를 지나

덕교리의 덕교마을이 산행초입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오른쪽의 이방산 정상쪽의 밤나무 단지에서 계곡쪽으로 가다가

계곡을 접어들지 말고 계곡 못미쳐 경운기 길을 따라 가다보면 넉넉한 오솔길이 이방산 가는 길이다.

30분정도 산행하면 길은 희미하지만 워낙 숲이 울창하여 지도와 나침반을 준비하고

산행을 하면 무리는 없을 것 같고 무엇보다 이방산 산행은 원시림 그대로이기 때문에

같은 700m 고지 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멋과 운치가 있는 산이다.

계곡에서 1시간 30분을 산행하면 헬기장이 나오는데 이곳은 정상이 아니고

오른쪽의 숲속이 정상인데 정상은 숲이 우거져 조망대 역할은 미흡하며 헬기장에서

북쪽능선을 따라 가면 되는데 1km 구간은 숲속 산행의 진수를 느낄 정도로 아늑하고

푸근한 길인데 1km 정도 더 걷다 보면 다시 제2헬기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난 길이 감투봉 가는 길이며 왼쪽은 덕교리 및 석남리로 하산하는 길이다.

여기서 500m 산행하면 임도가 가로질러 나 있는데 건너편 절개사면을 오르면 되는데

숲이 울창하니 독도에 조심하시고, 임도에서 750m를 더 가면 비로소 감투봉 정상이다.

정상은 헬기장으로서 북서쪽으로 국수봉, 써리봉, 중봉, 천왕봉이 눈앞에 보이고, 웅석봉은 코앞에 있다.

거리는 덕교마을에서 이방산 정상까지는 2.5km 이며 1시간 30분 소요되고

이방산 정상에서 감투봉 정상까지는 2.5km 이고 1시간 10분 소요된다.

감투봉에서의 하산은 임도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덕교리나 석남리로 하산하면

길을 잃는 일은 없지만 감투봉에서 괴음정으로 하산하면 잡목이 울창해서 운행이 곤란하니

선택을 잘 하여야 될 것이다. 하산시간은 1시간 30분이 소요되는데

감투봉 정상에서 괴음정까지는 2.5km이고, 석남리 및 덕교리도 2.5km이다.


▲  이방산 등산지도



찾아가는길

 진주ic삼거리 →→→남해고속도로 진주jc→→→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TG→→→지리산대로 시천삼장 우측도로

 →→→삼장면 체육공원주차장

49km 승용차 45분 소요.


→→→→→2018년 12월22일 토요일 동짓날이며

우리나라 구석구석  그리고 산을 찾아 길을 나서본다.

오늘은  삼장면 덕교리 마을 앞에는 파구정이란 곳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손씨 3형제가 이끄는 의병들이 잠복하였다가

왜적을 맞아서 싸워 이긴 곳으로 왜구를 파멸시켰다고 하는 역사의 길을따라

산청 이방산으로 산행길에 나서본다.

올 2018년 정상석 찍기 60회째 산행이다.


↗ 이방산 이정표

59번 국도를 타고 산청방으로 가다보면 후천 마을과 덕교마을 중간지점에 있으며

지리산 산청샘물공장 과 삼장면 생활체육공원쪽에 있어 찾기가 쉽다

이방산은

대포리 전체가 배(航)의 형국인데 대포(大浦.한벌)마을과 후천(後川,뒷내) 마을이 배의 가운데 이고

도대마을이 배의 돛대에 해당한다

도대마을에서 시작되는 계곡을 도대골이라 하는데

이 계곡을 따라 오르면 상사바위 갓바위 굴바위가 나오고

옛날에 호랑이가 제집처럼 놀았다는 호랑이 안방을 지나 이방산(715m)과 우측 깃대봉(710m)에 이른다.

정상에서는 지리산 천왕봉이 바로 건너편에 보이고

멀리 남해바다도 볼수 있으며 일출과 구곡산 일몰은 장관을 이룬다.

산주위에는 복수초,야생란, 금낭화가 군락을 이루고

생강나무,희어리,진달래,철쭉꽃이 아름다우며

멧돼지,노루,담비,오소리 등을 지금도 볼수 있다.


↗ 삼장면 생활체육공원

이방산에 산행을 위해서는 삼장면 체육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편리하다.

삼장면체육공원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친환경로409-28(덕교리 845번지) 위치하고 있다.

테니스장 풋살장 운동장도 있고

캠핑을 할수도 있다

캠핑카 주차장과 캠핑장 사이트가 60개로 구성되어 있고

전기 화장실 샤워실 취사장 등 편의시설도 잘 되어있어  야영하기 편리하도록 조성 해 놓았다.


↗ 이방산 들머리

후천마을과 덕교마을 중간쯤에 있는데 덕교마을에 해당한다.

옛 문헌에 보면

선시대 사대부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만 70여 편이 전해진다

그 중 김종직(1431~1492)<유두류록>,그의 제자로 35세에 죽임을 당한

김일손(1464~1498)<두류기행록>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를 보면 한 인물이 과대 평가 되기도 하고, 과소 평가 되기도 했는데

과소평가된 대표적인 이중 한 분이 점필재 김종직이다.

조선의 청백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인 김종직은 밀양 부북면에서 태어나

거기서 죽어 지금도 생가가 보존되고 있고, 그의 후손들이 무오사화때 피난한 이래

고령군 쌍림면에 350여년간 살고 있기도 하다 

그는 단종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조5(1459)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글 잘하는 선비 10명을 선발해 학예와 문장을 겸하게 할 때

형 김종석과 함께 선발되기도 했다.

그 후 감찰이 됐다가 파직되기도 했으나 경상도병마평사가 됐고 그 후 교리.

이조좌랑. 수찬등을 지냈다. 1471 함양군수로 와서 학문을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고 화목하게 하는 정사를 펼쳤다. 

그 이듬 해 추석, 45일 일정으로 지리산을 유람하고 그 유명한 유두류록를 남겼고

그 후에도 11편의 유람기를 썼다. 

선생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 성과를 날렸는데 어세겸은 그의 시를 보고 찬탄하여

나는 그의 종 노릇 밖엔 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성종이 문사들을 뽑았을 때 김종직 선생이 제일이었다. 

학문과 문장으로 당대의 우두머리가 됐으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각각 수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학자들이 김종직 선생에게 칭찬을 한번 받으면 갑자기 유명한 선비가 되기도 했다.

당대의 도학(道學문장가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쏟아져 나왔다. 

 김종직 선생이 61세에 사망했는데, 6년후 연산군 4(1498)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났다.

제자 김일손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김종직 선생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됐다 

조의제문은 중국의 고사(故事)를 인용해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됐다. 또 많은 문인이

참화(慘禍)를 입었다. 그러나 중종반정 후 벼슬이 회복됐으며 숙종 때는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청구풍아.당후일기 등이 있는데 오늘날 많은 대학 학계에서 그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즐비하다.


↗ 이방산 산행로 초입구간

이방산 초입구간은 밤나무산 임도 끝까지 올라가면

이방산으 등산로와 연결 되어 있다.

아마도 봄에오면 향긋한 밤꽃향이 진동할듯 하다.

이방산은 웅석봉 그리고 석대산 넘어 보이는 달뜨기능선에서 갈라져 나온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방산 코스는 종주꾼이 아니더라도 찾아볼 만한 좋은코스의 하나다.

특별히 내세울 암봉 하나 없는 평범한 산세를 이루고 있지만 깊고

그윽한 품은 지리의 여느 능선 못지않게 넓고 넉넉하다.

지금은 호젓한 등로에 낙엽만 무수히 쌓여 그윽함의 정취를 더하고 있다. 

↗ 이방산 산행로 밤나무 임도구간

임도 양측으로 밤나무가 즐비하다

원래 산청군에는 밤 생산이 많이 되는곳이다 하지만 농업인구가 고령화 되고

줄어드는 추세에서 밤생산량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산청에는 또한 곶감도 유명하다.

지리산 산청곶감 축제가 매년 1월초 4일간 개최되고 있다

산청곶감은 지난 2016년부터 3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브랜드로 선정됐다고 한며

특히 산청곶감의 원료감인 산청 고종시 역시 2016년부터 3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과일로 선정된 바 있다.

이는 산청곶감의 맛과 품질이 전국 최고임을 입증한다고 전한다.


↗ 이방산 산행로 밤나무 임도 끝구간

임도를 한참 걸었나 보다 이젠 끝이 보였다.

삼장면 이방산 주변에서 손씨 삼형제 의병활동이 나오는데

문헌에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3차는 의병운동이 전민족적 항쟁으로 발전하여 국권방위 전쟁으로서의 성격을 띠던 시기로

19078월 군대해산후부터 19099월 소위 남한 대토벌작전까지를 말한다

19076월 헤이그 제2회 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한국식민지화를 계속해 나갔다.

718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했다.

(1907. 7. 22) 일제는 그 여세를 몰아 7247개조의 정미조약(丁未條約)을 체결 조인하여

한국의 모든 내정권도 법적으로 통감이 장악하게 하였으며, 731일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강압에 의하여

새로 즉위한 순종은 한국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해산의 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해 해산군대가 의병항쟁에 합류함으로써 반일항전의 범위가 확대되었으니, 이것이 곧 3단계의 말기 의병운동이다.
이 시기는 일제와 조선민족과의 모순이 보다 첨예화하였다.

1908년 후반기부터 1909년 전반기에 걸쳐 의병운동의 중심지는 종래의 전국적인 규모에서

전라남· 북도로 옮아가 드디어 1909년 말에 이곳에 대한 일본군의 피비린내나는 대토벌로 의병운동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와 아울러 1908년에서 1909년에 걸친 의병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의병운동 내부에는 중요한 내적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종래의 저명한 의병장이 전사 또는 극형· 은퇴함에 따라 점차로 평민의병장의 비중이 높아지게 되고

이와 관련하여 의병투쟁도 점차 소단위부대로 분산하게 되는 동시에 다원화 되면서 완강한 저항력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가 작성한 기록에 의하면 19078월에서부터 19108월에 이르기까지

경남 진주권내의 의병 투쟁은 약 3백회에 달하고 42백여 명의 의병이 일제의 군경과 교전했거나 부왜인 처단

일본인 공격 등에 가담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진주권의 전환기(말기) 의병투쟁은 초기에는 의령· 삼가· 곤양· 하동 등 진주 인근에서 활약하다가 일본 군경과 밀정

그리고 부왜인들의 추적에 의해 신분이 드러남과 동시에 의병활동 하기가 어려워지자 차츰 서부경남 산간부(山間部)로 옮겨 갔고

특히 하동, 산청 등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했다.

주한 일본군 헌병대장 아까이시(明石元二郞)의 보고(1908. 8. 20∼9. 16)에 의하면

부산, 상주 등지의 관구에는 평온했지만 진주 관구에서는 의병투쟁이 격렬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관구내는 의연히 불온하다.

산청군 삼장면, 시천면 부근에는 적괴(의병) 윤승지(尹承旨)·박동희(朴東熙)·장세경(張世景)·송가(宋哥)·손구룡(孫九龍) 등이

인솔하는 약 5백명의 적단이 있다고 하는 정보가 있다. 본 기간 산청군내에서 약 15명과

덕산·하동군내에서 약 30명의 적이 출몰하였고, 거창군 지방에서도 소수의 적이 2회 출몰하였다.

하동부근 각 부대에는 적도의 출몰이 빈번하고, 특히 93일 아침 각 방면으로부터 다수의 적이 하동에 내습한다는 정보가

민간에 전해져서 인민은 크게 공포하고 군수와 같이 피난하는 등 형세가 불온하다.(독립운동사 자료 12, 324)
위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후기 진주권의 의병투쟁은 야산지대를 벗어나

주로 서부경남 내륙의 산골을 근거지로 하여 유격 전법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이 무렵 일본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진주 관찰부의 관문인 사천· 삼천포 및

남해·하동 지방의 선착장과 남강·섬진강 등의 나루터, 기타 주요 지점에 감시병을 배치하고 대낮에도 사람들의 왕래를 통제하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일제는 물샐 틈 없는 경비와 아울러 의병 토벌은 물론, 의병활동의 협조자를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의병과

주민들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차단한 후 의병에 대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한다.


↗ 이방산 운지버섯(구름버섯)

산행로 주변 썩은나무에 운지버섯이 구름모양으로 피어 있다

운지버섯은(구름버섯)

균모의 폭은 1-5이고 두께는 1-2이고 얇고 단단한 가죽질이며

반원형, 수십 또는 수백 개가 겹쳐서 군생하며 1년생이다.

면은 흑색인데 회색, 황갈색, 암갈색, 흑색을 띠는 고리 무늬를 나타내고 짧은 털로 덮여 있다.

살은 백색이고 표면의 털 아래에는 암색의 피층이 발달한다.

하면은 백색, 황색, 회갈색 등이며 관은 길이 1정도로 구멍은 둥글고 13-5개 있다.

포자는 무색의 원통형 또는 소시지 형이며 5-8×1.5-2.5이다.

발생은 1년 내내 침엽수와 활엽수의 고목에 군생하는 목재부후균으로 백색부후를 일으킨다.

 이 버섯에서 처음으로 버섯에 항암물질인 폴리사카라이드가 발견되었다.

분포는 한국에서는 가야산, 다도해해상국립공원(금오도, 연도), 두륜산, 방태산, 발왕산, 변산반도국립공원

소백산, 속리산, 오대산, 월출산, 지리산, 남산, 백두산, 만덕산, 어래산 등

한국의 전역에서 자생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분포한다.


↗ 이방산 상사(相思)바위

산행을 하다보면 산행지 마다 상사바위가 많이 존재 하고 있으며

상사바위에 얽은 전설도 비슷한 내용도 많다.

이방산 상사바위 전설을 보면

옛날 서질골(현재 삼장농협뒤)에 질그릇을 굽는 도공 노부부와

얼굴이 예쁜 금녀라는 딸이 살고 있었다.

금녀는 매일 아침 집앞을 지나 서당가는 양반집 아들 이도령의 모습애 반하여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로 금녀는 이도령에게 사모의 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 애정만 날이 갈수록 깊어 갔다.

세월이 흘러 이도령이 좋은 혼처가 생겨 결혼을 하게되자

금녀의 짝사랑은 더욱 깊어져 병이 되었다.

상사병에 걸린 금녀는 따뜻한 봄날 나물캐러 산에 올랐다가

큰바위 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금녀의 눈네 저 멀리 있는 바위에서 갓을 쓴 이도령이 거기로

오라는 손짓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넋이 나간 금녀는 거기로 가려다 그만 소(沼)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후 금녀가 떨어져 죽은 바위를 상사(相思)바위,갓을 쓴 이도령의 허상이 보였던

바위를 갓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이방산 상사(相思)바위

상사바위 전설은 금녀의 상사병으로 떨어셔 죽은 장소 였다

높이도 3m정도는 되어 보인다.

이도령에게 한마디 말도 못건네 보고 죽은 금녀의 짝사랑이 아쉽다

갓바위는 상사바위에서 상부쪽으로 10m정도의 거리에 있는데

여긴 표식이 없어 상사바위 전설을 읽어보지 않으면 갓바위인지  알수없다.

산행하면서 갓처럼 생겼나 쳐다 보았는데 흙산에 바위 하나만 둥그러니 있을 뿐이다.

지금도 보면 상사병으로 자살하는 경우를 언론을 통해 볼수있다


↗ 이방산 산행로

겨울에 이방산을 오르니 온통 낙엽뿐이다.

한걸음 걸을때 마다 낙엽 밟는 소리가 바스락 바스락 산길에 울려 퍼진다

산행로 주변엔 멧돼지 먹이 찾은 흔적 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뿐

정자나무 쉼터에서 이방산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으며

하나는 진행방향 왼쪽의 지능선을 따라 곧장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면의 계곡쪽으로 오르는 길이다.

간적 차이가 별로 없고 등로 역시 둘다 뚜렷하기 때문에 어느 것을 택해도 무방하다.


↗ 이방산 굴바위

호랑이굴 같이 제법 크다 요즘엔 호랑이는 없을 것이고

지리산 반달곰이 겨울잠을 잘려나 한번 살펴보자

정말 예전에는 호랑이가 생활할 만큼 굴이 깊어보였다

예전에 지리산 새끼 반달곰은 지리산에 방사된 뒤에

지리산 노고단 주변에서 등산객들에게 자주 노출되었으며

보통 같은 경우에는 등산객들이 놀라겠지만 지리산 새끼 반달곰은 덩치가 작아서

사람들이 귀여워 하면서 초콜릿 과일 음료등 먹이를 주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 이방산 굴바위

요즘들어 지리산 주변 마을주민들에게

방사된 반달곰이 발견되어 사람들이 도망치기도 했다는 마을 주민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지리산 주변산을 산행하면서 반달곰 흔적이나 본적은 전혀 없다.

사실 반달곰은 표범보다 더 위험하다

야생동물들은 쇠소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배낭에 방울을 달고 산행하는게

야생동물 퇴치에 도움이 된다.


↗ 무릎까지 오는 쌓인 낙엽

이방산은 온통 낙엽으로 뒤덮혀 있으며  조망은 그다지 좋지 않다

낙엽으로 인하여 등산로도 보이지 않으며 미끄럽기도 하다

보행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이방산 산행은 딱바실에서도 많이 오른다

여름산일 경우는 딱바실에서 오르는게 좋다 흐르는 계곡따라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주 등산로도 계곡을 따라 오르기에 여름에 이코스를 많이  이용 한다고 한다.



↗ 이방산 산행로

쌓인 낙엽으로 인하여 등산로가 확인조차 어렵다


삼장면 덕교리는

덕교리(德橋里)는 무근다리, 무근들, 진교, 덕교 등이라 부르는데 본래 진주군 삼장면의 지역으로서

옛날에는 진교(묵은다리)라 하였는데 도보로 다니던 시절에 묵은 다리가 있던 곳이라는 뜻이다.

마을 뒤에는 이방산이 높이 솟아 있다

마을앞에는 남명선생이 그의 제자 덕계선생을 전별하던 송객정과 임진왜란때 왜적을 파한 파구정등이 있고

들이 넓고 기름진 큰 마을이다.

조선 제26대 고종 광무10(1906)에 산청군 삼장면에 편입되고

19143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상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덕교리라 하였다.

매년 정월에 동신제를 지내는데 지금도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 이방산 깃대봉 삼거리 갈림길

길림길에 오면 이방상 정상은 그다지 멀지 않다

산청군 삼장면은(三壯面)

대한민국 경상남도 산청군 서부에 있는 면으로서

산간곡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1,000m 내외의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면 경계를 따라 이방산(716m)·구곡산(961m)·국수봉(1,038m) 등이 솟아 있으며

북서부 일대가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한다. 덕천강이 동부의 산간을 흐르고

이를 따라 소규모 농경지가 분포하며 도로가 뻗어 있다.

·보리·콩 등이 많이 나며, 송이버섯·오미자·당귀 등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특산물로 대나무와 부채가 유명하다.

유물·유적으로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33-1)를 비롯하여 대원사 다층석탑(보물 제1112)

내원사 삼층석탑(보물 제1113), 대포리 삼층석탑(보물 제1114)

삼장사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 등의 문화재가 많이 있다.

행정구역은 대포리·내원리·대하리·덕교리·석남리·평촌리·유평리·홍계리 등

8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21개리)


↗ 이방산 정상0.40Km
삼장면 덕교 및 후천마을 그리고 이방산에는 임진왜란에 관련한 유적지는

찾아볼수가 없었다.

이방산에 오르다 보면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산청군에서 이정표를 정비한것이 아니라 아마도 도토리산악회에서

설치정비 한것으로 보인다

도토리산악회를 검색해보니 각 지역마다 도토리산악회가 있는것을 확인할수 있었다


↗ 이방산 빨치산 루트 깃표

누군가가 빨치산 루트 깃표를 매달아 놓았다

이병주의 대하소설'지리산'에서 공식적으로 달뜨기능선과 빨치산 루트가 나온다

빨치산이란 여수·순천 사건의 잔류 반란 세력과 탄압을 받은 좌파 인사들

6·25 전쟁 후 인민군 잔류 세력이 지리산 등에 입산하여 전개한 공산 게릴라를 이른다.

빨치산이 빨갱이로 통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해방 후 남로당 활동에서 유격 투쟁을 배합하게 된 것은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비롯된다.

미군정 당국은 1947년 8·15 해방 기념 대회의 옥외 개최를 금지시키고

이를 구실삼아 남로당 부위원장 이기석 등 수많은 간부들을 구속했으며

모든 좌익계 신문을 폐쇄하였다.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활동에 대한 탄압과 주요 핵심 인물에 대한 검거 선풍이

남로당이 폭력 전술로 노선을 바꾸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남로당은 1948년 ‘2·7 투쟁’과 ‘5·10 선거 반대 투쟁’을 통해

부분적인 무장 투쟁 전술을 채택해 비폭력적인 정치 투쟁을 지원토록 했다.

4·3 제주 항쟁의 여파로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 순천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 반란 사건이 일어났고

14연대는 반란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11월 하순에 유격 거점을 마련했다.

각 지역의 남로당 조직은 14연대 반란군이 주축이 된 지리산의 반란군과 합세해 곳곳에서 관공서를 습격했다.

한동안 전라남도 구례 지역에 국한되었던 관공서 습격은 11월 중순 이후

전라남도 곡성·광양, 전라북도 남원·무주·장수, 경상남도 거창·함양·산청·진주·하동 일대로 번져 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이방산 정상(二坊山 頂上) 716m

이방산 정상이다 여기서 보면 지리산 천왕봉이 세세하게 보이다고 하지만

미세먼지 그리고 수목으로 인하여 조망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방산 지리태극 산행코스는 이곳 말고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59번 국도변 찬새미가든~상사바위~이방산~감투봉~926~백운계곡갈림길

~달뜨기능선~웅석봉~어천계곡~(단성면 방목리)어천마을 이며

시간은 약 5시간30분쯤 걸리며 휴식을 포함하면 7시간쯤 예상해야 한다고 한다.


↗ 이방산 정상(二坊山 頂上) 716m

겨울인데도 포근해서 땀 삐질거리며 등산했는데

산정에 오르니 식은 땀으로 인하여 한기(寒氣)가 들려고 해서

외투를 다시 입었다.

이방산 등산로 입구의 덕교리 마을 앞에는 파구정이란 곳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손씨 3형제가 이끄는 의병들이 잠복하였다가

왜적을 맞아서 싸워 이긴 곳으로 왜구를 파멸시켰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유래하였다.

삼장면과 시천면 사이에 우뚝 솟은 이방산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유서 깊은 곳으로서

그 발자취가 역력하며, 삼장면 덕교리에서 해발 600미터에 이르는 이방산을 넘어서면

시천면 사리인 마근담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웅석봉에서 남으로 뻗은 지맥이 갈라진 골짜기로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이다.



↗ 이방산 정상(二坊山 頂上) 716m

이방산(二方山)은 지리산의 지맥인 웅성봉 남쪽 줄기에 속해 있는 산이다.

웅석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줄기가 마근담봉에서 양분되는데 좌측은 수양산까지 세력이 뻗어있고

우측으로 뻗어있는 줄기는 시천면 면소재지까지 뻗어있다.

우측에 감투봉과 이방산이 속해있다.

이방산(二方山)은 한자의 뜻 그대로 양방향으로만 줄기가 뻗어 있어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고

동서방향의 줄기는 발달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나 경사는 급하편이며 어떤 구간은 칼등위를 걷는 정도의

가파른 경사가 좌우로 형성되어 있다.

이방산과 같은 줄기에 속해 있는 감투봉은 해발이 더 높으나 봉우리로만 알려져 있다.

아마 등산노선이 이방산 위주로 형성되어 있고 감투봉은 산아래에서 직접 오르기에는

경사가 급하여 노선이 능선에만 발달 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주변 조망은 감투봉이나 이방산 모두 높은 관목이 시야를 막고 있어 좋지 못한 편이다.

단 마근담봉에서 감투봉 가는 노선에서는 지리산 천왕봉과 주변 줄기 조망이 우수하고

이방산, 감투봉, 웅석봉 줄기 조망도 좋다.


↗ 이방산 정상 인근 헬기장

정상부근에 헬기장은 마당이 있다

헬기장 표식은 없었지만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지 알수는 없지만......!

이방산(二方山)은

산명은 한자의 뜻 그대로 남북으로 길게 널어져 있는 산줄기가 두 방향으로만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임진왜란때 손씨 3형제가 파구정(삼장초교)이라는 곳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고 감투봉과 삼장면 주변에서 의병 활동을 활발이 했기 때문에

의병 활동의 주 무대인 이곳의 산이름을 감투봉(敢鬪峰)이라 불리어진 것 같다고

전해지고 있다.


↗ 삼장면 생활체육공원에서 바라본 이방산(二坊山)

동짓날 산청에 있는 이방산 산행을 마무리 해본다

올해들어 정상석 찍기 이방산이 60번째이다


인용글 :

자료-인터넷사전,향토문화사전, 한국의산하,우리산줄기이야기,산청군등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

지역주민 인터뷰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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