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늑대 FORCE

고성 운흥사(固城 雲興寺),승병 활동의 근거지인 운흥사에서 선조들의 충의(忠義)보다 본문

바다늑대/山 & 旅行

고성 운흥사(固城 雲興寺),승병 활동의 근거지인 운흥사에서 선조들의 충의(忠義)보다

바다늑대FORCE 2018. 6. 21. 18:54


고성 운흥사(固城 雲興寺)

승병 활동의 근거지인 운흥사에서 선조들의 충의(忠義)보다


▣ 운흥사[雲興寺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와룡2길248-28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 말사

055-835-86560 

♣ 사찰기행일 : 2018.6.20(수) 날씨:맑음


♣ 운흥사  개요:

승병 활동의 근거지이자 조선 수군의 주요 전적지인 운흥사(雲興寺)는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와룡산 향로봉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운흥사는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된 대웅전 건물은

1731년(영조 7)에 재건한 것으로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그밖에 범종루, 산신각,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다만 대웅전 앞에 탑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

대웅전 설명문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탄 부속 건물들을 미처 복원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한다.
운흥사 소재 문화재 중 괘불탱 및 궤는 보물 제1317호, 관음보살도는 보물 제1694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1690년에 만든 운흥사 범종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승병 활동의 근거지이자 조선 수군의 주요 전적지인 운흥사(雲興寺)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 6,000여 명을 이끌고 운흥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승병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격렬한 전투가 승병의 근거지인 이곳에서 전개된 것이다.
이곳은 일본군 입장에서 볼 때는 군량미 조달을 위해

꼭 점령해야 하는 곡창지대인 삼남(三南)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조선군 · 승병 · 의병 입장에서 보면

이 길을 막아야 일본군의 보급로를 봉쇄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최대한 약화시킬 수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 장군도 작전회의를 위해 운흥사에 세 번이나 올라왔다고 한다.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대규모의 승군이 집결한 것이고

일본군도 이곳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화력을 집중해 공격했다.
나중에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이 사찰에 불을 질러 대웅전 등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폐허가 된 운흥사는 방치되다가 1651년에 법성 스님이 중창했다.


♣ 나의 사찰기행 가는길

 진주ic삼거리 →→→진주개양오거리→→→가좌삼거리→→→배춘삼거리

 →→→척정교차로→→→봉현삼거리 운흥사방향→→→운흥사주차장

40km 승용차 50분 소요




→→→→→사찰기행시작

산에 오르면 사찰이 있고

사찰에 가면 산이 있다

고성 향로봉 정상에서 운흥사 승병의 호국정신을 생각하며

고성 자란만의 풍경을 보고서 운흥사 도량을 걸어본다.........!


↗운흥사 일주문(雲興寺 一柱門)

운흥사 일주문은 주차장 인근에 있는데 건축한지 얼마되지 않은듯 하며

단청은 되어 있지 않고 사찰로 가는 길이 현재는 되어 있지 않다.

일주문은

절에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문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서 지어진 것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한다.

문 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 설 때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마음을 촉진시키는 데 그 뜻이 있다.

현상 면에서 나타난 것은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하나가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인 본질 면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반야(般若)와 번뇌(煩惱)가 둘이 아니다.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도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 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일주문이 새워진 것이다.


↗ 운흥사 법당가는길

구름이란 존재는 아주 긍정적이고 친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농사에 꼭 필요한 비를 몰고 오는게 구름이고, 뜨거운 여름 햇볕을 피하게 해주는 것이

또 구름이라 했던가 그래서인지 ‘많은 구름’을 뜻하는 운흥(雲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이 전국적으로 참 많이 있다.


↗ 운흥사 보제루(普濟樓)

운흥사 보제루는 2014년에 건축 되었다고 하며 보통 사찰에서는

절에 따라 만세루(萬歲樓)·구광루(九光樓)라고도 하나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보제루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찰 중심 불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모든 법요식(法要式)은 이곳에서 행하고 있다. 


↗ 운흥사 보제루(普濟樓) 아래 사진

보제루는 사찰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 등이 대중을 모두 수용할 정도로 넓지 못하다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중심 불전을 마주 올려다볼 수 있는 누각에서 법요를 베푸는 옛 방식의 하나로서,

근세에 이르기까지는 이 누각에서 예불하고 설법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즉, 초기 가람 형태에서 금당(金堂)의 뒤편에 배치되었던

강당(講堂)의 기능을 이 누각이 금당의 앞쪽에서 대신하게 된 것이다.

고대의 가람배치와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법회의식 등이 이 건물을 중심으로 진행됨에 따라

공간 배치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절에서는 이 누각에서 법요를 개최하지 않고

각 법당에서 개최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침저녁의 예불까지를 이 누각에서 개최하는 사찰로는

부산의 동래 범어사(梵魚寺)가 있으며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물 제662호인 화암사우화루(花巖寺雨花樓)가 있다고 전한다.


↗ 운흥사 석탑

보제루를 지나 법당으로 향하는 도량 중앙에 석탑이 있으며

아마도 근래에 세워진듯 하였다

고성 운흥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 6,000여 명을 이끌고 운흥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승병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격렬한 전투가 승병의 근거지인 이곳에서 전개된 것이다.
이곳은 일본군 입장에서 볼 때는 군량미 조달을 위해 꼭 점령해야 하는

곡창지대인 삼남(三南)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조선군 · 승병 · 의병 입장에서 보면

이 길을 막아야 일본군의 보급로를 봉쇄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최대한 약화시킬 수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 장군도 작전회의를 위해 운흥사에 세 번이나 올라왔다고 한다.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대규모의 승군이 집결한 것이고

일본군도 이곳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화력을 집중해 공격했다.
나중에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이 사찰에 불을 질러 대웅전 등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폐허가 된 운흥사는 방치되다가 1651년에 법성 스님이 중창했다.


↗ 운흥사 석탑

석탑은 불국사의 석가탑이랑 비슷하며

운흥사는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한다

운흥사 대웅전 앞에 탑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

대웅전 설명문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불탄 부속 건물들을 미처 복원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한다.
운흥사 소재 문화재 중 괘불탱 및 궤는 보물 제1317호, 관음보살도는 보물 제1694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1690년에 만든 운흥사 범종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 운흥사 범종루

운흥사 범종루에는 1690년 숙종 16년에 제작된 범종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밀반출되어 현재 일본도쿄 네즈(根津)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뿐만 아니라 전국방방곡곡에 우리 소중한 문화재들이 일본이 얼마나 가져갔을까...?

운흥사 범종루에는 최근에 조성한 호국대범종(護國大梵鐘)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범종루(梵鐘樓)

운흥사 범종루 편액을보면

편액의 관지(款識)에 三神山人昊山 이라고 새겨져 있어

이 편액 필적은 쌍계총림의 고산스님 필적이다 라고 한다.


운흥사

운흥사는 지역적으로 볼 때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면서 내륙에 잇대어 있는 이곳은

왜군 입장에서 볼 때 군량미 조달을 위해 꼭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될

곡창지대인 삼남(三南)으로 가는 길목이었을 것이다.

그런즉 우리 입장에서도 이 길을 가로막으면 왜군의 보급로가 봉쇄됨으로써

군사력을 최대한 약화시킬 수 있었을것이다.

500여 년 전 이곳에 주둔했던 6000명 승군과 사명대사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던

그 옛날의 고성 앞바다 였을거다.


↗ 운흥사 대웅전 앞에서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 6,000여 명을 이끌고 운흥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승병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격렬한 전투가 승병의 근거지인 이곳에서 전개된 것이다.
이곳은 왜군 입장에서 볼 때는 군량미 조달을 위해 꼭 점령해야 하는 곡창지대인

삼남(三南)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조선군 · 승병 · 의병 입장에서 보면

이 길을 막아야 일본군의 보급로를 봉쇄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최대한 약화시킬 수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 장군도 작전회의를 위해 운흥사에 세 번이나 올라왔다고 한다.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대규모의 승군이 집결한 것이고,

일본군도 이곳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화력을 집중해 공격했다.
나중에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이 사찰에 불을 질러 대웅전 등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폐허가 된 운흥사는 방치되다가 1651년에 법성 스님이 중창했다.


↗ 운흥사 대웅전

운흥사의 전승역사를 보면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위치한 운흥사(雲興寺)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온다.

절이 위치한 와룡산은 사천시 삼천포항 뒤에 서 있는 와룡산과는 다른 산으로

흔히 소와룡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의 형세는 하나의 용머리를 놓고 청룡과 백룡이 서로 다투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이 절이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이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 절이 고성군에 소재한 옥천사와 안정사 그리고 장의사와 더불어

대표적인 4대 사찰로서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현재 운흥사를 소개하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전거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한국불교 사찰사전』1)이다.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운흥사는 676년 의상대사 창건설과 1350년 고려 충정왕2년 창건설이 있으며

그 이후 조선초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이로 인하여 왜군에 의하여 절이 소실되었다 고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 2)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하였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는데

독특한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운흥사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 기둥이 대단히 높아 건물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인다.

기둥은 민흘림과 배흘림이 섞여 있는데

배흘림기둥은 굵기나 곡선의 비율이 안정되어 있어 아름답다.

건물의 장식은 단순하게 처리했지만, 장식물의 간격이 일정하고

기둥과도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부의 모습은 외부에 비해 훨씬 화려한데

중앙을 향해 피어오르듯 처리한 장식은 미려함을 더해준다.

천장은 층급을 두고 중앙을 높게 처리함으로써 거대한 공간감을 느끼게 하였다.

부처가 거처한다는 수미단을 상징하는 불단 위에는 닫집을 씌움으로써 신성성을 더해주고 있다.

마루 틀을 짜고 그 사이에 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운 우물마루는

소박하면서도 고급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계 맞배집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운흥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固城雲興寺木造三世佛坐像]

운흥사 대웅전 내부의 목조여래삼불좌상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8호. 총 3구. 본존상 높이 157㎝, 좌협시상 높이 140㎝

우협시상 높이 136㎝. 고성군 운흥사에 봉안된 목조삼세불좌상으로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와룡산운흥사대웅전불상개금중수기(臥龍山雲興寺大雄殿佛像改金重修記)」에

따르면 1649년에 조성, 1740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운흥사 대웅전

한국의 사찰은 그 역사를 온전히 기록으로 남겨 전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운흥사도 예외가 아니며, 더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면 그 이전의 기록은 기대하기 힘들다.

운흥사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사찰로는 울산 원적산의 운흥사가 있다.

그 다음이 고성 와룡산의 흥사라고 할 수 있는데, 논문에는 지금까지 확인한 와룡산 운흥사와

직접 관련된 기록물은 세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손명래(孫命來, 1664-1722)2)의 「와룡산운흥사팔상전기」3)이다.

손명래의 「와룡산운흥사팔상전기」보면
손명래는 유학자로서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고 문과에까지 급제하여

당대 진주 지역의 문장가로 이름이 있었다.

운흥사의 팔상전 완공에 즈음하여 지은 기문인 「와룡산운흥사팔상전기」가그의 문집인 『창사집』에 남아있다.

숙종 43년 정유년(1717)에 지은 이 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령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는 진양과 고성의 고을인데

진양과 고성을 크게 경계지우는 것은 와룡산의 높은 봉우리이다.

와룡산을 둘러싸고 사찰과 암자가 무려 7-8개이나 운흥사가 제일이니

법전은 동서에 마주 서 있고 아담한 요사가 좌우를 둘러있다.

시주로 경영하는 바와 법력이 수립되는 바는 곧 해인사와 통도사가 뒤에서 놀라며 쳐다볼 정도이나

소위 팔상전이란 것이 건립되지 못하여 지나가는 선비와 승려들이 개연히 한스러워 하며

불문의 흠이 된다고 하지 않음이 없었다.

금상(숙종) 43년 병신 늦봄에 동쪽 대웅전의 왼편에 자리를 측량하여

약간 명의 장정을 쓰고 약간의 시일을 쏟더니 중하에 도끼소리는 그치고 단청의 마무리가 며칠 남았다

기록하고 있다.


↗ 운흥사 대웅전

운흥사의 현판 「대웅전개금단호기」에 보면
현재 운흥사 대웅전 건물 뒤쪽에는 괘불탱을 담아 보관하고 있는 괘불궤가 있고

그 아래쪽 안으로는 창고가 있어 여러 가지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 창고 안에 비교적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기문 현판이 하나 있는데

외곽에 아무런 장식이 없고 현판만 낡은 상태로 있다. 이 현판이 1807년에 만들어진 「大雄殿改金丹頀記」이다.

운흥사에는 몇 채의 건물이 있지만 기문이나 상량문은 하나도 걸려 있지 않다.

절에 보관된 현판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이 현판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살피건대, 사찰의 기원을 상고하고 사람이 일한 자취를 조사하니 예전 천계 갑자년에 혜명대사가 절을 창설하였으니

동쪽 언덕이 곧 대웅전이다. 옛날 공사를 시작한 승려를 찾으려하면 망연하여 그 때를 알 수 없다.

이 현판의 주요 내용은 운흥사를 중창하고 난 후에 불상의 개금과 단청이 이루어진 경위를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운흥사 중창의 년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천계 갑자’년에 혜명대사가 창설하였다고 하였으므로 1624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1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인 ‘건륭 5년 경신’(1740)년에 다시 옥찰이 내려온 것을
인연으로 하여 개금과 단청을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玉札은 아마도 왕실에서 보내온 편지를 말하는 듯한데

이것은 이 시기에 운흥사가 왕실과 인연을 맺었던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운흥사의 대웅전 불상 좌우에는 ‘세자저하수천추(世子邸下壽千秋)’와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이라는 위패와 비슷한 모양의 기원문이 장식물로 비치되어 있다.

쌍계사의 말사인 운흥사 주지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곳에는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그것도 있었는데

현재 그것은 쌍계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운흥사가 왕실의 복을 위한 기도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증거라 고 하겠다.



↗ 명부전(冥府殿)

고성운흥사명부전목조각상(固城雲興寺冥府殿木彫刻像)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8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운흥사 명부전은 대웅전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한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상 10위 드이 봉안되어 있으며

모두가 목조로 만들어 져 있다.


↗ 명부전(冥府殿) 내부 시왕상 10위

도명존자는 지옥보살의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무독귀왕은 경괘를 든 문간차림이다.

시왕은 삼존의 양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그 사이사이로 사자, 판관, 동자상 등이 있다. 명부전의 입구에는 인왕상이 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이 목조각상들은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 명부전(冥府殿)내부 지장보살좌상

 지장보살 地藏菩薩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자의 영혼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중국에서 지장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신행이 삼계교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이 '점찰보'를 설치하면서부터 지장신앙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지장보살은 삭발 승려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고통 받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여섯 세계에 상응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이라 불리는 법당의 주존으로 모시고 있다.


↗ 운흥사 산신각

운흥사 산신각은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로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 운흥사 도량 제일 위쪽이면서

뒷편에 위치한곳이 산신각이다.

산신각은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1칸의 건축 구조이며

최근에 조성한 신신탱화가 봉안 되어 있다

산신각주련은

靈山昔日如來囑(영산석일여래촉)

옛날 영산에서 부처님의 위촉으로

威振江山度衆生(위진강산도중생)

이강산의 중생제도 위해 위엄 떨치네


↗ 대웅전 옆 비석(碑石)

대웅전 옆에 있는 작은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새겨 놓았다

작은비석을 조성한 불자이름도 같이 새겨져있는데 마모되어 알아볼수가 없었다.


↗ 영산대재시 괘불 지줏대

운흥사에서는 매년 호국영령과 국태민안을 위한 영산대재와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운흥사 괘불탱은

화면 가득 입상(立像)의 석가삼존불을 배치하고 그 윗면에는 합장한 두 분의 타방불(他方佛)과

관음·세지보살을 작게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문수·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예배자를 압도하기라도 할 듯 화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그려져 있는 본존불은

오른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으로 오른손은 다소곳이 모아서 길게 내려 뜨리고 있고

왼손은 가슴께로 들어 올려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엄지와 중지 무명지 를 살짝 구부리고 있다.

장대한 신체와 더불어 움추린 듯 직각을 이루는 넓은 어깨에 네모난 얼굴과 어깨에 닿을 만큼 길다란 귀를 갖추고

두터운 대의(大衣)를 착용하여 한층 중후함을 느끼게 한다.


고성 운흥사 영산전(固城 雲興寺 靈山殿)

영산전은 1731년(영조7)에 중건된 것이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에 들보 5량(樑)으로 조성된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천장은 가운데를 높이고 하나의 우물천장을 조성하였으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정면 가운데 칸은 좌우 협칸보다 넓게 만들어 쌍여닫이 빗살창을 달았으며

양 협칸에는 빗살창과 띠살창을 달아 대칭적이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산화한 승병과 의병의 명복을 비는 영산재를 이 곳에서 매년 거행하고 있다.

연산전의 주련은

淸蓮座上月如生(청련좌상월여생)

푸른연화좌위에 둥근달이 떠오르듯 앉으신

三千界主釋迦尊(삼천계주석가존)

삼천세계의 주인이신 석가모니부처님

紫柑宮中星若列(자감궁중성약열)

자감궁가운데 뭇 별들이 늘어서듯

十六大阿羅漢衆(십육대아라한중)

십육대아라한 함께 계시네


고성 운흥사 영산전(固城 雲興寺 靈山殿)내부

영산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영산불국(靈山佛國)을 상징한다.

영축산정은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던 곳으로

불교의 성지(聖地)를 영산전을 통하여 현현시킨 것이며

 이곳에 참배함으로써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불국토인 영산회상에 참배하는 것이 된다.


↗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의 장독대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묻 사진작가들의 촬영대상 이기도 하다

운흥사 장독대는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운흥사 장독대는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드는 장소이고 장독담도 부더러운 곡선이다

부처님도 부더럽고 부처의말씀도 부더럽고

그중에서도 자비는 더욱더 부더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당장은 부더럽고 자비로운 부처님 말씀 그대로 이다.


↗ 보광전(普光殿)

운흥사 보광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종무소와 스님들이 수행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듯하다

전형적인 사찰구조와는 조금 다르며 부잣집 주택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


↗ 운흥사 대웅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편십방중)

부처님 나투심 십방세계에 가득하니

三世如來一體同(삼세여래일체동)

삼세여래가 한몸이시네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불진)

광대한 서원 구름처럼 다함이 없고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넓고넓은 깨달음의 바다 아득하고 끝이없네

廣大淸淨妖莊嚴(광대청정요장엄)

광대하고 청정하며 장엄한 곳에

衆會圍繞諸如來(중회위요제여래)

많은중생모여 들어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도다


화사승 의겸(華師僧 義謙)

숙종조부터 영조조(1710년경~1760년경)까지 지리산 지역을 중심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대에서 불화를 그린 승려이다

의겸 스님은 ‘운흥사 괘불’(보물 1317호)을 조성한 스님으로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3대 화승 중 한 명이다. 

의겸 스님의 생몰연대와 출생지, 출가 인연 등은 자료가 없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학계에서는 의겸 스님이 남긴 작품 중 초기 작과 말기 작을 기초로

생몰연대를 1690년경부터 1760년경 까지로 유추하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유추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화승의 길을 걷는 데는 적어도 세 단계의 기간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 6,000여 명을 이끌고 운흥사 일대에서 왜군과 싸웠던 이곳

운흥사 도량을 둘러보면서 선조들의 호국정신 충의를 다시한번 더 생각하였다........!


고성 운흥사(固城 雲興寺)


승병 활동의 근거지인 운흥사에서 선조들의 충의(忠義)보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고성군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홈페이지자료

논문 고성 운흥사의 역사와 임진왜란 관련성 및 소장 목판 연구 김경수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8.06.21]

마트폰으로

여기 QR코드 앱으로 찍어주세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