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ㅕㄴ으로
- dd
- 계 色
- 색
- 보내세요
- 베오울프
- 사한
- UCC
- 첫눈에반한
- 20일만에결혼
- 미소
- 무드연주곡
- 풍요로운추석명절
- 초미니 비키니 눈길
- Caution
- 2007)
- (2007)예고편
- 얼짱보디빌더 박수희
- 몸은 액션?
- 戒 Lust
- 두바이왕자
- 제니퍼 애니스톤
- The Simpsons Movie
- 호텔여직원과
- ㅅ어
- 얼굴은순정
- 베스트 20
- BEOWULF
- 행운을드립니다
- Today
- Total
바다늑대 FORCE
남한산성(南漢山城),병자호란 역사가 있는 경기광주 남한산성 둘레길을 걷다 본문
남한산성(南漢山城)
병자호란 역사가 있는 경기광주 남한산성 둘레길을 걷다...!
▣남한산성(南漢山城)
위 치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23
전화 : 031-743-6610
여행일 : 2017년12월10일 일요일
날씨 : 출발지 흐림 - 도착지 눈
▣남한산성(南漢山城) 개요 :
사적 제57호. 둘레는 약 8,000m.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晝長城)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624년(인조 2)에 왕이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 공사를 끝마쳤다.
4문과 16암문(暗門), 성가퀴[女墻: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 1,897개, 옹성(甕城)
성랑(城廊),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도총섭(都摠攝)으로서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이들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다. 지금은 장경사(長慶寺)만 남아 있다.
그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칸 반, 하궐(下闕) 154칸이었다.
1688년(숙종 14) 좌덕당(左德堂)을 세웠다. 1711년(숙종 37)에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우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右室)을 두었다.
1624년에 세운 인화관(人和館:客館)을 1829년(순조 29)에 수리했다.
관청으로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과
군사기관으로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두었다.
또한 종각·마구(馬廏)·뇌옥(牢獄)·온조왕묘·성황당·여단(塾壇) 등을 두고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僧徒廳)을 두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이밖에 현절사(顯節祠)·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영월정(迎月亭)·침과정(枕戈亭) 등이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를 하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지도
▣남한산성 찾아가는길
진주ic삼거리→→통영대전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 비룡jc
중부고속도로 남이jc →→경기광주ic →→남한산성주차장
321km 3시간30분
→→→→→2017년12월10일 일요일
우리나라 구석구석 그리고 산을 찾아서 떠나는길
오늘은 서울 도봉산 산행 계획이였으나 폭설로 인하여
등산로가 폐쇄되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폭설 내린 남한산성 가는길
진주에서는 그다지 흔하게 볼수없는 눈길이다
뽀드득 눈길 걷는 소리가 얼마 만에 듣는지도 모르겠다.
유년기땐 눈도 많이 오고
눈이오면 뒷산에 올라 토끼 발자국 찾아 다니던 기억도......!
↗담벼락에 소복 쌓인 눈
하이얀 솜사탕 같이 뽀송뽀송하게 쌓여 있다
올해 들어 나에겐 첫눈이다.
나는 눈(雪)보다 비(雨)를 더 좋아한다
왜냐면 밟지 않은 눈은 좋은데...녹아 내리기 시작하면
너무 오염되어..하이얀 색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비는 창가에 토닥토닥 부딪치는 소리와 비 그친후 맑은 시야가 더 좋기 때문이다...!
↗둘레길 들머리와 망월사 표지석
남한산성 둘레길은 5코스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남함산성 5코스 구간을 걸었다
가장 긴 코스라고 하는데.. 조상들의 얼이 있는 길이기에
조심스레 걸어본다.
※망월사[望月寺]는
조선시대 탄압받던 불교의 부흥의 시발점
망월사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있다. 남한산성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특히 동문에 가까운 급한 비탈면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광주시에 있어 광주시에서 접근이 훨씬 쉬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자가운전이 아니라면 오히려 성남 쪽에서의 접근이 훨씬 용이하다.
산성과 더불어 나라를 지킨 절 망월사(望月寺). 망월사는 남한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중요한 국가방어시설로서 성 안에는 행궁 이외에 여러 방어시설이 건설되었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이곳으로 옮겨와 청나라에 대항하였고, 결국 삼전도라는 치욕을 안게 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남한산성과 이곳에서 있었던 역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스님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도 계속 승군이 주둔하였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에서는 대단위 토목사업이나 국가적인 건설 사업에 승군의 힘을 빌었었다.
승군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열심히 국가사업에 참여해 임무를 완수했고
이런 승군을 국가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부터 그렇게 탄압하고 억압했던 불교가 다시 세상에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일련의 사건의 한 중심에 망월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남한산성은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많은 역사적 사건을 간직하고 있는 명소들이 산성 안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산성은 사적 이외에 도립공원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다른 곳에 비해 경관이 뛰어나고
자연이 잘 보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장경사 방향으로→→
남한산성내에 사찰이 많은것은
산성 공사를 승려 각성이 도총섭(都摠攝)으로서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이들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다.
그래서 남함산성내에 사찰이 있으며
장경사(長慶寺)로 길을 걷는다..
↗남한산성 장경사(南韓山城 長慶寺) 일주문
장경사(長慶寺)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안에 있는 사찰이다.
동문에서 북쪽으로 2km 지점에 있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도성(서울)을 지키던 산성으로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지을 당시인 조선 인조(仁祖) 16년(1638)에 세웠다.
전국8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山城) 짓는 것을 도왔는데
이때 승군(僧軍)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9개의 절 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절이다.
절에 있는 건물로는 대웅전(大雄殿),진남루(鎭南樓),칠성각(七星閣),대방(大房),요사채(寮舍砦) 등이 있다.
조선시대 승병(僧兵)들이 나라를 위해 활동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장경사 대웅전과 9층석탑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승려 벽암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축성 후에도 승군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하여 인조16년(1638)에 건립한 절이 바로 장경사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 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 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한산성 내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10개의 절을 세웠는데
이곳이 창건 당시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사찰 내에 있는 대웅전은 가장 화려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경사 대웅전
정면3칸으로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장경사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창건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은 많지 않다.
건물들은 모두 후대에 중수된 것들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무심당, 범종각
삼성각, 심향각과 요사1채가 있으며 그밖에 팔각구층석탑1기가 있다.
모두 근래에 들어와 지어졌으며 장경사(長慶寺)라 쓴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
요사채가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옛 모습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남한산성 성곽
남한산성의 둘레길 총거리는
외성 2.7km, 본성 9.05km, 총 11.76km이라고 한다.
둘레길을 걷다보니
모노레일 공사가 진행중인것 같다
둘레길을 모노레일을 타고 남한산성을 구경할 날이
얼마남지 않은듯 하다,..
↗남한산성은
남한산성 (南漢山城) 국가 사적 57호로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 문무왕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 여장(女墻)
여장(女墻)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塼乭)로 축조한 평여장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 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 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서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한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타구가 마련되어 있고
남한산성 여장규모는 길이 4.2m, 높이 1.3m, 폭 0.8m 내외가 일반적이다.
↗남한산성 여장(女墻)에서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남한산성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 22년) 한남루를 세우고 1642년에 세운 객관인 인화관을 1829년(순조 29년)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을 비롯하여,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 마구, 뇌옥, 온조왕묘, 성황단, 여단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지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 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후기 10대로 중 하나인 봉화로의 일부 노선으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 중 하나였다.
봉화로의 일부 구간과 주변의 다양한 역사문화 자원들을 연결시켜 탄생시킨 것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이다.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왕들이 여주의 영릉을 참배하러 갈 때
보부상들이 보따리를 지고 인근 장터를 떠돌 때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할 때 지나던 길이였다고 전한다.
이처럼 남한산성 옛길은 지난 시절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동서남북 4개의 특색 있는 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는 옛길이다고 하겠다.
↗남한산성
눈덮힌 남한산성을 걷는다는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조상들의 피와 굴욕적인 역사적 이야기도 있지만
아뭏튼 이렇게 자유롭게 눈 가득 내린 성곽 둘레길을 걷는다는게
자유와 행복이 있는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제3 암문(暗門)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 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할수 있는 시설도
설치 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편이다.
이 암문은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m
높이2.65m에 달해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남시의 조망
남한산성 눈그친후 의 하남시가 조망된다.
경기도 중앙부에 있는 도시로서
수도권의 개발과 성장, 중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1989년에 하남시로 승격되어 광주군에서 분리되었다.
광주산맥 여맥의 영향으로 대부분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1980년대 이후 서울의 침상도시로 자리잡았다.
하남은 삼국시대초 백제 시조 온조왕 13년에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를 도읍으로 정하고
‘하남 위례성’이라 부른 이래, 백제 근초고왕 25년까지 백제의 도읍지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한주를 광주라 고쳐서 불렀으며, 이때부터 광주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하였다.
조선 선조 10년에 광주군 동부면이 되었으며, 1980년 12월 1일 동부읍으로 승격하였고
1989년 1월 1일 광주군 동부읍·서부면과
중부면 일부가 합쳐져 하남시로 승격되어 오늘의 하남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하남은 1987년 중부고속도로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개통되고
1991년 신장동과 창우동 일원 택지개발을 착수하여
1994년 12월 아파트 단지에 첫 입주를 시작한데 이어 신장동 2지구 개발사업이
2002년 11월 완료되었으며 "물과 음악이 흐르는 도시" 컨셉트로 5,768세대의
풍산택지개발지구가 2008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2014년 미사강변도시 입주와 2015년 위례신도시 입주로 국제관광, 위락, 레져, 호텔 등
비즈니스 환경이 조성 될 예정으로 이 모든 것이 제모습을 갖추게 되면
다수의 인구 유입으로 36만 자족도시 기능을 갖춘 복합도시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될 전망이라고 한다.
↗남한산성 본성
제4암문(북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곳에 설치한 성문이다
일종의 비밀 통로 이기때문에 크기도 작다
이 암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1km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도달하게 된다.
↗제4암문(북암문)
성문 밖에서 촬영해 보았다.
이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다.
↗눈덮힌 남한산성
이렇게 하얗눈 가득 쌓인길 2017년도는 남한산성에서 맞이 했다.
눈덮힌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영화 남한산성을 생각해본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에 침입하며 일어난 전쟁.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새로운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청의 압박이 점차 거세지자 이에 대한 조선의 조정은 둘로 나뉜다.
청과의 화친을 통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 그리고 청과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
조선의 왕 인조는 척화파의 손을 들어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636년 12월, 청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 이로써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청이 순식간에 한양 근처까지 당도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지만 길이 막혀 실패한다.
결국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게 되고
점점 좁혀 오는 청의 공격으로 인해 남한산성에 고립된다 ........................(중략)
↗남한산성 북문
성문 안쪽에서 촬영해보았다.
↗남한산성 전승문(全勝門)
병자호란 당시의 패전을 잊지말고 언제나 승리하자 라는 뜻의 전승문이라고 전한다.
전승문의 북문밖은 고골방향이라 한다.
해발367m 의 북문은 남한산성 북쪽에 있으며
문 밖으로 난 길을 따라 하남시 상사창동에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 수운을 이용하여 세곡을 운반 하던 통로였다
하남시에서 덕풍천을 따라 옛고을인 고골을 지나 오르는 통로의 관문이었다.
↗남한산성 북문(문루)
북문은 병자호란때 성문을 열고 나아가 전투를 치룬 유일한 문으로
그 전투가 바로 법화골 전투이다.
당시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원로대신이었던 김류장군 주장으로 총을 든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사를 공격 하였으나
적의 유인 계략에 말려들어 아군은 총 한방도 제대로 쏘지 못하고
전멸하고 말았다.
이때 청나라 군사는 불과 2명만 전사 하였다고 한다.
↗제1군 포터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중정남한지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며
현재는 한군데도 남아 있지 않다.
조사결과 이 군포지는 수변보다 약간뫂은 평탄한 대지위에 정면3칸 측면1칸의 주춧돌이 발굴되고
다수의 와편과 조총탄환이 나왔다고 한다.
군포는 목조가구로 된 건물에 기아를 얹고 토석벽을 두런 건물로 보이며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온돌이나 난방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길은
산성 내·외곽으로 길이 나 있어 취향에 맞는 길을 골라 걸을 수 있으며
성곽 한 바퀴를 모두 도는 데는 약 7km에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길이 잘 나 있고 경사도 그렇게 심하지 않아 아이들도 완주할 수 있을 정도다.
산성 일주가 부담스럽다면 5코스로 나눈 둘레길을 걸어보아도 된다고 권한다.
남한산성도립공원관리소에서는 가벼운 유적답사 산행코스로 둘레길 5개 코스를 추천하고 있다.
산성종로 주차장에 주차(종일 1,000원)하고 조금만 오르면 각 산성의 문에 도착할 수 있어 편리하며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이정표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중간에 산성종로 로터리로 내려오는 길도 여럿 있어 힘들면 그냥 빠져나오면 그만이다.
제1코스는 산성종로 로터리에서 북문으로 올라 서문~남문을 둘러보는 코스다.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등산객이 가장 많이 오가는 코스이기도 하다.
산성종로 로터리에서 북문까지는 400m 정도만 걸으면 닿는다.
전승문(戰勝門)으로 불리는 북문은 그 이름과는 달리 병자호란 당시 300명의 군사들이
이 문을 나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가 대패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패배 이후 정조는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으로 이름을 ‘전승문’이라 고쳤다고 한다.
둘레길은 노송이 보기 좋은 길을 따라 서문으로 이어진다.
성곽 안쪽의 콘크리트포장도로를 걸어도 좋고 흙길인 외성 길을 돌아도 좋다.
북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벌봉으로 향한다.
서문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해 걷기에 편하다.
남한산성의 대부분 길이 그렇듯 계단과 길이 잘 닦여 있어 걷기에 참 좋다.
다만 눈이 녹지 않은 계단 길에선 반드시 아이젠을 차길 권한다.
↗남한산성 서문 안내 표지판 에서
남한산성 둘레길 제2코스는
산성종로 로터리에서 행궁을 지나 수어장대로 곧장 올라 서문과 북문을 둘러보고 되돌아오는 2.9km 코스다.
수어장대로 가는 길에 행궁과 영월정, 숭열전을 둘러볼 수 있다.
산성로터리 관광안내소에서 계단을 오르면 무기제작소의 사무를 관장하던 침괘정을 지나고 울창한 솔숲이 시작된다.
5분 정도 걸으면 ‘달을 맞이한다’는 영월정에 닿는다.
남한산성행궁(입장료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은 전쟁이나 내란 때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할 요량으로 인조 4년 남한산성과 함께 건립됐다.
지리적으로 한양도성과 가장 가까운 곳인 만큼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종묘와 사직까지 갖추었다.
숭열전은 백제 시조이며 남한산성을 처음 축조한 온조왕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지금 남한산성이 있는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특히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이 지역은 성지나 다름없었다.
수어장대를 지나 성곽 산책로를 따라 20분 정도 걷다 보면 서문에 도착한다.
↗운무속 제2롯데월드 조망
서문을 지나서 수어장대로 가는길에 운무속 도시중앙 송곳처럼 뽀쪽하게 서있는게
제2롯데월드라고 한다.
롯데월드타워(영어: Lotte World Tower)는 서울 송파구 신천동 롯데월몰 단지 내에 위치한 건물이다.
2010년에 착공을 시작하여2015년12월22일 123층까지 상량완료했으며,
2016년3월경 첨탑공사가 완료됨으로써 외장 공사가 완료되었고
2016년12월22일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국청사
남한산성 국청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의 말사라고 한다.
1624(인조 2년) 벽암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국청사를 창건한 '각성대사' 는 당시 <팔도도총섭 총절제충군주장> 에 임명되었고
팔도의 스님(승병)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을 쌓으면서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 비밀리 무기와 화약 그리고 군량미를 비축해 두기 위해
국청사를 비롯하여 천주사 개원사 남단사 한흥사 장경사 동림사 등 7개의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의병의 무기 창고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비밀이 누설 되어 일제에 의해 폭파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오랫동안 절터만 남아있다가
1968년 보운이 중창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왔다고 전한다.
↗국청사 대웅전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체가 있는데
유물로는 성삼문의 친필이 적힌 병풍과 송시열 선생의 친필 로 된
책 세권이 전해진다고 합다.
일반인들에게 공개는 하지 않았지만 이 대웅전은 불자 최계순이 광도중생을 기원하기 위해
1998년 중수 하였다고 한다.
↗종각
종각이며 팔작지붕 형태의 전면3칸 측면두칸의 건물양식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에 존재하던 승영사찰(승려 군대가 머물던 절)인 국청사(國淸寺) 옛터에서 나무 건축재가 발굴됐다. 전문가들은 국청사를 비롯한 남한산성 내 승영사찰의 누각 구조를 이해하는 데 큰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산성 내에서 조선시대 건축재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남한산성 옛길 종합안내 표지판
↗남한산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표지석
1963년1월21일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
1971년3월17일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제158호)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 남한산성도립공원
한양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한양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총 11.76km(본성 9.05km, 외성 2.71km), 높이는 7.3m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 옛터를 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12km이다.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16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과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칸, 하궐 154칸, 좌전 26칸으로, 모두 252칸을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이쯤되면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안이 유치 가능 인구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화려했던 과거의 잔재만이 존재하고 있는 곳, 남한산성*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2,700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내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된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연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숭렬전 이서 장군사당,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 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 남한산성 도립공원의 주요문화재
1) 남한산성(성곽) - 국가사적 제 57호, 남한산성행궁 - 국가사적 제 480호
2) 수어장대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1호
산성 축성 당시 동서남북에 세워진 4개 의장대 중 으뜸가는 장대이며, 또한 유일하게 남은 장대이다.
성곽을 따라 멀리 내다보며 적을 감시하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 세워진 목조건물 2층 집이다.
3) 숭렬전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2호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으로 정조 19년(1795)에 숭렬전이라는 편액이 내려졌다.
4) 청량당 - 도유형문화재 제 3호
남한산성 축성 때 모략을 받고 죽은 이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5) 현절사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4호
병자호란 때 청에 끝까지 항복을 반대한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넋과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6) 장경사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 15호
남한산성 축성과 유지, 보수를 위해 산성 내에 두었던 9개의 사찰 중 하나로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7) 침괘정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5호
8) 연무관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6호
9) 지수당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14호
10) 망월사 - 경기도기념물 제 111호
♧*400년의 천작지성(天作之城), 1000년의 세계유산(世界遺産) ‘남한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014년 6월 22일 한국 시간 오후 3시 30분.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렸던 카타르 도하에서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1995년 최초로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3건이 동시에 등재된 이래 남한산성은 대한민국의 11번째
경기도의 3번째 세계문화유산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도권 남부 최고의 등산 코스이자 닭요리로 유명한‘유원지’로 회자되었던 곳이었다.
특히 우리 국민에겐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치욕의 장소로 애써 외면했고 방치되었다.
등산객들은 성곽이 문화유산 보다는 운치 있는 탐방로 이자 공원시설의 하나로 여겼고
이곳에 행궁이 있었는지도 대부분 알지 못했다.
관련 전문가들도 섣불리 이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리라고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랜 준비 끝에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등재 사유는 16~18C 동아시아 국가 간 축성술과 도시계획이 상호 교류한 증거로서 축성술과 무기체계의 시대별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초대형 포곡식 산성으로서 지금까지도 주민들이 거주하는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보유하여 등재기준을 완전성과 진정성을 보유하였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아울러 법적 보호체계와 보존정책을 비롯해 현장의 보존관리가 양호한 것도 등재 심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현재 남한산성은 국가지정문화재로는 성곽(사적 57호, 11.76㎞)과
남한산성 행궁(사적 480호, 19,256㎡) 2개소이며 도지정문화재는 수어장대를 비롯한 10개소로서 관리되고 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병자호란 역사가 있는 경기광주 남한산성 둘레길을 걷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남한산성, 경기도 홈페이지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사전 ,전통사찰관광정보홈페이지자료등 참고함.바다늑대Forever[2017.12.12]스마트폰으로여기 QR코드 앱으로 찍어주세요....!
'바다늑대 > 山 & 旅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산[萇山].부산 장산 정상에 서서 해운대 도시풍광에 젖다 (0) | 2018.01.09 |
---|---|
한라산 백록담.제주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서 구름아래 바다를 안아보다. (0) | 2018.01.08 |
형제봉(성제봉聖帝峰),하동 섬진강 은빛 물길보며 지리산 남부능선 형제봉 산길을 걷다 (0) | 2017.12.07 |
정남진(正南津) 장흥 (0) | 2017.12.05 |
천관산[天冠山]南道의 바다와 하늘을 冠을 이고있는 천관산길을 海風 맞으며 걷다....! (0) | 2017.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