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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산[金臺山],함양 오도재를 돌아 금대산 금대암에서 지리산을 안아보다 본문
금대산[金臺山]
함양 오도재를 돌아 금대산 금대암에서 지리산을 안아보다...!
▲금대산
높이 : 847m
▲나의산행코스 :
함양 오도재→→→오도재휴게소→→→금대암→→→금대산 정상(원점회귀)
▲금대산 개요:
함양 금대산은
경상남도 함양군의 마천면 가흥리 일대에 있는 산이다(고도 : 852m).
삼봉산에서 맥이 뻗어내려 백운산과 금대산을 이루었다.
임천이 금대산을 에워싸고 구불거리며 흐르다 동북쪽으로 빠져나간다.
금대산을 끼고 있는 임천을 따라서 여러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산의 남서사면에는 마천면 소재지가 입지하였다.
『광여도』(함양), 『1872년지방지도』(함양), 『영남지도』(함양)에서도 금대산이 표기되었다.
금대산에 있는 옛 절로는 안국사와 금대사가 있다.
금대산이라는 산 이름의 유래는 금대사(金臺寺)에서 연유되었다.
금대사는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에 행우(行宇)가 창건하였고
도선(道詵)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1430년(세종 12)에 행호(行乎)가 안국사(安國寺)와 함께 중창하였다
▲금대산 등산지도
▲ 함양 금대산 가는길
진주ic삼거리----→ 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대암주차장
79km-----1시간20분 소요
→→→→→2017년 7월22일 토요일
우리나라 구석구석 그리고 산을 찾아 오늘도 길을 나서본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러는 연일 폭염이다
오늘은 직장선배랑 함양에 있는 오도재를 넘어 금대산에서 지리산 조망을
보기로 하고 길을 나서본다.....!
↗오도령(悟道嶺)
자동차 광고속에서도 나온 오도재이다
함양읍내를 지나 남원 가는 24번국도를 10여분 가다보면
좌회전해서 마천 가는1024번 지방도인데
이 길을 들어서면 뱀이 허물을 벗듯 용트림하며 오르는 고갯길이 바로 오도재이다.
↗오도재
사진작가들은 여기서 차량불빛 야경을 촬영하는 장소로도 유명하며
산행자들은
팔령치와 오도재에서 많이 실시하고 있는데 오도령(悟道嶺)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인오조사(印悟祖師)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한 연유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오도령(773m)은 삼봉산과 법화산(997m)이 만나는 지리산 관문의 마지막 쉼터로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걸음을 멈추며 지리산을 노래했고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온 남해·하동 등지의 해산물이 이 고개를 지나
전라북도·경상북도·충청도지방으로 운송된 육상 교역로였다고 한다.
우리는 오도재에서 산행을 하지않고
최간코스엔 금대암 주차장에서 하기로 하였다.
↗지리산 제1관문
오도재는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가장 단거리 코스로
2004년 개통하여 도로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재를 넘어 뱀같이 구불구불하게 난 길은
새로운 명물로써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오도재 정상 바로 아래
지리산 주능선(노고단~천왕봉)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드넓은 지리산
조망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뿐 아니라, 대자연의 어머니라 불리는 지리산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으면 속세의 모든 근심을 잊고 호연지기가 절로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리산 제1관문
제1문은 오도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부터 이 곳에는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방장 제1문이 2개 있었으나 나무로 된 문은 6.25때 불타고
없어졌으며 돌로 만든 문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2005년 초에 오도재 옆 금대산에서 돌로 만든 방장 제1문의 표지석과 바위에 새겨진
방장 제1문에 관한 칠언시를 찾아냄으로써 지리산 제1문의 역사성이 증명되었으며
함양군에서는 2006년 11월 1일 지리산 제1문을 오도재 정상에 준공하였다.
↗오도재 휴게소에 있는 조형물
智異山 (지리산)
경암(敬菴) 문동도(文東道)
浩浩復浩浩 (호호부호호)
悠然出世塵 (유연출세진)
花落溪流錦 (화락계류금)
雲生壑舖茵 (운생학포인)
山川人覓道 (산천인멱도)
天地鳥鳴春 (천지조명춘)
欲題探勝句 (욕제탐승구)
憑崖筆驅神 (빙애필구신)
지리산
- 문동도 -
넓고 넓으며 다시 넓고 넓으니
아득히 세속에서 벗어났구나.
꽃 떨어져 시내에는 비단 같은 물 흐르고
구름 일어나 골짜기에는 자리 깔았네.
산천에는 사람들이 길을 찾고
천지에는 새들이 봄을 노래하네.
좋은 시구를 찾아 짓고자 하여
언덕에 기대서서 신명나게 붓을 달린다
↗지리산 마고할매상
마고(麻姑)할미는 한국 신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신 또는창세신, 거인신이다.
마고할망, 마고할미, 마고 할머니, 혹은 마고선녀 등으로도 불린다.
엄밀히 일컫자면 본명은 마고.
여성의 지위가 남자와 비등하거나 높았을 적에는 한국 무속에서 창세신 위치에 있었으나
무속의 힘이 약해지고 남성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위상이 축소될 대로 축소되어
현재 시점에서는 그냥 일개 여신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한반도 각 지방의 마고 관련 전설, 그리고 그녀를 모시는 사당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서낭단과 노고당의 별칭이 할미당이며
할미당에서 모시는 여신이 대지모신이라는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이 역시 마고와도 관련이 있다고 전한다.
↗금대암 입구 산행표지목
우리는 먼저 금대산 산행을 한후 금대암을 둘러 보기로 하고
금대산 정상을 향해 걸었다
햇살은 그야말로 찜통 그자체였다.....!
↗금대산 들머리
금대산 들머리에는 많은 산행자들의 흔적인 산악회깃표들이
뜨거운 햇살을 머금고 있다.
↗금대산 등산로
바람 한점없는 날씨이다
초록숲속 솔나무 향기가 더위를 조금 식혀 주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것이 마치 아침이슬이
초록잎새에 떨어지는듯한 느낌이다.
↗원추리꽃
찜통깥은 햇살을 품은 원추리꽃
더위 따윈 아무렇치도 않은듯 예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원추리꽃은
근심을 잊게 하는 꽃으로서
예로부터 여인들이 원추리를 가까이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득남초(得男草),의남초(宜男草)라 했으며, 아들을 낳으면 근심이 사라지니 망우초(忘憂草)라고도 했다.
원초는 또한 훤초(萱草)라고도 하는데
당 태종 이세민이 자신의 어머니가 생전에 머물던 집 뜰에 훤초를 가득 심었다고 해서
흔히 어머니를 ‘훤당(萱堂)’이라고도 한다.
원추리는 우리나라 각처의 산지 계곡이나 산기슭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습도가 높으면서 토양의 비옥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며, 키는 50~100㎝이다.
뿌리는 사방으로 퍼지고 원뿔 모양으로 굵어지는 것이 있다.
잎은 길이가 60~80㎝, 폭이 1.2~2.5㎝로 밑에서 2줄로 마주나는데
모양은 선형이며 끝이 둥글게 뒤로 젖혀지고 흰빛이 도는 녹색이다
6~8월에 원줄기 끝에서 짧은 가지가 갈라지고 6~8개의 노란색 꽃이 뭉쳐 달린다.
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며 계속 다른 꽃이 달린다.
9~10월경에 타원형 열매가 달리는데 종자는 광택이 나며 검은색이다.
백합과에 속하며 넘나물, 들원추리, 큰겹원추리, 겹첩넘나물, 홑왕원추리라고도 한다.
관상용으로 쓰이며 어린잎은 식용, 뿌리는 약용한다.
술로 담가 먹기도 하며, 중국에서는 요리에도 사용한다.
우리나라와 중국에 분포한다.
↗조망
가슴이 확터이는 기분이다....땀삐질거리며 올라와 잠시 바위에
함양을 바라보면서 쉬어 본다
우측이 칠선계곡 방향이며 백송사 있는곳이다
칠선계곡 너무 천왕봉 그리고 중봉 하봉도 조망되며
발 아래는 금계마을이 펼쳐져 있고 체석장도 보인다
체석장에는 석불을 조성중에 있고
멀리 보이는 가운데 산이 합천 황매산이다...!
↗내려오기가 더 힘듦
암벽에 올라갈땐 쉬웠는데 막상 내려 올려니 조심스러웠다
↗바위채송화[류엽경천(柳葉景天)]
절벽암반에 붙어 있는 바위 채송화이다
돌나물과 바위채송화를 류엽경천이라고도 불리우는 여러해살이 야생화로
우리나라 제주도. 남부. 중부. 북부지방의 산간 바위 겉 습기를 좋아하며 자생한다.
높이는 10cm정도이고 원줄기는 밑부분이 옆으로 뻗고 윗부분이 가지와 더불어 곧게 서며
밑부분에 갈색이 돌고 꽃이 달리지 않는 가지에는 잎이 빽빽이 달린다.
↗바윗돌 사이길
큰암석과 작은암석 사이로 등산로가 있다
아마도 한덩치 하는 산행자는 조금 비집고 나가기가
힘이 들듯한 틈사이가 작은편이다..
↗암석굴
금대암에서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에 있는 암석굴모양이다
큰암석이 서로 엉켜 하나의 동굴이 된 셈이다.
제법 안쪽은 3인용 텐트를 칠 정도의 넓이이며
잠시 여기서 더위를 식혀 보았다.
↗정상 인근에 있는 안내표지목
금대암 까지 0.69km
삼봉산 까지는 5.3km 이다.
우리는 산행을 1km 하지도 않았지만 흘린 땀방울은 아마도
천리를 걸은 만큼 흘린듯 하다.....!
↗금대산[金臺山]
금대산은 지리산 조망으로 좋은장소이기도 하다
주로 산행자들은 금대산과 인접 삼봉산을 거점으로 산행을 한다
↗금대산 정상[847m]
금대산 표지석은 강한 바람에 넘어졌는지
두동강이난 것을 본드로 붙어 놓았다.
산행자들은 삼봉산 백운산 금대산 이렇게 종주를 기본코스로 하고 있다
삼봉산(三峯山 1,187m) 은 경남 함양군 함양읍, 마천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걸쳐 있는 해발 1,186.7m의 산으로
산행내내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바라보며 산행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지리산 조망산이다
예전에는 지리산의 유명세에 밀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최근 삼봉산과 금대산이 전국 산꾼들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까닭은
지리산 전망대로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봉산을 걷노라면 남동쪽으로는 천왕봉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을 선명하게 바라보이고
북쪽으로는 남덕유산의 산줄기들이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등구치(등구재 650m)~백운산(902.7m)~금대산(847m)이 이어지고
남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임천강으로 흘러간다.
또한 삼봉산은 지리산조망뿐 아니라 덕유산, 백운산, 계관산
기백산을 바라보는 최고의 전망대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산행코스는 크게 3곳의 들머리에서 산행을 시작할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오도재와 흥부마을로 유명한 팔령 그리고 백장암(백장교) 들머리이다.
물론 금계마을 마천분교에서 시작해도 무방하다.
어떤 코스든 도상거리는 13km 전후 , 산행시간 6시간 이상 소요된다.
다만등구재까지 한없이 내려선 능선에서 다시 깔딱오름길을 올라야 하는 버거움을 포기할거면 등구재에서
창원마을로 하산을 할수도 있을것이다.
↗금대산 정상에서 지리산을 안아보다
금대산에서 지리산 조망은
중봉(1874m) 천왕봉(1915) 제석봉(1808m) 장터목대피소(1653m)
연하봉(1730m) 촛대봉(1703m) 세석대피소(1560m) 영신봉(1652m) 칠선봉(1558m)
우측에서 좌측순으로 지리산 봉우리들이다.
이렇게 지리산 전체를 안아볼수 있는 금대산이다.
↗다랑이논의 조망
지리산 자락 삼정산 기슭에 펼쳐진
함양군 마천면 도마마을이 다랭이 논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작가들의 출사 장소 이기도하다
가을날 벼가 누렇게 익일 무렵이면 다랑이 논 본 모습을 볼수가 있다.
산을 깎고 돌로 쌓아 물이 새지 않게 수평을 유지해놓은 ‘다랑이’ 논을 볼 때면
대대로 내려오며 일일이 손으로 쌓아 구축했을 분들의 땀과 노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람의 힘이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그 ‘다랑이’ 논 사이로 최근 지리산 옛길이 복원되어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trail'을 즐기려 찾고 있다.
↗금대암 가는길 150m
아마도 하산하는 시간은 30분도 채 안걸린듯 하다..
↗하산길의 금대암[金台庵]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읍 가흥리 있는 사찰로서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읍 가흥리에 있으며 656년(태종무열왕 3)에 조사(祖師) 행호(行乎)가 창건하였다 한다.
↗금대암은
지리산의 주 능선을 조망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 경남 함양 땅에 있다.
함양의 마천면에는 기세 좋게 지리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금대산(852m)이 있다.
그 산자락에 놓인 ‘갈 지(之)’ 자의 가파른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암자 금대암이다.
금대암이야말로 지리산의 거대한 능선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서는 최고의 조망처다.
금대암의 중심이 되는 본전인 무량수각 앞마당.
시선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지리 능선을 마주하고 서면
다른 설명이 없어도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우뚝 일어선 산의 능선이 하늘에 금을 그어놓은 듯하다.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 연하봉, 촛대봉, 세석, 영신봉, 칠선봉…. 봉우리를 세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정도다.
모르긴 해도 1300여 년 전쯤 여기다 암자를 처음 세운 이도 이런 경관 때문에 이 자리를 택했을 것이었다.
↗금대암 무량수전
금대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금대사라고도 한다. 창건한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대에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6ㆍ25때 소실된 뒤 금대암복구기성회가 조직되어 중건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인법당(人法堂)과 산신각(山神閣)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금대사삼층석탑이 있다.
이 삼층석탑은 행호가 절을 창건할 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나, 탑의 조성수법으로 보아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대암 무량수전 편액
금대암은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 행우(行宇)가 창건하였으며
도선(道詵: 827∼898)이 나한전을 지어 중창한 뒤 나한도량으로 이름이 났다.
1430년(조선 세종 12)에 천태종 판사도대선사(判事都大禪師) 행호(行乎)가
인근 안국사(安國寺)와 함께 중창하여 금대사(金臺寺)라고 하였다.
1489년 김일손이 이곳을 여행하고 남긴 기행문 《유두두록》에 따르면
당시 이 절에는 20여 명의 승려가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구 500여 명이 몰려와 이곳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 하며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950년 6.25전쟁 뒤 폐사된 것을 금대암복구기성회가 중건했다
↗무량수전 본존불
금대암의 창건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마다 다르다.
심지어 암자에 있는 문화재 안내문도 서로 기록이 달라 혼란만 주고 있다.
안국사 부도 안내문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1403년(태종 3)에 행호 조사가 중건한 것으로
금대암 안내문에는 656년(신라 태종 무열왕 3년)에 행호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금대암 전나무 안내문에는 1403년(태종 3)에 행호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금대암 3층석탑 안내문에는 656년(신라 태종 무열왕 3년)에 행평(行平)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각기 달리 적고 있다.
일부 백과사전에는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 행우(行宇) 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행평(行平) 과 행우(行宇)는 금대암을 중창한 행호(行乎) 조사의 오기로 보인다.
행호 조사는 생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의 승려로 <법화경>의 이치를 깨달아 천태종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지은 치악산 각림사의 낙성식을 주관했고, 장령산에 대자암의 주지로 임명됐다.
세종이 즉위하자 판천태종사로 임명됐으나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의 금대사와 안국사, 천관산 수정사, 강진 백련사를 중수했다.
조선 초기 불교가 배척되는 분위기에서도 효령대군 등을 불교에 귀의시키는 등
왕실에 불교를 보급하는 데 힘쓴 인물로 전해진다.
금대암은 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그 후의 역사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다만, 신라의 도선국사, 고려의 보조국사와 진각국사, 조선의 서산대사가 도를 닦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응윤 스님1743~1804)도 <경암집-금대암기>에서 '신라․고려시대로부터
우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나고 덕망 있는 고승이 모두 이 암자에 거주했는데
고찰할 만한 사적은 없다.'고 했다.
↗금대암 동종금(金臺庵銅鍾) 문화재자료 제268호 (함양군)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59㎝, 입 지름 43㎝의 범종이다.
종 위에는 우리 나라 종의 특징인 소리의 울림을 부드럽게 해준다는
용통이 약간 훼손되었으나 남아있고, 종의 고리에는 용머리가 정교하게 새겨 있다.
종 몸체에는 한 줄의 선을 가로로 긋고, 7자의 부처님 말씀인 법어를 새겨 넣었다.
밑으로 사각형 모양의 유곽에는 빗살무늬를 새겼고, 그 안에 유두를 9개씩 두었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보살상을 4면에 새겼다.
이 종은 조선 영조 10년(1734)에 쌍계사에서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남아 있지만
종의 형식으로 보아도 전형적인 조선 중기의 종임을 알 수 있다.
금대암 동종(金臺庵 銅鐘)은 영조(英祖) 10년(1734)에 제작된 불구(佛具)로
산음 쌍계사에서 제작되어 이곳 금대암(전통사찰(傳統寺刹) 제84호)에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명문(銘文)이『옹정(雍正) 십이년(十二年) 갑인년월일(甲寅年月日) 조성(造成)
중종중칠십근(中鐘重七十斤)) 산음 쌍계사(雙溪寺)』로 정확히 기록(記錄)되어 있다.
음통(音筒)은 약간 훼손되어 있으나 상부의 용두(龍頭)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윗단에 한줄의 선을 돌리어 법어 7자(法語 7字)를 새겼으며
그 아래에 세줄의 띠를 돌렸고, 하단은 민자형으로 역시 세줄의 선을 돌리고 있다.
유곽은 빗살무늬를 새기고 유두(乳頭)는 9개가 배치되었으며
합장한 보살상은 4면에 새겨져 있다. 형식은 전형적인 조선 중기의 동종(銅鐘)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동종의 크기는 높이 59㎝, 지름 43㎝, 둘레 138㎝로서
귀중한 문화재(文化財)자료로 보존(保存) 관리(管理)되고 있다.
↗금대암 무량수전 도량
지리산의 조망은
무량수각 앞마당뿐만 아니라 금대암으로 드는 길 어느 자리에 서도 뒤를 돌면
거대한 지리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암자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따로 있다.
이른바 ‘화룡점정’이라 부를 만한 조망의 명당인데 근래에 무량수각 뒤쪽에다
나한전을 새로 들이면서 저절로 만들어진 자리다.
새로 지은 나한전 옆에는 전각과 딱 붙어 있다시피 한 집채만 한 바위가 있다.
바위는 예전에도 그곳에 있었지만, 워낙 바위가 커서 나한전을 세우기 전에는 그 위로 올라설 수 없었다.
나한전을 놓는 과정에서 바닥을 높이면서 바위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 바위 위가 바로 지리산을 바라보는 최고의 자리다.
지리산과 마주한 바위 위에 앉으면 저절로 ‘산을 보는 자세’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앉아서 지리산을 대하는 느낌은, 법당 아래서 서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르다.
평안하게 앉은 몸이 마음을 이완시키고,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느긋하다.
무언가 자연에 한 발 더 나아간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런지 여기 앉으면 시간을 잊는다.
↗금대암 나한전
나한전 주련
백운청풍자거래 [白雲靑風自去來]
흰구름 맑은바람 스스로 오가는데
일락서산월출동 [日洛西山月出東]
서산에 해지자 동녁에 달 뜨다
천강유수천강월 [千江有水千江月]
천개의 강물에는 천개의 달이 뜨고
만리무운만리천 [萬里無雲萬里千]
만리에 구름없어 만리가 푸르른 하늘이네
↗나한전(羅漢殿 一思 石龍鎭 필)
지리산 금대암에 있는 나한전 편액이다.
대구에서 현대서예를 앞장서 이끌고 있는 일사 석용진 선생의 필이라고 한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석 선생이 자신의 새깔을 넣어 편액을 썼다고 전한다...
↗금대암 나한전 내부
나한전에는 원래 5분의 나한을 모셨으나
가운데 한분만 남기고 도난을 당해 다시 모신 것이라 전한다.
↗금대암 삼층석탑
이 탑은 커다란 바위 위에 서 있는데 바으ㅟ가 탑 기단부를 대신하여 그위로
3층의 탐신이 쌓여 있는 모습이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가지런히 새겼다.
꼭대기에는 단조로은 머리장식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후대에 보충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교적 보존이 잘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얕게 두었는데
그에 따라 낙수면의 경사도 완만하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긑에서 살짝 들려 상승감이 느껴진다.
비록 바위가 기단부를 대신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가벼운 지붕돌의 고선처리는 탑 전체에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
각 부분의 모습들로 보아 아 탑은 조선전기에 세운것으로 보인다[문화제청]
↗원형 작은바윗돌
동그란 바윗돌에 달모양 같다
어느 사찰의 소원바윗돌 처럼 생겼지만
어떤의미의 돌인지 설명이 없어 궁금만 더하다......!
↗금대암 선원
금대암은 신라 도선국사가 빼어난 수행처로 인정했으며
고려시대엔 보조국사, 조선시대엔 서산대사가 수도했다는 말이 구전돼 오고 있다.
또 보조국사 지눌의 법맥을 이은 제자 진각 혜심도 이곳에서 수도했는데
눈이 이마에 묻힐 정도가 되었는데도 묵묵하게 앉아 마치 고목처럼 꼼짝하지 않고 수행했다고 한다.
진각 혜심의 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몸에 옷을 걸치지 않아서 무의자라 했을까
마음에 허위의 옷을 걸치지 않아서 무의자라 했을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선시와 게송들은 그가 마음에 번거로운 옷을 걸치지 않은 사람이
었다는 걸 알려준다.
“한 생각에 선한 마음이 생기면 부처가 마왕의 궁전에 앉고
한 생각에 생기면 마왕이 부처의 법당에 살게된다.
선악을 한꺼번에 잊어 버리면 부처와 마왕이 어디에 나타나랴... ......!
↗금대암 전나무
경상남도 기년물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 전나무는 1403년(태종3년)에 행호조사(行乎祖師)가 창건한
금대암 입구에 서 있다.
비탈에 일군 텃밭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전나무 한 그루
이제 금대암의 상징이 되어버린 전나무의 나이는 500살이 넘었다.
높이가 40m, 둘레가 2.9m로 현재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찻길이 놓이기 전 산길을 오르면 금대암의 입구였던 이곳에는 원래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벼락을 맞아 없어졌다.
지리능선의 장엄한 풍경을 재는 긴 자처럼 전나무는 허공에 매달린 듯, 지리산에 기대어 있는 듯하다.
↗금대암 전나무는
대략나이가 5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40m 둘레가2.92m로
현존하는 전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것으로 평가된다.
↗금대암 전나무는
조선 성종 때의 문인이었던 유호인(1445-1494)은
이곳 금대암을 둘러보고 난뒤 쓴시(詩)에서
잘 있느냐 금대암아
송하문이 옛같구나
송풍에 맑은 꿈 깨어 잠꼬대를 하는도다
라고 하였다 한다
이로써 보건대 금대암 주위에는
조선 전기에도 소나무과에 속하는
나무가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대암 의 지리산 조망
금대암만큼 조선시대 유람록에 자주 등장하는 암자도 드물다.
1400년대 김종직의 <유두류록>,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1600년대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등의 유람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김일손이 <두류기행록>에 남긴 글이다.
김일손은 1489년 4월 14일에서 4월 28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했는데
등구사에서 2박을 하고 4월 16일 금대암에 이르게 된다.
"한 승려가 물을 긷고 있었다. 나는 정백욱(일두 정여창)과 함께 불쑥 들어섰다.
뜰에는 모란 몇 그루가 있었는데, 반쯤 시들었어도 그 꽃은 매우 붉었다.
누더기 승복을 입은 승려 20여 명이 가사를 입고서 뒤따르며 범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도량'이라고 했다.
정백욱이 그럴 듯하게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일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가되 물러섬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매진하여 부처가 되는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무리 가운데 민첩한 한 사람이
긴 막대기로 내리쳐 깨우치게 하여 잡념과 졸음을 없애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처가 되기도 고되군요. 학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성취함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암자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달린 석장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 하나.
금대암의 이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옛날부터 '금대'라는 이름이 지어진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리산의 여러 사찰 가운데서 창건된 지가 오래되었다는 데서
지리산에서 경치가 으뜸이라는 데서, 금박으로 칠했다는 데서 '금대'라는 이름을 유추했지만
이는 억측일 뿐이었다.
금대는 <정토경>에 나오는 말이다.
정토경은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의 <정토삼부경>을 말한다.
<관무량수경-정종본>에 왕비 위제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도 왕사성의 아사세라는 태자가 나쁜 친구 조달의 꾐에 빠져
왕인 빈바사라를 잡아 일곱 겹으로 된 감옥에 감금하고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왕비인 위제희는 몸을 깨끗이 씻어 꿀 반죽을 몸에 발라 남몰래 왕에게 먹였다.
태자 아사세가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의 만류로 궁궐의 깊은 곳에 어머니를 가두고 만다.
슬픔과 근심에 쌓인 왕비 위제희는 부처가 있는 기사굴산을 향해 간절히 예배했다.
이에 부처는 위제희와 미래 세상의 일체 중생들이 서방 극락세계를 보는
열여섯 가지 법을 가르쳐 주게 되니 이가 '16관법(觀法')'이다.
위제희와 대중을 위한 관법이 여섯, 미래중생을 위한 관법이 일곱, 삼배구품왕생이 셋이다.
그중 공덕이 높은 수행자가 삶을 마치려고 할 때
아미타불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등 대중들과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자색을 띤 금빛 연화대(금대)를 가지고 그 수행자를 영접하는데
수행자가 돌아보면 자색을 띤 금색 연화대(금대)에 이미 올라앉아 합장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금대'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부처님의 몸이 금빛이라서 부처가 있는 자리를 금대라고 한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금대산[金臺山]
함양 오도재를 돌아 금대산 금대암에서 지리산을 안아보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함양군, 한국사찰 홈페이지 한국의산하홈페이지 카페 블로그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7.07.24]스마트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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