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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생가[湖巖生家],의령 부잣길따라 호암 이병철선생 생가에서 부자기운 느끼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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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생가[湖巖生家],의령 부잣길따라 호암 이병철선생 생가에서 부자기운 느끼다

바다늑대FORCE 2017. 6. 18. 11:03

 

호암생가[湖巖生家]

의령 부잣길따라 호암 이병철선생 생가에서 부자기운 느끼다....!

 

♣호암 이병철 생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호암길22-4

☎ 055-573-0723

♣ 찾아가는길

    진주 고속도로 IC삼거리-→ 남해고속도로 군북방향→ 남해고속도로 군북IC→79국도

- 20번국도-→의령용덕-→ 의령정곡마을

   

♣ 기행일 : 2017.6.15(목) 날씨:맑음

 

 

♣호암 이병철 생가 개요:

 한국이 대표 기업가, 호암 이병철선생 생가 *
호암생가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이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끈

대표적 기업가인 호암 이병철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1851년 호암선생의 조부께서 대지 면적 1,907㎡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손수 지었으며

호암선생은 유년시절과 결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의 시절을 이 집에서 보냈다.
일자형 평면 형태로 지어진 생가는 남서향의 평평한 땅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동안 몇 차례의 증·개축을 거쳐 은은하고 고고한 멋을 풍기는 오늘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현재의 생가는 안채, 사랑채, 대문채,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담한 토담과 바위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구분되고

주위로는 울창한 대숲이 조성되어 운치있는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氣)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혈(穴)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地勢)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南江)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明堂)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 호암 이병철 선생(湖巖李秉喆先生)에 대하여 -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이래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61년에는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를 발의하고 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1965년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우리의 정신적 자산을 풍족하게 하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고

 

1980년대에는 특유의 통찰력과 선견력으로 반도체산업에 진출하여

우리나라 첨단산업의 발전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호암선생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하였다.

또한, 선생은 성균관대학교 운영을 통한 인재육성을 비롯

문화, 예술,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의 발전에 많은 업적과 교훈을 남겼다.  

 

♣호암 이병철 생가 찾아가는길

  진주→→→의령 정곡 호암이병철 선생 생가

  50km  승용차40분

 

 

 

 

 

 

한민국 구석구석 기행 시작→→→

업무상 의령에 왔다가 그냥 귀가하기가 그래서

함께 갔던 직장 선배랑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를 들러보기로 하고 의령 정곡마을로 향했다.

날씨는 초여름인데도 폭염 수준이였다.

 

 ↗장내마을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가 있는 장내마을이다

생가근처에는 생가를 방문하는 사람들 때문인지 음식휴게시설 간판이 보였다

마을 길 이름도 호암길이라고 명명 되어 있어

한눈에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마을을 알아 볼수 있다.

의령군 정곡면 장내마을은

정곡면 소재지인 중교리(中橋里)에 속한 마을에는 문곡(文谷, 글골, 구곡)과

두곡(斗谷, 두실, 막실)과 장내 (墻內, 담안)가 있다.

중교를 흔히「중다리」로 부르고 있는데 이 중다리를 동네 가운데 있는 다리 때문에

중교로 고쳤다는 설명이지만 다른 유래가 있다.

중다리의 ‘중’은 가운데 또는 겹친다는 뜻으로 ‘中’또는‘重’이어야 하고

‘다리’는 다리(橋)가 아니라 달(月)의 변음이라는 것이다.

결국 중달(中月 또는 重月)이란 말을 쉽고 편하게 부르면서 중다리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내(墻內 또는 牆內)는 원래 지명이 「담안」이다.

옛날 시대와 인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저 전하는 말로는 정경 벼슬을 했던

은진 송씨 부자 집이 이곳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8촌까지 수십가구가 한 곳에 모여 살았으며 주위에는 돌담부랑(돌담)을 쌓고 있어서

담부랑안 담안이란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

리고 이 송씨 부자가 부치던 논밭이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들 이름도

‘정경들’이라고 부른다. 지금 두곡 못미처에 있는 곳이다.
동네 뒤로 ‘대안등’이란 산이 있고 동네 앞으로 큰 도랑이 흐르고

 큰 다리가 놓여 있어서 중교(中橋)란 지명도 어울린다고 볼 수도 있다.

동네앞 나지막한 산줄기가 뻗어 있는데 나부티고개다. 그리고 역사가 오래된 초등학교

우체국을 비롯하여 여러 기관이 모여 있는 곳이라 시골 면소재지로서는 크다.

 

↗ 마을 안길 호암생가 방향 표시판

지금 정곡중학교 뒷산의 산골짜기를 ‘미륵골’이라 부르는데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던 터였던 모양이다.

이 곳에서 1925년 당시 초등학교 학교장이 미륵골 사지(寺址)에서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2기를 발견하여 현 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발굴과정에서 머리, 팔, 무릎 등 여러 곳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아주 귀중한 유물로 판명되어 경남도지정문화재(제6호)로 지정되었고

크고 작은 규격의 두 석불은 팔각연화대좌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미소를 띄운 얼굴모습에

등 뒤로 넓적한 광배가 돋보이고 있으며 작은 키의 불상은 법의를 걸치고

역시 미소를 띈 채 땅을 가리키는 손가락 등으로 보아서 고려시대의 불상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마을 안에는 삼성그룹의 총수였던 고 이병철 회장의 생가와 별장이 있고

경주 이씨 문중의 강원재(江沅齋), 도계재(陶溪齋)를 비롯하여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란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효행이 지극한 큰 선비로

널리 알려진 화헌(和軒) 이종욱(李宗郁) 공을 추모키 위한 중화당(中和堂)이 서산 밑에 있다.

↗호암선생 생가 가는길의 돌담길

돌담길이 너무좋아 배경으로 사진하나 찍어 보았다.

장내마을은

삼성그룹의 총수였던 고 이병철 회장의 생가와 별장이 있고

경주 이씨 문중의 강원재(江沅齋), 도계재(陶溪齋)를 비롯하여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란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효행이 지극한 큰 선비로

널리 알려진 화헌(和軒) 이종욱(李宗郁) 공을 추모키 위한 중화당(中和堂)이 서산 밑에 있다.
그리고 중학교 정문 옆에는 효자성균관생원(孝子成均館生員)

이종영지려(李宗榮之閭)라는 현판이 걸린 꽃집이 있다.

이 꽃집은 조선 선조 때 사마시에 오르고 임란 중에는 조상의 신주를 등에 업고 다녔고

병중의 부모님에게는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고 시병을 한 효자였다고 한다.

역시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곽망우당, 성부사, 정동계선생과의 교분도 두터웠던 분이다.

선조 33년(1600) 조정에서 효자정문을 내렸고 헌종 13년(1847)에 도계서원에 입향 한 큰 선비라고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동네에는 은진 송씨가 먼저 들어왔고 그 뒤 여러 성바지가 들어왔다.

지금은 경주 이씨 25집, 의령 남씨 11집, 경주 최씨 10집

그리고 강씨, 박씨, 정씨, 전씨가 댓집씩이고 오씨, 임씨가 서너집씩 모두 75호가 살고 있다.

의령의 중부지역 중심지인 정곡면 중교(중다리)란 지명은

특히 호암(湖巖) 이병철(李炳喆)회장의 고향 동네라 안팎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할 것이다.

그리고 소재지 못 미쳐서 나부태고개에서 서쪽으로 쑥 들어가면 문산사(文山寺)절이 있다.

높은 석탑과 연못이 있고 아담하고 정갈스럽게 보이는 절에는

비구승만 두 분이 있으며 절 건너에는 문산정(文山亭)이 있다.

 

↗ 부잣길 따라

요즘 시멘트 담벼락엔 벽화가 유행인듯

여기 벽화도 농촌풍경을 그려 놓았다..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 입구[대문]

안내자에 의하면

몇차례의 개축을 거쳐 지은 집이라고 하며

대지면적 1,907㎡에

1851년 호암 선생 조부께서 전통한옥 양식을 손수 지었다고 한다

호암선생은 유년시절과 결혼하여 분가 하기전까지

이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 관람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대문부터 벌서 부잣집임을 알수 있다

풍수지리적 측면에서도 명당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뒷편으로 보이는 산자락이 기운을 끌고 내려와 산 끝이 집터를 가싸고 있는 형태이며

진주 남강이 빠르게 흐르지 않고 천천히 흐르며 이 마을을 가싸 안아주는 터 이다.

 

↗호암 이병철 생가  배치도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 사랑채 광[창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다시 부엌과 부엌방 방2개 대청으로

사랑채는 방 2개와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에는 솟을대문 양쪽으로 방2개가 배치되어 있다.

 

 

↗생가 배치도

 대문을 들어서면 화단 우측에 안내 배치도가 있다.

안내문에는

이 곳은 1910년 2월 12일 한국경제 발전을 이끈 지도적 인물인

호암 이병철 선생(1910~1987)이 태어난 생가 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사랑채 앞 우물

사랑채는 남자들이 기거 했던 곳이며

대문을 들어서면 곧 바로 맞이 하게 되는 단아한 모습의 사랑채 이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면서 손님이 오시면 접대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부농이나 상류층의 주택에서만 이처럼 독립된 건물을 불수 있다.

사랑채앞에도 우물 이 있으며

옛날에 주택내에 우물이 있다는 것은

부자집만 가능 하였다

금수저는 하늘에서 정해 타고 나는듯 하다.....!

 

 

↗우물내부

우물은 깊어 보였다

사용치 않아서 그런지 그렇게 맑은 물은 아니었다

예전처럼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야 새물이 나오고

또 나오고 하는데.......사용치 않으니

음용도 할수 있을지 궁금하다.

 

↗안채

여자들이 기거하고 살림을 살던 안채이다

안채 부엌옆 장독대에 동글동글 모여있는 항아리들이

부지런하고 알들한 안주인의 손길을 말해주는듯 하다.

안채 뒤편에는 대나무숲이 있으며

대나무 숲이  사시사철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한집에 우물이 두개인것은

정말 예전부터 부농이며 상류층 계급인것을 알수 있다..

↗장독대와 광[창고]

창고는 황토 그리고 돌로 쌓아 올려 쥐 한마리도 침입하기 힘들게 되어있으며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스할것 같다

창고앞에는 오동나무 세그루가 있으며

창고담벽엔 덕석 쟁기 탈곡기등 옛 농기구들이 전시 되어 있다

 

 

↗광[창고]내부

섬 가마니들 차고차곡 쌓여 있으며

예전엔 천정까지 가득 벼 가마니들이 쌓여져 있었을것이다.

 

↗전통 생활 도구

창고 속에는 민속전시관 같이 전통 농기구 생활도구가

가득 하였다

어린 아이들 체험교실 운영해도 좋을리 만큼이다.

 

 

 ↗농기구들

 각종 농기구들이 즐비하다

쇠시랑 삽 가래 등등.............

농기구에는 가는연장 삶는연장 씨뿌리는 연장 매는 연장 거두는 연장

몰대는 연장  농경사회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독(항아리)

경상도 사투리로는 도가지이다

 

↗멍석과 되와 말

말은 곡물의 분량을 측정하는 도구로

그 부피는 한 되의 정확한 10배가 되게 정해진 십진법 단위량일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곡식량의 실용단위는 섬 또는 석()으로서

1석은 15말〔〕로 되어 있어 석은 십진법을 사용하여 정해진 단위는 아니다.

그러나 곡물을 계량할 때는 언제나 말을 사용하였으며

또는 말로써 계량할 수 없는 적은 분량일 경우에는 되가 쓰였다.

상고 때부터 고려 문종 때까지는 단일량제도()로, 한 종류만의 말이 있었으나

고려 문종이 제가이량기제도()로 개혁한 이후에는 네 종류로 나뉘었다.

그 용적율은 대략 미곡용말:대 소두말:말장말:비조곡말=1.000:0.750:1.555:1.765이다.

단, 이 네 종류의 말 가운데 대소두용 말의 용적은

다른 한 말 값의 절반 값이 되는 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는 고려의 문종이 차등수조법()을 동과수조법()으로 개혁하였기 때문이다.

 

↗ 기가 제일 많은 암반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혈()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살구나무 아래서

살구나무아래서 폭염의 햇살을 잠시 피할무릅에

관광차 한대분의 관람객이 왔다

부산서 왔다고 하며 너도 나도 부자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가 보다......!

 

 

↗호암길11-1

  이 주택은 호암선생께서 분가하여 살던 집이라고

마을사람들이 전한다

대문을 굳게 닺쳐 있으며 개방하지 않고 있다

현재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내부

담벽이 너무 높아 내부를 볼수가 없어서

카메라 삼각대를 이용해 담넘어까지 올려 촬영해 보았다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이래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61년에는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를 발의하고 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1965년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우리의 정신적 자산을 풍족하게 하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고

1980년대에는 특유의 통찰력과 선견력으로 반도체산업에 진출하여

우리나라 첨단산업의 발전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호암선생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하였다.
또한, 선생은 성균관대학교 운영을 통한 인재육성을 비롯, 문화, 예술,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의 발전에 많은 업적과 교훈을 남겼다.   

 

 

→→→ 생가를 둘러보고 늦은 점심을 먹기위해

의령 재래시장에 있는 의령소바 본점으로 향했다.

 

↗의령소바 본점

주소는 경남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491-30번지 이며

의령 재래시장내에 있는 의령소바 본점이다

점심시간이 훨신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번호표를 뽑고 대기 하여야 했다

↗골프채왕갈비탕  12,000원

의령 전통의 맛 메밀국수로서 4계절 내내 메밀국수를 즐길수 있는곳이다.

 

 

 

호암생가[湖巖生家]

의령 부잣길따라 호암 이병철선생 생가에서 부자기운 느끼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의령군 홈페이지 향토문화사전 카페블로그자료등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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