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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逍遙山], 경기도의 小금강 소요산 원효대사의 禪길을 걷다 본문
소요산[逍遙山]
경기도의 小금강 소요산 원효대사의 禪길을 걷다
▲소요산[逍遙山]
높이 : 559m
▲산행일 : 2017년04월08(토) 날씨: 맑음
▲나의산행코스 : 관리사무소→→→일주문→→→원효폭포→→→자재암→→→선녀탕갈림길
나한대→→→의상대(원점회귀)
▲소요산개요:
소요산의 높이는 536m이고, 산세가 웅장하지는 않으나
석영반암의 대암맥이 산능선에 병풍처럼 노출되어 성벽을 이루고 있는듯하며
경기소금강(京畿小金剛)이라고 할 만큼 경승지이다. 동두천역에서 약 4㎞ 떨어져 있는데
소요산 하면 진달래·단풍·두견과 폭포를 연상할 만큼 꽃과 단풍으로 알려진 산이다
974년(광종 25)에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서화담양달래와 매월당이 자주 소요하였다고 하여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소요산의 입구에 청량폭포(淸凉瀑布) 및 원효폭포가 있는데
청량폭포가 있는 곳을 하백운대(下白雲臺)라 하고 그 위쪽의 원효폭포가 있는 곳을 중백운대라고 한다.
원효폭포 주변에는 방음봉·이필봉·약수봉 등의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중백운대에는 신라시대에 원효가 세운 자재암(自在庵)이 있고, 다시 그 위쪽으로 나한대·의상대 등을 거쳐
30m 돌층계를 오르면 원효대에 닿는데 이 곳을 상백운대라고 부른다.
산의 정상에서 보면 북쪽으로는 한탄강이, 남쪽으로는 서울방면의 산맥이 굽이쳐 전망이 매우 좋다.
서화담 양봉래와 매월당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소요산은 규모는 작지만 산세가 특이하다. 하백운대(440m)
중백운대(510m), 상백운대(559m), 나한대(571m), 의상대(587m), 공주봉(526m)의
여섯 봉우리가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주봉은 상백운대(559m)이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장관을 이루며, 여름의 녹음과 폭포, 계곡, 가을 단풍
또한 유별나서 옛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일컬어진다.
인적 뜸한 겨울 정취도 낭만이 그윽하다.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놓아 만물상을 연상케 한다.
자재암이 있는 백운대를 오르는 계곡은 암봉과 바위능선 사이로 골짜기가 협곡을 이루고 있으며
청량폭포, 원효폭포 등의 명소가 산재하여 있다.
수도권에 있어 거리도 가깝고 교통편도 좋다.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눈썰매장, 수영장등이 있어 수도권지역의 일일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자락의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도를 깨친 곳.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이 있은 후
심산유곡인 이 곳을 찾아와 수행하다가 절을 지었다.
수행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 하여 자재암이라 했다.
자재암 주변엔 아담한 물줄기의 폭포가 널려 있다.
원효폭포 옥류폭포 청량폭포 선녀탕 주변엔 여름철마다 피서객들로 북적댄다.
자연석굴인 나한전과 산중턱의 금송굴도 신비롭다.
▲소요산 등산지도
▲소요산 가는길
진주 →→→ 소요산관리사무소 381km 개인차량 4시간소요
→→→→→2017년 4월8일 토요일
새벽4시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을 향해
길을 나섰다..!!
↗소요산 산림욕장주차장
산행 시작은 여기 주차장 부터이다
소요산 대형조형물이 출입구처럼 되어있고 자전거 조형물 아래는 산악레포츠의 도시라 적혀져 있다.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소요산
매월당 김시습이 산책을 즐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부터 소요산을 걸어보자..!
↗매표소
입장료 어른 1000원
소요산 국민 관광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동두천시민 그리고 국가유공자는 무료이다
↗소요산 자재암 일주문
석가탄신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여기저기 연등이 많이 걸려 있다
보통 소요산 들머리를 자재암 일주문으로 산행기점으로 많이 한다고 한며
매표소에서 일주문 까지는 10여분 걸어야 한다.
자재암 일주문은
정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에 건립한 것이다.
정면에는「소요산자재암(逍遙山自在庵)」「경기소금강(京畿小金剛)」
이라는 편액 두 개가 걸려있다
↗속리교[俗離橋]
일주문 지나서
다리 건너기전 좌측엔 공덕비와 원효굴 과 원효폭포가 나오며
우측엔 공주봉 자재암 원효대로로 가는길이 나온다..
속리교는
속세와 인연을 끊는 다리의 뜻으로 자재암으로 가는길은
엄연한 수행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한조각 속진마을을 여기서라도 떨쳐본다...!
↗소요산 등산 종합 안내도
소요산은 김시습(매월당)이 자주 거닐던 산이라 해서 소요산인 이산은
그만큼 경관이 빼어나고 휴양하기에 좋은 장소다
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를 비룻해 나한대,의상대,공주봉의 여섯 개의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으로 능선을 이루고 있다.
경기의 소금강 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소요산은 계곡과 폭포를 찾는 이들이 많고
산 중턱에 있는 명사찰 자재암까지의 산행도 볼만하다.
자재암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길이 가파르지만 능선으로 접어들면
경사가 완만해 무리한 산행은 아니다.
진달래가 필무렵인 4월초부터 단풍이 지는 10월말까지 특히 아름답다.
안내판 글 옮겨보았다..
↗자재암 가는길 백팔계단
연꽃으로 10단위식 숫자로 표시 해놓았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백팔번뇌(百八煩惱)란
견혹의 88가지에 사혹의 10가지를 합해 98가지가 되고
여기에 탐심과 진심(瞋心)과 치심(癡心)의 근본 번뇌에서 일어나는 10가지 부수적인
번뇌를 더하여 백팔번뇌가 되는 것이다.
↗해탈문
해탈문은 목재로서 좌 우측 연꽃그림이 있고
풍경(작은종)과 해탈문이란 작은 편액이 걸려 있다
속리교에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108계단을 올라와 108번뇌를 떨치고
해탈문으로 들어선다........!
↗자재암[自在庵]
자재암(自在庵)은『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자재암(自在庵)」조에 의하면
654년(신라 무열왕 1년)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974년(광종 25년) 각규대사(覺圭大師)가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고 소요사라 했다.
그리고 1153년(의종 7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사찰에 대한 구체적인 연혁이 전하지는 않으나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 경기 양주도호부 소요사(逍遙寺) 조에 태조의 원당으로 하고
밭 1백 50결을 하사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범우고(梵宇攷)에 있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년)의
詩에 소요사가 언급되고 있으나 페허가 되었다고 했다.
이로보아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자재암은 태조의 원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다가
어느 시기엔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후기 들어서는 1872년(고종 9년)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이 퇴락한 자재암을 중창하고 영원사(靈源寺)라 하였다.
이때의 일은 설화같이『소요산영원사중건기(逍遙山靈源寺重建記)』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은 같은 꿈을 꾸고 만나
영산전ㆍ만월보전ㆍ독성각ㆍ산신각ㆍ별원(別院) 등 모두 44칸을 중창 하였다고 한다.
1907년에는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09년 성파(性坡)스님과 제암 스님이 다시 중창하고 절 이름을 자재암으로 고쳤다.
이러한 내용은『자재암재차중건기(自在庵再次重建記)』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근세에 들어 한국전쟁 당시 다시 소실된 것을 1961년 진정(眞精) 스님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 스님이 요사채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1982년에는 일주문을 각각 지었다. 이어 1984년에는 동두천 시내에 부설 연화유치원(현)이 개원하였고
1983~1985년에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운 중창을 하여 지금의 사격을 갖추었다.
↗나한전 그리고 석등
그리고 옥류봉..석등뒤 암석이 옥류봉(옥로봉)이라고 한다.
나한전 우측에 원효샘이 있다..
원효샘은 바위틈에서 스며나오는 석간수로 물맛이
달면서도 그 성품이 맑아 오랜세월 다인들에 사랑을 받아왔다.
그 인연으로 자재암은 차문화 유적지로 꼽히고 있다.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여(茶禪一如)'라고 하지 않던가
원효샘은 원효스님이 수행하던중 만든 샘물로 스님이 보여주었든
중생 사랑이 천년의 세월에도 마르지않고 이렇게 전해주고있는 것이다 .
나한전 내부↘
청량폭포 옆 기암괴석 아래에 위치한 천연동굴로서
창건당시 원효스님께서 수행하였다는 수행처였으며
1812년 학산 윤제홍이 그린 <소요사 방화굴>이란 그림에 보면 불상을 봉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나한전은 근대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으로 1961년 이후 세워진 것이다.
나한전 내부에는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청량폭포
청량폭포라고고 불린다. 원효대, 관음봉과 어울려 원효대사의 친견설화가 내려온다.
↗정상(의상대)으로 가는 계단
자재암 나한전 좌측으로 등산로가 있으며 여기서 부터 능선까지 오르막길
산행자들의 숨소리가 헉헉거리는 소리가 봄날 새소리와 같이
어루러져 들리는듯 하다.
↗우드계단 끝
잠시 숨고르기와 봄바람에 땀도 식혀보고서.....!
↗ 소요산 계곡
아마도 선녀탕에서 내려오는 물이 고여 있는것 같다
계곡옆 나무는 뿌리를 다 드러내고
물에 금방 입수할듯 모습을 하고 있다.
↗119표지목
119표지목이 큼직 해서 좋다
경기도의 큼직한 마음같아서 그런가?
조난표지목은 대부분 규격화 되어 있는데 경기도 119조난표지목은
큼직해서 맘에 쏙 든다.....!
표지목 주위에는 생강나무가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다.
↗하백운대와 나한대 갈림길
오르막길 연속 이제는 능선이 보인다..
인간의 발자국이 얼마나 무서운지 등산로 나무들은
뿌리를 흔히 드러내고 있다.....!
↗하백운대와 나한대 갈림길에서 나한대 쪽으로
정상 의상대 있는곳으로 가기위해 나한대 방향으로 걸어면서
디카로 셀카를 찍어 본다....!
↗ 누운나무와 같이 휴식
나무도 피곤해서 누운가 보다....나도 나무랑 같이 휴식을 취해본다
우리 산악회 회원 초등학교 2학년 아드님 어느새 내뒤에 서있네...
울 딸도 초등학교 6학년 까지만 해도 지리산에 함께 일곱번이나 산행 했는데
중학생된 이후부터는 일절 같이 가지 않네....크크크!!
↗나한대 가는 등산로
산행자가 얼마나 오르고 또 내려오고 했을까....?
등산로 계단은 상처가 가득하다
안전 가로대는 겨울에 차갑게 달라붙지 않도록
플라스틱으로 덮어씌워 놓아 산행자를 많이 배려한것을 알수 있다.
↗나한대[571m]
나한대가 눈앞에 보인다...
나한대는 소요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오른편에는 의상대와
공주봉이 위치해 있고
왼편에는 선녀탕 하산로 칼바위와 상백운대가 위치해 있다....!
↗나한대 에서 의상대쪽으로 한컷
나한이란 의미는 불교를 수행하여 해탈에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이르는 명칭으로 신라시대 원효에 의해 창건 되었고
구려초에 나옹 등 여러 고승들이 수행하였던 장소이고
특히 조선태조가 이절에 머물며 절의 면모를 일신한 이후 자재암이 크게 번성하자
절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봉우리들이 불교와 관련된 명칭으로 부르는 중에
이곳을 나한대라 부르게 되었다.
↗나한대에서 바라본 의상대
나한대에서 의상대까지는 0.2km 이며 공주봉까지는 1.2km이다
↗바위틈 진달래
흙을 찾아 얼마나 뿌리를 깊에 내렸을까..?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뻗어서 흙과 물을 찾아 많은 노고가 있을듯한 진달래
그 노력에 잎도 피우고 꽃도 피웠다.
↗바위틈 솔나무
언제나 한결같이 푸른솔나무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수행하는 스님처럼 흔들리지 않고 참선하는듯 하다...!
↗소요산 정상 안내표지목[의상대]
미세먼지로 인해서 동두천 조망을 시원하게 못봐서 조금 아쉽지만
우리나라100대 명산 소요산 정상에 오르다..!
↗의상대(義湘臺 587m) 소요산 정상
동두천의 명산인 소요산이 주봉으로 해발578m 이다.
여가서는 동두천시의 상,하봉암동이 바라보이며 그 건너편으로 파주의 감악산이 보이다.
뒷편으로는 소요산 지막과 국사봉,왕방산,해룡산,칠봉산이 마치 용의 등처럼 휘감아져 보인다.
이름의 유래는 조선 태조가 소요산에 머물며
자재암을 크게 일으킨후 자재암을 둘러싼 소요산 여러 봉우리들이 불교와 관련된 이름으로 불렀는데
자재암을 창건한 원효대사의 수행 동반자인 의상을 기려 소요산 최고봉을 의상대라
부르게 되었다..
※의상[義湘]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나섰던 인물인데
원효가 신라로 되돌아온 데 비해 그는 끝내 유학을 감행하여
중국 화엄종 제2대조인 지엄(至嚴)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신라로 귀국한 후에 신라 화엄종을 창설했으며
법계도의 210자를 바라보면서 글자 하나하나가 제멋대로 자기의 우월성만을 주장하고
자리다툼만 한다면 의미 있는 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하나를 통한 전체의 통일과 조화를 강조했는데
이는 획일주의나 전체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정신적 경계인
우주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의상의 문하에는 삼천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뛰어난 제자들이
신라 화엄종의 주류를 형성했고, 이들을 통해서 실천을 중시하는
의상의 교학이 한국 화엄교학의 전통이 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대승불교 중에서도 화엄종이 대세를 이뤘다.
그러나 후반기에 들어와 이 화엄종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허위의식에 빠져 선종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선종은 지방 호족을 지지 기반으로 크게 유행했고 고려의 창건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소요산은
동두천시 소요동에 있으며 한수 이북 최고의 명산, 또는 경기의 소금강 등으로 불린다.
서울에서 44km, 동두천 시청에서 동북쪽으로 약 5km의 거리에 있는 소요산 (587m) 은
해발은 낮아도 수목과 폭포, 봉우리가 줄지어 있다.
소요산에는 곳곳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요석공주가 머물렀다는 별궁터와 원효가 수도했다는 원효대도 있고 정상인 의상대 옆에 있는
공주봉(원효가 요석공주를 두고 지은 이름)도 있다.
산 중턱의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도를 깨친 곳으로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이 있은 후 심 산유곡인 이곳을 찾아와 수행하다가 절을 지었다고 한다.
수행 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하 여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하여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자재암 주변엔 아담한 물줄기의 폭포가 널려 있다.
원효폭포, 옥류폭포, 청량폭포, 선녀탕 주변엔 여름철마다 피서객들로 북적댄다.
자연석굴인 나한전과 산중턱의 금송굴도 신비롭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혼란한 시기에 생존하였던 원효 (元曉 617-686) 는 의상과 더불어
당나라에 유학하려 두차례(34세, 650년 및 45세, 661년) 나 시도하였으나
자신의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음을 깨닫고 혼자 되돌아와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왕성한 저술, 선교활동을 펴,그 사변력, 통찰력과 문장력에 대한 명성이 항간에 자자하였다.
그는 광대들이나 쓰는 무애박을 치고,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며, 광대, 백정, 기생, 시정잡배
몽매하고 늙은사람들 사이를 방방곡곡 떠돌며 춤추고 노래하며 술마시고 거문고를 켜며
무수한 대중에게 불법을 전하였다.
코흘리개 아이까지도 부처에 대해알게 되었다.
김춘추의 둘째누이인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첫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고 홀로 되었는데 불심이 깊었던 공주는
인격이 고매하고 화랑시절 백제전투에도 참가했던 원효에 대하여 깊은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667년 문무왕 7년경(51세) 부왕인 태종무열왕의 과부공주인 요석과 만나
얼마후 설총을 낳고 이후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 라 하며 무애의 보살행을 행하였다 한다.
결혼전 원효는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이를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다는 원효의 결혼에의 관심으로 보는 견해도 많지만
새 시대의 지평을 열어보이리라는 사상사의 선언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소요산에 가면 원효가 과연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알수 있는 자취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높은 산 불끈 솟은 바위는 지혜로운 이가 들 곳이요,(원효대)
푸른 소나무 깊은 골은 수행자가 깃들 곳이니라.(자재암)"
"주리면 나무열매를 먹어서 주린 창자를 달랠 것이요,(소요산)
목이 타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힐 것이니라.(원효폭포)"
"메아리가 울리는 바위굴을 염불하는 법당으로 삼고,(나한전-굴)
슬피우는 기러기를 기쁘게 마음의 벗으로 삼을 것이니라."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조선세조 10년에 간행된 반야바라밀다 심경약소
언해본이 완벽하게 발견되어 보물 1211호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의상대는 소요산 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어 가을단풍과 겨울 설경이 장관이다.
소요산은 소요산역이 있는 소요동이 산행의 들머리가 된다. 입구에서 중간의 주차장과 상가를 지나
그저 평탄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소요산 자재암' 이라 쓰인 현판을 단 일주문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조금 오르면 기암 절벽 사이로 떨어지는 원효폭포가 있고 그 폭포아래 속리교라는 다리가 있다.
여기서 두 갈래 길이 나타나는데, 오른쪽으로 난 계곡 길을 따라 오르면 남쪽 능선 위, 소요산의 정상인
의상대(587m)로 바로 오르게 된다.
속리교를 지나 왼쪽의 난간으로 난 길을 계속 오르면 절벽을 이룬바위가 나타난다.
원효대사가 수도 한 곳이라는 전설이 서려있어 원효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양쪽으로 치솟은 암벽 사이의 숲길을 오르면 곧 세심교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백운암 돌담 옆을 지나면 곧 자재암에 닿는다.
자재암 옆에는 나한전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굴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주 맛있는 물이 솟아나온다.
(원효샘물)이 물은 최고의 차맛을 내기로 유명하여 이곳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담론과
산책을 유도한 우리나라 차문화의 산실이다.
그 옆에는 높이 20여 미터의 청량폭포가 있고 청량폭포를 지나면 중백운대로 이어지는
능선길과 계곡으로 계속되는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중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암릉길이다.
중백운대에서 상백운대 (535m) 로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한 밋밋한 길이지만
능선 남쪽은 가파른 벼랑을 이루고 있다.
상백운대에서 선녀탕이 있는 계곡으로 바로 내려갈 수도 있고 아니면
나한대를 거쳐 정상인 의상대까지 간후 원효폭포 쪽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또한 의상대로 이어지는 능선 곳곳에 계곡 쪽으로 난 하산길이 있다.
이쪽 능선에서의 하산길들은 경사가 급한 편이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소요산[逍遙山]
경기도의 小금강 소요산 원효대사의 禪길을 걷다
인용글 : 자재암 및 동두천홈페이지 한국의산하 산행자료등 인터넷사전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7.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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