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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禪雲寺], 고창 도솔산[兜率山] 선운사 미륵성지에서 구름에 누워 지혜를 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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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禪雲寺], 고창 도솔산[兜率山] 선운사 미륵성지에서 구름에 누워 지혜를 담다

바다늑대FORCE 2015. 6. 9. 16:21

선운사[禪雲寺],

고창 도솔산[兜率山] 선운사 미륵성지에서 구름에 누워 지혜를 담다

 

♣선운사[禪雲寺]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兜率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본사 지장성지

 ☎ 603-561-1478 

♣ 찾아가는길

    남해고속도로(진주jc)→호남 고속도로 장성 위에서 장성-고창간 고속도로 진입

→ 서해안 고속도로 선운사 I.C. → 선운사

   

♣ 사찰기행일 : 2015.05.31(일)

♣ 선운사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本寺)이다.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년(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檢旦,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707년(숙종 33)에 쓰여진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 兜率山禪雲寺創修勝蹟記〉는 전자의 설을 취하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날밤에 좌변굴(左邊窟:진흥굴, 도솔암 밑에 있다.)에서 자다가

꿈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하였으니 이것이 이 절의 시초라고 하였다.

이 창건설화는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다고 하는 사실에 따라 형성되었겠지만

 당시에 이 지역이 신라땅에 속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또 검단의 창건설을 보면 위덕왕 24년은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러난지 2년 뒤에 해당한다.

 그런데 검단과 해구(海口)에 있는 검단리(檢旦里)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즉, 옛날에 검단선사가 바닷가의 사람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쳤기에

 해안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시납하였다는 것이다.

두 설은 모두 설화이기에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모두 진흥왕이 창건하고 그 뒤에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354년(공민왕 3)에 효정(孝正)이 중수하였고

1472년(성종 3)부터 10여년 동안 극유(克乳)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극유는 1472년에 이 절에 이르러 뜰에 구층석탑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중창을 발원하였다.

그는 이듬해 2월 제자 종념(終念)과 함께 상경하여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德源君)이 쓴 원문(願文)을 얻어 중창을 시작하였다.

그 해 여름에 나주 보을정도(寶乙丁島)의 재목 1,000여 그루를 3척의 배에 싣고 왔으며

1473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와 20여 가마를 구웠다.

그리하여 1474년에는 2층의 장륙전(丈六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짓고

1475년 봄에는 선왕선가(先王仙駕)를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크게 열었다.

1476년에는 천불대광명전(千佛大光明殿)을 조성하였고

 1481년에는 모든 건물이 단청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장전(地藏殿)·동상실(東上室)·금당(金堂)·능인전(能仁殿) 등을 짓고

또한 영산회(靈山會) 등 53불회탱(五十三佛會幀)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10여 년에 걸친 극유의 중창불사로 인하여 선암사는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건물이 189채나 되는 웅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 어실(御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1609년에 이르는 2년 동안

 승려 수십 명이 선방(禪房) 한두 개 소를 먼저 지은 뒤 몇 년 동안에 법당 3칸을 지었다.

 1613년(광해군 5) 봄에 태수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에게 중창을 부탁하자

일관은 원준(元俊)과 더불어 수많은 집을 돌며 시주를 모았다.

그리고 어실을 빙자하여 고창 문수리에서 재목을 얻어 먼저 보전(寶殿) 5칸을 세운 다음

 상·하 누각과 동·서 양실(兩室)을 건립하였다. 이때의 중창은 6년 만인 1619년에 끝을 맺었다.

그 뒤 1707년(숙종 33)에 이르기까지 일관·원준 등의 선사들이 서로 계승하여 거듭 건물을 세우고

화상을 조성하는 등의 불사를 계속하였다.

1698년에 김우항(金宇杭)이 쓴 〈선운사중신기 禪雲寺重新記〉에는 중수에 참여하고

당시 선운사에 살고 있던 대중 260여 명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사찰규모와 조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이다.

 1707년에는 현익(玄益)이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를 지었다.

1839년(헌종 5) 비로 인해 법당 오른쪽 2칸이 무너졌다.

이에 찬성(贊誠)·의홍(義弘)·성찬(誠贊) 등이 법당과 향운전(香雲殿)을 수리하고 정문(正門)의 기와를 갈았는데,

 1840년 가을에 중수를 마쳤다.

이 때의 중수내역을 기정진(奇正鎭)이 〈무장현선운사대법당사적기 茂長縣禪雲寺大法堂事蹟記〉에 기록하여 남겼다.

 1965년 팔상전을 중수하였고, 197년 성보전시관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운사 사적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 殿閣寮舍創建年代芳名列目〉이라는 제목 아래 남아 있다.

그것은 이 시기의 선운사의 역사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약도

 

 

하트3사찰기행시작→→→→→→→

 아름다운山과 사찰기행은 늘 함께 한다

山에 오르면 사찰이 있고 사찰에 가면 아름다운 山이 있다...!

 

↗선운사 가는길

 선운사 주차장에서 선운사 까지는 약1km정도 걸어야 한다

가는길 우측에는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가족동반 나들이객이 많다.

선운사 가는길은  양측엔 관광객 산행객 대상으로 상업하는 판매대가 즐비하다

특히 고창의 특산물인 복분자 엑기스 복분자술등 복분자 관련한 상품들이 대부분이다.!

 

↗도솔산 선운사 [兜率山 禪雲寺] 일주문 

본래는 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데서 유래한 명칭으로

한 곳으로 마음을 모으는 일심(一心)을 뜻했다고 한다.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들을 걸어 사찰의 격(格)을 나타내기도 합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래 범어사(梵魚寺), 양산 통도사(通度寺), 합천 해인사(海印寺)의 일주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중 통도사의 경우 문의 중앙에 ‘영축산 통도사(靈鷲山通度寺)’라는 현판을 걸어

사찰의 명을 밝히고 좌우 기둥에 ‘佛之宗家(불지종가)’와

 ‘國之大刹(국지대찰)’이라는 주련(柱聯)을 붙여서 이 절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요즘 사찰의 입구에 일주문을 세운 것은 신성한 곳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주머니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문화재관람요금 명목이다.

어떤때는 산행자와 매표소 직원간의 간간 언쟁 마찰이 일어나는것도 종종 본다.

난 불교신자증이 있어 그런 언쟁 피하고 산과 사찰을 편안하게 들어설수 있다

그냥 무료로 일주문을 들어설수 있다면 ..산을 찾는 산행자들의 언쟁 같은건...없을것 같은데........!

 

↗극락교

선운사 극락교를 건너면 천왕문이 보인다

극락교 아래 흐르는 물을 보노라면

극락세계 같은  마음이 청정해지는듯 하다....! 

 

 

↗천왕문[天王門]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殿閣寮舍創建年代芳名列目]보면

1624년 봄 창건, 화주 지정(智晶).

1674년 봄 수장, 화주 종민(宗敏). 단청, 화주 법안.

1669년 봄 개와, 화주 지휘(智輝). 1680년 봄 천왕등상(天王等像), 화주 사준.라고 되어 있고

선운사 천왕문은 앞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의 2층 건축물이며 2층엔 종과 법고가 있고

1층엔사천왕상이 있으며 편액은 선운사라고 되어 있다.

건물은  1970년에 건립되었지만 편액은 조선 후기의 서예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것이라 한다.

사천왕은 불법을 보호하는 외호신이며 동:지국천왕, 남:증장천왕, 서:광목천왕, 북:다문천왕으로

각각 자신의 무리인 호법신장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2012년에만 해도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하고 없다.

 

 

↗선운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선운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단층목조건물. 보물 제290호.

얕은 기단이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기단 중앙에 석계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긴 평면을 이루며,

주간(柱間)이 넓고 기둥이 상대적으로 짧아 넓게 퍼져 있는 모습이다.

막돌 초석 위에 약간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워

창방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을 놓은 내외3출목의 다포식 건물이다.

공간포(空間包)는 어간(御間)에 3구,

좌우 협간(狹間)과 툇간(退間)에 2구씩 배열했으며 정면 기둥 사이에는 빗살창호를 달고

 서쪽 면에만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옆면에는 공포를 배열하지 않고 대신 고주(高柱) 2개를 세워 3칸으로 했다.

처마는 부연(附椽)이 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다포계 건물에서는 드믄 맞배지붕이다.

 내부는 통칸이나 불벽(佛壁)을 1줄 세워 그 안에 불단을 설치했으며,

불단 뒤쪽으로 고주 3개를 세워 여기에 대량(大樑)과 종량(宗樑)을 짜맞추었다.

내부의 천장은 내진(內陳)의 어간만 우물반자이며

 나머지는 평반자로 하고 외진에는 빗반자를 설치했다.

내진의 우물반자와 평반자에는 꽃무늬를 장식하고,

빗반자에는 구획을 하여 주악상(奏樂像)을 그려놓았으며 평반자 중 툇간에는

구름 속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용을 생동감 있게 그려놓았다.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병화를 입어 파괴된 후

1614년(광해군 6)에 재건되었음이 사적기를 통해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있는 모습은 평야지대의 건물 특색을 잘 보여주는데,

다포계이면서 맞배지붕을 얹은 것이나 내부의 가구재가 간단한 것이 특색이며,

공포의 구성기법은 17세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대웅보전은 5여래(五如來:미타불,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약사여래불)

6보살(六菩薩:데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모 신

선운사의 중심 법당이었으나 정유재란(1597) 때 피해를 입어 지금은 중앙에

비로자나부처님과 좌우로 약사여래 부처님 아미타 부처님인 삼존불만 모시고 있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건립된 것으로 맞배지붕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고 법당 내부 천장에는 수많은 용들이 구름속에 몸을 감추고서 선운사를 수호하고 있다.

 

↗선운사 만세루[禪雲寺萬歲樓 ]

정면 9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건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

길이 27.0m, 너비 11.8m인 석조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 강당(講堂) 건물로

기둥높이는 3.9m이며, 귀기둥은 특히 비대한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였다.

안쪽 기둥들도 둥글게 다듬긴 하였으나 거의 자연목 그대로 이용하였다.

 지상 높이 0.48m에 하방(下枋)을 지르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았다.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을 끼우고 기둥머리를 얹은 다음

첨차를 끼워 장여[長舌]와 대들보를 동시에 받게 하였다.

대들보는 중앙 고주(高柱)와 양 평주(平柱) 사이에 각각 걸려 있으며

원목의 구부러진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기둥을 세우고 중도리와 종량을 받쳤으며,

종량에는 키가 큰 대공(臺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쳤다.

한편, 종량 중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특이한 기법도 발휘되어 있어 주목된다.

앞면에는 판장문을 달고 양 옆면 1칸에 2쪽 판문을 달았으며, 대웅전쪽은 완전히 개방하였다.

전체적으로 원목을 다듬지 않은 채 사용하여 구조의 단순성과 형태의 장엄함을 얻고 있으나

 내부공간의 처리는 조형적으로 잘 정리되지 않은 인상을 준다.

 

↗범종각 

선운사 범종(전북 유형문화재 제 31호)

 이 범종의 높이는 129cm 이다.

종신(鐘身) 4곳에는 연화당 화문이 띠를 두르고 있고

그 유곽 안에는 9개의 연꽃이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보살상과 범자(梵字)를 새겼다.

 몸체의 가운데 부분에 명문(銘文)이 있는데

이 글을 통하여 도편수 권동삼과 부도편수 이군술에 의하여 다시 개주되었으며

 처영스님이 직접 주도하고 감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운사 육층석탑(六層石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화강암으로 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원래는 9층이었으나 현재는 6층만이 남아 있다.

방형의 축대안에 지대석을 세우고 각층에 사각형의 중석을 올렸다

층 옥개석 위에 복발이 있고, 그 위로 팔각의 귀꽃으로 각축된 보개를 얹어 놓았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 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선운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나타낸 전각으로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十王)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공포는 초익공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연봉이 달린 쇠서나 봉황두 형태의 초각 등에서 조선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나타난다.

전면의 중앙 3칸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양쪽 협칸은 상단에

 띠살 형태의 창, 하단에 판장문 형태로 마감하였다.

명부전 내부에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주불로 좌우협시는 도명존자(우측), 무독귀왕(좌측)으로 

명부시왕 열분이 모셔져 있다.

↖조사전↑팔상전

선운사 팔상전(八相殿)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를 봉안하는 곳이다.

이곳에도 1706년의 중건 때 함께 봉안한 팔상탱화가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현재는 1900년에 새로 조성된 팔상 탱화 중 6점이 남아 있다.

석가여래 좌상도 근래에 조성한 것이며, 본존 뒤의 후불 벽화도 1901년에 조성된 것이다.

 선운사 조사전 

조사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선운사 조사스님들의

영정과 유물,  유품들을 봉안하기 위해 2010년에 세워졌다.

조사전에는  선운사 창건주인 검단스님을 비롯하여  의운, 설파, 백파,

경담, 환응, 석전 스님 등 7분의 진영도 함께 봉안됐다.

↗관음전(觀音殿) 

대웅전의 동쪽에 위치한 관음전은 정면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관세음보살을 봉안하는 전각이다.

관음전이란 현판을 달고 금동지장보살(보물 제279호)을 모셨다가, 2010년 관음전으로 복원하고

천개의 손길로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봉안하였다.

 

 

선운사 영산전(靈山殿) 

영산이란 영산회상의  준말로서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던 법회의 모임을 뜻한다.

영산전은 대웅보전의 서쪽에 위치하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조성된 영산전은  본래 장육전(丈六殿)으로 1471년 처음  조성할 때

 2층 전각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불타고 1614년에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바뀌었으며, 1821년과 1839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장육전이란 이름은 내부에 봉안된 불상이 1장 6척이나 되는 불상이었기 때문이며

거대한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서 2층의 누각 건물로 조성했다 한다.

영산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좌우에 제화갈라보살(竭羅菩薩)과 미륵보살(彌勒菩薩)을

협시로 순조 21년(1821)에 목조삼존불(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을 봉안하였다.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3m, 협시보살의 높이는 2.4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며,

 주존은 16각의 난간을 두른 목각연화대좌에 모셔져 있다. 석가여래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크고 육계는 없으며,

 얼굴은 방형(方形)에 가깝다. 목부분 아래에 삼도(三道)가 좁게 표현되어 있고 통견납의(通肩衲衣)의

간략한 의습에 가슴 밑 군의상단(裙衣上端)이 직선적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서 손 등을 위로 하여 중지를 무릎에 접하고 있고 왼손은 손 등을

 밑으로 하여 제2지(第二指)와 무지(拇指)를 맞대고 있다.

양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 삼존상은 목조불로서는 희귀한 우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운사 종무소 및 승가대학

 

↗전통다원

 

♡선운사 동백꽃[김윤자 ]

사랑의 불밭이구나
수백년을 기다린 꽃의 화신이
오늘 밤 정녕 님을 만나겠구나
선운산 고봉으로 해는 넘어가도
삼천 그루 동백 꽃등불에
길이 밝으니
선운사 초입에서 대웅전 뒤켠
네가 선 산허리까지
먼 길이어도
님은 넘어지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 오시겠구나
해풍을 만나야
그리움 하나 피워 올리고
겨울강을 건너야
사랑의 심지 하나 돋우는 저 뽀얀 발목
누가 네 앞에서 봄을 짧다 하겠는가
이 밤, 바람도 잠들고
산도 눈감고
세월의 문이 닫히겠구나

 

 ♡선운사에 가다[구석기]

 

가슴 아프게 핀
선운사 동백꽃 보러갔더니
꽃잎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리고
이슬비 무리 지어 내려앉는 법당에
백일홍 저만치 홀로 피었다
전날부터 끊임없이 내린
빗줄기에 맞아
땅바닥에 떨어져 누워도
네게로 향한 마음 아직 그대로인데
꽃잎은 오랫동안 참아온 마음을 버리고
왜 그렇게 쉽게 뒤돌아 가는 것일까
계단을 딛고 올라서고도 모자라
제단 위에 높이 세운
선운사 대웅전 한가운데
가부좌 틀고 앉아
미소지으며
문밖의 세상 버리라고 말하는
누구의 마음도 일편단심 붉구나
안개 덮인 내 품안으로
슬며시 선운사 한 조각
붉은 꽃잎
들어와 앉아 있는데
어디서 오느냐
어디로 가느냐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나는
너의 무엇을 찾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냐

 

선운사[禪雲寺],

고창 도솔산[兜率山] 선운사 미륵성지에서 구름에 누워 지혜를 담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선운사, 전통사찰관광정보홈페이지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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