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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華嚴寺],천년의 미소가 살아 숨쉬는 지리산 화엄사를 걷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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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華嚴寺],천년의 미소가 살아 숨쉬는 지리산 화엄사를 걷다

바다늑대FORCE 2015. 1. 11. 19:19

 

 

화엄사[華嚴寺],

천년의 미소가 살아 숨쉬는 지리산 화엄사를 걷다

 

♣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에 있는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 061-783-7600

♣ 찾아가는길

 남해고속도로(순천방향)→하동IC → 하동19번국도

 냉전삼거리에서 우회전 → 18번국도 →마광삼거리직진→화엄사

♣사찰기행일 : 2014.12.30(화) 날씨-맑음

 

♣화엄사 [華嚴寺] 개요: 

사적 제505호.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544년(진흥왕 5) 인도승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시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구례속지 求禮續誌〉에 의하면 543년 연기조사가 세운 절로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머물게 했으며

 642년(선덕여왕 11)에 자장율사가 건물을 중수했다고 하는데,

신라승이 백제지역에 있는 절을 중건했다는 사실은 의심스럽다.

한편 〈봉성지 鳳城誌〉에는 670년(문무왕 10) 의상법사가 왕명을 받아 3층의 장륙전(丈六殿)을 건립하고

사방 벽에 〈화엄경〉을 새긴 석경(石經)으로 장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원본사십화엄경 貞元本四十華嚴經〉은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장륙전이 건립될 당시에 석경이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화엄사의 창건이나 창건주,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발문에 의하면

 754년(경덕왕 13) 황룡사(皇龍寺)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화엄사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절의 창건연대와 창건주가 분명하게 밝혀졌으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서 2자를 따온 것이다.

 그뒤 신라말 이곳에서 출가한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

고려 광종대에는 홍경선사(洪慶禪師)가 당우와 암자를 중축했으며,

문종대에는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사고(寺庫) 2채를 일주문 밖에 건립했다.

 인종대에는 정인왕사(定仁王師)가 중수했으며, 충숙왕대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1424년(세종 6)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이때 장륙전의 벽을 장식했던 석경도 파손되어

 지금은 각황전(覺皇殿)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1630년(인조 8)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중건하기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완공되었다.

 1702년(숙종 28) 벽암선사의 제자였던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고

 다음해에 삼존불과 보살상 4구를 완성하고는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숙종이 각황전이라 사액하고 화엄사를 선교양종대가람이라 했다.

가람배치는 대웅전과 누문을 잇는 중심축과 각황전과 석등을 연결하는 동서축이 서로 직각을 이루고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동서5층석탑이 비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 절은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화엄사상을 펼쳐나간 곳이기도 하다.

현재 경내에는 17세기 이후의 건물만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각황전(국보 제67호)을 비롯하여 대웅전(보물 제299호)·영산전·나한전·원통전·명부전·적조당(寂照堂)·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 4사자3층석탑(국보 제35호),

 동5층석탑(보물 제132호), 서5층석탑(보물 제133호), 석경,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노주(露柱) 등이 있다.

 이밖에도 선조가 벽암선사에게 하사한 교지(敎旨) 1매, 예조사격(禮曹寺格) 1매,

예조홍각대사첩(禮曹弘覺大師帖) 1매, 겸팔도총섭첩(兼八道摠攝帖) 1매,

 예조대선사각성첩(禮曹大禪師覺性帖) 1매, 인조하사 어석(御席) 1건 및 가사(袈裟) 1령, 어작(御爵) 1대,

선조 어필각본(御筆刻本) 1권, 선조하사 서산대사 발우(鉢盂) 1좌 및 향합(香盒) 1건, 각황전중건상량문 1매 등이 있다.

♣화엄사 지도

 

 

♣ 가람배치도

 

 

 

고고사찰기행시작→→→→→→

 

2014년 막바지 12월30일 구례 화엄사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일주문

편액에는 지리산 대화엄사로 되어있다

아마도 가을에 왔으면 단풍이 길따라 아름답게 물들어 있을것이다..계곡 얼음속 물흐르는 소리가 졸졸....!!

우측에 매표소가 있고

성인 입장료3500원

 

↗불이문[不二門]

불이(不二)란 뜻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세속과 부처의 세계가 둘이 아니며,

선악(善惡), 유무(有無), 깨끗함과 더러움, 등등 상대적 개념에 대한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불이사상(不二思想) 속에 담겨진 불교의 진리는 매우 미묘한 법문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다.

 

↗대웅전으로 가는길

 우측에 불교용품점에서 토산물과 불교용품을 판매하고 있

↗종무소

 

↗템플스테이 수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관광객들이 절에 숙박하며 사찰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문화를 사찰에서 체험해 봄으로써 한국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이고,

한국 전통 문화와 불교의 수행 정신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문화 월드컵’으로 치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한 불교조계종에서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을 구성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오랜 전통의 한국 불교와 대중이 소통하는 장을 마련하여

 불교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고도의 정신문화를 공유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시행되었다.

그 결과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와 더불어 템플스테이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내·외국인의 관심이 점차 증대되어 참가자가 해마다 크게 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처음의 자연 환경과 불교문화가 어우러진 사찰에서 수행자, 즉 승려의 일상을 체험하며

 마음의 휴식을 찾고 전통 문화를 체험하는 단순한 프로그램에서 점차 사찰의 특성을 살려

 독특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추세이다.

대개 예불 및 발우 공양, 산책, 참선, 스님과의 대화 등이 각 사찰에서 공통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벽암국일도대선사비 & 화엄사 성보박물관

벽암국일도대선사비(碧巖國一都大禪師碑)

- 화엄사 경내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을 가지 전 성보박물관 입구에 있다.

특이한 귀면이 조각된 이수와 비신, 귀부를 완전하게 갖춘 석비다.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

그를 도와주는 신으로 사천왕을 두어서 역할 분담하였다. 

 그 다음해 선종대가람으로 승격되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각성이 다시 지은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화엄사 보제루는 법요식 때 승려나 불교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강당 건물이다.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대웅전 앞 한단 낮은 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 쪽 창문은 7칸 모두 큰 두짝의 빗살문을 달고 그 반대쪽

5칸은 널판지문을 달았으며 좌우 양칸은 문을 생략하였다. 

화엄사는 보제루에도 특별함이 숨어 있다.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용인 2층 누각 건물로 대개는 그 밑을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서게 되지만

화엄사의 보제루는 1층의 기둥 높이를 낮게 만들어 옆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각황전, 대웅전, 대석단 등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중심 영역의 경관을 강조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장식을 배제하고 단청도 하지 않아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1636년 건립한 것이다.

 

↗약수터

용머리에서 나오는 시원한 지리산 약수한잔 하고서...모든 번뇌를 물 한모금으로 떨쳐버리고........!!

 

화엄사 금강문(金剛門)

 금강은 쇠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라는 뜻이며 그 무엇도 이를 파괴할 수 없으나

 금강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으므로 금강의 마음을 가지면 모든 번뇌도 없어진다.

♣금강문은

 사찰에 따라 천왕문을 세우기도 하며, 어느 경우에는 금강문과 천왕문이 함께 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금강문이 천왕문 밖에 세워진다.

금강문은 보통 앞면 3칸, 옆면 1칸의 직4각형 평면을 이룬 단층집으로 건축된다.

중앙문은 앞뒤 모두 아무런 창호를 달지 않고 개방하며, 양 옆칸은 모두 벽체를 친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으로 꾸미고, 공포는 익공식이나 다포식을 사용했다.

안에는 중앙문만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게 하고, 양 옆칸에는 중앙 쪽으로 홍살을 세워 격리시키고,

그 안에 금강역사상을 세웠다.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사찰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가 제거되어 가람의 내부는 청정도량이 된다는 것이다.

↗우측에 나라연금강

나라연은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 백만 배나 된다.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 아금강역사 ) 

♣문수동자 : 문수보살이 동자로 나타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보처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자를 타고 있다. 

♣보현동자 : 보현보살이 동자로 나타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우보처로 진리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의 실천을 나타내기 위하여 코끼리를 타고 있다. 

인조 10년(1632년) 벽암 각성선사께서 중건했으며 1998년에 종열스님이 단청불사를 했다.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은 약 30도쯤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좌측에 밀적금강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이 있으므로

 밀적금강이라고도 한다. (훔금강역사)

 

화엄사 천왕문(華嚴寺 天王門)

 고대 인도에서는 제석천(帝釋天)이 만물을 창조(創造)한 신(神)이라 하여 존경하였다.

제석천왕은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복(福)을 주고, 악한 짓을 하면 벌(罰)을 주는 등 인간을 다스리고 감독하기 때문에,

 

이수 전면과 후면에 귀면이 조각되어 그 주위로 인동당초문이 시문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이수 밑으로 이수 받침대를 넓게 돌출시켜 이수 상단을 안정감있게 처리한 점이다.

귀갑문은 육각형이며 귀갑은 밑의 몸체와 완전 구분시켜 놓은 것이 이채롭다.

 전액에 비 건립 연대를 기록해 놓았는데 현종 4년(1663년)이다.

↗운고각 & 법고루

 법고루는 보제루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법고루라는 편액이 반대편에서 보면 운고각(雲鼓閣)이라는 편액이 있는데,

운고루가 정확한 표현일 터이다 .법고루 안에는 불전사물이 있다.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올 수호하는 네 명의 대천왕이다.

원시경전인 장아함경에는, "사천왕은 그 방위에 따라 각기 자리를 담당하고 정법을 수호하고 마귀의 습격을 방지한다."  

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는 천왕이다. 

증장천왕은 칼(보검)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더욱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 해주는 천왕이다.  

광목천왕은 용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서방(서구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넓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해주는 천왕이다. 

다문천왕은 보탑을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북방(북구로주)을 수호하고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왕이다.

조선 인조10년(1632) 벽암각성대사께서 중건했으며 1997년 종열스님이 사천왕상을 다른 모습으로 개체하였다.

화엄사보제루(華嚴寺普濟樓, 시도유형문화재 제 49호)

 지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화엄사는 통일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때 승려 연기가 처음 지은 절이다.

그 후 신라말 도선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으나, 임진왜란(1592) 때 불타 없어졌다.

조선 인조 8년(1630)에 승려 각성이 다시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인 인조 14년(1636)에 대웅전 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완성하였고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이 있으므로 밀적금강이라고도 한다.

 

화엄사 동오층석탑(華嚴寺東五層石塔, 보물 제 132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 있다.

그 중에 동쪽에 서있는 것이 이 탑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반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 없이 단정하다.

 탑은 1층 기단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층인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 층 몸돌의 너비가 줄어드는 정도는 큰 것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 늘씬해 보인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몸돌을 따라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가 큰 편이며

그 중 1층과 2층의 차이가 한층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층 기단인데 비해 1층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신라말기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께서 조성한 것으로 신라, 백제의 양식이 혼합된 탑이다.

부처님의 모든 법이 거짓과 꾸밈이 없고 순수하여

진실 그대로 참된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곧 부처님 도량은 참된 장소요. 세계요. 법계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탑이다.

 증명탑, 다보탑, 다보분좌탑이라고도 한다. 

오층은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 보살계, 불계를 표현하고, 장식과 꾸밈이 없음은 청정한 마음을 표현하며

단층기단은 일승법을 뜻하니 이 탑의 사상은 부처님과 보살님과 사람들의 성품은 둥글고

 원만하여 차별이 없고 꾸밈이 없으며 평등한 마음의 세계가 곧 화엄세계요

 연화장세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탑이다.  

1999년 10월에 보수중 이 탑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8과를 비롯, 330여점의 성보 유물이 나왔다.

 

↗범종각

 

 

화엄사 대웅전(華嚴寺大雄殿, 보물 제 299호)

 화엄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이며 크기는 전면19.5m, 측면12m로서 정면 5칸 ,측면3칸이며

 부처님 머리위에 못과 풀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우아하고 형태가 일품인 천개(天蓋)가 조각 되어있다.  

법당에는 깨달음의 세계(진리)를 몸으로 삼기 때문에 모양과 빛깔이 따로 없고

 오고 가는 곳도 없이 진리 그대로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과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복과 덕이 가득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원만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 盧舍那佛)과 모든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로

 목불(木佛)인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은 인조8년(1630)에 벽암(碧巖)스님과 문도에 의하여 중건 되었으며

삼존불상은 인조 10년(1632) 안치하고

 영조 33년(1757) 주지 회심(會心)대사때 처관(處寬),학찬(學贊),섭심(攝心),탁계(卓戒)스님께서

 중수 및 삼존불 개금과 함께 후불탱화 삼폭을 완성 했으며, 정조 22년(1798) 화엄사 대웅전 중수를 했다.

 1972년 도광스님이 삼존불 개금불사, 1989년 4월에 종원스님이 탱화보수

 1997년에 종열스님이 개금불사, 2000년에는 종걸스님이 법당마루 보수를 했으며

종삼스님이 2013년 2월에 양쪽 옆문을 교체하였으며,

영관스님이 2014년 1월 28일에 대웅전 신중단 옆으로 불등단(佛燈壇)을 설치했다.

대웅전 편액은 인조 14년(1636년)에 의창군(義昌君)이 쓴 글씨이다.

 

목조비로자나 삼신불좌상(木造毘盧遮那 三身佛坐像, 보물 제 1548호)

 대웅전 불단 중앙에 모신 불상으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며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으로

신라시대의 전통적인 비로자나 수인과 달리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모양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불계(佛界),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표하며 이 결인으로서 중생과 부처님이 둘이 아니며,

 번뇌와 깨달음이 일체인 뜻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불 왼쪽에 모신 불상인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두 손을 들어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는데

보관(寶冠)을 머리에 쓴 보살상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로자나불 오른쪽에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두고

 왼손은 엄지를 중지에 대고 왼쪽 무릎위에 올려놓고 있는 이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서

 악마를 항복시키는 인상(印相)이며 부처님깨서 성도한 모습이라고 한다.  

인조 10년(1632년)에 청헌(淸憲), 인균(印均)이 조성을 했으며 비로자나불상 크기는 2.7m, 노사나불상 크기는 2.5m, 석가모니불상 크기는 2.4m이다.

 

↗원통전 과 영전

↗원통전

화엄사 원통전(華嚴寺 圓通殿)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님, 칠성, 독성, 산신이 모셔져 있으며

 또 법당에 부휴집(浮休集), 염불직지(念佛直指)등 많은 귀중한 목판본이 보관 되어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은 크고 넓고 자비로운 덕이 있으신 분으로 가장 널리 우러름을 받으시며

극락세계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곳에 나타나 형편을 살피시고 모든 이들을 괴로움과 어려움에서 구해 주시는 인자하신 분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도 한다.

칠성(七星)님은 사람들의 좋은 일, 나쁜 일, 복덕, 수명장수를 도와준다고 한다. 

독성(獨聖)님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반존자로 천태산에서 혼자 도를 닦아 연각(緣覺)을 이룬 분이다.  

산신(山神)은 산신령, 산왕대신으로 산을 맡아 수호 하고 있는 분이다. 

화엄사의 원통전은 관세음보살 뿐만 아니라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을 함께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삼성각을 겸하고 있는 전각인 셈이다. 

조선 숙종29년(1703) 계파선사께서 중건했고, 1978년에 명선스님이 해체중수 했으며,

1997년에 종열스님이 관세음보살상을 개금 하였으며, 2006년 10월 종삼스님 기와 번와를 하였다. 

편액은 정조23년(1799)에 조종현에 의해 쓰어진 것이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華嚴寺 覺皇殿 前 石燈, 국보 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신라 문무왕17년(677)에 의상조사께서 조성한 것으로 이 탑의 높이는 6.36m이며 우리나라 최대의 석등이다.  

꽃잎 형태는 우담바라화로 이 꽃은 3천년만에 한 번 핀다고 하여 부처님 오심이 지극히 드문 일이라 비유한다 

꽃의 8잎은 8정도[정견(正見),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명(正命),정업(正業)

정어(正語),정사유(正思惟),정정(正定)]이고, 4개의 화창(火窓)은 사성제(苦集滅道)와 부처님의 광명이며,

 북의 모습은 진리의 소리이니, 즉 팔정도로 수행하여 사성제의 진리의 이치를 밝히고

 광명을 놓으시며 진리의 소리를 중생들에게 들려주시어

마음의 등불[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세계를 밝혀 주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석등이다.

 

 

화엄사각황전 (華嚴寺覺皇殿, 국보 제 67호)

 본래 이 자리에는 2층 4면 7칸의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을 의상조사께서 조성 하였으나 임진란 때 소실되었다.  

계파 성능선사(桂波 性能禪師)께서 장육전 중건 불사의 대발원의 백일기도로 문수보살의 선몽으로 공양주 스님이

 화주승으로 선택되고, 시주자는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로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소(沼)에 몸을 던지고

 공주로 환생했는데 한쪽 손을 쥔채로 태어났으며 5년후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각황전은 숙종25년 ~ 28년(1699 ~1703)에 중건 되었으며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 수법이 웅장하니 어느 것도 비교할 바가 못 되는 법당이다.  

법당 안에는 3불 4보살인 관세음보살,아미타불,보현보살,석가모니불,문수보살,다보여래,지적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부처님을 깨달은 왕(성인 중에 성인)이라는 뜻과 숙종 임금에게 불교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한다.

 편액은 1703년에 형조참판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영조 45년(1769) 자운(慈雲), 처관(處寬)선사가 중수, 헌종13년(1847년) 의헌(義憲), 윤행(允幸),

 도실(道實)스님이 중수, 1927년 8월 박 사시화(朴 四時華),

김 청정화(金 淸淨華) 등이 시주로 각황전 보살상(관세음, 보현, 문수, 지적)을 개금 하였다.  

1936년 정만우스님이 보수, 1973년에 불보살 개금불사를 도광스님이 하셨고,

1997년에 불단 해체보수, 불보살개금불사, 법당마루 불사를 종열스님이 했으며,

1999년에 종걸스님이 탑 모양 인등설치, 2006년에 각황전 법당 뒤에 영가 영구 위패단 및 아미타불 입상을

 종삼스님이 조성했으며, 2012년 10월 5일에 법당 뒤에 방화된 문짝을 2013년 2월에 교체 하였다.  

영관 주지스님이 2014년 4월 9일 종걸 주지 스님이 설치한 각황전 탑형태 불등단을 철거하고

 닺집 형태 불등단(佛燈壇)을 설치했다.

 

화엄사 원통전전 사자탑 : 사사자 감로탑(보물 제 300호)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널리 알리던 절로,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사상의 구현을 이루어 왔다.

신라 후기에는 승려 도선(道詵)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문종 때에는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어 일주문 밖에 큰 창고를 짓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7년 만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으며,

 이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 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4사자 감로탑은 신라 문무왕17년(677)에 조성한 것이며

4사자의 표정은 인간의 감정인 희로애락(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사람들의 수많은 번뇌를 뜻하며, 사자의 표현은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獅子吼) 또는 감로법(甘露法),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석탑은 사람들의 수많은 번뇌를 부처님의 청정한 지혜를 얻게 하여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나 연화장세계로 이끌어 주는 감미로운 탑이라 할 수 있다.  

2007년 2월에 주지 종삼스님이 이끼제거를 하여 탑이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존공사를 하였고

 다시금 2012년 2월에 4사자 감로탑 해체 보수 및 보존처리공사를 했다.

 

화엄사 홍매화(紅梅花) 와 나한전

♣홍매화

 장륙전이 있던 자리에 조선 숙종 때 각황전을 주건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파선사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장륙화(丈六花)라고 하며,

다른 홍매화보다 꽃이 검붉어 흑매화(黑梅花)라 불리기도 한다.

 

화엄사 나한전(華嚴寺 羅漢殿)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16분의 아라한(阿羅漢)을 모신 곳이며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번뇌의 적을 죽여 영원히 깨달음에 들어가서 어리석은 세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베풀어 바르게 이끌어 주시니

사람들에게 존경을 얻어 공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훌륭한 분이다.  

인조10년(1632) 벽암선사께서 중건하였는데 정조조(正祖朝)에 화재로 소실된 후

정조19년(1795)에 담인(曇仁)선사가 중건했고,

1984년 도광스님이 하얀 나한상을 개채(改彩)를 했으며, 1997년 종열스님이 석가모니불상 개금,

주지 종걸스님 때 1998년 8월 8일 나한전 금강역사상 한분과 녹사 2분 도난당했고

12월에 복원하여 모셨으며, 2005년에 명섭스님이 새로 후불탱화와 십육나한탱화를 조성과 주련을 달았다.

 

화엄사서오층석탑 과 각황전

화엄사서오층석탑(華嚴寺西五層石塔, 보물 제 133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있는 쌍탑 가운데 서편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동탑이 아무런 조각이 없는 반면

 서탑에는 조각과 장식이 가득하다. 

형태는 기단(基壇)은 2층이고, 그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워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각 층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1층 몸돌 4면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 배치하였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머리장식에는 2층의 단을 둔 받침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석탑의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8부중·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이나,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신라말기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께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조성한 것으로

 화엄사의 대가람의 배가 백두산의 혈맥의 웅대한 힘과 섬진강의 태극의 힘에 출렁되니

부처님 사리를 두 탑에 봉안하여 요동함을 막음과 동시에 가람의 원만한 기운이 감돌도록 하였다.  

기단 아래 조각형태는 12지신으로 개개인의 사람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수호신이고

위 부분의 조각형태는 팔금강(八金剛)과 사천왕(四天王)으로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제자를 지키고 보호하는 신이며

 이 탑을 일명 옹호탑(擁護塔)이라고도 부른다.

2층 기단은 상대의 차별을 없애고 절대 차별이 없는 이치인 불이법(不二法)을 표현한 것이다.  

1995년 8월에 보수중 이 탑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22과를 비롯, 16종 72점의 성보 유물이 나왔다.

 

 ↗적묵당 과 강원 

 

↗만월당

만월당 처마아래 곶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 35호)

 공사중이며 출입금지구역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 35호)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 (544)에 연기존자(鷰起尊者)가 세운 절로, .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14년(645)에 자장율사께서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사리탑과 공양탑을 세웠다.  

연기존자께서 오른 어깨에 옷을 벗어 메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붙이고 머리에 석등을 이고 왼 손에는

 찻잔과 구슬(여의주:불성)을 받쳐 들고 어머니에겐 진리의 공양을 부처님에겐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은 효사상의 공양탑(供養塔)이며,

앞쪽은 12선녀(시간,공간), 희노애락(번뇌)의 표정을 한 4사자(지혜)와

 어머니(비구니:수행자)는 몽오리 연꽃(불성)을 들고,

3층(3계)의 탑의 모습인 사리탑은 즉 수행자는 불성(佛性)을 밝히기 위해서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어 삼계(三界)의 대도사인 부처님 되기를 원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

사상의 사리탑(舍利塔)으로서 4사자3층사리석탑을 일명 효대(孝臺)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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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창건 설화 -

한반도와 만주 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된 뒤 제각기 국력을 기르고 영토를 확장하여

중국을 비롯한 멀리 천축에서까지 문화와 문명을 수입하여 바야흐로 태평성국의 기틀을 다진 삼국시대의 중엽,

소백대간(小白大幹)의 남단에 우뚝 솟은 두류산(頭流山, 현 智異山)에 봄이 무르익어가는 삼월 중순 무렵이었다.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에 한창 바삐 일손을 놀리고, 동리에서 꼬마들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소꿉놀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꼬마들은 멀리 두류산을 향하여 합장하고 그들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조석으로 염불을 외던 대로 소리를 맞추어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선재할아버지는 밭 언덕에 쉬면서

 꼬마들의 놀이에 눈을 던지며 미소를 지으면서 두류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박노인은 어제도 그제도 산 중턱 골짜기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한 그는

지금 또 안개마냥 골짜기에 번지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연히 보니 안개가 아니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박노인은 필시 산중에 무엇이 있겠구나 하면서

마을사람 십여 명을 대동하고 골짜기에 이르렀다.  

계곡 겉에 움막을 발견하고 다가가니 움막 안에서는 낭랑한 목소리와 장중한 음성이 조화를 이룬 독경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은 발을 멈추고 귀를 모았다. 사실 마을 사람들로서는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다른 나라 사람이 읽고 있는

독경 소리를 알아들을 줄도 몰랐으며, 독경이 끝나고 잠시 후 한 사문이 나왔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친 사문의 모습은 이들의 마을 십여 리 떨어진

홍련사(紅蓮寺)라는 절의 스님과 어딘가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얼굴 생김새와 피부가 우리 민족과는

 전혀 달랐으며 가사를 둘둘 말아서 몸을 감고 있는 점이었다.

박노인은 사문과 합장한 후 대화를 나눴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사문은 움막 안에서 벼루, 붓, 종이를 갖고 나와 글로서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한문은 천축국에 유학 온 양나라 스님에게 배웠고

 백제국에는 연(?)이라는 짐승을 타고 비구니이신 어머니와 함께 날아서 왔다는 말에

마을사람들은 놀라는 기색을 하였다.  

“빈도는 바닷가의 절에 살면서 바다 속에 사는 연이라는 짐승과 친해졌지요.

이 연은 능히 공중을 날으고 바다 속으로도 헤엄쳐 가며 바다에 떠서 배처럼 다니기도 합니다.

빈도는 이 연을 교화하여 오계(五戒)를 주고 제자를 삼아 이곳에 까지 왔고

방금 읽던 경전은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이렇게 필담을 나눈 후 사문은 저녁공양 거리를 준비하기 위하여 피리 비슷한 악기를 꺼내어 입에 대고

길게 세 번 불어대니 웅장한 소리와 함께 천년 묵은 거북만한 연이 공중에서 날아오더니

 사문 곁에 사뿐히 내려 앉았는데 그 형상이 머리는 꼭 용 같고 몸은 거북이며,

몸 길이가 열자는 넘어 보이고 두 날개를 가진 짐승이었다.

박노인 일행은 숨을 죽이고 이 신기한 동물을 보느라고

노비구니께서 그들의 등 뒤에 나와 서 있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연의 등에 사문이 앉자 노비구니는 바른손을 들어 번쩍 들어 떠나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고

사문은 노비구니에게 합장하고 다음에 연의 목을 쓰다듬어 주고는 범어로 뭐라고 이르니

 연은 곧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박노인 일행들은 감탄을 말하며 사문이 사라져간 남쪽을 향하여 합장을 하였다

. 연을 타고 다니시니 연존자라 할까. 비연존자(飛鳶尊者)라 할까.

의논한 끝에 연기존자(鳶起尊者, 緣起尊者)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후 “우리 고을에 경사가 난거야.

부처님께서 태어난 나라에서 오신 스님께서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화엄경을 백제땅에 가져왔으니,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충만한 이곳이 바로 최고의 불연국토(佛緣國土)야” 

몇 달이 지나고 연기존자도 우리말에 상당히 익숙해져서 이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향상되었고

 박노인의 손자인 선재를 시자로 두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존자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 하나 예불할 장소가 마땅치 못했다.

움막에서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없다하여 박노인의 마을 사람들은 법당을 건립하고자 존자님께 간청을 하여

불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이룩된 건물이 요사(寮舍)겸 설법전인 해회당(海會堂)이고,

또 한해가 지난 다음해 가을에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인 법당이 낙성되었다.

바로 이해가 백제성왕22년 갑자세(서기544년)였다.

박노인은 존자에게 연기존자님이라고 부르고 있아오니 연기사(鳶起寺)라 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존자는 한참동안 침묵하여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며  

“빈도는 본국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수지 독송해 왔고 현재도 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수행을 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 창해를 건너 이 나라에 온 것도 화엄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니

 화엄사(華嚴寺)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마을사람들은 

“존자님께서 命名(명명)한 가람 이름에 이의가 없이 대찬성입니다.

 화엄사, 화엄경, 화엄법문, 연화장세계라 이 나라가 연화장 불국토세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존자는 또 한마디 하는데  

“이 산은 멀리 백두산의 정기가 줄곳 흘러 내려와서 이뤄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일컫는다니 좋은 이름이외다.” 

“헌데 빈도가 이 산에 처음 닿았을 적에 삼매에 들어보니

 문수대성께서 일만보살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하였으니

이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 임에 틀림이 없소.

그리니 만큼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택하여

지리산(智利山)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리하여 지리산 화엄사(智利山 華嚴寺)가 되었다.  

연기존자는 박노인 외 마을사람들에게 특별히 차공양을 했다.

 처음 먹어보는 차맛이었다. 혀끝과 입안에 젖어드는 향 내음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그윽함이 깃들어 있었다.

 “존자님, 이 차는 무슨 차입니까 ?” 

이 차는 작설차(雀舌茶)라고 하는데 빈도가 여기에 올 때 수십 그루의 차나무와 씨앗을 갖고와

 이산 금방에 심어 났지요. 이 차는 불보살님께 올리는 귀중한 차이지요.

이 차를 올린 후에 이렇게 게송하지요. 

“깨끗한 맑은 물 감로수로 변하여 삼보님께 받잡노니 굽어 살펴주옵소서” 하고 염불, 독경을 한 후

내려서 빈도가 마시지요. 이 찻잔 안에 화엄법계의 무진법문이 들어있고 자비광명이 충만히 들어 있지요.

 여러분 이 차를 드시지요. 이 마을사람들은 찻잔을 들어 불단에 올려놓고 게송을 읊고는 소원을 빈 다음

찻잔을 불단에서 내린 후 제자리에 각기 앉아서 흡족하게 차를 마셨다.  

연기존자는 “빈도가 천축에서 제조하여 가지고 온 것이 조금 있어서 여러분께 차공양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빈도의 소원대로 화엄법문을 문수보살 도량에서 선양할 수 있도록

화엄사를 창건한 여러분의 불사동참 공덕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고맙기 때문이오.

여러분의 마음이 곧 불보살님의 마음이 아니겠소. 그래서 여러분께 차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그윽한 차 향기는 화엄사 골짜기를 맴돌고 연화장세계에 가득가득 퍼졌다.

연기존자는 화엄법문을 들려주는 것과 차공양으로 마을사람들의 노고에 보답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존자의 위덕과 효심과 무궁무진한 법문에 감화를 입어 어느덧 신심이 지극한 신도로 변해 갔다. 

그리하여 화엄사에 도인이 계신다는 소문은 날로 펴져서 널리 알려졌으며

연기존자는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삼아 문수대성의 명호를 날마다 십만 송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고

그를 찾는 청신사 청신녀에게 문수보살의 위덕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두류산으로만 불러오던 것을 방방곡곡에서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으로 여기고

 지리산이라 부르는 이가 많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수보살은 과거 7불의 스승이라 하거니와 지혜가 가장 뛰어난 분으로서

일체보살 중에 상수(上首)의 위치에 있는 보살이시며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므로

사람들은 때로는 지리산을 청량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연기존자는 이따금씩 연을 타고 지리산의 여러 곳을 두루 살피기도 하고 더러는 며칠씩 묶고 오는 일도 있었다.

존자는 이산의 주봉을 반야봉이라 이름 하였으니 반야(般若)란 지혜요,

문수를 일컬음이다. 이 주위가 팔백 리나 되는 웅장한 산이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이라면

이 산의 주봉을 반야봉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면 산 그대로가 바로 문수의 몸이 아니랴?

수천 척 높이의 봉우리가 수백도 더 되는 우뚝한 산 전체가 그대로 문수대성의 진신(眞身)이요 본면목인 것이다.

 존자는 반야봉에 조그만 토굴을 하나 짓고 이름하여 묘향대(妙香臺)라 하였는데 문수를 한역을 하면 묘수(妙首),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祥) 등이 된다. 다시 말하면 문수의 체(體)는 바로 묘유(妙有)라는 것으로

 향상 변함이 없는 자성(自性)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이 묘유를 묘향(妙香)이라 일컬은 것이다.

 

 

화엄사 창건 이야기 -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義湘)스님은 유학길을 포기한 원효(元曉)스님에게

자기가 화엄학에 통달함을 자랑하고 싶어서 화엄경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더니

 원효스님은 막힘없이 답변함에 의상스님은 놀라고 말았다. 

“화엄학(華嚴學)은 해동(海東)에서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원효스님은 어떻게 화엄학에 대하여 통달을 했을까?” 하고 생각하며  

“스님 소승이 당나라로 유학하여 화엄학을 전수받고 인가(認可)를 받은 사람은 저 뿐이고

 해동의 화엄학 시조(始祖)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스님은 화엄학에 다하여 달통하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132여년 전 백제국 구차례(求次禮: 현재 구례)라는 곳 두류산(지리산)에서 범승(梵僧)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경을 설했다고 합니다. 두류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설법처(常住說法處)라해서 지리산이요,

화엄경을 설했다고하여 화엄사라고 합니다. 화엄사는 백두산의 혈맥과

 섬진강의 태극이 합류하여 무한한 힘이 솟는 곳이지요. 

고구려는 백두산의 힘. 백제는 백두산의 혈맥으로 강대한 힘을 얻었고

 신라국은 혈맥이 없어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요.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갖고 화랑들은 지리산 세속평정에서 무예를 닦으며

그 곳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백제 무왕 때 우리가 그 곳을 차지했지요.

화랑도에게 무한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용맹스러움이 서라벌까지 전해지고,

이 소승도 화랑도 출신이라 화랑도에게 삼국통일의 염원을 심어주기 위하여 화엄사에 가 보았지요.

그 곳이 중국적인 화엄사상이 아니라 불타의 나라 천축에서 온 화엄의 도량인 것을 알고 감회가 깊었지요.  

이국땅 백제국에서 화엄의 꽃이 피워 있을 줄이야. 등잔 밑이 어둡구나.

의상스님은 지척에 천축적 화엄사상을 두고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서 중국적 화엄사상을 배우고 있었다니 말입니다.” 

“소승은 화엄사에서 화엄경의 이치를 통달하고 연기조사,

자장법사께서 거주(居住)하시던 해회당(海會堂)에서 화랑도에게 화엄사상을 설하며,

천차만별의 강물이 바다로 모이면 이름과 차별이 없어지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 하듯 삼국이 어디에 있는가.

한민족이 아닌가. 이렇듯 화암사상은 화랑도에게 원융무애한 힘을 줌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있지요.” 

의상스님은 놀라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칭 화엄학의 시조요.

부석사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적인 화엄사상을 갖고 근본도량을 삼을 수 없다하여 문무왕 17년(677년)에 지리산화엄사에 오셨다.  

“이곳이 바로 범승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의 꽃을 피었던 곳이니 부처님의 성지에 온 느낌이구나.

여기야말로 해동의 연화장세계로구나. 삼국인이 한 민족임을 실현하는 정신적 통일을 이루게 하며,

또 화엄사가 해동의 근본도량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화엄석경의 거대한 법당을 세움으로써

 중생계를 연화장세계로 꽃피우게 위하여, 부처님의 화엄힘을 빌어 백두산의 혈맥 아래에

 장육전(丈六殿) 법당을 건립하여야겠구나.”  

장육이란 부처님의 몸(16자)을 일컬으며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한다.

2층4면7칸의 사방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黃金丈六佛像)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 화엄경은 팔십화엄(八十華嚴)으로 10조9만5천48자로 되어 있으며 옥돌에 새겨진 화엄경은

 부처님의 화엄사상을 꽃피웠고, 지금도 그 석경(石經) 조각들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연화장세계의 화려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의상조사께서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어 화엄사상 선양에 전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화엄십찰은 지리산화엄사(智利山華嚴寺),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원주비마라사(原州毘麻羅寺),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비슬산옥천사(毘瑟山玉泉寺),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 팔공산미리사(八公山美理寺),

 계룡산갑사(鷄龍山岬寺), 웅주 가야협보원사(熊州 伽倻峽普願寺) 삼각산청담사(三角山淸潭寺) 등이다.  

인도(印度)적 화엄사상은 연기존자께서 씨를 뿌려 백제 승려와 백제국에 화엄의 꽃을 피웠고,

또 다시 신라 자장법사에서 원효성사로 이어 의상조사로부터 화엄의 종풍(宗風)이 해동에 가득하여

연화장세계를 이루었다.

 

화엄사[華嚴寺],

천년의 미소가 살아 숨쉬는 지리산 화엄사를 걷다

※인용글 : 자료 인터넷사전 및 화엄사, 전통사찰관광정보홈페이지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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