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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전나무 숲길따라 내소사 전설속을 걷다 본문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
전나무 숲길따라 내소사 전설속을 걷다
♣ 부안 내소사[來蘇寺]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243
변산반도 남단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 063-583-7281
♣ 찾아가는길
남해고속도로(순천방향)→서해안고속도로 → 줄포IC →
보안사거리(영전검문소)에서 좌회전 → 곰소 → 내소사주차장
♣사찰기행일 : 2014.12.28(일) 날씨-흐림
♣내소사 [來蘇寺]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3년(무왕 34)혜구(惠丘)가 창건하여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민(靑旻)이 대웅보전을 지어 중건하였고,
1604년(인조 18)청영(淸映)이 설선당과 요사를 지었다.
1902년관해(觀海)가 수축한 뒤 1983년 일주문을 세우고 198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으며,
1986년 천왕문을 짓고 설선당과 요사를 보수하였다.
1987년 봉래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88년 요사인 진화사(眞華舍)를 건립하였다.
1995년 수각(水閣)과 종각을 짓고 범종을 조성하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은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고 전하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현존하는 당우 및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하여
보물 제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제278호인 법화경절본사경(法華經折本寫經),
보물 제1268호로 지정된 괘불 등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요사채,
설선당(說禪堂)·보종각(寶鐘閣)·봉래루(蓬萊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3년(인조 1)에 완공되었는데 그 의장(意匠)과 기법이 매우 독창적인 조선 중기의 대표작이다.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법당 내부의 벽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상 등의 그림도 일품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건물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지었다 하고,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그때의 일화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동종은 1222년(고종 9)변산 청림사(靑林寺)에서 만든 종인데, 1850년 땅속에서 발굴된 뒤 이 절로 옮겨졌다.
그리고 법화경절본사경은 조선 초기에 이씨 부인이 망부(亡夫)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한 글자를 쓰고 한 번 절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필사한 것이다.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인 설선당은 인조 때 승려의 수학 장소로 건축되었고,
봉래루는 1414년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하였으며, 현재 산문(山門)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속암자로는 입구의 지장암(地藏庵)과 절 후방 1.5㎞ 지점에 청련암(靑蓮庵)이 있다.
절 일원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소사 지도
사찰기행시작→→→→→
변산 관음봉 산행을 마치고
내소사로 향했다
↗내소사 입구 상점들
변산반도국립공원 내소사탐방지원센터에서 내소사 방향엔
각종 음식점들과 기념품 매점이 즐비하다
↗내소사입구 700년 된 할아버지 당산
(내소사 일주문 앞에 있는 당산나무)
'내소사석포리 당산제'가 정월 대보름을 맞아 불교와 민속신앙이 결합되어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서 열린다.
입암마을과 들당산(일명 할머니 당산) 내소사 경내의 느티나무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사찰과 마을이 혼연일치가 되어 전승하고 있다.
내소사 주지스님 진학스님과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2009년부터 내소사 사찰과 민간이
일정부문 원형을 회복하여 ‘내소사석포리 당산제’로 명칭을 정하면서 불교신앙과 민간신앙이
복합적으로 전통을 재정립하고 운영되고 있다.
↗내소사 일주문
절에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문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서 지어진 것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한다.
문 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 설 때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마음을 촉진시키는 데 그 뜻이 있다.
현상 면에서 나타난 것은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하나가 아닌 것 같지만
실상인 본질 면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반야(般若)와 번뇌(煩惱)가 둘이 아니다.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도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 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일주문이 새워진 것이다.
↗전나무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전나무 숲길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내소사 숲길
나무 숲길을 걸으면
발걸움을
빨리 옮겨놓고 싶지 않다
잠시 흐르는 세월을 잊고 걸으면
온몸에 퍼져오는
숲의 향기를 다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전나무 행렬속으로
빠져들다보면
세상 시름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마음에 남아 있던 모든 찌든 것들이
다 사라지고
숲속에 나만이 남아 있네
- 용해원 시 -
↗벚꽃나무길
↗내소사 능가산 사적비
해안당 대종사 행적비
↗연못
대장금 촬영지
↗천왕문
전나무 슾길 끝에 있는 천왕문은
천왕문은 사천왕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서 사찰 경내 출입문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17평의 목조 한와 팔작지붕으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신축하였다.
1986년 편액은 일중 김충현 거사의 글씨이고 주련글귀는 해안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東方 持國天王(동방 지국천왕)
건달바·부단나 등 두 신을 지배하여 東洲를 수호하는 지국천왕은 범어 Dhritarastra의 번역으로
治國天이라고도 하며 須彌山(수미산)4층에 머물고 그 宮殿을 賢上城이라 한다.
지국천왕은 바른 손으로 옆구리를 짚고 왼 손에 칼을 들고 갖가지 天衣로 장식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경전에 따라 도상의 차이가 약간씩 있으므로 우리나라에선 주로 왼손에 비파 등 악기를 들고 있다.
수미산에서 동쪽으로 약 1천 유순을 가면 지국천왕이 거주하는 성(城)이 있는데,
그 성의 이름이 현상성(賢上城)이다.
성주인 지국천왕은 건달바와 비사도 신장을 영도하며,
동쪽의 인간 세계인 승신주(勝身洲)의 사람들을 보호한다.
西方 廣目天王(서방 광목천왕)
용·비바사 등 두 신을 지배하여 西洲를 수호하는 광목천왕은 범어 Virupaksa의 번역으로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떠서 위엄을 나타내어 나쁜 것들을 물리치므로 廣目·惡目·惡眼 이라고도 부르고,
여러 가지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굴복시키므로 雜語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선 주로 바른 손은 허리춤에서 용(龍)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고
왼손은 여의주 같은 구슬을 쥔 채 팔을 들고 있다.
수미산(須彌山)의 서쪽으로 1천 유순을 가면 광목천이 있다.
여기에는 천왕이 사는 주라선견성(周羅善見城)이 있는데, 이 성의 크기는 6천 유순(由旬)이나 된다.
이곳의 광목천왕은 모든 용왕과 부단나 귀신을 거느리고
서쪽 하늘 밑에 위치한 우화주(牛貨洲)의 인간계를 보호한다.
南方 增長天王(남방 증장천왕)
구반다·폐려다 등 두 신을 지배하여 南洲를 수호하는 증장천왕은
범어 Virudhaka의 번역으로 自他의 善根을 증진 한다는 뜻의 이름이다.
왼손은 주먹을 쥐고 허리에 대고 바른 손은 칼을 들고 있다.
수미산(須彌山)에서 남쪽으로 약 1천 유순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에 증장천왕이 거주하는 성이 있는데, 이름을 선견성(善見城)이라 한다.
증장천왕은 남쪽 섬부주(贍部洲)의 인간계를 보호하고 있다.
北方 多聞天王(북방 다문천왕)
야차·나찰 등 두 신을 지배하여 北洲를 수호하는 다문천왕은 범어 Dhanada 또는
Vaisravana의 번역으로 비사문(毘沙門) 이라고도 쓰고, 다른 이름으로 俱吠羅(Kuvera)라고도 한다.
北洲를 수호함은 물론이요,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옹호하면서 설법을 듣는다고 한다.
그래서 다문(多聞)이란 이름을 사용한다.
왼손은 항상 보탑을 들고 있으며, 어른손은 창을 쥐고 있다.
수미산(須彌山) 북쪽으로 1천 유순을 떨어져 있는데, 이 천을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한다.
다문천왕이 거주하는 성은 가외성(可畏城), 천경성(天敬城), 중귀성(衆歸城) 등 세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성에서 다문천은 북의 구로주(瞿盧洲)를 수호한다
↗내소사 경내의 1,000년된 할머니당산
내소사 경내에는 1,000년 된 당산목이 있다.이 나무는 느티나무로서 할머니 당산으로 불린다.
내소사 입구에는 700년 수령의 할아버지 당산이 있다.
내소사의 당산제의 원형은 민간주도에 의해서 전승되어진 것이 아닌,
사찰의 주도하에 오래토록 전승 되어 왔으며,
불교신앙과 민간신앙의 결합에 의한 복합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토속신앙을 받들고 있는 기층민들을 사찰 내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임으로서
불교신앙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포교를 병행하는 형태였다.
원형적인 부분에서 기존의 당산제와는 그 형식과 의식이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제례의식과 굿의 형태는 불교적인 의식을 따랐다.
내소사의 당산제는 음력1월14일,웃뜸 당산제는 음력1월15일 각기 치러졌다 한다.
↗감로수
연꽃모양의 식수터에 거북이 입속에서 물이 나온다
시원하게 한모금 마시고서........!
↗기념품 판매소
당산나무 좌측에 있는 기념품판매소인데
각종다기류 향 그리고 불교용품등이 가득하다..
↗봉래루
내소사 봉래루는 가람의 누각 건물은 주로 법회를 여는 공간이다.
본전 건물에 들어가려면 원래는 이 건물의 마루높이가 낮아 왼쪽으로 우회해서 들어가야 됐었는데,
언젠가부터 마루를 들어 올려 마루 밑으로 진입하도록 접근방식이 바뀌어 있다.
그러니까 ‘봉래루’의 앞 두 글자 ‘봉래’는 이 건물의 이름이고,
뒤에 붙은 ‘루’자는 이 건축물의 형식과 용도를 나타내는 글자가 되겠다
‘루(樓)’자가 붙는 건축물의 용도는 회합과 연회, 강연 등이 열리는 곳이다.
형식은 마루를 지상보다 높게 들어 올려 1층에는 기둥만 있는, 이른바 필로티(Pilotis) 구조 방식으로 구성된다.
↗보존각
내소사 고려동종이 있는 곳
부안 내소사 동종(扶安 來蘇寺 銅鍾)은 고려 시대 동종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높이 103㎝,
입지름 67㎝의 크기이다.
종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고, 어깨부분에는 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종의 어깨 밑에는 사각형의 유곽이 4개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는 연꽃으로 장식했고, 종의 몸통에는 구름 위에 삼존상이 새겨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양쪽에 협시불이 서 있다.
종 정상부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과 큰 용머리를 가진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있다.
고려 고종 9년(1222)에 청림사 종으로 만들었으나, 조선 철종 원년(1850)에 내소사로 옮겼다.
한국 종의 전통을 잘 계승한 종으로, 그 표현이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고려 후기 걸작으로 손꼽힌다.
※신비로운 전설의 '내소사 종'
이 종은 원래 변산반도에 있던 ‘청림사’라는 절의 종이었다.
그런데 청림사가 불에 타 없어져서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선 철종 때.
마침 부안 김씨 집안에서 재실(무덤이나 사당의 옆에 제사 지내려고 지은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이 종을 찾아냈다.
이 고려동종이 내소사에 오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땅속에서 종을 파낸 사람들은 종을 치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려동종은 전혀 울리지 않았다.
“희한한 종이네. 왜 아무 소리를 내지 않지?”
“그 종이 이 근처에 있는 절의 종이었을 거야.
혹시 듣는 귀가 있으면 자기네 절 이름을 듣고 소리를 낼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변산반도에 있는 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종을 쳤다.
그러자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던 종이 “내소사!” 하는 소리에 바로 반응을 보였다.
“와아, 종이 울리네! 이 종은 내소사로 보내야겠다.”
그래서 고려동종은 1853년(철종 4년) 내소사로 옮겨져 내소사 종이 되었다.
↗범종각
↗내소사대웅보전[來蘇寺大雄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291호.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圓柱]을 세웠으며
기둥의 밑부분은 그랭이수법을 썼음이 뚜렷하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外三出目)과 내5출목(內五出目)으로서 기둥 위에는 물론 주간(柱間)에도
공간포(空間包)를 놓은 다포계 양식이다.
주두(柱頭 : 대접받침)는 굽면이 사면(斜面)으로 끊기고 굽받침이 없으며
소첨차(小檐遮)나 대첨차 모두 교두형(翹頭形)으로 조각되었다.
초제공(初諸工)에서 3제공까지의 살미첨차[山彌檐遮]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4제공은 수서[垂舌]로 되어 있다.
내부의 공포(貢包)는 살미첨차가 모두 판형(板形)으로 되어 그 끝에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여 장식하고 있다.
가구(架構)는 대들보 앞면에서는 평주(平柱)에 걸고 뒷면에서는 내고주(內高柱)에 걸었으며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받치게 하였는데 종보부터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또한, 양측면의 평주에서는 충량(衝樑 : 대들보의 직각방향으로 얹힌 짧은 대들보)을 내어 대들보 위에 걸었는데,
보머리에는 용이 목어(木魚)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불단 뒤에는 후불벽(後佛壁)이 있으며, 그 좌우의 벽기둥은 대들보에 고정되어 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불단 위에는 닫집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건물의 정면 3칸은 모두 정교하게 조각한 소슬빗꽃살창호를 달았고, 측면에는 협문(夾門)을 각각 한짝씩 달았으며 나머지는 벽으로 처리하였다.
↗꽃살문
현존하는 솟을연꽃살문중 가장 오래된것이라 한다
↗대웅보전 풍경
내소사를 둘럿싸고 있는 관음봉을 배경으로
풍경을 카메라 렌지에 담아 보았다.
↗지장전
지장보살을 주존으로하여 염라대왕등10왕이 봉안된다
↘지장전 벽화
↗내소사 삼층석탑[來蘇寺三層石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판형(板形)의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2중기단을 세웠다.
낮은 하층 기단은 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하여 새겼는데 4매의 돌을 엮어 구성하였다.
하층 기단의 중석은 2개의 모서리기둥[隅柱]와 1개의 버팀기둥[撑柱]가 새겨져 있다.
하층 기단의 갑석은 2매의 돌을 동서 방향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는데,
낙수면이 급하고 상층 기단을 받치기 위한 2개의 몰딩(moulding : 테두리장식)이 새겨져 있다.
4매의 돌로 조립된 상층기단의 중석은 다소 높은 감을 준다.
1매의 돌로 된 상층 기단의 갑석은 그 하부에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상부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해 2단의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몰딩이 있다.
탑신은 각 층 모두 같은 모습인데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각 층 모두 모서리기둥만을 새기고 탑신의 면석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2층의 탑신부터는 체감이 심하다.
파손이 심하여 원형을 잃고 있는 옥개석은 그 하부에 3단의 층급받침이 마련되어 있고
물끊기가 파여 있으며, 반전이나 우동(隅棟)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탑신 위에는 노반(露盤)이 있고, 2개의 보륜(寶輪)이 중첩되어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규모가 적고, 가늘고 길어 보이는 세장형으로,
신라의 전형탑을 충실히 따른 고려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삼성각
산신 독성 칠성을 함께모신 당우를 삼성각이라 한다
↗진화사[眞華舍]
1988년 우암 혜산선사가 요사인 진화사를 건립하였다.
↗내소사 설선당(說禪堂)과 요사(寮舍)
설선당은 인조18년 (1640)에 청영대사가 지은 것으로
앞면6칸,옆면3칸의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집이다.
오른쪽 한칸은 마루이고,앞면에서 남쪽2칸은 난방을 위한 부엌으로 큰 아궁이가 설치 되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요사는 설선당과 함께 인조18년(1640)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앞면6칸,옆면2칸의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2층 맞배지붕 집이다.
1층은 스님들의 방과 식당,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2층은 마루로 식료품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각 칸의 벽면에 환기창을 설치 하였다.
설선당과 요사는 4면이 연결되어 중앙내부에 마당과 우물이둔 回자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백안당
↗소원쓰기
내소사에 다녀간 사람들이 기왓장에 방문기념으로 소원을 적어놓았다
↘내소사 전설
[신현배 작가의 국보·보물 이야기] 보물 291호 내소사 대웅보전
- 법당 안 짓고 목침만 3년 만든 목수의 속내는
-
조선 제16대 인조 때의 일입니다.
-
전라도 부안 땅, 변산반도 남쪽 끝에 있는 내소사에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
불이 나서 대웅보전이 모조리 타 버린 것입니다. 이에 주지 스님은 부처님에게 정성스레 기도를 드렸습니다.
“부처님, 대웅보전을 다시 짓겠습니다. 훌륭하게 지으려면 뛰어난 목수가 필요합니다. -
저희 절에 목수를 보내 주십시오.”
주지 스님이 기도를 시작한 지 백 일째 되는 날 밤이었습니다.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일주문 밖에 나가 기다려 보아라. 대웅보전을 지어 줄 목수가 올 것이다.”
주지 스님은 이 약속을 믿고 날마다 일주문 밖에 나가 목수를 기다렸습니다. -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목수는 열흘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주지 스님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목수를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지? 내일 새벽에 꼭 목수를 보내 주마.”
이튿날 새벽, 눈을 뜬 주지 스님은 동자승을 불렀습니다.
“얘야, 지금 일주문 밖에 목수가 와 있을 것이다. 당장 가서 그분을 모셔 오너라.”
동자승은 주지 스님의 지시를 받고 일주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
과연 일주문 옆 나무 밑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동자승은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손님, 우리 절을 찾아오셨죠? 주지 스님이 모셔 오라고 해서 제가 마중 나왔습니다.”
동자승은 목수와 함께 절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손님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우리 주지 스님과 잘 아는 사이이신가요?”
목수는 전혀 말이 없었습니다. 동자승이 아무리 물어도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부터 목수는 대웅보전을 짓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
제일 먼저 한 일이 기둥, 대들보, 서까래 등에 쓸 나무를 베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목수는 절 마당에 나무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목침만 한 크기로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
다섯 달 동안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이 일만 했습니다.
-
그러더니 그 뒤부터는 대패를 들어 목침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
그 세월이 무려 3년이었습니다. 동자승은 보다 못해 목수에게 한마디했습니다.
“손님, 목침을 만들러 절에 오셨습니까? 그러다가 언제 법당을 짓습니까?”
그러나 목수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동자승은 아주 기분이 나빴습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혹시 미친 게 아니야.’
동자승은 목수를 곯려 주기로 했습니다. -
그래서 목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목침 하나를 감춰 버렸습니다
- 화려한 대웅보전, 어느 목수·화공의 솜씨일까?
- 며칠 뒤, 동자승은 목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 목수는 절을 떠나려는지 걸망을 등에 걸머진 채 주지 스님에게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
-
“스님, 저는 법당을 짓는 일과는 인연이 없는 듯합니다. 이 일을 그만두겠습니다.
-
3년 동안 목침을 대패로 다듬어 왔습니다.
-
그런데 제 일에 소홀하여 목침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
이렇듯 부족한 제가 어찌 법당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목침 하나쯤 없어진 걸 가지고 뭘 그러시오? 그냥 그대로 법당을 지어 주시오.”
주지 스님은 목수를 간신히 달래어 계속 일을 하게 했습니다.
동자승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보통 목수가 아니네. 저렇게 많은 목침 중의 하나가 없어진 것을 어떻게 알았지?’
목수는 이튿날부터 대웅보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
목침을 쌓기만 하는데도 어느새 훌륭한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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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는 대웅보전에 단청을 하려고 화공을 절로 불렀습니다.
이때 주지 스님이 다른 스님들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법당에 단청을 하는 동안 어느 누구도 안을 들여다보면 안 된다.”
- 화공은 법당 안에 틀어박혀 단청을 시작했습니다.
- 그런데 그는 밥도 먹지 않고 뒷간에도 가지 않는지,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법당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호기심 많은 동자승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화공이 사람이야, 귀신이야? 어째서 코빼기도 안 보이지?’
동자승은 아무도 모르게 슬쩍 안을 엿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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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승은 목수가 법당 앞을 지킬 때 슬그머니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주지 스님께서 찾으시는데요.”
목수는 동자승의 말만 믿고 법당 앞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동자승은 재빨리 법당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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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동자승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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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안에 있는 것은 화공이 아니라 오색찬란한 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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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는 입에 붓을 물고 날개에 물감을 묻혀 단청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호랑이 울음소리가 절을 뒤흔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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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법당 안에 있던 새가 놀라 열린 문으로 잽싸게 푸드덕 날아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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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동자승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지 스님의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대호 선사여,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 버리면 어찌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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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불 지른 법당이 그대의 손으로 다시 지어졌소. 이 대웅보전은 길이길이 남을 것이오.”
동자승이 내다보니 법당 앞에는 큰 호랑이가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동자승을 데리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내소사에서는 대웅보전을 다시 지은 목수가 사람으로 변신한 호랑이(대호 선사)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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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에 벽화를 그린 새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고 전해오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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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
전나무 숲길따라 내소사 전설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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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글 : 한국전통사찰,문화재청, 내소사 홈페이지 및 인터넷전자료등 참고함.
바다늑대Forever[201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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